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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월 간 문 학 이 야 기 원문보기 글쓴이: 순수
헤르만 헷세 Hermann Hesse
Ⅰ
서쪽에서 바람이 불어 온다. 나를 버린 글위를 흐르는
헷세의 어머니인 마리아 군데르트(1842~1902)은 인도학자이고 당시 인도에서 기독교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헤르만 군데르트(1814~1892)의 딸로서 인도에서 태어났다.
아마도 헤르만 군데르트는 헷세에게 가장 영향을 끼친 흥미로운 사람이었다. 20여년 이상 인도에서 선교활동을 마친후 유럽으로 돌아와 바젤 교구에 직책을 맡게 된다. 그는 영어뿐만 아니라 독일어, 불어, 인도어도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인도의 지방어인 테루구, 타밀, 칸나다등 10여개국 이상을 이해하고 말할 수 있었다.
헷세의 양친들은 헤르만 군데르트가 건강상의 문제로 인도로부터 돌아와 바젤교구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 만나 일년후 결혼을 하였다. 양친은 엄격한 기독교 신앙생활을 했을 뿐만 아니라, 문학에도 관심이 많았고 지적인 호기심이 컸었다.
1893년 헷세의 아버지인 요하네스는 바젤 사회의 교구장으로 활동했지만, 그의 지적인 관심은 아주 폭넓고 다양하여 라틴 문학, 그리스 철학, 동양의 종교까지 미쳤다.그의 어머니인 마리아도 문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당시 추기경인 제임스 하닝톤과 데이비드 리빙스톤의 전기를 집필하였고, 어머니ㆍ부인ㆍ딸로서 충실히 임무를 다하면서도, 4~5개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헷세가 태어난 칼우의 집〉
헷세의 유년시절은 아주 반항적이고 한곳에 몰두하는 조숙한 아이였다. 1893년까지 헷세는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문제아〉로서 학교를 전 전하였다. 1881년 초에 헷세의 양친은 헷세가 보통의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양친은 그들이 이 보통이 아닌 이 조숙한 아이를 양육할 수 있는 힘이 있는지 의구심을 가졌다. 그들은 한때 이 아이를 멀리 보낼 계획까지 가졌다.
1893년 요하네스는 「우리에게 비참한 일이지만, 이 아이를 낯선 농가나 또는 기관에 맡겨야 할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우리는 이 아이 때문에 너무 신경이 쓰이고 힘이 들어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그는 모든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것 같다. 그는 달과 구름을 보고서는 바로 발 풍금으로 연주를 하고,연필이나 펜으로 아주 재미있는 그림을 그리고 또한 자연스럽게 리듬을 이해하면서 노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라고 적고 있다. 어쨌든, 1886년 그의 가족이 칼우에 돌아 왔을 때 헷세는 잠시동안 안정이 되는 듯 했다. 헷세는 학교생활에 그의 관심을 가지지 않고 노력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성적은 학급에서 최상이었다. 1890 ~1891년간 헷세는 시험이 어렵기로 악명 높은 슈바비언주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게핑겐 라틴학교에 다녔다. 헷세는 시험에 통과하였고 가을부터 말브론(Malbron)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헷세는 수업이나 선생님과 학생들에게 아주 만족을 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의 말브론에서의 학창시절은 짧고 불행하게 끝났다. 1892년 3월 7일 그는 학교를 도망쳐 나왔고,이때부터 두통과 불면으로 고통을 받기 시작했다. 5월 7일 그는 학교를 자퇴를 하고 치료를 위해 바로 바드볼(Bad Boll)에 있는 부름하르드트(Blumhardt)로 데려가 졌다.
헷세는 이곳에서 만족하는 듯 했으나, 6월 20일 다시 유언서를 남겨 두고 권총을 사서 사라졌다. 그러나 그날 다시 침울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틀 후 그는 인근에 있는 페스토르 고트로프 샬(Pastor Gottlob Schall)로 보내졌다. 이 학교에서도 정신적인 지체와 감정이 불안한 학생으로 판명된 후에 헷세는 칼우로 되돌아 왔다. 그는 집으로 돌아 와서도 부모들이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곧바로 스테텐(Stet ten)로 보내졌다.
이 시기의 헷세의 편지에는 그의 양친에 대한 분노와 억압된 불만이 폭발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열 다섯살이 된 헷세는 그의 아버지에 대한 피해의식과 사회 인습과 권위 및 종교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헷세의 공식적인 학교생활은 스테텐(Stetten)학교로 끝났다. 이후 헷세는 고향인 칼우에서 정원손질을 하거나 할아버지의 서재에서 독서에 열중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헷세는 일년 간 칼우에서 수공업 시계공장에서 견습생으로 보냈다. 1895년 10월 17일부터 칼우에 있는 튀빙겐(Tubingun) 대학내에 있는 헤켄하우어(Heckenhauer)서점에서 견습생으로 일하면서부터,거의 주기적으로 나타났던 두통과 자살직전까지 갔던 저항감은 수그러 들기 시작했다.
헷세의 하켄하우어 서점의 견습시기는 1895년 10월 17일부터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헷세는 출판업무를 배우면서 혼자 독학을 하기 시작하였다. 저녁시간에는 내면의 세계를 조용히 응시하면서 보냈다. 때로 그는 사회의 모임에 참가하거나 친구를 만나기도 했지만, 거의 혼자서 고독한 시간을 보냈다. 헷세는 그때를「내 삶에 유익했던 일을 했던 시기」라고 적고 있다. 헷세는 많은 시간을 독일 낭만주의 문학, 특히 그를 사로 잡았던 괴테의 작품을 읽으면서 보냈다.
이 튀빙겐 시기에 헷세는 미학(Aestheticism)의 분위기 즉 아름다움(Beauty) 세계속에서 믿음과 마음의 안정을 구하였고 특히 시詩의 세계를 통해 그 자신을 발전시켜 나갔다. 헷세는 문학사에 빠져 들었고 낭만주의 세계와 미학 美學은 가장 중심 테마가 되었다. 그는 브렌타노(Brentano), 아이헨도르프(Eichendorff), 슐레이에르마헤르(Schleiermacher)을 읽었고 특히 그가 가장 좋아했던 작가는 노발리스 (Novalis)였다. 이 시기에 그가 새로 발견한 미학에 대한 신념은 헷세 초기 작품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것은「자정후 한 시간(An Hour Behind Midnight)」이란 첫 산문집의 주조음主調音이 되었고, 또한 이후 산문집인 「헤르만 라우셔(Herman Lauscher)」의 일부분이 되고,「페터 카멘진트(Peter Camenzind)」에서 마지막으로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헷세의 첫 시집은 낭만적인 시들로 묶여져 1899년에 아주 작은 부수로 발간되었다. 시들은 약간의 슬픔ㆍ고독 그리고 정신적인 무게가 주조음 主調音을 이루었고, 이 세계속에서의 불안함을 느끼고 있는 한 사내를 나타내고 있었다. 어쨌든 헷세는 이 첫시집을 통해 정확하게 시리듬을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는 조숙함을 나타냈다.
헷세의 첫 산문집인「자정후 한 시간(An Hour Behind Midnight)」은 1899년 라이프찌니히에서 에오겐 디에데르니히 (Eugen Diderichs)에 의 하여 발간되었다. 후에 헷세는 이 책에 대하여「내가 일하고 살았던 신비롭고 꿈같았던 시간과 공간의 기록」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헷세의 초기시집에 발표된 시들을 보면 우리는 바로 그의 특성을 쉽게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전나무 아래서 쉬고 있노라면 바로 이곳이었다. 내가 이끼위에 누워 세월은 흐르고 꿈은 늙어지고 최초의 꿈의 주인이 누구였는지 나는 늘 괴로워했다. 가냘픈 금발이라는 것 뿐이다.
헷세는 튜빙겐에서의 책서점 견습생활을 마치고 바젤로 돌아오기로 했다. 당시 바젤은 역사 및 문화적 중심지로 헷세를 끌어 당겼다. 1899년 헷세는 니체(Nietzche)의 작품에 대단한 흥미를 가졌으며, 그의 한평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바젤은 무엇보다도 니체, 자콥 부르크하르트(Jacob Burc kardt)와 아놀드 보크린(Arnold Bocklin)의 도시」였다고 적고 있다. 바젤에서 헷세는 바젤의 가장 영향력 있는 가문에 소개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양있고 촉망받은 젊은 예술가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라이히 서점에서 주기적으로 서점일을 하면서 자주 바젤의 유명인사들의 모임에도 참가하였다. 헷세는 바젤의 아름다움과 미술품에 처음으로 눈을 뜨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순수 문학추구에서 감각적인 아름다움과 인간교제의 즐거움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튜빙겐 시절이 주로 미학과 고독에 몰입한 시기였다면, 바젤 시절은 보다 현실에 바탕을 둔 인간관계의 안정감과 자신감이 만들어진 때였다고 볼 수 있다.
1901년 헷세는 집핍에 전념하기 위하여 출판업 일을 그만 두었다. 이 해에 헷세의 제3책이 발간되었다. 이 책에는 약 200여편의 시들이 수록되었으며,이 시편들은「신독일 시인(New German Poets)」시리즈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뷰세(Busse)은 이 시리즈의 서문에서 헷세를 신낭만주의 독일문학에서 문체가 독특한 가장 개성있고 능력있는 작가라고 소개했다. 이 책은 헷세의 어머니에게 헌정獻呈 되었지만, 어머니는 오래동안의 지병으로 이 책이 출간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4월 24일 돌아 가셨다.
〈 나의 어머님께 〉
이야기할 것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오래 전부터 당신에게 드리려는 그러나 이것을 읽고 있으면
1903년 샤무엘 피셔(Samuel Fischer)란 출판업자로부터 편지가 왔다. 이 출판업자는 헷세의 산문집인「헤르만 라우셔(Herman Lauscher)」에 깊은 감명을 받아, 헷세의 기타 작품을 보기를 원했다. 당시 헷세는「작은 산문 소품들」을 쓰고 있었다. 그 후에 이 작품들이「페터 카멘진트(Peter Camenzind)」란 소설집으로 출간되어 헷세는 일약 유명하게 되었고, 동시대의 독일문단에서 가장 존경받은 작가가 되었다.
1903년 봄, 헷세는 두번째 이태리 여행을 갔다. 여행의 동반자는 바젤에서 교양과 학문으로 유명한 명문가의 딸인 마리아 베르노울리(Maria Bernoulli) 였다. 1904년 여름에 그들은 결혼을 하고, 「페터 카멘진트」로 부터 나오는 인지세 덕택으로 헷세는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작가가 되었다.
Ⅴ
그들은 3년간 시골농가에서 살았고, 1905년 12월 9일 첫 아들인 부루노 (Bruno)가 태어났다. 이곳에서 헷세는 많은 글과 시를 썼다. 헷세는 그 자신의 땅을 가지고 새로운 집을 짓기 위해 이 농가를 떠났다. 새 집은 먼 전망이 좋고 정원이 있었으며, 종전의 농가보다는 큰 집이었다.
〈운테르세에 있는 헷세의 수채화로 그린 집〉
가이엔호펜 시절 헷세의 명성을 점차로 퍼져 나갔다. 1904년 그에게 100크라운의 상금이 주어진 바우에른펠트(Bauernfelt) 상을 받았다. 슈바비언 실러 소사어티 (Swabian Schiller Society)에서는 헷세를 회원으로 선출하였고, 헷세 소사어티(Hesse Society)가 만들어 졌다.「페터 카멘진트」는 심한 비평도 받았지만, 학생들이 읽어야 할 책으로 선정되어 오래동안 사랑을 받았다. 1911년 헷세는 「세계에 무슨 일이 일어 나는지를 알기 위해」 인도로 여행을 떠났다. 헷세는 유년시절부터 인도에 이끌렸다. 그곳은 어머니가 태어난 고향이었고 또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활동했던 곳이었다. 인도는 그에게 어떤 신비한 지역이었고, 이러한 분위기는 그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의 서재로부터 얻은 것이었다. 그러나 후에 헷세는 인도는 그가 꿈꾸어 왔던 정신적인 이상향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Ⅵ
1914년 세계 제1차대전이 발발했고, 헷세는 2년간 스위스에서 살았다. 독일 시민의 의무를 회피하지 않기 위해 그는 군 복무를 자원했지만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지원하여 포로수용소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전쟁중에 헷세는 동료들에게 정신적인 가치와 사랑을 역설하였다. 그의 평화 주창은 싸늘한 냉대로 돌아왔다. 독일 언론들은 헷세를 「반역자」로 매도하였으며, 그는 이로 인해 마음의 큰 상처를 받았다. 1915년부터 1919년 초까지, 헷세는 포로수용소 일을 헌신적으로 했다. 그의 주업무는 포로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에게 작은 도서실을 만들어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하는 일이었다. 전쟁 자체에 의한 심한 스트레스, 가장 어린 아들의 중병,결혼생활의 위기,1916년 그의 아버지의 죽음 등으로 그는 심한 우울증이 생겨,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을 돕은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여기에 더해 헷세는 심각한 불면증에 빠졌으며, 당시 유명한 심리학자였던 융(Jong)의 제자인 J.B.랑(Lang) 박사의 진단결과 이는 그의 무의식세계의 파괴로 판명되었다.
이 시기는 그의 소설 데미안의 주인공인「싱클레어시기」로 알려졌다.「데미안(Demian)」은 헷세의 소설중에 가장 중요한 책이며, 이 책은 헷세가 직접 겪었던 사실을 소설화한 심리적인 소설이다. 이 책은 전쟁으로 막 돌아온 20대의 젊은 이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파괴해야만 한다.
「데미안」이 출간될 무렵,헷세는 이미 베른에 있는 집을 떠나 다시 돌아 오지 않았다. 1918년 후반부터 헷세의 결혼 생활은 이미 끝이 났다. 아내 마리아는 정신병원이 있었고,그들의 결혼생활이 다시 시작될 희망은 없었다. 전쟁 종료후 헷세는 다시 원기를 회복하여 이후 그의 영원한 정착지가 된 스위스의 호반가에 있는 몬타뇰라(Montagnola)로 이주했다.
1919년, 헷세는 독일의 전후세대들에게 교육을 주 목적으로 하는 새로운 잡지 출간을 공동으로 시작했다. 1922년까지 헷세는 이 잡지의 공동편집을 담당하였고, 논평 집필은 계속 되었다.헷세에 의하면 1919년이 헷세의 일생에서 가장 활동적인 시기였으며, 1920년은 작품생산이 그의 작은 시기였다. 이 시기는 회상回想의 시기였고 활동이 적은 때였다.
헷세는 1919년에 「싯다르타(Siddhartha)」를 쓰기 시작하여 1922년에 이 소설을 출간하였다. 헷세 자신은 「이 소설은 거의 20년이상 밀접하게 지내왔던 왔던 인도와 중국에 대한 생각」이 수확을 거둔 결과라고 말했다. 싯다르타는 헷세가 유년시절 할아버지의 서재로부터 알게 된 신비한 동양철학과 정신세계에 몰입해 온 한 정점頂點이었다. 1923년 여름, 헷세의 결혼생활은 끝이 났고, 그 해에 그는 스위스 시민권을 얻었다. 1924년 헷세는 스위스의 작가인 리사 벤게르(Lisa Wenger)의 딸과 두번째 결혼을 하였다. 이 결혼도 1927년 다시 끝날때까지 4년에 불과했다.
1939년 9월 세계 제2차대전이 발생하기 전날, 헷세는 독일이 겪게 될 정치적인 혼돈과 그리고 끝에 나타날 결과를 예측했다. 헷세는 1차 대전때에는 깊숙이 관여 하여 정신적 육체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받아서인지, 2차대전에는 그의 전쟁의 야만성만 언급하면서 관여를 하지 않았다.
헷세는 그의 인생의 체험과 일을 소재로 쓴 「유리알 유희(The Glass Bead Game)」를 집필하였는데, 이는 그의 창작력이 절정에 이르는 소설이었다. 이 소설은 1931년부터 1942년 10년간의 그의 모든 삶이 녹아 들 어간 작품이었다. 1935년 초 헷세는 그의 편지에서 이 작품을 그의 인생과 일의 최종적인 목표라고 언급했다. 유리알 유희는 1942년 4월 29일에 집필이 끝나, 단지 스위스에서만 출판되었다. 1942년, 그가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출판사의 요구로 헷세는 그의 전시들을 모두어「헷세 시전집(Die Gegichte)」를 발간했다.이 시집에는 헷세가 50여년간 쓴 약 600여편의 시가 수록 되었다. Ⅷ
대부분, 헷세의 독자들은 그의 고백적인 작품에 대하여 아주 따뜻하게 반응했다. 독자들은 헷세의 작품을 통하여, 삶에서 그들이 전에 결코 그렇게 깊고 명료하게 체험하지 못했던 것들을 그들 스스로 자연스럽게 인식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헷세는 전 세계로부터 홍수처럼 밀려오는 편지들에 답장을 쓰었며, 답장하는 시간이 그의 중요한 일과가 되었다. 이 편지들은 약 900여통이나 되었다.
1946년, 헷세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그는 건강상의 문제로 스웨던 한림원 문학상 수상식에 참가하지 못했지만, 연설문을 통해 「나는 노벨재단에 감사를 드리며, 특히 노벨재단의 정신는 전쟁이나 파괴가 아니라 평화와 화해라고 생각한다.」는 취지를 피력했다.
비록 헷세의 인생은 「위기와 또 다른 새로운 시작」의 연속이었지만, 그의 작품들은 꾸준한 지속적인 발전을 유지해 왔다. 그는 그의 독자에게「나는 크놀프, 데미안, 싯다르타, 스테판울프와 골드문트은 나의 분신으로 그리고 각각 내 가장 중심적인 주제의 변형으로 여긴다.」라고 편지글에서 적고 있다.
What you loved and what you strove for,
네가 사랑했고 네가 추구했던 것,
〈헷세의 묘지〉
It's strange to wander in the mist! My world was filled with friendship No one is truly wise
〈 안개 속에서 〉
기이해라, 안개 속을 헤매노라면! 내 인생 아직 밝았을 때 모든 것에서, 얼쩔 수 없이 조용히 기이해라, 안개 속을 헤매노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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