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① 얼마 후에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그의 무리를 병합하였으나 풍은 능히 제어하지 못하고 단지 제사만 주재할 뿐이었다. 복신 등은 유인원 등이 외로운 성에 구원군이 없자 사신을 보내어 그들에게 위로하며 말하되 “대사 등은 언제 서쪽으로 돌아가려는가 마땅히 보내드리고 전송하겠다.”고 하였다.(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 6 의자왕 20년)
② 인궤는 서신을 작성하여 화복을 상세히 설명하고 사자를 보내어 설득하였다. 그러나 도침 등은 무리가 많은 것만 믿고 교만하고 거만하게 인궤의 사자를 외관에 머무르게 하고 전하는 말로, “사자는 관직이 낮다. 나는 한 나라의 대장인데, 스스로 참견함은 합당하지 않다.”하고, 답장을 써 주지 않고 사자를 돌려보냈다. 얼마 후에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그의 무리들을 합병하니, 부여풍은 단지 제사만 주재할 뿐이었다. (용삭)2년 7월에 인원·인궤 등이 머물러 진수하던 군사를 이끌고 웅진 동쪽에서 복신의 남은 무리들을 크게 무찔르고, 지라성 및 윤성, 대산·사정 등의 성책을 공략하고, 많은 무리들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구당서 열전 동이 백제조)
③ 인궤는 군사가 적으므로 군사를 쉬게 하고 위엄을 가르치며, (유인원군과) 합군하고 신라가 그것을 도모하도록 (황제에게) 청하였다. 복신이 갑자기 도침을 죽이고 그 병력을 아울렀으나 풍왕이 능히 제어하지 못하였다. (용삭)2년 7월에 유인원 등이 웅진에서 그들(백제부흥군)을 무찌르고 지라성을 공략하고, 밤에 진현성에 바싹 다가가서 날이 밝을 무렵에 성으로 들어가서 8백급을 참수하니 신라의 군량수송로가 이내 개통되었다.(신당서 열전 동이 백제조.)
복신이 도침을 살해한 이유나 동기에 대해서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백제본기의 기사내용은『구당서』백제전의 내용을 채록한 것으로 보인다. 『구당서』나『신당서』백제전의 내용을 보면, 풍왕이 매우 무력하게 표현되
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 후에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그의 무리들을 합병하니, 부여풍은 단지 제사만 주재할 뿐이었다.”라든지, “복신이 갑자기 도침을 죽이고 그 병력을 아울렀으나 풍왕이 능히 제어하지 못하였다.”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즉,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도침의 군병을 복신이 모두 병합하였는데, 풍왕이 이를 제어하지 못하고 단지 제사만을 주재할 뿐이었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내용은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풍왕이 귀국하여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유추해 볼 때, 복신은 백제유민들의 호응과 왜국의 원조를 기대하여 부여풍을 맞이하였지만 실지로는 부여풍을 상징적인 존재로만 여기고자 하였는데, 도침은 그렇지 않고 풍왕에 대하여 깎듯이 군신의 예를 갖춘 것이 아닐까 한다. 그리하여 백제부흥군 내에서 자신의 입지가 좁아질 것을 우려해서 도침을 살해한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이 사건은 유인궤의 以夷制夷정책에 부흥군 수뇌부가 말려든 것이라고도 하겠다. 『구당서』유인궤전에 의하면, “부여풍은 시기심과 의심이 많다.”고 하여, 복신의 성격을 파악하고 있는데, 유인궤는 이를 최대한 이용하여 복신과 도침을 분열시키기 위하여, 화복을 상세하게 기록한 서신을 작성하여 사자를 도침에게 보낸 것으로 파악된다. 이 사실은 바로 복신에게 전달되었을 것이고 복신은 도침이 유인궤의 사자를 만난 것을 이적행위라는 명분으로 삼아 살해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복신의 도침 살해시기는 살해한 후 바로 662년 7월에
있었던 진현성 전투가 이어지고 있어, 풍왕의 귀국 후 얼마되지 않은 시기에 일어났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하여 복신의 의도대로 풍왕은 제사만을 주재하는 상징적인 존재로 표현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8. 진현성 전투
백제부흥군은 웅진부성을 고립시키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였으니, 이 전략은 크게 성공하여 신라의 웅진성으로의 군량 운송로인 ‘웅진도’를 차단하고 웅진부성의 당나라 진수군을 위기에 몰아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곧 부흥군 수뇌부의 자만심에 빠진 해이와 복신의 도침 살해사건은 부흥군 내의 사기를 현저하게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당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웅진도를 차단하는 백제부흥군의 주요 거점들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문헌사료에서 그 중에 가장 중요하게 취급된 것이 진현성이며, 이 진현성 전투는 지라성 및 윤성, 대산·사정 등 목책들과 같이 수행되고 있었다고 하겠다.
이 진현성과 지라성 등 성책에 대한 문헌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L-① (용삭)2년 7월에 인원·인궤 등이 웅진 동쪽에서 복신의 남은 군사를 크게 깨트리고 지라성 및 윤성, 대산·사정 등 목책들을 함락시키고 군사를 죽이고 사로 잡은 것이 매우 많았으며 거기에 군사들을 배치하고 진압하고 지키게 하였다. 복신 등이 진현성은 강을 내려다보고 있으며, 높고 험해서 요충으로 될 수 있다하여 군사를 더하여 지키고 있었더니 인궤가 밤에 신라 군사를 독려하여 성가퀴 밑에 바싹 다가붙었다가 날이 밝을 무렵에 성안으로 들어가서 8백명을 참살하니, 드디어 신라의 군량 수송로가 통하게 되었다.(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 6 의자왕 당 용삭 2년)
② (용삭)2년 7월에 ㉠ 인원·인궤 등이 머물러 진수하던 군사를 이끌고 웅진 동쪽에서 복신의 남은 무리들을 크게 무찔르고, 지라성 및 윤성, 대산·사정 등의 성책을 공략하고, 많은 무리들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이어서 군사를 나누어 그 성책을 지키게 하였다. ㉡ 복신 등은 진현성이 강을 내려다보고 있고 높고 험하며, 또 요충이 될 수 있다고 하여 군사를 더하여 그 성을 지키게 하였다. 유인궤가 신라의 군사를 이끌고 야음을 타서 성밑에
바짝 다가가서 사면으로 성가퀴를 더위잡고 기어올라갔다. 날이 밝을 무렵 들어가 그 성을 점거하고 8백여명을 참수하였다. 드디어 신라의 군량운송로가 통하게 되었다.(구당서 열전 동이 백제조)
③ 2년 7월에 유인원 등이 웅진에서 그들(백제부흥군)을 무찌르고 지라성을 공략하고, 밤에 진현성에 바싹 다가가서 날이 밝을 무렵에 성으로 들어가서 8백급을 참수하니 신라의 군량수송로가 이내 개통되었다.(신당서 열전 동이 백제조)
④ “하물며 복신은 흉포하고 잔학함이 매우 심하며 부여풍은 시기심과 의심이 많아 겉으로 합하고 속으로는 이산하니, 솔개같이 굳세고 거침없는 무리들이 같이 거주하고 있으므로 이 세력들이 반드시 서로 해를 끼칠 것이다. 마땅히 굳게 지키면서 변동을 관찰하고 편리함을 좇아 그것을 취할 것이지 움직이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니, 무리들이 그를 따랐다. 이 때 부여풍 및 복신 등은 진현성이 강에 임하고 높고 험하여 또한 요충에 해당하여 군병을 더하여 지켰다. 인궤가 신라병사들을 이끌고 야간을 틈타서 성에 접근하여 4면으로 풀을 잡고 올라가더니 새벽에 그 성에 들어가 웅거하니, 드디어 신라에서 군량을 운송하는 도로가 개통되었다.(구당서 열전 유인궤)
⑤ 이때에 적이 진현성을 지키는데 인궤가 야간에 신라군을 독려하여 성에 접근하여 성가퀴에 올라가 새벽에 성으로 진입하니 드디어 신라 ?道가 개통되었다.(신당서 열전 유인궤조)
상기 기록을 살펴보면, 유인원등 진수군이 웅진 동쪽의 백제부흥군의 거점인 지라성을 비롯한 윤성·대산·사정 등의 성책을 함락하고 이어서 ‘강이 내려다보이고 높고 험준한’곳으로 표현된 진현성을 함락하여, 신라의 ‘新羅?道’,‘ 新羅運糧之路’,‘ 新羅餉道’로 각기 표현된 ‘신라의 군량수송로’를 개통시키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신당서』열전 백제조에는 『구당서』의 기록 내용을 축약하여 수록해 놓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지라성과 진현성만을 거론하고 있다. 그리하여 상기 세 기록들을 통해서 볼 때, 진현성과 지라성이 가장 중요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이 전투에서 진현성과 지라성이 중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판단되는 것이다.
이와같은 상황을 상세하게 기록한 사서는『자치통감』으로서 당기 16, 고종 용삭 2년(662) 추7월 정사조에 다음과 같이 수록하고 있다.
㉠ 웅진도독 유인원과 대방주자사 유인궤가 (백제부흥군)을 웅진 동쪽에서 크게 물리치고 진현성을 함락시켰다.
㉡ 처음에 유인원과 유인궤가 웅진성에 주둔하고 있는데 황제가 칙서를 내리기를, 평양의 군사를 회군시켰으므로 한 성을 홀로 고수하기가 어려우니 마땅히 철수하여 신라에 가라. 만약 김법민이 문서로 군영에 머무는 것을 허용하면 마땅히 그곳에 머무르되 만약 그것이 용납되지 않으면 즉시 바다를 건너 돌아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장수와 사졸들이 모두 서쪽 본국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 유인궤가 말하기를, 신하된 자는 국가에 이로움이 있으면 죽움이 있을 뿐 두 마음이 없음을 자랑한다 하였는데, 어찌 급하게 그 사사로움을 앞세우고자 하는가. 主上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자하여 먼저 백제를 토벌하고 군병을 머물게 하여 그 곳을 지켜 그 심복을 제압코자 하였다. 비록 나머지 적들이 충천하고 수비가 심히 엄중하나, 마땅히 무기를 갈고 달굼질하며 말을 잘 먹여 그들을 불의에 공격한다면 이기지 못할 이치가 없다. 이윽고 싸움에 이긴 후에 사졸의 마음이 편안해질 것이다. 그 후에 군병을 나누어 험한 곳에 웅거하여 형세를 확장하고 표를 올려 황제에게 알려 다시 군병을 더할 것을 요구한다면 조정이 성공할 것으로 알고 반드시 장수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출동시킬 것이니, 원군의 소리가 겨우 접하기만 해도 흉하고 추한 자들이 스스로 섬멸될 것이요, 바로 성공을 바라지않는다 하더라도 해외가 영원히 맑아질 것이다. 지금 평양의 군병이 이미 귀환하였고, 또 웅진을 빼앗긴다면 백제의 나머지 백성들이 머지않아 다시 일어날 것이니 큰 죄를 범한 고(구)려는 언제 멸망시키겠는가. 또한 지금 한 성의 처한 지역이 적의 중앙에 차지하고 있어 진실로 혹시 움직이면 포로로 사로잡힐 것이요 신라에 들어가는 것이 용납된다 하더라도 역시 재갈 물린 자객이 될 것이니 벗어나려다 여의치 못하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물며 복신은 흉패하고 잔학하며 군신이 시기하여 거리가 있으니, 소행이 서로 도륙할 것이다. 마땅히 굳게 지키며 변화를 관찰하고 틈을 타서 그들을 취할 것이지 가히 움직일 것이 아니다 하니 무리가 그를 따랐다.
㉣ 이때 백제왕 풍과 복신 등이 유인원 등이 외로운 성에 구원군이 없자 사신을 보내어 그들에게 말하되 “대사 등은 언제 서쪽으로 돌아가려는가 마땅히 보내주도록 도와주고 전송하겠다.”고 하였다.
㉤ 유인원과 유인궤가 그들이 방비가 없음을 알고 홀연히 출격하여 그들의 지라성 및 윤성과 대산·사정 등의 성책을 공략하고, 많은 무리들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이어서 군사를 나누어 그 성책을 지키게 하였다. 복신 등이 진현성이 험요하다 하여 군병을 더하여 수비하게 하였다. 유인궤는 그들이 점점 느슨해진 틈을 타 신라군을 이끌고 야간에 성 아래에 바짝 접근하여 잡초를 붙잡고 성위에 올라가, 날이 밝음에 그 성에 들어가 웅거하니 드디어 신라의 군양 운송로가 개통되었다.
㉠은 머릿글로써, 진현성을 가장 중요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은 웅진부성의 당군을‘한 성을 홀로 지키기는 불가하다.’고 하여 철수하기를 권하는 당 고종의 칙지이고, ㉢은 당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군사를 유인궤가 애절하게 설득하고 있는 장면이다. 이 때 유인궤는 백제에 군진이 머물러야 하는 당위성을 역설하고, 복신의 흉포하고 잔학함이 매우 심함과 풍왕의 시기와 의심이 있음을 들어 반드시 서로 위해함이 있을 것이라 하여 부하들을 설득시켜 그대로 머물고 있다. ㉣은 윗 글 ㉡·㉢ 의 상황을 백제부흥군측에서 적절하게 표현한 것이며, ㉤은 ㉠의 기록을 부연해서 기록한 것으로, 상기 백제본기·『구당서』·『신당서』의 내용과 같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볼 때, 지라성 등 4성책과 진현성은 웅진의 동쪽에 있으며, 이들 성책의 함락으로 신라의 양도가 개통됨을 알 수 있으니, 이는 백제부흥군이 웅진 동쪽지방에 해당하는 지라성(대전 질현성에 비정)·윤성·사정·대산 등 4성책과 진현성에 군사들을 더하여 지키고 있었던 것은 옹산성전투의 패배이후 저지에 실패하였던 신라의 군량 운송로인 ‘熊津道’를 다시 차단하여 웅진부성의 당군을 고립시키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진현성으로서, 『삼국사기』지리지에는 황산군의 영현으로 진령현은 본래 백제의 진현현(眞은 貞이라고도 한다)으로 경덕왕 때 명칭을 고쳤는데, 지금의 진잠현이다. 이라 하여, 진현성이 구 진잠 관내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진현성은 정현성이라고도 칭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貞峴은 앞에서도 살펴본 바 있듯이 바로 백제의 패망 직후 백제부흥군이 처음으로 일어난 근거지의 하나로 나타나고 있었으나, 그 이후 그 명칭이 백제 유민의 활약과 관련하여 나타나지 않다가 661년 6월 신라의 ‘웅진도’ 개통기사와 관련하여 다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백제부흥운동 초기에는 직접 사비성을 공격하고 있는 성들이 중심이 되어 활약하고 있음으로 해서 그 명칭만 잠깐 보이다가, 이때 이 진현성에 모여 웅거한 목적이 신라의 양도를 차단하여 웅진에 주둔하고 있는 당군을 고립시키기 위하였던 것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왕이 牛鳴谷에서 사냥을 하는데 친히 사슴을 쏘아 맞혔다.(삼국사기 권26 백제본기 동성왕 14년 10월) 고 하여, 동성왕이 492년에 우명곡에 행차하여 수렵을 하고 있는 장면이 수록되어 있다. 왕의 수렵기사는 심신을 단련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지만 대체로 그 지방을 경영하기 위하여 사전에 친히 답사하여 지형을 파악하고자 하는 과정을 나타내고 있다. 이 우명곡은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현재 서구 牛鳴洞에 비정된다고 하겠다.
논산시 벌곡면과 대전시 서구 경계에서 시작되는 우명동에는 벌곡천과 이어지는 갑천에 의하여 형성된 계곡이 10㎞ 이상 지속되고 있으며, 벌곡천 및 갑천을 따라 대전에서 논산을 거쳐 부여로 이어지는 도로가 이어지고 있다. 바로 이 도로를 감시하기 위하여 백제는 이 도로상에 眞峴城을 축조하였는데, 이 진현성은 현재 흑석동산성에 비정되고 있다. 이 진현성은 백제부흥운동시에 백제부흥운동의 첫 번째 시발점이기도 하지만『삼국사기』등 국내사서는 물론『구당서』및『자치통감』등 중국사서에까지 전투 상황이 수록될 정도로 활약상이 널리 알려진 백제부흥군의 주요 거점이기도 하다.
동성왕이 우명곡에 행차한 목적은 이 우명곡이 논산을 거쳐 부여에 이르는 지름길 역할을 하기 때문에 사비천도를 추진 중이던 동성왕으로서는 신라군의 침입로에 대한 방어전략을 세우는 것이야말로 지극히 당연한 조치로 판단된다. 이 통로 상에 축조된 흑석동산성은 흑석역의 서쪽에 있는 해발 197m의 고무래봉 정상부에 축조되어 있는데 속칭 ‘밀암산성’이라고도 한다. 남쪽을 제외한 3면이 두마천(갑천)으로 돌려 있고, 경사면이 매우 가파르며, 대전에서 한삼천리를 거쳐 연산에 이르는 도로와 호남선철도가 내려다 보이고 있어 이 길목을 감시할 목적으로 축조되었다고 하겠다. 이 산성의 평면형태는 삼태기모양으로 내탁하여 외축한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성의 전체 둘레는 540m 정도이다.
한편 지나성·윤성·사정·대산책 중에서 축성년대가 확실하여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성책이 사정성이다. 이 성에 대한 축성기록을 보면, 『삼국사기』백제본기 동성왕 20년 7월조에 사정성을 축조하고 한솔 비타로서 지키게 하였다. 고 하여, 동성왕 20년(498)에 사정성을 축조하고 있으니, 이것은 신라가 소지왕 8년(486)에 삼년산성과 굴산성을 고쳐 쌓고 점차 서쪽으로 진출하고 있는 사실에 대한 대비책으로 간주된다. 이는 삼년산성이 보은에 위치하고 있고, 굴산성은 옥천군 청성면 산계리의 토성에 비정되고 있으니, 옥천은 삼국시대 당시 백제의 우술군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던 신라의 고리산군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또한 성왕 4년 (526)에 다시 사정책을 세우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전년인 법흥왕 12년(525)에 신라가 사벌주(현 상주)에 군주를 두고 있는 데에 대한 대비책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신라의 사벌주 설치는 백제를 침공하기 위한 사전준비로 파악되기 때문에 사비천도 이전의 성왕으로서는 신라의 침공로 부근의 성책에 대한 보완의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이로 볼 때 사정성은 웅진의 동쪽인 신라의 진입로상에서 찾아야 할 것이므로, 상기 지나성 등 4성책도 웅진의 동쪽에 있음이 증명된다 하겠다. 이 사정성의 위치에 관해서는 이 성이 함락되고, 곧 진현성이 함락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서로 가까운 지역에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하여서는 우선 진현성에 비정되는 흑석동산성과는 직선거리 1.5리 지점에 있고, 진산에서 대전을 거쳐 유성으로 나갈 수 있는 길목인 대전시 사정동 창평부락 뒷산에, 이에 적합한 산성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산성에 대하여서는 성주탁 교수에 의하여 대전시 사정동에 위치하고 있는 사정성에 비정된 바 있으니 이는 진산에서 대전으로 진입하는 통로상에 있는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이 산상은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그 둘레는 약 350m이다. 이 산성의 서쪽과 남쪽에는 유등천이 이 산성을 휘감듯이 흘러가고 있으며, 서벽밖에는 바로 대전-진산간의 도로가 지나가고 있다. 이 산성에서 남쪽으로는 흑석동산성, 북으로는 유성산성과 연결되고 있으며, 동북으로는 질현성과 연결되고 있다.
이 사정성과 같은 시기에 함락된 것으로 기록된 지라성도 이 부근에서 찾을 수 있을 것으로 파악되는 데, 이 지라성에 대하여『책부원귀』에 보면, 마침내 인원과 인궤는 몰래 경계치 않고 있는 支離城과 윤성·대산·사정등의 성책을 쳐서 빼앗고, 많은 사람을 잡거나 죽였다. 그리고 군대를 나누어 이곳을 지키게 하였다. 라 하여, ‘支離城’으로 기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支羅’⇒‘支離’로 우리 발음으로 보면, ‘지라’⇒‘지리’⇒‘질’로 됨을 알 수 있는데, 이와 같은 유사음을 가진 산성으로, 사정성에서 동북으로 직선 25리 정도 거리에 ‘질현성’이 위치하고 있다. 이 산성은 대전시 동구 가양동 ‘더퍼리’에서 대전시 동구 추동으로 넘어가는 ‘질티재’ 북쪽 산 위에 위치하고 있으니, 이 질티는 구 회덕에서 동쪽으로 넘나드는 고개로, 이를 넘으면 옥천방면과 문의?청주로 가는 방면 및 회인?보은으로 이르는 통로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위치임을 알 수 있다. 이 산성의 동으로는 불과 250여m 거리에 있는 고봉산성과 서로 대하고 있고, 멀리 백골산성과 연결되고 있으며, 북으로는 견두성이 바라다 보인다. 현재 이 산성 바로 남쪽으로는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있으며, 동남쪽으로는 대청호와 대전-옥천간 국도가 관측되고 있다.
9. 내(노)사지성 전투
『삼국사기』신라본기 문무왕 2년조에는 조금 특이한 내용의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8월에 백제 잔적이 내사지성에 모여 진을 치고 있어 불길하므로 흠순 등 19명의 장군을 보내어 이를 토벌하여 깨뜨렸다. 대당총관 진주와 남천주총관 진흠이 거짓으로 병을 칭하고 한가로이 방임하며 국가의 일을 걱정하지 아니하므로 드디어 그들을 주살하고 그 일족도 아울러 주멸하였다.
문무왕 2년인 662년 8월에 백제부흥군이 내사지성에 모여 진을 치고 있기 때문에 불길하여 흠순 등 19장군이 거느리는 대군단을 편성해서 파견하고 있다. 여기에서 불길하다고 하는 것은 이 내사지성의 백제부흥군으로 인하여 다시 웅진도가 차단될까봐 우려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 전투에 참여한 19장군에 대당총관 진주와 남천주총관 진흠이 빠져 있는데, 그 이유는 병을 핑개로 국가의 일을 걱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주와 진흠은 661년 고구려 정벌 시에 각각 대당총관과 하주총관으로 출동하여 옹산성전투에도 참여하였던 인물들이다. 그런데 이 내사지성전투에 병을 칭하여 참여하지 않으려고 하다가 오히려 그 가족들까지 주살되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시 내사지성에 주둔하고 있는 백제부흥군의 위세가 그만큼 대단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또한, 백제부흥군이 내사지성에 집결하여 있었던 것은 신라에서 웅진으로 연결되는 웅진도를 차단하여 웅진부성의 당군을 고립시키려 하였음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성의 위치에 대해서,『 삼국사기』지리지를 살펴보면, 유성현은 본래 백제의 노사지현으로 경덕왕때 명칭을 고쳤는데 지금도 그대로 호칭한다. 고 하고, 『대동지지』에는 ‘奴斯只(奴一作內)’라하여 ‘노사지’를 ‘내사지’
라고도 칭함을 볼 수 있다. 즉 노사지성 또는 내사지성은 같은 지명으로 구유성 관내에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유성관내에 위치하고 있는 산성 중에서 토축이며, 성의 둘레가 580m인 구성동산성(☞대덕연구단지 내 대전시보건환경연구원 뒷산)은 내(노)사지현의 현치소로, 그리고 석축이며 성의 둘레가 680m인 월평동산성)은 상기문헌기록에 나타나는 내사지성에 비정한 바 있다. 월평동산성은 대전에서 유성으로 통하는 만년교 남쪽 표고 137.8m의 산상에 위치하고 있다.
10. 웅진도에 대한 검토
백제부흥군이 웅진부성에 진수하고 있는 당군을 고립시키기 위하여 시도한 것이 이 웅진도의 차단이었다. 앞에서 살펴본 옹산성 및 우술성 전투, 진현성 전투, 내사지성 전투 등이 모두 이 웅진도를 타개하기 위한 전투였음을 감안할 때 백제부흥군의 웅진도 차단을 앞세운 웅진부성의 고립은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고도 하겠다. 이 웅진도에 관한 문헌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M-① (660) (백제부흥군)이 또 부성 부근 4 곳에 성을 쌓고 포위하여 지키니 이 때문에 부성에 출입할 수 없었다. 나는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포위를 풀고 사면에 있는 적의 성들을 아울러 모두 쳐서 깨뜨려 먼저 그 위기로부터 구하였다. 다시 양식을 운반하여 드디어 1만 당군으로 하여금 범의 입가로부터의 위험을 면하게 하였으며, 머물러 진수하던 굶주린 군사들이 자식을 바꾸어 서로 먹는 것이 없게 하였다.(삼국사기 권7 신라본기 문무왕 11년『문무왕보서』)
② 6년(661)에 이르러 복신의 도당이 점점 많아져서 (웅진)강의 동쪽 땅을 침범하여 빼앗으므로 웅진의 한병(당군) 1천명이 가서 적의 무리를 쳤으나 적에게 격파를 당하여 한사람도 돌아오지 못하였다. 패배한 이래로 웅진으로부터 청병이 밤낮으로 계속되었다. 신라에는 전염병이 많이 돌아 군마를 징발할 수 없었으나 괴로운 청을 거절하기 어려워 드디어 군사를 징발하여 가서 주류성을 에워쌓다. 적은 우리군사가 적은 것을 알고 즉시 와서 공격함에 미치니, 병마를 크게 손실하여 이로움을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남방의 여러 성들이 일시에 모두 반항하여 함께 복신에게 귀속하니 복신이 승리에 편승하여 다시 부성을 포위하였다. 이로 인하여 웅진도가 끊어져서 부성에는 소금과 된장이 떨어졌으므로 즉시 장정들을 모집하여 길을 엿보아 소금을 보내어 그들의 곤핍을 구하였다.(문무왕보서)
③ (661) 12월에 이르러 웅진의 양식이 다 하였으나 먼저 웅진으로 군량을 운반하면 칙령을 어기는 것이 두렵고 만약 평양으로 군량을 보낸다면 웅진의 양식이 곧 끊어질까 두려웠다. 이러한 까닭에 늙고 약한 자를 보내어 웅진으로 군량을 운반케 하고 힘세고 건장한 정병은 평양으로 향하도록 배려하였다. 웅진으로 양식을 보내는 데에 있어서는 길에서 눈을 만나 인마가 모두 죽고 백에 하나도 돌아오지 못하였다.(문무왕보서)
④ (662)에 웅진부성에서는 자주 종자를 요구했으므로 전후에 보낸 곡식이 수만여 곡(斛)이나 되었다. 남으로 웅진으로 운반하고 북으로는 평양으로 공급하여 조그마한 신라가 두 군데로 나누어 공급을 하니 인력은 극도로 피로하고 소와 말은 다 죽었으며 농사는 시기를 잃어 곡물이 익지 않았다. 저축해 두었던 창고의 양식은 두 군대로 운반하여 다 없어졌으므로 신라 백성들은 풀뿌리도 오히려 부족하였는데 웅진에 있는 한병(당군)들은 양식에 여유가 있었다. 또 머물러 진수하는 한병(당군)들은 집 떠난 지가 오래되어 옷이 헤어졌으나 몸을 온전히 가릴만한 것이 없었다. 신라에서는 백성들을 독려하여 부과시켜 제때에 의복을 공급하였다. 도호 유인원은 멀리 외로운 성에 주둔함에 사면이 다 적이므로 항시 백제에게 포위를 당하여 언제나 신라가 베풀어주는 구원을 입었다. 1만 한병(당군)이 4년간 신라의 것을 먹고 입어 유인원 이하 병사 이상이 皮骨은 비록 중국 땅에서 났으나 血肉은 모두 신라의 것이다.(문무왕보서)
『문무왕보서』에는 이와 같이 웅진도와 관련된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우선 M-①에서는 660년 백제 멸망 직후 당군 1만과 신라군 7천이 사비부성에 주둔하고 있을 때에 신라에서 식량을 보급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고,
M-②에서는 661년 백제부흥군이 웅진강의 동쪽 땅을 침범하여 빼앗으므로 웅진의 당군 1천명이 가서 쳤으나 적에게 격파를 당하여 한사람도 돌아오지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당군이 자구책으로 직접 웅진도를 개통시키기 위하여 출병하였다가 대패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겠다. 이로 볼 때 웅진도는 신라군이 웅진의 당군에게 군량을 지원하여 주는 보급로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으며, 웅진도가 끊긴 관계로 몰래 사잇길로 운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M-③은 661년 12월에 웅진으로 양식을 보내는 데 길에서 눈을 만나 人馬가 모두 죽고 백에 하나도 돌아오지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바로 백제부흥군을 만나 전멸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하겠다. M-④에서는 부성에 주둔하고 있는 당군이 항시 백제에게 포위를 당하여 언제나 신라가 구원해 주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으며, 1만 당군의 衣食이 4년간 모두 신라로부터 양육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문무왕보서』에 수록된 ‘웅진도’는 앞서 이 웅진도를 개통시키기 위하여 나당군이 공격한 전투기사 중에서 백제본기나『구당서』및『자치통감』에 기록되어 있는‘新羅?道’ 및 ‘新羅餉道’, 그리고 ‘新羅運糧之路’를
나타내는 것으로, 신라에서 웅진의 당군에게 군량 및 의복을 운송하기 위한 통로임이 확실하다 하겠다.
그리하여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북진 중이던 신라군이 661년 9월에 웅진도를 차단하는 요충인 옹산성 및 우술성을 함락시킴으로써 웅진도를 개통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인 개통에 지나지 않고 말았으
니, 백제부흥군이 계속하여 웅진도를 차단할 수 있는 요충지를 점령하여 웅진에 이르는 신라의 보급로를 끊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것이 662년 7월 유인원·유인궤 등이 나당군으로 백제부흥군의 거점인 지나성·윤성·대산·사정 등 성책과 진현성을 함락시키고, 드디어 신라의 양도를 열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662년 8월에 신라는 흠순 등 19장군이라는 대군을 동원하여 내사지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있는데, 현재 월평동산성에 비정되고 있는 이 산성의 입지조건이 대전-공주의 도로선상에 놓여 있음을 감안할 때, 이 사실도 웅진도 개통 및 확보에 있었다고 판단된다.
이 웅진도의 위치비정에 대하여서는 池內宏의 연구업적이 있다. 熊峴停및 옹산성의 소재가 공주 이남의 錦江 동쪽의 땅이라는 것은 위에서 一言한 바와 같다. 지금의 회덕으로 정해지는 우술성의 위치도 이 추측에 의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퍽 막연한 감이 있으므로 좀 더 생각해 보면, 공주에서 논산천의 상류에 있는 魯城및 論山에 이르러, 다시 서북으로 향하면 扶餘에 이른다. 이는 공주, 부여간의 자연통로이고 백제시대에 있어서는 노성에는 熱也山縣이 논산의 서쪽 금강 가까이 石城里에는 珍惡山縣이 있었다. 문무왕의 글에 보이는 소위 ‘熊津道’는 이 통로를 가리킨 것으로 관찰된다.
웅진도를 개통시키기 위하여 전투를 벌였던 옹산성 및 우술성과 지라성 등 4성책, 그리고 진현성 등의 위치로 볼 때 웅진도는 대전관내를 통과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또한, 백제는 이미 이 통로에 대해서는 다음 기사에 의하여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3월에 고구려와 말갈이 북쪽 변경에 침입하여 狐鳴등 7성을 탈취하고, 또 彌秩夫로 진군하였다. 아군이 백제·가야 구원병과 길을 나누어 막으니, 적이 패하여 물러감으로 추격하여 尼河 서쪽에서 격파하고 천여명을 참수하였다.(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 소지마립간 3년)
신라 소지왕 3년은 481년으로 백제 동성왕 3년에 해당한다. 481년 3월에 고구려와 말갈이 신라에 쳐들어오자 신라로부터 원병요청을 받은 백제가 신라의 동쪽 변경에까지 원병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상기 내용에서 지명이 확실한 곳은 미질부로 현재 경북 영일군 흥해읍이며, 니하는 대체로 강원도 강릉 근교인 연곡천과 정선관내 골지천에 비정되고 있다. 웅진에서 출발한 백제 원군이 미질부로 가기 위하여 통과한 지점은 대전-옥천-보은-상주-경주를 거쳐 동해안의 흥해로 진출하였을 것이기 때문에 역으로 신라가 웅진에 주둔하고 있는 당군에게 군량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통로를 통하여 지나갈 것임은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백제부흥군은 웅진에 주둔하고 있는 당군을 고립시키기 위하여 그 통로상에 있는 대전지방의 요충지에 군사력을 집중시켜, 신라의 군량운송로로 경주를 출발하여 보은을 거쳐 옥천-대전-공주에 이르는 소위 ‘웅진도’를 차단하려 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사실은 신라의 배신으로 한강 하류지역을 빼앗긴 성왕이, 이에 대한 보복으로 554년 관산성(옥천)을 공격하다 전사한 사실과 신라 태종무열왕이 660년 백제 침공 시에 보은 삼년산성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은 바로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