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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효 : 얽매이지 않는 자[元曉不羈]1)
성사(聖師) 원효(元曉)는 속성이 설(薛)씨이다.
할아버지는 잉피공(仍皮公)인데 또한 적대공(赤大公)이라고도 한다.
지금 적대연(赤大淵) 옆에 잉피공의 사당이 있다. 아버지는 담날(談捺) 내말①이다. 처음에 압량군(押梁郡)의 남쪽〈지금의 장산군(章山郡)〉② 불지촌(佛地村) 북쪽의 밤골 사라나무③ 아래에서 태어남을 보였다. 마을 이름인 불지(佛地)는 혹은 발지촌(發智村)이라고도 한다〈속어로는 불등을촌(弗等乙村)이라고 한다〉.
사라나무는 속설에서 “성사의 집은 본래 이 골짜기 서남쪽에 있었다. 어머니가 임신하여 달이 찼을 때 마침 이 골짜기의 밤나무 아래를 지나다가 갑자기 해산하게 되어 몹시 급하여 집으로 돌아갈 수 없어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고 그 속에서 누울 자리를 삼았기 때문에 사라나무라고 한다”고하였다. 그 나무의 열매가 또한 보통과 달라 지금도 사라밤이라고 부른다.
① 내말= 신라의 17관등 중 11번째의 계급으로 5두품이 받을 수 있는 관등이다.
② 압량군(押梁郡)과 장산군(章山郡)은 지금의 경산시(慶山市)이다.
③ 사라나무[娑羅樹, sāla]는 단단한 나무라는 뜻이다.
나무껍질은 인도 서민들의 연료로, 지역에 따라서는 밧줄을 만드는 데도 쓰인다.
예로부터 전해오기를, “옛날에 어떤 절의 주지스님이 절의 노비에게 한 사람당 하루 저녁 끼니로 밤 두 개씩을 주었더니 노비가 [적다고] 관청에 소송을 하였다. 관리가 괴상히 여겨 밤을 가져다가 검사해 보았더니 한 개가 한 발우에 가득 찼다. 그래서 이제부터 오히려 한 개씩만 주라고 판결하였다. 그래서 밤골이라고 했다”고 한다. 성사가 이미 출가해서 그 집을 희사하여 절로 만들고 초개사(初開寺)라고 하였으며, 사라나무 곁에 절을 지어 사라사(裟羅寺)라고 하였다.
성사가 태어나니 어릴 때 이름은 서당이고, 집 이름은 신당이다〈당은 속어로 터를 말한다.〉 처음에 어머니가 유성이 품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그로 인해 임신하였다. 해산하려 할 때 오색구름이 땅을 덮었으니 진평왕 39년(617) 대업 13년 정축년이었다. 나면서 총명함이 남달랐고 배움에 일정한 스승을 따르지 않았다. 그 제방을 노닐은 시작과 끝[始末], 널리 펼친 무성한 자취는 당승전과 행장에 갖추어 실려 있으므로 일일이 싣지 않는다. 다만 향전(鄕傳)에 기록되어 있는, 한두 가지 다른 일만 싣는다.
성사는 일찍이, 어느 날 정신 나간 듯이 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빌려주겠는가? 나는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다듬으리라.”
사람들이 다 알지 못했는데, 그 때 태종(太宗)①이 이를 듣고 말하기를, “이 스님이 아마 귀부인을 얻어서 어진 아들을 낳고자 하는 것이리라. 나라에 크게 어진 이가 있으면 이로움이 매우 클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때 요석궁(瑤石宮)②〈지금의 학원이 이곳이다〉에 홀로 된 공주가 있었다. 왕이 궁중의 관리에게 명을 내려 원효를 찾아 맞아들이게 하였다. 궁중의 관리가 명을 받들어 그를 찾아 나섰더니 이미 남산(南山)에서 와서 문천교(蚊川橋)③〈사천(沙川)을 사람들은 새내(年川) 또는 모기내(蚊川)라고 한다.④ 또 다리 이름을 느릅다리⑤라고 한다〉를 지나다 그를 만났다. [그러자 원효스님이] 일부러 물에 빠져 옷을 적셨다. 관리가 성사를 궁으로 모셔서 옷을 벗어 말리게 하여 그 때문에 머물러 자게 되었다.
공주는 과연 임신하여 설총(薛聰)⑥을 낳았다. 설총은 나면서부터 슬기롭고 총명하였으며 경서와 역사에 널리 통달하였으니 신라 십현(十賢)⑦중의 한 사람이었다. 우리말[方音]⑧)로 중국과 주변 국가의 풍속과 문물의 이름을 회통시키고 육경⑨의 문학을 풀이하여⑩ 지금까지도 우리 해동에서 경서를 공부하는 이들이 이어받아 끊이지 않는다.
① 태종은 신라 제29대 왕인 태종 무열왕(武烈王, 603~661·재위 654~661) 김춘추(金春秋)이다.
② 요석궁(瑤石宮)은 현재의 경주 월성 서쪽에 있던 것으로 궁궐터만 남아 있다.
③ 문천교(蚊川橋)는 경주 시내의 월성 남쪽을 흐르는 남천에 있던 것으로, 현재 월정교(月精橋)라고 전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다리.
④ 사천(沙川), 새내[年川], 모기내[蚊川]는 모두 경주의 남쪽을 흐르는 남천을 가리키는 말이다.
⑤ 느릅다리[楡橋]는 “요석궁터 남쪽에 있다”
⑥『삼국사기』권46「열전」제6 ‘설총’에 따르면 설총은 배우지 않고도 도술(道術)을 알았고 일찍부터 경전과 사서에 정통하여 구경(九經)을 우리말로 읽어 후생을 가르쳐 학자들이 높이 받든다고 하였다.
⑦ 십현(十賢)은 설총을 포함하여 김대문(金大問), 최치원(崔致遠), 최승우(崔承祐), 왕거인(王巨人), 최언위(崔彦撝), 원걸(元傑), 박인범(朴仁範), 김운경(金雲卿), 김수훈(金垂訓)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⑧ 우리말[方音]은 설총이 정리했다고 알려진 ‘이두(吏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두는 한자에 의한 한국어 표기법의 한 가지로서 삼국시대부터 시작하여 19세기 말까지 사용되었다.
⑨ 육경은『시경(詩經)』,『서경(書經)』,『예기(禮記)』,『악기(樂記)』,『역경(易經)』, 『춘추(春秋)』의 여섯 가지 경서로서, 여기에서 경(經)이란 상(常)의 의미로 사람이 항상 좇아야 할 도리를 말한다.
⑩ 설총의 경전 풀이는 석독구결(釋讀口訣)을 지은 것이라고 한다. 이 구결이 경전의 표준적인 해석이 되어 신라의 국학에서 교수용으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구결(口訣)은 한문에 붙이는 한국어 토씨를 표시할 때 사용하는 문자이다. 한문을 쉽게 읽기 위해서, 또는 올바른 해석을 위해 문법 구조를 나타내기 위하여 각 구절마다 한국어 토를 다는데 그것을 기록하기 위해 한자나 한자의 약자체를 빌려서 사용하는 것이다. 구결은 한문을 해석하여 읽는 석독구결(釋讀口訣)과 한문을 그대로 읽으면서 한국어의 기능어를 삽입하는 순독구결(順讀口訣)로 대별되는데, 석독구결은 고대에 발달하였고 순독구결은 비교적 후대에 발달하였다. 현재 구결은 순독구결로서 한문에 토를 다는 데 쓰는 약식 부호로서 쓰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원효스님은 이미 계를 잃고 설총을 낳은 이후로는 속인의 옷으로 갈아입고 스스로를 소성(小姓)거사라고 불렀다. 우연히 광대들이 춤추며 희롱하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묘하고 기이하였다. 그 모양대로 만들어 도구로 삼고『화엄경』의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난다.”에 따라 이름 지어 ‘무애(無碍)’라 하였다. 그러고는 노래를 지어 세상에 유행하게 하였다. 일찍이 이것을 가지고 천촌만락을 노래하고 춤을 추며 교화하고 시를 읊으며 돌아오니, 가난한 이들과 어리석은 무리들도 다 부처님의 명호(名號)를 알게 하고 모두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를 부르게 하였으니, 원효스님의 교화가 참으로 크다.
*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난다.” 이 구절은 『화엄경』의「보살명난품(菩薩明難品)」제6에 나온다. 문수사리보살이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일승으로 생사를 벗어나셨는데, 어찌하여 지금 보니, 일체 불세계가 일마다 같지 않습니까?”(一切諸佛, 唯以一乘, 得出生死, 云何今見, 一切佛剎, 事事不同)라고 묻자, 이에 현수보살이 답한 다음 게송의 일부이다. “문수여, 법은 항상 그러하여 법왕에게는 오직 일법 뿐이니,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오직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난다.”(文殊法常爾, 法王唯一法, 一切無礙人, 一道出生死) 「보살명난품(菩薩明難品)」의 ‘명난(明難, 힐난에 대답해 밝힌다)’은 문수보살과 아홉 보살이 서로 문답을 통하여 불보살의 깨달음의 세계에 대한 일체 의심을 없애고 신심을 확고히 해준다는 의미이다.
그가 태어난 마을 이름인 불지[부처님 땅]와 절 이름인 초개[처음 열다]와 스스로 일컬어 원효[새벽을 엶]라 한 것은 모두 처음으로 부처님의 광명[佛日]을 비추었다는 뜻이다. 원효 역시 방언인데 당시 사람들은 모두 사투리로 ‘첫 새벽[始旦]’이라고 불렀다. 일찍이 분황사(芬皇寺)①에 머물면서 『화엄경소(華嚴經䟽)』를 지었는데 제4「십회향품(十迴向品)」②에 이르러 마침내 붓을 꺾었다. 또 일찍이 송사로 인하여 몸을 백 개의 소나무로 나누었으므로 다들 수행의 계위가 초지(初地)③라고 하였다. 또한 바다용의 권유로 인하여 노상에서 왕명을 받들어『삼매경소(三昧經䟽)』④를 짓는데 붓과 벼루를 소의 두 뿔 위에 놓았으므로 각승(角乘)이라고 하였으니, 또한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의 2각⑤의 미묘한 뜻을 나타낸 것이다. 대안(大安)법사⑥가 순서대로 배열하여 종이를 붙였으니 또한 마음이 통하는 사람⑦이 화답한 것이다.
① 분황사(芬皇寺)는 경주시 구황동에 있는 절이다.
② 십회향은『화엄경』에서 보살의 수행과정인 신(信), 주(住), 행(行), 회향(廻向), 지(地) 가운데 네 번째에 해당하므로 ‘제4’라고 한 것이 아닐까 추정해볼 수도 있다.
③ 60권『화엄경』의「십지품」제22에 초지보살이 출가하면 “몸을 변해 백 개로 만들고는 그 낱낱 몸에서 백 보살을 나타내어 모두 권속을 삼는다.”고 하였다.
④ 『삼매경소』는 『금강삼매경』에 대해 원효스님이 지은 주석서『금강삼매경소』 이다. 이 저술의 의의를 높이 평가하여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이라고 격을 높여 부른다. 원효스님의 실천수행관이 잘 담겨 있는 논으로 간주된다.
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는 “각의 뜻이라고 하는 것은 심체가 망념을 여읜 것을 말함이니, 망념을 여읜 상이란 허공계와 같아서 두루하지 않는 바가 없어 법계일상(法界一相)이며 바로 여래의 평등한 법신이니, 이 법신에 의하여 본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째서인가? 본각(本覺)의 뜻이란 시각(始覺)의 뜻에 대하여 말한 것이니 시각이란 바로 본각과 같기 때문이며, 시각의 뜻은 본각에 의하기 때문에 불각(不覺)이 있으며 불각에 의하므로 시각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대승기신론별기(大乘起信論別記)』에서는, “각의 뜻이라 하는 것은 곧 두 가지가 있으니 본각과 시각을 말한다. 본각이란 이 심성이 불각상을 여읜 것을 말하니, 이 각조(覺照)의 성질을 본각이라 하는 것이다. … 시각이란 바로 이 심체가 무명의 연을 따라 움직여서 망념을 일으키지만, 본각의 훈습의 힘에 의하여 차츰 각의 작용이 있으며 구경에 가서는 다시 본각과 같아지는 것이니, 이를 시각이라 말하는 것이다. 불각의 뜻을 말하는 것에도 두 가지가있으니, 첫째는 근본불각이며, 둘째는 지말불각이다. 근본불각이란 아라야식내의 근본무명을 불각이라 이름하는 것을 말하며, … 지말불각이라고 하는것은 무명에서 일어난 일체의 염법을 모두 불각이라 이름 하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다.
⑥ 대안(大安)법사는 7세기에 활동한 신라의 스님으로, 이상한 옷차림을 하고 항상 시장에서 구리그릇을 두드리며 “대안, 대안” 하고 다녔기 때문에 대안이라고 이름하였다고 한다. 왕비가 병이 나서 바다 속 용궁에 들어가『금강삼매경』을 구해 왔는데, 용궁에서 이 경은 대안성자가 뒤섞인 순서를 바로 맞추고 원효스님이 해석서를 풀어 강의하면 왕비의 병이 나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대안에게 경전을 맞추라고 명하자 대안은 궁궐에는 들어가지 않고 경전만 맞추겠다. 고 하여 8품으로 완성하였다. 대안스님은 원효스님이 아니면 해석할 수 없다고 하며 원효스님에게 빨리 가져가도록 하였고, 원효스님은 이를 받아 명작『금강삼매경론』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송고승전』권4「원효전」). 이와 같은 전승은 대안스님이 불교 교단과는 거리를 두고 활동하던 대중 포교 활동가였으며, 새로운 교학에 높은 수준의 이해를 갖추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⑦ 지음(知音)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절친한 친구를 가리키는 것으로『열자(列子)』에 나온다. 춘추시대 거문고의 달인 유백아(兪伯牙)가 자신의 음악을 알아주던 나무꾼 종자기(種子期)가 죽자 거문고 줄을 끊었다는 ‘백아절현(伯牙絶絃)’의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미 입적하자 설총이 유해를 부수어 아버지의 모습을 빚어 분황사에 안치하고 돌아가심을 공경하고 사모하는 뜻을 나타냈다. 설총이 그때 옆에서 예를 올리니 상이 갑자기 돌아보았는데 지금도 돌아본 채로 있다. 원효스님이 일찍이 머물던 혈사① 옆에 설총의 집터가 있다고 한다.
① 「서당화상비」에 의하면 원효스님이 이곳에서 70세에 입적하였다고 한다.
2. 당 신라국 황룡사 원효의 전기[唐新羅國黃龍寺元曉傳]
스님 원효는 성이 설씨이며 동해의 상주 사람이다. 어린 나이에 슬기롭게 법에 들어가 스승을 따라 학업을 받았는데 노니는 곳이 정해짐이 없었다. 의미의 경계를 용맹히 격파하고 문장의 진영을 씩씩하게 가로질러 날래고 굳세게 전진하여 앞에서 막음이 없었다. 삼학에 모두 통달하여 그 땅[신라]에서 이르기를, 만인을 대적할 만하다고 하였다. 정밀한 의해가 신의 경지에 들어간 것이 이와 같았다.
일찍이 의상법사와 함께 당나라에 들어가려고 하였으니 현장 삼장의 자은의 문을 흠모한 것이다. 그 인연이 어그러지자 마음을 쉬고 노닐었다. 얼마 안 되어 말하는 것이 사납고 함부로 하였으며 행적을 보이는 것이 빗나가고 거칠었다. 거사와 함께 주막과 기생집을 출입하였으며, 지공처럼 금칼과 쇠지팡이를 지녔다. 혹은 소를 지어서 『잡화』(『화엄경』)를 강설하기도 하였으며 혹은 거문고를 뜯으며 사당에서 즐기기도 하였다. 혹은 여염집에서 자기도 하였으며 혹은 산이나 강가에서 좌선하기도 하였다. 그 뜻대로 형편에 따르니 도무지 일정한 법식이 없었다. 그때 국왕이 백좌인왕경대회를 설치하고 두루 큰스님을 찾았다. 본 고을[상주]에서 명망을 들어 그를 천거하였으나 여러 스님들이 그 사람됨을 미워해서 왕에게 참소하여 받아들이지 않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의 부인이 머리에 악성 종기가 났는데 의사의 노력에도 효험이 없었다. 왕과 왕자, 그리고 신하들이 산천의 영험한 사당에 기도하여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어떤 무당이 말하기를, “만일 다른 나라에 사람을 보내어 약을 구해오면 병이 치료될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곧 사자를 보내어 바다 건너 당나라에 가서 그 의술을 구해 오게 하였다.
넓고 깊어 어두운 물속에서 홀연히 한 노인이 나타나 파도를 타고 배 위에 뛰어올라서는 사자를 맞이하여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궁전의 장엄함과 화려함을 보고 용왕을 알현하였다. 왕의 이름은 금해였는데 사자에게 말하였다. “그대 나라 왕비는 청제 의 셋째 딸이다. 우리 궁중에 전부터『금강삼매경』이 있었으니 이에 두 가지 각(覺)이 원만히 통하고 보살행을 보인것이다. 이제 왕비의 병에 의탁하여 증상(增上)의 인연을 삼아 이 경을 부쳐서 그대 나라에 출현시켜 유포하고자 할 따름이다.”
이에 30장쯤 되는 중첩되고 흩어진 경전을 사자에게 주면서 다시 말하기를, “이 경전이 바다를 건너는 도중에 마구니의 장난에 걸릴까 두렵다”고하였다. 왕이 사람을 시켜 사자의 장딴지를 칼로 찢어서 그 안에 [경을] 넣고 밀랍 종이로 봉하고 약을 바르니 장딴지가 예전과 같았다.
용왕이 말하기를, “가령 대안성자에게 차례를 매겨 꿰매게 하고 원효법사를 청하여 소를 지어 강의하고 풀이하게 한다면 왕비의 병이 낫는 것은 의심할 바 없을 것이다. 가령 설산의 아가타약①의 효력도 이보다 더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용왕이 전송하여 바다 위로 나와서 드디어 배에 올라 귀국하였다.
① 아가타(阿伽陀, agada)는 불사약(不死藥)으로도 불린다.
그때 왕이 듣고서 기뻐하여 곧 먼저 대안성자를 불러서 차례대로 묶게 하였다. 대안성자는 헤아리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형색과 차림새가 특이하였으며, 항상 저자거리에서 구리로 만든 발우를 두드리며 “크게 편안하시오, 크게 편안하시오[大安]”라고 외쳤기 때문에 대안이라고 이름 한 것이다. 왕이 대안에게 명하니 대안이 말하기를, “그저 경전만 가져 오십시오. 왕의 궁궐에는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대안이 경전을 받아 배열하여 여덟품을 만드니 모두 부처님의 뜻에 합치하였다. 대안은 “속히 원효에게 가져다주어 강의하게 하십시오. 다른 사람은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원효가 이 경전을 받은 것은 바로 본래 태어난 상주에 있을 때였다. 사자에게 말하기를, “이 경전은 본각과 시각의 두 가지 깨달음으로 종지를 삼습니다. 나를 위해 소가 끄는 수레[角乘]를 준비하여 책상을 두 뿔 사이에 두고 붓과 벼루를 비치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소가 끄는 수레에서 『소』를 지어 다섯 권을 만들었다. 왕이 요청하여 날을 정해황룡사에서 강설하기로 하였다. 그때 박덕한 무리들이 새로 지은『소』를 훔쳐가버렸다.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어 사흘을 연기하여 다시 적어 세 권으로 만들었으니 이를『약소』라고 한다.
왕과 신하, 스님들과 속인에 이르기까지 법당을 구름같이 에워쌌다. 원효가 이에 설법함에 위의가 있었으며, 얽힌 것을 풀어줌에 법칙으로 삼을만했다. [사람들이] 칭찬하고 찬양하며 손가락을 부딪치니 그 소리가 허공에 들끓었다. 원효가 다시 소리 높혀 말하기를, “지난 날 백 개의 서까래를 고를 때에는 비록 모임에 참예하지 못하였으나 오늘 아침 하나의 들보를 놓는 곳에서는 오직 나 홀로 가능하구나!”라고 하였다. 그때 모든 이름 높은 대덕들이 얼굴을 숙여 부끄러워하고 엎드려 참회하였다.
처음에 원효가 행적을 보인 것이 항상 함이 없었으며 사람을 교화하는 것도 일정하지 않았다. 혹은 소반을 던져 대중을 구하기도 하고, 혹은 물을 뿜어 불을 끄기도 하고, 혹은 여러 곳에 모습을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모든 곳에 입멸할 것을 알리기도 하였으니 또한 배도②와 지공의 부류라 할 것이다. 그 신해(神解)한 성품에서 살펴보면 밝지 않은 것이 없었다.
『소』에 광본과 약본의 두 가지가 있으니 모두 본토(신라)에서 유행하였다. 약본은 중국에 유입되어 후에 번경삼장이 그것을 고쳐『논』이라고 하였다.
② 배도(盃渡)는 배도(杯渡, ?~426)를 가리킨다. 배도에 대해서『양고승전』권10에서는 “배도(杯渡)는 성명을 알지 못한다. 항상 나무 술잔을 타고 강물을 건너 다녔으므로 배도라 불렀다. 처음 나타난 곳은 기주(冀州)였다. 세밀한 행은 닦지 않았다. 그러나 신비한 힘이 탁월하여, 세상에서 그 유래를 헤아리지 못하였다.”고 하며 이후 그의 기이한 행적을 길게 소개하고 있다.
덧붙여 말한다.
“바다 용의 궁전은 어디로부터 경본을 가지고 있었는가?” 소통시켜 말한다.
“경에 이르기를, ‘용왕의 궁전에 칠보탑이 있고 모든 부처님께서 설하신 모든 깊은 교의가 따로 칠보 상자에 가득 담겨 있었으니 십이인연③과 총지④와 삼매 등이다’라고 하였다. 진실로 이 경전을 합해서 세간에 유행시키고 다시 대안과 원효스님의 신이함을 드러내었으니 왕비의 병이 가르침을 일으키는 큰 실마리가 되게 하였다.”
③ 십이연기= ①미혹함의 근본인 무명(無明, avidyā), ②무명으로부터 다음의 의식 작용을 일으키는 업인 행(行, samskāra), ③의식 작용인 식(識, vijñāna), ④마음과 물질을 가리키는 명색(名色, nāmarūpa), ⑤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 오관(五官)과 의근(意根)의 육처(六處, sad-āyatana), ⑥육근이 대상과 만나는 촉(觸, sparśa), ⑦육근과 대상의 접촉을 통해 받아들이는 감각인 수(受, vedanā), ⑧고통을 피하고 즐거움을 구하는 애(愛, trsnā), ⑨자기가 욕구하는 것을 취하는 취(取, upādāna), ⑩다음 세상의 결과를 불러올 업인 유(有, bhava), ⑪이생에서 몸을 받아 태어나는 생(生, jāti), ⑫늙어서 죽는 노사(老死, jarāmaran3 a)이다. 십이인연에 대해서 전통적으로 삼세에 걸친 이중의 인과로 해석하며 다른 해석으로는 한 찰나에 이 모든 것을 갖춘다고도 한다. 십이연기를 중생이 업을 받는 쪽으로 따라가는 것을 유전연기(流轉緣起), 업을 소멸하는 쪽으로 따라가는 것을 환멸연기(還滅緣起)라고 한다.
④ 총지는 다라니(陀羅尼, dhāranī)의 번역이다. 짧은 구절로 된 것은 진언(眞言) 또는 주(呪)라 하고, 긴 구절로 된 것은 다라니 또는 대주(大呪)라고 한다.
3. 당 신라국 의상의 전기[唐新羅國義湘傳]중에서
[의상은] 원효법사와 뜻을 같이 하여 서쪽으로 유학하고자 하였다. 갑자기 중도에 궂은비를 만났는데, 마침 길가의 토굴 사이에 몸을 숨기게 되어서 비바람을 피했다. 이튿날 아침에 자세히 보니 오래된 무덤에 해골이 옆에 있었다. 하늘은 여전히 가랑비가 내리고 땅도 진흙이어서 한 걸음도 나아가기 어려웠다. 그대로 머물며 나서지 못하고 또 무덤굴 벽에 기대어 있었다. 밤이 깊어갈 무렵 갑자기 귀신이 나타나 괴이하였다.
원효스님이 탄식하기를, “어제 여기에서 머물며 잤을 때에는 토굴이라며 또한 편안했는데 오늘 밤은 잠깐 머물면서도 귀신의 동네에 의탁하니 동티가 심한 것이구나. 곧 마음이 생하므로 갖가지 법이 생하고 마음이 멸하므로 토굴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알겠도다. 또한 삼계는 오직 마음이요, 만법은 오직 식뿐이다. 마음 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으리라” 하고는 곧 짐을 챙겨 되돌아왔다.
4. 원효국사의 전기[元曉國師傳]
스님의 성은 설씨이고 이름은 서당이며 신라 압량군〈지금의 경산이다〉 불지촌 사람이다. 어머니가 별이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잉태하였으며, 해산할 무렵 오색구름이 땅을 덮으며 태어났다. 수 양제 대업 10년, 신라진평왕 39년 정축년(617)이었다.
다 자라서 당나라로 도를 찾아 들어갈 때 밤에 무덤 사이에서 머물게 되었다. 갈증이 심하여 손으로 움켜서 물을 마셨는데 매우 달고 시원하였다. 이튿날 아침 그것을 보니 해골이었다. 홀연히 맹렬하게 자신을 성찰하고 탄식하였다. “마음이 생하면 갖가지 법이 생하고 마음이 멸하면 해골도 둘이 아니다. 여래께서 말씀하시길, 삼계가 오직 마음이라 하셨으니 어찌 나를 속이셨겠는가!” 마침내 다시 스승을 구하지 않고 곧 본국으로 돌아와 『화엄경』을 주석하였다.
일찍이 정신 나간 듯이 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빌려주겠는가? 하늘을 받칠 기둥을 다듬으리라.” 사람들은 아무도 [그 노래의 뜻을] 알지 못했다. 당시에 태종이 노래를 듣고 말하기를,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아들을 낳으려 하는구나.”라고 하였다. 그때 요석궁에 홀로 된 공주가 있었다. 원효스님을 궁으로 모셔 맞아들여 그 곳에서 머물게 되어 과연 설총을 낳았다. 설총은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슬기로워서 경서와 역사에 널리 통달하여 신라 십현 중의 한 사람이었다. 방언을 지어 문물의 이름을 회통시키고 육경을 풀이하여 벼슬이 한림에 이르렀다. 고려 현종 임금이 홍유후로 추증하고 문묘에 모셔 제사지내도록 하였다.
스님은 일찍이 분황사에 머물며『화엄경소』를 지었는데 제4「십회향품」에 이르러 붓을 꺾었다. 또『삼매경소』를 지어 각승이라고 불렀는데 소를 타고 두 뿔 사이에 걸어놓고 지었다는 말이다. 입적하자 설총이 분황사에 아버지의 모습을 소상으로 만들어 모셨다. 그때 곁에서 상에 예를 올리자 상이 홀연히 돌아보았다.
상주 사불산에 원효암과 의상암 두 암자의 터가 있고, 영변 묘향산에 척판대①가 있으며, 동래 금정산에는 원효암과 화엄대가 있다. 해남 두륜산에 원효대와 의상대가 있고, 광주 무등산에 원효암이 있으며, 양주 소요산에 탁석천②과 관음송③과 화정공주의 대궐터가 있다. 고려 숙종 임금은화정국사라는 시호를 내렸다.④
① 척판대는『송고승전』에 나오는 “혹은 소반을 던져 대중을 구하기도 하고”라는 원효의 행적과 관련된 곳이다.「묘향산척판대사적기」에 따르면 당의 태화사(泰和寺)가 무너져 천 명의 대중이 매몰될 위기에 처한 것을 안 원효가 ‘해동원효척판구중(海東元曉擲板救衆)’이라고 쓴 소반을 날려서 그들을 구했다는 설화가 전한다.
② 탁석천(卓錫泉)은 지팡이를 꽂은 자리에서 나온 샘물이다. 또, 탁석은 스님이 지팡이를 꽂았다는 의미에서 한 절에 머물게 되었다는 뜻으로 쓰인다. 탁석천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혜가스님의 수행처인 숭산(嵩山) 이조암(二祖庵)에 있는 탁석천이다. 혜가스님이 처음 이 터에서 수행할 때는 물이 없어 고생스러웠다고 한다. 이를 안 달마스님이 찾아와 짚고 있던 지팡이로 땅을 치니 물이 솟아 우물을 만들었다는 얘기가 전한다.
③ 『삼국유사』 「낙산이대성 관음 정취 조신」조에 원효가 관음을 친견한 이야기가 나온다. 원효가 낙산사 근처에 갔을 때 한 여인이 월경이 묻은 옷을 빨고 있어서 물을 청했더니 더러운 물을 주었다. 원효가 그 물을 버리고 다시 냇물을 떠 마시자 근처 소나무 위에 있던 파랑새가 “제호를 마다했다”고 꾸짖고 사라졌다. 그 아래에 신발 한 짝이 있었다. 절에 도착하자 관음의 자리 밑에 그 신발이 있음을 보고 관음을 만난 것을 알게 되었으며, 사람들이 그 나무를 관음송이라고 했다고 한다.
④ 『고려사』권11숙종 6년(1101) 8월 계사조에는 원효스님에게 ‘화쟁국사(和諍國
師)’라는 시호를 내렸다고 하였다.
[자료출처] = 붓다의 옛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