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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3 현종실록 1권, 현종 대왕 행장(行狀 )164-3
인선 왕후(仁宣王后)의 상을 당하게 되자, 예관이 처음에는 기년으로 대왕 대비(大王大妃)의 복제를 정하였는데, 이는 대개 당(唐)·송(宋) 때 적부(嫡婦)에게 입어주는 상복의 제도를 사용한 것이다. 외부의 의논은 ‘효종 대왕이 이미 서자(庶子)가 되었으니 인선 왕후가 적부(嫡婦)가 될 수가 없다." 하면서 비평하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 송시열에게 편당하는 자가 또 앞뒤099) 의 복제가 다르다 하여, 예관 조형(趙珩) 등에게 부탁하여 대공(大功)으로 고쳐 표지를 붙여 들였는데, 대개 서부(庶婦)에게 입어주는 상복 제도를 사용한 것이다. 왕이 앞뒤가 전도되었다 하여 예관을 가두고 치죄하였다. 그러나 대공의 복제가 또한 시행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빈청(賓廳)에서 모여 의논하는 일이 있었는데, 7월 13일이었다. 왕이 깨닫고 뜻이 불끈 솟구쳐 친히 《예경(禮經)》을 고증하여, 《예경(禮經)》 주소(注疏)의 ‘적처(嫡妻)에게서 난 둘째 아들을 세워도 또한 장자(長子)라고 부른다.’는 문구로 주장을 삼아, 대왕 대비의 복제를 대공에서 기년으로 고쳐 입게 하였다. 이에 적통(嫡統)이 밝아지고 나라의 예가 엄해지는 동시에 인심도 흡족히 여기었다. 왕의 뜻을 여쭈어 보지 않고 마음대로 복제를 고쳤다 하여 예관을 죄주고, 《예경(禮經)》을 따르지 않고 다른 논의에 의탁하였다 하여 수상을 죄주었는데, 빌붙은 여러 사람은 모두 차례로 벌을 받았다. 또 장차 내치고 들어쓰는 일을 크게 밝혀 국시(國是)를 바르게 하고 종묘를 존중되게 하려 하였는데, 왕의 건강이 좋지 않았다.
8월 7일에 다시 재신(宰臣)을 불러 빈청에 모이게 하고 불러들여 일을 의논하려 하였는데, 갑자기 병이 들어 실행하지 못하였다. 12일이 지나 창덕궁(昌德宮)의 재려(齎廬)100) 에서 승하하니 춘추 겨우 34세였고 왕위에 있은 지 15년이었다. 아, 슬프도다!
왕이 어려서부터 숙성함을 타고나 어려서도 장난을 좋아하지 않았다. 춘궁(春宮)에 있을 적에 효도를 다하여 증자(曾子)·민자(閔子)의 덕행이 있었고 왕위에 오르게 되자 정신을 가다듬어 정치에 힘쓰고 조상의 사업과 뜻을 잇는 일에 마음을 두었다. 대비 및 대왕 대비에게 효성을 다해 섬겨 비평하는 말이 없었고, 기쁘고 화락한 얼굴빛과 아침 저녁으로 문안하는 예를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으니 양전(兩殿)이 기뻐하고 궁중에 화기가 넘쳐 흘렀다.
대왕 대비가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과도하게 슬퍼하다가 병이 위급하자, 왕이 뜨락의 한데에 앉아서 의원을 불러 약을 묻고, 손수 약물을 가지고 들어가서 올리니, 이 말을 듣는 이들이 감동하였다.
왕대비가 처음 통명전(通明殿)에서 거처하였는데, 왕의 거처와 조금 사이가 떨어졌었다. 왕이 왕대비를 위해 집상전(集祥殿)을 지어 옮겨 모시려 하였다. 집상전이 완성되기 전에 대조전(大造殿)으로 옮겨 거처하기를 청하고 자신은 부근의 별실(別室)에 거처하여 봉양하는 데 편리하게 하였다. 대비가 묵은 병이 있었는데 왕이 밤낮으로 정성을 다해 그 마음을 위로하였다. 대비가 일찍이 말하기를,
"왕이 매양 곁에 있으니 병이 몸에서 떠나가는 것 같다."
하였다.
일찍이 대왕 대비를 모시고 남군(南郡)101) 에 거둥하여 온천에 목욕하여 효과를 보았는데, 왕이 도내에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을 크게 베풀었다. 환궁하여 또 조정과 종친에게 은전을 베풀고 제도(諸道)에까지 일체로 행하였다. 이는 대개 내 노인을 노인으로 존경하는 마음을 미루어 남의 노인을 존경하는 은혜[老老之恩]를 미루어 시행한 것이다.
세시(歲時)에 항상 부로(父老)들을 위문하고 혹은 달마다 늠료(廩料)를 주기도 하였으며 재신에게는 달마다 쌀과 고기를 계속 보내 주었다. 판서 박장원(朴長遠)이 어머니에게 효도하였는데 그가 먼저 죽자, 왕이 특별히 명하여 그의 어머니에게 종신토록 늠료를 주게 하였다. 가까이 모시는 신하들 중에 어머니가 늙었다 하여 돌아가 봉양하기를 청하면 왕은 윤허하지 않고 쌀·고기·옷감들을 넉넉하게 주라고 명하였다. 부모의 봉양을 위해 주군(州郡)의 수령을 원하는 자가 있으면 곧 허락해 주고, 혹 그 사람이 지방관으로 나가는 것이 아까우면 특별히 쌀과 베를 주었는데, 그 효도로 다스림이 이와 같았다.
왕에게 다섯 자매가 있었는데, 매우 사랑하였고 똑같이 대우해 주었다. 좋은 음식을 얻게 되면 반드시 나누어 먹고, 병이 났다는 말을 들으면 놀라고 근심하여 문병으로 보내는 사람과 약을 가지고 가게 한 사람이 끊이지 않았으며 죽었을 경우에는 비통해 마지않았다. 신하들의 상소에 죄없이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의 형제를 모함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몹시 미워하고 통렬히 배척하였다.
소현 세자의 딸이 황창 부위(黃昌副尉) 변광보(邊光輔)에게 출가하였는데,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슬퍼하면서 말하기를,
"선조(先朝)의 사랑이 여러 부마(駙馬)보다 못하지 않았다. 이런 일들을 생각해 볼 때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특별히 해조(該曹)로 하여금 보살펴 주게 하여 선왕께서 시종 한결같이 하신 뜻을 보존하도록 하라."
하였다. 친족과 매우 화목하여 곡진한 은혜의 뜻이 있었고, 친분을 헤아려 돌보아 주어 끊임이 없었다. 왕이 귀척(貴戚)에게 대우를 융숭히 하였으나 사정에 흔들려 공사를 해친 적이 없었다. 여러 궁가(宮家)의 하인들이 한 번이라도 법을 범하여 방종한 자가 있으면 반드시 유사(有司)에게 회부하여 법으로 통렬히 다스렸다.
학문에 마음을 두어 의리를 강구하고, 질병이 있지 않으면 반드시 경연에 나갔다. 또 전대의 역사를 강구하기를 좋아하여, 그 임금의 수덕(修德) 여부와 정치의 득실, 민생의 고락에 대해 부지런히 토론하여 거울로 삼았다. 견해가 고명하여 항상 강관(講官)의 견해보다 뛰어났다.
동궁(東宮)에 있을 적에 이미 심리학에 뜻을 두어 선유(先儒)의 인심 도심설(人心道心說)을 써서 들이게 하여 살피고 음미하는 자료에 대비하였다. 일찍이 《대학(大學)》을 강할 적에 왕이 이르기를,
"몸을 닦는 데서부터 천하를 다스리는 데에 이르기까지 경(敬) 자의 공부가 아닌 것이 없다."
하고, 《중용(中庸)》을 강할 적에 왕이 이르기를,
"사람이 도(道)를 멀리 있다고 여기는 것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이어서 묻기를,
"어떤 것이 비근(卑近)한 것이고 어떤 것이 고원(高遠)한 것인가?"
하니, 강관이 아뢰기를,
"사람의 일이 비근한 것이고 불씨(佛氏)와 노자(老子)의 교리(校理)가 곧 고원한 것입니다."
하자, 왕이 이르기를,
"반드시 불씨와 노자(老子)뿐만 아니라, 자기에게 절실하지 않은 것이 곧 고원한 것이다."
하였다.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할 적에 왕이 이르기를,
"격물·치지(格物致知)하는 방법이 이 책에 모두 구비되어 있다. 비록 격물·치지를 한다고 하더라도 성의(誠意)를 하지 않는다면 어디에다 공력을 쓸 수 있겠는가. 또 반드시 성의의 공부가 있어야만 격물·치지한 바가 배치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서경(書經)》을 강할 적에 익직편(益稷篇)의 ‘제(帝)여, 제위(帝位)에 계심을 삼가소서.’라는 대목에 이르자, 왕이 이르기를,
"임금이 임금의 자리에 있는 도리는 삼간다는 신(愼)의 한 글자보다 더 큰 것이 없다. ‘기미를 생각하여 편안함을 생각한다.[惟幾惟康]’는 것은 대개 공부하는 데 매우 요긴한 곳을 말한 것이다. 기미[幾]란 생각하는 시초이고 편안함[康]이란 안락한 즈음이니, 더욱 삼가해야 한다."
하였다. 역대의 일을 강할 적에 강관이 아뢰기를,
"한 문제(漢文帝)는 자질이 높지 아니한 것은 아니나, 배운 바가 다만 황제(黃帝)·노자(老子)의 도(道)였으므로 몸소 현묵(玄默)을 행하느라 옛날 성왕(聖王)의 정치를 회복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옛 사람이 말하기를 ‘순(舜)은 어떠한 사람이며 나는 어떠한 사람인가. 문왕(文王)은 내 스승이다.’102) 하였는데, ‘겨를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한 무제가 제 양공(齊襄公)이 복수한 말을 인용한 것103) 을 살펴보면 규모가 매우 컸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고, 무력을 함부로 남용하였으나 마침내 패망하지 않은 것은 윤대(輪對)의 뉘우침104) 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무력을 함부로 남용한 것은 다른 게 아니라 한 고제(漢高帝)가 평성(平城)의 근심을 남겼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자질이 이와 같았으므로 말년에 그것이 잘못된 일이었다는 것을 알고 곧바로 윤대를 버리는 조칙(詔勅)을 내리고 또한 신선 구하는 일을 파할 수 있었던 것105) 이다."
하였다. 당 태종(唐太宗)이 군사를 일으킬 때의 일에 이르러서 장관으로 하여금 범엽(范曄)이 논단한 사평(史評)을 읽게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아버지를 협제(脅制)하고, 오랑캐를 신하로 삼았다106) 는 설은 더욱 준절(峻截)하다."
하였다. 건성(建成)의 일107) 을 논하기를,
"명나라 태종조(太宗朝)에 한왕(漢王) 고후(高煦)는 사람됨이 선량하지 못하였으나, 인종(仁宗)이 태자가 되어 은혜와 사랑으로 대우하니, 인종의 세대가 끝날 때까지 감히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하였다. 가령, 건성이 태종을 이와 같이 대우하였더라면 어찌 피를 흘리는 변고가 있었겠는가."
하였다. 송 태조(宋太祖)가 한잔 술로 병권을 해제한 일108) 을 강할 적에 강관이 아뢰기를,
"이것은 권모 술수에 가깝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무슨 지장이 있겠는가. 이것은 인심을 열복(悅服)시킨 것이다."
하였다. 송 진종(宋眞宗)이 천서(天書)로써 태묘(太廟)에 고한 것109) 에 이르러 이르기를,
"스스로를 속이는 것도 안 될 일인데, 하늘에 계신 조종(祖宗)의 영혼을 속일 수 있겠는가. 진종의 초기 정사는 또한 볼 만하였는데, 간사한 소인에게 그르친 바가 되어 그 마지막을 잘 끝내지 못하였으니 심히 경계할 만하다."
하였다. 왕이 경연에 임하여 강논한 말씀 중에 아름다운 말이 매우 많았으나 다 기록하지 못하였다.
강을 정지하던 날에는 또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사기를 고열(考閱)하여 정치하는 데에 절실한 고사(故事)를 써서 올리게 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써서 올린 바의 고사가 볼 만할 뿐만 아니라, 또 풍자하고 깨우치는 뜻이 많으니 내 유념하겠다."
하였다. 밤에 측근의 신하를 불러 보고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강마하고 백성의 일에까지 물으니, 정의가 서로 부합되어 마치 가정의 부자 사이와도 같았다. 왕이 눈병이 있었으나 촛불에 책을 보았다. 신료들이 더 덧칠까 두려워하자, 왕이 이르기를,
"겨울밤이 매우 길고 또 내가 잠이 없어 삼경 전에는 잠자리에 들지 못하니 책을 보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뒤에 눈병이 심해지자, 옥당으로 하여금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을 써서 올리게 하되 그 글자를 크게 써서 열람하는 데 편리하도록 하였다. 비록 병환 중에 있었으나 학문에 항상 이와 같이 힘썼다.
대신을 예우하여, 말을 하면 의견을 굽혀 따르지 않은 적이 없었다. 병이 들면 의원과 약을 보내 문병하고 죽었을 경우에는 상(喪)이 끝날 때까지 녹봉을 그대로 주고 혹은 제수(祭需)까지 주었으며, 혹은 안석[几]과 지팡이를 특별히 하사한 적도 있었다. 유학(儒學)을 중시하는 선왕의 뜻을 왕이 이어받아 송시열·송준길 등을 대접함에 있어 은우(恩遇)가 매우 융숭하였으며, 이유태·이상(李翔) 등 여러 사람도 초빙하여 아울러 특별한 예로 대우하였다. 그리하여 송시열은 마침내 의정(議政)에 제수되고, 송준길은 지위가 삼재(三宰)110) 에 이르렀다. 송시열·송준길 등이 예를 그르친 일이 발각되게 되자, 사당(私黨)을 지어 자기와 다른 사람을 배척하는 마음을 갖고서 효종의 능을 옮긴 뒤에 소를 올려 뒤늦게 지난 일을 탓하니, 왕이 그의 편벽됨을 미워하여 대우가 약해졌다.
처음 왕이 송시열 등을 대우할 적에 정성과 예의가 아주 지극하여 전고보다 특출하자 조정과 재야에서 그들의 풍채를 사모하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송시열 등이 잘 받들지 못하고 도와주는 바가 없어 실패를 가져오게 되었으며, 좌우의 두세 명 신하에 이르러서도 그들이 이끄는 대로 행동만 한 채 국사를 담당하고 보필하여 공적을 이룬 게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모두 ‘임금은 있으나 신하는 없다.’고 탄식하였다.
왕은 여러 신하를 매우 너그럽고 후하게 대우하였는데, 항상 말하기를,
"임금 노릇하는 도리는 아랫사람에게 시기와 의심으로 대하면 아랫사람이 반드시 불안한 마음을 갖게 되므로 오직 성의를 미루어 대해야 하는 것이다."
하였다. 언로(言路)를 열기에 힘써 비록 남을 공격하고 남의 비밀을 들추어내는 정직한 체하는 자일지라도 반드시 받아들여 너그러이 용납하고 혹은 포상하여 장려하기도 하였다. 비록 초야의 미천한 사람의 말이라도 반드시 채택하여 기록하게 하고 혹은 벼슬을 제수하기도 하고 혹은 상을 내리기도 하였다. 화재로 집을 잃은 측근의 신하가 있었는데 특별히 호조에 명하여 구제하게 하였다. 그들이 죽었을 때 노고한 행의(行誼)가 있거나 혹은 청렴 근신(謹愼)으로 드러났을 경우에는 관례로 보내는 부의(賻儀) 이외에 별도로 관재(棺材)를 하사하고 혹은 상수(喪需)·제수(祭需) 및 일꾼을 보내 도와주고 아울러 그들의 아내와 자식의 굶주림과 추위를 구제해 주었으며, 작고한 훈신(勳臣)의 아내와 자식에게도 그와 같이 하였다.
임인년111) 에 청나라에서 사사(査使)112) 를 보내어, 의주 부윤(義州府尹) 이시술(李時術)이 본부의 사람이 강을 건너가 나무를 베게 허락하였다 하여 사형으로 단안을 내렸다. 왕이 반복하여 굳이 변론했으나 해결되지 않자, 특별히 이시술에게 금 5백 근을 주어 그들에게 뇌물을 써서 화를 해결하는 자본으로 삼게 하였다. 그리고 사관(査官)을 특별하게 접대하고 이어서 사신을 보내어 구하였는데, 이시술이 이에 힘입어 완전히 모면하였다. 신하를 자신의 몸처럼 보살핌이 이와 같았다.
조정이 화목하지 못한 것을 고민하여 매양 서로 삼가고 협력하는 도리로 책려(策勵)하고, 방백과 수령이 조정을 하직하고 임지로 떠날 적에는 병이 있지 아니하면 곧 불러보고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를 물어본 다음 백성을 어루만지고 사랑하는 방도를 거듭 일러주었다. 또 전임(前任) 때의 폐막을 묻고는 아뢴 바에 따라 곧 변통하게 하였다.
인재를 수용(收用)하되 먼 지방의 사람도 빼놓지 않았다. 서북(西北) 양도(兩道) 지방은 길이 멀고 제주(濟州)는 바다 속에 있다 하여 특별히 중신과 근신(近臣)을 보내어 과거를 보여 인재를 뽑게 하고 백성을 구제하게 하니, 먼 지방 사람이 모두 고무되었다. 향천(鄕薦)113) 의 법을 거듭 밝히고 또 재신(宰臣)과 삼사(三司)로 하여금 인재를 별도로 천거하게 한 다음 재능이 특이한 자가 있으면 평상의 격례에 구애하지 않고 발탁해 썼다.
또 항상 이조에 신칙하여 전사한 사람 및 청백리의 자손을 녹용(錄用)하게 하고, 혼조(昏朝) 때 원통하게 죽은 사람에 있어서도 증직하라고 하였다. 그 뒤에 충신·현사(賢士) 중에 특출한 자는 모두 기록하여 혹은 사당을 세우거나 관작을 추증하기도 하고 혹은 비를 세우거나 무덤을 표지(表識)하기도 하고 그 후예에게 벼슬을 주기도 하고 혹은 그 호역(戶役)을 면제해 주기도 하는 등 표창하는 은전이 거의 빠뜨림이 없었다. 효자나 열녀 중에 행실이 드러난 자에게는 곧바로 정문을 세워서 표창하였는데, 서민과 노비에게도 두루 미치었다. 한번은 경연의 신하와 세조 때 성삼문(成三問)의 일에 대해 의논하게 되었는데, 왕이 이르기를,
"성삼문 등은명나라 방효유(方孝孺)114) 등과 같은 사람이다."
하였으니, 충의(忠義)를 포상하고 높이는 뜻이 이와 같았다.
백성의 일은 지성으로 근심하고 노고하였다. 만일 상위(象緯)115) 의 변고나 수재·한재를 만나면 곧바로 정전(正殿)을 피해 거처하고, 수라의 가짓수를 줄이고, 자기 자신에게 죄를 돌리고, 도움되는 말을 구하였는데, 전후로 내린 애통한 교서가 신민으로서 차마 듣지 못할 정도였다. 비가 내리기를 빌 적마다 친히 제사지내지 않더라도 반드시 궁중에서 재계한 다음 밤새도록 한데 서서 묵묵히 기도하고 기우제를 파할 때가 되어서야 편히 쉬었다.
만일 재난과 흉년을 만나면 신료들을 불러들여 재변을 사라지게 하는 계책을 강구하고 진구하는 정사를 크게 거행하였다. 그리하여 조세와 공물을 면제하고 포흠진 것을 감면하며 혹은 곡식을 옮겨다가 구제하기도 하고 혹은 죽을 쑤어 그들을 먹였다. 돌림병이 나돌면 양의(良醫)를 나누어 파견하여 약을 가지고 가서 구제하게 하였다. 또 측근의 신하를 보내어 여제(厲祭)를 지내고 국상(國殤)에게 제사지냈다. 그리고 조석으로 공급하는 어주(御廚)의 물품을 절약하고 초하루와 명절에 올리는 외방의 공물 헌납을 정지하고, 주방(酒房)을 파하고, 어구(御廐)의 말을 방출하였으며, 공상(供上)하는 일용의 물품에 이르기까지 또한 모두 재량하여 줄였다. 또 내장(內藏)116) 과 각 아문에 저축된 것을 풀어서 진휼에 돕게 하였는데, 곤궁한 백성에게 은혜를 베푼 정사가 하나뿐만이 아니었으나, 오래 갈수록 더욱 독실하였다. 항상 말하기를,
"백성이 굶주리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먹는 것이 목에 넘어가지 않고 잠자리가 편치 않았다. 만일 한 가지라도 백성을 살릴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아까운 물건이 뭐가 있겠는가."
하였다. 진휼을 파한 뒤에 또 어사를 보내어 제도(諸道)의 수령이 진휼의 정사를 잘 거행했는지의 여부를 염탐하게 한 다음 승진시키거나 벌을 주었다. 경술·신해 두 해에 이르러서는 팔도가 크게 기근이 들고 이어서 큰 돌림병이 떠돌았다. 왕이 밤낮으로 애태우며 성의를 다해 구제하되 더욱 여러모로 힘을 기울였다.
임자년117) 봄에 국내에 선유(宣諭)하여 여러 해 동안 포탈된 부세(賦稅)를 모두 탕감하게 하고 이어서 죄수 및 폐고(廢錮)된 사람을 모두 처결하여 방면하고 서용(叙用)하게 하니, 백성들이 매우 기뻐하였다. 이 때문에 크게 흉년이 들어 길에 굶어 죽은 사람이 즐비하였으나 포악한 백성이 일어나지 않고 나라의 근본이 흔들리지 않았다. 중외(中外)에서 물에 빠져 죽거나 불에 타서 죽거나 맹수에 해독을 입은 자가 있다고 아뢰면 또한 반드시 돌보아주게 하였다. 겨울철에 호위하는 병사가 추위에 고생하는 것을 염려하여 특별히 동옷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한번은 능침(陵寢)을 참배하는데 벼를 수확하기 전의 절기였다. 왕이 영을 내려 이르기를,
"나를 수행하는 신하들과 상장(廂將)118) 이 경유하는 곳에 만일 풀 한 포기라도 손상하였을 경우 금령을 범한 견책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고, 행차가 지날 적에 또 점검해 보게 하였다.
온천에 거둥할 때에 왕이 이르기를,
"도로를 정비하되 가마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정비하고 혹시라도 도로를 넓게 확장하여 백성의 전지에 손해를 끼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온천 근처의 백성이 집을 비워 수행한 관원을 거처하게 하고 스스로는 한데에 거처한 것을 보고는 매우 불쌍히 여겨, 쌀과 콩을 주어 호구(糊口)의 밑천으로 삼게 하였다. 서울로 돌아왔을 때 온천에서 돌아오는 측근의 신하가 있었다. 왕이 그에게 벼가 손상된 곳이 있던가라고 묻자, 그가 대답하기를,
"의장(儀仗)을 설치하였던 근처에 약간의 손상이 있었습니다."
하자, 왕이 댓가를 넉넉하게 보상하라고 명하였다. 그 불쌍하게 여기고 근심하고 사랑함이 이와 같았다.
일찍이 팔도의 군안(軍案)을 조사하여 어린아이 및 죽은 사람 2만 명이 납부해야 할 군포(軍布)를 면제해 주었다. 그리고 특별히 내수사(內需司)의 베를 내리고, 또 상평창(常平倉)의 은·베와 감영·병영에 저축된 것을 풀어서 내외(內外)의 비용에 보충하게 하였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는 본디 호구의 부세(賦稅)가 없고 다만 군졸이 납부한 베로 경상의 비용으로 써 왔는데 백성들이 오랫동안 이를 근심거리로 여겼다. 왕은 폐단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 줄을 알고 갑인년119) 에 대간의 말을 채용하여 바야흐로 크게 변통해 영원한 제도로 만들려고 하였으나 미처 이 일을 시행하지 못하였다.
각사(各司) 노비들의 공포(貢布)가 다른데 비해 너무나 많아 오랫동안 고질적인 병폐가 되어 왔다. 왕이 특별히 내수사의 공부(貢賦)를 감하되 아울러 고루 감해주게 하였다. 내수사의 재물 용도가 이로 인하여 더욱 궁핍하게 되었으나 왕은 상관하지 않았다.
선조(先朝)에서 호남·호서에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여 부세를 고르게 함으로써 백성들을 편리하게 하였으나, 호남의 산간 고을에서는 미처 시행하지 못하였다. 왕은 그 공적의 뒤를 이어서 더욱 구별 획정(劃定)하여 두루 시행하게 하니, 백성이 매우 편리하게 여겼다.
왕가(王家)의 법도가 매우 엄하여 궁중이 엄숙하였고 안팎의 구분이 엄격하였다. 재신(宰臣)과 간신(諫臣)이 일찍이 왕가의 일가붙이와 궁중의 일을 말하였는데, 사실과 틀린 것이 있었다. 왕이 이르기를,
"내가 진실로 털끝만큼이라도 사사로운 뜻이 없다면 사람들의 말이 반드시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그런 일이 있으면 고치고 그런 일이 없으면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 비록 한 말이 사실과 틀렸다 하더라도 들은 바를 다 아뢰었을 뿐이니, 혐의할 게 뭐가 있겠는가."
하였다. 한번은 장번 내관(長番內官)120) 이 말미를 받아 고향에 내려갈 때에 외방에 폐해를 끼쳤는데, 내관을 꾸짖어 파면하고, 이를 알고서 아뢰지 않았다 하여 특별히 그 도의 감사를 추고하였다.
왕의 성품이 독실함을 좋아하고 명예에 가까운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궁중에서 좋은 일을 행하였을 때 혹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하면 마음에 매우 싫어하므로 시종의 신하가 그 뜻을 알고 감히 외부에 퍼뜨리지 않았다. 검소하기를 더욱 좋아하여 겉옷을 제외하고는 비단옷을 입지 않았다. 한번은 병이 들어 신료를 대내(大內)에서 접견하였는데 방안에 깔아놓은 자리가 매우 낡았으나 바꾸지 않았다. 신료들이 물러나와서 감탄하였다.
왕이 정대한 학문에 마음을 두고 이단(異端)을 매우 미워하였다. 이미 두 이원(尼院)121) 을 철거하고 사찰에 있는 모든 선왕의 어판(御板)도 달지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일찍이 이르기를,
"음사(淫祀)122) 가 도움은 없고 해만 있다는 것은 알기 어렵지 않다. 어리석은 여염의 지아비와 아낙네는 본디 책망할 것조차 없지만 사대부의 집안도 이러한 일이 있으니 내 실로 이해가 안 간다."
하였다. 어판(御板)이란 승가(僧家)에서 부처에게 물건·음식 등을 공양할 때에 어좌(御坐)를 죽 써 놓은 것인데 이것은 부처를 모시고 같이 먹는다는 것으로서 전대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었다.
왕은 학교를 독실히 숭상하였다. 일찍이 태학(太學)에 나아가 친히 석전제(釋奠祭)를 지내고, 경서(經書)를 찍어 중외에 반포하였으며, 또 성균관(成均館)에 교정청(校正廳)을 설치하고 경서의 잘못된 자획(字劃)과 음의(音義)를 일체 모두 바로잡아 사방의 학자에게 혜택을 주었다.
뜻하지 않은 일에 경계심을 가져 군정(軍政)을 닦게 하고 장신(將臣)을 접견하여 이야기할 적에 피곤함을 잊었다. 혹은 원유(苑囿)에 나아가 군대를 사열하기도 하고, 혹은 거둥을 인하여 군사를 사열하기도 하였는데, 행진(行陣)하는 법과 병갑(兵甲)의 제도를 강구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병조 판서 김좌명(金佐明)이 중국의 《기효신서(紀效新書)》 및 《연병실기(練兵實紀)》 등의 서적을 올리자. 왕은 즉시 반포하여 연습하게 하였다. 훈련 별대(訓鍊別隊)를 새로 설치하고 또 정초군(精抄軍)을 설치하여 병조 판서가 대장의 일을 겸임하게 하였다. 이것은 대개 정예롭고 용맹한 군사를 양성하고 양식과 기계를 비축하여 위급할 때에 대비토록 하려는 것이었다. 또 어사를 파견하여 호남·호서·영남 3도 및 제주를 순무(巡撫)하고, 해안의 방비를 자세히 살피고 수군(水軍)을 정돈하려 하였으나 미처 시행하지 못하였다. 평상시에 군사(軍事)를 수치(修治)하는 데에 뜻을 두고 무비(武備)를 잊지 않았는데 이는 숙위(宿衛)를 엄히 하고 변경을 튼튼히 하려 한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장차 신기(神機)123) 를 묵묵히 운용하여 천하의 변천을 조용히 살펴보면서 선왕의 뜻을 소술(紹述)하려는 것124) 이었다.
대신(臺臣)이 일찍이 필요치 않은 군사를 혁파하지 않는다고 간하자, 왕이 이르기를,
"내가 군사를 좋아하여 그런 것이 아니다. 만일 깊이 생각해 본다면, 내 뜻이 국가를 위망(危亡)의 형세에 두고 다만 군사를 일삼는 데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또 일찍이 측근의 신하들과 같이 큰 나라를 섬기고 이웃 나라를 사귀는 일에 대해 논한 적이 있었는데, 주상의 뜻을 알지 못하고 말하는 자가 있었다. 왕이 탄식하며 이르기를,
"이웃 나라와 사귀고 큰 나라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는 사세가 같지 않은 것이 있는 것이다. 내가 나이 어리고 덕은 없지만 조종(祖宗)과 부형의 백대 원수를 어찌 감히 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북쪽 변방의 수령들은 무관이었으므로 탐욕하고 방종하였다. 다시 병마 평사(兵馬評事)의 제도를 설치하고 반드시 이조의 낭관(郞官)과 옥당의 관원을 임명해 보내어 그들을 견제하게 하였다.
작고한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가 임진란을 당하여 북방에서 공로가 있었는데, 도신(道臣)의 청으로 인하여 특별히 품계를 올려 좌찬성을 추증하게 하고 같은 시대 남·북도(南北道)의 의사(義士) 20명에게 모두 포상하라고 명하니, 함경도 한 지방이 격려되었다.
왜국 사신이 올 적에도 반드시 측근의 신하를 엄선하여 국경에서 맞아 위로하게 하되 그들의 환심을 잃지 않게 하였다. 왜국 사신이 웅천(熊川)에다 왜관(倭館)을 옮기겠다고 굳이 청하였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는 대개 내지(內地)에 옮김으로써 후일의 근심을 끼칠까 염려한 것이었다.
왕은 옥사를 더욱 자세히 살피고 신중히 처결하였다. 매양 큰 추위와 심한 더위에는 곧 승지로 하여금 전옥서(典獄署)에 달려가서 죄질이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게 하였다. 일찍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마땅히 해조(該曹)로 하여금 긴급한 죄수를 곧바로 처결하게 하되, 비록 하루에 재차 복심(覆審)하게 되더라도 상규(常規)에 구애하지 말도록 하라."
하고, 또 일찍이 이르기를,
"사형수를 세 차례 복심하게 하는 뜻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는가. 마땅히 죽어야 할 죄를 지은 자는 반드시 죽이려 하고 마땅히 죽지 않아야 할 자는 반드시 죽이지 않으려 하는 것이 곧 그 본의이다."
하였다. 또 추운 철에 오래 갇혀 있는 것을 염려하여 양식과 동옷을 주라고 명하였다.
왕이 평소 병환이 있었으나 정사의 처리를 부지런히 하였으며, 병이 조금 나으면 항상 승지로 하여금 문서를 가지고 입시(入侍)하도록 하였다. 내직과 외직에 결원이 생기면 전관(銓官)으로 하여금 곧바로 차임하여 충원하게 하고 며칠을 지체한 적이 없었는데, 대개 직무가 폐지되어 백성에게 폐단이 미칠까 염려한 것이다.
갑인년125) 에 대비(大妃)126) 가 승하하였다. 왕이 항상 부왕(父王)을 일찍 여읜 것을 슬퍼하다가 또 모비(母妃)를 오래 봉양하지 못한 것을 지극한 한으로 여겨 거친 밥을 들고 맹물을 마시며 슬퍼함이 예절에 지나쳤다. 신하들의 굳이 간하며 권도를 따르시라는 청을 억지로 부응하기는 하였으나, 음식을 대할 적마다 울먹이며 스스로 감내하지 못하였다. 무릇 장사나 제사에 드는 물품과 예로 섬기는 절차를 반드시 정성스럽고 경건하게 하였다. 대비가 일찍이 경덕궁(慶德宮)으로 거처를 옮겼었는데, 이때 와서 창경궁(昌慶宮)에 반우(返虞)127) 하고 왕도 옛 거처로 돌아갔다. 사물이 눈에 부딪힐 적마다 감회가 복받쳐 슬픔이 더욱 간절해 종일토록 묵묵히 앉아 있으면서 잠시도 슬픔을 잊지 못하였다. 옆에 모시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감동되어 슬퍼하였다.
혼전(魂殿)을 받들어 모시기를 일체 평소처럼 하였고 철따라 나는 음식물을 올리는 것이 산릉(山陵)에 잇따랐는데, 전(奠)을 드릴 적에는 반드시 친히 점검하고 감독하여 올렸다. 기일 하루 전에 친히 살펴보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그 정결 여부에 대해 물어보고 이틀날 아침에 또 연달아 물어 보았다. 왕의 병이 위독할 적에 창 밖의 바람 소리를 듣고 말하기를,
"이것은 곡식을 해치는 바람이 아닌가. 내가 어찌 또 이 소리를 듣는단 말인가."
하였다.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백성을 근심하는 마음이 임종 전까지 이처럼 열렬하였다. 염습(斂襲)에 필요한 유갑(襦匣)·의복 등을 모두 궁내에서 준비하고 호조로 하여금 시장 백성에게 한 자, 한 치도 거두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는 대개 우리 중궁(中宮)128) 및 사왕(嗣王)129) 이, 평일 백성을 걱정하고 검소를 숭상하는 왕의 지극한 뜻을 몸받아 행한 것이었다.
중궁(中宮)은 김씨(金氏)로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영의정 김육(金堉)의 손녀이고 중종조의 현신(賢臣) 대사성(大司成) 김식(金湜)의 6대손이다. 1남 3녀를 낳으셨는데, 아들은 우리 사왕(嗣王)130) 전하이다. 큰 따님은 명선 공주(明善公主)이고, 다음 따님은 명혜 공주(明惠公主)인데, 모두 출가하기 전에 일찍 죽었고, 막내 따님은 명안 공주(明安公主)인데 출가하지 않았다.
사왕(嗣王)의 비(妃)는 김씨(金氏)로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의 딸이다. 신해년131) 봄에 책봉을 받아 빈(嬪)이 되었고, 지금 중궁의 자리에 올랐다.
변변치 못한 신이 지식이 없는데, 이미 사왕(嗣王)의 명을 받아 왕의 말씀과 행적에 대한 기년(紀年)을 위와 같이 대략 차례대로 서술한 다음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 왕은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굳세고 침착한 자질을 가진데다가 너그럽고 따스한 덕이 있고 넓고 큰 도량이 있었다. 효도와 우애는 천성으로 타고났고 자애로운 심성은 아래 백성들에게 믿음을 받았다. 재위한 지 16년 동안에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의 일에 애쓴 마음은 신명(神明)에게 질정(質正)할 수 있다. 몸을 검속(檢束)하되 부족한 것처럼 하고 선(善)을 구하되 미치지 못할 듯이 하였으며, 하루 이틀 사이 번거로운 정무에 경계를 다하고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언제나 가졌다.
비록 좋지 못한 운과 어려운 때를 만나, 수재·한재·풍재(風災)·상재(霜災)가 없는 해가 없었으며 백성들이 병들고 외세가 핍박하였으나, 왕은 근심하고 노고하며 가다듬음으로써 하늘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걱정하고 충애(忠愛)함으로써 백성의 생명을 보전하였다. 안으로는 음악이나 여색(女色)의 즐거움을 누리지 않았고 밖으로는 놀이나 사냥의 즐거움을 추구함이 없었다. 그리하여 무릇 전대 제왕이 욕심껏 방종하고 사정(私情)을 행하며, 법도를 패하고 덕을 어지럽게 했던 일들이 마음이나 행동에 파고들지 못하였다.
진하(陳夏)를 아울러 썼으나 경력(慶曆)의 치세(治世)에 해가 되지 않았고132) , 왕려(王呂)가 권세를 부렸으나 실로 중조(中朝)의 탄식이 나오게 하여 원우(元祐)의 태평을 이루었다.133) 전례(典禮)가 밝혀지자 인륜이 펴고 사설(邪說)이 사라짐에 인심이 바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입으로 외우고 마음 속으로 말할 적마다 ‘우리 왕의 덕은 한 문제(漢文帝)와 송 인종(宋仁宗)도 앞서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임금도 무시하고 아버지도 무시하는[無君無父] 논설을 물리쳐서134) 온 세상에 군신의 의리와 부자의 윤기가 나타나도록 함에 이르러서는 또 사도(斯道)135) 에 큰 공로가 있었다. 비록 신민들이 복이 없어 하늘이 장수를 주지는 않았으나, 그 자애로운 마음과 자애롭다는 소문이 사람에게 깊이 감명되어 실로 영구히 잊지 못하고 생각하게 되었으니, 우뚝이 동방에 성덕(盛德)의 임금이 되었다. 아, 아름답도다.
옛날 주(周)나라의 왕계(王季)는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사랑을 쌓아 문왕(文王)의 빛난 덕과 무왕(武王)의 큰 공렬(功烈)을 이룩하게 해 주었고136) , 한(漢)나라의 문제(文帝)와 경제(景帝)는 몸소 공손과 검소를 행하여 건원(建元)의 성대한 정벌의 공을 이루도록 터전을 만들어 주었으며137) , 송(宋)나라 인종(仁宗)은 지극한 정성과 깊은 자애로 한결같은 덕을 지녔는데 군자(君子)가 말하기를, ‘사직(社稷)이 오래 지속되어 마침내 반드시 힘입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우리 현종 대왕(顯宗大王)으로 말하면, 잔포(殘暴)한 자를 교화시키고 사형을 없앨 수 있는 덕138) 과 백성을 화하게 하고 빨리 덕을 공경하는[諴小民疾敬德] 도139) 는 진실로 옛날 명철하고 올바른 임금과 비해 볼 때 손색이 없다. 내가 적은 기년(紀年)의 글을 한번 보았으면 한다. 첫째도 ‘우리 백성이다.’ 하고, 둘째도 우리 백성이다.’ 하여 하나의 생각도 백성에게 있지 않은 적이 없었다. 정이 깊어서 교화가 믿음을 받게 되고, 백성이 감화됨에 하늘이 감응하였으니 진실로 하늘이 장차 우리 문자 문손(文子文孫)이신 유자왕(孺子王)140) 을 크게 인도해 주어 옛 나라를 새롭게 하고 국운을 길이 누리게 하며, 주(周)나라를 높이고 오랑캐를 배척하는 《춘추(春秋)》의 의리를 이어 우리 국가의 억만년토록 끝없는 아름다움을 누리게 할 것이다. 아, 아름답고 성대하도다.
자헌 대부(資憲大夫) 이조 판서(吏曹判書) 겸 지의금부사(兼知義禁府事) 성균관 좨주(成均館祭酒) 오위 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신(臣) 윤휴(尹鑴)는 지어 올림.
【태백산사고본】 23책 1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81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 역사-편사(編史)
[註 001]
신사년 : 1641 인조 19년.
[註 002]
그 지방 : 심양.
[註 003]
증선지(曾先之) : 원(元)나라 여릉(廬陵) 사람인데, 자(字)는 종야(從野)이다. 《십팔사략(十八史略)》을 지었다.
[註 004]
천경(踐更) : 징발된 수졸의 복무 기간.
[註 005]
기축년 : 1649 인조 27년.
[註 006]
신묘년 : 1651 효종 2년.
[註 007]
가례(嘉禮) : 국조 《오례의(五禮儀)》에 규정한 오례(五禮) 중의 한 가지로 경사스러운 의례(儀禮)라는 뜻. 임금의 성혼(成婚)·즉위(卽位) 또는 왕세자·왕세손의 책봉·성혼 등의 예식. 여기서는 성혼(成婚)을 말함.
[註 008]
임진년 : 1652 효종 3년.
[註 009]
선성(先聖) : 공자를 말함.
[註 010]
기해년 : 1659 효종 10년.
[註 011]
대왕 대비(大王大妃) : 현종의 조비(祖妃)로 곧 인조의 계비(繼妃) 자의 장열 왕후(慈懿莊烈王后) 조씨(趙氏).
[註 012]
대행 대왕(大行大王) : 임금이 죽은 뒤에 아직 시호를 올리기 전의 칭호, 여기서는 효종을 가리킴.
[註 013]
성복(成服) : 초상이 나서 사흘이나 닷새 뒤에 처음으로 상복(喪服)을 입는 일.
[註 014]
예(禮)에 ‘임금을 위해 참최(斬衰)를 입고 내종(內宗)·외종(外宗)이 모두 참최(斬衰)를 입는다.[爲君斬內外宗皆斬] : 《예기(禮記)》 잡기 하(雜記下)에 "외종(外宗)이 군부인(君夫人)을 위해 입는 복제(服制)도 내종(內宗)과 같다.’ 하였는데, 그 소(疏)에 ‘임금의 내종(內宗)이 임금을 위해 다 참최(斬衰)를 입고 부인을 위해 자최(齊衰)를 입으니 임금의 외종(外宗)의 딸도 임금 및 임금 부인을 위해 입는 복제가 내종과 같다.’라고 하였다. 내종은 임금의 동성의 딸로 관작이 있는 사람, 외종은 임금의 고모·누이의 딸로 관작이 있는 사람. 《주례(周禮)》 춘관(春官) 서관(序官).
[註 015]
네 가지 설[四種說] : 《의례(儀禮)》 부위장자(父爲長子) 조의 소(疏)에 ‘비록 승중(承重)하였다 하더라도 삼년복을 입지 못하는 것이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정체(正體)나 전중(傳重)하지 못한 것이니 적자(嫡子)가 폐질(廢疾)이 있어 종묘의 주사(主祀)를 감당하지 못함을 말함이고, 둘째는 전중(傳重)하였으나 정체(正體)가 아닌 것이니, 서손(庶孫)이 후사가 된 것이 그것이고, 세째는 체(體)이기는 하나 정(正)이 아닌 것이니, 서자(庶子)를 세워 후사가 된 것이 그것이고, 네째는 정통이기는 하나 체(體)가 아닌 것이니 적손(適孫)을 세워 후사로 삼은 것이 그것이다.’ 하였다.
[註 016]
선왕조(先王朝) : 효종.
[註 017]
대의를 천하에 펴려고 하였으니 : 효종이 북벌(北伐)하여 병자 호란의 수치를 씻고자 한 것을 말한다.
[註 018]
서명(叙命) : 서용하라는 왕의 명.
[註 019]
경자년 : 1660 현종 원년.
[註 020]
삼세(三稅) : 전세(田稅)·공포(貢布)·군포(軍布).
[註 021]
수미(收米) : 세수 미곡.
[註 022]
정희 왕후(貞熹王后) : 세조 비(妃) 윤씨(尹氏).
[註 023]
태상황(太上皇) : 자리를 내주고 생존한 황제를 높여 부르는 말.
[註 024]
사군(嗣君) : 왕통을 이은 임금.
[註 025]
황면재(黃勉齋) : 황간(黃幹).
[註 026]
연기(練期) : 소상(小祥)을 말함.
[註 027]
문순공(文純公)이황(李滉)이 기대승(奇大升)의 논평을 듣고 깜짝 놀라 옛날의 견해를 바꾸면서 : 선조 즉위년, 즉 1567 명종(明宗)의 상에, 공의전(恭懿殿:인종 비(仁宗妃) 박씨(朴氏)를 말함)이 명종에게 수숙(嫂叔)이 되어 복(服)이 없어야 한다고 의논이 정해졌는데, 이황도 그 설을 인정하였다. 기대승은, "형제가 전국(傳國)하여 차례를 이었으니 나름대로 군신·부자의 의리가 있는데 어찌 복이 없을 리가 있겠는가. 기복(朞服)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니, 퇴계가 크게 깨닫고, 조정에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군자가 있지 않았으면 어떻게 국가가 제 구실을 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기대승의 변례(變禮)에 통달한 것을 훌륭하게 여기고 퇴계가 선한 말을 선뜻 따르는 것을 칭찬하였다.《고봉집(高峰集)》 속집(續集). 기명언(奇明彦)의 명언은 기대승의 자(字).
[註 028]
선왕 : 효종을 말함.
[註 029]
‘죄없는 선비를 죽인다.’ : 《맹자(孟子)》 이루(離婁)에 나오는 말로,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죄없는 선비를 죽이면 대부(大夫)가 그 나라를 떠나가야 한다." 하였다.
[註 030]
흉인(凶人) : 윤선도를 가리킴.
[註 031]
‘제갈양이 마속을 죽인 일’ : 삼국(三國) 촉(蜀)의 제갈양(諸葛亮)이, 자식처럼 사랑하는 장수 마속(馬謖)이 가정(街亭)의 싸움에서 제갈양의 명령을 어기고 대패하자, 눈물을 흘리며 그를 목베어 죄를 다스리고 사기를 고무시킨 일. 《삼국지(三國志)》 촉지(蜀志) 마속전(馬謖傳).
[註 032]
계복(啓覆) : 임금에게 아뢰어 사형수를 다시 심리하는 일.
[註 033]
음사(淫祀) : 내력이 바르지 못한 귀신에게 지내는 제사.
[註 034]
공민왕은 이존오(李存吾)의 소를 불태웠고, : 공민왕 15년(1366)에 이존오(李存吾)가 우정언(右正言)으로 있을 적에 신돈의 전횡에 분격하여 소를 올려 탄핵하자, 왕이 크게 노하여 그 소를 불태우게 하였다. 뒤에 신돈이 모반하자 신돈을 주벌하고, 이존오의 충성을 사모하여 증직하고 10세 된 이존오의 아들에게 장사직장(掌事直長)을 제수하였다. 《석탄집(石灘集)》 하(下).
[註 035]
광해주(光海主)는 정온(鄭蘊)의 소를 불태웠습니다. : 광해군 6년(1614) 정온(鄭蘊)이 부사직(副司直)으로 소를 올려 영창 대군(永昌大君)의 처형이 인륜에 어긋남을 지적하고 그 가해자인 강화 부사(江華府使) 정항(鄭沆)을 참수하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광해가 크게 노하여 승정원을 몹시 꾸짖고 그 소를 불태우게 하였다. 《동계집(桐溪集)》.
[註 036]
세실(世室) : 오랜 세대를 두고 제사지내는 위패(位牌)를 모시는 종묘의 신실(神室).
[註 037]
사친(四親) : 고조·증조·할아버지·아버지를 말함.
[註 038]
양묘(兩廟) : 인종·명종.
[註 039]
역사(逆祀) : 낮은 분을 위에, 높은 분을 아래에 제사지내는 것. 《좌전(左傳)》 문공(文公)의 2년조에 ‘8월 정묘일(丁卯日)에 태묘(太廟)에 제사가 있어 희공(僖公)의 신주를 위에 올려 모셨으니, 역사(逆祀)이다.’ 하였다. 그 주석에 ‘희공(僖公)이 민공(閔公)의 형이고 민공과 부자 사이가 되지는 않으며, 일찍이 신하였으므로 위치가 아래에 있어야 하는데, 민공의 윗자리에 있게 하였으므로 역사(逆祀)라 한다.’ 하였다.
[註 040]
‘단선(壇蟬)의 제도’ : 단과 선은 제사지내는 장소. 흙을 모은 것을 단, 땅을 깎은 것을 선이라 한다. 《예기(禮記)》 제법(祭法)에 "천자는 7묘(七廟)와, 단(壇) 하나, 선 하나를 세운다……. 먼 조상을 위해 조묘 둘을 만들어 제사지낸다. 조묘에서 제사받을 수 없는 조상은 단에서 제사지내고, 단에서 제사를 받을 수 없는 조상은 선에서 제사지낸다. 단과 선에서 제사지내는 조상은 기도할 일이 있어야 제사지내고, 기도할 일이 없으면 제사도 지내지 않는다. 선에서도 제사를 받을 수 없는 조상은 이를 귀(鬼)라고 부르는데, 이는 기도할 일이 있어도 제사지내지 않는다." 하였다.
[註 041]
천험(天險) : 천연의 험요(險要). 곧 오르거나 넘볼 수 없는 것을 비유함.
[註 042]
삭선(朔膳) : 매월 초하룻날에 각도에 나는 물건으로 임금이나 왕비에게 올리는 음식상.
[註 043]
혼조(昏朝)에서 절개를 세웠고, : 윤선도가 광해 8년(1616)에 성균관 유생으로서 권신(權臣) 이이첨(李爾瞻) 일당의 횡포를 들어 상소했다가 경원(慶源)에 유배되었다.
[註 044]
무술년 : 1658 효종 9년.
[註 045]
내사옥(內司獄) : 내수사 안에 있는 감옥.
[註 046]
갑진년 : 1664 현종 5년.
[註 047]
실봉(實封) : 어전에서 개봉하게끔 견고하게 봉한 편지.
[註 048]
풍정연(豊呈宴) : 임금 내외의 경사를 경하하기 위해 무엇을 바치는 잔치 자리.
[註 049]
아병(牙兵) : 대장 휘하에 있는 병정.
[註 050]
기해년 : 1659 효종 10년.
[註 051]
기해년 : 1659 효종 10년.
[註 052]
을사년 : 1665 현종 6년.
[註 053]
영호 군병(迎護軍兵) : 맞이하여 호위하는 군병.
[註 054]
별조(別造) : 특별 제조.
[註 055]
을미년 : 1655 효종 6년.
[註 056]
정미년 : 1667 현종 8년.
[註 057]
무신년 : 1668 현종 9년.
[註 058]
기유년 : 1669 현종 10년.
[註 059]
신덕 왕후(神德王后) : 태조의 계비(繼妃) 강씨(康氏).
[註 060]
염분포(鹽盆布) : 소금 굽는 가마에 대해 물리는 세포(稅布)임.
[註 061]
경술년 : 1670 현종 11년.
[註 062]
기유년 : 1669 현종 10년.
[註 063]
명년 : 1672 현종 13년.
[註 064]
계축년 : 1673 현종 14년.
[註 065]
기유년 : 1669 현종 10년.
[註 066]
지난해 : 1671 현종 12년.
[註 067]
효고(孝考) : 효종.
[註 068]
편배(編配) : 유배 죄인을 배치하는 것.
[註 069]
신해년 : 1671 현종 12년.
[註 070]
노기(盧杞) : 당 덕종(唐德宗) 때의 간신. 덕종 때 동중서 문하 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에 발탁되었다. 천성이 음험하여 정치를 크게 어지럽혔다. 《당서(唐書)》 권223 하.
[註 071]
한(漢)나라 때에 쌀이 붉게 썩고 돈꿰미가 썩어 셀 수 없는 것 : 한 문제(文帝)·경제(景帝) 때에 공순하고 검소를 숭상하며 중농 정책을 써서 창고에 곡식이 가득 차고 곳간에 재화(財貨)가 남아 돌아, 서울의 돈이 수만 금으로 돈꿰미가 썩어서 셀 수 없고, 태창(太倉)의 곡식이 너무 묵어 창고에 넘쳐서 밖에 노적하였는데, 쌀이 부패하여 먹을 수 없을 정도였다. 《통감절요(通鑑節要)》 권8 효경 황제(孝景皇帝).
[註 072]
당(唐)나라 때에 쌀 한 말 값이 3전이었던 것 : 당 태종(唐太宗) 정관(貞觀) 원년에 관중(關中) 지방에 흉년이 들어 쌀 한 말 값이 비단 한 필이었는데, 3년에 풍년이 들어 흩어졌던 자가 고향에 돌아오고 쌀 한 말 값이 3, 4전에 불과하고 1년에 사형을 결단한 것이 겨우 29인이었다. 《통감절요(通鑑節要)》 권36 당기(唐記) 태종 황제(太宗皇帝) 상(上).
[註 073]
방악(方岳) : 감사를 말함.
[註 074]
명농(明農) : 농인(農人)을 밝게 가르침.
[註 075]
신해년 : 1671 현종 12년.
[註 076]
임자년 : 1672 현종 13년.
[註 077]
경술년 : 1670 현종 11년.
[註 078]
기해년 : 1659 효종 10년.
[註 079]
교산(喬山)의 염려 : 산릉(山陵)이 무너지는 염려. 교산(喬山)은 황제(皇帝)를 장사지낸 산. 황제를 교산에 장사지내니, 산릉(山陵)이 홀연히 무너져서 무덤은 비어 있고 시체가 없어졌으며 다만 칼과 신발만이 있을 뿐이었다 한다. 《포박자(抱朴子)》 극언(極言).
[註 080]
장릉(長陵)의 흙을 한 줌 가져가는 자가 있더라도 : 장릉(長陵)은 한 고조(漢高祖)의 능. 곧 한 고조의 능을 파헤침을 말한다. 한 문제(漢文帝) 때에 도적이 한 고조의 사당에 있는 옥 가락지를 훔쳐 갔는데, 정위(廷尉) 장석지(張釋之)가 기시형(棄市刑)에 처하자, 한 문제는 멸족(滅族) 명을 적용하지 않았다 하여 대노하였다. 장석지는 "지금 종묘의 기구를 훔쳤는데 멸족한다면, 가령 어리석은 백성이 장릉(長陵)을 파헤친다면 폐하께서 무슨 법으로 치죄하겠습니까." 하였다. 《한서(漢書)》 장석지전(張釋之傳), 《통감절요(通鑑節要)》 권7, 《한서(漢書)》 태종(太宗) 효문 황제(孝文皇帝) 상(上).
[註 081]
정미년 : 1667 현종 8년.
[註 082]
신해년 : 1671 현종 12년.
[註 083]
10일 안에 이른 연왕(燕王)의 글과 : 한 소제(漢昭帝) 때에 상관걸(上官桀)이 대장군 곽광(霍光)을 제거하고자 하여 사람을 시켜 연왕 단(燕王旦)의 상서(上書)를 가짜로 만들어 곽광의 죄를 고발하게 하였다. 이 말을 듣고 곽광이 갓을 벗고 소제에게 사죄하니 소제는 "짐은 이 상서가 거짓임을 알았다. 장군은 죄가 없다. 장군이 교위(校尉)를 조용(調用)한 것이 10일이 못 되었는데 연왕이 그 일을 어떻게 알겠는가?" 하였다. 이때 소제의 나이는 14세였는데 상서한 자는 과연 도망하였다. 연왕은 소제의 형으로 제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원망하다가 이를 이용하여 곽광을 모반자로 몰아 내치려 한 것이다. 《통감절요(通鑑節要)》 권11 한기(漢紀) 효소 황제(孝昭皇帝).
[註 084]
내탕(內帑) : 임금의 사적 재물을 넣는 곳간.
[註 085]
신해년 : 1671 현종 12년.
[註 086]
일죄(一罪) : 십악(十惡)에 해당하는 중죄. 사형.
[註 087]
연산(燕山) : 중국 하북성(河北省) 계현(薊縣) 동남에 있는데, 뒤에 이곳에 연산부(燕山府)·연경로(燕京路) 등을 두었다. 원나라 때에는 연경(燕京)에 도읍을 정하였으니 곧 원의 수도였던 연경(燕京)을 말한다. 고려는 충렬왕(忠烈王) 이후 원의 부마국(駙馬國)이 되어 원의 간섭을 받았으며 왕실의 호칭도 격하되었다.
[註 088]
기해년 : 1659 효종 10년.
[註 089]
인선 왕후(仁宣王后) : 효종비 장씨(張氏).
[註 090]
대왕 대비(大王大妃) : 인조 계비(仁祖繼妃) 조씨(趙氏).
[註 091]
중서부(衆庶婦) : 여러 며느리.
[註 092]
기해년 : 1659 효종 10년.
[註 093]
정부의 동·서벽(東西壁), : 의정부의 좌참찬(左參贊)과 우참찬. 관리가 출근하여 모여 앉을 때 좌석의 동쪽에 앉는 벼슬을 동벽(東壁), 서쪽에 앉는 벼슬을 서벽(西壁)이라 한다. 의정부의 좌참찬, 홍문관의 응교(應敎) 등이 동벽에 해당되고, 의정부의 우참찬·홍문관의 교리·수찬 등이 서벽에 해당한다.
[註 094]
정희 왕후(貞熹王后)가 장순 왕후(章順王后)의 상에서와 : 정희 왕후는 세조비(世祖妃) 윤씨(尹氏)이고, 장순 왕후(章順王后)는 예종비(睿宗妃) 한씨(韓氏)이다. 장순 왕후가 정희 왕후의 며느리가 되며, 세조 7년(1461)에 정희 왕후보다 먼저 승하하였다.
[註 095]
소혜 왕후(昭惠王后)가 공혜 왕후(恭惠王后)의 상에서 : 소혜 왕후(昭惠王后)는 덕종비(德宗妃) 한씨(韓氏)이고, 공혜 왕후(恭惠王后)는 성종비(成宗妃) 한씨(韓氏)이다. 공혜 왕후는 소혜 왕후의 며느리가 되는데 성종 5년(1474)에 소혜 왕후보다 먼저 승하하였다.
[註 096]
대행 대왕(大行大王) : 죽어서 시호를 올리기 전의 임금. 여기서는 효종.
[註 097]
단궁(檀弓)이 문복(免服)을 입고 : 공의 중자(公儀仲子)의 상(喪:중자〈仲子〉의 아들 상임)에 단궁(檀弓)이 문복(免服)을 하였다. 문복은 5세친(世親) 즉 10촌에게 입거나, 붕우로서 다른 나라에서 죽어 주인이 없는 자에게 입는 복인데, 중자(仲子)가 단궁에게 5세친이 아니고 또 상이 다른 나라에서 죽은 자가 아닌데, 단궁이 문복을 입었다. 이것은 중자(仲子)가 적손(嫡孫)을 버리고 그의 서자(庶子)를 세웠으므로 단궁이 입어서는 안 될 복(服)을 입음으로써 중자(仲子)가 세워서는 안 될 서자(庶子)를 세운 그것을 기롱한 것이다. 단궁은 예를 아는 사람으로 이것이 예에 합당하지 않음을 중자의 형인 자복 백자(子服伯子)에게 물었고, 자유(子游)도 공자(孔子)에게 물었는데, 공자는 "손자를 세워야 한다."고 하였다. 《예기(禮記)》 단궁(檀弓) 상.
[註 098]
자유(子游)가 최복(衰服)을 입었다 : 사구(司寇) 혜자(惠子)의 상(喪)에 자유(子游)가 마최(麻衰)를 입고 숫삼의 요질(腰絰)을 띠고 조문했다. 혜자의 형인 문자(文子)가 이를 사양하였다. 원래 친구의 상에는 조복(朝服)을 입고 고운삼의 요질을 두르는 것이 예이다. 그러나 자유는 혜자가 적자(嫡子) 호(虎)를 폐하고 서자를 세웠으므로 짐짓 예가 아닌 옷차림으로 조문했던 것이다. 혜자의 형 문자가 깨닫지 못하자, 자유가 자기가 서야 할 손의 자리에 서지 않고 신하의 위치에 서니, 문자는 자유의 행동이 기롱의 뜻임을 깨치고 혜자의 적자(嫡子)인 호(虎)를 붙들고 들어와 남향하여 서게 하였다 한다. 《예기(禮記)》 단궁(檀弓) 상.
[註 099]
앞뒤 : 앞은 효종 대왕의 상, 뒤는 비인 인선 왕후의 상임.
[註 100]
재려(齎廬) : 인선 왕후의 승하로 현종이 재계하는 상려(喪廬).
[註 101]
남군(南郡) : 남쪽에 있는 온양(溫陽)을 말함.
[註 102]
옛 사람이 말하기를 ‘순(舜)은 어떠한 사람이며 나는 어떠한 사람인가. 문왕(文王)은 내 스승이다.’ : 맹자(孟子)가 성간(成覵)이 제 경공(齊景公)에게 이른 말을 인용하여, 등문공(滕文公)에게 성선(性善)을 말하고 선정(善政)을 행할 것을 권면한 것이다. ‘순(舜)은 어떠한 사람이며 나는 어떠한 사람인가.’라는 말은 안연(顔淵)의 말이고, ‘문왕(文王)은 내 스승이다.’는 말은 주공(周公)의 말을 공명의(公明儀)가 인용하여 한 말이다. 《맹자(孟子)》 등문공(滕文公) 상.
[註 103]
한 무제가 제 양공(齊襄公)이 복수한 말을 인용한 것 : 한 무제는 태초(太初) 33년(102)에 완(宛)을 정벌하고 난 그 위세로 호(胡)를 곤궁하게 하려 할 의향을 두어 조령(詔令)을 내려 말하였다. "고제(高帝)가 평성(平城)의 근심을 끼쳐두셨고, 고후(高后:한 고조의 황후인 여후) 때에 선우(單于)의 서간(書簡)이 아주 패역(悖逆)하였다. 옛날 제 양공(齊襄公)이 9세(世)의 원수를 갚으니, 《춘추(春秋)》에서 위대하게 여겼다." 《통감절요(通鑑節要)》 권11 한기(漢紀) 세종 효무 황제(世宗孝武皇帝) 하.
[註 104]
윤대(輪對)의 뉘우침 : 윤대는 서역(西域)에 있던 지명으로 한 무제(漢武帝) 때에 공물을 바쳤고, 한(漢)에서 전졸(田卒) 수백 인과 관리를 두어 통제하였는데 한 무제 말년에 윤대를 포기하고 애통(哀痛)의 조서를 내려 기왕의 정벌로 국력을 소모하고 백성을 고통스럽게 한 것을 뉘우쳤다. 《한서(漢書)》 서역전(西域傳), 《통감절요(通鑑節要)》 권11 한기(漢紀) 무제(武帝) 하.
[註 105]
신선 구하는 일을 파할 수 있었던 것 : 한 무제(漢武帝)가 즉위한 이래 신선술을 좋아하여 승로반(承露盤)을 만들고, 방사(方士)를 보내어 신선을 구하는 등 매우 미혹되었는데, 말년에 신선을 기다리는 방사(方士)를 다 파하고 신하들을 대하여 스스로 탄식하기를 "내가 전에 어리석어서 방사(方士)에게 속임을 당하였는데, 천하에 어찌 선인(仙人)이 있겠는가. 다 요망한 것일 뿐이다. 음식물을 조절해 먹고 약을 먹으면 병이 조금 적을 수 있을 뿐이다."하였다. 《통감절요(通鑑節要)》 권11 한기(漢紀) 무제기(武帝紀) 하.
[註 106]
아버지를 협제(脅制)하고, 오랑캐를 신하로 삼았다 : ‘아버지를 협제(脅制)하였다.’는 것은, 수 공제(隋恭帝) 때에 천하가 어지러우므로 이세민(李世民:당 태종의 성명)이 천하를 평정하려는 뜻을 품고 아버지 당공(唐公) 이연(李淵)에게 기병(起兵)할 것을 권하자, 듣지 않으므로 진양궁인(晋陽宮人) 배적(裵寂)을 시켜 이연을 모시고 술을 먹으면서 강요하게 하여 소청을 얻었다. 《통감절요(通鑑節要)》 권34 수기(隋紀) 공제(恭帝).
[註 107]
건성(建成)의 일 : 건성(建成)은 당 고조(唐高祖)의 태자(太子)이며 당 태종(唐太宗)의 형. 당 태종이 진왕(秦王)으로 있을 적에 공이 많고 명망이 높자, 건성이 원길(元吉)과 공모하여 당 태종을 참소하여 죽이려 하였다. 당 태종이 건성(建成)을 사살하고 심복인 울지경덕(尉遲敬德)이 제왕(齊王) 원길(元吉)을 사살하였다. 《통감절요(通鑑節要)》 권36 당기(唐紀) 태종(太宗) 상.
[註 108]
송 태조(宋太祖)가 한잔 술로 병권을 해제한 일 : 송 태조가 무장으로 즉위한 건륭(建隆:960∼962) 이래로 번진(藩鎭)의 병권을 해제하고 장리(贓吏)는 중법으로 다스렸다. 오월(吳越) 전숙(錢俶)이 내조(來朝)하자 재상들은 전숙을 억류하고 그 영지를 취하자고 청하였으나, 송 태조는 듣지 않고 귀국시켰다. 또 남한(南漢)의 유장(劉鋹)이 그 나라에 있을 적에 짐독(酖毒)을 술에 타서 신하를 즐겨 죽였다. 유장이 내조(來朝)하자 송 태조가 술을 따라 유장에게 주니, 유장은 독약이 들어있는 것으로 의심하고 술잔을 받들어 올리고 울며 아뢰기를 "신의 죄가 용서받지 못하겠으나 폐하께서 이미 죽이지 않으셨으니 대량(大梁)의 포의(布衣)가 되어 태평 성세를 보기를 원하오며 감히 이 술은 마시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송 태조는 웃으며 "짐은 성심을 미루어 남에게 대하는데 어찌 그처럼 하겠는가." 하고 유장의 술잔을 가져다 자신이 마시고 별도로 술을 따라 유장에게 주었다. 《송사(宋史)》 권1 권3 송태조 본기(宋太祖本紀).
[註 109]
송 진종(宋眞宗)이 천서(天書)로써 태묘(太廟)에 고한 것 : 천서(天書)는 송 진종(宋眞宗) 때에 하늘로부터 내려온 글. 송 진종이 글안(契丹)과 전연(澶淵)의 맹약 맺은 것을 수치로 여겨 천서(天瑞)에 의해 봉선(封禪)하여 사해(四海)를 진정할 양으로 꿈에 신인이 천서(天書)를 내렸다고 거짓말을 하고 그것을 승천문(承天門)과 태산(泰山)에서 얻어서 신하들과 함께 광적으로 기뻐하였으며 대중상부(大中祥符) 6년(1013) 12월에 천서(天書)를 조원전(朝元殿)에 바치고 마침내 옥청궁(玉淸宮)과 태묘(太廟)에 고하였다. 《송사(宋史)》 권6 권7 진종 본기(眞宗本紀).
[註 110]
삼재(三宰) : 좌참찬을 가르킴.
[註 111]
임인년 : 1662 현종 3년.
[註 112]
사사(査使) : 어떤 일의 조사를 위해 온 사신.
[註 113]
향천(鄕薦) : 시골 주군에서 인재를 천거하는 것.
[註 114]
방효유(方孝孺) : 명(明)나라 태조(太祖), 혜제(惠帝) 때의 명신. 자(字)는 희직(希直). 혜제(惠帝) 건문(建文) 때에 시강 학사(侍講學士)가 되었다. 연왕(燕王:뒤에 성조〈成祖〉임)의 군사가 들어와서 그를 불러 조서(詔書)를 초하게 하자, 방효유는 최질(衰絰)로 이르러 호곡(號哭) 소리가 전폐(殿陛)에 사무쳤다. 성조(成祖)가 의자에서 내려와서 위로하고 좌우 신하들을 돌아보고 붓과 종이를 주게 하며 말하기를, "조서를 선생이 아니면 초를 할 수 없다." 하였다. 방효유는 붓을 땅에 던지며, "죽이면 곧 죽을 뿐이지 조서는 초할 수 없다." 하였다. 마침내 시장에서 사지가 찢어지는 형을 당하고 종족과 친우로서 연좌되어 죽은 사람이 수백 인이었다. 성조(成祖)는 태조의 네째 아들로 처음에 연왕(燕王)에 봉해졌는데, 태조가 승하하자, 군사를 일으켜 건문제(建文帝)를 축출하고 정난병(靖難兵)이라 일컫고 서울을 함락하여 제위(帝位)에 올라 방효유(方孝孺) 등 건문제(建文帝)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죽이고 연경(燕京)에 천도(遷都)하였다. 《명사(明史)》 방효유전(方孝孺傳).
[註 115]
상위(象緯) : 해·달과 오성(五星).
[註 116]
내장(內藏) : 궁내의 곳간.
[註 117]
임자년 : 1672 현종 13년.
[註 118]
상장(廂將) : 임금의 거둥 때 호위하는 장수.
[註 119]
갑인년 : 1674 현종 15년.
[註 120]
장번 내관(長番內官) : 대궐 안에 거처를 두고 장기간 대전, 세자궁에 번드는 내시.
[註 121]
이원(尼院) : 인수사와 자수사.
[註 122]
음사(淫祀) : 사신(邪神)을 제사지내는 것.
[註 123]
신기(神機) : 신묘한 기산(機算).
[註 124]
선왕의 뜻을 소술(紹述)하려는 것 : 선왕은 효종. 효종의 북벌 계획을 계승하여 이룩하려는 것을 말한다.
[註 125]
갑인년 : 1674 현종 15년.
[註 126]
대비(大妃) : 효종비 장씨(張氏).
[註 127]
반우(返虞) : 장례 치른 뒤에 신주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
[註 128]
중궁(中宮) : 현종의 비 김씨(金氏).
[註 129]
사왕(嗣王) : 숙종.
[註 130]
사왕(嗣王) : 뒤의 숙종.
[註 131]
신해년 : 1671 현종 12년.
[註 132]
진하(陳夏)를 아울러 썼으나 경력(慶曆)의 치세(治世)에 해가 되지 않았고 : 진하(陳夏)는 진집중(陳執中)과 하송(夏竦)을 말하고, 경력(慶曆)은 송 인종(宋仁宗)의 연호, 송 인종이 부필(富弼)·한기(韓琦) 등을 정승에 임용하여 경력지치(慶曆之治)란 태평 성세를 이룩하였으나, 재주는 있으면서 다소 간사한 하송(夏竦)과, 예에 무식하고 영리(榮利)를 추구한 진집중(陳執中)을 중직과 정승에 임용하였다. 《송사(宋史)》 하송전(夏竦傳) 진집중전(陳執中傳) 인종 본기(仁宗本紀).
[註 133]
왕려(王呂)가 권세를 부렸으나 실로 중조(中朝)의 탄식이 나오게 하여 원우(元祐)의 태평을 이루었다. : 왕려(王呂)는 왕안석(王安石)과 여혜경(呂惠卿)이고, 원우(元祐)는 송 철종(宋哲宗)의 연호, 왕안석과 혜경이 신종(神宗) 때에 집권하여 청묘(靑苗)·수리(水利)·균수(均輸) 등 여러 신법(新法)을 만들었다가 물의가 일어나자 당시 명신을 배척하였다. 송 철종이 즉위 초에 여공저(呂公著)·사마광(司馬光) 등 명신을 불러 써서 왕안석이 건의하여 만든 신법을 파하고, 어진 사람을 등용하여 언로(言路)를 트니 천하의 인심이 흡족하여 치세로 행하였다. 《송사(宋史)》 신종·철종 본기(神宗哲宗本紀).
[註 134]
임금도 무시하고 아버지도 무시하는[無君無父] 논설을 물리쳐서 : 기해년(1659) 효종의 상(喪)에 효종의 모비(母妃)인 자의 대비(慈懿大妃) 조씨(趙氏)의 복제(服制)를 송시열 등이 기년(朞年)으로 정하였는데, 현종 1년(1660)에 허목(許穆) 등이 상소하여 삼년(三年)으로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기년으로 정하였다. 현종 15년(1674)에 인선 왕후(仁宣王后)의 복제(服制)를 의정(議定)하면서 기해복제(己亥服制)의 의례 제신(議禮諸臣)을 추죄(追罪)케 하였다.
[註 135]
사도(斯道) : 유도(儒道).
[註 136]
옛날 주(周)나라의 왕계(王季)는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사랑을 쌓아 문왕(文王)의 빛난 덕과 무왕(武王)의 큰 공렬(功烈)을 이룩하게 해 주었고 : 왕계(王季)는 주 태왕(太王)의 세째 아들, 문왕(文王) 아버지. 이름은 계력(季歷). 그의 형 태백(泰伯) 및 우중(虞仲)이 형만(荊蠻)으로 도망하여 왕위를 계력에게 양보하였다. 계력은 왕위에 올라 태왕의 업을 닦아 문왕에게 전하고 무왕 때 은(殷)을 멸하고 주(周)를 창건하였다. 《사기(史記)》 권4 주본기(周本紀), 서경(書經) 입정(立政).
[註 137]
한(漢)나라의 문제(文帝)와 경제(景帝)는 몸소 공손과 검소를 행하여 건원(建元)의 성대한 정벌의 공을 이루도록 터전을 만들어 주었으며 : 문제(文帝)는 한 고제(漢高帝)의 중자(中子)로 혜제(惠帝)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효제(孝弟)를 숭상하고 농사를 권장하여 검소와 질박을 천하에 보임으로써 예의가 일어났다. 경제(景帝)는 문제(文帝)의 맏아들로 즉위하여 문제의 업을 계승하여, 절약 검소하고 백성을 사랑하였다. 건원(建元)은 한 무제(漢武帝)의 연호로 B.C 140∼134. 경제의 중자(中子)로 즉위, 문제 경제의 업을 이어 태학(太學)을 일으키고 유학을 높이며, 남월(南越)·동월(東越)을 평정하고 조선을 치고 서남이(西南夷)와 흉노를 물리치고 서역(西域) 제국과 교통하였다. 《사기(史記)》 권10, 11.
[註 138]
잔포(殘暴)한 자를 교화시키고 사형을 없앨 수 있는 덕 :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착한 사람이 나라를 다스리기를 백 년 동안 하면 잔포한 사람을 교화시키고 사형을 없앨 수 있다.’ 하였으니 참으로 옳다, 이 말이여!" 하였다. 《논어(論語)》 자로(子路).
[註 139]
백성을 화하게 하고 빨리 덕을 공경하는[諴小民疾敬德] 도 : 《서경(書經)》 소고(召誥)에 있는 말로, 성왕(成王)의 시정(始政) 때에 소공(召公)이 성왕에게 고한 말이다.
[註 140]
문자 문손(文子文孫)이신 유자왕(孺子王) : 《서경(書經)》 입정(立政)에 나오는 말로, 성왕(成王)에게 현재(賢才)을 임용하는 도리로 진계(進戒)한 것이다. 곧 성왕은, ‘무왕(武王)의 문자(文子)이신 어린 왕’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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