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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陰縣新創鄕校 안의향교 2023년 개교 550주년
점필재집 시집 제8권 / [시(詩)]
상원일에 안음에 가서 중용형을 뵙고, 안음현감 및 진사 이녹숭ㆍ훈도 도영창ㆍ유극기ㆍ한백원과 함께 술을 마시고 취해서 돌아오니, 밤은 2경이 되어가는데 눈빛과 달빛이 서로 빛나므로 남계를 지나면서 시를 지었다. 이 때 도 훈도ㆍ유극기ㆍ한백원 세 사람이 따라 돌아왔다[上元日謁仲容兄於安陰與安陰明府及李進士祿崇都訓導永昌兪克己韓百源飮醉還夜將二鼓雪月交輝過灆溪有作時都韓三人從還]
천지의 중간에 먼지 하나 움직이지 않으니 / 天地中間不動塵
달빛과 눈빛이 가장 정신이 쇄락하구나 / 嫦娥滕六最精神
말 느슨히 몰며 백봉의 간장은 썰렁한데 / 緩騎白鳳肝腸冷
네 사람이 함께 고대를 읊으며 지나노라 / 吟過孤臺共四人
우리 형제 잔치 파하니 닭은 홰로 올라가고 / 醉罷鴒原雞欲棲
밝은 달빛은 위아래로 우리들을 따르누나 / 淸光上下屬吾儕
흥이 다하여 배 돌린 것과는 상관 없으니 / 非關興盡仍回棹
남계를 가지고 섬계에 비교하지 말아다오 / 莫把灆溪比剡溪
[주-D001] 백봉의 간장 : 뛰어난 시상(詩想)을 비유한 말. 한(漢) 나라 때의 문장가인 양웅(揚雄)이 흰 봉황[白鳳]을 토(吐)하는 꿈을 꾸고부터 사부(詞賦)가 더욱 뛰어났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주-D002] 남계를 가지고……비교하지 말아다오 : 진(晉) 나라 때 왕휘지(王徽之)가 일찍이 산음(山陰)에 살 적에 어느 날 밤 눈이 막 개고 달빛이 청량하자, 문득 섬계(剡溪)에 사는 친구 대규(戴逵)가 생각나므로, 즉시 조그마한 배를 타고 대규의 집을 향하여 밤새도록 가서 그의 집 문앞까지 가서는 들어가지 않고 배를 돌려 되돌아왔다. 그러자 누가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내가 본디 흥이 나서 왔다가 흥이 다하여 되돌아가는 것이니, 어찌 꼭 안도(安道: 대규의 자)를 만나볼 것이 있겠는가.”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晉書 卷八十》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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佔畢齋文集卷之二 / 安陰縣新創鄕校
朝鮮受帝命。尹東夏。首以闢庠序。育人才爲務。雖窮陬遐裔。莫不有鄕校。由是。文明之治。度越前古。安陰爲縣。介居山谷。實小且僻。然其登帳之戶。殆一千有奇。自感陰徙治于利安。且已五十有七年。爲邑如是其久也。生齒如是其繁也。而學舍至今未克建。生徒貿貿。僑寓或僧舍。或縣司。前後凡六所。最後。依於縣宰之廢衙。湫隘頹頓。非惟師生之次無別。先聖先師憑神之版。亦且束之屛處。每春秋釋奠。始出而陳之以祭。嗚呼。何其慢易之至於斯耶。原厥所以。守令則曰。簿書期會。不獲譴於監司。足矣。吾不知其他。學官則曰。饔飧供具。屬饜足矣。營繕非吾力所及。不肯出一言以勸守令。乾沒之與。餔歠相遭。弛慢縱臾。各廢其職。觀民風者。雖歲一至焉。而生徒苟備烏巾靑衿。謹於迎侯。則以爲不愆於禮。漫不問學舍之修廢。此所以幾於六十年而無作之者也。我殿下卽位之四年。
中原崔侯榮。自晉州通判。移莅于玆。
余兄仲容。方爲訓導。道同志合。
語及于是。慨然有營建之志。于時。朝廷有旨。令諸道。修葺學校。兄語崔曰。時不可失。卜地於縣治之北三里許。得厚岩寺舊址。林麓幽邃。面勢隆曠。東西二川。鏘鳴金石。合流于巽維。宛若泮水之制。兄又語崔曰。地不可失。遂欣然諧協。須材之夫。發於儒吏之戶。陶土之工。徵諸遊手之徒。募得良民許遠。
先立夫子廟。規制宏敞。是癸巳之秋八月也。
未幾。崔侯政成而還朝。
平陽申侯允完繼來。其程督一如崔侯。左齋右庖。前置修軒。明倫之堂。端據其後。而東西夾室。具焉。
乃塗其雘。周以崇墉。告成于甲午之夏四月。
又作十二位之神主。奉安新廟。旣舍采已。大合縣之耆老而落之。隣邑文士。咸來觀禮。余以兄之故。亦往賓席。酒一行。進諸生而諗之曰。吾東方。家塾黨庠。無其制。而民益蚩蠢。幸値聖明。十室之邑。皆有學舍。以敎子弟。每三載。貢其俊秀者。二三子之邑。獨闕焉無聞。豈徒長民者之責。諸君與有愧焉。今也。連得賢宰。而吾兄無一權力。惟以祗順上意。誘導後進爲心。贊二侯。終始經度。百年闕典。一朝而新。使諸君春秋弦誦。有游息藏修之所。雖欲怠於爲學。容何辭焉。諸生應曰。諾。旣而。又告之曰。爲學有本原。孝弟是也。孝弟也者。無所不在。諸君在家。則有家廟之事。於校則有奠采之禮。其周旋升降。灌𨡜獻酬。於是乎齋其誠。在家則有父母。於校則有師長。其省謁唯諾。服勤諫諍。於是乎比其敬。在家則有兄弟。於校則有朋友。其友愛恭順。麗澤摩勵。於是乎推其信。苟能是。則學不出於黌序。而德成藝立。他日。興於鄕。立於朝。擧此而措之。無所往而不綽綽然矣。諸生復應曰。敢不書紳。以毋墜先生之命。遂記于壁。以擬夫白鹿洞䂓云。
점필재집 문집 제2권 / 기(記) / 안음현에 향교를 새로 창건하다[安陰縣新創鄕校]
조선(朝鮮)이 황제의 명을 받아 동하(東夏 동방 화하(東方華夏))를 다스리면서 으뜸으로 학교를 개설하여 인재(人才) 양성하는 것을 급무로 삼았다. 그리하여 아무리 궁벽한 고장의 먼 곳 백성들에게도 향교(鄕校)가 있지 않은 데가 없어, 이로 말미암아 문명(文明)의 치적(治績)이 전고(前古)를 초월하였다.
그런데 안음현(安陰縣)은 산골짜기에 끼여 있어 실로 작고 또 궁벽하다. 그러나 그 민적(民籍)에 오른 호수(戶數)만도 거의 천여 호가 되고, 감음현(感陰縣)을 이안현(利安縣)으로 옮겨 다스린 지도 벌써 57년이나 되었다. 고을은 이토록 오래되었고, 인구는 이토록 번성해졌는데도 지금까지 학사(學舍)를 건립하지 못하여 우매한 생도(生徒)들이 승사(僧舍)나 혹은 현사(縣舍) 등 전후로 모두 여섯 군데에서 붙여 있다가, 최후에는 현재(縣宰)의 폐아(廢衙)에 의지해 있는데, 이 곳은 땅이 낮고 좁은데다 건물도 퇴락하였다. 그래서 스승과 생도의 자리만 구별이 없을 뿐 아니라, 선성(先聖), 선사(先師)의 위판(位版) 또한 묶어서 밀쳐 두었다가 매양 봄, 가을의 석전(釋奠) 때에야 비로소 꺼내서 진열하여 제사를 지내고 있으니, 아, 어쩌면 만홀하기가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그 까닭을 추구해 보면 이러하다. 수령(守令)은 곧 “관청의 직무 수행에 있어 감사(監司)로부터 견책만 받지 않으면 족하다. 나는 기타의 일은 알 바 아니다.”는 태도이고, 학관(學官)은 곧 “조석(朝夕)의 음식만 배부르게 먹으면 족하다. 건물을 짓거나 수리하는 일은 내 힘이 미칠 바가 아니다.”는 태도에서, 한 마디 말이나마 꺼내서 수령에게 권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민재(民財)를 마구 취렴(聚斂)하는 수령과 음식이나 탐하는 학관이 서로 만나서 해이하고 완만하게 서로 부추기면서 각기 자기의 직무를 유기해버렸다.
그런데 민풍(民風)을 관찰하는 이는 비록 해마다 한 번씩 오기는 하지만, 생도들이 만일 오건(烏巾)과 청금(靑衿)을 착용하고 관찰사를 맞이하는 데에 공근(恭謹)하기만 하면 곧 예에 어긋나지 않았다고 여기고, 학사(學舍)의 수폐(修廢)에 관해서는 전혀 묻지도 않았으니, 이런 때문에 거의 60년 동안이나 학사를 지은 자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우리 전하께서 즉위한 지 4년이 되던 해에
중원(中原) 최후 영(崔侯榮)이 진주 통판(晉州通判)에서 이 곳으로 옮겨 보임되었는데,
나의 형 중용(仲容)이 이 때 훈도(訓導)로 있으면서 최후와 서로 도가 같고 뜻이 합하여 이 일을 서로 언급한 나머지 개연히 향교를 영건(營建)할 뜻을 갖게 되었다. 이 때 마침 조정에서 분부가 내려 제도(諸道)로 하여금 학교를 수리하게 하였으므로, 형이 최후에게 “이 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 하고는, 현(縣) 소재지의 북쪽으로 3리쯤 되는 곳에 땅을 가려 후암사(厚巖寺)의 옛 터를 얻었는데, 산자락의 숲은 깊고 그윽하고 면세(面勢)는 높고 탁 트이었으며, 동쪽 서쪽의 두 냇물은 콸콸 흘러서 동남방에서 합류(合流)되어 완연히 반수(泮水)의 제도와 같았다.
그러자 형은 또 최후에게 “땅을 잃어서는 안 된다.” 하고, 마침내 흔연히 서로 합의하여, 재목 실어나르는 인부(人夫)는 유리(儒吏)의 가호(家戶)에서 징발하고, 흙 바르는 인부는 놀고 지내는 무리들에서 동원하였으며, 양민(良民) 허원(許遠)을 뽑아서 먼저
부자묘(夫子廟)부터 세우고 보니, 규제(規制)가 넓고 통창하였다. 이 때가 바로 계사년(1473, 성종4) 가을 8월이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최후가 임기를 마치고 환조(還朝)하자,
평양(平陽) 신후 윤완(申侯允完)이 그 뒤를 이어 와서 그 작업을 맡겨 독책하기를 일체 최후와 같이 하여, 왼쪽에는 재(齋), 오른쪽에는 포(庖), 앞에는 수헌(修軒)을 두고, 명륜당(明倫堂)을 바로 그 뒤에 세우고 동서(東西)로 협실(夾室)을 갖추었다.
그리고는 이에 모두 단청(丹靑)을 바르고 빙 둘러 담장을 높이 쌓아서
갑오년(1474, 성종5) 여름 4월에 고성(告成)하였다.
또 십이위(十二位)의 신주(神主)를 만들어 신묘(新廟)에 봉안하고, 석채(釋菜)를 마친 다음, 현(縣)의 기로(耆老)들을 크게 모아서 낙성식(落成式)을 가졌다. 그러자 인읍(隣邑)의 문사(文士)들이 모두 와서 예절을 구경하였다. 나는 형 때문에 또한 빈석(賓席)에 참여하였는데, 술이 한 순배 돌아가자, 내가 제생(諸生)들을 앞으로 나오게 하여 고(告)하기를,
“우리 동방에는 가숙(家塾)과 당상(黨庠)의 제도가 없어서 백성들이 더욱 어리석었는데, 다행히 성명(聖明)의 세대를 만나서는 십실(十室)의 마을에도 모두 학사(學舍)를 두어 자제들을 가르쳐서 매양 3년마다 그 중에 준수(俊秀)한 자를 천거하여 올렸다. 그런데 이삼자(二三子)의 고을에만 유독 빠져서 들을 수가 없으니, 이것이 어찌 한갓 관장(官長)의 책임만 되겠는가. 제군도 함께 부끄러울 일인 것이다. 그러다가 지금에야 연해서 어진 수재(守宰)를 얻음으로 인하여 우리 형은 한 가지 권력도 없이 오직 성상의 뜻을 공경히 따르고 후진(後進)들을 바르게 유도할 것만을 마음으로 삼아서 두 수재를 도와 처음부터 끝까지 일을 경영한 결과, 백 년 동안 결여되어온 전례(典禮)가 하루 아침에 일신되었다. 그래서 제군들로 하여금 춘추(春秋)로 글을 읽는 데에 있어 휴식하고 학문하는 장소가 있게 하였으니, 아무리 학문을 하는 데에 게으르고자 하더라도 무슨 핑계를 대겠는가.”
하니, 제생들이 그렇다고 응답하였다. 이윽고 나는 또 그들에게 고하기를,
“학문을 하는 데에 본원(本源)이 있으니, 효제(孝弟)가 바로 그것인데, 효제는 있지 않은 곳이 없다. 제군이 집에서는 가묘(家廟)의 일이 있고 향교에는 전채(奠菜)의 예가 있으니, 그 주선(周旋)하고 승강(升降)하며 제사지내고 헌수(獻酬)할 적에 여기에서 그 정성을 똑같이 하는 것이며, 제군이 집에서는 부모가 있고 향교에는 사장(師長)이 있으니, 그 살펴 뵙고 응답하고 명령에 따라 열심히 임무를 수행하고 간쟁(諫諍)할 적에 여기에서 그 공경을 똑같이 하는 것이며, 집에서는 형제(兄弟)가 있고 향교에는 붕우(朋友)가 있으니, 그 우애하고 공순하며 학문과 덕행을 서로 돕고 연마할 적에 여기에서 그 신의를 넓히는 것이다. 진실로 이렇게만 할 수 있다면 배우는 것이 이 향교를 벗어나지 않고도 덕(德)이 이루어지고 기예(技藝)가 수립되어, 후일 향(鄕)에서 천거되어 조정(朝廷)에 서게 되더라도 이 도리를 가지고 시행한다면 어디에서도 여유가 작작하게 될 것이다.”
하니, 제생이 다시 응답하기를,
“감히 큰 띠에 써서 선생의 명령을 명심하지 않겠습니까.”
하므로, 마침내 이것을 벽에 기록하여 백록동규(白鹿洞規)에 비기는 바이다.
[주-D001] 반수(泮水) : 옛날 태학(太學)의 동서쪽 문(門) 남쪽에 빙 둘러 있던 물을 가리킨다.[주-D002] 백록동규(白鹿洞規) : 백록동서원 학규(白鹿洞書院學規)의 준말로, 당(唐) 나라 초기의 백록동서원이 송(宋) 나라 때에 이르러 이미 황폐해졌는데, 주희(朱熹)가 그것을 복구시키고 학규(學規)를 조목별로 게시(揭示)했던 데서 온 말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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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행(金樂行) 1708년(숙종 34)~1766년(영조 42)
九思堂先生續集卷之三 / 墓碣 / 徵士風乎亭申公墓碣 附遺事後敍
申祉 14?? ? 寧海 篤慶 風乎亭
故徵士風乎亭申公之葬。在眞城縣西茅田向坤之原。宜人咸陽吳氏祔于後。九世孫應鉉追其先考翼之志。與族子正兌謀表于公墓之隧。來責銘。不敢終辭。謹按公諱
祉。字篤慶。本寧海人。高麗文貞公贒之後。曾祖諱得淸。恭愍朝以判事致仕。祖諱藝。中郞將。考諱永錫。敎導官。妣原州李氏。監務稠之女也。公以我恭定王某年月日生。性至孝。稍長。恪受敎導公敎誨。篤志向學。自中郞公徙眞城。至敎導公。又寓居原州。而與李氏間一日而沒。公時未冠。親執喪事。自斂至葬。竭力無闕禮。泣血三年以致毁。天順中登國庠。已而絶意進取。退居求志。惠莊王癸未。察孝廉。除義盈庫副使。公曰。祿不逮養。學未及成。辭不就。晩歸眞城。作亭合江上流。命曰風乎。每春暮。携冠童。臨流而浴。倚欄而風。曰。想曾點之志而戒其狂。以早孤不得終養爲大痛。每日晨昬。涕泣謁祠堂。年八袠。猶親奠獻。厚置祭田。爲歌詩以寓哀慕之意。當時士大夫祭三代。公獨据程朱說。設四龕。祭及高祖。有二弟三妹。友愛篤至。與上舍公禧。至老相提携以爲樂。敎子孫。拳拳以文學忠孝勉之。有遺戒傳于家。公歿弘治中。今且三百年。其事行不可得以詳。然同時名賢
金瓜堂宗裕。以公比之雪中松桂。
公之外玄孫金文忠公誠一。以行高當世稱之。後之欲知公者足徵焉。配吳氏。監司儼之女。有淑德。生子命昌郡守。郡守子眷副司果。女適金禮範。贈承旨。卽文忠公大父。司果子從渭。知丑山郡事。以孝聞于朝。光渭司勇,景渭,應渭,守渭習讀。餘不盡錄。其著者在玄孫。曰漹。有文行。嘗假牧尙州。曰演。以孝聞。贈左尹。曰滌武科。丙子死雙嶺。在五世孫。曰禮男。儀觀甚偉。當壬辰亂。賊遇而奇之。欲挈去。卽奮罵自决死。贈參判。妻閔氏。亦以貞烈㫌閭。人稱雙節。曰智男敎官。有文行。曰忠男。贈軍資正。曰慶男。贈承旨。六世孫。曰楗。濟用副正。曰楫文科。光海時退不仕。後官至正。曰榏。贈參議。曰橈。以孝稱。曰𥴈。丙子後廢擧隱居。七世孫。曰周翰。贈參判。曰光斗。曰周伯並生員。八世孫。曰垕。文科縣監。十世孫。曰達濟進士。嗚呼。觀於子孫節行之盛。可不知所自乎。銘曰。
維志之高。維德之厚。忠孝作先。以錫厥後。無謂遠矣。其徵則有。
頃年。申君應鉉大瞻甫。以其先祖風乎公遺事來示樂行。責以墓道之文。樂行八世祖妣申氏。於風乎公爲孫女。樂行卽公之外裔也。義當相其役。遂不敢終辭。然後世刻石。率屈於力。文必取簡約。雖眞爲秉筆君子者且不免。况樂行哉。其大而不可闕者。固不敢不書。亦節而略之。不能畢著其本末。其小者又不暇及焉。然事雖小而所係於潛德者大。若是者烏可以終沒之哉。公曾祖判事公登甲科。仕恭愍朝。知麗之將亡。退老于家以終。皇考敎導公早孤失學。旣冠。受母夫人之戒。感奮就敎官受業。篤志好學。後登上庠。調江界敎導官。其世德家學。固已有源本矣。公生有異質。幼而馴雅。敎導公甚愛之。爲文以授之。所言皆篤學力行之意。其家庭之間。所以期望而傳授之者又如此。公孝思出天。當其喪二親於原州也。他鄕無宗族。二弟幼。公獨自經紀。旣合葬。卽竪碣以表之。築石爲墻。以防野火。旣老。猶自力於祭祀。盡其追養之誠。置祭田奴僕特厚。遺命使之永不祧敎導公。幼時。從母元司直夫人及外祖兄弟同正李公某有鞠養撫愛之恩。而兩家皆絶不祀。公曰。非族之祭。雖云非禮。吾不忍餒彼之鬼。每於其亡日。祭之甚謹。夫根於心者質也。質者本也。修餙於外者文也。文者末也。與其文勝而事末也。寧質勝而敦本。是故君子之失。常在於厚。縱使公之遺命及祭元李數事。有違於禮典。此君子之失也。非仁孝厚德根於心。能之乎。凡世之早孤而失養。竆獨而無後者。讀公之遺事。皆可以隕淚矣。公自少好山水。旣歸眞城。愛合江上流水石之勝。遂作風乎亭日。靜處其中。謝絶世事。詠歌以自樂。其襟懷趣味。固超然出於流俗矣。且以公之行事考之。其發於言者。亦一本於質實。而不以文餙虛假可知也。乃以曾點之志自許。而以之名其亭。豈程子所謂已見大意者歟。樂行讀公所爲家傳書序,祀位詩,風乎亭詩序諸篇。其詞華雖若有遜於後世纂組之工。然亦皆藹然出於肝肺。而不屑屑乎聲病粉澤之末。此又可敬。樂行因是而益知古今人之不相及也。古之君子。辭或不足。而其不盡之意。在於言句之外。取名於世者不盛。而蓄德於中者甚富。今之人號爲操觚墨者。類能摛華綴藻。燁然可觀。而求其實。則與其言不同者多。然世且以美名歸之。受之者亦詡詡然無所讓。此亦末俗文勝之弊。主世道者。宜若可以反之也。公之序曰。昔先人作書戒之。純深懇到。余謹受敎。有志於學。而誦習經傳。未透精義。講劘師友。未得領會。學未深造。孤負先訓。葢敎導公之所以訓公。公之所以自勉。非世俗詞章名利之業也。旣擧進士。卽退而養靜者。葢欲專意此學。以體先訓。故其被徵也。亦以學未及成爲辭。然孟子曰。誦其詩讀其書。不知其人可乎。是以論其世也。今論公之世而迹公之不就徵。其微意又可見也。金瓜堂贈公詩曰。長占雲林寄此身。不聞時事轉頭新。滿園松桂偏宜雪。泛水鳧鷖豈受塵。是其知公者哉。自公之沒。歷數百年。累經兵燹。遺文字多放失。平日事蹟不盡傳。惜哉。公之後以孝節文學相繼。蔚然可述。丑山公有畫像。後人於合江上。建影堂以祭之。參判公夫人閔氏貞烈事。見續三綱行實。其棹楔今猶在玄谷村前路上。諱楫。嘗爲密陽府使。故世稱密陽公。少遊鄭文莊公之門。爲高弟。諱𥴈。丙子後隱居。名其室曰新亭。以寓感憤之懷。有述志詩。諱橈。明經飭行。父喪服闋。又居憂三年云。應鉉卽新亭公之曾孫。其先公諱某有文行。以長德稱於鄕黨。應鉉老而讀書。淳厚信善。克世其家。方纂述先德。圖所以傳於後者。
구사당속집 제3권 / 묘갈(墓碣)
징사 풍호정 신공 묘갈 유사의 후서를 붙이다 〔徵士風乎亭申公墓碣 附遺事後敍〕
고(故) 징사(徵士) 풍호정(風乎亭) 신공(申公)의 묘소는 진성현(眞城縣) 서쪽 모전(茅田) 곤향(坤向)의 언덕에 있고, 의인(宜人) 함양 오씨(咸陽吳氏)의 묘소는 공의 묘 뒤에 부장되어 있다. 공의 9대손 응현(應鉉)이 그의 선친 익(翼)의 뜻을 추념하여 족자(族子) 정태(正兌)와 함께 공의 묘도(墓道)에 비석을 세우기를 도모하고 나에게 와서 묘갈명을 청하니 감히 끝까지 사양할 수가 없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공의 휘는 지(祉)이고 자는 독경(篤慶)이며 본관은 영해(寧海)이다. 고려시대 문정공(文貞公) 현(賢)의 후손이다. 증조부의 휘는 득청(得淸)으로 공민왕(恭愍王) 때 판사(判事)로 벼슬을 그만두었다. 조부의 휘는 예(藝)로 중랑장(中郞將)을 지냈고 아버지의 휘는 영석(永錫)으로 교도관(敎導官)을 지냈다. 어머니는 원주 이씨(原州李氏)로 감무(監務)를 지낸 조(稠)의 따님이다. 공은 조선조 공정왕(恭定王 태종(太宗)) 모년 모월 모일에 태어났다.
공은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조금 성장해서는 공경히 아버지 교도공의 가르침을 받아서 향학에 뜻을 돈독히 두었다. 조부 중랑장이 진성(眞城)으로 이사한 뒤로, 교도공에 이르러 또 원주(原州)에 우거하였는데 교도공이 부인 이씨와 함께 하루 사이에 모두 죽었다. 공이 이 때 관례를 올리지 않은 나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히 상사를 치르는데, 염(斂)으로부터 장례에 이르기까지 힘을 다하여 예의 절차를 빠뜨림이 없었고, 3년 동안 피눈물을 흘리며 지나치게 애통해하여 몸이 손상될 정도였다.
천순(天順) 연간에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얼마 후 벼슬의 진출에 뜻을 끊고 물러나 거처하며 자신의 뜻을 구하였다. 혜장왕(惠莊王 세조(世祖)) 계미년(1463, 세조9)에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의영고 부사(義盈庫副使)에 임명되었다. 공이 말하기를 “녹봉으로 봉양할 어버이가 계시지 않고 학업도 성취되지 않았다.”라고 하면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만년에 진성으로 돌아와 합강(合江)의 상류에 정자를 짓고 이름을 풍호정(風乎亭)이라 하였다. 매양 늦봄에 관자와 동자를 데리고 흐르는 물에 임하여 목욕하고 난간에 기대어 바람을 쐬면서 날마다 증점(曾點)의 뜻을 상상하며 그의 광(狂)을 경계하였다.
이른 나이에 어버이를 잃어 봉양을 마치지 못한 것을 매우 애통하게 생각하여 매일 새벽과 저녁에 눈물을 흘리며 사당을 배알하였다. 나이 80세가 되어도 오히려 친히 제수를 올렸고 제전(祭田)을 넉넉하게 두었다. 또 가시(歌詩)를 지어 어버이를 애틋하게 사모하는 뜻을 붙였다. 당시 사대부들이 3대의 조상만을 제사 지냈는데, 공은 유독 정주설(程朱說)에 의거하여 네 개의 감실을 만들고 고조부까지 제사를 지냈다. 두 남동생과 세 여동생이 있었는데 우애로 대함이 독실하고 지극하였다. 상사공(上舍公) 희(禧)와는 늙을 때까지 손잡고 끌어주며 즐겁게 지냈다. 자손들을 가르침에는 부지런하게 문학(文學)과 충효로 면려하여 유계(遺戒)가 집에 전해오고 있다.
공은 홍치(弘治) 연간에 죽었으니, 지금 거의 300년이 되어가기에 그의 업적과 행실은 상세하게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동시대에 살았던 명현(名賢)
과당(瓜堂) 김종유(金宗裕)는
공을 눈 내린 가운데의 소나무와 계수나무에 비유하였고, 공의 외현손 문충공(文忠公) 김성일(金誠一)은 행실이 당세에 우뚝한 것으로 칭찬하였으니, 후대에 공을 알려는 자는 이것으로 충분히 징험할 수 있다.
부인 함양 오씨는 감사(監司) 엄(儼)의 따님이니, 착하고 올바른 덕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낳은 아들 명창(命昌)은 군수를 지냈다. 군수의 아들은 권(眷)으로 부사과(副司果)을 지냈으며 딸은 김예범(金禮範)에게 시집갔는데, 김예범은 승지(承旨)에 증직되었으니 곧 문충공의 조부이다. 부사과의 아들은 종위(從渭)로 축산군 지사(丑山郡知事)를 지냈는데, 효행으로 조정에 알려졌다. 또 사용(司勇)을 지낸 광위(光渭),경위(景渭),응위(應渭),습독관(習讀官)을 지낸 수위(守渭)가 있다.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그중에 드러난 자로는 현손자의 항렬에 언(漹)은 문학과 행실로서 임시 상주 목사(尙州牧使)가 된 적이 있고, 연(演)은 효행으로 조정에 알려져 좌윤(左尹)에 증직되었고, 척(滌)은 무과에 급제하여 병자호란 때 쌍령(雙嶺)에서 전사하였다.
공의 5세손 항렬에 예남(禮男)은 풍모가 매우 훌륭하였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적이 만나보고는 기이하게 여겨 데리고 가려하니, 즉시 분노하며 꾸짖고 자결하였으며, 참판에 증직되었다. 아내 민씨(閔氏)도 정렬(貞烈)로 정려가 내려지니, 사람들이 부부를 두고 쌍절(雙節)이라 말하였다. 또 지남(智男)은 교관을 지냈으며 훌륭한 문장과 행실이 있었다. 충남(忠男)은 군자감 정(軍資監正)에 증직되었다. 경남(慶男)은 승지(承旨)에 증직되었다.
공의 6세손 항렬에 건(楗)은 제용감 부정(濟用監副正)을 지냈으며, 집(楫)은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광해군 때 조정에서 물러나 벼슬하지 않다가 뒤에 관직이 제용감 정(正)에 이르렀다. 익(榏)은 참의(參議)에 증직되었고, 요(橈)는 효도로 일컬어졌다. 전(𣝕)은 병자호란 이후 과거시험을 그만두고 은거하였다.
공의 7세손 주한(周翰)은 참판(參判)에 증직되었으며, 광두(光斗)와 주백(周伯)은 모두 생원이 되었다. 공의 8세손 후(垕)는 문과에 급제하여 현감이 되었다. 공의 10세손 달제(達濟)는 진사가 되었다. 아! 자손들의 성대한 절의의 행실을 보면 유래가 있음을 알지 못하랴.
명은 다음과 같다.
오직 뜻은 높고 / 維志之高
오직 덕은 두터웠네 / 維德之厚
충과 효는 선대부터 행하여 / 忠孝作先
그 후손에게 물려주었네 / 以錫厥後
시대가 멀다고 말하지 마라 / 無謂遠矣
그것을 증거할 자료는 있다네 / 其徵則有
지난해 신응현(申應鉉) 대첨(大瞻) 군이 그의 선조 풍호공(風乎公)의 유사(遺事)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주면서 묘갈명을 지어주기를 부탁하였다. 나의 8대 조모 신씨(申氏)는 풍호공의 손녀이니, 그렇게 따지면 나는 곧 공의 외손이 된다. 의리상 마땅히 그 일을 도와야 하겠기에 드디어 감히 끝까지 사양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후세에 비석을 세우면서 대체로 재력이 부족하여 비문을 반드시 간략하게 지으니, 비록 참으로 붓을 잡는 군자라 할지라도 또한 이런 사정을 피할 수 없는데, 하물며 나 같은 사람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중에 중대한 일로 빠뜨릴 수 없는 것은 진실로 감히 서술하지 않을 수 없지만, 또한 절제하여 간략하게 함으로 인하여 그 일의 본말을 다 드러낼 수 없었다. 또 그중에 작은 일은 언급할 여유가 없었지만, 일이 비록 작다고 하더라도 숨어있는 덕에 관계되는 것으로 중대한 경우는 어찌 끝내 매몰시킬 수 있겠는가.
공의 증조부 판사공(判事公)은 문과에 갑과(甲科)로 합격하여 공민왕에게 벼슬하다가 고려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 집으로 물러나 늙으면서 일생을 마쳤다. 공의 아버지 교도공(敎導公)은 일찍 아버지를 잃고 배움의 기회를 놓쳤다. 이미 관례를 치르고 어머니의 경계를 받아들여 감격하고 분발하여 교관(敎官)에게 나아가 배웠는데 뜻을 돈독히 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였다. 뒤에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강계 교도관(江界敎導官)에 임명되었다. 집안의 세덕(世德)과 가학(家學)이 진실로 이미 근원과 뿌리가 있었던 것이다.
공은 태어나면서 특출한 자질을 가졌고 어려서는 양순하고 전아하였다. 교도공이 매우 사랑하였기에 글을 지어 주었는데 내용이 모두 독실하게 배우고 힘써 실행하는 뜻이었다. 그 집안에서 기약하고 바라며 전수함이 또한 이와 같았다. 공의 효성은 하늘에서 타고난 것이었다. 원주(原州)에서 두 분 부모님의 상을 당하였을 때, 타향이기 때문에 종족이 없었으며 두 동생도 어렸다. 이에 공이 홀로 스스로 장례의 일을 순리대로 처리하였다. 이미 합장하여 묘소를 만들고는 곧바로 비석을 세워서 표창하였으며, 돌을 쌓아 울타리를 만들어 야화(野火)를 예방하였다.
이미 늙어서도 오히려 제사에 스스로 힘을 써서 추급하여 봉양하는 정성을 극진히 하였다. 제전(祭田)을 두었고 노비들에게 특별히 후하게 대하였다. 유명(遺命)으로 영원히 교도공의 신주를 조매하지 못하게 하였다. 공이 어릴 때 이모인 원 사직(元司直) 부인과 외조부의 형제인 동정(同正) 이공(李公) 모씨에게 길러주고 어루만져주며 사랑해주는 은혜를 받았는데, 양가에 모두 후손이 끊어져 제사를 지내지 못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종족이 아닌 사람에게 지내는 제사는 비록 예가 아니라고 말하나 내가 차마 저분들의 영혼을 굶주리게 할 수가 없다.”라고 하고는 매양 그들이 돌아가신 날에 제사를 드리기를 매우 근엄하게 하였다.
대저 마음에 근본하는 것은 질(質)이니 질은 근본이고, 밖으로 수식하는 것은 문(文)이니 문은 말단이다. 문이 성대하며 말단을 일삼기보다는 차라리 질이 성대하며 근본을 도탑게 하는 것이 낫다. 그래서 군자의 실수는 항상 두텁게 하는 데 있다. 가령 공의 유명(遺命), 원 사직 부인과 외조부 이공에게 제사를 지내는 몇 가지 일은 예법에 위배되는 것이 있으나 이것은 군자의 실수이다. 인효(仁孝)의 두터운 덕이 마음에 근본하지 않았다면 능할 수 있겠는가. 무릇 세상에서 일찍 부모님을 잃어 봉양을 하지 못하였거나 궁핍하게 홀로 살면서 후손이 없는 사람은 공의 유사(遺事)를 읽으면 모두 눈물을 흘릴 수 있을 것이다.
공은 어릴 때부터 산수를 좋아하였다. 이미 진성(眞城)에 돌아와서는 합강(合江) 상류의 수석(水石) 승경을 좋아하여 드디어 풍호정(風乎亭)을 지었다. 그리고는 날마다 그 가운데 고요하게 거처하며 세속의 일을 사절하고, 시를 읊조리고 노래하며 스스로 즐겼는데, 그 회포의 취향이 진실로 초연하게 세속에서 벗어났다. 또 공의 행실과 업적으로 고찰해보면, 언어로 표현한 글들이 또한 한결같이 질박하고 성실한 것에 근본하였고 문식으로 헛된 가식을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에 증점(曾點)의 뜻으로 스스로 허여하여 이것으로 그 정자를 이름하였으니, 아마도 정자(程子)가 말한 바 ‘이미 큰 뜻을 보았다’는 사람에 해당할 것이다.
내가 공이 지은 〈가전서서(家傳書序)〉,〈사위시(祀位詩)〉,〈풍호정시서(風乎亭詩序)〉 등 여러 편을 읽어보니, 시문의 재화(才華)가 비록 후대 사람들이 말을 모아 엮은 공교로움에는 손색이 있는 것 같으나 또한 모든 작품이 성대하게 가슴에서 우러나왔고 성병(聲病)과 분택(粉澤)의 말단에 자질구레하게 얽매이지 않았으니, 이 점 또한 공경할 만하다. 내가 이로 인하여 지금 사람이 고인에게 미칠 수 없는 것을 더욱 알게 되었다.
옛날 군자는 언사는 혹 부족할지라도 다하지 않는 뜻이 언어 구절의 밖에 있기에, 세상에서 명성을 취하는 것을 성대하게 여기지 않고 마음에 덕을 축적하는 것을 매우 넉넉하게 하였다. 요즘 사람 중에 문필가로 일컬어지는 자들은 대체로 화려하게 표현하고 무늬를 주워 모아 빛나게 볼 만한 글을 짓지만, 그 실상을 구해보면 그 말과 같지 않는 자가 많다. 그러나 세상에서 또한 아름다운 명성으로 부여해주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가 또한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사양하지 않으니, 이것은 또한 말세의 풍속에서 문(文)이 성대한 폐단이다. 세도(世道)를 주관하는 자는 마땅히 질(質)로 돌이켜야 할 것 같다.
공이 지은 〈가전서서(家傳書序)〉에 말하기를 “옛날에 선친이 편지를 써서 경계하였는데, 순수함이 깊고 간절함이 지극하였다. 제가 삼가 가르침을 받아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경전을 암송하여 익힘에 정밀한 뜻에 투철하지 못하였고 사우들과 강마(講磨)함에 뜻을 터득하지 못하여, 학문에 깊이 나아가지 못한 채 선친의 가르침을 저버렸다.”라고 하였으니, 대개 교도공이 공을 가르친 바와 공이 스스로 힘쓴 바는 세속의 사장(詞章)과 명리(名利)의 학업이 아니었다. 이미 진사시험에 합격하고 곧바로 물러나 고요한 가운데 마음을 기른 것은 대개 이 학문〔유학〕에 뜻을 오로지 하여 선친의 교훈을 체득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므로 벼슬의 부름을 받아도 또한 학문이 완성되지 못한 것으로 사양하였다. 그러나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그 시를 외우며 그 글을 읽으면서 그 사람을 알지 못하면 되겠는가. 이 때문에 그 당세를 논한다.”라고 하였으니, 지금 공의 시대를 논하여 공이 벼슬의 부름에 나아가지 않은 점을 추적해보면 그의 은미한 뜻을 또한 알 수 있다.
김과당이 공에게 준 시에 “길이 은둔처를 차지하여 이 몸을 깃들이며, 시사가 변하는 것을 듣지 않네. 정원에 가득한 소나무와 계수나무는 눈 속에 매우 어울리니, 물 위에 노니는 오리 갈매기가 어찌 티끌을 받으랴.”라고 하였으니, 이는 공을 알아본 작품일 것이다. 공이 죽은 뒤로부터 수백 년이 지났고 또 여러 번 병화를 겪어 남긴 글이 산실됨이 많아 평소의 사적이 모두 전해지는 것은 아니니, 애석하다.
공의 뒤로 효행과 절개 그리고 문학에 뛰어난 이들이 서로 이어져 기술할 만한 성대한 점이 있다. 축산공(丑山公 축산군 지사를 지낸 종위(從渭))은 초상화가 남아있는데, 후인들이 합강 가에 영당(影堂)을 건립하여 제사를 지내고 있다. 참판공(參判公) 부인 민씨(閔氏)의 정렬(貞烈)에 대한 일은 《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에 보이고, 그의 정려각은 지금도 현곡촌(玄谷村) 앞 길가에 있다.
휘 집(楫)은 밀양 부사(密陽府使)가 된 적이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밀양공(密陽公)이라 일컫는다. 그는 어릴 때 정 문장공(鄭文莊公 정경세(鄭經世))의 문하에서 배워서 고제(高弟)가 되었다. 휘 전(𣝕)은 병자호란 이후에 은거하여 당호를 신정(新亭)이라 하고, 비분강개하는 회포를 부쳐서 뜻을 술회한 시를 지었다. 휘 요(橈)는 경전에 밝고 행실을 계칙하였으며, 아버지상에 삼년복 입기를 마치고도 또 다시 삼 년 동안 상주로 지냈다고 한다. 응현(應鉉)은 곧 신정공의 증손자이다. 그의 아버지 휘 모는 훌륭한 문학과 행실이 있어서 뛰어난 덕으로 고을에서 칭찬을 받았다. 응현은 늙어서도 독서하여 순후(淳厚)하고 신선(信善)하였으며, 그 집안의 전통을 이어서 바야흐로 선조의 덕을 찬술하여 후세에 전할 것을 도모한 사람이다.
[주-D001] 족자(族子) : 고조부 이상에서 갈라진 집안의 조카를 말한다.[주-D002] 문정공(文貞公) 현(賢) : 1298~1377. 본관은 평산(平山), 어렸을 때 이름은 몽월(夢月)이다. 자는 신경(信敬), 호는 불훤재(不諼齋, 不萱齋)로 고려 개국공신(開國功臣) 신숭겸(申崇謙)의 12세손이다. 어려서부터 역동(易東) 우탁(禹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충숙왕(忠肅王) 2년(1315) 성균시(成均試)에서 장원급제하였다. 충숙왕(忠肅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원(元)나라에 가서 주공천(朱公遷), 허겸(許謙), 전당(錢唐) 등과 종유하며 학문에 더욱 전념하여 대학자가 되었다. 그 뒤로도 여러 번 원나라에 초빙되었는데 명제(明帝)가 사례(師禮)로 대하고 불훤재(不諼齋)라는 호(號)를 내렸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주-D003] 천순(天順) : 명나라 영종(英宗)의 연호로 1457~1464년 사이이다.[주-D004] 증점(曾點)의 …… 경계하였다 : 《논어》 〈선진(先進)〉에 공자(孔子)가 제자들에게 각기 자신의 뜻을 말하라고 하자 증점(曾點)이 “모춘에 봄옷이 이루어지거든 관자 대 여섯 사람 및 동자 예닐곱 사람과 함께 기수에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면서 돌아오겠다.〔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하였다. 이에 공자께서 위연히 감탄하면서 “나는 증점을 허여하노라”라고 하였다. 그런데 《맹자》 〈진심 하(盡心下)〉에 증점을 광자(狂者)에 분류하고 있는데, 광자는 뜻이 크지만 행동이 따르지 못하여 중도의 도리에 너무 지나친 사람을 말한다.[주-D005] 상사공(上舍公) 희(禧) : 신희(申禧, 1426~1526)는 풍호정의 동생으로 1465년(세조11)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그 뒤 흥해 훈도(興海訓導), 풍천 교수(豊川敎授), 전생서 주부(典牲暑主簿)를 역임하였다.[주-D006] 홍치(弘治) : 명나라 효종(孝宗)의 연호로 1488년~1505년 사이이다.[주-D007] 김종유(金宗裕) : 1429~?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중용(仲容), 호는 과당(瓜堂)이다. 김숙자(金叔滋)의 둘째 아들이며 김종직(金宗直)의 형이다. 1453년(단종1) 진사에 합격하여 안음 훈도(安陰訓導)와 선교랑(宣敎郞)을 지냈다.[주-D008] 김성일(金誠一) : 1538~1593.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峯),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저서로 《학봉집》이 있다.[주-D009] 쌍령(雙嶺) : 오늘날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대쌍령리 일대를 말한다. 여기에서 1637년 1월 3일 조선군은 청나라군과 싸워서 대패하였으니, 이것이 유명한 쌍령전투이다.[주-D010] 원 사직(元司直) : 성이 원씨(元氏)로 사직(司直) 벼슬을 한 사람이다. 사직은 오위(五衛)의 한 관직으로 현직(現職)이 아닌 문무관(文武官)과 음관(蔭官)을 임용(任用)하였다. 정5품으로 부호군(副護軍)의 다음이며 부사직(副司直)의 위로 실무는 없었다.[주-D011] 동정(同正) : 실지 직무를 집행하지 아니하고 벼슬자리의 명목만을 띠는 벼슬로, 차함(借銜)의 벼슬 이름 아래에 붙여 쓰던 칭호이다.[주-D012] 증점(曾點)의 …… 이름하였으니 : 기수(沂水)에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쐬며 산수간에 한가로이 노는 아취를 말한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각기 자신의 뜻을 말하라고 하자 증점(曾點)이 “모춘에 봄옷이 이루어지거든 관자 대 여섯 사람과 동자 예닐곱 사람과 함께 기수에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면서 돌아오겠다.〔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하였다. 《論語 先進》 ‘풍호정’은 여기에서 따온 것이다.[주-D013] 정자(程子)가 …… 보았다 : 《논어》 〈선진〉에 나오는 위의 글 주석에서 정자(程子)가 “증점과 칠조개(漆雕開)는 이미 큰 뜻을 보았다.”라고 하였다.[주-D014] 성병(聲病) : 문장시부(文章詩賦)를 짓는데 있어서 평측(平仄)과 성조(聲調)에 얽매이는 병폐(病弊)를 말한다.[주-D015] 분택(粉澤) : 수식하고 윤색하여 꾸미는 것을 말한다.[주-D016] 맹자(孟子)가 …… 논한다 :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나온다.[주-D017] 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 : 1617년(광해군9) 편찬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를 말하는 듯하다. 임진왜란 중에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비롯하여 신라, 고려, 조선 시대의 충신, 효자, 열녀의 행적을 수록한 책이다. 임진왜란 이후 피폐해져서 유교적 가치관이 혼란스러워 나라를 통치하는데 어려움이 있자, 국민 도의를 다시 회복하고 혼란스러운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광해군이 온 국력을 기울여 간행한 책이다.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송희준 (역) |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