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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주변화의원리(한동석) 원문보기 글쓴이: gil2000
학문 연구
선생은 어려서부터 한문을 공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어려서는 형제, 종형제들과 함께 학교를 다녔는데 당시 숙부였던 한희관이 조선 말엽에 과거에 응시했던 것으로 보아 학문을 하는 집안이었을 것이라는 것을 추정할 수 있고 따라서 한학 공부를 하며 자랐을 것으로 보여진다.
20대 후반에 함흥에서 장사를 하면서 재혼을 하고 어느 정도 재력을 쌓아 종형제들을 돌보기도 했는데, 그 부인이 폐병을 앓아 42년도에 사망하였다. 이 때 부인이 죽기 전에 폐병을 치료하기 위해 그 당시 동무 이제마 선생의 이전제자 중의 하나라고 하는 김홍제란 사람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 때 김홍제 선생이 처음에 부인의 병을 치료해 주면서 나중에 다시 재발하면 못 고친다 하였는데, 후에 결국 이 병이 재발하여 사망하자 한의학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운영자 註: "二神散의 捕虜"와 내용이 약간 다름. "二神散의 捕虜"는 선생이 직접 쓰신 기고문인데, 여기서는 30년 전에 二神散으로 동생의 晨洩을 고친 후부터 한의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 의림 기고문 참고 -) 이것을 인연으로 김홍제 선생 밑에서 한의학을 배웠다고 한다. 이것은 한동석 선생의 종제인 한봉흠 교수의 구술에 의한 것이나, 설태훈 씨에 구술에 따르면 북청의 양경호라는 이에게서 한의학을 배웠다고 하고 일설에는 선생 자신이 많이 아팠는데 한의사에게 치료를 받고 완쾌되자 이를 계기로 한의학을 공부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러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선생은 북한에서 김홍제, 양경호 등의 인물에게서 한의학을 배우기 시작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외에도 선생의 종제인 한봉흠 교수에 의하면 진외 종조부가 이제마 선생의 제자였다고도 하니 그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
6.25가 발발하면서 월남한 선생은 부산으로 가서 한약방을 운영하는 이와 동업하여 진료를 시작하였다. 이 때에도 이미 진료를 할 정도의 수준에는 도달했으나 항상 부족함을 느꼈고 마땅한 스승을 찾지 못해 오직 책 속에만 열중했다. 그래서 주로 獨學을 했지만 자신의 부족한 점에 대해서는 머리 숙여 배우려고 했다. 자기보다 나은 이가 있으면 찾아가든지 모셔와 자신의 집에 기거시키면서 주위의 한의사들을 모아 같이 배웠다.(1953년에 한장경 선생에게 2개월 동안 周易을 배웠고, 이후에도 설태훈 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과 함께 방학동 등지에서 몇 차례 수학하였다. 한장경 선생과는 북한에 있을 때부터 정치생활을 함께 하여 이미 하는 사이였다).
그러던 중 黃帝內經 運氣篇을 보게 되고, 이것을 萬讀, 內經 전체를 千讀하는 것을 목표로 內經을 공부했다. 한봉흠 교수에 의하면 선생은 실제로 黃帝內經 運氣篇을 萬讀했다고 한다. 선생이 생전에 한봉흠 교수와 이야기를 나눌 때에 三千讀을 하고 나면 뭔가 알게 될 것 같다고 말하며 공부를 했었는데, 三千讀을 하고 났지만 잘 모르겠다고 하였다. 그러면서부터는 오대산, 계룡산 등지로 공부를 하러 가기 시작했고, 주역을 배우기 위해 사람을 찾아 헤맨 것도 같다고 한봉흠 교수는 이야기했다. 그렇게 六千讀을 하고 나니 구름 밑에 뭔가가 있는 것 같으니, 三千讀을 더 해봐야겠다고 하며 다시 三千讀을 더 하였다. 그 후에는 "저거 봐라. 야구 선수들이 코치가 던지라는 대로 탁탁 던지잖니? 저거도 도통한 거다. 철봉대에서 저거 봐라. 외팔로써 빙글빙글 돌지 않니? 저거도 다 저 분야에서 도통한 거다. 그런데 九千讀해서 안 트이는구나. 萬讀을 채워야겠다. 萬讀을 하고 나면 뭔가 통할 거야."라는 말씀을 하고 萬讀을 넘겼다고 한다.
밤새워 공부하고 아침에는 인근에 있는 나비다방에 가서 커피 한잔을 마시고 밤사이에 한 생각들을 정리했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변사람들에게 이러한 것이 있는데 이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고 들려주었다.
한번씩 한의원을 장기간 비워두고 공부하러 떠나기도 했는데, 주로 계룡산이나 오대산에 들어가 한 달 씩 공부하다 돌아오기도 했으며 돌아와서는 제자들을 불러모아 그 동안 공부한 성과를 들려주었다. 나중에 우주변화의 원리를 집필하면서부터도 방대한 원고를 들고 계룡산으로 내려가 원고의 정리와 집필을 했다.
이 당시 이정호 씨는 正易을 연구하기 위하여 金一夫 先生이 말년에 은거하던 계룡산 국사봉에 강학의 장소를 마련하고 권영원, 이용휘, 유승국, 백문섭, 김근수, 한장경, 김경운, 유남상, 육종철, 정성장 등과 더불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正易을 공부하고 토론하고 있었다. 이 때 한동석 선생이 한달에 3∼4회, 1주일에 2회씩도 방문하여 이들과 학문을 연구하고 토론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한장경 선생과 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선생의 집중력은 실로 대단하여 주위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였고, 의문점이 생기면 추호도 마음에 거리끼는 것이 없을 때에야 다음으로 넘어가는 철저함을 보였다. 이것은 학문을 하는 데에만 적용된 것이 아니라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과정에서도 철두철미하게 임하여 한치의 어긋남도 없었다.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철학과에 입학하기 위해 입학시험을 준비할 때에는 당시 유명했던 영문법 책이었던 삼위일체 를 그대로 다 암기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 때의 나이가 53,4세 가량 되었을 때였는데, 제자들이 어떻게 그 내용을 다 외울 수 있느냐고 여쭈자, 이 정도도 제대로 못하면 공부는 어떻게 하겠느냐고 하시며 그 내용을 모두 외웠다고 한다.
우주변화의 원리의 내용이 쉽지가 않아 한봉흠 교수가 선생에게, "형님, 좀 쉽게 풀어서 쓰시지요. 교수고 박사인 내가 보아도 잘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내가 읽고 알게는 써야 되지 않겠습니까?"하고 청한 적이 있었다. 이 때, 선생은 "가만 나둬. 진리라는 거는 알 사람만 알면 되는 게야."라 했다. "진리라는 것은 정치를 하는 단 한 사람만이 알아야지, 여러 사람이 알면 장사를 하게 돼."하고 말하였다.
韓 교수는 선생의 말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周易공부하고 한의학 공부하면서 모두 가짜 한의학 공부한다고 그랬어. 宇宙 變化하는 거 모르고 어떻게 한의사를 하고 세상을 아는가 그랬거든. 오행을 기본으로 놓고 여기서부터 천기 보는 거, 하늘을 보고 땅을 봐라. 버러지 보고 나무에 잎이 나오는 거. 여기 지금 봄인데 木의 봄에, 하늘에 木이 들어 왔다는 거거든. 이러면 혁명이 난다는 거거든. 사회가 시끄러워 진다는 거거든. 木이 너무 많아도 곤란하다는 거거든. 올해 무슨 곡식이 잘 될까 그러거든. 아니야. 가을에 火氣가 많이 들면 쌀도 잘 되지만, 고추나 마늘도 잘 돼. 근데 그거를 알면 통치자 한 두 사람이 알아야지, 만인이 알면 사회가 문란해진다는 거거든. 그걸 가지고 장사를 한다는 게야. 그러기 때문에 한 사람이 알아야 되고, 알고 나면 그 사람은 죽어야 된다. 천기를 누설해서 죽었다는 거 나도 그렇게 봐."
韓봉흠 교수가 선생에게 주역 공부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 질문한 적이 있었다. 이 때, 선생은 韓 교수에에 "글자나 해석하는 게 주역공부가 아니야. 주역공부를 제대로 하면 다 보여.", "천기 보는 거를 배워라. 천기를 보는 게 하늘을 쳐다보면 천기를 보는 거야? 아니야, 땅을 봐라. 땅에 이렇게 보면 풀이 있고 돌멩이가 있고 이렇게 흔들리지? 지렁이, 털벌레, 딱정벌레 요거로 천기를 보는 거야. 딱정벌레가 많이 있는 거는 이 地上에 金氣가 많이 왔다는 거야. 이제 발이 많은 돈지네가 많이 끓을 때가 있다면 火氣가 왔다는 거야. 땅에 지렁이가 많으면 土氣가 많다는 거고. 이렇게 해 가지고 천기를 보는 거야. 그러니까 지금은 이른 봄인데 金氣가 왜 이렇게 많으냐."고 말하였다.
인사동 사거리에서 한의원을 하는 동안, 틈나는 대로 인사동의 통문관 등의 고서점들을 돌면서 여러 서적들을 구해 읽곤 했었다. 선생의 학문에 대한 열정은 주위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 할 정도로 대단했었다. 한의원에서건 어디서건 잠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한다. 매일 아침 6시 정도에 일어나서 2시간 정도를 소리내어 책을 읽고 외우기를 되풀이 하였다. 밤을 새워 공부하고 미진한 부분은 새벽부터 나비다방에 나가 커피를 마시며 고민하기도 하였다. 사람이 많아 시끄럽거나 해도 곧장 나비다방으로 가서 책을 보았다.
한의원에 환자가 붐비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밥 먹을 정도만 되면 되었지, 환자 욕심은 낼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당시 국회의원 원내총무를 하던 김진만 씨가 한의원에 와서 자기 병을 꼭 고칠 수 있겠느냐고 다짐을 하자, 주위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믿을 수 없다면 오지 말라고 하며 벽력같이 소리지른 적도 있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한의원에 환자는 그리 많지 않았으며, 오직 책만 보고 저녁으로는 다른 이들을 가르치면서 공부에만 정진하였다. 종종 부인인 이옥자 씨에게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겨야 한다고 말하였는데 그런 것이 선생의 욕심이었을 뿐, 다른 부분에서는 욕심을 내지 않았다.
평상시의 한동석 선생
선생은 명예와 부를 구하지 않고 굉장히 검소한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집안의 경제권도 직접 전담하여 관리하였으며, 주로 남대문 시장에서 싼 옷만 사 입었고, 부인에게도 그런 것을 사주었다. 선생은 돈을 함부로 쓰면 돈의 보복을 받고 물질을 함부로 남용하면 반드시 물질의 보복을 받는다고 하였다. 반면, 대의명분이 있는 일에는 목돈을 내놓았다. 속되고 안일한 것에 빠지지 않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무리 힘들어도 밀고 나가는 성격이었다.
그리고 선생의 집안은 지방에서 올라와 유학하던 선생의 조카들이나 다른 친척들로 항상 붐볐다고 한다.
선생은 술은 드시지 않았고 담배는 즐겼다. 술은 젊은 시절에는 마셨으나, 후에는 공부에 방해가 된다하여 입에도 대지 않았고, 담배는 즐겨 피운 편이었다. 영화와 바둑에 취미가 있었는데, 영화를 보러가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택시를 타고 갔다가 영화만 보고는 다시 택시를 타고 돌아왔다. 바둑에도 취미가 있었고 바둑계의 원로들과도 교분이 있었다. 선생의 기력은 아마추어 3단의 실력이었다. 김수영 7단의 부친인 김탁씨와 같은 함경도 고향출신이어서 이를 통해 조남철9단과도 알게 되었다. 조남철 9단은 본인이 워낙 약골이어서 한선생님 신세를 많이 졌다면서 그 때를 회고했고, 본 저자에게 김탁씨의 아들이자 자신의 제자인 김수영 7단을 소개했다.(기타 일화 참조:운영자註) 김수영 7단은 어릴때 부터 선생에게서 약을 지어먹곤 했고 특히 조남철 9단과 친했으며 김탁씨의 후원을 받던 조치훈 9단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기전에 한의원에 와서 인사를 하고 떠났다.
선생은 인사동 네거리에서 개원을 하고 있었고 설태훈 선생은 가까운 곳에서 개원을 했기 때문에 서로 왕래하기가 좋았다고 한다. 아침저녁으로 서로 내왕하였는데 주로 건국대학교 분교(인사동) 근처에 있던 나비다방에서 만났다. 선생은 밤을 새워 공부하였고 새벽에는 그 곳 나비다방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 커피한잔씩을 마시며 생각에 잠기곤 했다고 한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 책을 들고 나비다방에 나가서 공부하다가 10시 쯤 다시 들어와 아침식사를 하고 진료를 시작하였다. 그 외에도 생각할 것이 있거나 책을 보고 싶으면 한의원에서 나와 나비다방을 찾곤 했는데 선생을 만나려면 그 나비다방에 가야 만날 수 있다고 할 정도였다.
선생은 항상 무언가를 열심히 외우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언제나 황제내경을 옆에 끼고 다녔으며 인사동 골목길을 다닐 때나, 아침에 아들을 데리고 산책을 나갈 때에도 항상 무언가를 손가락으로 꼽아가며 외우곤 했다. 부인인 이옥자씨의 말에 의하면 선생은 "나는 의사인데 이것은 항상 놓지 말고 외워야 한다"고 하며 약성가를 아침저녁으로 외웠다고 하며, 한봉흠 교수는 황제내경 운기편일 것이라고 했다.
1960년 전후인 50세 전후에는 내경 운기편, 류경, 주역, 본초 등을 한의사를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한의원2층에서 강의하기 시작했고, 동아.조선일보 등의 일간지에 한방관련 기사를 투고하기도 하고 양방의사들과 논쟁을 벌이는 글을 싣기도 했다. 그리고 틈틈히 일본의 천리교대학에 6, 7개월간 음양오행에 관한 원고를 쓰고 이양구씨가 이를 번역하여 연재하기도 했으며, 이 때부터 우주변화의 원리를 집필하기 시작했는데, 여름에 한달씩 계룡산으로 가서 숙소를 정해두고, 매일 아침 시냇물에서 목욕재계를 하고 난 다음에 원고를 정리하곤 하였다.
1960년에 경희대학교 한의과 대학의 전신인 동양의약대학에 출강하게 되었다. 4.19 혁명을 앞두고 있던 때에 동양의대에는 폐쇄령이 내려져 있었고 몇몇 교수들이 학교를 떠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생들과 다시 동양의대의 임시관리책임자였던 전 서울신문사사장 오종식 씨가 협의하여 교수충원을 시도하게 되었다. 조교와 학생들이 추천하면 검토하여 발령을 내는 방식이었으며 그때 추천받은 사람들은 모두 교수로 발령을 받았다. 당시에 학년대표를 맡고 있던 문준전 전 경희대 한의대 교수와 이덕준씨가 한동석 한의원으로 내방하였고 그때 선생은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그것을 계기로 선생은 동양의대의 강사로 출강하게 되었고 6개월 정도 후에 전임강사로 발령을 받았다. 이때 동양의대로 발령을 받게 된 사람은 선생 외에도 윤길영, 안병국 교수가 있었다.
이 무렵 가까이 지내던 조재관 교수가 총장으로 있던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편입하여 정치학사를 63년 2월에 수료하였고 성균관 대학교 일반대학원 동양철학과에 입학하였으나 석사학위는 받지 못하였다.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동양철학과를 졸업하기 위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논문을 준비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석사학위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 논문은 현재 성균관 대학교에 보관되어 있지 않다. 그에 대한 이야기가 서로 엇갈리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그러한 제목과 주제로 논문을 쓰려 하였으나, 당시의 선생의 대학원 지도교수였던 유승국 박사가 그런 거창한 주제의 논문을 선생이 어찌 쓸 수 있겠느냐는 투의 말을 하자 기분이 상해 아예 논문을 쓰지도 않았다는 것이고, 그것과 조금 다른 것은 당시 지도교수였던 유승국 교수의 말에 의한 것인데 그 원고를 읽어보니 논문의 체계가 제대로 잡히지 않은 소설이나 수필과도 같은 것이어서 논문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 원고를 탈고하였는지, 아니면 계획만 가지고 있다가 지도교수와의 의견충돌로 아예 시작도 하지 않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선생의 마지막 제자인 오세정씨의 증언에 의하면 결국 그 원고를 반 정도로 줄인 것이 우주변화의 원리라고 했다.
동양의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였으나, 그것도 오래지 않아 동양의약대학의 제2대 학장으로 양방의사인 이종규 박사가 취임하자 그 날로 교수직을 그만 두고 학교를 그만두게 된다. 이종규 박사와는 평소에 교분이 있었고 처형이 되는 이영자씨, 이영자씨의 동료이자 선배인 김기조 씨 등과 함께 서로 친한 사이였지만, 한의과대학에 양방의사가 학장을 하는 것은 한의사를 모독하는 것이며 불합리한 처사라고 하며 동양의약대학의 교수직을 그만 두었다.
이 시기에는 강의나 기고 등 활발하게 외부적인 활동을 하였다. 고위층 인사들과의 교류도 적지 않았으며, 한의사협회의 활동에도 참가하였다. 대학한의학회가 성립되면서 이와 더불어 63년 4월 1일에는 대한한의학회 초대이사에 임명되기도 했다. 이 무렵에는 한의학회보에 임상경험을 기고하면서 다른 한의사들의 참여를 독려하였고, 황제내경 강좌에 많은 글들을 연재하였고 또한 대한한의학회가 개최하는 각종 강연에 강사로 참여하기도 하였고, 방송에도 출연한 적이 있었다.
1966년 인사동에서 삼선교 돈암동 쪽에 있는 좀더 넓은 집으로 이사하였다. 당시에 성균관대의 모교수가 여기서 살았는데 이 집이 흉가라 하여 헐값에 내놓고 이사간 집을 샀다고 한다.
선생의 임상
선생은 한의원에 따로 간호사도 두지 않고 부인이나 제자들이 약을 싸면서 도왔을 뿐, 대부분 선생 혼자서 한의원을 꾸려 나갔다. 선생에게 배우러 오는 사람이 여럿 있었는데 그 중 어떤 사람이 와 보고서 하는 말이 그렇게 용하다는데 왜 한의원이 이렇고, 환자도 별로 없고 이런가 하고 말하자, 배우러 온 사람들에게 "돈 벌려거든 오지 마라. 의원질 해서 돈 벌겠다는 그런 생각가지고 있으면 시장에 나가서 장사를 하지, 이걸 하느냐. 한번 잘못한다면 殺人하는게 의원인데."라고 하였다.
어떤 젊은 사람이 약을 받아들고 "이거 먹으면 낫습니까?" 하고 물은 적이 있었다. 이에 선생은 "너는 병원에 가서도 그런 소리를 하느냐. 낫지 않으면 돈을 도로 달라는 말이냐. 어디서 그런 소리를 하느냐. 가라!"고 호통을 쳤다. 그런 반면, 약을 지었는데 돈이 없다고 하여 일돕는 사람들이 난감해 하면, "소위 仁術이라는게, 뭐가 仁術이냐. 약 먹고 살겠다는 사람, 돈없다고 지어 놓은 약을 그냥 주지 않고 그런 법이 있겠느냐."라고 하며 약을 지어 그냥 쥐어 보냈다. 나중에 돈을 가지고 오는 사람도 있었지만, 안 오는 사람도 제법 있어서 주위사람들이 뭐라고 하면, "돈 없다고 약 안주는 것은 못할 일이야"고 말하였다.
전문과목이 따로 있지는 않았다. 선생은 "특별히 어떤 병을 잘 본다는 것은 다른 것은 모른다는 말이다. 무슨 병을 잘 하고 무엇을 잘 보고하는 것을 쳐다보지 마라. 다른 병보다 그거 좀 낫단 말이고 다른 건 모른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선생의 처방은 일반적으로 보기에는 너무 과감하고 간결하여 마음편히 따라 쓰기에는 쉽지 않았다. 송륭섭 씨의 조카가 설사를 오래하여 양방병원에 다녀도 낫지 않아 선생에게 데리고 온 적이 있었다. 그러자 처방을 써주며 직접 지어가지고 가라 하였는데, 여기에는 부자가 한돈 반이 들어가 있었다고 한다. 두 번 다시 물으면 벽력같이 호통치는 성품을 잘 아는 터라 두번 묻지 않고 처방대로 약을 지어 와서 가족들에게 이야기 하였더니, 조카의 아버지인 그의 형이 부자는 함부로 쓰면 위험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고민을 하다가, "그래도 교수님께서 설마 니 조카 죽으라고 처방 낸 건 아닐테니 먹여보자."고 하여 약을 달여 먹이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어린 나이의 조카였던 탓에 약을 한꺼번에 먹이지 않고 한 첩을 달여 조금씩 떠 먹였는데, 한 접 달인 양의 반 정도를 먹일 즈음에 땀을 흠뻑 흘리면서 조카의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하더니 설사가 완전히 나았다. 또 그런 반면 아주 오랫동안 약을 투여하는 경우도 있었다. 여섯 제 이상씩 약을 투여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 두 첩으로 병을 치유하지 못하면 바로 거기서 한두제 또는 여섯제 까지 약을 복용시켰다. 함부로 이렇게 권하면 약을 팔기 위한 것으로 오해를 사기도 쉬운 일이고 환자들이 거부하여 투약할 수 없었겠지만, 선생의 성품과 위엄으로는 그것이 가능했다고 한다.
한번은 앞서 언급했던 부산의 김기조 씨가 한의원으로 내방한 적이 있었다. 자신의 오빠인 연세대학교 철학과 교수를 지내던 김기석씨가 腎臟結石으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양방병원에서는 수술할 것을 권하여 수술 하기 전에 한방으로는 방법이 없나하여 찾아 왔는데, 내용을 들은 선생은 다짜고짜 "왜 수술해. 洋醫 멍텅구리 새끼나 腎臟수술을 하라지. 腎 속의 돌이 뭐야, 金氣지. 거기다 불을 넣으면 다 녹아."라고 하였다. 그러자 본인도 양방의사였던 김기조 씨는 병원에서는 당장 수술을 하라고 하는데 불을 넣으면 녹는다고 하니 신기하게 여기면서도, 죄송하지만 자기와 같이 세브란스 병원에 같이 가자고 청하였다. 그래서 병원에 가서 診脈을 하고 난 후, 약을 지어주면서 몰래 먹여 보라고 하였다. 수술날짜가 다되어 갈 즈음에, 김기석 씨가 통증이 없으니 조금 더 기다려 보고 난 후에 사진을 다시 한 번 찍어 보자고 했다. 그래서 1주일 후에 X-ray를 찍어 보니 結石이 없어진 것이었다. 그제서야 김기석 씨가 의사에게 한의사의 약을 먹었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러자, 그 의사는 선생에게 전화를 걸어 불손한 말투로 당신이 누구냐, 김기석 교수에게 약을 준 사람이냐, 그렇다면 세브란스 병원의 나에게로 와보라고 하자, 선생은 "에이, 요 호로새끼. 엇다 대고 니가 와라 가라야. 결석 하나 고치지 못해서 칼로 째는 백정새끼가 어디다 대고 와라 가라야. 요놈 새끼. 우리 집에 기어와도 내가 너를 대할랑 말랑해. 에이 상놈."하며 소리치면서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러나 무작정 양방의사를 싫어한 것은 아니었다. 마음을 열고 진지한 학문적 토론을 나눌 수 있거나 양방의료의 한계를 인정하고 허심탄회하게 다가오는 사람이면 한.양방을 가리지 않고 깍듯하게 예우했다.
한봉흠 교수가 군대에 있을 때, 맹장 수술을 받게 되었는데 이 때로 선생이 약을 써서 이틀만에 치료했고 그 후에도 속이 냉하여 오는 여러 질환에 부자를 다량으로 투여하는 처방을 과감하게 사용하여 치료한 적이 많았다고 한다.
선생은 麝香도 요긴하게 사용했던 것 같다. 한번은 황종안의 친척이 아무 것도 못 넘기고 있다고 와서 처방을 내 달라고 부탁을 하자, 물도 못 넘기고 있다면 사향을 좀 먹이고 그것도 먹을 때 목에 수건을 느슨히 감고 있다가 약을 넘기고 나서는 조이라고 시켰다 한다. 이것은 사향의 기운이 못 올라오게 하는 것이라 했다. 그렇게 사향을 5푼인가 먹고는 툭 터졌다고 한다. 설태훈 씨의 장녀가 홍역을 앓고 있었는데 앞을 보지 못할 정도였는데 선생이 주머니에서 조그마한 麝香을 꺼내 주면서 먹여보라 하였는데 그대로 하고 하룻밤 자고 나니 깨끗하게 없어졌다고 했다.
선생은 앞으로 암 질환이 상당히 문제가 될 것이므로 이에 대한 연구가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당신이 스스로 암 환자를 무료 진료하면서 한 30년 정도 연구하면 이것을 잡아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치료 수단으로는 만삭이 되어 누에고치를 만들기 직전의 투명해진 누에와 인삼과 겨우살이가 좋을 것이라고 하였다. 암이라는 것은 금기 덩어리이기 때문에 이것을 녹이는 것은 오직 이와 같은 불밖에 없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중금속 해독에는 마늘과 메밀을 사용하라고 이야기 하였는데 나중에 한봉흠 교수가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에 실험을 의뢰해 본 결과, 그 효능이 탁월했다고 한다.
별세
63년에 이미 당신 스스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하였고 돌아기시기 한 해 전인 67년 12월 정도부터는 주위사람들에게 "내가 왜 이러지?" 하며 자신의 건강상태가 좋지 못함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자꾸만 머리가 커지는 것 같다는 말을 하고 이후에 "환한 봄날인데, 볕 좋은 봄날인데 환한 세상이 왜 이렇게 어둡냐."고 하는 등 서서히 죽음을 예감하였다.
돌아가시던 68년에는 산책을 나가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였다. 당신이 죽고 난 뒤에 가족들의 생계가 매우 어려워질 것이라 예견하였으며(선생이 죽고 난 뒤에 온 식구가 거지가 되어 거리에 나 앉을 것이라며 대성통곡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하는데, 과연 선생의 임종 후 가세가 기울고 가족이 흩어지는 시련을 겪었다) 혹시라도 당신의 生日과 生時만 넘기도록 살 수 있다면 회생할 것이나 완전한 건강을 되찾으려면 2,3년이 걸릴 것이라 하였는데, 아무래도 그날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하는 등, 자신의 죽음과 관련된 여러 일들을 미리 내다보았다. 그래서 자구책으로 자신의 생일을 넘기고 오겠노라고 계룡산으로 내려갔었으나, 꿈에 선생의 조모가 나타나 "여기가 어디라고 왔느냐, 빨리 너의 집으로 가거라!"고 소리치는 것을 보고서 그 곳이 머물러 있을 곳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황급히 서울로 돌아왔다. 돌아와서 제자들에게도 역시 갈 곳이 아니었기에 그랬을 것이라고 얘기했다 한다. 여느 때처럼 계룡산으로 갔다 하면 한달 씩 걸려야 올라오던 선생이 며칠만에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 주위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는데 이때부터 건강히 급격히 악화되었다.
자신의 生時만 넘기면 된다는 선생의 말에 한봉흠 교수가 그렇다면 양방 치료를 시도해도 되겠느냐는 질문을 했는데 선생은 그것은 결코 안된다 하였다. 이영자 씨에 의하면 당시의 의료기술로는 양방으로도 어쩔수 없었다고 한다.
결국 뇌혈관발작으로 혼수상태에 빠진지 열흘도 채 안되어 자신이 태어난 날에 태어난 時를 넘기지 못하고 1968년 음력 6월 5일(양력 6월 30일) 새벽, 가족과 제자들의 곁에서 별세하였으니, 이 때 선생의 나이 향년 58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