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다산이 강진에 도착해서 처음 거처로 삼은 주막집. 나중에 다산이 사의재라 칭했다지요.
강진은 도자기 축제를 준비하고 있더군요. 국도변에서 본 강진 벌판 입니다.
퀴즈입니다. 여기서 도자기를 찾아 보세요.
사의재 입구입니다. 시내 길가에 접해 있는 마을도로 안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담장으로 안과 밖이 구분되어 있지 않고 사방으로 여러 통로가 나 있습니다.
여기도 입구
여기도 입구. 여기가 대문이죠.
여기도 입구입니다. 조그만 연못 위에 놓은 나무다리입니다.
누군가가 빗질을 잘해 집 주변이 깔끔합니다. 진공 청소기로 청소한 것 과는 다른 정갈함이 느껴집니다.
사의재는 본채,건너채,헛간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곳은 본채입니다.
건너채는 식당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아주머니 두 분이 채소를 다듬고 있고 지금 막 손님이 들어갑니다. 전라도 사투리가 푸근하게 들려 옵니다.
사의재 마루에 앉아 봤습니다. 상상을 해 봅니다. 200년 전 그 때를. 평전의 유배지 시기를 읽고 와서 그런지 감흥이 쉽게 오는 것 같습니다. 다산이 초창기 유배 생활은 그리 여건이 좋지 않았을 겁니다. 보호 관찰 대상으로 묶인 간첩이 이 곳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딱~ 맞을 것 같습니다. 80년대 후반 비전향 장기수들이 출옥하고 여기 저기를 전전하면서 막노동하고 신분을 숨기고 살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숨어 들어간 여인숙. 그 달방을 '사의재'라 스스로 불렀습니다. 사람들은 '웃기고 자빠졌네~'라 합니다. 본인들은 누추한 여인숙 구석 방을 왜 그렇게 이름불렀을까요? 자신의 맘을 잡고 굳굳하게 살아가기 위한 다짐으로 그렇게 했을 겁니다. 외롭고 쓸슬한 겨울 밤,번화가 밤하늘을 밝히는 가로등 불빛과 취객들의 왁짜한 소리를 등에 지고 서안에 앉아 소주 한 잔에 맘을 달래고 꾿꾿하게 자신의 삶을 정리했던 사람들. 그들이 바로 다산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마루에서 본 마당 모습입니다. 여느 옛 집 마당과 다를게 없습니다. 고추와 가지,그리고 꽃들이 심어져 있습니다. 조금 여유가 없어 보이지만 황토흙 마당이 맘을 편안하게 해 주는 것 같습니다.
본채 오른쪽으로 돌아 가면 잔디가 깔려 있는 빈터가 보입니다. 여기에 안내판이 있습니다. 민박집을 세우겠다는 내용입니다. 단순한 체험 민박집이 아나라 다산을 공부하고 토론하는 그런 민박집이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박석무저자가 쓴 평전을 읽고 하루 묻으며 다산에 대해 토론하는 행사를 하면 좋겠다 싶습니다.
주모 동상도 보이는데 다소 이질적입니다. 그래도 간첩같은 다산을 측은지심을 가지고 받아 준 노파와 딸이 고맙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나름 좋다는 생각입니다. 다산은 강진에 올 때 이렇게 이야기 했답니다. 사람이 조금 어려우면 다소 도와주려 하는데 아주 어려우면 도와주지 않는다. 그러는 와중에 이 노파가 손을 내밀었으니 이렇게 후대의 탐방객의 기억에 남게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겠지요. 노파는 맹자가 이야기하는 인간의 본성을 제대로 실천한 위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의재에 세워져 있는 안내문들을 둘러 보겠습니다. 다산실학의 4대 성지라 해서 네 군데를 소개하는 안내판입니다. 다산이 18년 동안 머물렀던 네 곳을 이르는 말입니다. 다산은 1801년에서 1805년 4 년간 본인이 동천여사(동쪽 샘물에 있는 집),혹은 동천매반사(동쪽 샘에 있는 밥 파는 집)로 일컬은 사의재애 묻었습니다. 05년 겨울부터 06년 봄까지는 보은 산방에 머믈며 두번째 내려온 첫 아들 학유와 함께 열공을 합니다. 06년 가을에서 08년 봄까지는 그의 애제자 이청(학래라 부릅니다.)의 집에 머뭅니다. 08년 봄 우연히 찾아간 귤동의 초당이 맘에 들어 주인으 허락하에 여기에 머뭅니다. 우리가 아는 다산초당입니다. 이곳에서 18년 해배될 때가지 11년을 머물게 되지요.
다산은 1801년 신유년에 국문을 두 번 당합니다. 그를 친애했던 정조대왕이 1800년에 붕어하고 당시 11세 였던 순조가 왕위에 등극하면서 영조의 계비이자 순조의 증조할머니인 정순대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게 됩니다. 정순대비를 등에 업고 노론 벽파가 다시 권력을 잡습니다. 정순대비는 1월 10일에 서교를 사학이라 칭하고 이를 섬기면 역적죄로 다룰 것임을 천명하는 포고령을 내립니다. 오가작통이라는 무서운 연좌제를 실시하여 발각되면 '당연히 코를 베어 죽여서 씨도 남기지 않도록 하라'고 합니다.
1월 19일에는 다산의 두 살 터울로 위인 정약종이 천주교 자료들을 장롱에 담아 운반하던 중 한성부 포교에게 압수당하는 이른바 '서급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노론 벽파는 남인의 신서파를 일망타진할 계획을 세웁니다. 정약종은 종교적 신념을 지키고 순교를 합니다. 그외 최창현,최필공,홍교만,김백순,김건순등 거물급 신자들이 순교하죠. 이강환,이승훈도 정략적 판단으로 사형을 당합니다. 다행히 정약용과 그의 중형인 정약전은 각각 경상도 장기현과 전라도 신지도로 유배를 가게 됩니다.
그런데 9월에는 황사영 백서사건이 발생합니다. 정약용과 약전은 다시 한양으로 끌려가 국문을 받게 되는데 사실 정치적 탄압이 농후합니다. 여기서도 혐의가 없자 정약용은 강진으로 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를 가게 갑니다. 그들은 수원을 거쳐 금금강을 넘어 나주로 같이 내려 옵니다. 나주에서 약전은 흑산도로 약용은 영산강을 거쳐 영암 월출산을 넘어 강진으로 들어 오게 됩니다.
다산이 중형 정약전과 같이 걸었던 유배길을 올레길 처럼 소개하고 있는 안내판입니다. 걷는 것을 좋아 하고 다산의 유배길을 걸으며 다산의 삶과 사상을 되새겨 본다면 그 것도 좋은 경험이겠다 싶습니다.
다산이 이야기 하는 '사의재'의 의미를 적어 놓은 것 입니다. 다산은 1801년 겨울 강진에 유배가 와서 외롭고 힘든 겨울을 보냅니다. 이듬해 가을이 되어야 사람들 인심이 되살아 나고 관의 감시도 느슨해 지면서 아전들이 먼저 자식들 교육을 청해 옵니다. 여기서 만나 평생 만남을 지속한 제자가 손병조,황상,황경,이청,황지초,김재정등이었고 특히 황상과 이청이 시와 理에서 뛰어났다고 합니다. 다산은 제자들을 길러내면서 일 년이 지난 후 자신의 봉놋방 서당이름을 사의재로 정합니다. 아마 그때까지 보는 눈이 있어서 소위 누구나 다 아는 비밀스러움으로 아이들을 가르쳤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의재는 결국 자기 결의인 것 같습니다. 학인으로 이러한 몸가짐을 가지고 살겠다는 것이지요. 담백한 생각,장중한 외모,과묵한 말,무거운 몸가짐(삶을 바꾼 만남의 책에서 인용)을 뜻하는 네 가지의 마땅함(宜). 현대는 자기 PR시대라 하고 개성을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그 옛날은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그러나 本은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경박한 생각과 행동으로 표현되는 자기 PR은 남에게 공감을 얻을 수는 없을 거라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깊이 새겨볼 말인 것 같습니다.
다산은 그 전 해(1802년 정월) 자식들에게 공부방 이름을 삼사재로 하라 했습니다. 삼사재는 斯는 멀리 하라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삼사는 사납고 거만한 뜻을 지녀 함부로 행동하면 못 쓴다. 비루하고 속된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신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를 의미합니다.
고달픈 귀양살이를 읊은 시입니다. 그 상황이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정호승시인의 다산에 대한 시입니다. 잘 안보이네요. 후대의 유명한 학자와 문학가들이 다산을 노래했습니다. 다산은 한 시대의 매듭이었는지 모릅니다. 그 매듭을 가지고 우리는 한 차원 다른 도약을 할 수 있었을거라 생각됩니다.
첫댓글 여러분들의 공부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네..감사합니다. 다산의 숨결이 느껴집니다.
가 보고 싶은 마음만 굴뚝같네요.
늦게나마 잘 읽고 갑니다. 가보고 싶은 것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