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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목 외 7편
윤석산
봄날, 접목된 가지
파르스름하게 돋는 새순은
애초 그 진통을 생각케 하는
내 여인의
마알간 눈언저리
웃음꽃입니다.
엽맥마다 눈부신 비늘을 털고
화안한 공간을 열어가며
흔들리는 꽃잎의 리듬과
달랑거리는 말방울 소리와
청사(靑紗) 초롱
그렇게 아름다운 말씀의 행렬이 있지만
꽃잎 진 자리
터지는 합창
열매 맺히는…….
푸른 순수가
안개처럼 내리는 봄날
햇살 속 해살대며
새순 돋음을 보면
과피(果皮) 벗길 은빛 과도와
대목 도리던 아픈 웃음을 생각케 합니다.
- 제1시집 아세아의 풀꽃(1977)에서
구면기하학(球面幾何學)
1. 논리의 출발
두 점 사이 최단의 거리는 곡선이다.
적어도 구면기하학(球面機何學)에서는 그렇다.
그렇다면
뜨락 한 구석
한낮의 고요란 고요가 모두 녹아내리는
저 돌멩이와 나 사이 최단의 거리는
곡선인가?
직선인가?
2. 나를 벗어나기 위하여
장미가 햇살 속에 드러눕는다.
꽃잎도 가지도 벗어버리고 그림자 속으로 눕는다.
(그림자 속의 장미는 곡면이거나 평면이다.)
바람이 불고
장미는 다시 선이 되고 점이 된다.
(그렇다면 내가 나를 벗고 햇살 속에 누우면 무엇이 될까?)
3. 고정관념
입체의 본질은 점(點)
그러나 내 눈에는 언제나
입체는 입체
(…… 내 어머니는 내 어머니, 내 아버지는 내 아버지, 내 아내는 내 아내, 내 아들은 내 아들, 내 손자는 내 손자, 나는 나 …… 피이, 그런 게 어디 있어? 아버지는 벌써 돌아가셨고, 아들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고, 있는 건 없는 거고, 없는 건 있는 것일 수 있는데……)
4. 고독한 풍경
공원에서 돌아오는 길이다.
이 세상 마지막 날 저녁처럼
아내의 머릿결에 내리는 햇살이 너무 고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되풀이해 말했다.
나는 애써 그 말을 찾아냈는데
아내는 조용히 팔짱을 웃으며 푼다.
5. 미소와 칼
흰구름이 묘한 포오즈를 잡는다.
꼭 미소짓는 소녀 같다.
그러나 친구는 칼춤 추는 얘기무당 같단다.
미소와 칼은 같은 게 아닐까?
바람에 슬리어 구름은 자꾸 모습을 바꾸는데도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을로 들어섰다. 마을에서는 저녁연기가 잔혹한 환상처럼 피어오르고, 모든 것이 흐릿하게 보였다.
- 제2시집 벽 속의 산책(1985)에서
말(言)의 오두막집에서
―현대인들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분열된 말을 구사하면서 모든 사물을 분석하고, 제한된 상상력 속에 하품하며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제주 초원에 ‘말의 오두막집’을 짓고 전설 속의 미인을 초대했다.
1
현대인들은 말의 껍데기만 가지고 산다.
가령 ‘너’라는 말만 해도 그렇다. 우리는 흔히 너를 ‘홀로 있는 너’니 ‘관계 속의 너’니 하고 나누지만, 그런 ‘너’에게는 네 마알간 피부, 네 부드러운 머리칼, 네가 아침마다 사용했을 샴푸 냄새, 그걸 헹굴 때 수도꼭지에서 똑똑 떨어지던 물방울의 투명한 울림 같은 것들은 모두 증발되고 ‘너’라는 의미만 남아 있다.
2
내가
꼭두새벽에 일어나
우두커니 뜨락의 느티나무를 바라보는 것은
간밤 ‘너’와 잔 게 아니라 너라는 ‘말’과 잤기 때문이다.
나는 만질 수도 있고, 냄새 맡을 수도 있는 말을 원한다. 아니 ‘너’와 ‘나’를 원한다.
3
태초 말씀은 법이요, 진리요, 사물이었나니,
우리 하느님이 자기 아들을 시켜 태백산 꼭대기 제일 큰 아름드리 나무 밑에 신시(神市)를 열게 하신 것도
까맣게 말라붙은 어둠을 응시하며 우어우어 기도하는 곰을 예쁜 며느리로 삼고 우리 할아버지를 낳게 하신 것도 말씀이었나니,
서양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던가, 말씀이 말씀을 낳고, 세상을 낳고, 그 아들이 홍해(紅海)를 갈랐다는,
그러나 잠시 후 너는 내 체취를 닦아내기 위해 샤워를 할 테지. 뜨락 저 느티나무도 간밤 달빛 냄새를 털어 내고 그냥 느티나무가 되어 한낮 무더위에 시달릴 테고…….
4
오, 말씀들이여!
오늘처럼 날씨가 좋은 날이면
하늘나라 들판 작은 풀꽃들의 흔들림까지 환하게 보이는 써억 좋은 날이면
그 위로 쫘악 슬리는 햇살의 미세한 표정까지 보이는 날이면
하늘 한쪽 끝에 그네를 매고, 그 그네 밀어 올려
남, 남, 남, 남빛 바다를 그대에게 보여주고 싶구나.
태초, 하늘이고, 바다고,
너이던 말씀이여!
5
언어학자들은 인간과 말이 분리되기 시작한 건 허공을 가로지르는 푸르른 장강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라고 하지만,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 구구단을 못 외우는 짝꿍의 나머지 공부를 가르치다가 머리통을 콩콩 쥐어박고 집으로 도망 오다가 주(朱)씨네 과수원 철조망을 넘은 뒤부터다.
비에 젖은 가지와 가지 사이를 날아다니며 깔깔대던 복숭아들 …… 그러나 그건 복숭아가 아니라 밤마다 내 꿈속을 기웃대는 이웃집 섭순이거나 맞으면 맞을수록 배실배실 웃는 짝꿍, 아니 그보다 훨씬 큰 내 누나 또래의 처녀애들 …… 갑자기 세상이 환해지고 온몸이 가쁜해져 나도 모르게 철조망을 넘어가 잎새 뒤에서 새침을 떠는 놈들을 골라잡는 순간 온몸 가득 좌르르 번지는 짜릿함 때문에 진저리를 친 뒤부터다.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그 때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 이빨을 옹동그려 문 과수원집 누렝이가 씨익하고 달려와 뒷동산으로 쫓기며 쫓기며 한 입 쓱 베어 물다가 책보따리를 복숭아나무 가지에 걸어 놓고 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비오는 하늘을 바라보며 목울대가 튀어나오던 그 순간을. (후략)
- 제3시집 말의 오두막집에서(1992)
칸나꽃 뒤로 보이는 풍경을 위하여
나는 왜 빗속에 날뛰는 저 바다를 언제나 바다라고만 부르는 걸까.
위태롭게 흔들리는 칸나꽃 뒤쪽 끊임없이 밀려오는 물굽이를 박차고 조랑말떼처럼 내닫는 빗줄기, 수평선은 번뜩이는 빗줄기에 실려 하늘로 오르고…….
그 뒤에 무연히 남는 공간을 산이나 들, 또는 죽음이라고 부르면 안 되는 걸까. 불같이 미끄러운 칸나라고 부르면 안 되는 걸까.
나는 왜 빗속에 흔들리는 저 칸나를 붉다고만 말하는 걸까.
꿈속인 듯 빗속인 듯 그대가 밤마다 남기고 간 입술 자욱처럼 선연하게 타오르는 저 빛깔을 사랑이나 이별 또는 불같은 미끄러움이라고 불러서는 안 되는 걸까.
누군가 이미 말한 것 같다만, 사물은 시간마다 달리 보이는 법,
그래도 관념은 여전히 고집을 피우고, 온몸 가득 까닭 없는 슬픔이 번져 나른한데,
다탁 위에 놓인 내 손을 잡고 애써 웃는 그대를 오늘만은 다르게 부르고 싶어 견딜 수가 없구나.
내가 안아 준 다음에 너는 어떻게 변할까.
너는 너, 나는 나일까. 비를 맞으며 천연스레 흔들리는 저 칸나꽃처럼 네가 너 내가 나인 것도, 서로가 서로의 껍질을 벗기고 마침내 시드는 것도 두려워 망연히 앉아있는데, 어디선가 가느다란 실내악 소리가 들려온다.
내 손을 잡고 파르르 떠는 네 손의 투명한 실핏줄에서도, 아까부터 같은 박자로 흔들리는 칸나꽃잎에서도, 그 너머를 짓달리는 빗줄기의 희끗희끗한 갈기에서도, 오보에 소리가, 클라리넷 소리가, 색소폰 소리가 들려온다. 부우, 부우, 부우우, 부우, 부우, 부우우…….
그대여! 아직은 대낮이다만,
태양은 먹구름 속으로 들어가 천지가 캄캄.
그러나 아직은 부끄러운 대낮이다만, 희미한 등불을 들고 어두운 네 층계를 내려가려 하노니, 부드럽게 부드럽게 내려가려 하노니,
왜 이렇게 자꾸 말이 더듬어질까, 미끈덩거리는 욕망에 걸려 넘어지는 관념들, 그 때마다 네 몸은 하이얀 파도가 되어 갈라지고, 그 틈으로 얼핏얼핏 드러나는 침대. 그 시트 위에 쓰인 먼 나라 문자들이 신비롭구나.
나는 왜 빗속에 날뛰는 저 바다를 언제나 바다라고만 부르는 걸까.
흔들리는 칸나꽃 뒤쪽 번뜩이는 빗줄기에 실려 하늘로 오르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아득해 하는 이 맘을 사랑이라고 부르면 안 되는 걸까.
몸서리치도록 고운 꽃빛깔에 걸려 넘어지는 관념 위로 부우우, 부우, 부우……, 색소폰 소리가 쏟아지는데
나는 마땅한 네 이름을 생각할 수 없어 죽음을 생각한다. …… 부우, 부우, 부우…….
- 제4시집 나는 왜 비 속에 날뛰는 저 바다를 언제나 바다라고만 부른 걸까(1994)
꿈속으로 가는 길
산수국 꽃잎 속에는 길이 있어.
도깨비불보다 더 파아란 길이 있어.
그 길 끝 숲 속에는 의자 두 개가 있어
달빛이 앉았다 가는 의자 두 개가 있어.
그대가 커피를 마시다 놔둔 종이컵이 있어.
- 제5시집 다시 말의 오두막집 남쪽 언덕에서(1999)
노오란 프리지어 꽃잎 속의 바다와 나
죽을 것같이 고요한 대낮, 나는 없고, 화병에 꽂힌 프리지어 꽃잎 속 간밤 그대와 마시던 술잔 가에 묻은 슬픔과 그 슬픔 뒤에서 아른대던 욕망과 사랑이 뭔가 토론하던 말에서 밀려난 생각들이 노오랗게 물들어가고 있는데, 나는 없고……, 나를 생각하는 내가 없어 관념의 바다 한복판에 꽃잎만 한 배를 띄우고 오늘도 나를 찾아 항해를 시작한다.
오후 내내
돛 접은 요트 하나가
어디론가 까닥까닥 흘러가고 있다.
- 제6시집 우주에는 우리가 지운 말들이 가득 떠돌고 있다(2009)
*<한국문학 도서관(www.kll.co.kr)>을 구축하다가 정년퇴임을 앞두고 파산 직전의 상태에 빠져 옳은 것은 반드시 이뤄진다는 신념을 포기하고 절망하면서 상상력 놀이를 한 작품이라서 골랐음.
러브 스토리를 보며 울었다
- 병상의 산책 3
병원 TV에서 「러브 스토리」를 방영하고 있다.
‘사랑은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 거’라는…….
그러나 눈싸움을 하다가 지쳐 언덕바지에 드러누운 두 주인공에게
그 말이 사랑의 시작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다시 장면이 바뀌고,
여자 주인공 제니퍼가 자기가 죽으면 결혼하라고 애원하는데,
내 ‘여친(女親)’은 일흔한 살 할머니……,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G선상의 아리아」에
자꾸 눈시울이 젖어 고개를 돌렸다.
- 제7시집 존재하지 않는 존재에 의한 통증(2017)
점 속의 풍경
- 망처의 노래 11
당신이 자박자박 걸어 들어간 점 속 세상은 아주 고요하네요.
간혹 낙엽이 날리고
싸락눈이 쌓이더니
이젠 고요만 일렁거려 눈물이 나려고 하네요.
- 제8시집 하늘나라 들판에서 깨달은 사랑(2024)
■ 시인의 에스프리 - 나의 인생, 나의 문학
문학도 인생도 거기 있는 게 아니라 찾아가는 과정
1. 작품을 못 쓴다고 동인회에서 쫓겨난 ‘동인회 회장’
대부분의 문인들은 타고난 재능 때문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김래성(金來成) 선생의 황금박쥐와 알렉상드르 듀마의 철가면을 뒤섞어 장편소설을 쓰겠다고 덤비고, 중학교 때 롱펠로우의 에반젤린에 감동을 받아 망부석 전설로 장편 서사시를 썼지만, 그 흔한 백일장에서 입선 한 번 해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제가 시를 쓰기로 결심한 것은 1965년 2년제 교육대학을 들어가고 한 달 뒤부터입니다. 봉천지기 대여섯 마지기밖에 없는 가난한 농사꾼 8남매 장남으로 태어나 검정고시를 합격해야 학력을 인정받는 ‘고등공민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도 석 달 늦게 들어가 장학생으로 졸업하고, 졸업을 하고 교편을 잡으면 밥은 먹고 살게 될 것 같아 장차 뭘 하며 살까 생각하다가 밤뻐꾸기 울음을 들으며 시를 쓰기로 결심했지요.
아마 대학에 들어와 읽기 시작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휴매니즘이다 영향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텅 빈 인생에서 내 가치는 타자와 맺은 ‘관계의 질(質)’에서 결정된다는 말에 자극을 받고, 어떤 방법으로 맺을까 생각하다가, 좋은 작품을 쓰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원고지와 볼펜만 있으면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으로 미루어.
그러나 혼자 쓰기는 망막하대요. 그래서 함께 쓸 친구들을 모으고, 3월 말 <석초(石草) 동인회>를 조직했지요.
하지만, 중고등학교 때 각종 백일장에 이름을 휘날리던 친구들에게 주눅 들어 그해 10월 말까지 합평회에 작품을 못 내고 쫓겨나고 말았지요. 그래서 겨울 방학 직전까지 모임이 있는 날 저녁마다 포장마차를 전전하며 ‘빌어먹을 때려치워?’를 되풀이했습니다.
그러다가 겨울방학을 앞두고 대학 도서관에서 한국 전후(戰後) 문제 시집과 세계 전후 문제 시집 두 권을 빌려가지고 시골집으로 갔지요. 그리고 사랑방에 배를 깔고 누워 마음에 드는 작품들을 골라 모작(模作)했지요. 덕분에 방학이 끝나고 동인회에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제가 주변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졸업을 앞두고 개인 시화전을 열 때부텁니다. 자기 독자는 자기 스스로 확보해야 한다며 열었지요. 그리고 5년 계속 연말마다 열었지요.
그러는 제게 처음 관심을 보이신 분은 당시 <충남문인협회> 지회장이신 한성기(韓性祺) 선생님이십니다. <현대문학사>에서 새로 시문학지를 창간했는데 추천을 받지 않겠느냐고 하시는 겁니다.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젊은 사람이 그만 시건방 떨라고 호통을 치시더니, 단신으로 월남해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추풍령 요양원으로 들어가 시를 쓰고 다시 일어나셨다며, 자신에게 ‘시는 사랑이고 종교’라고 하시는 겁니다.
시는 사랑이고 종교라는 말씀이 저를 자신도 무릎을 꿇게 만들더군요. 그래서 작품을 다듬어 한 달 뒤 보내드리고, 이듬해 1월호에 앞에 수록한 「접목(椄木)」으로 초회 추천을 받고, 8월호에 「용왕굿」과 「무녀(巫女)」로 종회 추천을 받았습니다.
새로 창간한 문예지의 1호 시인으로 나서니까 세상이 저만 주목하는 것 같대요. 우쭐한 생각에 종회 추천 축하회 때 만난 교육대학 때부터 동인이었던 집사람과 교제를 시작하고, 이듬해 3월에 초회와 종회 추천 심사 위원이셨던 김윤성(金潤成) 선생님의 주례로 손목 한번 잡아보지 않고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초등학교 선생이 새로 창간한 문예지의 1호 시인이라는 게 미안하데요. 그리고 우리 집 형편을 안 집사람은 밤마다 혼자 일어나 부시럭거리다가 한숨을 쉬는 겁니다.
아무래도 공부를 더 해야겠데요. 그래서 결혼 전에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쓴 새로운 글짓기라는 작문 지도서 원고를 정리해 이듬해 4월에 출간했지요.
다행히도 제가 근무하던 <공주군 교육청> 신영준 교육장님 소개로 두 달 만에 초판 3만부가 팔려나가고, 연말까지 2만부가 더 팔려 편입학 등록금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울로 올라가 현대문학과 시문학 주간이신 조연현(趙演鉉) 선생님께 공부를 더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지요. 선생님은 자신이 근무하는 대학에 입학시키려고 하시다가 처음 들어간 대학의 입학한 해로부터 10년 이내에 졸업해야 한다는 학칙 때문에 <국민대학교> 총장님께 부탁드려 편입학금을 면제받고 한 학기 장학생으로 들어갔지요.
그런데, 등록을 마치고 내려오니까 미치고 팔짝 뛸 일이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지난해 환갑을 넘기신 아버지께서 중풍으로 누워계신 겁니다.
망설여지데요. 그러나 올라갔습니다. 선생님께서 다른 대학에 부탁을 해 마련한 자리라서 대신 집사람에게 돌 지난 딸을 데리고 시골집으로 들어가 살림을 도와드리라고 했지요.
이렇게 공부를 시작했지만 이력서 학력 란을 4년제 대졸로 바꾸고, 강남 영동(永東) 고등학교 국어과 교사로 뽑혔을 뿐 실제로 공부한 건 없습니다. 저와 다섯 동생들의 학비와 시골 아홉 식구의 생활비와 아버지 약값을 벌기 위해 매월 원고지 1000매 안팎의 잡문을 쓰느라고.
졸업하던 해 가을에 첫시집 아세아의 풀꽃(1977)을 펴냈지요. 이 시집의 주된 테마는 앞에 수록한 「접목」과 같은 ‘사랑’이나 ‘자연’, 그리고 「풀꽃」 같은 ‘사회적 불평등’이었습니다. 제 나름대로 깨달은 시학은 전후 문제 시집들을 읽고 훈련한 ‘혼성모방(混成模倣, pastiche)’이었습니다. 문학사에서는 미국 문단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처음 제안한 것이라고 하지만 제가 조금 빨리 시작했었던 같습니다.
지금엔 이 원리를 문학만이 아니라 제 인생살이에도 적용하며 살고 있습니다.
2. 다식(茶食) 찍기를 벗어나기 위해
이렇게 출발한 제 작품의 테마와 기법이 아주 새롭게 바뀌기 시작한 것은 1976년 6월 「구면기하학(球面幾何學)」이라는 연작시를 쓸 때부터입니다.
제가 이 작품을 쓰게 된 동기를 말씀드리려면 편입한 대학 4학년 때 4월 어느 날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현대시학을 발행하는 전봉건(全鳳健) 선생님께서 만나자고 하더니 월평(月評)을 쓰지 않겠느냐고 하시는 겁니다. 현대시를 전공하는 교수나 비평가들에게 부탁하는 글인데, 제게 부탁하시다니 놀랍데요. 그러면서 얼마 전에 발표한 「풀꽃」이라는 시를 어느 비평가가 4대 일간지 중 모 신문의 문화란에 도시 문명에 짓눌린 현대인들의 아픔을 은유한 작품이라고 격찬하고, 선생님께서도 진보도 보수도 아닌 제 중도적인 테마와 상징적인 어법으로 쓰는 게 마음에 드셨던 모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루 저녁에 100매 안팎의 잡문을 쓰면서 강의를 들어야 하는 제 처지로서는 무리데요. 그러나 받아들였습니다. 좋은 시를 쓰기 위해 공부하겠다고 올라와 잡문만 쓰고 사는 처지가 너무 서글퍼서.
그런데 월평을 쓰려고 매월 각 문예지의 작품들을 읽어보니까, 이건 아니다는 생각이 들데요. 대부분 원로 분들의 작품이 콩가루 넣고 콩다식, 깨가루 넣고 깨다식이라고 찍어내는 겁니다.
특히 눈에 거슬리는 것은 현대문학에 연재하시는 박두진(朴斗鎭) 선생님의 「속(續)ㆍ수석열전」이었습니다. 4, 5년 전에 수석연가(水石戀歌)와 수석열전(水石列傳)라는 시집을 펴내셨으면서도 ‘속’이라는 단어 하나를 덧붙여 연작시라며 연재하시는…….
한번 들이받고 싶데요. 하지만 참았지요. 현대문학 주간은 조연현 선생님이시고, 실어야 할 현대시학지에서 박선생님은 편집 고문이면서 전 선생님이 받드는 분이라서.
그런데 ‘강단 비평가’들은 이런 제 인내심을 실험이라도 하려는 듯이 작품을 발표하실 때마다 가당치도 않은 이론들을 끌어다대며 ‘독자적인 시세계를 개척한다’고 격찬하는 겁니다.
사람에 따라 잣대를 달리 대려면 쓰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데요. 그래서 한 달분 지면에 몇 쪽을 더 추가해 우리 예술 정신의 근간이 달마도(達摩圖) 한 장을 그리기 위해 수만 개의 원을 그리면서 운필(運筆)의 속도를 조절한 다음 붓을 드는 ‘장인(匠人) 정신’이라면, 원로들은 어제의 나를 부정하고 새출발하는 ‘모색과 편력’ 쪽이다, 유럽 화단에서 피카소를 최고의 화가로 꼽은 것은 어느 한 기법을 고집하기 때문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하고 새출발하기 때문인데, 혜산(兮山) 선생님 연작시는 다식 찍기의 연속이다, 예술의 샘이 말라서 그러신다면 후배들에게 지면을 물려주고 물러나는 것도 원로다운 태도라고 들이받았지요.
‘메타 비평적’인 성격을 띤 글이라서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 줄 알았지요. 그러나 천하는 아주 고요하데요. 아니, 어떤 시인은 사석이긴 하지만 속이 시원하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연재가 끝나자 20편 안팎의 신작 특집을 하자고 하시니까 절대로 그럴 리 없겠지만, 너는 ‘다식찍기’를 안하나 보자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써둔 작품도 없고, 한두 달 안에 그 많은 작품을 쓰려면 틀림없이 다식 찍기를 할 것 같데요.
그러나 등단한지 4년밖에 안 되는 햇병아리에게는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기회데요. 그래서 받아들였지요. 그리고 밥을 먹으면서도 잠을 자면서도 고민했지요.
그러다가 교육대학을 다닐 때 교양수학 시간에 배운 ‘구면기하학(球面機何學)’을 제재로 삼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데요. 수학이라면 흔히 대수학을 떠올리지만 크기와 넓이를 헤아리는 기하학이 먼저 일 수 있고, 기하학이라면 평면 기하학을 떠올리지만 둥근 지구 위에서는 구면(球面) 기하학이 더 사실에 가깝고, 우리가 믿어온 진리라는 것들도 오해와 편견일 수 있음을 암시적으로 푼다면 다식 찍기는 면할 것 같데요.
아니, 문학사에 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데요. 흔히 이상(李箱)을 수학을 제재로 삼아 쓴 첫 시인으로 꼽지만, 숫자를 뒤집어 쓴 작품이나 ‘첫째 아이가 무서워하는 아이라도 좋소, 둘째 아이가 무서워하는 아이라도 좋소…….’라는 작품은 이 세상 풍경을 은유하기 위한 보조관념일 뿐 수학을 주제로 삼은 작품은 아니니까요.
그리고 연작시 형식으로 쓰면 어떨까 생각했지요. 모든 예술 작품은 유기적이면서도 독립성을 유지해야 하는데 1925년에 발표한 김동환(金東煥) 선생님의 국경의 밤 이래 혜산(兮山) 선생님까지 50여 년 동안 서사적인 기행시(紀行詩)를 모티브 별로 나눠 써온 관행을 바로잡기 위해. 서사적 제재는 앞뒤 사건은 인과관계 때문에 완결성과 독립성을 유지할 수 없어서.
하지만 논리적인 테마도 연작시로 쓰려니까 언어화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데요. 그건 제 작품의 첫머리를 살펴봐도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우선 구면기하학은 일반 독자들에게는 낯선 개념이라서 그부터 알려줘야 할 것 같데요. 그리고 끝까지 읽도록 만들 장치를 설정하고. 그래서 첫 번째 작품의 제목을 ‘논리의 출발’이라고 붙이고, 첫행을 우리가 아는 바와는 정반대인 ‘두 점 사이 최단의 거리는 곡선이다.’라고 정의했지요. 제목과 첫행까지는 한꺼번에 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계속 이런 식으로 말하면 기하학 이론서 같아서 더 이상은 안 읽을 것 같데요. 그래서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그렇다면/뜨락 한 구석/한낮의 고요란 고요가 모두 녹아내리는//저 돌멩이와 나 사이 최단의 거리는/곡선인가?/직선인가?’라며 또박또박 따지는 식의 질문을 했지요.
그러나 두 번째 작품도 이런 식으로 전개할 수는 없데요. 그래서 방향을 바꾸어 ‘나를 벗어나기 위하여’라는 시적인 제목을 붙였지요. 하지만 이 방향으로 나가면 앞 작품과 유기성(有機性)이 없어서 ‘장미가 햇살 속에 드러눕는다’라고 시적이지만 기하학적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풍경을 그리고, 괄호를 연 다음 ‘그림자 속의 장미는 곡면이거나 평면이다’라고 기하학적 상태를 제시하고, ‘바람이 불고’, 그 ‘장미는 다시 선이 되고 점이 된다’며 변한 모습을 귀띔해주고…….
그리고 계속 나와 관계없는 이야기를 하면 또 독서를 포기할 것 같아 다시 괄호를 열고 ‘그렇다면 내가 나를 벗고 햇살 속에 누우면 무엇이 될까?’라며 ‘나’로 돌아왔습니다. 나를 ‘A’, 뜨락의 풍경을 ‘B’라고 하면 제목까지 포함하여 ‘A-B-B-B-A’의 구조를 취하면서.
저는 이 작품을 마무리하던 날 새벽에 히죽이 웃었습니다. ‘이성과 감성’의 포괄을 이상형으로 꼽는 영미 현대시를 뛰어넘었다는 생각에. 그러면서도 온몸을 부르르 떨리며 제 미래가 걱정되었습니다. 아버지뻘인 원로에게 패악질을 했으니, 앞으로 어떤 경우에도 다식찍기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제가 일생 동안 청탁을 받기 위해 편집자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살아온 것도, 마감 시한이 지나도 덜 된 원고는 붙잡고 늘어진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제 오만하고 까다롭다는 평것도 이 때문에 따라붙은 거고.
3. 언어로 천지를 창조하려고
까마득한 원로 선생님과 선배 비평가들을 공격하고 나니까 더 공부해야겠대요. 그래서 고등학교 교사가 된 1985년 가을 제2시집을 펴내고 다시 조연현 선생님께 말씀드렸지요.
그러자 선생님은 이듬해 근무하시던 대학에서 한양대학교 문과대학장으로 옮기시면서 석사과정을 수료할 때까지 장학생으로 넣어 주시고, 2년 뒤 다시 박사과정에 넣어주시고. 제가 교수가 되고, 박사가 되고, 오늘날까지 시를 쓸 수 있는 것도 조 선생님 덕분입니다.
그러나 박사과정 3학기를 마친 1982년 말, 미치고 팔짝 뛰며 하늘을 우러러보다가 실실 웃을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동생 회사에서 공사 대금으로 받은 어음을 이서(裏書)해 주변 사람들에게 바꿔줬는데 부도가 나는 겁니다. 그리고 한 달 뒤 동남아 여행을 떠나셨던 조 선생님이 돌아오시다가 일본 온천장에서 작고하시는 겁니다.
할 수 없이 대학원 등록을 포기했지요. 그리고 근무한지 5년밖에 안 되는 고등학교에 사표를 내고, 대낮에도 강아지만 한 쥐들이 뛰어다니는 지하실 사글세 방으로 옮기고, 퇴직금과 전세금을 빼 어음을 바꿔준 동료들의 빚을 갚았지요.
하지만 그냥 놀 수는 없데요. 그래서 종로구 낙원상가 뒤쪽에 조그마한 출판사를 차리고, 대학 편입학할 때 펴낸 새로운 글짓기를 세 권으로 분권해 다시 펴냈지요.
다행히도 그 책들은 날개 돋친 듯 잘 팔려나가데요. 그래서 다시 어떤 책을 낼까 궁리하는데 대학 후배 하나가 찾아와 부인이 아이를 낳을 때가 되었는데 연탄값도 쌀 살 돈이 없다고 하소연하데요.
몇 푼 보태주고, 원고 교정과 자료 수집을 맡겼지요. 그런데, ‘복(福)은 혼자 오고, 화(禍)는 짝지어 온다’는 말이 맞는 모양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은혜를 갚겠다고 당시 최고 권력층 앞잡이 하나를 소개해주대요.
그 앞잡이는 국회의원에 출마하려고 하는 사람으로, 이름이 필요하다며, 새마을 운동을 주제로 하는 책을 집필해 자기 출판사에 자기 이름으로 발행하면 장관과 대통령 동생 도움을 받아 수십만 권을 팔아주겠다고 꼬이는 겁니다.
거절했지요. 새마을 운동을 반대하는 건 아니지만, 정치적 색깔이 강한 글은 쓰고 싶지 않아서. 그러자 그 후배놈은 자기가 초고를 집필할 테니 목차라도 짜달라고 애걸복걸하데요. 그렇게 써봤자 결국엔 내가 다시 손을 봐야 할 것 같아 타이프라이터로 두드려 주고 교정을 보라고 했지요.
그 정치꾼은 정말 교육부장관의 머리말과 내무부 장관의 추천서를 받아오데요. 그리고 전국 서적상들이 어음을 가지고 올라오고. 그런데 그 정치꾼은 한 보름쯤 지나니까 공천에서 떨어졌는지 그 책의 저작권과 판권을 주장하는 겁니다. 그리고 후배놈도 그 꾼의 사무실로 옮겨 앉고.
그 꾼의 사무실로 찾아가 이의를 제기했지요. 그러자 꾼은 공갈ㆍ협박ㆍ명예 훼손으로 고소를 하고, 그래서 맞고소를 하니까 젊은 검사는 두 장관과 대통령 동생의 이름에 기가 죽었는지 양쪽 다 무혐의 처분을 내리는 겁니다. 항소를 하려고 변호사인 친구와 상의를 했지요. 그러자 그 친구는 ‘검사 동일체(同一體) 관례’를 설명해주면서 소용없다고 하데요.
저는 지금도 변호사 친구와 헤어져 돌아오던 날 낙원동 입구 쇼윈도우에 비친 제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도심 한복판에서 비를 맞고 서 있는 허수아비 같기도 하고, 시집갈 나이의 처녀가 뭇 놈들에게 손을 맡기려고 저녁 장사를 나가는 것 같기도 하던…….
하지만, 사람이 아주 죽으라는 법은 없는 모양이었습니다. 제 종회 추천의 심사위원장이셨던 서정주(徐庭柱) 선생님, 초회와 종회추천 심사위원이셨던 김윤성 선생님, 사표를 내지 말라고 만류하신 <영동고등학교> 황기탁(黃淇鐸) 교감 선생님 덕분에 새 일자리와 돈이 될 만한 일감을 확보해 다시 대학원에 복학해 수료할 수 있었습니다.
수료 후 일 년간 시간 강사를 나가면서 여기저기 이력서를 냈지요. 그러다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제주대학교>로부터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채용한다는 우선순위로 면접을 보러 오라고하데요.
간절히 기도하며 내려갔지요. 총장님은 뽑힌다면 대학과 제주도를 위해 뭘 하겠느냐고 물으시데요. 그래서 신비평 이론을 만들어 전 세계 대학 강단을 지배해온 미국 벤트빌트 대학의 랜섬 교수처럼 학생들과 함께 작품을 쓰고 연구를 해서 제 전공만은 어느 대학에 뒤지지 않겠다고 하고, 제주도를 제재로 삼아 좋은 작품들을 써 홍보대사 노릇을 하겠다고 했지요.
그런데 정말 채용 통고가 오데요. 그래서 1986년 3월 초부터 매주 토요일 오후 2시가 되면 글을 쓰겠다는 학생들을 연구실로 불러들여 합평회를 했지요. 그리고 밤마다 제주 문화, 역사, 민속, 방언은 물론 한라산 식생도감(植生圖鑑)까지 뒤적거리고, 주말마다 골목길을 누비며 홍보대사가 될 준비를 하고, 제주 서민들의 투박하면서도 끝이 없는 정한을 담기 위해 새로 ‘층량(層量) 4보격’까지 만들어냈지요.
제가 학생들과 함께 연구하고 실험할 주제로 잡은 것은 한 작품 안에 ‘전인적 인식과 반응’을 다 담는 거였습니다. 제가 이런 방법을 찾아내려고 한 것은, 작품을 쓸 때 ‘바다여’하면 저 멀리서 하얀 비말을 날리면서 푸른 파도가 밀려오고, ‘멈춰라’ 하면 그 자리에 서는 것 같은데 며칠 뒤에 읽어보면 죽은 활자들의 나열로 바뀌는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왜 그런가 생각했지요? 그러다가 아주 문득 언어의 기호적 속성에도 원이 있지만 그 순간에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다 쓰지 않고 필요한 것들만 골라 쓰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러니까 시는 간결하게 써야 한다는 관습 때문에 테마에 관계없는 것들은 빼고, 또 독자들에게 순수하게 보이고 싶어 그때 손을 잡고 있었던 그녀 촉감과 아른거리는 젖가슴을 빼고 고상한 것들만 골라 쓰거나 다른 것으로 바꿔 쓰기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언어를 ‘사물 그 자체’로 보고, 전인적 인식과 반응을 다 담기로 했지요. 성공만 하면 창작 혁명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어느 유파보다도 다초점(多焦點)의 작품들을 쓸 수 있을 것 같데요. 그래서 제3시집 표제시 「말의 오두막집에서」(1990) 초고를 쓰고 연구실 팀의 합평을 했지요.
그러나 한 작품 안에 이성과 감성, 무의식, 지적 논리까지 다 담기는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데요. 너무 길어지면서 횡설수설하는 것 같아서 연작시 형태로 고치고, 앞뒤 작품이 각기 다른 색깔과 냄새를 풍기도록 만들고 제3시집을 펴냈지요.
그러나 한 작품 안에 다 담을 방법이 없데요. 그래서 다시 초점의 유형과 심리적 거리를 살펴봤지요. 다 아는 이야기지만, 관념이나 정서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 감각은 ‘비교적 먼 거리’, 무의식은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 객관적 논리는 ‘지나치게 먼 거리’에 해당하고, 인간의 의식 활동은 비교적 가까운 거리나 비교적 먼 거리)에서 출발하는 겁니다. 그리고 연접된 방향으로 이동하면 혼란은 면하지만 반대쪽의 초점들을 담을 수 없고, 다 담으면 횡설수설하는 것처럼 보이거나 엄청나게 길어지는 겁니다.
고민하다가 라이트(T, G. Wright)의 화자 이론을 읽고 원시화자(原始話者)를 이용해 제4시집 나는 왜 비 속에 날뛰는 저 바다를 언제나 바다라고만 부르는 걸까(1994)를 쓰기 시작했지요. 그가 분류한 문명화자(文明話者)는 이성적 상태의 화자를 말하고, 원시화자는 흥분 상태의 화자를 말합니다.
이 시집이 그런 의도로 썼다는 것은 제호를 살펴봐도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대개 제호는 간결해야 기억하기 쉽다고 짧게 붙이는 게 관행인데 이제까지 펴낸 우리 시집 가운데서는 가장 긴 문장으로 표현하고, 바다를 바다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의문스러워하는 내용을 담은 것은 원시화자의 발언임을 암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또 이 시집의 표제작으로 생각하고 있는 「칸나꽃 뒤로 보이는 풍경을 위하여」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다를 바다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의문을 표할 뿐만 아니라, ‘수평선은 번뜩이는 빗줄기에 실려 하늘로 오르고……. / 그 뒤에 무연히 남는 공간을 산이나 들, 또는 죽음이라고 부르면 안 되는 걸까. 불같이 미끄러운 칸나라고 부르면 안 되는 걸까.’라고 횡설수설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연구실 팀과 다초점의 작품을 쓰고, 원시화자까지 등장시키니까 해마다 신춘문예와 저명한 문예지를 통해 두세 명씩 등단하데요. 그래서 1994년부터 ‘다층(多層)’이라는 동인회를 조직하고, 1999년에 동인지를 계간 문예지로 전환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문단의 반응은 아나키스트적인 것으로 결코 바람직하다고는 볼 수 없네요. 아무리 새롭고 입체적인 느낌이 들어도 공감이 안 가는 작품을 읽을 사람은 거의 없니까요.
그래서 제4시집을 펴내고 곰곰히 생각했지요. 그러다가 석ㆍ박사 과정을 다니는 동안에 ‘낯설게 만들기(Defamilarization) 이론’에 너무 쩔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데요.
4. 동서 시학의 융합
우리나라 대학 강단을 지배해온 이론은 신비평이라고 했으면서 왜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낯설게 만들기’를 끌어드리느냐고요? 맞습니다. 그러나 신비평의 비조(鼻祖)인 엘리엇의 이론은 무의식을 부도덕하다며 배제했지만 쉬클로프스키의 낯설게 만들기와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엘리엇이 주장한 형이상시 이론은 17세기 존 단(1572∼1631) 일파의 ‘이질적인 사상을 폭력적으로 결합’한 ‘개똥철학자들의 시’로 ‘기상(奇想, conceit)과 절연(絶緣, depaysement)’으로 요약됩니다. 기상은 괴상한 생각, 절연은 인과관계를 접어두고 뚝뚝 따다가 합치는 걸 말합니다.
그렇다고 첫 시집의 「접목」이나 「풀꽃」으로는 돌아갈 수 없데요. 이런 작품들은 지금엔 하도 많은 사람들이 써서 아예 안 읽을 것 같아서.
그리고 그런 현상은 이미 우리 감각과 정서도 서구화되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데요. 그래서 제5시집 다시 말의 오두막집 남쪽 언덕에서(1999)는 인위적으로 조작하지 않고 떠오르는 대로 쓰되, 화자의 상황에 따라 조절하고, 빈틈을 만들면서, 상상한 것들을 미끄러뜨리는 방법으로 쓰기로 했지요.
제가 이런 식으로 쓰려고 했다는 것은 이 시집의 제호를 살펴봐도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다시 말의 오두막집’은 전인적 인식과 감각을 되살릴 방법이 없나 고민하던 제3시집을 암시하고, ‘남쪽 언덕에서’는 장소는 상황을 바꾸었어도 다시 시작함을 암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니까 ‘본래’와 ‘새로움’을 합치고 미끄러뜨렸다는 느낌을 들도록 만들려고 붙인 겁니다.
또 앞에서 골라 소개한 「꿈속으로 가는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꿈속에 이런 길을 걸었다’로 시작하면 싱거워 안 읽을 것 같데요. 그래서 ‘산수국 꽃잎 속에 길이 있어’라고 시작했지요. ‘꽃잎 속에 길이 있다니?’하고 긴장하게 만들려고요.
그 다음 행 역시 어지간한 구절로 이어받으면 안 읽을 것 같데요. 그래서 ‘도깨비불보다 더 파아란 길이 있어’라고 변화를 주면서 환상적인 분위기를 덧붙였지요.
하지만 이 정도는 너무 단순하데요. 과거 이미지즘의 시들이 유파의 위치를 잃고 시의 기본 어법으로 바뀐 것도 이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래서 그 길 끝에 ‘달빛이 앉았다’ 가는 ‘의자 두 개’를 설정하고, 달빛이 어떻게 하는 게 아니라 ‘그대가 커피를 마시다 놔둔 종이컵’이 있다고 했지요. 그리고 의도를 밝히지 않고 서술자 노릇 ‘있어’를 반복적으로 제시하여 의미율(意味律)을 형성하도록 했지요. 리듬은 누구든지 따지지 않고 받아들이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런 작품들을 쓰면서 줄곧 서양에 대한 제 생각이 실제와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데요. 그래서 1997년 독일 <본(Bonn) 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객원교수를 지원했지요. 그러다가 그해 말 외환위기 사태가 벌어져, 소위 지성인이라는 인간이 급하지도 않은 연구를 하겠다고 수만 불씩 쓰고 다닐 수는 없다는 생각에 포기했다가 7년 뒤에 나갔지요.
하지만 2004년에 나간 건 서구의 감각을 확인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습니다. 1999년부터 이 땅의 모든 문인들이 앉은 자리에서 원하는 책들을 골라 읽고, 발표하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구축해온 <한국문학도서관(www.kll.co.kr)>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이 시스템을 만들려고 뛰어들었던 건 어느 단계가 되면 중앙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돕고, 그들이 돕지 않아도 회원들이 연 만 원 정도의 회비를 내면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전체 회원이 3만명이 넘고, 입력 도서도 국내 최고의 도서관이 되었는데, 정부도 지방자치단체도 출판협회와 출판사들의 반대 때문에 외면하는 겁니다. 그리고 회원들은 거꾸로 제가 돈을 버는 줄 알고. 그래서 식구들이 문 닫게 떼어놓으려고 강제로 끌고 나간 겁니다.
제가 그때 끌려나간 곳은 독일의 남부 도시 뉘른베르크였습니다. 둘째 동생이 유럽 출장을 갈 때 묵는 집과 차가 있고, 중부 유럽이라서 어느 곳이든 갈 수 있어.
하지만 제 봉급은 도서관 인건비로 쓰고, 정부에서 지원하는 연수비로만 살려니까 동생네 펜션에서 뉘른베르크 앞 들판을 바라보며 문학연구방법론과 화자시학, 새로운 시인을 기다리며 등을 집필하고 돌아왔지요.
이렇게 돌아왔지만 5년 동안 집 앞 생맥주집에서 담배를 빨며 버텼지요. 그러다가 2009년 4월 하순으로 어쩔 수 없이 접어둘 일이 발생하데요.
그러니까 어느 날 학과 공문함에서 공문을 꺼내가지고 나올 땝니다. 조교가 제 손에 든 공무원 건강 검진단서를 쳐다보며, 이번에도 받지 않으면 대학에서 과태료를 물어야 한다며 행정 직원들이 말을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 그럼 받지 뭐.”
강의가 없는 날에 대학 부속 병원으로 갔지요. 기본 검사만 받을까 하다가 강의 중 잠시 발음이 어눌했던 것이 생각나 MRI 촬영까지 했지요.
그런데 의사 선생님은 생각지도 않은 소리를 하시는 겁니다. 정수리 부분에 커다란 혹이 있다면서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순간 들들들 두개골을 자르는 쇠톱 소리가 나면서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대요. 당장 수술을 받지 않으면 큰일이 날 병은 아니라서 제6시집 우주에는 우리가 지운 말들이 가득 떠돌고 있다(2009)를 편집해 우리 도서관 출판부인 <한국 아카이브>로 넘겼지요. 이 시집 제호 가운데 ‘우리가 지운 말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은 말들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1학기 강의가 끝나면 우리 대학 병원에서 받으려고 했지요. 하지만 뇌수술은 전문가한테 받아야 한다면서 <연세대학 세브란스 병원>으로 끌고 가데요. 그리고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 입원 중에도, 경기도 가평 북배산에서 요양을 하면서도 현대수필에 두번째 자서전 「미신의 숲에서」 연재를 썼지요.
그리고 12월에 제주도로 돌아와 도서관은 입력 서버만 운영하기로 하고 지난 5월에 펴낸 6시집을 읽어봤지요. 이젠 더 이상 실험이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데요. 새로운 시인을 기다리며와 화자시학을 정리하면서 마련한 규칙인 화제의 내용에 따라 화자를 내세우고, 성과 연령과 상황을 설정한 다음, 그런 사람이 그런 상황에 부딪히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할까 상상하며 받아쓰기하듯 쓰고, 독자들이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게 만들 곳은 바로 옆으로(A→B), 깊게 생각하도록 만들 곳은 아주 먼 곳(A→F)으로, 그냥 읽히게 만들 곳은 중간 단계(A→C)로 이동해 빈 틈을 만들고, 미끄러뜨리면 되겠대요. 이런 거리를 규칙화하면 리듬을 만들어내고 구조도 만들어내니까요.
이런 판단이 무리가 아니라는 것은 2009년에 펴낸 제6시집 우주에는 우리가 지운 말들이 가득 떠돌고 있다와 2017년에 펴낸 제7시집 존재하지 않는 존재에 의한 통증, 그리고 금년 3월쯤 펴낼 제8시집 하늘나라 들판에서 깨달은 사랑에서 고른 「점 속의 풍경」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아니, 좀 더 정직히 말하면 실험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2009년 겨우 뇌수술을 하고 제주도로 돌아오자 정년퇴임이 다가오고, 2011년 정년 퇴임을 하면서 도서관 부채를 다 갚을 수 없어 회생신청(回生伸請)을 하고, 2013년 7월 후두암 증세를 발견했으나 어머니가 대장암으로 입원 상태이신 데다가 그럴 형편이 아니어서 머뭇거리고, 2014년 3월 1일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겨우 삼우젯날 입원하셨던 그 병원에 입원하여 40여 차례 방사선 치료를 받고, 완치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가 재발하여 성대를 잘라내고, 그 다음 해 주치의가 병원을 이동하여 따라가 치료를 받고, 5월 말 퇴원해 양평 황토방에서 휴양을 하고, 2016년 제주도로 건너와 원로 문화예술인 지원금을 받아 제7시집 존재하지 않는 존재에 의한 통증(2016)을 펴내고, 정기 검진을 받다가 다시 만성백혈병 진단이 나오고, 그래서 인공성대를 빼고 집 앞 제주대 병원으로 옮기고…….
어떠세요? 살아 있는 것만 해도 참 용하지요? 그럼 제7시집과 금년 3월 중순쯤 전자시집으로 펴낼 8시집에 대해서만 말씀 드리고 물러가겠습니다.
제7시집에 대한 제호는 둘째 딸이 붙여준 겁니다. ‘존재하지 않는 존재’는 제 성대를 잘라내게 만든 후두암과 그 병의 원인이 선이나 정의에 대한 제 믿음에서 시작되었다는 뜻이라고 귀띔을 해주더군요. 그리고 이 시집에서 고른 「러브스토리를 보고 울었다」는 병원 휴게실 TV로 본 에릭 시걸의 소설 러브스토리로 제작한 영화를 보고 쓴 작품입니다.
그 영화를 보는 순간, 집사람과 결혼한 과정에서부터 날마다 병상 옆 간이 의자에서 쪼그리고 자는 모습이 떠오르데요. 그래서 창문을 열고 눈덮인 정원의 산수유꽃을 바라보다가 다시 일어날 수만 있으면 뭐던지 위해주겠다고 결심했지요.
그리고 제주도로 돌아와 통장을 털어 새로 집 단장하고, 화장실 문 앞에 인조 장미와 해바라기 한 송이씩을 걸어놓은 다음, 식사가 끝나면 내 밥그릇과 반찬들을 싱크대로 갖다 주고, 그 동안 작품집과 이론서들을 고쳐 쓰기 시작했지요.
이렇게 책상 앞에 눌어붙어 살자 ‘또 누구 못살게 하려고 그러느냐’며 소나기 잔소리를 퍼붓대요. 그래도 핏쓱 웃고 반응을 안 보이자 제가 퇴원한 후 연구 교수로 영국으로 나갔다가 사하라 사막으로 들어가 원고 정리를 하는 큰딸로부터 톡이 날아오데요. 한 달 뒤인 5월 1일에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만나 2004년에 못 가본 동부 유럽과 그리스를 함께 여행하자고. 그러니까 아빠 바보 심리를 이용하여 딸내미랑 연합 작전을 편 겁니다.
거절할 수 없는 유혹이데요. 그래서 100미터만 걸어도 헐떡거리는 체력에 나가 부다페스트, 슬로베니아, 그리스, 터키 등지를 여행하고 돌아와 다시 저서들을 정리하고 연재하며 살았지요.
그럼 제8시집에 실을, 「점 속의 풍경」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이 작품을 고른 것은 이렇게 생사를 넘나드는 동안 제게 아주 탁월한 예감 능력이 생긴 거 같아섭니다.
2017년 시인시대 여름호에서 짧은 시 청탁을 하데요. 그래서 「점 속의 풍경」을 써보냈지요. 그때는 그냥 나도 죽을 날이 멀지 않았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런데 4년 뒤인 2021년 9월 25일에 거실 소파에서 자고 일어나서 보니까 화장실에 불이 켜있대요.
기다려도 아무 기척이 없데요. 그래서 문을 열어봤지요. 그런데 집사람이 목욕을 하고 옷을 입다가 쓰러져 싸늘하게 굳어 있는 겁니다.
어이가 없어 눈물도 안 나오데요. 병실 간이 소파에서 쪽잠을 자면서 나를 살려내고, 마지막 연구 화자시학을 완성하도록 동서양의 가교 지역인 그리스와 터키까지 끌고가 체력을 길러준 사람이 먼저 떠나다니…….
그래서 「점 속의 풍경」을 비롯해 아내에 관한 작품을 ‘망처(望妻)의 노래’로 고쳐 속에 제8시집 준비하며 살고 있습니다. 장례를 치르고 혼자는 못 산다고 가족들이 대전 종합청사 옆에 20평짜리 오피스텔을 얻어주면서 끌어냈지만 집사람 냄새가 너무 그립고, 가족들을 괴롭힐 것 같아 도망와 옆에 집사람 사진을 걸어놓고…….
그래, 요즘엔 어떻게 사느냐고요? ‘혼밥’이 힘들고, 글을 고칠 때 앞줄에 쓴 이야기를 잊고 다시 쓰거나 구만팔천리쯤 건너뛰는 게 문제지, 얼굴도 볼그데데하고, 허벅지와 종아리 근육도 탱탱해 한 10년은 더 살고, 제가 벌려 놓은 일들을 정리하며 살고 있어 참 행복합니다.
5. 마지막 부탁드리는 말씀
왜 그렇게 고쳐 쓰느냐고요? 네에 젊은 날의 제 글들은 뭐도 모르고 오만을 떨었데요. 그렇게 오만을 떠는 글들을 읽을 사람들이 어디 있겠어요? 그리고 이렇게 고쳐 쓰는 동안 새로운 사실들을 깨닫게 되데요. 자서전까지 세 번 고쳐 3년씩 9년간 연재한 것도 제 새로운 얼굴들이 발견돼서 그랬어요.
그렇게 고쳐 써서 뭐할 작정이냐고요. 네에 전자책으로 만들어 전 국민들에게 무료로 바치겠습니다. 전자책으로 만드는 것은 젊은 분들은 핸드폰에 넣고 다니며 읽거나 듣고, 나이든 분들은 컴퓨터에 넣고 확대해서 읽으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글을 쓰거나 문학을 연구하는 분들은 버퍼로 싸서 옮기로 요약할 수 있도록…….
정말 무료로 보급하려고 하느냐고요? 네에. 이런 글을 쓰는 저는 제 노력으로만 이뤄진 게 아닙니다. 그리고, 제 글쓰는 목표가 보다 많은 분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거였으니까요.
그런데 뭘 부탁하려고 하느냐고요? 문학작품을 쓰거나 읽는 분들은 보내드리는 전자책들을 되도록 많이 퍼날러 주시라는 겁니다. 그게 귀찮은 분은 <한국문학도서관(www.kll.co.kr)> 홈페이지 주소를 일러주세요.
그리고 문학을 연구한 분들은 제가 마련한 화자시학을 보완해 자기 나름대로 완성해주시라는 겁니다. 화제에 따라 화자를 선택하고, 그의 성과 연령과 사회적 상황에 줄거리와 어법을 만들고……. 이걸 완성하지 못하면 우리 문학은 영원히 서구 이론에 지배에서 못 벗어나기 때문에 부탁드리는 겁니다.
문학은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에 너무 장황하게 이야기해서 죄송합니다. 독자 여러분, 안녕히 계세요. 안녕, 안녕, 안녕…….
윤석산
1946년 충남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출생, 1967년 공주교육대학 졸업.
1972년 시문학으로 3인합의 2회 추천으로 등단.
1975년 국민대학 국문과 3학년 편입. 1989년 한양대학교 대학원 석ㆍ박사과정 수료(문학박사).
시집으로는 제1시집 아세아의 풀꽃(1977) 외 7권 자서전을 덧붙여 고쳐쓴 시전집 4권(2020),
이론서로는 화자시학(1997) 외 6권, 제15회 <윤동주 문학상> 본상 수상(1999). 제주대학교 명예 교수.
1999부터 현재까지 <한국문학도서관(www.kll.co.kr)> 구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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