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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새재 옛 한시 감상(3), 이이 등 소답자한 68호에서
11. 이이/ 12. 김성일/ 13. 유성룡 / 14. 이정구
11. 이이
이이는 16세 때 어머니 심사임당이 별세. 3년 시묘 19세 때 금강산에 들어가 1년간 불교 공부. 23세 때 예안 도산을 가서 35년 선배인 이황 선생을 방문하여 가르침을 받음. 전후 아홉 차례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九度壯元公이라 칭함. 1575년 동서분당으로 사림이 분열 무위한 정쟁에 휘말리게 됐다. 수명은 짧아서 49세에 죽음. 파주 자운서원 등 20여개 서원에 배향됨. <<만언봉사>> 에서 시의時宜에 따라 법을 변통하여 백성을 구해야 한다. 因時而制宜 강조, 실공實功 실효實效를 강조했다. 진리란 현실을 문제와 직결되어 있는 것이며 현실을 떠나서는 구할 수가 없다. 이와 기의 불리不離의 관계로 파악하였다.
▣ 감상 채근담에 이르기를 “바람, 꽃, 눈, 달, 등 사계절의 경치는 마음에 여유를 주는 것들인데 세상에 찌든 사람은 즐길 여유가 없이 쓸데없이 분주하다” 고 하였다. 또 “천지는 본래 광활한데 속 좁은 사람은 스스로 세상을 좁다고 생각한다.” 하였다. 달빛이 여관의 사립짝을 비추어 길손의 객수客愁를 더한다. 월광의 정취를 마음껏 누리고 있다.
12. 김성일
* 김성일은 이황의 문인. 봉교로서 1572년 노산묘를 노릉(단종릉)으로 봉축하고, 사육신 관작을 회복하도록 진언. 정언으로서 변장으로부터 초피덧저고리를 뇌물로 받은 우의정 노수신을 탄핵했다. * 1590년 일본에 통신사 부사로 파견되었고 귀국 후 보고에서 정사 황윤길과는 다른 보고를 했다.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재직 중에 임진왜란을 당했다. 왜란이 일어날 정세가 안보인다고 보고한 것은 민심 흉흉할 것을 우려하였다고는 하나 왜란이 일어나자 발언에 책임을 물어 소환도중에 유성룡의 변호로 공을 세워 속죄할 수있는 기회를 얻었다. 경상우도 초유사가 되어 곽재우 의병활동과 진주목사 김시민의 활동을 도왔다. 경상우도 관찰사 겸 순찰사를 겸하여 진력하다 1593년 병사함. * 정치적으로는 동인 또 동인이 분열하였을 때는 남인이 됐다. 1590년 정여립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옥사한 최영경의 신원을 위해 서인 영수 정철을 규탄했다. 안동 호계서원 등에 제향됨.
▣ 감상 채근담에 이르기를 “산골짜기에 피어난 한 조각 구름, 가고 머묾에 얽매임이 없고, 하늘에 걸린 밝은 달, 고요하고 소란스러움에 개의치 않네.” 하였다. 간절한 마음으로 바람도 봄꽃을 시샘하지 않았으면 한다.
13. 유성룡
* 유성룡은 의성 출생. 이황(李滉)의 문인. 풍원부원군 작호. 66세에 亡. 시호 문충. 병산서원(屛山書院)에 제향(祭享). 1592년 임진왜란전후 도체찰사로 군무를 총괄, 이순신(李舜臣),권율(權慄) 등 명장을 등용하였다. 왜란중 4도도체찰사, 훈련도감제조, 영의정 등으로 왜란을 극복하는데 공헌하였다. * 한때 인생무상을 느끼고 낙동강 서쪽 언덕에 집을 짓고 제자를 가르치려하여 호를 서애라 하였다. 퇴계에게서 배울 때 "이 사람은 하늘이 낸 사람이다."라고 영리함을 칭찬받았다. 25세에 대과에 합격하였다. 왜란직전 일본에 사신의 파견을 건의하였고, 이순신, 권률장군을 천거하여 국난극복에 기여하였다.. * 피난길의 선조는 개성에서 영의정 이산해를 파면 귀양보내고, 유성룡을 영의정에 임명하였으나 반대파가 들고 일어나 당일로 파면되고 국사는 계속 보았다. 평안 관서 삼남 도체찰사가 되어 군무 총괄, 명군 접대, 군량 보급, 외교 군무 민정에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였다. * 명군의 내분이 일어나자 영의정 유성룡을 북경에 파견하여 해명하려 하였으나 유성룡이 명의 내분에 끼어드는 것이 체통안서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가지 않아 삭탈관작 되어 고향 하회마을 에 돌아갔다.(57세) *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바둑을 둘 줄 모르는 선조에게 대국을 요청하자 그는 우산에 구멍을 뚫어 훈수함으로써 이여송을 무릎 꿇게 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질만큼 바둑의 애호가였다.
다음은 제자 정경세가 동문에게 스승을 도와드리자고 편지하면서 가난하게 사는 참상을 쓴 시이다. 河上傳家只墨庄 兒孫蔬糲 不充賜 (하상전가지묵장 아손소여 불충사) 如何將相 三千日 倂欠成都八百桑 (여하장상 삼천일 병흠성도 팔백상) 낙동강변 유서 깊은 이 집에는 오직 장서 뿐 채소죽도 아이들에게 재대로 주지 못하는 구나. 장상 10년에 어찌하여 제갈량이 남겼던 뽕나무 800그루의 미련도 없었을까? (청렴한 제갈량도 후손을 위해서 뽕나무 800그루를 남겼지만 유성룡은 그것마저도 남기지 않았다.)
*庄(장) : 전장 장(莊)의 속자/ 糲(려) : 매조미쌀/ / 倂(병) : 나란히, 물리칠, 다툴, 아우를/ 欠(흠) : 모자랄
▣ 감상 채근담에 이르기를 “명성을 자랑함이 피하는 멋만 못하니, 일에 능수능란함이 어떻게 일을 줄여 한가로움만 같겠는가?” 하였다. 영의정까지 오른 유성룡은 높은 벼슬 헛된 이름 부끄럽다고 하였다고 읊으며 새재를 지나다녔다.
14. 이정구
* 월사(月沙) 이정구는 병조·예조·형조판서를 거쳐 인조 6년(1628)에는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고, 죽은 후인 영조 21년(1754)에 특명으로 부조전(나라에 공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영원히 모시는 것)을 하사 받았다. * 그는 문장 가문에서 출생하여 어린 시절부터 비범한 재질을 보였고 중국어에 능통하여 여러 차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공을 세웠다. * 그는 문장은 장유·이식·신흠과 더불어 ‘한문 4대가’라고 일컬어졌다.
* 임진왜란시 조선을 지원한 명나라가 지원에 대한 대가로 여러 가지 트집을 잡아 압박하면서 찬획주사(贊畫主事) 정응태(丁應泰)가 군사총책 경리(警吏) 양호(楊縞)와 다투게 되었는데 선조가 양호(楊鎬)를 두둔하자 앙심을 품고 특히 조(祖)와 종(宗)의 호칭사용을 명나라 조정에 조선에 불리하게 밀고 하였다
"조선이 왜를 끌어들여 명나라를 침범 하려고 임진왜란을 유발하였다"는 등 조선에 나와 있는 명나라 장수 양호 등 명나라 지원군 지휘부와 조선조정을 싸잡아 20여 종목을 명황제에게 誣告 하였는바, 이에 조선 중국황제에게 주문(奏文)을 지어 올렸다. 이정구는 이에 무술변무주(戊戌辨誣奏)를 작성하여 명나라 조정을 설득하였다. 국가가 위태로울 때 조선의 자주국의 위상을 격상 시킨 두드러진 외교업적이었다.
▣ 감상 ‘구름 걷힌 봉우리 푸른빛 새로워라’고 읊고 있다. 나 역시도 그런 시구가 있다. 시 <맨드라미>에서 마지막 4연에서 ‘살포시 거친 손을 잡으니/ 잠을 깨는 그 모습이/ 비갠 뒤 안개 벗어나는 벽봉碧峰 같아라.’ 라고 읊었다. 벽봉碧峰은 푸른 산 봉우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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