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를테면 '후기쟁이'랄까요? 써 두지 않으면 하도 잘 까먹어서 책 보고, 영화 보고, 연극 보고, 사람 보고 어떻게든 쓰면서 살려고 해요. 이제 배움터 사흘째인데, 혼자만 누리긴 아까워서 다른 선생님들도 많이 함께 했으면 하는 마음에 일기처럼 하루씩 남겨 볼게요. 옷 짓느라 정신이 없어서 사진 찍어둔 건 없고, 눈으로 마음으로 찍어둔 것만 옮겨 보겠습니다.
옷 짓는 날 1
내 동무 지영 언니는 늘 우리 마을에서 누구보다 빠르게 좋은 것들을 내게 날라다 준다. 기막히게 맛난 음식, 가슴 울리는 좋은 책, 혼자 듣기 아까운 강의나 음악 따위를, 누구보다 앞서 전해주고 안겨다준다. 그래서 이번에 언니가 함께 철릭원피스 만들자 이야기했을 때 일정 맞추는 거 말고는 별다른 고민 없이 같이 하겠다 답했다.
옷 짓는 첫날 일정은 내 몸 치수를 재는 일과 옷감 뜨러 진시장에 가는 것이다. 내 몸 치수를 재어서 나에게 딱 맞는 옷을 지어 입는다니! 그동안 내게 옷은 사 입는 것이지, 짓는 게 아니었다. 어렸을 때 엄마가 스웨터나 조끼를 떠준 일은 있지만, 내 손으로 내 옷을 만들어 입는 건 정말 난생처음이다.
평소에는 잴 일 없었던 가슴둘레와 팔길이, 어깨 너비, 등길이, 허리 둘레, 뒷목점에서 내 종아리까지의 길이를 구석구석 재었다. 키나 몸무게, 나이, 시력 말고는 내 몸과 관련된 숫자는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치수를 잴 때마다 내 몸 여기저기를 새로이 발견하는 기분이다. 내 뒷목점이 여기 있구나! 80A, 90B 따위로 끼워 맞춰 왔던 가슴 둘레가 아니라 모두 다르게 봉긋한 가슴을 가지고 있구나! 나는 옆으로 허리가 길구나! 어깨가 정말 딱 벌어졌구나! 마흔 해 넘게 이 몸으로 살아왔는데, 아직도 내 몸에 대해 모르는 게 참 많다. 치수를 재며 몸을 알아가는 것만으로도 이미 나를 대접해주는 기분이다. 정해져 있는 사이즈에 맞춰서 옷을 입는 게 아니라, 내 몸에 맞춰 옷을 입을 준비를 한다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어깨가 쫙 펴지고, 등뼈가 곧추 서고 턱이 살짝 들린다. 아침 출근 때면 늘 급하게 허겁지겁 옷을 걸치던 때와는 천지 차이다. 마음이 당당해진달까?
재어둔 치수들을 바탕으로 옷본을 그렸다. 저고리 제도를 하는데 그려야 하는 옷본만 해도 여러 장이다. 뒷판, 앞판, 곁마기, 당, 소매, 수구(소매 끝동) 따위를 하나, 하나 그렸다. 선생님이 미리 밖에서 구해 오신 철지난 포스터에 그려둔 옷본을 붙이니 당장 옷 몇 벌은 만들 수 있을 것 같처럼 든든하다. 이 옷본만 있으면 이제 몇 벌이고 문제 없다, 고 이때는 생각했다. ^-^;;;
옷본을 다 그리고 점심 먹은 후 옷감을 끊으러 진시장에 갔다. 자유롭게 진시장을 둘러보다 세 시쯤 18호문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언니와 나는 선생님이 일러주신 가게 세 곳을 둘러보며 미리 마음에 드는 천을 찜해 두었다. 시어머니가 가끔 진시장에서 뜬 천으로 딸아이 이불을 만들어 주시기도 하고, 어머니 옷도 지어입으셔서 늘 어떤 곳인지 궁금했는데 한번도 제대로 둘러볼 기회가 없었다. 다 둘러보진 못했어도 완전 다른 세상에 들어온 듯했다. 나중에 같이 공부하는 선생님께 들었는데, 2층에서 천을 골라 3층에서 옷을 지어주시기도 한단다. 지금처럼 쉽게 옷을 사 입고 또 싫증나면 쉽게 버리는 세상에, 정성스레 옷감을 골라 내 몸에 맞게 지어주는 사람들이, 그걸 지어입겠다는 사람들이 여기 다 모여있다. 참말 새 세상이 맞다. 늘 천은 인터넷에서 샀는데 직접 만져보고, 내 몸에 둘러보며 천을 고르는 맛이 쏠쏠하다. 고름으로 쓸 천, 곁마기로 들어갈 천, 당으로 쓸 천을 이야기하며 옷감을 고르고 있자니, 치수 재며 처들렸던 고개가 더 위로 향하고, 콧대도 높아지는 듯하다. 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세상으로 의기양양하게 들어서는 기분이다. 앞으로 이 콧대가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고개가 아래로, 아래로 향하는 시간이 앞에 놓여진 건 상상도 못한 채 옷감 네마 반, 자신감 사십마 반을 끊어 집으로 돌아갔다.
나, 이제 진시장에서 옷감 끊어 옷 지어 입는 사람이다. ^-^ (24.1.3.)
첫댓글 와. 글을 읽는내내 바느질을 잘 몰라도, 바느질 연수에 참여하지 않아도 마치 거기 있는듯 따스함이 느껴져요.
살구님 옷짓는 글은 우리들 맘에 딱 맞게 지어진 글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