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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사 요(堯)임금 순(舜)임금 우(禹)임금
1) 태평성대의 시작 요(堯)임금
신들이 활약하던 시대로부터 인류의 시대로 들어서면 성군들이 통치하는 태평성대가 출현한다. 중국에서 이 시대는 요(堯) 순(舜) 우(禹) 탕(湯) 문왕(文王) 무왕(武王) 주공(周公)으로 이어지는 여섯 명의 임금이 다스렸다고 한다.
이중에서도 특히 요, 순 시대는 후세에 태평성대를 상징하는 용어가 될 정도로 대표적이다. 이들 성군은 완전한 신은 아니지만 영웅과 마찬가지로 반신반인적인 성격을 띠는 비범한 존재이다.
요(堯)의 출생이나 성장 과정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가 없다. 여러 고서에 의하면 그는 당(唐)이라는 지역에 나라를 정했고 성이 도당씨(陶唐氏)라고 했다 한다.
우리는 요(堯)라는 그의 이름과 성이 흙이라던가 도기(陶器)와 관련된 것으로 보아 그가 신석기 시대 토기 제작상의 저명한 인물로 신격화한 것이 아닌가하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신석기 시대에는 토기 제작이 무척 중요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요는 훌륭한 자질을 지닌 임금이었다. 그는 임금이 되었어도 아주 검소하게 살았다. 전국(戰國)시대에 법가(法家) 사상가인 한비(韓非)가 쓴 ‘한비자(韓非子)’에 따르면 그는 겨울에는 사슴가죽옷을, 여름에는 삼베옷을 입었고 집은 띠풀과 통나무로 지었으며, 식사는 거친 야채국으로 만족했다 한다.
그래서 문지기라도 이보다는 더 잘 살았을 것이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였다 한다. 요는 마음에서도 진정 백성들을 위하고 염려했다.
한(漢) 나라 때 유향(劉向)이 지은 ‘설원(說苑)’에 의하면 그는 어떤 사람이 배가 고프다 하면 “ 내가 그의 배를 곯게 하였구나”하고 또 어떤 사람이 춥다 하면 “내가 그를 춥게 하였구나”하며 어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내가 그를 죄에 빠뜨렸구나”하였다 한다.
요(堯)가 얼마나 자기를 돌보지 않았는가를 말해주는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 그 당시 악전이라는 유명한 신선이 있었다. 그는 요(堯)가 국사에 전념하느라 몸이 쇠약해진 것을 염려하여 산에서 딴 좋은 잣을 요(堯)에게 먹으라고 선물하였다.
그러나 요(堯)는 너무 바빠서 그것을 먹을 시간조차 없었다. 그런데 그 잣을 먹었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이삼백세까지 살았다 한다.
요(堯)를 보좌했던 신하들도 모두 뛰어나서 태평성대를 이룩하는 데에 기여했다.
‘설원’에 의하면 후일 그를 계승하여 마찬가지로 성군이 된 자는
순(舜)은 사도(司徒)로서 교육 일을 맡았고,
설(契)은 사마(司馬)로서 군사 일을 맡았고,
나중에 주(周) 나라의 시조가 된 후직(后稷)은 전주(田疇)로서 농사 일을 맡았고,
기(夔)는 악정(樂正)으로서 음악 일을 맡았고,
수(倕)는 공사(工師)로서 기술 일을 맡았고.
고요(皐陶)는 대리(大理)로서 재판 일을 맡았다고 한다.
<설(契)의 태생 비화>
아득한 옛날 유융씨(有융氏)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아름다운 딸이 셋 있었다.
어느날 세 자매가 현구수(玄丘水)라는 강에서 목욕을 하고 있을 때였다. 신성한 새가 한 마리 날아오더니 오색찬란한 알을 떨어뜨리고 가는 것이 아닌가? 큰 딸 간적(簡狄)이 그것을 주워보니 너무도 탐스럽고 먹음직스러웠다. 간적은 알을 한번 입에 머금어 보았다.
그 순간 미끄덩하고 알이 목에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그 날 이후 간적의 몸에 변화가 생겼다. 나날이 배가 불러오더니 마침내 아이를 낳고야 말았다. 아이는 이름을 설(契)이라고 하였는데, 총명하고 어질었다. 설은 장성하여 요(堯) 임금 때에 교육의 책임자인 사도(司徒)가 되었다가 후일 상(商) 땅에 봉해져서 은 민족의 시조가 되었다.
그의 후손인 탕이 하(夏)를 정벌하고 상을 나라 이름으로 정하였는데 다시 반경왕(盤庚王) 때에 은 땅으로 천도를 하면서 은이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시경(詩經)’에서는 이 일을 두고 다음과 같이 찬미하였다.
“하늘이 신성한 새를 하계에 내려보내 은 민족을 일으키시니 그들의 영토가 광대하도다.”
(天命玄鳥 降而生商 宅殷土芒芒)
시경에 의하면 신성한 새는 우연히 나타난 것이 아니고 천제(天帝)가 은 민족을 일으키기 위해 자신의 분신으로 파견한 것이었다.
결국 이 신화는 은 민족이 천상의 아버지와 지상의 어머니가 결합해서 낳은 신성한 혈통임을 천명한다.
이 신화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아버지를 모르고 어머니만 알았던 모계사회의 현실을 반영한다. 사실상 은 민족의 시조는 간적인 셈이다. 간적은 은 민족의 시조모(始祖母)로서 추앙되었으며 은이 멸망한 이후에도 결혼 중매 생식의 신인 고매신(高媒神)으로 섬겨진다.
둘째, 은 민족(동이족)이 새를 토템으로 숭배하는 습속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신성한 새를 민족의 발생과 관련시킨다든가 알을 매개로 사람을 낳는 방식을 취한다든가 하는 착상은 새 토템의 습속에서 기인한다.
설 신화, 곧 은 민족의 시조 탄생신화는 동이계 다른 민족의 시조 혹은 영웅 탄생신화와 특징을 공유한다.>
<후직(后稷)의 탄생의 비화>
옛날에 유태씨(有邰氏)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에게 강원(姜嫄)이라는 딸이 있었다.
어느날 그녀는 들에 놀러갔다가 큰 거인의 발자국이 찍혀 있는 것을 보았다. 호기심 많은 처녀 강원은 그 발자국에 자신의 조그만 발을 디뎌 보았다. 그 순간이었다. 몸 속에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오는 것이 아닌가.
집에 돌아온 후부터 그녀의 배가 불러오더니 마침내 달 수가 차자 이상한 살덩어리 같은 것을 낳았다. 그녀는 끔찍한 생각이 들어 그것을 골목길에 버렸다. 그랬더니 소와 양이 피해갔다.
다시 이번엔 얼음판에 버렸더니 새가 날아와 깃털로 감싸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새가 날아가 버리자 살덩어리 속에서 준수한 한 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신기하게 생각하고 아이를 거두어 길렀는데 처음에 아이를 버렸다고 해서 이름을 기(棄)라고 불렀다. 아이는 자라면서 농사일에 두각을 나타내어 요 임금 때 농업 책임자인 농사(農師)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순(舜) 임금 때 태(邰) 땅에 봉해졌고 이때부터 후직(后稷)이라고 불리워졌다. 이후 그의 후손이 주 민족을 형성하게 되었다.
후직의 탄생신화는 영웅신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영웅은 대개 비범한 탄생 이후에 버려지기 때문이다. 후직처럼 신비한 기운의 작용에 의해 탄생이 이뤄지는 경우, 이러한 신화를 감생신화(感生神話)라고 부른다.
감생신화는 초자연적인 기운이나 신과의 접촉, 혹은 그 영향에 의해 인물이 탄생하는 내용의 신화로 영웅이나 민족의 시조 탄생에 많다.
요(堯) 임금의 시대는 모든 일들이 순조롭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갑자기 열 개의 해가 동시에 떠올라서 혹독한 가뭄에 시달린 적도 있었고(이 때는 명궁 예가 아홉 개의 해를 격추시켜 위기를 모면했다) 20여년간 홍수가 계속되어 생존이 위협을 받은 적도 있었다.
양(梁) 나라 때 임방(任昉)이 지은 ‘술이기(述異記)’에 의하면 나라가 잘 다스려지자 여러 가지 상서로운 징조들이 요의 궁전에서 나타났다고 한다.
가령 말에게 먹이려던 꼴이 싱그러운 벼로 변했는가 하면, 봉황새가 뜨락에 내려오고, '삽포'라는 이상한 풀이 주방에 나서 한 여름에도 서늘하여 음식이 상하지 않기도 하였다.
‘습유기’라는 책에는 또 지지국(秖支國)이라는 나라에서 바쳤다는 중명조(重明鳥)라는 새에 관한 기록이 있다. 이 새는 한쪽 눈에 눈동자가 둘이었으며 닭처럼 생겼고 봉황새의 울음소리를 냈다.
이 새는 맹수도 물리치고 사악한 모든 것으로부터 보호해주는 힘이 있었다. 그런데 이 새는 중국에 머무르지 않고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가 가끔 오곤 했다.
사람들은 이 신통한 새가 자기 집에 오길 고대하였는데 새가 안 오면 이 새의 모습을 나무나 쇠로 새겨 문앞에 걸어두어도 도깨비나 귀신 따위를 물리칠 수 있었다 한다.
고대 중국에는 인간의 일과 하늘의 도리 곧 자연이 합치된다는 관념이 있었다. 이를 천인합일관(天人合一觀)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에서 임금이 정치를 하면 그 잘잘못에 따라 반드시 자연의 징조가 나타난다는 생각이 일어났다.
예컨대 정치가 잘 이루어지면 하늘이 봉황새와 같은 신성한 동물을 보내 그 표징을 드러내고 정치가 어지러우면 산이 무너진다든가 하는 천재지변으로 하늘이 경고를 한다는 식이다.
이것을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이라고 한다. 이 천인감응설은 한 나라 때에 크게 유행하였다. 요가 정치를 잘 하니 여러 신비한 자연현상이 나타났다고 하는 이야기들은 정작 ‘산해경(山海經)’과 같은 신화서에서 보이지 않고 모두 한 나라 이후에 지어진 책들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들이 후세에 천인감응설적 관념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요(堯)는 백성들이 자신의 다스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어졌다. 그래서 어느날 궁궐을 나와 길을 거닐었다. 그런데 팔십살 쯤 된 노인이 길가에 앉아 막대기로 땅을 두드리며(일설에는 고대의 비석치기 비슷한 놀이라고도 한다)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닌가?
“아침에 나가 일하고 저녁에 들어와 쉬네. 우물 파서 물 마시고 밭 갈아 밥 먹으니 임금님 덕이라고는 하나도 없네.”
"日出而作, 日入而息, 鑿井而飮, 耕田而食, 帝力干我何有哉"
요(堯)는 이 노래를 듣고 화를 낸 것이 아니라 만족했다.
왜냐하면 임금의 존재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백성들에게 전혀 부담을 주지 않는 다스림이야말로 최상의 다스림이기 때문이다. 노인이 불렀던 노래를 ‘격양가(擊壤歌)’라고 하는데 이후 태평성대를 상징하는 어휘가 되었다.
즉위한 지 수십년이 흐르자 요는 왕위를 적합한 사람에게 물려주고 싶었다. 그런데 아들 단주(丹朱)는 성품이 거칠고 못되었다. 요는 인재를 물색하다가 허유(許由)라는 사람이 어질다는 추천을 받고 그를 찾았다.
한편 허유는 요가 자기를 불러 왕위를 주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몸을 피하여 기산(箕山)이라는 곳으로 가서 살았다. 堯는 다시 기산으로 사람을 보내 허유에게 우선 재상이라도 맡아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 요청을 완강히 거절하고 허유는 집 근처를 흐르는 영수(潁水)라는 강물에 나아가 귀를 씻었다. 그 때 마침 친구 소부(巢父)가 물을 먹이려고 소떼를 끌고 왔다가 이 광경을 보고 왜 귀를 씻는지 물었다.
허유는 이렇게 말했다. “요가 나더러 재상이 되라 하네. 이런 더러운 소리를 들었기에 귀를 씻는 것이라네.” 이 말에 소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이 조용히 살았으면 어찌 이런 꼴을 당했겠나. 내 소가 먹을 물이 더러워졌겠네.” 그리고는 소를 끌고 상류로 가서 물을 먹였다. 결국 요는 허유에게 왕위를 전할 것을 포기하고 후일 순에게 물려주게 된다.
뒤에 허유가 죽자 요임금은 기산(箕山) 위에 묻고 그의 무덤을 기산공신(箕山公神)이라 하였다. 이 두 고사(高士)의 절개와 지조를 이른바 기산지절(箕山之節) 또는 기산지조(箕山之操)라 하였다
요(堯)의 이야기는 중국의 초기 역사시대의 정치상황을 시사한다. 그것은 아직 가부장적인 왕권국가가 성립되기 이전의 모습으로 집단에서 지도자를 합의에 의해 선출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던 현실을 반영한다.
이것은 후세에 유학자들에 의해 선양(禪讓)이라는 왕위 계승방식으로 찬양된다. 아울러 요의 다스림과 관련한 신비한 징조라던가, 격양가, 허유 이야기 등은 후세에 지어진 혐의가 강하다.
요(堯) 순(舜) 우(禹) 탕(湯) 등의 초기 제왕들은 후세에 특히 한 나라 때에 유교가 국교로 제정되면서 유교에서 표방하는 이상국가의 개념에 맞춰져 윤색되는데 이 과정에서 앞서의 이야기들이 창작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2) 성군 순(舜)임금
요(堯) 임금과 더불어 태평성대의 군주로 일컬어지는 성군 순(舜)의 삶이 그러했다. 그는 정말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고초를 인내와 덕성으로서 이겨냈고, 그럼으로써 인간 승리의 모범이 되었다.
순(舜)의 아버지는 장님으로 이름을 ‘고수’라 하였다. 고수라는 글자 자체가 ‘눈 먼 늙은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고수가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봉황 한 마리가 쌀을 물고 와 그에게 먹여주면서 자손을 점지해 주고 가버렸다.
그 후 얼마 안가서 아들을 낳게 되었으니 그가 곧 순이다. 순은 태몽도 신기했지만, 눈동자가 둘인 기이한 아이였다. 그래서 중화(重華)라고도 불렀다. 눈동자가 둘인 사람이라는 뜻이다.
순(舜)의 이러한 탄생신화는 몇 가지 의미를 함축한다. 첫째, 꿈에서 봉황을 보았다는 것은 그가 새 토템 민족의 훌륭한 인물임을 암시한다. 맹자(孟子)도 일찍이 말했듯이 순은 동이계(東夷系)종족 출신인데, 그들은 새를 토템으로 삼고 있었다.
다음 눈동자가 둘이라는 표현은 순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고대 중국에서는 비범한 사람의 모습을 형용할 때 눈과 관련하여 이런 표현을 썼는데, 가령 춘추(春秋) 시대의 강력한 군주였던 진문공(晉文公)도 눈동자가 둘이었다고 한다.
순(舜)은 이렇게 태어났으나 그의 삶은 기구하였다. 어머니가 그를 낳은 지 얼마 안 되어 돌아가시고 계모가 들어오는 일종의 가정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계모는 자신이 낳은 아들 상(象)과 함께 순을 학대하였다.
더욱 어처구니없는 것은 고수가 계모와 이복동생 상의 말만 듣고 순(舜)을 더욱 학대한 것이다. 신화에서 순의 아버지를 장님으로 설정한 것은 시각 장애보다 마음의 장애를 표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는 사리에 어둡고 인정에 밝지 못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어질고 효심 깊은 순은 반항하지 않고, 모든 학대를 견디었다고 한다. 고수는 매일 구타하였는데 그는 가만히 참고 맞았다 한다.
때로 큰 몽둥이로 때리면 도망쳤다고 한다. 맞기 싫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맞고 죽으면 아버지께 큰 불효가 될까 였다고 하니 효심도 이 정도면 상상을 초월한다.
순(舜)은 결국 집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쫓겨난 순(舜)은 이곳저곳을 옮겨 살았는데 그의 어진 성품은 가는 곳 마다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그가 역산(歷山)에서 농사를 지을 때는 그곳 농부들이 모두 밭을 양보하였고, 뇌택(雷澤)에서 고기를 잡을 때는 그곳 어부들이 다투어 어장을 주었다 한다. 그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을을 이루었다 한다.
순(舜)이 이렇게 훌륭하다는 소문은 온 나라에 퍼졌다. 그러자 대신들이 요 임금에게 다음의 임금 감으로 순을 추천하였다. 요 임금은 순(舜)에게 아황(娥皇)과 여영(女英) 두 공주를 시집보내고 아홉 아들들을 보내 순의 생활을 직접 지켜보게 하였다.
순(舜)은 지위가 달라졌다고 해서 교만하지 않고, 여전히 고수와 계모를 효성스럽게 모시고, 상을 자애롭게 대하였다.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순이 임금님의 사위가 되자 고수와 그 가족들은 시기와 증오심에 몸을 떨었다. 특히 동생인 상은 더욱 적개심을 가졌다.
그들은 상의 적극적인 주장에 따라 순을 죽이고 재산과 아내를 빼앗기로 결정하였다. 궁리 끝에 한 가지 계략을 꾸몄다. 유향(劉向)의 ‘열녀전(列女傳)’에 의하면 고수가 순에게 곡식 창고의 지붕을 수리하라고 시켰다 한다.
순(舜)이 두 공주에게 얘기했더니 새 무늬가 있는 옷을 만들어 입고 가게 하였다. 순(舜) 지붕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데 고수가 사다리를 치우고 밑에서 불을 지르는 것이 아닌가! 순(舜)은 두 공주가 만들어 준 신기한 옷 덕분에 새처럼 날아서 내려왔다 한다.
‘사기’에서는 순이 미리 두 개의 갓을 준비해 뒀다가 그것을 펼쳐서 내려왔다는 식의 다소 과학적인 설명을 하고 있다.
첫번째 음모가 실패하자 두 번째 음모를 꾸몄다. 이번에는 아버지 고수의 명령으로 우물을 치게 한 것이다. 그러자 두 공주는 용무늬가 있는 옷을 순에게 입혀서 보냈다. 한참 우물 밑바닥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데 위에서 돌과 흙이 쏟아졌다.
순은 용처럼 우물 밑의 물길로 빠져 나왔다. ‘사기’에서는 순이 미리 파둔 통로로 탈출하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 때 상은 정말 순이 죽은 줄 알고 공주와 재산을 차지할 꿈에 부풀었다. 그리하여 순의 집에 와서 제멋대로 순의 거문고를 타고 있었다. 그 때 순이 집안으로 들어오질 않는가?
이 사건 이후에도 순(舜)의 가족들에 대한 성실한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회개할 줄 모르는 악독한 상과 고수는 다시 음모를 꾸몄다. 순(舜)을 술자리에 초대를 해 취하면 죽여 내버리려고 한 것이다. 두 공주는 순이 가기 전에 신기한 약으로 목욕을 하게 했다.
잔치에서 고수는 순(舜) 게 쉼 없이 술을 권했다. 그러나 공주의 약 덕분에 순(舜)은 조금도 취하지 않고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최후에 요 임금의 시험마저 통과해 마침내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임금이 되고 난 후에도 순은 고수와 계모, 상을 대하기를 전과 다름없이 하였다. 심지어 상을 ‘유비(有鼻)’라는 지역의 제후로 봉하기까지 하였다.
그러자 마침내 그 모질게도 악했던(이를 완악ㆍ頑惡하다 라고 한다) 가족들도 뉘우치면서 점차 선한 길로 들어섰다고 한다. 순(舜)의 효심과 어진 마음이 결국 승리를 거둔 것이다.
순(舜)은 요 임금의 뒤를 이어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이른바 ‘요순시대’라는 태고의 가장 이상적인 시대를 구현하였다. 순(舜)은 음악을 좋아하여 ‘남풍가(南風歌)’라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 한다.
악공들을 시켜 거문고를 개량하게 하고, 구소(九韶)라고 하는 악곡을 짓게 하였는데 후세에 공자는 순의 구소를 가장 완벽한 음악으로 칭송하였다.
순과 두 왕비에게도 만년이 찾아왔다. 그런데 그들의 최후는 다소 비극적이다. 순은 남쪽 지역을 두루 돌아보던 중 창오(蒼梧)라는 들녘에서 그만 객사하고 말았다. 다른 민간 전설에 의하면 순이 사람을 해치는 거대한 구렁이와 싸우다 죽었다고도 한다.
두 왕비는 눈물을 뿌리며 남쪽으로 갔는데 그 때 눈물방울이 대나무에 떨어져 강남 지역의 대나무는 오늘날에도 반점이 남아 있다고 한다. 두 왕비는 상수(湘水)라는 강을 건너다 풍랑을 만나 빠져 죽고 말았다. 후에 두 왕비의 혼은 상수의 여신으로 화하였다.
순(舜)의 신화에서 그가 계모에게 학대받다 공주와 결혼하는 성공담은 마치 신데렐라 이야기를 남성의 경우로 바꾸어 놓은 듯하다. 일부 학자들은 순 신화가 원시시대의 야수를 길들이거나, 사냥하는 데에 뛰어났던 수렵 영웅에 대한 숭배의 흔적을 담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완악한 가족을 변화시키는 과정을 맹수를 길들이는 과정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동생 상은 가장 덩치 큰 동물인 코끼리로 불리고 있다. 고대 중국은 기후가 온난해 코끼리가 많았고, 순(舜) 신화는 당시 코끼리를 길들였던 현실을 반영했다는 것이다.
순(舜) 신화는 그러나 요 신화처럼 후세 유학자들에 의해 교육적으로 각색된다. 순(舜) 철두철미한 효자로 묘사한다. 우리의 마음에 묘한 여운을 남기는 것은 순과 두 왕비의 비극적인 최후이다.
행복한 순 부부의 뜻밖의 불행, 이야기의 급격한 파국이 의미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순(舜)의 객사, 민간 전설에서 암시하고 있는 순(舜)의 피살, 그리고 두 왕비의 잇따른 횡사, 물귀신이 되어 떠도는 그들의 깊은 한은 어떤 사실을 감추고 있는 것일까?
후세의 유학자들에 의하면 요에서 순(舜), 순에서 우(禹)는 ‘선양(禪讓)’이라는 양보의 방식으로 덕있는 사람에게 왕권이 전해졌다고 한다.
우리는 혹시 순(舜)과 우(禹) 사이에 존재했던, 선양과는 거리가 먼 피비린내 나는 폭력의 냄새를 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유학자들이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위하여 그토록 이상화했음에도 미처 은폐하지 못한 폭력의 냄새를...
3) 우(禹)의 전설과 하왕조의 시작
요(堯) 임금 시절은 신화시대의 후기 혹은 전설시대의 초기에 해당한다 할 것인데 이 시절에도 어마어마한 홍수가 엄습한 적이 있었다. 무려 20여 년에 걸친 대홍수를 다스림과 관련하여 희비가 엇갈린 영웅적인 인물이 곤(鯀)과 우(禹)이다.
요(堯)임금 때의 대홍수에 대해서는 ‘맹자(孟子)’와 ‘서경(書經)’ 등의 옛 책에 기록이 있다. ‘맹자’에 의하면 이때 물이 역행하여 중국 전체에 범람하였고 이 때문에 파충류가 극성하여 사람들은 지상에 살지 못하고 나무 위나 동굴에 집을 짓고 살았다 한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 ‘물이 역행’했다고 하는 표현이다. 이것은 황하가 정상적으로 흘러가지 않고 옆으로 넘쳐서 거주지를 덮친 것을 의미한다.
어진 요(堯)임금은 이러한 사태를 방관할 수 없었고 곧 조정에서 회의를 열어 홍수를 다스릴 적임자를 추천하도록 하였다. 그랬더니 신하들은 이구동성으로 곤(鯀)이라는 인물을 추천하였다.
곤(鯀)은 ‘산해경(山海經)’에 의하면 대신(大神) 황제(黃帝)의 손자라 하였으니 그도 황제의 일족인 셈이다. 곤(鯀)은 곧 치수(治水)에 착수하였는데 도도히 흐르는 물을 막기 위해 둑을 쌓는 일에 열중했다. 그러나 둑을 쌓았어도 강한 물길에는 역부족이었다.
둑은 무너져 버렸고 다시 더 튼튼한 둑을 쌓기 위해 많은 흙이 필요했다 “흙만 많이 있으면 얼마든지 둑을 쌓아 저 홍수를 막을 수 있을 텐데.” 흙에 궁핍함을 느끼던 곤(鯀)은 마침내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은 천제(天帝)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식양(息壤)’이라고 하는 흙이었다.
그러나 ‘식양’은 천제의 보물창고에 있어서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곤(鯀)은 고민 끝에 마침내 천제 몰래 식양을 훔쳐내고야 말았다. 곤(鯀) 식양을 땅 위에 뿌리자 저절로 흙이 불어나더니 순식간에 산만큼 커지는 것이 아닌가? 곤은 성공을 예감하며 다시 둑을 쌓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곤이 식양을 훔쳐간 사실은 이내 천제에게 알려졌다. 천제는 크게 노하였고 불의 신인 축융(祝融)을 보내 곤을 처형하도록 지시하였다. 마침내 곤은 북방의 음습한 땅 우산(羽山)이라는 곳에서 축융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곤(鯀)의 9년간에 걸친 치수의 노력은 이렇게 실패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일이 생겼다. 곤(鯀) 처형당한 시체가 삼년이 되도록 썩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소식을 듣고 괴이하게 여긴 천제는 천신으로 하여금 오도(吳刀)라는 예리한 칼을 가지고 가 곤의 시체를 베도록 하였다. 오도가 곤의 배를 가른 순간 그 속에서 외뿔 달린 용, 곧 규룡(虯龍)이 튀어나왔다. 이 용이 후일 사람으로 변하여 우(禹)가 되었다.
곤(鯀)이 홍수를 막기 위해 식양을 훔쳤다가 처형을 당한 일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위해 불을 훔쳐다 주었다가 중벌을 받은 일과 비교되어 흥미롭다.
아울러 우리는 곤(鯀) 살해된 몸에서 아들 우가 나오고 우가 아버지의 실패를 딛고 성공하는 스토리에서 외디푸스 콤플렉스의 희미한 잔영(殘影)을 엿볼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신화적 모티프는 풍토와 문화적 차이에 따라 지역적으로 현저하게 혹은 미약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의 성공적인 치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하자. 우(禹)는 아버지인 곤(鯀)이 취했던, 둑을 쌓아 물길을 막아버리는 방법은 실패의 전례가 있기 때문에 그대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우(禹)가 택한 주요한 방법은 물길을 막는 것이 아니라 물길을 터서 분산시키는 것이었다.
우의 작업에는 훌륭한 조력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날개 달린 응룡(應龍)을 비롯한 여러 용들이었는데 이는 우(禹) 역시 본래 용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응룡은 강한 꼬리로 땅을 그어서 물길을 팠다. 한번은 황하의 신인 하백(河伯)이 나타나 푸른색의 큰 돌을 건네고 사라졌다.
거기에는 물길이 잘 그려져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다. 그 돌을 하도(河圖)라고 불렀다. 또 한 번은 동방의 신인 복희(伏羲)가 현신하여 대나무 쪽처럼 생긴 옥을 주었는데 그것으로 하늘과 땅을 측량할 수 있었다. 그 옥을 옥간(玉簡)이라고 불렀다.
이처럼 치수에 전력을 다하느라 너무 바쁘고 시간이 없어서 우(禹)는 나이 서른이 되도록 그 흔한 데이트 한 번 못해 보고 결혼은 꿈도 못 꿀 형편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다 때가 있고 연분이 있다고 하던가? 노총각 우에게도 짝을 찾을 기회가 온 것이었다. 우(禹)가 남쪽의 도산(塗山)이라는 곳에서 치수에 열중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하얀 구미호(九尾狐) 한 마리가 우(禹) 앞에 나타나 살랑 살랑 꼬리를 흔들어대지 않는가?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는 요즘에는 요물로 생각하지만 고대에는 가정과 나라가 번창하게 될 조짐으로 여겼다.
때가 왔음을 예감한 우는 분발하여 마침내 그 지역에서 여교(女嬌)라는 아름다운 처녀를 만나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못하였다. 우(禹)가 치수에 바빠 신혼 나흘 만에 아내를 두고 출장을 갔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파국은 엉뚱한 데서 일어났다. 우가 환원산(轘轅山)이란 곳에서 작업을 할 때였다.
우(禹)는 산 위에서 작업을 하면서 아내에게 북소리가 울리면 밥을 가져오라고 일렀다. 아내가 없을 때 우(禹)는 곰으로 변해 일을 하고 있었는데 잘못 돌을 걷어차서 그것이 걸어둔 북에 맞아 소리가 나고 말았다.
우(禹)의 아내가 밥을 가지고 와 보니 남편이 곰이 되어 있지 않은가? 우(禹)의 아내는 놀라 달아났고 곰이 된 우(禹)가 급히 쫓아오자 돌로 변해 버렸다. 우(禹)가 이 때 아내에게 “내 아이나 내놓으시오”라고 외치자 돌이 갈라지면서 아들이 튀어나왔다.
우(禹)의 아들 ‘계(啓)’는 이렇게 탄생하였으나 우(禹)의 결혼생활은 그만 이것으로 끝이 나고 말았다. 엄청난 홍수를 다스리느라 가정까지 희생한 우, 그러나 무려 13년간에 걸친 그의 노력 덕분에 마침내 치수는 성공하였고 이제는 모두가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요 임금, 순(舜) 임금의 뒤를 이어 온 백성의 추대를 받아 새로운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우(禹)는 임금이 된 후 두 가지 중요한 일을 하게 된다.
한 가지는 신하 백익(伯益)을 시켜 그동안 섭렵하면서 파악했던 중국 전역의 지리와 풍물을 기록하여 책으로 펴낸 일이다. 이 책이 바로 ‘산해경’이라고 한다.
또 한 가지는 천하의 제후들이 바친 구리를 모아 아홉 개의 거대한 세발솥을 만든 일이다. 이때 우(禹)는 구리 솥의 표면에 각지의 요괴 귀신 등의 형상을 새겨 넣어 백성들로 하여금 미리 알고 해를 입지 않도록 하였다 한다. 우(禹)는 이 모든 업적으로 인하여 후세에 길이 추앙되었다.
중국인들은 항시 우를 존중하여 ‘위대한 우 임금(大禹ㆍ대우)’으로 기려왔다.
곤(鯀)과 우(禹)의 치수 신화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음미해야 할 부분이 있다.
곤(鯀)은 물길을 막아서 실패하고 우(禹)는 물길을 터서 성공하였는데 이 내용은 후세에 임금이 백성들의 언로(言路)를 잘 열어주어 비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교훈으로 활용된 것이다.
중국인들이 스스로를 용의 후예로 자처할 만큼 용의 전설이 풍부한 것도 이와 관련된다. 용은 물을 관리하는 신성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오리엔탈리즘의 혐의가 없지는 않으나 근대에 한 서구학자는 심지어 고대 중국을 ‘수력국가(水力國家)’로 규정하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곤(鯀)과 우(禹)의 치수신화는 고대 중국이 이 시점에서 부자 상속의 가부장 사회로 진입한 듯한 느낌을 우리에게 준다. 곤(鯀)과 우(禹)가 부자간에 사업을 넘겨받는 내용도 그러하지만 우가 아내와 결별하면서 아들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우가 개창한 하(夏) 왕조에 이르러 아들인 계에게 왕위를 물려줌으로써 과거에 요ㆍ순ㆍ우로 이어지던 선양(禪讓)이라는 합의 추대에 의한 왕권계승 방식이 사라지고 개별 혈통의 독점적인 왕조 국가가 출현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