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것도 아닌데 400년도 넘게 사람들이 돌보는 무덤들이 있다. 다름 아니라 '말(馬)의 무덤'이다. 4백여 년 전에 죽은 숱한 이들의 자취가 흔적조차 없는데, 짐승들의 무덤이 곱게 벌초되며 관리되고 있는 것은 의아한 일이다. 그러나 그 사연을 따라 가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만만치 않은 역사와 만나게 된다.
전남 강진군 작천면 척동마을의 황의진(87)옹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의병으로 활약한 양건당(兩蹇堂) 황대중(黃大中) 장군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양건당께서는 젊어서부터 지극한 효자였소. 어머님 병환에 사람의 살이 약이 된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고 허벅지살을 잘라 달여 드려서 낫게 해드렸지. 그 때문에 다리를 절게 되셨는데, 임진왜란에 거제도에서 싸우시다가 오른쪽 다리까지 다쳐 두 다리를 모두 절게 되자 이순신 장군이 '과거의 다리는 효건(孝蹇)이요, 지금의 다리는 충건(忠蹇)이니 양건(兩蹇)이로다' 하셨다고 해. 그래서 양건당이 되셨지."
황대중 장군은 젊은 시절 운명처럼 우연히 집에 찾아들어온 말과 함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전쟁터를 누비다가, 1597년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하고 만다. 주인이 죽자 곁을 떠나지 않고 우는 말의 등에 김완 장군이 시신을 수습해 태웠고, 말은 강진까지 쉬지 않고 내달렸다. 고향마을에 도착한 말은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장례가 끝난 지 3일 만에 죽었다고 전한다. 그 뒤 가족과 마을 사람들은 장군의 묘지 가까운 곳에 말 무덤을 만들어 충정을 기리고 있다.
전남 나주시 세지면에는 역시 남원성 전투에서 함께 순절한 후조당(後凋堂) 이용제(李容濟) 장군의 묘와 함께 그의 말을 기리는 의마지총(義馬之塚)이 있다.
이용제 장군은 1591년 무과에 급제한 뒤 4년 후 흥덕현감으로 부임하고,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이순신 장군 휘하의 삼도수군 통제영에서 활약했다. 도원수 권율이 선조에게 올린 장계에는 이용제 장군이 "거제 기문포 수군연합작전에서 왜적선 3척을 격파하고 육지로 기어오르는 왜적 18급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고 기록돼 있다.
이후 이용제 장군은 흥덕현의 관군을 이끌고 남원성 전투에서 싸우다 시신조차 수습되지 못한,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이용제 장군의 애마는 장군의 갑옷만을 입에 물고 고향 마을로 돌아왔는데, 기력이 모두 소진되어 죽고 말았다고 한다.
후손 이난수(78)씨는 "어려서부터 말 무덤이 있는 뒷산 전체를 몰무덤(말무덤)이라고 불렀지요"라고 말한다. 말 무덤 자체가 지명이 될 만큼 400여년 동안 마을의 역사와 함께 해 온 셈이다. 마을 입구에는 장군의 충절을 기려 임금이 내린 정려각(영조 17년)이 있다.
전남 곡성으로 가면 임란의병장 월파(月坡) 유팽로(柳彭老) 장군과 운명을 함께한 말의 무덤이 있다.
유팽로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1592년 4월 20일을 기해 전국에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켰으며, 그해 7월 10일 벌어진 금산전투에서 산화하기까지 초기 의병의 선두에 서서 싸운 청년 의병장이었다. 유팽로 장군의 활동은 이후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라 불리게 한 줄기찬 전라의병투쟁의 시발점이자 사표가 되었다.
유팽로 장군은 1592년 4월 초 홍문관 박사에 올랐다. 왜군에게 동래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많은 이들이 숨고 달아날 차비를 할 때, 유팽로 장군은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서울을 떠나 고향으로 향했다. 유팽로 장군은 고향과 가까운 순창 대동산 앞에 이르러 수백의 군사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왜적이 강함을 알고 읍성을 점령해 적에게 바치고자 하던 부랑배 무리였다. 유팽로 장군은 대의로써 나라를 지켜야 함을 웅변하며 이들을 설득하여 의병으로 바꾸었다.
그해 5월 29일에는 담양에서 고경명 장군을 중심으로 전라도 연합의병인 담양회맹군이 결성되었다. 이후 연합의병의 선봉장을 맡았던 유팽로 장군은 금산혈투에서 왜적의 급습을 받아 진용이 무너져 퇴각하던 중, 고경명 장군이 미쳐 빠져 나오지 못했음을 알고는 다시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고경명 장군이 "나는 이미 면치 못할 것을 아는데 공은 왜 아직 탈출하지 않는가, 후일을 기약하라"고 하였지만 유팽로 장군은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싸우다 전사하였다.
유팽로 장군의 말, 오리마(烏驪馬, 검은색 말)는 주인의 머리를 물고 고향으로 돌아왔고 김씨부인은 이를 치마폭으로 받아안아 장례를 치렀다. 말은 9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울다가 굶어 죽었다고 한다. 1년 뒤 김씨부인도 남편의 기일을 마치고는 자결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