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생각해 보면 방향감각이나 미래에 대한 특별한 계획 같은 것도 없는 더구나 군대도 갔다 온 성인으로써는 너무나 어설프기만 했던 '사회 초년생'이었던 것 같다.
미술학원에서 아이들 가르치는 수입으로 근근히 그림생활을 하면서 내 한 목숨 연명해나가기는 했지만, 생활이 퍽 불안정했던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더구나 그림을 그릴 개인적인 공간은커녕 사는 것마저 누님 집에 빌붙어 지내는 처지다 보니,
주변 친구(나에게 미술학원 일자리를 소개시켜주었던)의 화실에 대학시절에 그렸던 그림들을 갖다 놓고 가끔씩 들러 개인작업을 하기는 했지만,
(누님 집은 경기도 '광명시', 아르바이트하던 미술학원은 '답십리', 친구의 화실은 '혜화동')
여기저기 오가느라 거리에 빼앗긴 '시간 낭비'의 연속이었다.
여기에, 그 시절의 흔적인 드로잉 몇 점을 소개하기로 하겠는데,
위) '정물'. A4 정도. 크레파스. 1983 . (내가 그 시절에도 이런 식의 '정물''꽃그림'등은 잘 그리지 않았는데, 그래도 이렇게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게 흥미롭다. 물론 그리고 싶어서 그렸겠지만...)
아래) '주시'. A4 정도. 크레파스. 1983 (내 내면에 잠재하고 있던 뭔가에 대한 '표현'의 열망?)
'나 만의 그림'을 향한, 어설픈 시도로의 드로잉 몇 점이 아직도 남아 있다. (위, 아래)
위) '수박장수'. A4 정도. 크레파스. 1983 . (이 드로잉이 흥미로운 것은, 나는 이 시절부터 '수박장수'를 그려보려고 했다는 사실인데, 그 뒤로도 몇 차례 (어쩌면 지금까지도) 이 '수박장수'를 그려보고 싶어 했는데, 아직까지 제대로 된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고 보면 이 시도가 첫번째 같은데, 이렇게 엉성하게 그려나갔다는 게 '부끄럽기도' '우스꽝스럽기' 그지 없다.)
아래) '인생'. A4 정도. 크레파스. 1983 . (이 드로잉은, 누군가의 한 주변인의 죽음을 맞아, 그 사람의 인생(일생)에 대한 얘기를 그림으로 표현한답시고 시도했던 것으로, 이건 나중에 크게(그 아래) 발전시키기도 했다.)
'인생' . A4 정도. 연필. 1983. (위)
'인생' . 100호 캔버스. 유화 종이 꼴라지. 1983. (아래)
당시 갓 대학을 졸업했던 나는, '앞으로 어떤 그림을 어떻게 그려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연구와 고민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사회적(화단)으로 보면,
미술권력을 꽉 잡고 있던 기성 세대의 '추상 흐름'에 반기를 든 젊은 세대(나보다 3-5년 위?)들의 '민중미술'이 고개를 들던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나 역시 이미 대학 4년 때 조직되었던 '의식과 감성' 전을 계기로 그 시대의 흐름에 동참하기는 했지만,
사실 나는 그런 쪽엔 자질도 의식도 없이 그저 주변 동료들에 따라다녔을 뿐인데,
그들은 대학 졸업 후에도 계속 뭔가 그런 미술의 흐름을 쫓거나 그들 만의 의견을 내세우고 있었는데도 나는 역시 '강 건너 불 구경' 하듯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지냈는데,
아무래도 그 생활이 너무 불안했고 또 그림 그릴 공간에 대한 절실함으로,
지금은 그 정확한 시점도 기억할 수 없는데(자료엔 나와 있을 텐데, 그걸 들춰볼 상황이 아니라서) 결국, '연희동'에 작은 화실을 열기에 이른다. (83년 말?)
그런데 화실 운영의 재주도 없다 보니 고생은 많았음에도 생활의 쪼들림은 갈수록 심해졌는데, 그래도 (지금 돌이켜보면)'참 아름답던 시절'로는 기억된다.
아래 첫번 째 사진) '연희동 화실' 모습. (이 사진이 중요한 이유는, 몇 점의 벽에 붙어 있던 그림들 때문이다.)
위 첫번 째 사진 오른쪽 벽면에, 아래 '자화상'이 붙어 있다.
'자화상' . A4 정도. 크레파스. 1983.4 (위)
그 시절, 다른 자화상이 없으니(있었는데 분실) 이 자화상이 어쩌면 현존하는 내 안경 낀 첫번 째 자화상이기도 하다.
위) 미술학원(83년 말 같은데...) 강사 시절
그런데 그 시절(84년 일듯),
내가 어떤 특별한 방향감각도 없이 지내고 있을 때,
대학 4년 때 함께 전시를 했던 동료들이(그들은 그 이후로도 계속 뭔가를 도모하면서 새로운 그룹 '실천'을 구성한 뒤 활동하고 있었는데),
함께 그 운동을 하자는 제안이 와서,
결국 그들의 운동에 합류하게 된다.
그러니까 만약 그들이 나를 끄집어내주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아니면 그 이후로도 계속) 그런 쪽엔 발도 못 붙였을 위인이었다는 것이다.
아래) '실천' 그룹 3회전 카탈로그. (그들은 이미 1, 2회 전시를 했고, 3회 때부터 나도 동참하게 되었다.)
아래) 그 카탈로그의 내 란
그 카탈로그에 실렸던 당시의 내 '그림에 대한 내 자세'(?).(이것 역시 카탈로그 제작 당시, 거의 의무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적어내야 했기 때문에, 마지 못해 이런 말을 냈던 것으로, 그만큼 나는 이런 쪽엔 자질도 없었고 또 관심마저 갖지 못한 사람이었다.)
말과 글이 일치하지 않음을 알면서부터 나는 글과 그림은 더욱 더 일치하지 않음을 실감해 왔다.
굳이 말을 빌리자면 난 그림을 내 멋대로 그린다는 것밖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언제 내 가치관이 정립되어 남들 앞에 내 '예술론(?)'을 펼지 모르겠으나,
글쎄, 어렵겠다는 생각만 든다.
'실천 전'에 출품했던 이 그림(아래)은,
한 그림 위에, 그 그림을 살리면서 또 다른 윗 그림을 입힌(덧칠, 테이프를 방충망처럼 밑 그림 위에 붙인 뒤, 그 위에 물감으로(나이프 작업) 칠한 뒤, 그게 마른 상태로 그 테이프를 떼어 내 아래 그림도 드러나게 하는, 두 그림의 겹친) 효과로, 나는 두 그림을 겹치게 해서 더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만들려는 시도를 많이 해왔다. (그런 경우는 이 창의 다른 드로잉, 위, '주시'에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 그림은 '박 정희' 암살 사건을 다룬 것이다. 그랬던 이유(?)는, '실천'전이 그래도 '민중미술'계통이었는데, 적어도 나 역시 그런 사회적인 이슈를 다룬 작품을 출품해, 다른 동료들과의 호흡을 맞추기 위함이었다.)
'잊으면 안 될 순간'. 120호 유화. 1984
아래) '잊으면 안 될 순간'. A4 정도. 크레파스. 1984
위) 이 드로잉에 대한 에피소드,
나는 이 일(자화상 정리)을 하느라 자료를 찾으면서, 이 드로잉(위)을 발견했는데, 처음엔,
내가 왜 이런 그림을 그렸다지?(너무 엉성해서, 부끄럽다는 생각으로) 했는데,
나중에 '실천 그룹전' 카탈로그를 들춰보니, 그 안에 바로 이 그림의 유화작업(위, 위)이 있어서야,
아! '잊으면 안 될 순간'의 밑그림(드로잉으로의)이었구나... 하고 깨달을 정도로,
내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내가 왜 이런 그림을 그렸다지?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기도 하는 게 내 '불분명한 기억'이라는 것이다.
(그 얘기를 하고 싶었다.)
아무튼 이 시기에도 고생이 참 많았었다.
이 고생했던 시절에 나를 참 많이도 도와줬던 한 제자 얘기는 이 전에도 이 까페에 올린 적이 있고,
지금은 그와 연락이 끊겨, 내가 간절하게 그를 찾고 있는 중이기도 한데... (아래, 지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