동장군이 어둠 속에서 조용히 기지개를 켜는 새벽,
경모재 앞 정료대에는 보이지 않는 불길 하나가 마음속에서 먼저 타오른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그 불은 꺼지지 않고, 오히려 더 또렷해진다.
숭혜전의 전각은 마치 선왕의 영혼을 부르기라도 하듯
신라의 옛 등불을 다시 밝힌다.
천 년의 시간을 건너온 빛이 기와와 기둥을 어루만지며
이 자리가 단순한 공간이 아님을 조용히 일러준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아직은 낯선 나의 청관복이 어깨를 조인다.
의관의 무게보다도 마음의 긴장이 먼저
옷자락 사이로 스며든다.
고요를 가르며 집례관의 낮고 깊은 음성이 울린다.
“배 , 흥, 평신—”
그 소리는 공기를 타고 퍼져
미추왕과 문무왕, 경순왕의 위패를 지나
섬돌 아래로, 그리고 내 가슴 속으로 스며든다.
경순왕 사후, 이름조차 남지 않은 성손들에 의해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해져 온 혼불.
그 불씨는 천 년이라는 시간의 그네를 타고
마침내 오늘, 이 순간
내 가슴에 조용히 내려앉는다.
영하의 날씨에 홀(笏)을 쥔 손끝은 얼음처럼 차갑지만
마음은 오히려 뜨겁게 달아오른다.
몸은 아직 예법과 복장에 완전히 익숙하지 않지만,
곁에서 귓속말로 조심스레 일러주시는
참봉님들의 정겨운 가르침에
나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진다.
이곳에서 나는
배우는 자이자 잇는 자로 서 있다.
차가운 새벽 공기 속에서
천 년의 혼불은 다시 한 사람의 가슴으로 옮겨지고,
그 불빛은 오늘도 꺼지지 않는다.
신문왕릉 분향및 봉심
첫댓글 김기홍 참봉어른, 글을 아주 감칠맛 나게 잘 쓰시는군요.
"혹시 평소에 문필활동을 하시는 분이신가?" 하고 혼자서 유추해봅니다.
언제일지는 모르겠으나 경주에 가면 다시 한번 수인사를 하여야 할까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