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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칠부(居柒夫, 502년 ~ 579년)
또는 김황종(金荒宗)은 신라 진흥왕, 진지왕 때의 학자·장군·재상이다. 미사흔의 고손자로 각간 김잉숙(金仍宿)의 손자이고 이찬 김물력(金勿力)의 아들이다
젊어서 큰 뜻을 가지고 승려가 되어 사방으로 유랑하였다. 고구려를 정찰하려다가 혜량(惠亮)의 강경(講經)을 들었다. 다시 신라로 돌아와 벼슬길에 올라 대아찬이 되었다. 혜량(惠亮)은 본래 고구려 출신으로 거칠부(居柒夫)와의 인연으로 신라에 귀화하여 승통(僧統)이 되고, 진흥왕의 명을 받아 처음으로 백고좌 강회(百高座講會)·팔관회(八關會)를 주재하여 기원을 이루었다.
진흥왕 6년(545년) 이찬 이사부의 의견에 따라 거칠부는 왕명을 받고 학자들을 모아 《국사》를 편찬하여 파진찬이 되었다.
진흥왕 12년(551년), 8명의 장군(미진부, 구진(九珍) 등)을 명하여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공략하여 죽령(竹嶺) 이북 고현(高峴) 이남의 10군을 빼앗았다. 혜량이 신라로 온 것도 이 때이다.
진지왕 원년(576년)에 상대등이 되었다가 노환으로 78세에 죽었다. 상대등의 자리는 노리부가 계승하였다.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와 마운령 순수비에 이름이 남아 있다.
가족[편집]
아버지 :김물력 아들 : 순원(順元) [출처 필요] 손자 : 구리지[출처 필요] 증손 : 사다함[출처 필요]
딸 : 윤궁
사위 : 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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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金剛, 생년미상 ~ 660년)
혹은 김강은 신라 중기의 문신이다. 태종무열왕 시기에 이찬과 상대등을 역임하였다.
태종무열왕 즉위 2년, 이찬에서 상대등으로 승진하였으며 그의 후임이 김유신이다. 태종무열왕 치세 초기, 조정의 영수로 관료들을 관장하고 있었으며 그 자신은 이찬, 상대등 등 최고위 관직을 역임했던 진골 귀족이다. 삼국사기에서의 서술은 소략하나 화랑세기에선 8대 풍월주이자 신라의 무신인 문노의 삼남으로 기술되어 있다. 생년에 대해선 기술이 없으며 무열왕 7년에 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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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생(金生, 711년 ~ 791년)은
남북국 시대의 명필로서, 자는 지서(知瑞)이다. 신품사현의 한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글씨에 매우 뛰어났으며, 일생 동안 필법을 닦아 예서, 행서, 초서는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고려 사신 홍관이 송에 가서 김생의 글씨를 내보이자 송에서는 왕희지에 비할 만큼 천하의 명필이라고 극찬하였다. 그 후부터 중국 사신은 김생의 필적을 보배로 알고 구해 갔다 하며 해동서성(海東書聖)으로 불렸다. 그가 직접 쓴 글씨는 남아 있지 않고 《이차돈 비》, 《백련사액》 등의 비문과 액자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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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범(朴仁範, 생몰연대 미상)은 신라 때의 학자이다. 일찍이 당나라에 들어가 빈공과에 급제했고, 시문이 뛰어나 이름이 높았다. 귀국 후 한림학사·수예부시랑(守禮部侍郞) 등을 역임하였다. 898년(효공왕 2) 명승(名僧) 도선(道詵)이 죽자 왕명으로 그의 비문을 지었다. 《동문선》에 그의 시 10수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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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노(文努)는 신라의 제8대 풍월주였다. 그는 선혜부인의 아들 비조부공과 가야국 문화공주의 아들이었다.
《필사본 화랑세기》에 의하면, 거칠부와 말보(末宝)의 딸인 윤궁낭주(允宮)와 혼인하였다. 말보는 아시공과 삼엽공주의 딸로, 2대 풍월주 미진부의 누이이며 실보낭주의 자매이다. 따라서, 윤궁과 미실(미진부의 딸), 9대 풍월주 비보랑(실보낭주의 아들)은 사촌이 된다. 실제로, 미실이 윤궁에게 문노를 추천하였다.
사도태후의 오빠인 노리부공은 세종과 짜고 진지왕 대신 왕위에 오를 계획을 세웠으나 다른 화랑들의 반대와 사도태후의 만류로 인해 왕위는 포기하고 대신 미실을 다시 원화로 세우고 세종을 국선(國仙), 노리부공에 반대했던 화랑 문노를 아선(亞仙)으로 삼았다.
아버지 : 비조부(比助夫)
외조부 : 찬실(贊失)
외조모 : 미상 어머니 : 문화공주 김씨(文華公主 金氏)
부인과 후손[편집]
부인 : 윤궁낭주 김씨(允宮娘主 金氏) 아들 : 대강(大剛)
아들 : 충강(充剛)
아들 : 금강(金剛)
딸 : 윤강(允剛)
딸 : 현강낭주(玄剛娘主)
딸 : 신강(信剛)
침첩(枕妾) 한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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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가기(金可紀, ?~859년)는 신라의 학자·도사이다.
원성왕 때 당나라에 들어가 빈공과(賓貢科)에 급제, 박식과 명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한때 사신으로 귀국했다가 다시 당나라에 들어가 도술(道術)에 전심, 종남산 자오곡(終南山 子午谷)에 은둔하여 화초와 도리(桃李)를 가꾸면서 《선경(仙經)》과 《도덕경》을 공부하였다. 858년 당나라 왕에게 자기는 옥황상제(玉皇上帝)의 부름으로 영문대시랑(英文臺侍郞)이 되어 언제 승천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예언대로 다음해 2월 15일 죽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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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성(金大城, 700년 ~ 774년)은 신라 경덕왕 때 국상(國相)·건축가·조각가이다.
김문량(金文亮)의 아들이며, 벼슬이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에 이르렀다. 경덕왕 10년(751년) 부모의 장수와 국가의 안녕을 위하여 불국사·석불사·장수사(長壽寺) 등을 창건하였고, 천재적인 기술과 솜씨를 발휘하였으며, 석굴암의 설계를 완성하였다. 석굴암은 불국사의 사탑·전당과 아울러 걸작품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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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생(金生, 711년 ~ 791년)은 남북국 시대의 명필로서, 자는 지서(知瑞)이다. 신품사현의 한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글씨에 매우 뛰어났으며, 일생 동안 필법을 닦아 예서, 행서, 초서는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고려 사신 홍관이 송에 가서 김생의 글씨를 내보이자 송에서는 왕희지에 비할 만큼 천하의 명필이라고 극찬하였다. 그 후부터 중국 사신은 김생의 필적을 보배로 알고 구해 갔다 하며 해동서성(海東書聖)으로 불렸다. 그가 직접 쓴 글씨는 남아 있지 않고 《이차돈 비》, 《백련사액》 등의 비문과 액자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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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비형(金鼻荊, 581년 ~ ?)은 진지왕의 아들로, 진평왕 때의 인물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비형은 진지왕이 사량부의 미인 도화부인(桃花夫人)와 사통하여 낳은 자식이다. 579년에 진지왕은 도화부인를 불러 후궁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도화부인는 남편이 있다며 거절하였다. 그 해 진지왕은 폐위되어 죽었다. 2년 뒤인 581년, 도화부인의 남편이 죽자 진지왕의 귀신이 도화부인에게 나타나 사통하였다.
이 이야기를 듣게 된 진평왕은 비형을 불러 궁중에 살게 하고 15세 때 집사(執事) 벼슬을 주었다. 그런데 비형은 밤마다 궁궐을 빠져 나가 밖에서 놀았다. 이에 왕은 병사들을 파견해 지켜보게 하니, 비형은 귀신과 놀고 있었다. 이에 왕이 비형을 시켜 강에 다리를 놓게 하니 하룻밤 사이에 다리가 완성되었다.
하루는 진평왕이 비형에게 묻기를, 귀신 중에 정사를 도울 만한 자가 있느냐고 했다. 이에 비형은 길달(吉達)을 추천하였다. 당시 각간 임종이 자식이 없어 왕은 길달로 하여금 임종의 양자가 되게 하였다. 임종은 길달을 시켜 흥륜사(興輪寺) 남쪽에 문루를 짓게 하고, 길달이 거기에서 밤마다 자니, 사람들은 이를 길달문이라고 불렀다. 어느 날 길달이 여우로 변해 도망치니 비형이 귀신을 시켜 이를 잡아 죽였다. 이후로 귀신들이 비형을 두려워하여 모두 달아났다.
이에 당시 사람들이 비형을 우러러 노래를 지어 불렀다 한다
부왕 : 진지왕
모후 : 도화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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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두(薛罽頭, ? ~ 645년)
는 신라 귀족 출신의 당나라 장수로 고구려-당 전쟁에서 활약했다. 삼국사기에 열전이 남아 있으며, 살계두(薩罽頭)로도 불린다.
설계두는 신라의 귀족이었으나, 골품 제도에 불만이 있었다. 하루는 친구들과 술을 마시면서, "신라는 사람을 등용하는데 골품을 따진다."며, 중국에 가서 관직을 해야겠다는 뜻을 밝혔다. 결국 진평왕 43년인 621년, 계두는 배를 타고 당나라에 들어갔다.
당시 당나라는 고구려와 전쟁을 하고 있었다. 645년, 당 태종은 고구려를 친히 정벌하였다. 당시 계두는 좌무위 과의(左武衛 果毅)의 직위로 종군하고 있었다. 당군은 요동에 이르러 주필산(駐蹕山)에서 고구려군과 격전을 벌였다. 설계두는 선봉에 서서 용감히 싸우다 결국 죽고 말았다.
당 태종은 이 소식을 듣고 외국인 신분으로 자국인보다 목숨 바쳐 싸운 점에 감명받았다. 이에 측근을 시켜 설계두의 시신에 어의(御衣)를 덮어주고, 대장군에 추증하고, 예로써 장사를 지내 주었다.
한편,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조에 따르면, 당시 당 태종은 안시성을 공략하고 있었고, 고구려는 고정의,고연수,고혜진 등이 병사를 이끌고 이를 구원하러 가고 있었다. 여기서 당 태종이 고구려군과 싸운 곳이 주필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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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거(率居, ? ~ ?)는 신라 때의 화가이다. 삼국사기에 열전이 남아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솔거는 미천한 집안 출신으로 그 조상을 알 수 없다. 선천적으로 그림에 뛰어났으며 황룡사 벽에 그린 노송(老松)이 실물과 같아 새들이 날아들었다 부딪혀 죽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 일화에 의하면 훗날 황룡사의 벽에 그려져 있던 노송도의 색이 바래지자 한승려가 노송도를 색을 다시 칠했고 새들이 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외에도 분황사(芬皇寺)의 《관음보살도》(觀音菩薩圖), 진주 단속사(斷俗寺)의 《유마상》(維磨像), 《단군초상》(檀君肖像), 《진흥왕대렵도팔폭》(眞興王大獵圖八幅) 등이 있었다 하나 전하여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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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공주(叔明公主, ? ~ 603년)는 《화랑세기》에만 등장하는 신라의 왕족으로 제4대 풍월주 이화랑의 부인이다. 진흥왕의 왕비이기도 했으며, 《화랑세기》에만 등장하는 정숙(貞肅)태자의 어머니라고 한다.
학계에서 위서 논란이 있는 《화랑세기》에 따르면, 숙명은 이사부와 지소태후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어머니를 따라 진골정통이었으며, 진골정통으로 대를 잇게 하려는 지소태후의 뜻에 따라 이부(異父)오빠인 진흥왕의 후비가 되었다. 진흥왕은 어릴 때부터 왕후로 정해진 사도왕후를 사랑하였고, 숙명과는 어머니가 같은 남매 사이라고 하여 깊이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숙명의 배후 세력 때문에 무시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숙명은 진흥왕과의 사이에서 아들 정숙을 낳았고 지소태후의 입김으로 정숙이 태자가 되었다.
왕후가 되기 이전부터 궁중에서 이화랑과 사통하였으며, 왕후가 된 이후에도 이화랑을 사랑하였다. 이 사실이 들통나자 이화랑과 함께 도망쳤고, 이로 인해 정숙은 혈통을 의심받아 태자에서 폐출되고 숙명 역시 폐비되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아들을 태자로 옹립할 수 있었던 사도왕후가 이화랑과 숙명을 옹호하였기 때문에 용서를 받고 이화랑과 정식으로 결혼하게 되었다. 이화랑과의 사이에서 원광과 보리 등을 낳았다고 한다. 말년에는 남편 이화랑을 따라 영흥사(永興寺)로 들어가 불도에 힘쓰며 살았다.
가족 관계[편집]
아버지 : 이사부
어머니 : 지소태후 남편 : 진흥왕 아들 : 정숙태자
남편: 이화랑 아들: 원광
아들: 보리공
딸: 화명(花明)
딸: 옥명(玉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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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보 갈문왕(習寶, ? - ?) 또는 사보 갈문왕은 내물왕의 손자이자 눌지왕의 조카이며 복호 갈문왕의 아들[1]이었다. 그는 내물 마립간의 손녀, 눌지 마립간의 딸 조생부인(鳥生夫人)과의 사이에 지증왕이 있었다.
복호의 아들이 아니라 눌지나 미사흔의 또다른 동생의 아들일 것이라고 추정되었으나 조선시대 후기에 지어진 신라경순왕전비에 의하면 그는 복호 갈문왕의 아들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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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암(金巖, 생몰년 미상)은 8세기 신라의 점복가·병술가(兵術家)이다. 관위는 이찬.
김유신(金庾信)의 후손으로 《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의 적손(嫡孫)인 김윤중의 서손(《김해김씨족보》에는 김유신의 3남 원정의 손자로 적었다)이다. 기록에는 본성이 총민하고 술법 배우기를 좋아하였으며 하나를 들으면 세 가지를 아는 수재였다고 전한다. 일찍이 이찬으로서 당에 숙위하면서 틈틈이 음양학(陰陽學)을 배웠으며, 스스로 《둔갑입성지법(遁甲立成之法)》을 저술하여 점복술과 은형술(隱形術)에 신경지를 열었다. 당 대력(大曆) 연간에 귀국한 뒤에는 사천대박사(司天大博士)를 거쳐 양주(良州)·강주(康州)·한주(漢州) 등지의 태수(太守)를 역임하고, 집사시랑(執事侍郞)을 거쳐 패강진두상(浿江鎭頭上)이 되었다. 태수직으로 재임하는 동안 농한기를 현지 사람들에게 육진병법(六陣兵法)을 가르쳤으며, 혜공왕 15년(779년)에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당할 뻔한 적도 있었으나 마침 당에서 사신으로 일본에 와있던 고학림(高鶴林)이 그를 보고 반가워하는 것을 보고, 억류하지 못하고 돌려보냈다고 한다.
《삼국사기》는 또한, 일찍이 메뚜기떼가 서쪽에서 패강진 경계로 들어와 들판을 뒤덮어 백성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암이 산마루에 올라가 분향하고 하늘에 기도하자 갑자기 큰 비바람이 일며 누리가 다 죽어 버렸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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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관공(軍官公, 612년 ~ 681년)은 동란공(冬蘭公)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석명 공주(昔明公主)이니 진지왕의 딸이다. 양도공보다 세 살이 적었다. 인품이 넉넉하고 후덕한 것이 지소태후의 전형(典型)이 있었다. 천관공은 군관공과 천운 사이에서 태어났다. 군관공의 아버지는 동란공이다. 동란공은 동종과 오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 화랑도에 들어가 양도공 휘하에서 학문과 무예를 배웠는데 양도공의 어머니는 양명공주인데 양명공주는 진평왕과 보명궁주의 딸이니 그의 어머니인 석명공주와 자매지간으로 양도공과 사촌지간이다. 이로 인해 그는 양도공의 뒤를 이어 선덕여왕 재임 시 풍월주가 되어 화랑도를 이끌어 갔으며 처남인 천광공을 부제로 삼았다. 그 이후 장군이 되어 태종무열왕과 김유신을 도와 백제와 고구려를 정벌하여 삼국통일에 기여한 공으로 문무왕에 의해 680년에 상대등이 되었으나 681년 신문왕 초기에 일어난 김흠돌의 난을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결하였다.
가족:
선대[편집]
조부 : 동종공(冬宗公)
조모 : 오란(五蘭) 아버지 : 동란공(冬蘭公)
외조부 : 신라 제 25대 국왕 진지왕
외조모 : 보명궁주(寶明宮主) 어머니 : 석명공주 김씨(昔明公主 金氏)
부인과 후손[편집]
부인 : 천운(天雲) - 수품과 천장낭주의 딸, 천광공의 누이 아들 : 제 30대 풍월주 천관공(天官公)
정인 : 양도공의 누이 2명 서자 : 18명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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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파랑은 신라 시대의 향가 '찬기파랑가'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기파랑이 실제 누구인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알 수 없다. 하지만 당대의 화랑 지도자의 한명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찬기파랑가에서 기파랑은 고결하고 숭고한 자로 묘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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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덕(萬德, ? ~ ?)은 신라의 무용가이다.
대사(大舍) 벼슬에 있다가 552년 진흥왕의 명을 받고 법지와 함께 우륵에게 배웠는데, 만덕은 춤을 배워 계고, 법지와 함께 어전에서 연주하여 찬사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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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고(階古, ? ~ ?)는 신라의 음악가이다.
가야에서 망명해 온 우륵이 진흥왕의 명으로 가무를 가르치자 왕명으로 법지는 노래를, 만덕은 춤을, 그는 거문고를 배웠다. 재주가 뛰어나 자주 임금 앞에서 연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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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진(祿眞)은 신라 헌덕왕 때의 문신이다. 성(姓)과 자(字)는 모두 불명.
일길찬 수봉(秀奉)의 아들로, 23세에 벼슬하여 내외관(內外官)을 여러 번 지내고 헌덕왕 10년에 집사시랑(執事侍郞)에 이르렀다. 동왕 14년에 각간 충공(忠恭)이 심화가 괴로워 병을 칭탁하고 쉬고 있을 때 그는 찾아가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말로 충공을 설득시켜 병을 고쳐 주었다고 한다.
1.집을 짓는 원리나 정치의 원리나 다름이 없다.
2.조정에 빈 자리가 없고, 벼슬아치가 저마다 인품을 갖추며, 상하가 고루 정하게 되고, 현·불초(賢不肖)의 분별이 선 후에야 왕정(王政)이 이룩된다.
3.공사(公私)의 분별, 공평무사, 뇌물의 근원 봉쇄, 인사 정책의 공정성, 업무의 경중(輕重) 파악 등이 특히 중요하니, 이를 지키지 못하면 국사는 혼탁해진다.
4.공직에 있는 자가 정사(政事)를 폐하고 누워 있음은 부당하다.
그는 결국 왕과 세자를 일깨워주고, 김헌창(金憲昌)의 반란 진압에 공을 세워 대아찬 벼슬이 내렸으나 받지 않았다고 한다. 즉 그는 유교적인 왕도 정치 사상을 깊이 이해하고 문란한 현실 정치를 비판하여 경계시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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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타지(居陀知, ? ~ ?)는 9세기경 신라의 무신, 외교관, 궁사이다. 진성 여왕의 왕자 양패의 수행원으로 당나라에 다녀왔다
진성 여왕 때 왕자인 양패가 당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진성 여왕은 백제의 해적을 염려하여 활 잘 쏘는 사람 50명을 함께 보냈는데, 거타지도 그중 한 사람으로 뽑혔다. 배가 한 섬에 이르렀을 때 풍랑을 만나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않자, 섬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그 날 밤, 양패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활 잘 쏘는 사람 1명을 섬에 남겨두고 가면 풍랑이 가라앉을 것이라는 말을 하였다. 이에 거타지가 혼자 남아 있었는데, 한 노인이 나타나 자기 아들을 죽인 중을 죽여달라고 부탁했다. 거타지가 중을 처치하자, 노인은 자기 딸과 결혼해 주기를 바랐다. 노인은 딸을 꽃으로 변하게 하여 거타지의 품속에 넣어주었다. 거타지는 당으로 가서 양패 일행을 만나 무사히 귀국하였다. 그는 품고 온 꽃을 여자로 변하게 하여 함께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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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반(伯飯, ? - ?)은 신라의 왕족이다. 신라 24대 진흥왕의 손자이다. 신라 26대 진평왕의 동복아우이자 국반의 형이며, 27대 선덕여왕의 숙부이자 28대 진덕여왕의 백부가 된다. 형 진평왕에 의해 백반 갈문왕에 책봉되었다.
그의 이름 '백반'은 불교에서 석가모니의 삼촌 이름에서 따온 것[1]이라 한다. 진평왕 즉위 원년(579년) 8월에 동생 국반이 백반 갈문왕에 추증될 때 그도 진정갈문왕(眞正葛文王)으로 책봉되었다. '
그가 왕으로 즉위한 것이 아니었고, 그의 자녀가 왕으로 즉위하지는 않았으나 형인 진평왕은 그를 갈문왕으로 봉하여 왕에 준하는 예우를 하였다. 삼국사기[2]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그는 진흥왕의 모제라 하여 동모 형제라고 기술된 것으로 보아 그들 외에 이복 형제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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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칭 마의태자(麻衣太子, 생몰년 미상)는 신라(新羅) 마지막(제56대) 왕 경순왕(敬順王)의 왕자이다. 성은 김(金)씨, 휘는 일(鎰 또는 溢)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종교는 불교이다. 그는 죽방부인의 적자임과 동시에 신라 왕조 최고의 화랑으로 일컬어지는 효종랑의 손자이다. 고려에 귀순하려는 아버지 경순왕을 만류하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나라를 떠나 금부리에서 충신 지사 일민들과 함께 조국 광복의 숭념을 발의하였다. 후에 개골산(皆骨山)에서 대절을 지켰으므로 그 증손에 이르러서야 대의를 실행한다는 명분으로 나라에 출사하게 되었다.
이찬을 지낸 효종랑의 적자인 경순왕은 사직이 불안정한 때에 대기에 올라 방국 수호의 책무를 지게된 것이다.
서라벌로 쳐들어온 직후 신라의 구원요청으로 고려 태조 왕건이 몸소 거느리고 온 1만의 기병까지 공산(公山) 전투에서 궤멸시키고 승승장구하던 견훤은 경순왕 4년(930년) 1월의 고창(高昌) 전투에서 왕건에게 대패하면서 주도권을 고려에 빼앗겼다. 재암성(載巖城)이나 고창(안동부)은 물론 영안(永安)·하곡(河曲)·직명(直明)·송생(松生) 등 30여 개의 군현(郡縣)과 동해 바닷가의 명주(溟州)에서 흥례부(興禮府)에 이르기까지 총 110여 성과 부락이 고려에 항복하는 등 수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방에 대한 지배권을 모두 상실한 신라는 이미 경주 지역의 지방 정권이나 다름없는 처지였고, 한편으로 고려는 국왕인 왕건이 직접 수도 서라벌을 방문해 경순왕을 찾아 위로하며 "예전 견훤이 왔을 때에는 승냥이와 호랑이를 만난 것 같았는데, 지금 왕공 (王公)이 오니 미덥기가 그지 없다."는 호평을 들을 정도로 서라벌의 민심을 얻었고, 경순왕의 종제 유렴(裕廉)을 질임으로하여 개경(開京)으로 데려가는 등 신라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키워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경순왕 9년(935년) 10월, 왕은 여러 신하들을 모아 왕건에게 국토를 모두 바치고 항복할 것을 논의하게 되었다. 신하들의 의논도 엇갈리는 가운데 왕자가 나서서 강하게 반대했다.
國之存亡必有天命只合與忠臣義士收合民心自固力盡而後已豈冝以一千年社㮨一旦輕以與人
나라의 존망이라는 것이 천명(天命)에 달려있기는 하지만 충신(忠臣), 의사(義士)와 함께 민심을 수습해 스스로 지키다가 힘이 다한 후에 그만두어도 늦지 않습니다. 어떻게 천 년의 사직(社稷)을 하루아침에 가볍게 남에게 줄 수 있단 말입니까?
―《삼국사기》
그러나 경순왕은 "이젠 더 강해질 수도 약해질 수도 없는데 버텨봤자 죄 없는 백성만 더 괴롭힐 뿐"이라며 끝내 항복을 청하는 글을 지어 고려에 보냈고, 왕자는 바로 금부리에서 두 아들 그리고 대의지사와 함께 세력을 이루었다가 시간이 흘렀고 개골산에 들어가 베옷을 입고 거하였다. 11월에 왕건이 신라의 항복을 받아들여 경순왕을 개경으로 불러들이고, 서라벌을 경주(慶州)로 고쳐 고려의 군현으로 편입시키면서 신라는 멸망했다.
후세의 평가[편집]
금부대왕의 얼자인 김은열의 묘지명에 태자공의 휘가 쓰여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나라를 들어 항복하려는 아버지와 고려에 맞서 결사항전을 주장했던 마의태자의 행동은 유교적 대의명분론에 비추어 윤증이나 신흠 같은 조선의 유학자들로부터 재조명되고 칭찬받았는데, 오운의 《동사찬요(東史纂要)》를 비롯해, 안정복(安鼎福)은 저서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마의태자에 대해 후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윤증이나 신흠 같은, 조선의 문인들이 마의태자의 행적에 대해서 읊었던 한시 작품들의 초의(草衣)' 또는 '신라왕자'(《상촌집》)로만 다루어질 뿐으로, '마의태자'라는 이름이 본격적으로 대중에 퍼지게 된 것은 왜점 때 이광수가 1926년 5월부터 1927년 1월까지 『동아일보(東亞日報)』지면에 연재했던 신문소설 「마의태자」를 통해서였다. 이후 극작가 유치진이 마의태자를 주제로 한 동명의 희곡을 발표하였으며, 이후 '마의태자'의 비극적인 이미지가 대중들 속에 자리잡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경주 김씨의 분파인 부안김씨(扶安 金氏)는 "금와대왕" 이라 추숭한다.
신라부흥운동설[편집]
신라가 멸망한 뒤 금강산에서 은거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제외하고 마의태자에 관련한 어떤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다만 마의태자가 은거했던 금강산 주변을 중심으로 마의태자와 관련한 민간전승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비로봉 바로 아래에는 마의태자의 무덤이라 전하는 '신라마의태자릉(新羅麻衣太子陵)'이라는 비석이 새겨진 무덤이 있고, 바로 옆에 그가 타고 다니던 용마(龍馬)가 변해 돌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는 용마석(龍馬石)도 있다. 무덤은 둘레 약 10미터, 높이 1.5미터로 보통 무덤보다 조금 크다. 강원도 인제군에는 상남면 옥새바위(마의태자가 옥새를 숨겼다고 전하는 바위), 김부리(金富大王洞) 어귀의 수거너머(마의태자가 수레를 타고 넘었다는 고개) 등 마의태자와 관련된 지명들이 많이 남아 있다. 김부리라는 지명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신라 경순왕(김부대왕)이 살았던 데서 유래한다고 소개되어 있지만 김부리의 대왕각(大王閣)에는 경순왕의 태자라는 김일(金鎰)이라는 인물이 신으로 모셔지고 있으며 대왕각 안의 위패에는 「신라경순대왕태자김공일지신위(新羅敬順大王太子金公鎰之神位)」라고 새겨져 있다(다만 '김일'이라는 인명 자체는 1940년대 이후에야 새로 위패에 추가된 것이다).
그 가운데 흥미로운 것은 마의태자가 단지 은거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고려에 의해 멸망한(실은 자진항복한) 조국 신라의 부활을 위해 부흥운동을 준비했다는 전승이다. 현지 전승에 따르면 마의태자는 혼자 수도를 떠난 것이 아니라 일군의 무리를 이끌고 있었고[1]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맹장군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맹개골이라는 마을이름이나 신라 부흥운동을 위해 군량미를 모아 저장하였다는 '군량리'라는 마을 지명도 남아 있다고 한다. 또한 인제에 유난히 많은 '다무리'라는 지명은 '국권 회복'을 뜻하는 것으로(《삼국사기》에서 이미 '도로 되찾은 땅'이라는 뜻의 '다물'이라는 말이 언급된 예가 있다) 이를 근거로 마의태자가 신라부흥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설이 있다.
강원도 인제와 더불어 마의태자와 관련된 전설이 많이 남아있는 곳은 충주(忠州)로, 마의태자와 그 누이동생 덕주공주가 각각 조성했다는 월악산(月岳山) 자락의 미륵대원(彌勒大院) 터와 덕주사(德住寺)가 있다. 양평의 용문사에는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절에 들러서 짚고 있던 지팡이를 땅에 꽂은 데서 유래했다는 은행나무가 있으며, 홍천에서 마의태자 전승이 남아있는 인제로 넘어가는 길목에 지왕동(왕이 지나간 마을)과 왕터(왕이 넘어간 자리)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이들 마의태자 관련 전승지역을 지난 2000년 답사 취재하고 마의태자의 북행(北行) 루트를 추정한 KBS 역사스페셜 제작팀에서는 2000년 4월 15일에 「신라 최후의 미스테리―마의태자」라는 부제로 방영되었던 『역사스페셜』방송분에서 금강산으로 갔다는 마의태자의 전승이 남아있는 지역이 굳이 경주에서 금강산으로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동해안 교통로가 아닌 내륙에 남아있는 것에서, 경주에서 계립령으로 가서 충주를 지나 물길로 양평으로, 홍천을 거쳐 인제와 한계령을 지나는 마의태자의 북행 루트를 상정한 뒤, 해당 도시들이 신라 시대에는 제2의 수도로 불렸다는 점(충주의 경우), 그리고 외부 세력과 철저하게 차단된 곳(미륵대원 터나 덕주사의 경우)이라는 점을 들어 마의태자가 신라의 주요 거점 가운데서도 천혜의 요새들만을 택해 거치면서 자신과 뜻을 함께할 사람을 규합하려 했던 것이라는 추론을 제기했다.
일단 김부대왕, 즉 경순왕과 연관지어 설명하는 강원도 각지의 전승에 대해, 고려에 항복한 뒤의 경순왕의 행적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三國遺事)》,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등의 문헌에 남아있는데, 휘하 백관과 함께 서라벌을 떠나 개경으로 가서 왕건을 만났고 왕건은 경순왕을 정승(政丞)으로 삼고 대궐 동쪽에 있는 신란궁(新鸞宮)을 저택으로 내려주는 한편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으로 임명하였다고 적고 있다. 해당 지역의 연고자에게 그 지역의 행정을 책임지게 함으로써 지방 출신의 고급 관리를 우대하고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치를 원활하게 하는 것이 사심관 제도의 취지이지만, 이 경우 지방에서 올라온 연고자에게 자신의 연고지 행정을 맡겼다고 해서 지방에 그대로 머무르게 한 것은 아니었다. 경순왕이 개경으로 간 뒤 경주로 돌아왔다는 어떤 기록도 찾을 수 없으며, 경순왕의 무덤도 경주가 아닌 지금의 경기도 연천에 마련되었다. 또한 개경으로 향하는 경순왕의 행렬이 잠시 인제에 머물렀을 가능성을 추정한다고 해도 그 루트에 강원도 내륙인 인제는 포함되지 않는다는[2] 점을 보더라도 경순왕이 인제에 왔을 가능성은 희박하며 김부대왕동이나 대왕각, 그리고 인근의 관련 지명들은 김부대왕이라 불린 경순왕 자체를 가리킨다기 보다 경순왕과 관련된 주변인물을 가리킨다고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이다(경순왕이란 명칭은 사후에 붙여진 것이고 생전에는 경순왕의 이름인 '김부대왕'으로 불렸다는 점에서는 실제 경순왕을 가리키는 명칭일 수도 있다).
강릉 김씨 문중에는 명주의 호장(戶長)으로 김부(金富)라는 인물이 전쟁으로 피폐해진 그 지방의 민심을 보살폈다는 내용의 전승이 있는데 마의태자의 유적으로 알려진 갑둔리 5층 석탑은 김부라는 사람의 제자인 구(仇)라는 사람이 「김부의 수가 오래고 또 (구의) 집안이 길이 보전되기를(金富壽命長存家)」바라는 염원으로 세웠다는 내용을 전하는 탑의 비명(碑銘)이 확인되었고, 여기서 말하는 '김부'도 실은 신라의 김부(즉 김부의 아들인 마의태자)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김부의 부(富)와, 김부대왕각에 모셔진 김일(鎰)에 쓰인 한자는 똑같이 '넉넉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김부를 김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마의태자의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 대왕각에 모셔진 위패의 이름이 정말 마의태자의 본명인지를 말해줄 수 있는 어떤 자료도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추측의 영역을 벗어나지는 못한다. 갑둔리 5층 석탑도, 요(遼) 성종(聖宗)의 연호인 「태평(太平) 16년 병자(1036년)」라는 연호가 탑에서 확인되었고 이것이 탑의 조성시기로 여겨지는데 태평 16년 즉 고려 정종(靖宗) 2년은 마의태자가 살았던 시대보다 100년이나 뒤의 것으로 연대가 서로 맞지 않다. 이러한 지명들은 실제 마의태자라 불린 신라의 왕자와 관련된 유적이라기보다는 거란, 또는 몽골과의 항쟁 과정에서 생겨난 지명이라는 해석이 제기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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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상(朴堤上, 363년~418년 추정)은 신라의 충신이다. 자는 중운(仲雲), 호는 관설당(觀雪堂)·도원(挑園)·석당(石堂) 등이다. 혁거세 거서간의 9세손, 파사이사금의 5세손이며 영해 박씨(寧海朴氏)의 시조이다. 《삼국유사》는 김제상(金堤上)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삽라군(歃羅郡)의 태수직을 수행하였다. 눌지 마립간 즉위 10년(426년)에 왕의 명을 받아, 고구려에 볼모로 있던 눌지 마립간의 동생 복호(卜好)를 구하여 신라로 돌아왔으며, 이어서 야마토에 볼모로 있는 왕자 미사흔을 구하러 건너갔다. 왕자를 구출하여 신라로 보낸 후, 그를 신하로 삼으려는 인교 천황의 설득을 거절하다가 죽었다. 행적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내물왕(奈勿王)과 김제상(金堤上)〉편, 《일본서기》, 《동국통감》, 《문헌비고》 등에서 기록을 찾아볼 수 있으나, 각 기록의 내용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기록[편집]
《삼국유사》[편집]
《징심록 추기》[편집]
김시습이 저술했다는 글로, 진위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부도지 참조)
제상공이 어렸을 때, 한 도인이 공을 보고 이르기를 "이 사람은 견우성(牽牛星)의 화신이니 반드시 제도(濟渡)하는 공이 있으리라"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이름을 '제상'이라고 하였다. 자라자 도인이 또 알리기를, "동촌 김공의 집에 17살 난 처녀가 있으니 곧 직녀성(織女星)(베가)의 화신이므로 공과 더불어 좋은 인연이라"하였다. 그로 인하여 혼인이 이루어졌다. 도인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 두사람은 별의 정기로 이루어진 하늘이 내린 인연이라, 그러므로 빛이 오래도록 없어지지 아니할 것이니, 비록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나 어찌 한이 있으리오."라고 말하였다 하니, 이는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1]
망부석 설화[편집]
망부석(望夫石) 설화는, 일본으로 떠난 박제상을 그리워한 박제상의 부인에 얽힌 설화이다.
《삼국유사》의 〈내물왕(奈勿王)과 김제상(金堤上)〉편의 중반부에서 다음과 같이 전한다.
王旣見寶海, 益思美海一欣一悲, 垂淚而謂左右曰. 如一身有一臂, 一面一眼, 雖得一而亡一, 何敢不痛乎. 時 堤上聞此言, 再拜辭朝而騎馬. 不入家而行, 直至於栗浦之濱, 其妻聞之, 走馬追至栗浦, 見其夫已在舡上矣. 妻呼之切懇, 堤上但搖手而不駐. 왕이 이미 보해(복호)를 만나자, 미해(미사흔)의 생각이 더하여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니, 눈물을 흘리며 좌우 신하들에게 말했다. "마치 한 몸에 팔이 하나인 듯, 한 얼굴에 눈이 하나인 듯, 비록 하나는 얻었으나 하나는 잃었으니, 어찌 감히 괴롭지 아니한 일인가." 그 때에 제상이 그 말을 들으니, 다시 절하고 하직하여 말을 탔다. 집으로 가지 아니하고, 곧바로 율포(栗浦) 물가로 향하니, 그의 처가 이를 듣고, 말달려 율포로 좇아가니, 이미 지아비가 배 위에 올라있었다. 아내가 간절하게 부르나, 제상은 다만 손을 흔들며 떠났다.
같은 편의 후반부에서 다음과 같이 전한다.
初堤上之發去也, 夫人聞之追不及, 及至望德寺門南沙上, 放臥長號. 因名其沙, 曰長沙. 親戚二人, 扶腋將還, 夫人舒脚, 坐不起, 名其地, 曰伐知旨. 久後夫人不勝其慕, 率三娘子上鵄述嶺, 望倭國痛哭而終. 仍爲鵄述神母, 今祠堂存焉. 처음 제상이 떠날 때, 부인이 이를 듣고 좇았으나 미치지 못했으니, 망덕사 문 남쪽 모래사장에 이르러, 누워서는 크게 부르짖었다. 이로 인하여 그 모래사장의 이름을, 장사(長沙)라 이르게 되었다. 두 사람의 친척이 부축하며 돌아오는데, 부인이 다리가 풀려 앉은 채로 일어나지 않았으니, 그 땅의 이름을 벌지지(伐知旨)라 이르게 되었다. 오랜 후에 부인이 사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딸 셋을 데리고 치술령(鵄述嶺)에 올라, 왜국(倭國)을 바라보며 통곡을 하다 생을 마쳤다. 그로 인하여 치술령의 신모(神母)가 되었으니, 지금도 사당이 존재한다.
치술령은 울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상에 있는 바위는 지아비를 그리워하던 바위라고 하여 망부석이라고 부른다. 문헌의 마지막에서 언급된 사당은 인근에 위치한 은을암(隱乙岩)으로, 죽은 아내의 혼이 새가 되어 날아든 곳이라 하여 유래되었다. 망부석과 은을암은 함께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호 『박제상유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신라 박제상의 관련 전설이나 설화에 대해서는 박제상망부석설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저서:
눌지 마립간의 동생 미사흔을 구하러 삼도(三島)로 건너가기 전에 《징심록》(부도지)을 저술하였다고 전해진다.[2]
가족 관계[편집]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그는 박씨라고 하나 일설에는 김씨라는 전승도 있다.
고조부 : 지마 이사금 증대고모 : 내례부인 박씨 - 아달라 이사금의 왕후
증조부 : 박이비(朴伊非)
할아버지: 갈문왕 박아도(朴阿道), 지마 이사금의 손자[3]
아버지: 박물품(朴物品)
부인: 치술공주, 실성마립간의 딸(화랑세기에 따르면 눌지마립간의 후궁가 되었다고 함) 딸: 박씨, 미사흔의 처
아들: 박효원(朴孝元)[4]
아들: 박문량(朴文良, 백결 선생)[5]
딸 : 박아기(朴阿奇)
딸 : 박아영(朴阿榮)
딸 : 박아경(朴阿慶)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