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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2005년 3월 14일~21일(7박8일)
천년의 숲 속에 고요하게 자리 잡은 민족의 성지 오대산 월정사에서 단기출가학교를 개설한지도 벌써 6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단기출가학교에 지원한 사람만 해도 천 오백여명이 되었고,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입학하여 힘든 수행과정을 거쳐 졸업한 분들이 3기까지 151명이다. 월정사 단기출가학교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시작한 단기출가학교였기에 여러 가지 어려운 점도 많았지만, 우리 사회에 새로운 출가문화를 정착시키는 단초 역할을 했다는데 대해서는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번 성지순례는 우리보다 일찍 단기출가가 정착되어 있는 남방의 불교국가를 순례하며 수행체험과 아울러 그들의 단기출가를 견학하는데 목적을 두고 월정사 주지스님을 비롯한 대중스님, 그리고 단기출가 졸업생들과 그 가족들로 구성이 되어 7박8일간의 일정으로 이루어졌다.
어느 스님이 그랬다. “미얀마에 가면 부처님 당시의 불교를 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보통 남방불교를 이야기 할 때 스리랑카는 일찍이 영국학풍의 영향을 받아서 학문불교로 통하고, 태국의 스님들은 자만심이 너무 지나쳐서 거만하게 굴기 때문에 거만불교라고 한다. 미얀마의 불교는 수행불교로 통한다. 실제로 학문을 하더라도 교리를 사상이나 철학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수행에 결부시켜서 학문을 논하기 때문에 생동감을 느낀다. 뿐만 아니라 신심이 남 다른 까닭에 태국보다 교세가 더 강하다. 떠오르는 햇살을 받으며 탁발행렬이 지나갈 때, 마주쳐 오는 시민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합장하거나 맨땅에 삼배를 올리는 경우도 있다. 성지순례를 겸해서 일정이 잡혀 제대로 된 수행체험은 1박2일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많은 견학과 체험을 통해 남방불교를 이해하는 아주 뜻 깊은 시간들이었다.
순례도중 틈틈이 메모를 하긴 했지만 남방불교와 성지에 대한 부족한 식견으로 인해 심도 있는 체험담이 되지 못하고 개략적인 일정소개 정도의 글이 되고 말았다. 여기에서 언급되는 내용들은 내가 들은 이야기들로만 이루어져 혹시 잘못 알고 있는 내용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밝혀둔다.
3월14일(월요일)
아침 일찍 인천공항 H카운터로 모이라는 여행사의 연락을 받았다. 월요일이라 혹시 출근시간에 차가 밀리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에, 공항에서 가깝고 시설 좋은 곳에서 잔다고 저녁공양까지 미루며 일부러 인천공항 신도시까지 갔다. 순진한 산승들이 선택의 여지없는 아주 비싼 요금을 모텔에서 물고 여행객들로 북적이는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8시. 미얀마 날씨가 한 여름이라기에 월정사에서 입고 온 겨울누비는 차 안에 벗어두고 여름 삼베옷으로 갈아입고 공항을 서성되니 그 모습들이 영락없이 비행기를 잘못타서 국제미아가 된 듯한 어색한 차림새여서 서로 마주 보고 웃었다. 오랜만에 만난 단기출가학교 졸업생들과 스님들이 반가운 인사를 나누며 회포를 푸니 지난 3기 수행기간 동안의 온갖 일들이 새삼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오전10시50분, 월정사 주지 정념스님을 비롯한 단기출가학교 태극권 교수사인 대우 한주스님, 단기출가학교 소임자 스님(동은, 주봉)과 봉복사 주지이신 법륜스님, 각 국장 스님(관행, 고견, 자월, 해운), 그리고 단기출가 각 기수별 대표격인 반장(1기 반장 선각, 2기 여행자 반장 혜인, 3기 반장 명법)과 2기 졸업생인 일경 보살님, 3기 졸업생인 수경 보살님과 그 가족들로 구성된 18명의 ‘월정사 단기출가학교 남방불교 수행 체험단’을 태운 타이항공 629편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오후 2시50분, 환승을 위해 홍콩공항에 도착해서 약 1시간 정도 시간이 있길래 처음으로 내려 본 홍콩 공항은 어떤가 하고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비록 공항이긴 하지만 예상했던 홍콩의 모습보다 많이 한산한 편이었다. 아마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후 많은 외국자본들이 빠져 나가면서 경제 사정도 나빠지지 않았나 싶었다.
4시에 다시 공항을 출발해 4시45분에 태국에 도착했다. 방콕의 돈무앙 공항은 규모가 얼마나 큰지 두 눈 똑바로 뜨고 가이드를 따라가지 않으면 일행을 잃어버릴 만큼 많은 여행객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동남아를 여행하는 대부분의 항공사들이 이곳을 거쳐 가기 때문에 허브공항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화장실에 제대로 들릴 시간도 없이 다시 타이항공 305편으로 급히 갈아 탄 시간은 현지시각으로 오후 5시35분.
돈무앙 공항을 6시에 다시 이륙해서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미얀마의 수도 양곤 밍글라돈 공항에는 6시50분에 도착했다. 더운 공기가 훅- 하며 온 몸을 엄습했다. 현지 가이드로 나온 고모정씨(나는 처음에 이름을 듣고 나의 애창곡인 ‘비내리는 고모령’생각이 나서 속으로 웃었다)는 고향이 포항인데 우리가 자매결연을 할 마하시 수도원에서 6개월의 단기출가 경험이 있을 정도로 신심이 있었으며, 미얀마가 좋아 현지여인과 결혼 한지 1년밖에 안된 신혼의 멋진 청년이었다. 호텔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간단한 미얀마 인사를 알려 주었다. ‘밍갈라바’-안녕하세요? 란 뜻인데 빠알리어로 ‘행복·축복’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ༀ 여기서 잠깐, 공부 차원에서 미얀마의 전반적인 간단한 소개...^.^
미얀마는 뚜렷한 세계절과 함께 열대기후에 속한다. 우기는 5월 중순부터 10월 중순까지 남서풍 몬순기후이다. 여름(hot season)은 우기가 시작하기 전 2월 중순
부터 5월까지이다. 미얀마를 방문하기 가장 좋은 계절인 건기는 10월 중순부터 2월 중순까지이다. 해안지대와 델타(삼각주)에서는 평균 섭씨 32도이고 북부 고산지대는 21도이다. 해안지대에서의 연평균 강우량은 500mm이고 중부 건조지역에서는 75mm도 안 된다
황금의 땅으로 알려진 미얀마는 방글라데시, 인도, 중국, 라오스, 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동남아시아 최대의 국가이다. 총 면적이 한반도의 3배 규모이며, 북쪽에서 남쪽으로 2,090km, 동에서 서로 952km, 인도만으로 2,832km가 펼쳐져 있다. 미얀마에서 초기 문명은 타옉히타야(Sri Ksetra), 베이타노(Visnu), 한린(Hanlin)의 퓨 왕국의 고고학적인 증거가 있는 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강력한 지도력과 식견으로
미얀마를 통합했던 아뇨라타 왕이 11세기 초에 첫 번째 미얀마 왕조를 세웠다. 바간에 수도를 두었던 왕조는 몽고족의 침입이 있었던 13세기 말까지 존립하였다.
식민지화가 극성을 부렸던 19세기, 미얀마는 1825년, 1852년, 1885년에 걸친 3차례의 영국과의 전쟁 후 세 번째 전쟁에서 영국에 합병되었다. 세계 2차 대전 동안 미얀마는 1945년 연합군의 재점령까지 거의 3년간에 걸쳐 일본이 지배하였다. 1948년 1월4일 미얀마는 독립 주권국이 되었으며, 1989년 국명이 버마에서 미얀마로 개칭되어 식민지 때부터 사용해 오던 이름을 바꿔 부르게 되었다. 종교는 테라바다 불교(남방불교: 소승불교)를 채택하고 있으며 국민의 90%이상이 불교를 믿는 두드러진 불교국이다.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며 기독교, 이슬람, 힌두교 및 몇몇 정령신앙 역시 존재하고 있다.
미얀마의 문화는 두 위대한 문명, 즉 인도와 중국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나 그 자신만의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불교는 미얀마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얀마 사람들은 가족 간의 밀접한 유대, 연장자에 대한 공경, 단순하고 소박한 의상과 같은 전통을 간직해 오고 있다. 관용과 자족하는 생활은 이 나라 사람들의 특성이며, 미얀마 사람들의 친절은 널리 알려진 바이다.
공식 언어는 미얀마어이며, 영어도 폭넓게 쓰이고 있다. 전통적인 경제는 26년간의 중앙 계획적 사회주의에서 시장 지향형 개방 경제로 옮겨가고 있다. 민간 요소들이 내수 무역과 대외 무역에서 고무되고 발전되었다. 외국인 투자는 투자자들을 위한 관대한 장려로 거의 모든 경제 부문에서 허용되고 있다. 농업은 경제의 주요 부문이며, 민간 부문 참여는 급속하고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강력히 촉진되고 있다. 산업에서는, 중소기업들에게 농업에 기반을 둔 산업에서 있어 우선권이 주어진다. 천연자원과 인적자원이 풍부한 신흥국인 미얀마는 장기적 관점에서의 경제 발전에 있어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미얀마는 135개의 민족들이 각각의 고유한 언어와 사투리를 지니고 있는 연방국이다. 주요 민족은 버마족, 친 족, 까친 족, 샨 족, 까야 족, 꺼인 족, 몬 족, 라카인 족이 있으며, 미얀마라는 명칭은 이 모든 민족을 포괄하는 의미다. 미얀마 인구는 4천7백만이 넘으며 버마족이 약 70%가량을 이루고 있다.
미얀마 현지 시간은 표준시(G.M.T)보다 6시간 30분 빠르며, 한국 시간보다는 2시간 30분 느리다.(공식적으로 2시간 반이 젊어졌다고나 할까^^)
미얀마 통화는 ‘짜트’(KYATS)이며, 유통되는 지폐 단위는 다음과 같다.
KS1000, KS500, KS200, KS100, KS90, KS50, KS45, KS20, KS15, KS10, KS5, KS1
-공부 하시느라 애썼는데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미얀마인의 영혼 속에는 대부분이 부처님을 모시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이들의 불심은 생활화 되어 있다. 거의 집집마다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데 스님들도 피곤하면 가끔 빼먹기 쉬운 예불을 이곳 사람들은 철저히 지킨다고 한다. 또한 스님들에 대한 존경심도 대단해서 버스를 타면 무조건 공짜이고 좋은 앞자리는 스님들의 지정석이며, 누가 앉아 있더라도 스님이 타면 얼른 양보해 준다. 집안에 대소경사의 자문은 물론이고, 항상 스님을 모셔 법문을 청하고 예경한다고 한다.
하루 종일 천상에서만 노는 것도 지쳐 사바세계로 내려와 늦은 저녁공양을 Rainbow한식당에서 하고 양곤에서 제일 좋다는 Traders Hotel(일명 Shangri-La호텔)1228호에 첫 날의 여장을 풀었다.
양곤은 미얀마의 수도이며 미얀마로 들어오는 첫 관문이다. 일 년 내내 무성한 열대나무들, 그늘이 우거진 공원, 아름다운 호수가 있는 양곤은 한 때 동방의 정원도시로 알려졌다. 양곤은 알라웅파야 왕이 1755년 미얀마 남부 지방을 정복한 후 '다곤' 이라 불리는 지역에 군을 주둔시키면서 도시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양곤이란 이름은 "전쟁의 종식" 이란 뜻이며, 1885년 영국군이 미얀마를 합병한 후 양곤은 랭군이라는 영어식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3월 15일(화요일)
새벽 4시 반에 모닝콜 벨이 울렸다. 오늘의 일정이 빠듯한 관계로 서둘러야만 했다. 나는 학감스님과 방을 같이 썼는데 피곤하셨는지 모닝콜 벨소리에도 꿈쩍을 안했다. 간단하게 샤워를 한 후 5시에 1층 로비에서 뷔페식으로 아침공양을 하고 5시 반에 이 나라 최대의 유적지인 바간(Bagan)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위해 아직도 캄캄한 새벽바람을 뚫고 공항으로 출발을 했다. 10여 년 전 해인강원 도반들이 각자의 모친을 모시고 미얀마를 찾았을 때에는 국내선 비행기를 탈 때에도 여권을 보여줘야 할 만큼 절차가 까다로웠는데, 이젠 국내선을 이용할 때에는 여권을 보여주지 않아도 될 만큼 간소화 되었다.
6시 10분에 공항에 도착해 7시에 바간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하늘에서 내려 본 바간의 대지는 건기라서 그런지 냇가는 모두 말라있고 야자나무로 된 땅의 경계만이 이곳이 밭이었다는 것을 알려줄 뿐 온 천지가 황토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버스로 이동하면 14~5시간 정도 걸릴 거리를 비행기로 약 1시간 이동한 후 바간 공항에 도착했다. Air Bagan의 비행기는 꼬리부분의 항공사 마크가 연꽃봉오리를 상징하고 있었고 기내잡지 이름도 ‘Lotus(연꽃)’으로 되어 있어 지역의 불심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바간공항은 조그만 해서 내려서 걸어 청사로 들어가는데 길옆에 피어있는 분홍빛 부겐베리아(일명 종이꽃)가 10여 년 전의 모습으로 나를 반겨 주었다.
미얀마에는 7개의 비구 종파가 있으며 계율상의 차이로 크게 2개 종파로 분류된다. 공항이나 길에서 가끔 돈을 만지거나 담배를 피우는 스님을 만났는데 이런 스님들은 대체로 사원에서 퇴출(?)당한 스님들이라 했다. 미얀마에서는 스님들이 담배를 피우거나 육식을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계율에 담배를 피워서는 안 된다는 조항이 없다는 이유 때문이라는데, 한국에서라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날 일이 이곳에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편하게들 피우고 계신다. 그것이 관습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사람들의 고정 관념이란 것이 무서운 거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육식과 흡연을 하고 싶은 스님들이 이곳에 온다면 꽤나 좋아 할 듯싶다. 그러나 일부종파인 쉐진종파에서는 돈은 물론 담배도 못 피우게 한다고 한다.
바간은 전에는 영국식 발음으로 파간(Pagan)으라 불리웠으나 이후 미얀마식인 바간(Bagan)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으며, 미얀마 만달레이 관구 민잔현 서부에 위치해 있다. 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 인도네시아의 보로부두르 사원과 같이 세계 3대 불교 유적지 중의 하나로,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미얀마 불교의 변천을 한눈에 볼 수 있는, 16세기 바간 왕조의 전설을 간직한 신비의 장소이다. 바간은 1287년 몽고 침입으로 많은 건축물과 불교 문화재가 파괴되었다. 그 후로도 영국 식민지 시절의 문화재 약탈과 1975년의 대지진은 화려했던 이 지역 역사와 문화를 매몰시켜 버렸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곳 사람들은 말한다. 바간이야 말로 미얀마가 미래의 힘이 살아 숨 쉬는 곳이라고. 하기야 아직도 남아 있는 2천5백 개가 넘는 크고 작은 파고다가 옛날 바간 왕조의 영광을 그대로 대변해 주고 있어 이 말이 결코 억지는 아니리라.
바간은 구바간과 신바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여기에 대한 사연은 이와 같다.
평화롭게 사람들이 살고 있는 바간에 어느 날 미얀마정부에서 한 무리의 군대를 내려 보냈다고 한다. 총칼을 앞세운 그들은 주민들에게 이렇게 위협을 가했다. "너희들 모두.... 오늘 오후 2시까지 이 동네에서 완전 철수한닷!! 실시!!!!"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들.
가재도구도 변변히 챙기지 못하고 오랫동안 살던 집에서 쫓겨나고 만 것이다. 그렇게 쫓겨나온 사람들이 다시 집을 짓고 터전을 정한 곳이 바로 신바간이라는 곳이다. 그 후 부터 현재까지 바간은 구바간과 신바간이라고 불리고 있다 한다.
참, ‘미얀마 정장’에 대해 설명 한 말씀...
미얀마인들은 대부분이'론지(Longi)'를 입으며, 슬리퍼를 신고 다닌다. 론지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입고 다니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치마모양의 옷이다. 통치마 같은 이 옷은 일반 사람들이 평상시에 입는 옷이기도 하고, 직장인들의 근무복이기도 하며, 외교행사나 국가기념식 때 국가원수나 외교관들이 입기도 한다. 목욕을 할 땐 몸을 가릴 필요가 없이 이 옷을 헐렁하게 하여, 그 속에서 물을 부어 넣어 씻기도 하며, 잠잘 때는 론지를 벗어 포개어 베개로 쓰기도 한다. 미얀마 사람들은 일상생활이나 활동 시 모두 슬리퍼를 신발로 사용한다. 덥고 습기가 많은 기후가 슬리퍼를 많이 사용하게끔 하였고, 양말이 필요 없는 기후에서 언제든지 신고 벗을 수 있으며, 간편하기 때문에 편리하게 이용하고 있다. 국가원수나 공무원, 일반인도 모두 슬리퍼를 신고 다니며 많은 사람들이 신을 신지 않고 맨발로 다니기도 한다. 스님에 대한 공경이 대단하므로 스님의 옷자락을 만지면 안 되며 사원에 들어갈 때는 정중한 복장을 갖추고 반드시 맨발로 참배를 해야 하니 이것이 곧, 여행객들의 ‘미얀마 정장’이다. 하차할 때 가이드가 “미얀마 정장입니다.” 하면 모두 신발을 차에 벗어두고 내려야 했다.
버스로 다시 북쪽으로 한 시간 정도 이동했다. 버스하차한 곳에서 마침 이곳의 시골장(야웅마켓)이 열렸다길래 다들 시장구경을 나섰다. 재래시장은 어느 곳이나 서민들의 애환이 서려 있는 곳이다. 1달러를 외치며 전통공예품이나 불교용품을 든 애들 몇 명이 졸졸 따라 다녔다. 여기서는 남자들도 모두 치마 같이 생긴 ‘론지’를 입는데 그 가게 앞에서 연꽃 문양이 꽤 괜찮아 보이는 걸로 하나 보자기 용도로 하면 괜찮을 것 같아 400짜트(5$)주고 샀다. 그리고 이곳 여성들은 거의 노소를 가리지 않고 얼굴에 하얀 분칠 같은 것을 하고 다니는데, ‘딴나까’라는 나무를 잘라 그것을 돌에 비벼 가루를 낸 것이라 하였다. 영국사람이 쓴 책에 미얀마 여인들이 예뻐 보이는 이유 중의 하나가 더운 날씨에도 이것을 발라서 자외선 차단도 하고 냉각효과까지 있어 때론 온 몸에 바를 정도로 피부보호를 잘 해서 그렇다는 얘기를 한다. 최근에는 한류열풍의 바람이 이곳 까지 불어 닥쳐 한국드라마가 인기이고, 가장 호감 있는 나라가 한국이라 할 정도로 한국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있었다. 심지어 한국에서 근로자로 있던 미얀마인이 본국으로 돌아와서는 한국어 학원을 차릴 정도로 한국은 이제 이곳 청소년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는 듯 했다.
또 미얀마 글씨는 온통 동그라미들로 이루어져 있다. 가이드가 이곳 사람한테 너네나라 글은 왜 이렇게 동그라미밖에 없냐고 묻자, 그럼 한국 글을 써보라 해서 썼더니 웃으며, 한국 글은 왜 이렇게 작대기만 있냐고 했다 한다.
바간에서의 첫 순례지는 ‘쉐산도 파고다’ 였다. 미얀마의 대부분 사원들은 이름 앞에 ‘쉐’가 붙는데 ‘쉐’란 금(金)을 뜻하는 이 나라 말이라 한다. ‘황금의 땅’이라는 별호답게 온 나라의 사원들은 엄청난 금들로 싸여져 있었다.
두 번째로 방문한 곳이 탓빈뉴 사원(Thatbyinnyu Temple) 이다. 이 사원은 바간에서 가장 높은 파고다로서 높이가 61미터로 1144년에 알라웅시투 왕에 의해 건립되었다. 건립당시 1,2층은 스님들의 거주공간이었고, 3층은 도서관, 4층은 법당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 파고다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면 바간 전체를 한 눈에 볼 수 있는데, 그 광경은 가히 장관이라 할 만하다. 이 파고다를 건축시에 매번 만 번째 돌을 빼내어 그 옆에 작은 파고다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텔리 파고다라 불린다. 텔리 파고다의 벽돌 수를 세어보면, 탓빈뉴 사원 전체의 벽돌 수를 알 수 있다.
여기서 잠깐...
여태까진 부처님이 누워있는 상이면 모두 열반상인줄 알았는데 다리를 직각으로 모으고 오른팔이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손바닥이 아래로 향하고 있으면 ‘열반상’이고, 발을 포갠 상태에서 오른팔로 머리를 배고 있으면 ‘휴식상’이라 했다.
세 번째로 방문한 곳은 아난다 사원(Ananda Temple) 인데 바간왕국을 대표하는 파고다로서 최고의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다. 1091년에 짠시타왕에 의해 건립된 이 사원은 본당의 한쪽 편 길이가 53m의 정방형으로 만들어졌으며 아난다의 이름을 따서 아난다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 사원은 바간의 유적들 중 몇 안 되는 내부 공간이 비어있는 파고다이며, 가장 보존이 잘 된 유적중의 하나이다. 실내에는 550여개의 감실이 있는데 부처님 생애에 관한 다양한 광경들을 묘사하고 있는 정교한 솜씨의 석조물과 불상들이 있다. 또 이 아난다 사원의 특징은 거대한 불상의 모습이 보는 각도에 따라 표정이 틀리다는 것이다. 왕이나 스님들은 불상 가까이까지 와서 친견을 하니 엄한 모습으로 보여 항상 스스로를 경계하라는 법문을 들려주시고 있고, 살아가기에도 고단한 백성들의 친견장소는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는 모습으로 보였다.
네 번째로 방문한 곳은 쉐지곤 파고다 인데 아난다사원과 더불어 고대 문화와 예술미를 갖춘 부처님의 사리가 안치되어 있는 중요한 파고다로 손꼽히며 석양이 질 때 밍갈라제디 파고다의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황토색 띈 바간의 전경은 그 절정에 달한다. 이 지역 마지막 왕조의 시조인 아뉴라타에 의해 1059년 시작되었고 1087년에 그의 아들이 완공했다. 축조된 바간의 숱한 탑들 가운데 쉐지곤 대탑을 가장 걸출한 축조물로 꼽는다. 이 사탑은 쟈타카스 풍경을 양각으로 조각한 석판이 보존되어 있는 곳으로 수많은 다른 사탑의 모델이 되고 있다. 특히 이곳에는 부처님의 두 전골과 치사리가 봉안되어 있어 다른 파고다와는 달리 일반 여행객들의 출입을 선별, 통제하고 있다. 파고다 사각의 스투파에는 4m정도의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스투파를 빙 둘러 7가지 동물이 있는데 이 곳 사람들은 이름을 요일에 맞춰 짓는다고 한다. 코끼리의 상아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을 합쳐 8가지 동물의 띠가 형성되는데 그러니까 여기의 사주볼 때 띠는 8개 밖에 안 된다.
사원 곳곳에서 사미승들의 탁발모습이 눈에 띄었다. 원래 돈을 못 만지게 되어있는 이곳 계율로 볼 때 저 사미승들은 가족의 생계수단으로 탁발을 나온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그 눈빛들이 하도 선해 보여 고루고루 보시를 했다. 미얀마 사원의 불상 앞에는 불전함이 많이 놓여 있다. 처음에는 왜 저렇게 불전함이 많을까 했는데 알고 보니 모두 용도가 다른 불전함 이었다. 예를 들면, 부처님 조성용 불전함, 개금용 불전함, 사중 경비에 쓰는 불전함 등이다.
오전에 4군데의 사원을 둘러보고 12시 반에 Treasure Resorts 에 투숙하여 더위에 지친 몸을 잠시 쉬었다. 호텔의 천정에는 부처님의 전생을 그린 본생담이 벽화로 그려져 있었다. 이곳의 특산품이 대나무 공예이다 보니 호텔 대부분의 비품들은 물론 바닥까지 대나무로 되어 있었다. 여기의 호텔직원 한 달 월급이 20$, 한국 돈으로 약 2만원이 조금 넘는 수준이다. 공무원 월급이 10$~20$이며, 일등 신랑감으로는 군인과 의사 순이다. 군인들 중에 외국인으로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이며 그의 사상을 배우는 ‘박정희 학교’까지 있다고 한다. 또 영국 식민지 영향인지 영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고등학교 2~3학년 되면 영어로 강의를 하고, 점수를 얻지 못하면 낙제까지 시킨다 한다.
미얀마의 유일한 미완성 파고다인 담마양지 파고다의 뭉툭한 모습을 멀리 보며 마누하(Manuha) 사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마누하 사원은 몬족의 왕인 마누하가 바간의 왕인 아뉴라타에게 체포되었다가 1059년에 풀려나 이 사원을 착공했는데 여기에는 마누하 자신이 체포된 때의 감옥생활 모습을 묘사해 놓은 것으로 내부에는 3개의 좌불과 1개의 와불이 있다. 특이한 것은 이곳의 부처님은 가슴이 굉장히 부풀어 올라 있는데 마누하왕이 전쟁에서 지고 감금당해 있을 때의 답답한 마음을 표현하고자 밀폐된 공간에다가 가슴을 부풀려 조성했다 한다. 그래서 그런지 미얀마인들은 일이 안 풀리거나 가슴이 답답할 때 이곳을 찾아 기도를 하면 효험이 있다는 믿거나 말거나의 전설도 있다. 또 이 곳 에는 엄청나게 큰 발우가 있는데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생쌀을 발우에 보시 한다. 크기가 어느 정도인가 하면 쌀 50가마는 들어갈 것이라 한다.
바간에서 마지막으로 축조되었다는 밍글라 제티 파고다에 올랐다. 1287년에 완공된 이 파고다는 몽골제국의 징키즈칸의 침략에 의해 바간왕국의 최후의 탑이 되었다. 멀리 늬엿늬엿 해가 古都 바간의 최후의 그 모습처럼 장엄하게 넘어가고 있었다.
고대도시 바간....
더 이상 사람들이 살지 않는 곳....
침묵과 고요가 울려 퍼지는 곳에서도
해는 뜨고 또 져간다.
아름다운 석양 속에서 가라앉는 고대도시 바간....
나는 한동안 숨을 멈추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같은 고대도시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에는 사람들의 냄새가 많이 났었다.
상점들이 즐비했고 언제나 사람들과 관광객들로 북적거렸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바간은 다르다...
바간은.... 침묵이었다.
침묵이 울려대고 있는 곳이었다.
.................................................
그리고.....
해는........
점차 가라앉고 있었다.
바간에서의 순례를 마치고 저녁공양 장소로 이동했는데 식당이름이 Sunset Garden 이었다. 이와라디 강 바로 옆에 자리한 이 식당에서 이름값을 하는 일몰은 아깝게 놓쳤지만 야외 가든에서 먹는 고도에서의 저녁공양은 거의 환상적이었다. 공양을 하고 숙소로 돌아와 좀 쉬다가 1기반장인 선각거사와 가족으로 같이 오신분과 같이 호텔근처로 포행을 나섰다. 나라전체가 전기사정이 안 좋은 터라 가로등도 없고 띄엄띄엄 있는 가게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에 의지해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맘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가벼운 흥정도 하며 느지막이 호텔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3월16일(수요일)
5시 50분에 기상. 잠시 마당을 포행하고 6시 반에 아침공양을 했다. 7시에 공항으로 이동하여 만달레이행 8시 10분 비행기를 탔다.
지도를 보면 미얀마의 생긴 모양이 꼬리달린 가오리모양으로 생겼는데 만달레이는 상(上)미얀마의 옛 수도로 이라와디 강변에 자리 잡고 있다. 미얀마에서 양곤 다음으로 큰 제2의 도시이며, 중앙부에 위치한 덕분에 철도, 도로, 비행기, 강을 운항하는 기선 등을 이용한 내륙교통과 교역로의 중심지가 되었다. 만달레이는 1857년 민돈왕이 아마라푸라를 대신하는 수도로 건설한 도시이다. 미얀마 왕국의 마지막 수도였으며 1885년 11월 영국군에게 함락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일본군에게 점령되어 거의 전부가 파괴되었고, 윌리엄 슬림 경의 지휘 아래 영국 제14군단이 재점령했던 1945년 3월12일 포위기간 동안 최악의 손상을 입었다.
'미얀마 불멸의 심장'을 뜻하는 만달레이에는 불교신자가 많으며 중요한 불교중심지로서 수많은 스님들의 본고장이다. 시 중심부에는 해자(垓子)로 둘러싸인 뒤프랭 요새, 왕궁(Nandaw)의 폐허, 수많은 불교사원과 수도원, 옛 영국 관청이 있다. 이라와디 강 근처 영국 병영지 북동쪽에 있는 만달레이 구릉에는 비교적 최근에 지은 수도원·탑·기념비 등이 있다. 구릉 기슭의 730개 파고다로 이루어진 왕실지정유적(Kuthodaw)에는 미얀마 불교도들이 개정·정선(精選)하여 정통경전으로 받드는 불교경전들이 기록된 729개의 흰 대리석 석판이 있다. 제5차 불교도회의에서 민돈 왕이 공인한 이 석판들은 하나하나 탑 같은 형태의 소형구조물로 보호되어 광장에 세워져 있으며 광장 중심부에는 전통사원인 730번째 파고다가 자리 잡고 있다. 만달레이 최고의 명물은 시 남쪽에 있는 마하무니(또는 아라칸) 파고다이다. 1784년 보다우파야 왕이 아라칸 해안에서 가져온 수많은 전리품들 가운데 하나로 이 파고다에 안치되어 있는 높이 3.6m의 황동불상도 걸작품으로 꼽히는 유물이다.
1167년 민신사우 왕이 세운 슈웨키이미인트 파고다를 비롯한 아름다운 파고다가 상당수 있다. 만달레이 시에서는 차〔茶〕 도매, 견직조, 술의 양조 및 증류, 비취세공, 동 및 구리 주조, 금박업 같은 산업을 하며 성냥·목공품·금은그릇도 생산한다. 철도와 비행기편으로 남쪽에 있는 양곤, 북쪽에 있는 미치나와 미얀마로드의 출발점인 라시오까지 연결된다. 가까이 있는 아바·아마라푸라·사가잉 시가 만달레이 도시권에 속한다. 박물관과 현대식 병원도 하나씩 있다. 양곤을 제외하고 전국에서 유일하게 일간지가 발행되는 곳이기도 하다. 대나무숲이 우거진 주변지역은 미이틍게 강과 마기이(마다야) 강에서 물을 공급받는다. 마다야 가까이에 있는 사이긴 구릉지대에서는 설화석고가 나며 이것은 만달레이에서 제작하는 불상(佛像) 재료로 쓰인다. 평원지대는 미얀마의 건조지대 일부이지만 길이 67㎞인 만달레이 운하를 통해 3만 6,400㏊나 되는 지역에 대규모로 관개가 이루어지고 있다. 만달레이 바로 북쪽의 밍군에는 무게 약 70t인 세계에서 가장 큰 종 가운데 하나가 있다.
만달레이는 미얀마의 전통 예술과 장인의 기능으로 유명하다. 두개의 고대 조각물이 있는데 하나는 돌부처를 직접 깎아 만든 것이고, 다른 하나는 특별한 관심을 모으고 아직까지도 따라하고 있는 금으로 만든 잎(개금할 때 사용하는 것)의 제조법이다. 금으로 만든 잎사귀 제조에 대한 관심은 도시의 남동쪽으로 모아진다. 금덩어리를 필름처럼 얇게 만드는 것은 정말 힘든 작업이다. 우리 스님 몇 분이 체험삼아 망치를 몇 번 두드려 봤는데 얼마 하지 않아서 땀을 뻘뻘 흘렸다. 이러한 작업들은 남녀가 힘을 모아서 해야 되는데 남자는 금을 얇게 만들고 여자는 그 얇은 금에 무늬를 넣는다. 이러한 금으로 만든 잎사귀는 파고다를 도금하거나 예술작품에 사용되는데 불자들이 패킷 단위로 산다. 이러한 제조 판매 분야에서 만달레이는 미얀마에서 중심을 이루고 최고이다. 만달레이 남쪽에 있는 마하무니 파고다 근처에는 모든 길이 다 혼신의 힘을 다해 돌을 깎아 만든 길이다. 인도, 태국, 중국 등과의 경계이면서 미얀마의 다른 주를 가기위해서는 미얀마를 거쳐서 가야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만달레이는 이러한 상업과 무역의 중심이다.
마하간디용 강원에 도착했다. 이곳은 미얀마에서 제일 규모가 큰 강원으로서 1년에 한번 승가고시를 치고 5단계의 시험과정을 거쳐 마지막 관문까지 통과하면 '삼장법사‘의 칭호를 얻게 된다. 이때부터 비로소 중요한 소임을 맡게 된다. 결제 기간에는 1500여명이 수행을 한다고 한다. 마침 10시10분 사시공양시간이 되어 스님들이 공양하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몇 백 명의 스님들이 발우를 들고 줄을 서서 공양을 타가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공양을 알리는 종을 치는데 종모양이 건축자재로 쓰이는 H빔을 뚝 잘라서 메달아 놓은 것 같았다. 신도들이 배식을 하는데 이때 따로 공양 올릴 것이 있으면 옆에 서 있다가 대중공양을 하는 모습도 보였다. 우연히 이곳 주지스님의 공양상을 보게 되었는데 오늘 공양을 낸 신도들과 같이 상에 앉아 있었고 공양이 담긴 그릇에 주지스님이 손을 한 번씩 댄 후에야 신도들은 공양을 했다. 대부분의 스님들은 손으로 공양을 했고, 어른스님들은 숟가락으로 했다. 미얀마에는 경전을 중심으로 한 교학수행이 강한 편인데 최고 경지까지 오르려면 거의 15년 정도 걸린다. 이 강원의 수행방법은 주로 우리나라 옛 강원의 공부 방식처럼 암기를 하여 스승께 외워 바치는 방식을 위주로 하고 있으며, 자기들이 믿는 것만이 부처님 가르침이라고 믿고 생활하여 폐쇄적이며, 자유 토론도 없다 한다.
스님들이 공양하는 모습을 보고 인근에 있는 우뻬인 다리로 자리를 옮겼다. 이 다리는 100여 년 전에 우뻬인 시장이 마하 간디용 스님들이 호수를 빙 둘러 탁발 다니는 것을 보고, 스님들의 탁발을 돕기 위해 호수를 가로질러 티크나무로 된 다리를 놓아 준 것인데 그 길이가 엄청나서 장관이었다. 우리 일행은 끝까지 가보지 못하고 중간쯤에서 발길을 돌렸다. 오는 길에 그림을 놓고 파는 곳에서 동자승 두 명이 탁발하면서 해 맑게 웃는 모습을 유화로 그린 작품을 하나 샀다.
오후에는 마하무니 파고다(Mahamuni Pagoda) 를 순례했다. 파고다에 개금된 금의 양이 2톤이나 된다는 이곳에 있는 부처님은 만달레이에서 가장 사랑받는 부처님으로서, 라카인 주에서 가져온 마하무니 부처님을 모시기 위하여 보도우파야 왕이 1784년에 이 파고다를 만들었다. 이른 아침 불상의 얼굴을 씻기는 의식을 하기 위해 매일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고 있으며, 불자들의 참배와 개금하려는 행렬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미얀마에는 자연자원이 풍부해서 중국에서 유통되는 옥의 대부분이 미얀마에서 수입해 가는 것이라 하며, 에메랄드를 제외한 모든 보석류가 생산된다고 한다. 또한 티크나무가 많아 세계 생산량의 80%를 미얀마에서 하며 석유를 비롯한 지하자원도 넉넉하다하니 은근히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시내 대부분의 가로수가 한 종류로 되어 있어 이름을 물어보니 ‘아됴카’나무라 했는데 범어인‘아쇼카-asoka’를 음역한 것인 것 같았다. 무우수(無憂樹)의 뜻을 가졌으며, 부처님이 이 나무 아래에서 태어나셨다.
이상한 차가 한 대 지나가서 무슨 차냐고 물으니 이동용 복권 판매차량이라 했다. 이곳의 1등 상금이 3천6백만 원이라 하니 이곳에도 복권열풍이 불고 있나보다.
마하무니 파고다의 순례를 마치고 이곳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는 ‘만달레이 언덕’에 올랐다. 이곳은 경사가 심해 큰 버스는 올라가지 못하고 ‘작은 차’ 라는 뜻을 가진 10인승 미니 트럭버스 ‘클리카’를 타고 올라갔다. 해발 230미터에 위치한 만달레이 언덕은 언덕으로 올라가는 1,700개의 계단 위에서 만달레이 시 전경과 이라와디 평지의 외곽 지역, 그리고 안개 짙은 샨 언덕 등의 장관을 볼 수 있다. 만달레이 언덕에는 부처님이 이곳을 방문하셔서 이 언덕의 아래쪽에 위대한 도시가 -현재의 만달레이- 세워질 것을 예언하셨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만달레이 언덕을 내려오면 오른쪽으로 커다란 성이 보이는데 한 변이 2km나 되는 만달레이 성이다. 성을 둘러싸고 있는 사방을 인공 해자(垓子)를 만들어 적의 침공을 막고자 했으나, 영국과의 전쟁 때에는 14일 만에 함락되었다. 만달레이 시내의 황금빛 도시는 민돈왕의 영화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폭격으로 불운하게도 파괴되었다. 옛 궁전과 똑같이 만들어 놓은 건축물이 성벽 안에서 현재 건축 중이며, 거대한 궁전 성곽, 4개의 성문 그리고 외호로 영화로웠던 궁전에 지금은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다.
미얀마에는 ‘보험’이란 것이 아예 없다. 교통사고도 마찬가지. 사고가 나면 운전자는 일단 도망부터 친다고 하는데, 그래도 국민성이 좋아서인지 그런 일은 별로 없고 사고 또한 거의 나지 않는다고 한다. 양곤이 이 나라 수도이긴 하지만 인구로 보나 도시 규모로 보나 만달레이가 훨씬 크다. 대중 교통수단은 먼저 자전거로 시작된다. 자전거를 개조해서 손님을 태우는데, 생긴 것이 독일 영화에서 나오는 의자를 붙인 오토바이처럼 생겼다. 서로 등을 기대고 탈 수 있도록 만들어 승객 두 사람을 태울 수 있다. 탁발에 나섰다가 손님 두 사람을 태운 깡마른 사람이 오르막길에서 일어선 자세로 온 힘을 다해 페달을 젓는 사람을 보았는데 가슴 한 켠이 짠했다. 다음이 오토바이인데 운전자가 헬멧을 쓰고 있으면 지금 ‘영업중’이란 표시다. 다음이 택시. 택시정도 타려면 아마 상당히 부자여야 될 거다. 그리고 우리가 만달레이 언덕을 올라갈 때 탔던 10인용 미니 트럭버스이다. 말이 10인용이지 출퇴근 시간에 보면 뒷 범퍼에 매달리기까지 하여 20여명은 충분히 타고 가는 것 같았다. 가장 많이 실어 나르는 교통수단은 역시 버스다. 버스도 50여명이 정원이겠지만 타고 있는 모습을 보면 거의 숨을 못 쉴 정도로 타고 다닌다. 버스지붕에는 주로 짐을 싣는데 사람들이 타고 있는 모습도 종종 본다. 기름 값은 엄청나게 싼데 중형승용차에 가득 주유해도 우리나라 돈으로 약 3천원이면 된다.
그리고 미얀마에는 인구의 1%, 약 50만 명이 스님이다. 한국의 조계종 스님이 약 12,000명 정도이고 타 종단 스님까지 모두 포함하면 2만 명 정도 되려나. 이곳도 신분증이 있는데 특이하게 종교난이 있다. 이곳에 자기의 종교를 한 번 적어 넣으면 바꿀 수가 없다. 기존의 교회나 성당은 인정을 하나 새로 짓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5시 50분에 만달레이에서 바간으로 비행기로 이동했다가 다시 양곤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갈아탔다. 6시 반이 넘자 마침 해가 지기 시작했는데 그 모습이 장관이었다.
무한한 우주...
태초의 정적...
雲海 너머에다 天女들이 한을 풀어 놓은 듯
붉게 피어오르는 저 노을...
어떠한 걸림도 없는 허공에 일직선으로 선을 그어
한 순간에 눈을 베어 버리는 저 노을...
보이는 것이라곤 오직
노을을 경계로 한 창공과 운해...
내 시선이 닿는 온 우주에
부처님이 성도할 때 뿜어 나왔다는 그 아홉의 빛줄기처럼
사바를 물들이는 저 장엄한 노을...
우주를 상하로 툭- 반 토막 내어
노을을 지펴내는 저 운해의 장작들...
지상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시간이 흐를수록 운해는 점차 까만색으로 변해갔고, 운해의 끝을 경계로 한 선에서부터 처연하도록 붉은 노을이 시작되고 점점 주황색, 노란색, 그리고 마지막 부분은 짙은 BLUE색을 띠고 있었다. 노을이 다 사라진 후 양곤 에 도착해서 레인보우 식당에서 저녁공양을 하는데 단기출가학교 2기 졸업생인 ‘진덕’ 행자님이 인근의 ‘쉐오밍 명상센터’에서 출가해 “가루왕사”라는 법명을 받고 수행중이라며 인사차 들렀다. 이곳 가사를 걸치고 까맣게 탄 모습이 영락없는 미얀마 스님이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회포를 풀었다. 마하시 수도원이 배에서 일어나는 호흡을 관찰하는 반면, 쉐오밍 명상센터에서는 코끝으로 느껴지는 호흡을 관하는 것이 다르다고 한다. 공양 후 다시 트레더스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3월17일(목요일)
오늘은 부처님 출가일이다. 그리고 이번 성지순례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 남방불교와의 교류를 위해 마하시 수도원과 자매결연을 맺는 날이다. 8시에 호텔을 출발해서 마하시 수도원으로 향했다. 우리 단기출가학교를 졸업한 분들과 동참한 불자들 모두가 월정사에서 준비해 간 단기출가학교 교복(행자복)으로 갈아입고 있으니 사뭇 수행체험단의 분위기가 났다. 15분정도 이동해서 마하시 수도원에 도착했다. 마하시 수도원은 마하시 스님이 1947년에 창건한 절로서 1982년 열반에 들 때까지 수많은 사람을 깨달음의 향연으로 인도한 곳이다. 지금도 미얀마에만 340여개의 분원이 있고, 세계 각국에도 20여개의 분원이 있을 정도로 대단한 수행가풍을 인정받고 있다. 이곳의 운영은 모두 신도회에서 하고 있으며 스님들은 오직 수행과 신도들을 위한 법문이 주로 하는 일이다. 이곳의 수행법은 배에서 일어나는 호흡을 관하는 것이다. 3일에 한 번씩 사야도(종교청에서 시행하는 시험에 통과하여 수행을 지도하시는 큰스님으로 우리의 선원장 개념과 비슷하다)께 인터뷰, 즉 공부 점검을 받는다. 공부점검 방식은 한국의 선승과 마찬가지로 주로 수행자가 길을 잃지 않고 똑바로 갈 수 있도록 지도하는 ‘소몰이 방식’의 인터뷰를 한다고 한다. 한국의 사찰이 주로 산중에 있는 반면 미얀마의 사찰은 거의 시내에 있는데 이것은 탁발을 해서 공양에 의존하는 이곳의 수행방식 때문이다.
수도원의 입구에 들어서니 왼쪽으로 종무소가 있고 종무소 옆 건물 2층 베란다에 마하시스님의 대형 사진이 걸려 있었다. 경내에는 독경소리가 은은한데 지금은 부처님을 찬탄을 듣는 시간이라 한다. 큰스님이 선창하면 스님들과 신도들은 따라서 외우는 방식이다. 곧 방사 배정을 받고 방을 둘러보았다. 작은 방에 조그만 책상과 침대하나, 바닥은 맨 바닥에 시멘트로 되어 있었고, 변기가 있는 세면장, 그리고 소박한 베란다가 개인수행공간의 전부였다. 스님들과 남자들은 같이 숙소를 쓰고 여성들의 수행공간은 따로 있었다. 내 방은 2층 이었는데 짐을 풀어 놓고 베란다에 의자를 내어놓고 밖을 내다보았다. 길 건너편에는 천막을 쳐놓고 수행에 필요한 물품들을 팔고 있었다. 10시가 되자 열 번의 종을 쳤다. 나중에 알았는데 공양을 알리는 종이 열 번이 아니고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여기의 종도 역시 기다란 막대기 모양의 종이었다.
우리 일행은 아직 정식 방부(?)가 안 된 관계로 상공양을 했고 다른 스님들은 발우공양을 했다. 그런데 상에 올라온 반찬을 보니 경악. 남방스님들이 음식은 가리지 않는다고 들었지만 막상 상에 올라온 닭고기볶음과 닭고기 스프를 보니 놀랄 수밖에... 그러니까 공식적으로 사찰에서 육식을 하게 된 첫 공양이 된 셈이다.
공양을 하고 수도원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포행을 한 후 방으로 돌아와 베란다에서 길을 내려다보며 휴식을 취했다. 날씨는 아주 무더워 점심공양 후 1시까지는 모두 휴식시간이다. 방에는 냉장고는 물론 선풍기도 없다. 더위를 이기는 방법은 그냥 온 몸으로 더위와 하나가 되는 수밖에 없다. 세면장의 샤워꼭지는 아예 온수가 나오는 것이 없다. 잠시 후 사미승들의 경 읽는 소리가 온 도량을 메아리친다. 군사정권이 들어서 있는 이 미얀마에 이렇게 거대한 수행센터가 있다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세상에는 삶을 편리하게 하는 온갖 도구들이 나왔지만 마음을 다스리는 도구는 아직까지 없다. 과연 수행이란 무엇이고 삶이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사라져간 바간의 황금사원들과 古都. 무수히 많은 탑들의 숲속에서 화석화 된 듯한 미얀마 불교의 한 단면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수행센터가 수백 개 존재한다는 것이 어쩌면 지금의 미얀마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영혼의 고향이며 쉼터인지도 모르겠다. 2시에 자매결연 행사가 있어 준비해 간 자매결연서와 선물들을 점검했다. 우리가 준비해 간 선물은 기부금 천 달러와 법륜전에 모셔진 문수보살상과 책, 그리고 노트, 티백으로 된 인삼차였다.
자매결연식
오후 2시에 마하시 스님이 수행하시던 장소에서 자매결연식이 시작됐다. 지금까지의 불교는 남방스님들은 북방불교 스님들을 보고 매일 계를 파하는 스님이라며 인정을 하지 않았고, 북방의 스님들은 남방스님들을 보며 소승불교라며 대접을 해 주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런 시점에서의 자매결연은 한 부처님의 제자로서 서로의 수행방법을 인정해주고 수행교류의 물꼬를 터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많은 스님들이 증명으로 참석해 주어 의식은 더욱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결연식은 예경, 양국의 스님 소개, 월정사 주지 정념스님의 인사말, 마하시 수도원장 스님의 인사말, 우틴완 신도회 대표 인사말, 결연서 조인 및 교환, 가사와 선물 전달 및 기부금 보시, 미얀마 스님들의 부처님 찬탄송, 회향의 순으로 진행됐다. 먼저 수도원 측에서 결연서 전문을 영어로 읽고, 한글로 된 전문은 내가 읽었다. 그리고 참석하신 미얀마 스님들 30여명께는 단기출가 졸업생들과 동참한 불자들이 조금씩 성의를 모아 가사를 모두 보시했다. 자매 결연식을 여법하게 마치고 밖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대중 고불식
이어서 법당으로 자리를 옮겨 우리가 이곳의 가사를 입고 수행을 체험하게 된 것을 대중에게 알리는 고불식을 했다. 원래는 이곳의 가사를 입으려면 이곳의 계를 받아야만 가사를 입을 수 있으나 오늘 자매결연을 계기로 서로의 수행을 인정해주는 차원에서 대중에게 알리기만 하고 가사를 수하는 파격적인 일이 일어난 것이다. 고불식이 끝나고 미얀마 가사를 갈아입는데 우리 가사와는 완전히 틀려 입는 것이 여간 까다롭지가 않았다. 이곳 가사는 두 개인데 ‘론지’처럼 생긴 바지와 맨몸에 가사를 둘둘 마는 형식의 상의용 가사로 나눠져 있다. 온 몸을 2개의 천 조각으로 둘둘 말다 보니 제대로 말지 못하면 아찔한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는 위험한 의상이었다. 겨우 엉성하게 가사를 입고 발우와 좌복, 대가사를 지급받았다.
삭발식
고불식이 끝난 후 단기출가 1기 반장 출신인 선각거사의 삭발식이 이어졌다. 그러니까 여기서의 삭발은 정식출가의 의미이다. 비록 오늘 계를 받고 내일 퇴소하면서 환계식을 하지만 1박2일 동안 정식 비구스님의 자격을 갖게 되는 것이다. 증명법사 11명의 스님들이 빙 둘러 앉은 가운데 계를 설하는 모습이 흡사 부처님 당시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수계자는 계사 앞에 꿇어 앉아 가사를 받고 계를 하나하나 따라 외운다. 여기서는 스무 살이 지나 출가를 하면 사미계를 먼저 받고 곧 이어 비구계를 받는다. 한국에서는 행자생활을 거쳐 사미, 비구가 되려면 최소한 5년이 걸리는데 어찌 보면 초스피드로 스님이 되는 것이다. 그만큼 이곳에서는 출가라는 것이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간단히 할 수 있는 하나의 문화로서 정착되어 있는 것이다. 선각거사는 한국에서는 월정사에서 단기출가한 인연으로, 또 미얀마에서는 짧은 기간이지만 정식 스님이 되는 출가로 두 번의 선근을 심는 귀한 인연을 맺게 됐다.
선각거사의 삭발식이 끝나고 2기 단기출가 여성 졸업자인 일경 보살님의 삭발식 장소로 자리를 옮겼다. 미얀마에서는 비구니 제도가 없기 때문에 여성 출가 수행자를 8계만 지니게 하여 ‘띨라신’(팔계녀) 이라고 부른다. 공양간 지하에 띨라신 수행자 15명과 우리 대중스님들이 마주보고 증명을 하며 식을 진행했다. 먼저 일경보살님이 가운데 앉고 그 앞에 동행한 보살님들이 사각으로 된 흰 천을 네 귀퉁이를 펼쳐 잡고 앉았다. 삭발을 하면 머리카락이 그 위로 떨어지게 함이었다. 월정사 단기출가학교에서도 삭발을 할 땐 이처럼 흰 천을 깔고 삭발을 한다. 일경보살님은 여성의 몸으로 또 한 번 삭발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월정사 단기출가학교의 발전을 위해 삭발체험의 보살행을 하신 것이다. 분위기가 너무 엄숙해 삭발하는 동안 일경님의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보는 사람을 하여금 숙연한 마음을 갖게 했다. 삭발식에 비해 계를 설하는 것은 의외로 간단했다. 8계만 설하면 되기 때문이다. 삭발을 하고 수행복으로 갈아입은 일경님의 모습이 참 맑아 보였다.
위빠사나 수행체험
이곳 수행자들은 모두 오후 불식을 하기 때문에 물이나 사탕외의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 오후의 바쁜 일정으로 배고픈 줄도 모르고 위빠사나 수행 체험에 들어갔다. 지객을 맡고 있는 스님이 반 지하방으로 되어있는 수행실로 우리를 안내하고 한국말로 된 위빠사나 수행법 테이프를 들려주었다. ‘위’는 ‘특별한’이라는 뜻이고, ‘빠사나’는 ‘주시·관찰’의 의미로 위빠사나는 ‘특별한 주시, 또는 관찰’의 의미다. 테이프 설명의 요지는, 호흡으로 움직이는 배의 움직임을 끊임없이 관찰하되, 망상이 들면 그 망상을 자연스럽게 관하다가 망상이 다하면 다시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이었다. 마치 마른나무를 가지고 불을 피우려면 쉴 새 없이 비벼야 만이 그 열기로 불을 얻는 것처럼, 끊임없는 자기 주시를 해야 만이 깨달음의 불씨를 피워낼 수 있다는 것이다. 설명이 끝나고 주지스님을 비롯한 대중스님들과 동행한 1기 반장 선각 거사님, 3기 반장 명법거사님, 박재현 종무실장님과 함께 위빠사나 수행에 들어갔다. 한국의 간화선과는 수행방법의 차이가 있으나 깨달음으로 향하는 의지와 목적이야 틀릴 것이 뭐겠는가. 고요한 선실에 앉아 수행을 하고 있는 대중스님들을 보니 부처가 따로 없었다. 이곳 스님들은 시계도 찰 수가 없어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을 몰랐는데, 매 시간 정각에 시간 수만큼 종을 쳐 줘서 알 수 있게 했다. 9시가 되어서 각자 침소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
3월 18일(금요일)
다음날 새벽3시. 기상을 알리는 목탁소리가 들렸다. 말이 목탁이지 약 1m50 정도의 긴 통나무를 반으로 잘라 가운데 공간을 만든 특이한 형태의 목탁이었다. 누가 치나 하고 베란다 밖을 내다보니 청소를 하는 거사님이 목탁을 치고 있었고 그 앞에서 개 한마리가 목탁을 한번 칠 때마다 답이라도 하듯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하늘을 바라보며 울었다.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수도원 개 3년이면 목탁 친다’는 말을 지어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조금 있자 도량을 경행하는 사미승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곳의 경행 자세는 아주 자유롭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팔을 흔들거나 행자님들은 차수를 하게 하는데 여기는 팔짱을 껴도 괜찮고, 뒷짐을 져도 괜찮다. 가끔 뒷짐을 지거나 팔짱을 끼고 포행 하는 어린 사미승들이 보이는데 아주 귀여워보였다.
05시 30분. 이곳 대중스님들의 안행줄에 맞추어 공양간으로 향했다. 여신도 몇 분이 입구에서 커피캔디 2개씩을 나눠 주었다. 그리고 한 쪽 옆으로 신도들이 줄을 서서 스님들이 다 지나갈 때 까지 합장하고 예를 표하고 있었다. 공양간 안에 들어서니 한쪽 옆으로 앉은 띨라신과 신도들이 비구스님들이 모두 자리에 앉을 때 까지 합장한 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비구니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이 나라에서 온갖 불평등을 감내하면서 수행을 하고 있는 띨라신을 보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공양상에는 죽과 밥 그리고 찬 몇 가지가 전부였으며, 특이한 것은 스푼만 있고 포크는 없었다.
05시 50분. 아침공양 한 것이 소화도 되기 전에 탁발 나갈 준비를 하느라 부산했다. 탁발을 하는 것은 하루 일과 중 중요한 행사로서 그 의미가 아주 크다. 부처님 당시서부터 해 오는 2천 5백여 년의 역사를 가진 수행법이기 때문이다. 탁발 나갈 때의 복장은 사뭇 까다롭다. 우선 가사로 온 몸을 빈틈없이 싸매야 하는데 이를 ‘통견’이라 한다. 평상시 가사를 입을 때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는 ‘편단우견’방식인데 탁발 할 때에는 얼굴만 내어놓고 온 몸을 거의 꼼짝 못 할 정도로 둘둘 말아야 한다. 왼쪽 겨드랑이 밑에 둘둘 말은 가사의 매듭을 힘을 주어 꼭 끼고 있어야 하는데, 만약 그것을 놓친다면 가사전체가 흘러내려 그대로 알몸이 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여간 긴장되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 대중스님들은 통견하는데 익숙치가 않아서(통견을 제대로 하려면 초보자는 약 10분을 낑낑대야 될 것 같았다.) 지객스님을 비롯한 마하시 스님들이 한 분씩 맡아 도와주었다. 지객스님이 나한테로 오더니 왼쪽 팔에 가사가 흘러내리지 말라고 둥근 고무줄을 끼워주었다. 약간은 코믹스럽게 생긴 지객스님의 세심한 배려가 고마웠다. 겨우 가사를 수한 후 오른쪽 어깨에 발우를 메고 줄을 서니 영락없는 미얀마의 탁발승 같았다.
6시. 드디어 탁발을 나섰다. 행렬의 맨 앞에는 길을 인도해 줄 수도원의 스님이 1명 서고 그 다음에 월정사 주지스님을 비롯한 우리 대중들이, 그 뒤를 마하시 대중스님들이 뒤따랐다. 띨라신은 탁발을 못하게 되어 있어 대부분 비구 스님들과 몇몇의 사미들만 탁발에 동참했다. 한국에서도 얼마 전 ‘동남아시아 지진해일 피해민 돕기 자비탁발행사’를 종단적인 차원에서 한 적이 있었다. 우리 월정사 단기출가학교에서도 교계처음으로 강릉과 원주에서 탁발을 했었는데, 지금처럼 맨발로 부처님 당시의 모습으로 돌아가 ‘돈’이 아닌 ‘밥’을 탁발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수도원을 나서 왼쪽 길로 접어들었다. 좁은 골목길을 나서니 곧 큰 길이 나왔다. 차들이 씽씽 달리고 있는 거리 한쪽을 우리 대중들의 기다란 탁발행렬이 지나고 있었다. 뒤를 잠깐 돌아보니 끝이 보이지 않는 이른 아침의 탁발행렬이 참으로 장엄했다. 양곤 시내의 도로 포장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서 돌멩이가 튀어 올라 뼈만 남은 오래된 아스팔트를 맨발로 걷는다는 것은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이곳 스님들이야 탁발이 생활이니까 별 문제없이 잘 걷고 있었지만 우리 대중들은 괴로운 표정이 역력했다. 마치 가시밭길을 걷는 듯한 고통이었다. 문득 2천 5백여 년 전의 부처님도 이렇게 탁발을 다니셨을 것이고 때로는 가시에 찔리기도 하셨을 거라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해 졌다. 어느 큰 도로를 지나는데 거리에 잎이 여섯 달인 분홍빛 꽃들이 마치 꽃비라도 뿌린 듯 무수히 떨어져 있어 아픈 맨발바닥을 따뜻이 보듬어 주었다.
탁발을 도는 코스가 정해져 있는데 중간 중간에 신도들이 나와서 밥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보시자는 반드시 맨발로 서 있다가 스님들이 지나가면 골고루 조금씩 밥을 한 주걱씩 발우에 담아 주었다. 탁발코스는 시내 중심가를 돌아서 주택가를 끼고 돌다가 진흙탕이 질퍽거리는 시장과 빈민가를 지나기도 했다. 그야말로 중생들이 사는 삶의 현장 구석구석을 고루고루 다니는 셈이었다. 이렇게 탁발을 다니면 사원 밖에서 사는 중생들의 삶을 직접보고 그들의 애환을 온 몸으로 느낌으로서 더욱 간절한 구도의 열정이 샘솟을 것 같았다. 보시하는 사람들도 다양했는데 좀 괜찮아 보이는 집 앞에 서 있는 보시자의 밥은 윤기가 있는 쌀밥이었고, 시장바닥의 노점상 할머니가 담고 있는 밥은 푸석하면서 약간 검은 빛이 돌았다. 또 지치고 목이 마를 때쯤 되니까 밥이 아닌 물을 공양하는 신도들도 있었고, 커피믹스를 공양하는 분들도 있었다. 수도원에서 탁발에 동참한 재가신도 한 분이 도시락이 5개로 연결된 바구니 지게를 메고 따라 다니면서 공양물이 넘치거나 특별한 공양물이 있으면 따로 받기도 했다. 대략 20여명의 신도가 공양을 올렸는데 공양 받은 밥의 양이 점점 많아지면서 손으로 감싸 안은 발우의 따뜻한 온기가 배까지 전해졌다. 아~ 순간 온기 속으로 전해져 오는 공양물과 그들의 정성이 온 몸으로 느껴지면서 수행과 고행의 의미를 다시 한 번 곱씹었다.
탁발행렬이 지날 때에는 불자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합장하고 경을 외우며 공경을 표했고, 어떤 차들은 행렬이 지나갈 때 까지 차를 세워놓고 기다리기도 했다. 시장의 푸줏간 앞을 지날 때엔 땅바닥에 진흙탕과 섞인 핏물을 밟고 지나가기도 했고, 비둘기 떼가 모여 사는 곳을 지날 때엔 온 거리에 하얗게 덮여있는 배설물을 밟으며 지나야만 했다. 문득 금강경 첫 구절에 나오는 ‘여시아문 일시불 재사위국 기수급 고독원 여대비구중 천이백 오십인구 이시 세존 식시 착의지발 입사위대성 걸식어기성중 차제걸이 환지본처 반사흘 수의발 세족이 부좌이좌’기 생각났다. 부처님이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원에 머무르실 때, 천이백 오십 명의 스님들과 함께 성안으로 들어가 지금의 이런 모습처럼 탁발을 하시고 돌아와 공양 후 발을 씻고 자리에 앉으셨다는 내용이다. 부처님의 일상생활 가운데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탁발을 함으로써 대중에게 보인 것이며, 한편으론 금강경의 대의를 이 첫대목에 그대로 다 나타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까 싶었다. 공양때가 되어 가사를 수하시고 거리곳곳의 민초들이 사는 삶의 현장 구석구석을 직접 돌아보시는 부처님의 모습... 그것 외에 또 무슨 법문이 필요할까 싶었다.
탁발이 거의 끝날 때쯤 앞에서 가고 있는 주지스님과 한주스님의 가사를 보니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수도원으로 돌아와 탁발한 공양물은 한 곳에 모아 두었다. 탁발한 공양물은 사시공양 할 때 따로 지은 밥과 섞어서 대중들이 같이 먹는다. 마하시 수도원은 인원이 천 오백여명이 되어 탁발한 밥으로는 모든 대중이 다 먹을 수가 없어 밥을 별도로 더 지어야만 한다. 방으로 돌아와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을 씻고 가사도 새롭게 고쳐 입었다. 잠시 쉬었다가 10시에 사시공양을 참석했다. 공양간 입구에서는 항상 신도들이 줄을 서서 스님들께 보시할 것이 있으면 직접 공양물을 보시했다. 우리가 직접 탁발해온 밥을 공양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공양간을 둘러보니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사미승들(신퓨-단기출가 포함)은 옆에서 발우공양을 도와주는 보살님들이 있었는데 어머니들이라 했다. 공양 후에는 어느 분이 대중공양을 냈는지 아이스크림이 나왔다.(뒤에 들은 이야긴데 이 날 신퓨-어린 사미승의 단기출가 의식-가 있어 가족들이 대중공양을 낸 것이라 했다)
공양 후 방으로 돌아와 발을 씻고 자리에 앉았다. 벽 모서리로 도마뱀 한 마리가 지나가고 있었다. 무심히 ‘지나감’이라고 속으로 되뇌어 본다. 바깥날씨가 어찌나 더운지 포행나갈 엄두도 못내고 그냥 방에서 정진하는 것이 낫겠다 싶어 앉아있었다.
오후 3시. 마하시 수도원의 사야도 스님과 수행경험을 묻는 인터뷰시간을 가졌다. 1박2일의 짧은 수행 체험이었지만 모두 진지하게 임했고 수행하면서 느꼈던 궁금한 것들을 질문했다. 사야도 스님은 친절하게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셨다.
위빠사나에 대한 궁금증 가운데 몇 가지 내용을 정리해 본다. 예를 들어 돌멩이를 관하는데 있어 그냥 돌멩이를 볼 때에는 돌멩이로만 보이지만 자세히 관찰하면 미세한 구멍까지도 볼 수 있는 것과 같고, 줄 타는 광대에 비유하자면 서툰 광대는 조심스럽고 불안하게 줄을 타지만 줄 타는데 능숙한 광대는 줄 위에서 자유자재로 노는 것과 같이, 수행하는 가운데 망상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관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익숙하게 되어 결국 삼매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음식물을 포크로 집을 때 그 음식물을 집고자 찌르는 힘, 그것이 결국 정진력이라 했다.
인터뷰가 끝나고 선각거사의 환계의식이 있었다. 1박2일 동안의 미얀마 비구스님생활을 반납하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계를 받는 것도 간단하고 계를 반납하는 것도 간단하다. 그만큼 출가문화가 생활화되어 있는 것이다. 띨라신은 따로 환계의식을 하지 않았다. 마하시 수도원에서의 1박2일 일정은 짧았지만 의미 있는 시간들이었다. 가이드 말이 마하시 수도원측에서도 북방불교권의 사찰과 자매결연을 맺고 이곳 가사를 입은 뒤에 수행 및 탁발까지 동참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 했다. 그만큼 지금까지의 북방불교와 남방불교사이에는 수행교류가 드물었던 것이다. 짧은 일정이라 제대로 수행체험을 하지 못하고 떠나 수도원측에도 미안한 마음이었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고 수도원을 떠나 호텔로 향했다.
호텔로 가는 시간이 퇴근시간 무렵이었는데 영국 식민지 당시에 쓰던 버스를 내부만 고쳐 쓰고 있는 차들 속에 거의 짐짝처럼 타고 있는 사람들이, 시원한 에어컨이 들어오고 있는 우리 버스를 무심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호텔에 여장을 풀고 수행체험이다, 오후 불식이다 하면서 지치고 힘들었던 몸과 마음을 ‘한일관’식당에서 두리안 과일을 디저트로 맛있게 먹으며 풀었다. 공양도중 또 정전이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정전이 다반사라 다들 그러려니 했다.
3월19일(토요일)
7시에 기상을 하고 8시 공양을 마친 후 9시에 쉐다곤 파고다를 향해 출발했다. 가는 길에 왕자 복장처럼 화려하게 치장을 한 단기출가(신퓨)하는 차량행렬을 만났다. 미얀마에서는 이런 모습을 종종 보게 되는데 그만큼 출가가 하나의 축제로서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출가란 삶과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 고통으로부터 벗어남과 더불어 깨달음의 향기를 중생들에게 전해주어 그들로 하여금 해탈과 구원을 얻도록 하는 일인 만큼 대장부라면 한번은 해야 하는 것이니 어찌 축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들의 단기출가는 단순히 불교의 교리와 세계관을 배우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불교도로서의 행동양식을 몸에 익히는 과정이다. 출가생활에서 배우고 지키는 교리와 계율은 환속 후에도 그들이 불교적 사고와 행동양식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다. 미얀마의 단기출가제도는 ‘신퓨(Shinpyu)’의식이라고 한다. 싯다르타 왕자의 출가를 따르는 의식으로 ‘붓다의 자식이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미얀마에서 10~15세까지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신퓨의식을 치르고 나면, 남자로서 나아가 독립된 인격체로서 인정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신퓨의식 기간 동안 단기출가자들은 사미승으로서 청소나 물 긷기 등 사찰의 잔일을 하면서 빨리어나 불교교리, 예절 등을 배운다. 신퓨의식은 대개 우기 3개월 동안의 안거 기간에 이루어지며, 10계를 수지하게 된다. 미얀마인들은 신퓨의식 이후에도 죽을 때까지 몇 번이라도 출가생활을 반복한다.
태국의 단기출가제도는 ‘부엇낙(Buactnak)’이라고 한다. 태국남자는 누구나, 심지어 왕실남자들까지도 만 20세가 되면, 길게는 3년에서 짧게는 일주일까지 부엇낙을 경험해야한다. 쑤코타이왕국의 리타이왕이 왕의 신분으로 출가한 것에서 유래된 부엇낙은 대개 우기 3개월 동안의 안거기간에 이루어진다. 그리고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천도재를 겸해서 단기출가를 하는 것이 관례화 되어 있다. 이 기간 동안에는 227계를 수지하며, 빨리어로 된 경·율·론 삼장(三藏)을 배운다. 아집과 자만을 없애기 위해 매일아침 탁발을 하는 것도 중요한 일과다. 이와 같이 단기출가를 마치고 환속한 이들은 도덕적으로 완숙한 인간으로 인식된다. 이것은 불교적 윤리체계의 습득과 사회적 인간관계, 사회적 활동능력을 동시에 인정받는 것이다.
직장을 구하거나 결혼을 할 때에도 단기출가의 경험은 필수조건이다. 단기출가를 하고자 할 때 직장에서 유급휴가를 주거나, 대기업이 출가를 위한 휴가기간과 인원수를 명문화한 것도 이 같은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신퓨의식과 부엇낙은 공통적으로 효의 방편으로도 인식되고 있다. 출가가 최대의 공덕으로 인식되고 있는 이들 나라에서 아들이 출가함으로써 부모는 공덕을 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두 의식은 미얀마와 태국이 불교국가의 전형이 될 수 있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단기출가를 통해서 교리와 계율을 배우고 그것을 환속 후 일상생활에서 실천함으로써 불교가 사회전반에 걸쳐 뿌리 깊게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삼보에 대한 감사와 보시정신이 사회적인 미덕으로 승화되고 있는 것도 단기출가의 영향에 의한 것이다.
쉐다곤 파고다를 참배하는데 또 신퓨행렬을 만났다. 모두 10여명이 넘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마치 싯달타 태자가 출가할 때의 모습을 재현한 것처럼 화려한 왕자 복장이었다. 출가하는 어린이를 오른쪽 어깨위에 태우고 그 뒤로 향과 꽃 공양물을 든 예쁘게 단장한 축하객들이 뒤를 따르고 이어서 가족들이 주위사람들에게 보시를 하며 뒤를 따르는 식이었다. 신퓨하는 사람들은 사원으로 출가하기 전에 미얀마 최고의 성지인 이곳 쉐다곤 파고다를 세 바퀴 도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있다 했다.
쉐다곤 파고다는 미얀마에서 가장 신비로우며 웅장하게 보이는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푸른 숲으로 우거진 양곤 시내 위로 약 100미터의 높이로 우뚝 솟아 찬란히 반짝이고 있는 쉐다곤 파고다는 수 킬로미터 반경에서도 보이는 세계적인 종교 건축물이다. 미얀마의 종교, 역사, 문화의 총집결체인 쉐다곤 파고다는 2,500년의 전설과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기원전 585년, 미얀마의 두 형제 탁풋샤와 발리카라는 상인이 인도에서 부처님께 공양한 후 얻게 된 머리카락 여덟 개를 이곳에 묻고 탑을 조성한 것이 쉐다곤의 기원이라고 한다. 그 후 지진으로 초기 파고다의 형상은 없어졌다. 현재 파고다의 모습은 15세기 무렵 맹위를 떨치던 바고(양곤에서 동북쪽으로 약 70km 떨어진 고대도시)의 여왕 신소부 때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양곤은 ‘다곤’이라는 이름의 상업도시로 번성하였다. 바고의 여왕이 이곳에 자신의 몸무게와 같은 양의 금을 보시하여 탑을 만들었는데, 그 후 역대 왕이나 부자들이 경쟁하듯 이곳에 자신의 몸무게만큼 혹은 그 배에 금과 보석을 보시하여 오늘과 같은 100m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크기가 되었다 한다.
"구름과 안개 속에 흐릿했던 아침,
내가 쉐다곤(Shwedagon)을 처음 보았을 때
쉐다곤은 불로 된 혓바닥 같은 모습으로 하늘을 찌르듯 가리키고 있었다.
맑게 갠 날 정오의 그 모습은 평화롭고 장엄하였다.
그리고 달빛이 비치는 밤에 드러내는 자태는 정말 신비스럽기만 했다.
쉐다곤은 어느 곳에서도 선명히 눈에 들어온다.
그 분위기는 인간이 풍기는 듯한 분위기다. 그리고 그 위엄과, 아름다움, 그 순결함은 쉐다곤을 인간이 추구해온 가장 고상한 것들의 상징으로 만든다.
나는 그동안 황혼과 폭풍우, 빙하, 공원, 꽃 그리고 사람의 얼굴 등 나를 감동시켰던 많은 것들을 보아왔다. 그러나 인간이 그의 손으로 창조한 모든 것들 중에서
내가 아는 한 쉐다곤이 가장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쉐다곤을 처음 보았을 때 내 마음은 뛰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내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나의 뇌리에 되살아나곤 한다."
-미국의 대법관이었던 William O.Douglas의 저서 <말레이의 북쪽 North from Malaya> 중 발췌-
전체 금의 양은 약 7톤으로 추산하고 있으며, 우리가 방문한 때는 개금불사가 한창이라 탑 전체가 거푸집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뜨거운 날씨에도 끊임없이 꽃, 음식, 양초, 물을 바치며 기도드리는 순수하고 신심 깊은 미얀마인들의 참배자들의 모습에서 밝은 미얀마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았다. 도량 한 쪽에 커다란 보리수나무가 있었는데 부처님 성도할 때의 그 나무가 스리랑카를 거쳐 미얀마로 들어온 것이니 손자뻘 되는 보리수가 되는 셈이다.
쉐다곤 파고다를 참배하고 아웅산 묘소에 들러 모두 추모의 묵념과 반야심경을 독송했다. 그리고 ‘세계평화’라는 뜻을 가진 ‘까바에 사원’을 방문했다. 이 사원은 미얀마 종교청이 있는 자리로서 부처님과 목련존자 사리불 존자의 사리가 모셔져있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입구에서부터 총을 든 무장 군인들이 삼엄하게 경비를 서고 있었다. 모두 부처님 사리를 친견하고 수기를 받고, ‘딤섬’ 레스토랑에서 갖가지 만두 요리로 점심공양을 했다.
호텔로 다시 돌아와 3시에 체크아웃을 하고 사리 이운행사를 위해 ‘냐웅도 빨리 불교대학’으로 향했다. 3시 반에 사리이운 행사 및 친견법회를 가졌다. 오늘 우리가 모셔갈 부처님 사리는 부처님의 혈(血)사리로서 인도에서 미얀마의 메익틸라 지방의 ‘원더비 사리 박물관’으로 이운된 것을 이곳 냐웅도 빨리 불교대학에서 모시고 있다가 다시 한국의 월정사로 이운하게 된 것이다. 학장이신 ‘우 소바나’ 사야도 스님의 배려로 이운법회를 장엄하게 잘 마치고 기부금과 가지고 간 학용품 및 관세음보살상을 전달했다. 오대산 적멸보궁은 한국 사리신앙의 발상지이다. 지금 모셔져 있는 사리는 자장율사께서 중국 오대산에서 기도하던 중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모셔온 것이다. 이제 남방으로 전해져오는 부처님 사리까지 모시게 되었으니 바야흐로 사리신앙의 중심도량이 되는 것이다. 사리를 조심스럽게 모시고 19:45분 비행기로 양곤 공항을 출발해서 9시 반에 태국 돈무앙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 나와 있는 우리 일행을 태울 버스가 벤츠였는데 불과 약1시간 전의 미얀마 모습과 너무 차이가 나서 잠시 혼란스러웠다. 일본이 하루 1시간씩 일본차 광고를 TV에서 해 주는 조건으로 만들어줬다는 2층 고속도로를 시원스럽게 달려 Amari Atrium Hotel에 여장을 풀었다.
3월 20일(일요일)
오랜만에 느긋하게 아침시간을 가졌다. 태국에서의 일정이 그리 바쁘지 않은 관계로 아침도 천천히 먹고 9시에 왕궁 참배길에 올랐다. 온통 보석으로 장식한 왕궁의 화려함에 잠시 넋을 잃을 정도였다. 태국이 유일하게 동남아에서 식민지를 살지 않은 나라여서 그런지 문화재 보존도 잘 되어 있었고 또한 자부심도 대단하다고 한다. 왕궁을 참배 후 배를 타고 수상시장을 관람하고 새벽사원과 에메랄드 사원을 참배했다.
길거리에 보이는 태국글씨는 콩나물같이 생겼는데 얼핏 보면 오선지 없는 악보를 보는 것 같고, 또 어찌 보면 참새들이 전기 줄에 떼를 지어 앉아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가끔 한국 차가 보이기는 한데 가이드 설명이 한국 차는 완제품을 수입하기 때문에 관세가 200%붙어서 렉스턴의 경우 거의 9천만 원이 넘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태국에서 한국 차를 타고 다니면 꽤 행세나 한다고 봐야 한다나...
저녁공양 후 간단하게 성지순례를 마감하는 평가회를 가졌다. 월정사 단기출가학교의 발전을 위한 새로운 모색과 남방불교 수행체험 차원에서 가진 이번 순례는 힘들기도 했었지만 여러 가지 뜻 깊은 일들이 많았다. 그동안 남방과 북방, 소승과 대승으로 나뉘어 져서 서로를 반목하던 불교권이 자매결연과 수행체험을 통해 서로의 수행법을 좀 더 이해하고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인연을 만들었고, 단기출가학교 졸업생들도 단기출가가 정착화 되어있는 미얀마에서 그들의 수행법과 단기출가체험을 직접 해 봄으로써 수행의 폭을 넓히는데도 큰 몫을 했다. 주지스님이 좋은 말씀으로 순례의 마무리를 해주셨고, 한주스님과 대중스님들, 그리고 동참한 단기출가학교 졸업생들도 돌아가면서 한 말씀씩 했다. 앞으로 남방불교 수행체험을 정기적으로 가져 단기출가학교 졸업생들의 마음공부에 더욱 일조를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6박 7일간의 성지순례와 수행체험을 모두 마쳤다.
밤 11시 50분 비행기가 태국 공항을 이륙했고, 피곤에 지친 눈을 뜨니 아침 7시 반. 대한민국 인천공항에 도착을 알리는 기내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3월21일(월요일)
인천공항 도착 후 로비에서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다음에 또 좋은 수행회상에서 만나기를 기약하며 월정사 단가출가학교 남방불교 성지 순례단은 해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