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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유대-로마 전쟁과 2천 년의 방황 시작
1) 반유대주의
반유대주의는 신학적, 인종적, 정치적으로 anti-Judaism, anti-Semitism, anti-Zionism 이라는 세 가지 범주로 분류할 수 있다. 모두가 유대인 말살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움직임은 이미 유대민족의 출현과 함께 시작된 것이다. 유대인들이 거주했던 지역의 통치자들은 대부분 반유대 정책을 펼쳤다. 초기의 로마제국은 기원전 37년부터 팔레스타인에 자치 통치를 허락했다. 그러나 로마에 의해 왕으로 임명된 헤롯왕이 죽고 얼마 지난 뒤 팔레스타인 지역은 유대민족에 의한 자치 통치에서 로마제국의 직접통치로 바뀌었다. 로마 지배 당시 이집트 최대의 상업도시이자 항구도시였던 알렉산드리아에는 유대인과 그리스인이 많이 살았는데 상업적 경쟁관계인 두 민족 간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다신교를 믿었던 그리스인들은 당시에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섬긴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태양, 달, 바다, 강, 산, 바위, 큰 고목 등 형상이 있는 것을 보고 섬겼다.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그것도 유일신을 섬겨야 하는 유대인을 당시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또한 문화적 차이도 컸다. 그리스인들은 ‘세계는 하나다’라는 세계시민주의를 지향하는 헬레니즘 문화인 반면 유대인들은 선민사상에 근거한 차별성을 갖는 문화이다 보니 곳곳에서 부딪혔다. 알렉산드리아는 이제 반유대주의의 중심지가 되었다. 결국 갈등이 더해지자 해상교역과 상권을 둘러싸고 경쟁 관계에 있던 두 민족 간 알력이 폭발했다.
66년 여름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은 그리스인과 유대인 사이에서 벌어진 소송에서 그리스인이 승소한 직후 카이사리아(지금의 트리폴리)에서 발발했다. 승소한 그리스인들이 유대인을 학살하며 승리를 축하하는 동안 로마 수비대는 아무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예루살렘에서도 동요가 일어났다.이때 전쟁 여부를 놓고 유대인 온건파와 강경파 사이에서 심한 논쟁이 일었으며 강경파가 우세했다. 반란은 유대인과 그리스인 사이, 그리고 로마군과 유대인의 전쟁이자 동시에 유대인끼리의 내전이기도 했다.
2) 유대인 폭동의 시작, 1차 유대-로마 전쟁과 유대학교 ‘예시바’ 설립
유대인 폭동은 대규모 반란으로 이어져 1차 유대-로마 전쟁이 되었다. 타민족의 지배를 받고는 살지 못하는 유대인 특유의 신앙적 가치와 그리스·로마 문명과 히브리 문명 사이의 문화적 충돌과 특히 신앙적 가치의 충돌이 더 큰 원인이었다. 예루살렘에서 로마 수비대 병사들이 참살된 뒤, 시리아 주재 로마군들이 도착했으나 유대인의 거센 저항에 놀라 퇴각하였다.
AD 66년부터 70년까지 계속된 1차 유대-로마 전쟁의 발발 당시의 로마 황제는 네로였다. 예루살렘에서 로마군이 전멸하자 네로 황제는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전쟁이 시작된 지 3년째 되던 해에 베스파시아누스는 유다 왕국을 점령했지만 유대인들의 완강한 저항 때문에 예루살렘만 함락시킬 수 없어 예루살렘 도성을 포위하고 주민들이 굶주려 항복하기를 기다리는 장기전을 펼쳤다.
이 무렵 바리새파의 유명한 랍비인 ‘요하난 벤 자카이’가 민족의 독립보다는 유대교 보존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평화를 얻기 위해 항복을 주장했다. 그는 유대민족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는 것을 막으려면 로마군 사령관과 모종의 타협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비밀히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의 막사를 찾았다. 요하난 벤 자카이는 장군을 만나 머지않아 로마황제가 될 것이라고 예언한 뒤, 황제가 되면 자신들이 예루살렘 근처에서 평화롭게 유대 경전을 공부할 수 있는 조그만 학교를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매우 놀랐지만 예언이 이루어지면 호의를 베풀기로 약속했다.
같은 해 68년 네로가 자살했다. 네로가 죽자 세 명의 정치군인들이 왕위에 올랐으나 모두 몇 달 만에 살해되고 69년 새로운 황제로 베스파시아누스가 추대 되었다. 아직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베스파시아누스는 그의 아들 티투스를 후임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로마로 떠났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요하난 벤 자카이의 예언이 성취된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유대교 랍비가 당시 로마의 정치적 역학관계까지 궤 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베스파시아누스는 약속을 지켜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도시에 유대학교 ‘예시바’를 허락했다. 이로써 유대 문화유산이 소멸 위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맏아들인 티투스는 유대인들의 반란을 무력으로 가혹하게 진압하면서도 부하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하지 말라고 했으나 전쟁 중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로마제국은 승자의 관용을 베풀어 유대인들이 그들 땅에서 살며 유대교를 믿을 수 있도록 허용했다. 티투스 장군이 남아 있는 유대인들과 후대 사람들에게 로마제국의 위대한 힘을 보여 주려고 교훈적으로 남겨둔 기념물이 바로 ‘통곡의 벽(The Wailing Wall)’이 되었다.
로마는 이곳 성전 터에 유대인의 출입을 금지했으나 성전이 파괴되었던 날에 한해 예루살렘 성에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했다. 바로 이날 유대인들은 파괴당하고 겨우 서쪽에 남아 있는 벽에 모여들어 슬퍼하며 통곡했다. 그래서 통곡의 벽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지금까지도 유대인들의 최대 성지 중 하나가 되었다.
3) 2차 유대-로마 전쟁
1차 유대-로마 전쟁 이후에도 유대인의 봉기와 반란은 여러 차례 일어났다. 그러다가 AD 130년 로마제국 14대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실시한 두 가지 정책으로 유대인의 분노가 폭발했다. 하나는 식민도시를 예루살렘 바로 북쪽에 건설해 군대를 상주시킨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할례를 금지시키고 예루살렘 성전 자리에 로마의 신 주피터의 신전을 세운 것이다.
이에 격분한 유대인들은 132~135년에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킨 이 반란을 ‘제2차 유대-로마전쟁’이라고 한다. 로마 황제는 이번 기회에 아예 유대인의 뿌리를 뽑겠다고 결심하고 총동원령을 내려 결국 135년 로마군의 승리로 끝났다. 유대 역사가는 58만 명의 유대인이 전투 중에 죽고 그밖에도 “이루 셀 수 없는 수의 사람들이 굶주림과 화재와 칼에 맞아 죽고 유대 전역이 폐허가 되었다.”고 기록했다. 로마 황제는 ‘유대’라는 민족의 이름도 ‘시리아-팔레스타인’으로 바꾸었다.
4) 2차 이산, 2000년에 걸친 방랑의 시작
AD 66년 1차에 이어 132년에 발생한 2차 유대-로마전쟁으로 고대 유대 역사는 사실상 종지부를 찍었다. 1차 전쟁에서는 예루살렘 함락 이후에도 그나마 영토는 있었지만 2차 전쟁이 끝나면서 유대인들의 나라는 이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이때 유대교와 기독교는 완전히 분리되었다.
1, 2차 유대-로마전쟁으로 유대 국민의 3분의 2 이상이 죽었으며,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들은 노예로 잡혀 가거나 나라를 등지고 방랑길에 올라, 주로 북부 이탈리아와 독일 그리고 북아프리카로 향했다. 이를 ‘제2차 이산’이라 불린다.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추방된 뒤 이 지역은 주로 아랍인에 의해 통치되어 왔다.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는 이를 신이 유대인들로부터 거둬들인 축복을 이슬람에 내린 증표라고 여겼다. 아랍인들은 사라센제국 건설 이후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 팔레스타인 지역을 장악해 예루살렘을 성도로 삼아 왔다. 그 뒤 예루살렘은 십자군 원정에 의해 기독교도들에 일시적으로 점령당한 기간을 제외하고는 이슬람이 지배했다. 예루살렘은 이제 “하나의 신이 사는 집이자, 두 민족의 성도이며, 세 종교의 사원이 존재하는 유일한 도시”가 된 것이다.
유대인의 고난의 역사에서 바빌론으로의 강제 집단 이주가 첫 번째였다면 두 번째는 민족이 아예 사방으로 흩어지게 된 것이었다. 이후 유대민족은 세계 각지에서 국가적 조직체가 아닌 랍비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 공동체로 살아갔다. 이를 ‘디아스포라(Diaspora)’라 한다. 디아스포라는 ‘흩어진 사람’ 곧 이산이란 뜻으로 ‘이산 유대인 공동체’이다.
9. 2차 이산 이후, 후기 로마시대와 유대인
1) 유대인 공동체(디아스포라) 수칙
이제 유대인들은 서서히 요하난 벤 자카이의 방법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칼을 내려놓고 펜을 들었다. 이것이 바로 70~200년 사이에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의미 있는 유대 역사의 한 과정이다. 그리고 모든 지파는 사라지고 오직 바리새파 사상만이 남아 바리새파 율법학자인 랍비들이 유대인들의 정신적인 스승이 되었다.
유대인의 2차 이산 이후 유대인 지도자들은 사방에 흩어진 종족들을 보존시키고, 더 나아가 종교적 통일성과 민족적 동질성을 유지시킬 방법을 찾는다. 이 결과 그들은 디아스포라 공동체 수칙과 커뮤니티 조직에 대한 규정을 제정하고, 모든 유대인 공동체는 이것을 준수하도록 했다. 이 수칙의 요점은 “모든 유대인들은 그의 형제들을 지키는 보호자이고 유대인은 모두 한 형제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유대인 고유의 공동체의식이 유대 사회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세계 각지의 디아스포라를 하나로 묶었으며, 이 원칙들은 시대에 따른 개혁을 거쳐 오늘날까지 굳건히 이어지고 있다.
2) 로마제국의 분할
로마제국의 황금기였던 오현제 시대에는 능력 있는 사람을 황제로 추대했다. 그러나 오현제 이후 왕위가 세습되면서 로마는 쇠망의 길을 걷기 시작하여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로마제국의 혼란이 최고조에 달했을 무렵 제국 통치권을 쟁취하여 285년 왕위에 오른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광대한 로마제국에 황제가 하나뿐이기 때문에 다툼이 계속된다고 보았다. 그는 이런 폐단을 막기 위해 로마제국을 동서로 나누어 다스리기로 했다.
AD 286년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등의 서로마를 분할시켜 새로운 황제에게 맡긴 것이다. 이로써 로마제국은 동서로 나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 후 각각의 제국에 부 황제를 두어 다시 통치 구역을 4등분했다. AD 293년 이후 로마제국은 네 명의 황제가 존재하게 된다.
3) 313년 밀라노 칙령이후의 유대인 박해와 로마제국의 쇠망
로마제국 내에 기독교가 널리 퍼지자 기독교 박해가 시작되고 이것이 정치적 내분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어 황제들이 서로 다투게 되었다. 친 기독교의 콘스탄티누스 동로마 황제는 다른 황제를 하나씩 제거하고 313년 발표한 밀라노 칙령으로 로마제국 내의 종교의 자유가 선포되었다.
이로써 그동안 박해하고 금지해 왔던 기독교는 누구나 믿을 수 있는 종교로 인정되어 기독교도들에게는 무한한 기쁨이었지만, 예수를 박해했던 유대인들에게는 불행의 시작이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비잔티움(오늘의 이스탄불)을 개조해 새로운 기독교 종교도시를 만들기로 했다. 330년 로마제국의 수도를 아예 새로운 종교도시 비잔티움으로 옮기면서 이름도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뜻의 ‘콘스탄티노플’로 개명했다.
392년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국교로 채택되어 기독교 세력이 크게 늘어나면서 유대인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유대인은 하느님의 독생자 예수를 죽게 만든 하늘의 죄인이자 기독교의 적이다. 하늘에 대역죄를 지은 유대인들은 거룩한 땅 예루살렘의 하늘을 바로 쳐다보아서는 안 되며 그 신성한 마주한 땅 위에 어떠한 씨앗도 뿌려서는 안 된다. 또한 하늘에 죄를 지은 유대인들은 검과 창을 쓰는 무사가 되어서도 안 된다.”
이와 같은 로마 당국의 강력한 의지로 유대인들은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됐으며 전쟁에 군인으로 참가할 수도 없게 되었다. 이제 시민으로서의 자격이 없어진 것이다. 유대교 개종자와 기독교도의 결혼이 금지되었고, 425년 유대인들은 정부 관직에서 일할 수 있는 권리마저 박탈되었다. 또 7세기 중반에는 유대인의 토지 소유도 완전히 금지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유대인들은 어쩔 수 없이 상업에 종사하는 상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로마제국 내의 유대인 숫자는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10세기에 이르러 100~150만 명으로 대폭 줄어들었다. 상업을 장악하고 있던 유대인들이 떠난다는 이야기는 그 지역 상권이 죽고 경제가 피폐해짐을 의미했다.
로마는 혼란을 거듭하다 결국 395년 다시 동·서로 분열되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죽으면서 어린 두 아들에게 로마제국을 반반씩 나누어 상속했기 때문이다. 서로마제국에서는 라틴계가 우세했고 동로마제국에서는 그리스계가 우세했다. 동로마제국은 많은 인구, 유능한 황제, 풍부한 재정, 우수한 군사력 덕분에 3~4세기의 대 격변 속에서 살아남아 1453년까지 1000년을 이어갔으나, 반면 서로마제국은 게르만족에 의해 476년 막을 내렸다.
훗날 막스 베버는 로마제국의 멸망은 상거래 감소와 물물교환 경제의 확대가 원인이었다고 진단했다. 곧 시장경제의 파탄이 정치적 붕괴로 연결된 셈이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이지만, 유대인들을 추방시키지 않고 좀 더 관용을 베풀어 체제 안으로 흡수해 활용했다면 로마제국이 경제적인 문제로 그리 쉽게 무너졌을까? 역사의 의문점이다.
첫댓글 디아스포라는 불가사의합니다.
인간의 합리적 판단의 한계를 초월하네요.
우리 만촌의 글을 읽으니 대학의 구약과 신약성서의 강의를 들었던 생각이 나서 몆자 적어 본다,
원래 유태인들은 선민 사상이 있어서 유대교 교리에 하느님은 유태민족만 봐준다고 했는데
예수가 나타나 아니다 하느님은 유태민족만 봐주는게 아니고 모든 인류를 봐준다고 해서
유대교와 기독교가 대립을 하게 되었는데 하느님이 모든 민족 을 봐준다는 말에 유태민족만 봐 준다는 유대교가 이길수 없지요,그래서 유대교는 고립되고 유태민족도 고립되게 되지요,결국 유태민족의 고립은 유대교의 "하느님은 유태민족만 봐준다"는 그말 한마디 때문에 모든 사람들로 부터 박해를 받고 쫒겨다니는 신세가 되었다고 배웠는데 이말이 맞는지 ?
유태민족은 유태민족의 우월주의, 유태민족의 선민사상 때문에 고난을 당하게 되었는데
요즘 내가 우리 동기들과 선명하게 구별되는 주장을 한다고 오만이 원태를 망친다고 하는 놈이 있던데 나는 오만이 아니고 진리가 너회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에 따라 진리를 이야기 하면서 마음껏 자유를 누리며 망하기는 켜녕 , 더욱 번창하고 있지요, 이건 오만과는 거리가 멀지요,
소생은 귀하의 질문에 답할 만큼의 종교학적 지식이 없아오니 먼저 양해를 구합니다.
그러나 앞으로 10여회 더 계속되는 '세계사 속의 유대인 이야기'를 다 읽고 나면
궁금증이 조금은 풀릴 것이라 기대해 봅니다.
그리고 귀하의 '오만 운운'에 대한 댓글은
본 독서광장에서 왈가왈부할 논제가 아닌 듯하며,
" ...하는 놈이 있던데" 등의 표현은 삼가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참고로 푼수회 안수환 회장께서 본 카페에 올린 푼수회 보고서에서 말씀하신 5가지 선물,
즉 운수대통, 만사형통, 의사소통, 요절복통, 전화 한통 등 5통을 감사히 생각하시고,
귀하께서도 내년에는 통통통통통, 5통하시기 바랍니다.
만촌은 너무 젊잖은 어른이라, 근식이 처럼 대화를 하기가 어려울것 같네요,
,",,하는 놈이 있던데"란 말은 내가 진리만 이야기 한다고 했던 말인데 만촌의 충고를 듣고보니
진리가 아닌 말을 했네, 만촌의 지적데로 이런 진리가 아닌말은 삼가하겠음니다,이제 늙어서 정신도 좀 흐려진것 같네요,
곧 성탄과 새해가 오네요, 만촌 ! " 메리 크리스 마스 앤 해피 뉴 이어
내 댓글은 이 독서 광장에서 왈가 왈부할 할 논제가 아니라고 하는데 사나이가 정경 토론을 빼고
논쟁할 일이 어디 있는가?
나도 유태민족 처럼 되지 않으려면 문재인은 촛불만 봐주는게 아니고 태극기도 봐준다고 해야 되겠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진리가 아니다,
그래서 문재인은 촛불만 봐주지 태극기는 안봐준다고 소리높이 외쳐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