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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도 거울이 있을까
이선구
암흑 속에 갇혔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두 다리 멀쩡한 내가 굴러 떨어지다니. 놈들의 장난이 지나치다 싶었지만 이미 때늦은 후회였다.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게 눈이란 사실을 처음 알았다. 밝은 데서 그토록 총명했던 그것이 깜깜한 데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거기 아무도 없어요? 사고가 났어요! 사람이 죽어간다고요!”
나는 깊은 동굴 바닥에 널브러진 채 고함부터 질렀다. 하지만 메아리만 웅웅 돌아왔다. 어디 다친 데는 없느냐고,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리면 곧 구조해주겠다고, 하는 소리 따윈 일절 들리지 않았다. 인생 경험이 어쩌고, 아르바이트 하는 녀석이 아까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같잖은 소릴 지껄일 때부터 꺼림칙했지만 이건 체험이 아니라 틀림없는 안전사고였다. 지급받은 흰지팡이는 놓쳐버렸고 바로 옆이 천 길 낭떠러지일지 몰라 꿈쩍도 할 수가 없었다. 수십 번도 더 고함을 치고 또 쳐도 목만 아팠지 완전히 적막강산이었다.
긴장된 시간이 자꾸만 흘렀다. 그 자식이 나를 이 꼴로 만들어 놓고 내빼버린 건 아닐까? 의도성을 생각하자 스릴러 영화 몇 장면이 겹쳐지면서 불길한 느낌이 엄습했다. 사이코패스라면 어디선가 숨어서 숨을 죽인 채 낄낄대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럴 경우 나는 꼼짝달싹 못하게 갇힌 희생물일 뿐이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를 공포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등에선 식은땀이 주르륵 주르륵 흘러내렸다. 하지만 놈의 숨 쉬는 소리라든지 슬그머니 움직이는 어떤 미동도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사지가 팽팽한 긴장감으로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완벽하게 고립되었고 놈들이 안전사고를 방치했다는 판단에 신경질이 폭발했다.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은 우선 제자리에서 두 팔로 허공을 마구 휘젓는 일이었다. 만일 옆에 놈이 있었다면 잡히는 즉시 숨통을 끊어놓았을 것이다. 상처 입은 야생동물처럼 나는 마구 구시렁거렸다. 망할 자식! 찢어 쥑일 놈!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놈! 하지만 내뱉은 욕설마다 메아리로 웅웅 돌아오곤 하는 게 마치 내가 내 자신에게 욕설을 퍼붓는 꼴이었다.
놀이기구를 잘못 타다 황천길로 간 사람도 있다는데, 그나마 다행이라고 자위하기엔 길고 긴 절망의 시간이었다. 몇 바퀴를 굴렀는지 허리는 욱신거리고 무르팍이며 깨진 얼굴 부위가 쑥쑥 쑤시는가 싶더니 일순간 피비린내가 코청을 찔렀다.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50년 만에 운 건 메마른 땅에 생수가 터진 격이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눈물주머니가 말라비틀어진 줄로만 알았던 나는 적이 놀랐다. 울음은 나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발원하여 밖으로 크게 퍼져 나오는 듯 했다.
아아아악! 나는 널브러진 채로 시악을 썼다. 하지만 메아리가 또 다시 웅웅 돌아와 어김없이 귀를 후볐다. 세상에 믿을 놈이 없다더니. 안내한답시고 손을 잡아끌었고 눈가리개가 벗겨지지 않도록 나를 조심조심 다룬 놈을 믿은 게 이 꼴이 되어버렸다.
“대단하십니다. 오늘 큰 비용을 부담하고 ‘장님 체험행사’에 참여하신 용기에 칭찬을 드립니다. 이 길은 천 길 낭떠러지가 숨어 있는 길이죠. 위험을 무릅쓴 선생님의 결단력이 정말 멋있으십니다. 물론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떨어져도 즉각 구조될 테니까 두려움은 날려버리십시오. 이 혹독한 불경기를 걷는 인생길이라고 생각하시면 일생일대의 아주 색다른 체험이 되실 겁니다.”
낮도깨비 같은 놈의 이빨 까는 소리를 들으면서 내가 한 걸음 한 걸음 깜깜한 천연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초장에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을 때도 도우미 녀석이 후닥닥 부축하며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선생님, 조금 놀라셨죠? 하지만 아무런 위험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삶이란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겁을 내고 움츠러들지만 결국엔 별 것도 아닌 것, 말입니다. 아까 드린 지팡이를 꽉 잡는 것 잊지 마십시오. 참, 지금이라도 체험을 취소하시면 원래 자리로 가실 수 있습니다. 물론 환불도 해드리죠.”
거기까지였다. 10분이면 끝날 거란 도우미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안으로,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갔다.
“이제 다 울었소? 분노로 가득 찬 사람이군!”
갑작스런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그 깜깜한 공간에 나만 있는 게 아니었다.
“간 떨어질 뻔했네. 누구시죠? 너 도우미지?”
목소리의 주인공은 쉬 대답하지 않았다. 사람을 만났다는 것이 오히려 공포심을 증폭시켰다. 등골이 오싹한 순간 그 목소리가 다시 말했다.
“울음도 가슴속의 분노를 표출시키는 것 아니오?”
틀림없는 남자의 음성, 나이가 듬직한 목소리가 분명했다. 그제야 공포가 누그러졌다. 누군가 가까이 있다는 사실에 일단은 희망이 생겼다.
“도우미라면 진즉 말하지, 왜 이제야 인기척을 하는 거요?”
화가 치밀어 벼락같이 소릴 질렀다.
“허허. 당신의 분노가 어디까진지 보고 싶었소. 그리고 인내심까지도.”
진즉 쉬어버린 내 목소리와는 달리 그의 음성은 카랑카랑하기만 했다.
“비싼 참가비를 받은 행사가 이렇게 부상 사고까지 냈다는 걸 고발하고야 말겠어. 당신들 각오하라구! 이런 당찮은 곳에 돈을 퍼주고 오다니, 내가 미쳤지!”
소락떼기를 또 질렀다. 나는 아마도 그가 극적인 효과를 내기 위해서 도우미 신분을 숨긴 채 장난을 치는 것이라 믿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말대꾸에 기대가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나도 돈을 내고 온 사람이오. 당신 말대로 나도 미쳤나보오.”
희망이 물거품이 되자 이제는 그의 하오체 말투가 역겨웠다. 귓바퀴에 쥐가 날듯이 거슬려 내가 욕설을 내뱉었다.
“시러베아들 놈들!”
“당신은 여전히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소.”
영감이 높낮이 없는 소리로 다시 지적했다. 화를 내봤자 소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덫에 친 멧돼지마냥 나는 거친 숨을 푹푹 내쉬었다.
“이봐, 꼰대 아저씨! 나이가 몇인데 훈장 선생처럼 말씀하시나?”
“제 앞길도 건사하지 못하는 주제에, 묻기는! 망팔의 나이라오. 됐소?”
가는 방망이에 오는 홍두깨였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아도 유분수지, 이제 겨우 쉰을 넘긴 내 나이를 그 자리에서 들먹일 수는 없었다. 개구리 뻗듯 돌투성이 바닥에 여전히 드러누운 채로 있던 내가 그제야 상체를 반듯이 세우기 시작했다.
세상에는 밟아선 안 되는 자리가 있음이 번뜩 떠올랐다. 30년 전 강원도 골짜기에서였다. 철책을 마주보는 전방 지오피GOP(전초기지)에서 수색을 나갈 때마다 행여 지뢰를 밟을 새라 얼마나 신경을 곤두세웠던가. 그때만 해도 장마 끝에는 지뢰가 원래의 매립지에서 이탈하여 한참 먼 데로 떠내려가곤 했다. 선임하사가 새까만 위장 크림으로 떡칠한 얼굴 한복판에서 매서운 눈초리를 번득였다.
“죽고 싶은 놈은 아무 데나 밟아도 돼!”
저승사자에게 끌려가지 않으려고 우리 소대원들은 앞 사람이 짚은 발자국을 그대로 밟으며 느릿느릿 한 걸음씩 전진했다. 등골이 바짝바짝 곤두서는 수색조의 긴장감, 그것이 결국 추석 전날 사고로 이어졌다. 펑! 앞산을 기어오르던 1소대 쪽에서 들려온 굉음에 우리 2소대원 모두 기절초풍했다. 소대장은 시피CP(지휘부)에 무전연락을 취했고 즉시 우리 소대가 투입되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다친 전우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얼이 빠져있던 1소대원들을 대피시키고 우린 즉시 포위망을 구성했다. 풀숲을 헤치던 내가 하필 현장을 가장 먼저 발견했다. 군용 플래시 불빛 아래 드러난 것은 이백 근 남짓한 멧돼지였다. 그놈은 앞다리 하나는 날아가고 다른 하나는 부러진 채 도망도 못치고 나를 물어뜯을 듯 응그리며 황소숨만 거푸 내쉬었다. 상처 입은 동물의 눈동자, 그것이 나를 노려보았다. 다음날 중추절 체육 행사 중에 나는 연병장 한복판에서 졸도를 하고 말았다. 의무대에 입실을 했고 마주 보이는 천정에서도 씩씩거리는 멧돼지의 눈빛이 어른거렸다.
오늘, 밟아서는 안 될 자리를 밟은 걸까? 그렇다면 잊혀진 그 금기를 30년 만에 다시 범해서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는 추리가 가능했다. 바로 그때였다. 다행스럽게도 마침 손끝에 바위 같은 것이 만져져 우선은 등을 좀 기대고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손등으로 코를 훔치는데 엉긴 피가 묻어나며 다시금 피 냄새가 진동했다. 혀를 내밀어 터진 입술을 어루만지자 얼굴과 몸 여기저기가 합창을 하듯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에이 시팔!”
“당신의 분노는 자신을 향한 분노 같소.”
재수가 옴이 붙었나. 지랄 같은 늙은이를 만나 기분이 완전히 잡쳐버렸다. 분노면 분노지 자신을 향하고 말고가 어디 있단 말인가.
“왜 매번 콩 놔라 팥 놔라야?”
쏘아붙이면서 어둠 속을 꼴아보았다. 하지만 즉각 튀어나온 노인의 대꾸가 나를 주저앉혔다.
“어둠 속에도 거울이 있다는 걸 모르나? 이 동굴은 소리가 잘 울리도록 되어 있소. 내뱉은 말이 금세 자신에게 돌아온단 말이오.”
어쩐지 욕설이 매번 내게로 돌아오는 게 이상했다. 칠흑 같은 데서 무엇을 분간하기란 애당초 불가능했지만 나는 노인 쪽을 향해 오감을 집중했다. 제주도나 충북의 동굴과는 달리 요상 망측하게도 이곳에선 단 한 줄기 빛도 없었다. 나는 일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이런 완벽한 어둠에 갇히긴 처음입니다.”
“정말 그럴까?”
노인의 삐딱한 말발에 또 가로막히고 말았다. 그의 말에 최면이라도 걸린 듯 어릴 적 일이 떠올랐다. 그때 놀이터에 버려진 냉장고에 갇혔을 때도 이렇게 깜깜했었다. 술래잡기를 하고 있었고, 냉장고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엄마 말을 깜박했다. 완벽하게 숨을 수 있는 기가 막힌 장소를 찾은 기쁨도 잠시, 도무지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아무리 밀어도 문은 열리지 않았고, 발로 마구 차고 쿵쾅거려도 아무도 나를 꺼내주지 않았다.
“어릴 때 술래잡기를 하면서 어둠 속에 몸을 완전히 숨긴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어요.”
“거봐. 도움의 손길로만 나올 수 있는, 그게 진짜 어둠이라오.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때가······.”
알쏭달쏭한 그의 말을 들을 때마다 복장에서 분란이 일어났다. 분란은 쉬 가라앉지 않고 좌충우돌 제멋대로였다. 노인이 태연하게 물었다.
“왜 119에 전활 하지 않고 욕설만 퍼붓나?”
핸드폰은 동굴에 들어오기 전 안내원이 보호자나 매표소에 맡기라고 해서 무심코 아내에게 맡긴 터다.
“영감님,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핸드폰이 있었다면 진즉 119에 전화했지, 이런 비참한 꼬라지로 처박혀 있겠냐구요!”
내가 성질을 부리며 발을 내지르자 빈 깡통 하나가 여지없이 나뒹굴었다. 텅, 통, 통, 덜그럭!
“실컷 욕하고 실컷 차버려!”
“영감님, 지금 남 약 올리는 거요, 뭐요?”
“그것만이 자네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이네. 그 깡통, 아깐 내가 차낸 것일세. 그게 지금 도로 내게 돌아왔어.”
노인의 목소리는 여전히 높낮이가 없었다. 인생을 많이 살아서일까. 이런 상황에서 왜 화를 내지 않는 걸까. 노인은 내게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깡통 덕분에 우린 겨우 몇 발짝 떨어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영감님과 내가 아주 가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아주 가까이 있다네.”
노인의 철학이 내게서 무엇인가를 하나둘씩 앗아가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나도 내면에서 자꾸만 끓어오르는 분노에 품위 있게 저항하고 싶었다. 얼른 생각해낸 게 노인과 나의 공통점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생각을 하나둘 정리하기 시작하자 함정에 빠졌다는 점과 핸드폰이 없다는 점, 그리고 같은 깡통을 찼다는 점이 먼저 떠올랐다. 순간 번쩍 스치는 게 있었다. 주머니 어디쯤엔가 있을 라이터였다. 나는 후닥닥 겉옷을 더듬었다. 아! 앙증맞은 그것이 겉에서 만져진 순간 나도 모르게 입이 찢어질 뻔했다. 오백 원짜리 라이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행복할 수가 있다니. 나는 가슴이 부풀어 잘난 체하고 싶어졌다.
“영감님, 혹시 라이터 있으세요?”
“선생은 있나?”
나는 대답대신 실물을 보여줄 셈으로 라이터를 꺼내들었다. 이제 우리가 탈출하는 일은 보장을 받은 거나 다름없었다.
“당연히 가지고 있죠! 하하, 이제 라이터로 불을 비추면 지옥 같은 이곳이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여길 빠져 나가야 할지 알 것 같아요. 잠시만 기다리십쇼.”
재수가 더러운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어진다고, 나는 그만 라이터를 놓치고 말았다. 아까 코피를 훔칠 때 손에 묻은 코푸렁이 때문이었다. 탁, 덜거럭 탁 탁! 그 소중한 보물은 속절없이 손아귀를 빠져나가 근처에 처박혔다. 나는 소경이 동전을 찾듯 허겁지겁 바닥의 돌밭을 더듬기 시작했다. 일이 꼬이려고 그랬는지 라이터가 바닥에 떨어져 구르는 소리조차 메아리로 돌아왔기 때문에 위치를 점찍는 건 애당초 불가능했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또 흘러내렸다. 그걸 도로 찾는 일이 점차 어려워지고 있었다. 담뱃불을 붙여본 사람은 안다. 첫 마찰에서 실패하면 여러 번 시도를 해야 한다는 걸. 아까 첫 마찰에서 조그만 부싯돌 섬광만 있었더라도 그 짧은 순간에 우린 서로의 위치라든지 동굴의 모양이라든지 뭐든 눈에 담을 수 있었을 텐데······. 손바닥이 벗겨지고 쓰라릴 때에야 나는 돌바닥 헤집는 짓을 포기했다. 그렇게 믿었던 희망이 허무하게 사라져버린 데서 나는 지독하게 절망했다.
“젊은이, 더 분노하지 마오. 자신만 상하게 할 뿐이오.”
“이런 시팔. 지금 화 안 나게 생겼어요? 유일한 기회를 놓쳐버렸는데!”
억눌렸던 욕설이 또 튀어나왔다. 노인의 말처럼 내가 정말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는지도 몰랐다. 생판 처음 본 도우미란 놈을 너무 쉽게 믿었다는 사실에 골이 났고, 내가 자신을 구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점에 역정이 났을 것이다. 아마도 화내는 일은 내 삶의 습관이었다. 그때 노인이 끼어들었다.
“나도 사실 라이터를 놓쳐버렸지. 선생이 오기 전에 말이오.”
옆에 있다면 한 대 갈기고 싶었다. 그림자놀이를 하는 것도 아니고 장난 민화투도 분수가 있지, 아무리 나이가 많기로서니 말끝마다 얄미운 하오체에 남의 심사를 달챙이로 박박 긁어대는 언사가 나의 오장을 뒤집었다. 그래도 참기로 했다. 나와 함께 나락에 떨어진 동료로서 의지할 유일한 사람이고, 품위를 찾기 위해 하나둘 공통점을 찾아가는 중이니까. 하여튼 라이터를 떨어뜨렸다는, 또 다른 공통점이 추가되었다. 적어도 우린 담배쟁이었다. 담배를 피울 줄 안다는 건 인생을 돌아볼 줄 아는 것이라고 오래 믿어온 나는 노인에게 진한 동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럴 때 한 대 쭈욱 빨면 뭔가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을까요?”
금연으로 멍해진 나머지 생각 없이 튀어나온 말이었다. 길 것 같은 영감의 흡연 경력에 비하면 내 애연의 역사란 게 일천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노인이 다시 간섭했다.
“그 해로운 걸 이럴 때 한번 참아보지.”
나는 대꾸를 포기하고 마지막으로 담배를 피운 게 언제였나,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행사장에서 줄을 설 때였고 너끈히 50m는 될 장사진에서 빠져나와 후미진 곳에서였다. 제 발로 어두운 동굴에 들어가는 장님 체험을 하고 싶은 사람이 그렇게 많다는 데 놀랐고 두억시니처럼 속에서 마구 아우성치는 흡연욕구를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대신 줄을 선 아내가 자꾸만 내 쪽을 흘끔거려 제대로 피우지도 못 했다.
아내가 카페테리아 파라솔에서 기다리기로 한 사실이 나를 슬프게 했다. 차라리 이 고통도 체험 코스의 한 부분이라고 믿고 싶었다. 특별히 선택된 사람 몇으로 하여금 이런 극한 체험을 하게 한 다음 푸짐한 상품을 안겨주는 프로그램이었으면, 했다. 나는 남극대륙이나 케이투K2 봉에서 낙오되는 상상으로 위안을 찾아볼까도 했다.
“쌍. 우리가 짜식들한테 당한 겁니다. 완전히 둘렸단 이야기죠.”
나도 몰래 넋두리가 터져 나오는데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얼추 두 시간은 지났을 텐데, 아낸 왜 날 찾지 않는 걸까? 어떻게 이 긴 시간 동안 신고도 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온갖 생각들이 목을 자꾸 조여 왔다. 아내가 커피를 마시다가 우연히 몇 십 년 만에 만난 학창시절의 짝꿍과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깜박했을지 모른다거나, 지루함을 ‘땜빵’하러 근방에 산책을 나섰다가 이 범죄조직에 납치되었을지 모른다는 생각 따위였다.
“영감님, 오늘 누구랑 오셨죠?”
“아무하고도.”
예감이 적중했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한 대꾸로 보아 그러고도 남을 위인 같았다. 혼자 살면서 혼자 밥 먹고, 혼자 TV 보고, 혼자 잠자는 사람······. 어느 자리에서건 잘난 체를 하는 그런 영감쟁이가 세상엔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저는 마누라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입구 가까운 커피숍에서.”
그 말을 하는데 이상하게도 슬픔이 밀려와 그만 말끝을 흐렸다.
“내게도 그런 행복이 있었지. 누군가를 기다리고 누군가가 기다려 주는 사람들만 느끼는 행복. 그걸 잃었을 땐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오지. 하지만 생각해 보오. 최종적으론 누구나 이별을 하고 만다는 걸. 본능적으로 우린 항상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지만 실은 아무도 기다린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 허무해지지. 그게 인간의 실존이요.”
갑자기 울컥, 욕지기가 일더니 뱃속의 응어리가 역류했다. 웩, 웩- 그 자리에 쏟아낸 토사물에서 아내와 함께 점심으로 먹은 생선탕의 비린내가 풀풀 풍겨왔다. 어디서든 빛이 한 줄기만이라도 들어온다면 살 것 같았다. 뱃속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영감께 말을 붙였다.
“아주머니가 안 계신가 보죠?”
“세상 뜬지 7년 되었지. 나는 드넓은 세상을 마구 휘젓고 젊음을 맘껏 누리면서 시행착오를 많이 한 사람이야. 아내가 말없이 진득하게 기다려 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어느 날 대취하여 실족을 했는데 내가 쓰레기 더미에 앉아있더군. 그때 뭔가 번쩍했어. 아내에게 잘해주어야겠단 생각이 들어 벌떡 일어나 정신없이 달려갔지. 뒤늦게 행복을 찾았는데 그것도 잠시, 아낸 영영 떠나고 말았네. 날 기다리다 병이 든 거야. 이런 비참한 일도 있나? 사랑을 줄 수 있을 때 하필 그 사랑을 잃어버린 걸세.”
“거참! 그래서 어떻게 되셨죠?”
나조차 가슴이 아프고 조바심이 났다.
“천신만고 끝에 빛을 찾았는데 그 순간 어둠의 나락에 떨어진 꼴이 아닌가. 그래서 울부짖었어. 내 운명에 대해서, 내 삶에 대해서 고함을 지르며 반항했어. 그때부터 마구 떠돌아 다녔어. 발길 가는 대로 걷고 또 걸었지.”
나도 숙연해져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는 아무나 붙들고 자신의 운명을 물었다고 독백했다. 자신의 삶이 빛에 속한 것인지, 어둠에 속한 것인지, 그것을 알고 싶다고. 어둠을 청산한 순간 가혹한 심판을 받아 꼭대기에서 굴러버린 이유를 기어이 찾아내고 싶었다고, 그는 지난 7년 동안 그렇게 운명을 비관하면서 굶주린 당나귀처럼 살아왔다고. 그런데 마침 이 ‘장님 체험행사’ 플래카드가 눈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하여튼 영감님과 내가 어둠의 나락에 떨어진 것만은 분명합니다.”
“빛과 어둠은 공존하는 것. 자넨 굴러 떨어졌을 때 운명에 분노하고 반항을 했지만 나는 받아들였어. 오히려 내가 원했던 곳이란 점에서 기뻐했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거울을 보듯 나는 과거를 비춰보았네. 그렇게 해서 내가 빛을 향해 열망하고 있다는 걸 다시 확인했어. 빛은 어둠 속에서만 가장 확실히 가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가끔씩 회가 동할 때면 그는 어두운 곳을 찾아 나서곤 했다. 어둠에 빠졌다가 다시 빛을 보아야만 카타르시스에 이르는 습관성은 마약과도 같이 매번 그를 유혹했다. 단양의 동굴, 농촌 폐가의 벽장, 은수자가 떠나간 산골짝 바위틈, 심지어 공동묘지까지! 그곳에서 만나는 새벽의 여명은 그에게 무한한 신비와 기쁨을 주었다. 그게 점차 중독이 되면서 그는 더욱 극적인 체험을 소원했고 완벽한 어둠에 갇혀 허둥대는 질곡의 순간을 연출하고 싶어졌다. 극적으로 만난 빛이 극도의 환희를 안겨줄 거라 기대하면서.
“맙소사! 그게 바로 중독증입니다. 모르셨어요?”
바로 그때 반대쪽에서 와장창 소리가 났다. 웬 둔탁한 물체가 데굴데굴 구르며 떨어졌다. 어이쿠, 하는 사람의 비명소리로 보아 새로운 낙오자가 도착한 것 같았다. 이 불행한 이웃도 처음 한 동안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혹시 크게 다쳤거나 죽은 건 아닐까 가슴이 철렁했다. 정말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마냥 기다릴 수 없어 내가 큰 소리로 물었다.
“여보세요! 어디 다치지 않았나요?”
“몇 군데 벗겨진 것 같습니다만, 댁들은 괜찮나요?”
대꾸가 희한했다. 나 말고 제삼자가 있다는 걸 어찌 알았을까. 노인이 나섰다.
“아무 소리도 안 나서 행여나, 하고 걱정했다오. 그런데 우리가 둘이란 걸 어떻게 알았소?”
“다 아는 수가 있지요. 제 특기에 해당합니다만. 정말 선생님들은 괜찮습니까?”
내가 어둠을 향해 대답했다.
“몇 군데 다치고 코피가 터졌지만 뼈는 괜찮은 것 같아요. 하여간 반갑수다. 난 김명철이란 사람입니다. 우리가 사고를 당한 것이 틀림없죠?”
“나는 주기만입니다. 이건 당연히 안전사고죠! 언제부터 여기 계셨어요? 혹시 구조를 요청해봤나요?”
“죽어라 고함을 쳐도 감감무소식이오. 하필 핸드폰도 밖에 놓고 왔고. 마누라도 날 찾지 않으니 완벽한 고립이 아니겠어요? 혹시 핸드폰 가지고 있음, 어서 119에 전화하시죠.”
하지만 주기만이 곧바로 사과했다.
“미안해서 어쩌죠? 난 핸드폰이 없어요. 오래 전엔 보기 좋게 목에 걸고 다녔는데 앞을 못 보는 사람이란 걸 알고 누군가 훔쳐가 버렸어요. 그 후론 마누라가 더 이상 사주질 않더군요.”
“당신, 장님이오?”
노인이 외마디소릴 지르고 나도 놀라 입조차 벙긋하지 못했다. 주기만의 입에서 흘러나온 마누라란 단어 때문에 내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도대체 아낸 무엇 하느라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걸까? 아낼 탓하고 있는 사이 주기만이 입을 열었다.
“영감님, 제가 아까 처박혔을 때 맨 먼저 떠오른 게 뭔지 아십니까? 마누라가 날 유기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천박하기 짝이 없군.”
노인이 시큰둥하게 토를 달았다.
“비싼 입장권을 사주고 조심해서 갔다 오라는 말까지 하면서 내 등을 토닥였는데. 20년이나 함께 살아 온 아내가 고무신을 거꾸로······, 그럴 리 없겠죠?”
주기만이 소리 죽여 울었다. 깜깜한 데서 전달되는 그의 흐느끼는 소리가 그렇게 처연할 수가 없었다. 천덕꾸러기였을지 모를 그의 삶이 그려졌다. 돈을 보고 살아 주었다면 그의 아내는 결혼생활 내내 많이 참았을 것이다. 만일 상속 받은 재산도 다 까먹어 빈껍데기만 남은 처지라면, 더 이상 무엇을 바라고 그의 곁에 있어줄까. 말마따나 소경 남편을 깜깜한 동굴에 처넣은 게 유기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연민으로 인해 가슴이 쑥쑥 아파왔다.
“마누라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놈들이 처울긴!”
나도 찔끔거린 모양이었다. 노인의 질타가 창피했지만 어찌 보면 장님과 내가 지금 인생의 낭떠러지에서 떨어진 꼴이나 진배없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돌발 상황의 이유는 도저히 모르겠고 그 냉혹한 결과 앞에 내 자신이 불쌍한 모습으로 서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러면 나의 분노는 도대체 무엇을 향한 분노인가? 노인의 말처럼 울음이 분노의 표출이라면, 내 복장에, 아니면 뼛속에, 오랜 세월 갇혀있던 무엇이 분노했다는 말인가?
“노인장, 벌써 열 번도 더 구조되고 남을 시간이 흘렀습니다.”
“말마다 날을 세우는 꼬락서니하고는! 나도 실은 유기되었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가?”
“그래요. 이 칠흑 같은 어둠에 갇힌 채 공포의 시간이 자꾸만 흘러가는데, 마누라가 나서지 않은 게 날 포기해버린 것이 아니면 뭡니까?”
“마누라쟁이들을 탓하기에 앞서 자기 탓부터 해봐.”
쯧쯧, 혀를 찬 노인이 갑자기 깡통을 걷어찼다. 텅, 통, 통, 덜그럭! 깡통조차 반항하듯 소음과 메아리를 내뱉고는 주기만 앞에 떨어졌다. 하지만 주기만은 그것을 되차는 대신 조용히 집어 옆에 세웠다. 깡통이 조용해지자 세 사람도 모두 조용해졌다.
“나야 이젠 늙어 그렇지만,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게 있다면 바로 사람의 이중성이네. 신사인양 하는 태도에 숨은 야비한 모습 말이야. 친절한 손에는 숨겨진 비수가 있을 수 있고, 따뜻한 말 뒤에는 약탈의 욕망이 도사리고 있지. ‘장님 체험’이라니, 이 얼마나 배부른 환상인가! 남을 이해한답시고 체험에 나선 것부터가 교만이 아니라면 무엇이라고 해석을 해야 하나? 그러니 자신을 먼저 알아야하는 게 순서가 아닐까?”
“어르신은 미쳤군요. 무슨 말씀을 그리 거칠게 하십니까?”
속이 뒤틀린 내가 덤벼든 순간 장님이 끼어들었다.
“다툴 게 아니라, 어르신 존함이나 알려주십시오. 이것도 인연이고 뭔가 심오한 것이 숨어있음에 틀림없어요.”
“나광득,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이름이지.”
“혹시 몇 년 전에 신문에 났던 분 아니세요?”
“앞도 못 보는 사람이 언제 신문을 읽었어?”
“마누라가 매일 아침 신문을 읽어줍니다. 그러니 저는 마누라를 잃으면 안 됩니다. 선생님께선 혹시 태백 탄광 매몰사고 때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신?”
“그래. 바로 맞혔네. 작년이었지. 속이 뜨거워지더니 갑자기 눈이 훽까닥 돌아서 어둠을 찾아 나섰어. 폐광이었고 은퇴한 50대 광부를 하나 사서 함께 들어갔지. 산소통까지 짊어지고.”
“일종의 출애굽 사건이었군요. 의도적으로 기획한······. 쯧쯧.”
노인은 바로 나의 은사님이셨다. 주기만이 혀를 끌끌 차는 동안 나는 서너 차례나 전율했다. 자기 최면에 걸려 이상한 고백을 한 이 분이 광명고등학교 나광득 선생님이시라니. 졸업 30주년 행사 이후로 연락이 영영 끊긴 나광득 선생님의 소식이 태백의 폐광에서 울려 퍼졌을 때 정말로 동창회가 발칵 뒤집혔었다. 당시 신문에 이렇게 일면을 장식했다.
암흑을 뚫고 기적적으로 생환하다!
대서특필만큼이나 교사 시절 강의법도 기이했다. 수업시간 내내 독단과 파격으로 일관했으니, 오죽하면 별명이 나폴레옹이었을까. 아들을 따라 미국에 이민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던 선생님이 광산에서 구출되는 장면은 한동안 세간의 화제였다. 나는 기억력을 총동원하여 그때의 기사를 떠올렸다. 은퇴한 광부 둘이서 어려웠던 시절 자신들이 일했던 폐광 갱도에 들어갔다가 뜻하지 않은 매몰사고를 당한 것이라며 기사에서 추켜세웠다. 우리나라가 오이시디OECD에 가입도 하고 세계 10위 경제대국을 이룩한 것은 바로 이런 산업역군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침을 튀기며 미화시켰다. 어쨌든 내가 기억하는 뉴스는 그랬다. 하지만 그런 쇼가 세상에 어디 그것 하나뿐이랴. 주기만도 나도 나광득 선생님의 인생편력에 주눅이 들어 놀란 자라새끼 마냥 잔뜩 움츠렸다. 나는 난생 처음 기도를 했다. 은사님을 이런 데서 만나지 않아도 좋으니 제발 이 험한 체험에서 어서 빨리 벗어나게 해달라고. 선생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놈들은 날 전리품 다루듯 했어. 나를 담요에 싸서 앰뷸런스에 태우더군. 눈치 챈 나도 조금은 쇼를 했어. 기자들이 라이트를 내 얼굴에 비추며 사진을 찍어대더니 대문짝만 한 사진이 다음날 신문 1면을 장식했어. 내가 보아도 치켜 뜬 내 눈초리가 야생동물처럼 매섭고 생생하더군.”
순간 멧돼지의 날카로운 눈이 또 나타났다. 이 고립된 어둠 속까지 따라온 그놈의 끈덕진 시선을 도무지 피할 수가 없었다. 내가 그놈의 멱을 따버리든지, 아니면 그놈이 나를 떠받아 황천길로 보내든지 해야 끝장이 날 것만 같았다.
밟으면 안 되는 자리를 30년 만에 밟은 대가치곤 너무나 혹독한 이곳에서 나폴레옹 은사님을 만난 것은 무슨 의미일까? 내 쉰 목소리가 폭발하고 말았다.
“아, 지금 이건 선생님이 소원한 사고였군요! 우린 그저 들러리를 선 꼴이구요.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는 우리를 왜 이 일에 끌어들이셨습니까?”
“그 무슨 꼴같잖은 소릴! 나도 헷갈리는 판에 속단하지 말라구.”
“아닐 겁니다. 선생님, 세상엔 의도한 대로 상황을 끌고 가는 사람들이 있어요. 정신세계가 독특한 소수의 사람들 말입니다. 혹시 나폴레옹 선생님이 그런 분 아니신가요?”
내가 항의하자 은사님은 딴소리를 했다.
“무시기 소리야? 우린 모두 불행한 사람들이고 희망에 목말라 있는데. 판도라 상자에서 마지막까지 남은 게 바로 희망이 아니었나? 그리고 자넨 내 제자임에 틀림없어. 내가 나폴레옹임을 아는 사람이라면 특히나.”
나는 밝은 곳에서 수인사하려던 당초의 생각을 바꾸었다.
“인사가 좀 늦었습니다. 광명고등학교 10회 김명철입니다.”
“10회 김명철? 아, 수업시간에 종종 애먼 생각에 잠겨 창밖 먼 곳을 바라보곤 했었지?”
선생님은 나를 너무도 정확히 기억하고 계셨다.
“아, 아, 예. 아마도 제가 그땐······.”
“철학자가 꿈을 잃으면 욕쟁이가 되나? 세월만 무심하구먼.”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우린 서로 기이한 인연이야.”
대화가 끊어졌고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침묵으로 일관된 몇 십분 동안 정말 아무도 우릴 찾지 않았다. 완벽한 어둠에 갇혔다는 사실이 두렵고 무서웠다.
주기만이 체념한 듯 시를 외우기 시작했다.
나는 홀로 길을 가네.
돌투성이 길은 안개 속에서 어렴풋이 빛나고,
사막의 밤은 적막하여 신의 목소리마저 들릴 듯한데,
별들은 다른 별들에게 말을 거네.
무엇이 내게 그리 힘들고 고통스러운가.
나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내가 후회할 만한 것이 있던가.
나는 이미 삶에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며,
과거에 한 점 후회도 없네.
그저 자유와 평화를 찾아 다 잊고 잠들고 싶을 뿐.
(러시아 민요)
“싯귀마다 외로움이 너무 많이 묻어나는군!”
은사님의 논평에 주기만이 대들었다.
“앞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 채 발을 내딛는 기분, 그 모험을 아세요? 매순간순간 생사의 경계선에서 오들오들 떠는 심정을 이해나 하시냐구요!”
그가 시에서처럼 정말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지, 정말 후회가 없는지 궁금했다.
“그걸 삼목 형벌이라고 생각하진 말게. 축복일지도 모르니까.”
은사님이 제안하자 주기만도 이상스런 대답을 했다.
“오랜 세월 저는 제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연습을 해왔습니다. 불구의 몸뚱이에 갇혀버린 자유의지를 해방시키는 훈련이었죠. 매일매일 저는 새장에서 새를 껴내어 푸른 하늘에 날려 보내는 연습을 해왔습니다.”
“눈 먼 사람치고 범상한 사람 없다더니, 자네야말로 눈은 잃었어도 빛까지 잃진 않았구먼! 오, 하느님. 드디어 내가 큰 철학을 만났네!”
“그래서 손에 쥔 줄을 이 구렁에서 놔버려 드디어 제가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줄이라니?”
“마누라죠. 어쩌면 이곳에 기어들어온 것도 제가 선택한 것 같습니다. 아까 한동안은 마누라가 날 밀어 넣었다고 원망했죠. 하지만 이건 내가 선택한 길임에 틀림없어요. 내가 줄을 놓았으니 이젠 마누라도 자유로워졌을 겁니다.”
그의 처절한 말이 내 가슴에 울렸다. 그건 내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만일 아내가 내심 그걸 소원했다면 나는 여태껏 무엇을 인식하며 살아온 걸까. 순간 은사님이 나무랐다.
“왜 그 따위 말을 하나? 멋진 철학이 막판에 샛길로 빠져버렸어.”
“마누란 아마도 날 결코 찾지 않을 겁니다.”
내가 주기만의 말에 공감한 순간 그 멧돼지가 날카로운 주둥이로 내 옆구리를 들이받았다. 별안간 엄습한 통증에 나는 숨이 막혀 악 소리도 거의 내지 못 했다.
“자네들은 그걸 바라나? 그건 대단히 위험한 사상이네! 여자는 그 끈을 잡고 있을 때 비로소 자유를 느끼는 경우가 많거든. 내가 고통스러운 건 마누라쟁이에게 그 끈을 들려주고 싶어도 너무 늦어버린 때문일세. 아둔한 자들이여, 정말로 마누라들이 찾지 않는다고 하자. 어쩔 건가? 영영 이대로 암흑에 흡수되어버릴 건가, 아니면 자네들이 직접 나서서 마누라를 찾아갈 건가?”
은사님의 쩌렁쩌렁한 고함에 정신이 번쩍 들면서 멧돼지도 사라지고 옆구리 통증도 사라져버렸다. 하도 신기해서 벌떡 일어나 허공에 손을 저어보았다. 주기만도 일어섰는지 지팡이 짚는 소리가 들렸다. 찾아나서야 한다는 말이 우리 둘에게 힘을 주었다. 그것은 메마른 땅에 떨어지는 단비였다. 하지만 어둠에 막혀 다시금 멈칫거릴 때 주기만이 지팡이로 바닥을 세게 두드렸다. 탁 탁 탁, 세 차례 연거푸 울린 그 소리는 판사의 의사봉처럼 어둠 속에서 거룩하게 메아리쳤다. 그의 용기 충천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두 분 다 날 따라 오십시오. 빛을 찾으러 갑시다. 아니 마누라를 찾으러!”
“젠장, 형씬 앞이 안 보이는 사람이잖아?”
“형씨도, 지금 누가 장님이오? 사실인즉 여기선 나만이 나갈 수가 있소. 이 지팡이와 청력, 발끝의 촉감으로 말이오. 원래 이것들이 내 눈이 아닌가요? 그 점에서 선생들과는 다르죠. 마누라가 날 버렸다는 절망감으로 포기할 뻔한 이 감각들을 다시 이용하면 되오. 어서 날 따르시오!”
주기만이 당당하게 앞장을 섰다.
하하하하. 하하하하. 나광득 선생님이 크게 웃더니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드디어 자신들의 길을 찾았군. 김명철, 자네한테서 반항과 욕설을 빼면 뭐가 남을까? 그리고 주기만, 자네는 나가걸랑 마누라한테 큰 절을 올리게. 우리 모두를 구했으니 큰 절로도 부족하겠지만. 자, 출발하자구! 아까 자네들 울음이 인상적이었어. 중년의 남정네가 어느 때 우는지 내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네. 자 가세!”
나도 한 발짝 내짚으며 화답했다.
“은사님, 왜 어둠이 존재하는지 이젠 알 것 같습니다. 어둠 속에 있을 때에야 비로소 뭔가 깨닫기 때문이겠죠? 거기 숨은 거울에 자기를 비춰본다든가······.”
“그딴 위험한 사상은 나가는 즉시 잊어버려!”
나광득 선생님이 즉각 내치셨다. 눈먼 주기만이 지팡이로 더듬거리며 맨 앞에 걷고, 다음엔 그의 옷자락을 부여잡은 나광득 선생님이, 맨 끝에선 은사님의 다른 손을 잡은 내가 발걸음을 힘차게 내딛었다. 엉덩이가 들썩이며 어깨춤이 저절로 추어졌다. @
이선구 李瑄九
전주 출생. 대학 시절 단편소설 ‘동역자’로 가톨릭大 성의문화상 수상.
2006년 장편소설『시의 갈레누스』발표와 함께 작품 활동 시작.
계간문예소설문학상, 아시아황금사자문학상, 하이네문학상, 대한민국디지털작가상, 한국PEN문학상, 박종화 문학상 수상, 채만식 문학상 수상.
장편소설『베네치아코덱스』,『왕롱의 잔』,『사자춤』(전3권),『O.S.T.』
소설집『유리병 속의 코끼리』,『욕망을 팝니다』, 『열등방정식』,『아담의 추억』.
국제PEN한국본부, 한국소설가협회, 한국문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