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4대 미녀(4) - 양귀비(楊貴妃)
8세기 당나라 현종(玄宗)은 훌륭한 재상들의 보필을 받아 정치개혁을 단행한 명군이었다. 그는 호와로운 복장을 금지하고 사치를 경계하며, 여러 가지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이 시기가 바로 후대에 개원(開元)의 치(治)로 칭송받은 당나라의 전성기였다.그런데 나이 50이 지날 무렵부터 현종의 태도는 바뀌기 시작했다. 정치를 멀리하고 불로장생(不老長生)과 변신술(變身術), 신선술(神仙術) 등을 내세우는 도교에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흘러가버린 인생에 허무함을 느껴서일까, 아니면 그의 나이 쉰세 살 때 죽은 무혜비(武惠妃)를 잃은 슬픔 때문이었을까?
흥미를 정치에서 여자 쪽으로 옮긴 현종은 환관 고력사(高力士)에게 명하여 전국에서 미녀들을 찾아오게 하였다. 고러나 무혜비를 대신할 만한 미녀는 좀처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복건성(福建省)의 한 마을에 채화(采華)라는 미녀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곧장 궁중으로 불러들였다.
채화는 늘씬하고 키가 큰 미인이었을 뿐 아니라 학문과 교양을 두루 갖춘 재녀(才女)였다. 현종은 그녀가 지은 시 ‘매정(梅亭)’을 읆는 소리를 듣고, 그녀의 풍부한 재능에 감탄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현종은 매화꽃을 좋아하는 그녀에게 매비(梅妃)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그녀를 위해 각지의 매화를 구해 주었다고 할 만큼 그녀를 총애하였다.
그러나 현종은 이내 새로운 미인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그 미인이 바로 양귀비(楊貴妃)였다. 외롭고 쓸쓸한 처지가 된 매비는 현종에게 양귀비와 자매의 인연을 맺고 싶다고 청하였다. 자매가 되면 현종과 만날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현종은 “잠깐 관심을 가지는 것일 뿐이니, 그대 같은 재녀는 마음 쓸 것이 업노라”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이 대화를 엿들은 양귀비가 질투심에서 당장 두 사람 사이에 나가 자매의 인연을 맺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이 두 사람은 이렇게 하여 표면적으로는 자매 관계가 되었으나, 속으로는 현종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불꽃튀는 경쟁했던 끝에, 매비는 양귀비 일파의 모함에 빠져 추방되고 양귀비는 점차 현종의 총애를 독차지하게 되었다.
양귀비는 원래 현종과 그가 사랑하던 무혜비 사이에서 태어난 수왕 이모(李瑁)의 비였다. 그런데 그녀에게 한눈에 반해 아들에게 가로챈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애정이 자식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현종은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선 양귀비 자신의 뜻이라 빙자하여 그녀를 여도사(女道士)로 삼아 우선 남궁에서 살게 하고 태진(太眞)이라는 호를 내려 남궁을 태진궁(太眞宮)이라 개칭하였다. 현종은 수왕 이모에게 죄책감을 느껴서였는지 수왕에게 위씨의 딸을 보내어 아내로 삼게 하였다.
태진이 귀비로 책봉되어 양귀비로 불리게 된 것은 그 후의 일이지만 남궁에 들어온 태진에 대한 현종의 열애는 대단한 것이었다. 남궁에 들어온 지 1년도 채 못되어 태진에게서는 마치 황후가 된 듯한 도도한 행동마저 보였다. 현종과 태진 이 두 사람은 깊은 밤도 오히려 짧은 듯 해가 높이 떠올라도 잠자리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이렇게 하여 일찍이 흥경궁에 근정전을 세워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정무에 열중하던 현종 황제는 정치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상실하여 마치 딴 사람처럼 되어 버렸다.
남궁에 들어온 지 6년 후 태진은 귀비로 책봉되었다. 명실 공히 양귀비가 된 셈이다. 궁중의 법도상 귀비의 지위는 황후 다음이었으나 이때 황후는 없었으므로 사실상 양귀비가 황후의 행세를 하였다. 양귀비는 더욱 더 현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아 그녀의 일족들도 차례차례 고관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양귀비는 고아 출신으로 양씨 가문의 양녀로 들어갔기 때문에 혈연을 같이 하는 친척은 없었지만 현종은 양귀비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양씨 일족에게도 특별한 배려를 하였다. 양귀비의 6촌 오빠 양소는 별로 품행이 좋지 않았는 대도 불구하고 민첩하고 요령 있는 행동으로 점차 현종의 신임을 받아 현종으로부터 국충(國忠)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그 후 재상 이림보와 대립하였고 이림보가 실각한 후에는 안록산과도 대립했던 양국충이 바로 양귀비의 6촌 오빠이다.
천보 10년(751) 칠월칠석날에 있었던 일이다.
현종은 화청궁에 거동하여 장생전에서 양귀비와 함께 노닐고 있었다. 이윽고 밤이 깊어 하늘에는 은하수가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건만 웬일진지 칠석의 하늘을 쳐다보고 있던 양귀비는 갑자기 흐느껴 울기 시작하였다. 현종은 왜 우느냐고 달래듯 물었으나 양귀비는 그저 울음만을 계속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했다.
이윽고 양귀비는 눈물을 닦으면서 띄엄띄엄 그의 심정을 털어 놓기 시작했다.
"하늘에 반짝이는 견우성과 직녀성, 얼마나 아름다운 인연입니까. 저 부부의 지극한 사랑, 영원한 애정이 부럽습니다. 저 부부와 같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역사에도 자주 기록되어 있지만 나이가 들면 가을 부채처럼 버림을 받는 여자의 허무함, 이런 일들을 생각하면 서글퍼 견딜 수가 없사옵니다."
양귀비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한 마디 한 마디는 현종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 그리하여 두 사람을 손을 서로 붙잡고 그들의 영원한 애정을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에게 맹세하는 것이었다."하늘에서는 비익조(比翼鳥)가 되고, 땅에서는 연리지(連理枝)가 될 지이다."
이 뜻을 풀이하면, '비익조'는 중국 전설에 나오는 새로, 암수가 한 몸이 되어 난다는 데서 사이가 좋은 부부를 상징하고, '연리지' 또한 중국 전설에 나오는 나무로, 뿌리는 둘이지만 가지는 합쳐져 하나가 된다는 데서 부부의 깊은 애정을 상징한다. 현종과 양귀비는 이 '비익조'와 '연리지'처럼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것을 맹세한 것이다.
하지만 간신이 제멋대로 정사를 농락하고 현종은 양귀비에게 정신을 빼앗겨 당왕조의 정치는 부패 일로를 치닫고 있었다. 즉, 안록산이라는 절도사가 지나치게 권력을 쥐게 되어 조정에서 견제를 하려하자 난을 일으키게 되는데(안록산의 난) 그 후 사사명의 난, 황소의 난 등으로 당나라는 점차 쇠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