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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친일파라면 안중근은 민족 학살범인가
선진국 대열에 올라가고 싶어 몸살을 앓는 우리 대한민국 같은 나라도 없을 듯싶다. 1인당 국민소득 2만불도 못되는 처지에 선진국 운운하며 “할 수 있다”는 열정이 끓어 넘치고 있긴 하지만, 그러나 경제 수치만을 끌어올린다고 선진국이 되는 것도 아니다.
국가사회의 품위가 따라주어야 한다. 정치와 문화와 공동체 의식의 수준이 선진의 품위를 갖추어야 하지만, 아직 우리는 부끄럽고 볼썽사나운 후진의 속성을 벗어나지 못한 싸움박질에 매달려 있다. 정치의 후진성이 그러하고, 역사적으로 용도 폐기된 낡은 이념 투쟁이 선진의 발목을 잡고 있는 현실이 또한 그러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친일 소동’이다. 민족문제연구소라는 데서 주변 인물들과 함께 만들었다는 ‘친일인명사전’이 우여곡절 많은 과거의 그늘을 들추고 있다.
일제시대의 친일파를 수록했다는 친일인명사전이 소동을 피우는 것은 전직 대통령 박정희가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일제시대 만주국 장교였다. 민족문제연구소 측은 박정희가 혈서를 쓰고 자진해서 만주국 장교가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자진해서 일본대표 마라톤 선수가 되어 세계올림픽에 나가 우승함으로써 일본의 국위를 선양했을 법한 손기정은 왜 친일파에 넣지 않았을까.
반면에 구한말의 언론인 장지연,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등은 친일파라 한다. 식민지 시대의 압박과 설움 속 존재양식에 대한 진지한 통찰이 없이, 이들이 국가와 민족에 기여한 공적과 정신을 외면하고 작은 허물만을 꼬투리잡아 오늘의 잣대로 친일파 누명을 씌우고 있다.
박정희의 경우, 만주국은 일제가 세운 괴뢰국으로 일본 관동군의 통제를 받고 있었으며, 따라서 박정희는 상해임시정부가 선전포고를 한 적국의 장교였으므로 친일파로 규정한다는 것이 민족문제연구소 측의 주장이다.
논리의 핵심은 만주국 장교 박정희가 (독립군과 싸운 적은 없지만) 독립운동과 개념상으로 적대관계, 대립관계에 있었다는 것이다.
적대관계, 대립관계 부분만을 지적한다면 일본 육사 출신의 지청천 장군도 자유로울 수가 없다.
안중근 의사의 경우를 보자. 황해도의 소문난 부잣집 아들인 안중근은 동학군을 상대로 총 들고 싸웠다. 당시 부잣집들이 동학군의 공격을 받은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주장대로라면 안중근은 동학군과 적대관계에 있었고 실제로 동학군을 향해 총격을 가했으므로 민족 학살범이며, 또한 동학군은 약탈자나 폭도들이 된다. 한 부분만을 들추면 그렇다는 말이다.
역사 평가가 어디 그렇던가.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의거를, 그리고 동학농민군의 혁명 봉기를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부정적인 부분만을 들추어 전체를 부정해 버리는 것은 좌파의 전형적인 선전선동 수법이다. 즉 한 부분만을 부각시켜 전체를 묻어버리는 속임수가 도사려 있다.
실제로 좌파정권 시절에 70년대의 간첩을 유신정치에 저항한 민주인사로 둔갑시켜 보상금까지 준 어처구니없는 사례를 우리는 알고 있다. 이는 일제시대 도둑질하다 감옥에 가도 독립운동을 했다고 주장하는 것과 똑같다. 도둑은 도둑이고, 간첩은 간첩이다. 유신정치와 대립관계에 있었다는 이유로 간첩을 민주인사로 만드는 좌파의 속임수에 놀아나는 아직 우리 대한민국은 저급한 정치사회의 음습한 터널을 헤매고 있다.
“외국에 다녀보니 온통 박정희 얘기뿐” 노무현의 고백
21세기를 살면서 ‘친일’이라는 케케 묵은 역사속의 고물(古物)이 어수선한 분란을 일으키는 것은 박정희라는 대상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전직 대통령이 아닌 평범한 자연인 신분이었다면 만주국 하급장교의 전력이 문제될 리 없다.
대한민국 현대사를 대표하는 거물인 것이다. 거물과 크게 한판 붙어야 친일 소동의 효과는 큰 법이다.
박정희가 명단에 없는, 옛날 것을 재탕한 명부라면 누가 거들떠나 볼 것인가.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은 역설적으로 박정희를 위한, 박정희에 의한, 박정희의 친일 소동이다. 다시 말해 박정희를 죽이기 위한, 박정희 전력 활용에 의한, 박정희 선전선동의 친일인명사전이다.
박정희는 사실상의 친일에 관계없이 친일인명사전의 선전선동을 극대화하기 위한 작위적인 설정이며, 친일인명사전을 만든 관련자들의 성향에 관계없이 이들의 친일 소동만큼은 전형적인 좌파 노선을 노골화하고 있다고 필자는 보고 있다.
좌파 노선의 특징은 정치성에 있다. 교육의 문제를 교육에서, 노동 문제를 노사 관계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정치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이 좌파 투쟁의 특징이다.
정치성을 띠는 만큼 그들의 명분과 구호는 거창하다.
80년대 이후 민주화 열풍을 타고 세력화한 좌파들의 민족, 통일, 민주주의, 독재타도 구호는 어떤 경쟁세력도 당할 수 없는 단연 압도적인 것이었다. 이들은 가열찬 선전선동과 투쟁으로 순수 민주세력을 밀어내고 김대중, 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전성기를 구가하며 사회 구석구석으로 파고들었다.
이들의 투쟁 대상은 역사와 대한민국 정체성이었으며, 박정희 시대에 집중되었다.
집중 공격 대상이 박정희였다.
‘살아 있는 입’들이 좌파정권 시절 박정희라는 자기보호 수단이 없는 망자를 향해 ‘독재’, ‘친일’ 운운하며 어지간히도 욕사발을 퍼부어댔는데, 이 땅의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은 오히려 박정희를 강력히 옹호했고, 숱한 여론조사에서 80퍼센트에 달하는 절대적인 지지와 존경을 보내주었다. 박정희는 밟으면 밟을수록 더 크게 일어나는 들풀처럼 좌파정권 10년을 도도히 통과하면서 대한민국 현대사에 우뚝 자리를 잡았으니 이처럼 불가사의한 일이 또 어디 있을 것인가.
친일인명사전을 만든 중심 인물들은 박정희의 정치적 반대자들로 드러나 있다. 이들이 ‘역사의 심판관’인 양 완장 차고 벌이는 친일 소동이 박정희를 흔들어 보지만 그러나 박정희는 끄떡없다. 무슨 깜냥으로 국민여론의 높은 장벽을 넘을 것인가.
지난달 연세대에서 열린 박정희 평가 학술대회에서 주목을 받은 바 있는 여교수(김형아ㆍ호주 국립대)는 그후 필자를 만난 자리에서 봉하마을의 노무현을 만났더니 “외국에 돌아다녀 보니 외국 지도자들이 온통 박정희 얘기뿐이더라”고 하면서 순진하게 웃더라고 했다.
노무현의 고백이 그러하니 어쩔 것인가. 무슨 낯으로 세계 각국을 향해 “박정희는 나쁜 대통령”이라고 외칠 것인가.
대한민국의 진정한 자주독립을 이룬 박정희 시대
박정희는 우물안 개구리들의 상대가 아니다.
박정희는 당대 정치권력의 안위에 연연하지 않았다. 시시콜콜한 정치공세와 씨름하지 않고 두려움 없이 역사적 과제 해결을 추진했다.
1960년대 중반 한일국교 정상화를 둘러싸고 반대 세력은 ‘굴욕’이니 ‘매국’이니 하며 “박정희가 자진해서 나라를 다시 일본에 넘겨주어 반식민지 상태로 만들려 하고 있다”고 주장했었다. 야당 지도자 윤보선은 1964년 3월15일 부산 시민들 앞에서 “박정희는 제2의 이완용”이라는 극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1965년 5월 미국을 방문한 대통령 박정희는 18일 워싱턴 프레스클럽의 오찬 연설에서 “여러분이 본인에게 일본에 관하여 질문한다면 본인은 서슴지 않고 반일(反日)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한국인이면 누구나 다 같다”라고 말하고, “14년간이나 끌어온 한일회담을 매듭지어 국교정상화를 결단하게 된 것은 국가의 먼 장래를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그 무렵 외무장관 이동원은 청와대 브리핑룸의 사방 벽에 한국과 일본의 경제력을 분야별로 비교한 차트가 잔뜩 걸려 있는 것을 보고 “각하, 왜 하필 일본과 비교하십니까?”라고 물은 적이 있다.
대통령 박정희의 대답은 간명했다.
“일본을 따라잡아야 돼.”
박정희는 그래프를 보면서 마치 현장을 시찰하고 있는 것처럼 “됐어, 잘하는구만”이라고 혼잣말로 연거푸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이동원에게 말했다.
“한국 사람은 일본과 경쟁을 붙여야 해. 그래야 악착같이 달라붙어 본래 능력 이외의 알파(α)가 나오거든. ”
한국 축구가 전통적으로 일본에 강한 것을 연상케 하는 말이다. 박정희의 심중에 일본과의 경쟁에 그같은 투지와 승부욕이 끓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에 대한 박정희의 기본 자세는 반일감정에 얽매여서는 안되고, 일본이 서양을 배워 서양을 이긴 것처럼 우리는 일본을 배워 일본을 이기자는 것이었다.
한일국교 정상화의 물꼬를 트자 일본의 자본과 기술이 밀물처럼 들어왔다. 반대세력은 일본에게 다시 먹힐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반세기가 지난 오늘 한국은 세계 10위권의 경제강국으로 변모했고 세계시장에서 일본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박정희, 그는 당대의 국가경영을 지휘하는 대통령의 자리를 넘어 역사를 항해하는 ‘대한민국호’의 선장이었다.
그는 목숨 걸고 대한민국 현대사에 등장한 사람이다. 5.16은 그가 역사에 투신한 날이다. 목숨 걸고 역사적 과제와 씨름한 최고 지도자가 박정희 말고 누가 있던가. 없다.
역사적 과제는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으로 진정한 자주독립국가를 만드는 것이었다.
5.16혁명의 해인 1961년 당시 한국의 재정 자립도는 39.2퍼센트, 국방비는 4.9퍼센트로 나머지를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는 실정이었다. 그로부터 10년째가 되는 1970년,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1967∼1971년)을 앞당겨 초과달성한 그해의 재정 자립도는 94.5퍼센트, 국방비 자립도 83.9퍼센트로 비로소 자주독립국가의 틀을 갖추었다.
박정희의 일거수 일투족은 당대의 급급한 현안에 얽매이지 않고 과학기술, 고속도로, 산림녹화, 새마을운동, 중화학공업, 의료보장 등 미래를 향해 움직였다. 그는 역사를 호흡하고 역사를 경영했으며, 민족의 숙원을 혼신의 힘으로 녹여내 새 역사를 만들었다.
그는 역사감정에 얽매인 폐쇄적 민족주의가 아닌 실용적 민족주의로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역사를 볼 줄 모르는 청맹과니들은 박정희를 모른다. 역사를 품은 박정희의 함량을 모른다.
그를 친일파라고 친일인명사전을 흔들어대며 아무리 호들갑을 떨어도 그는 지금 역사 속을 유유자적하고 있다.
누구나 잘잘못이 있고, 공과와 영욕이 점철되게 마련인 인생 행로에서 부정적인 부분만을 들추어 그 인생 전체를 부정해 버리는 친일인명사전의 좌파적 선전선동과, 대한민국 정체성을 훼손하려는 그 노림수에 동의할 국민은 좌파들 외에 없다. 좌파들은 대부분 대한민국의 성장과 발전에 전혀 하는 일 없이 무임승차한 기회주의자들인지라 일반 국민의 정서에 융화될 수가 없다.
친일인명사전은 사료 가치가 없는 시대착오적인 붉은 삐라 묶음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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