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 시절, 구술생애사 작업을 하는 중 내가 만난 할머니 한 분은(몇 년전 고인이 되셨다), 당신의 손녀에 관한 이야기를 매우 구불구불한 방식으로 어렵사리 서술하셨다. 한참을 듣고 나서 정리해 보니 아래와 같은 내용이다.
1980년 5월. 당신의 큰 딸이 첫 아이를 출산하기 위해 광주 시내 모 산부인과에 입원해 있었고, 그때 5.18이 터졌다. 불을 켤 수 없어 칠흑같이 어두운 병실에서 초를 밝힌 채 아이를 출산해야 했다. 딸아이였다. 그 아이가 유치원에 다닐 무렵, 버스에 치여 사망하였다. 당시 현장에 있던 증인들에 따르면 버스에 치인 순간에 아이가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한 버스 기사가 다시 후진을 하여 아이를 ‘갈아’ 죽였다고 하였다(죽은 아이에 대한 보상금이 중증 후유 장애에 대한 보상금보다 작기 때문에 이런 선택을 하는 일들이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 죽은 아이에 대한 사망보상금으로 광주 모처에 부동산을 구입하였는데, 그 부동산의 가치가 꽤 올라 그럭저럭 먹고 살만한 삶을 살고 있는 아이의 엄마의 꿈 속에 어느 날 죽은 아이가 나타나서 울부짖었다고 한다 “엄마, 나는 한글을 몰라서 내 이름도 쓸 줄 몰라….”.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아이의 할머니, 그러니까, 내 구술생애사의 주인공은, 교회에 가서 아이의 이름으로 꽃을 바치고 목사님께 기도를 해달라고 자신의 딸에게, 그러니까 죽은 아이의 엄마에게 권유했다고 하였다. 태어나는 과정이 순탄치 않은 아이여서 죽음도 비참하였다는 이야기를 구술자는 덧붙였다.
5.18을 여태 앓으며 사는 이들이 적지 않다. 심지어, 이미 비참한 죽음이 5.18로 인해 더 비참한 방식으로 해석되며 기억되는 경우도 있다. 산 자의 생명과 죽은 자의 소멸이 제 나름대로 보장받아야 하는 최소한의 가치와 존엄을 무참히 붕괴시켜버린 집단적 트라우마가 바로 5.18인 것이다.
12.3 비상계엄사태를 겪으며, 5.18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온몸으로 느꼈다. 산 자의 생명과 죽은 자의 소멸의 다시 한번 완벽히 침탈당할 수 있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인간이라고는 하는 몹시도 연약하고 가녀린 존재의 근간이 다시금 완벽히 망각될 수도 있음을 확인하였다.
사람은 왜 사람이어야 하는가. 나는 왜 사람으로 태어나 살고 있다는 사실을 당위로서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세상을 당연히 여긴 업보가 결국 5.18의 부활이라는 참극으로 이렇게 드러나게 되는 것인가. 나는 그간 몇 명의 사람을 잡아 먹었던가. 소위 ‘내란’의 우두머리와 그 추종자들을 키워낸 이 세상은 ‘그들’만의 것이었던가.
“태어나는 과정이 순탄치 않은 아이여서 죽음도 비참하였다”는 이야기는, 개인에게 속한 것이 아니었다. 한반도의 근현대사에 대한 진혼곡이었으며, 남한사회에 닥칠 암울한 미래에 대한 슬픈 예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