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원 A씨는 최근 새로 개봉하는 영화 포스터를 인터넷에서 보고 의문이 들었다. 한글로만 큼지막하게 적혀 있는 제목만 보고선 그게 무슨 뜻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역사극 같아 보이는데, '임금의 길(君道)'일까? 아니면 주인공이 큰 칼을 들고 있으니 '군사용 칼(軍刀)'일까?" 궁금해서 예고편 동영상까지 찾아보니 그제야 제목 옆에 '群盜'라는 조그만 글씨가 보였다. '떼도둑'이란 뜻이었다.
A씨는 "한자로 썼으면 금세 무슨 뜻인지 알았을 단어를 한글로만 써서 더 어렵게 하고 있다"며 "한자를 전혀 드러내지 않은 채 단어 뜻을 유추하라는 건 무리"라고 말했다. 1980~90년대만 해도 '英雄本色(영웅본색)' '將軍(장군)의 아들'처럼 영화 포스터에 제목을 한자로 표기하는 일이 흔했으나, 40대까지 한글 전용 세대가 된 지금은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문제는 한자를 쓰지 않으면 복수(複數)의 의미 중에서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려운 제목들조차 이런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경주' '만신' '관상'은 무슨 뜻?
'군도'는 '표준국어대사전'에 실린 뜻만 해도 아홉 가지다. '무리를 이룬 섬(群島)' '군인이나 군대(軍徒)' '군용 도로(軍道)' '군(郡)의 도로(郡道)'…. 영화 '군도'의 제작사 측은 "디자인상 복잡해지는 것을 피하려고 포스터에서 한자 표기를 뺐다"고 밝혔다. 인터넷에는 〈영화 '군도'의 뜻, 알고 보니〉란 뉴스 기사도 올라 있다.
지난 6월 개봉한 박해일 주연의 영화 '경주'도 포스터만 봐선 뜻을 알 수 없긴 마찬가지다. '경주' 역시 '표준국어대사전'에 표제어가 8개나 올라 있을 정도로 한자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뜻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대략 지명인 '경주(慶州)'나 '빠르기를 겨룬다'는 '경주(競走)' 등으로 추정되는데, 확인 결과 전자였다.
역시 올해 개봉한 김새론·류현경 주연 영화 '만신'도 무녀를 높여 부르는 '만신(萬神)'인지, '온몸'을 뜻하는 '만신(滿身)'인지 알기 어려운데, '텐 사우전드 스피리츠(Ten Thousand Spirits)'란 영문 부제를 보고서야 전자임을 짐작할 수 있다. 지난해 개봉했던 영화 '관상'은 여러 배우의 얼굴 사진을 실은 포스터와 구석에 작게나마 적은 한자를 보고서 '관상(觀相·운명 등과 관련이 있다고 믿는 사람의 얼굴 모습)'임을 유추할 수 있었지만, '관상'에도 '천문이나 기상을 관측하는 일(觀象)' '취미에 맞는 동식물 등을 보면서 즐김(觀賞)' '상념을 일으켜 번뇌를 없애는 일(觀想)' 등 일곱 가지 뜻이 있다.
◇'神醫'에서 '信義'로 바뀐 '신의'
한구석에 낙관(落款) 모양으로 작게 한자 표기를 하기 일쑤인 TV 드라마 제목도 혼란을 주기는 마찬가지다. 2012년 SBS 드라마 '신의'는 원래 한자 제목을 '신의(神醫)'로 하려다가 대본 수정 등의 이유로 '신의(信義)'로 바꿨는데, 한자 제목 자체가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이 사실을 모르는 시청자가 많았다.
지난해 MBC 드라마 '마의'와 KBS 드라마 '천명' 역시 한자를 쓰지 않으면 뜻을 알기 어려운 제목이었다. 전자는 '삼베옷'이나 '마의태자'를 뜻하는 '마의(麻衣)'가 아니라 '조선시대에 말을 치료하는 의원'인 '마의(馬醫)'였다. 후자는 '사실이나 입장을 드러내 밝힌다'는 '천명(闡明)'이나 '천한 이름'이라는 '천명(賤名)'이 아니라, '하늘의 명령'이나 '타고난 수명'인 '천명(天命)'이었다. 한글 제목만 가지고는 그 뜻을 짐작조차 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는데, 지난해 MBC 드라마 '구가의 서'가 대표적이다. 이것은 '구가(九家)의 서(書)'로, 뜻은 '구미호 일족 사이에서 전해 내려온 책'이라고 제작진은 밝혔다.
전광배 월간 '한글+한자문화' 편집장은 "한자어가 문장 속에 들어 있을 때는 문맥을 통해 유추라도 할 수 있지만, 작품 제목을 한글로만 쓰면 그것조차 불가능하다"며 "언론 매체에서도 혼동을 줄 수 있는 작품명은 반드시 한자를 병기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