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7장
마태복음 7:1-12
산상수훈 7장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시작하는데 비판을 받지 않으려면 너도 비판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내가 상대방을 비판하지 않아도 상대방은 나를 향해 비판을 던질 수가 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비판을 하는 자는 인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어느 누구도 비판을 할 자격이 있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비판은 오직 주님이 하신다.
인간은 비판할 자격이 없고 주님만이 비판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자는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보지 않고 먼저 자기에게 있는 들보를 보게 된다. 상대방에게서 작은 허물을 발견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에게서 더 큰 허물을 발견할 수 있다. 곧 죄인임을 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들보를 뺄 수 있는 자들이 아니다. 결국 예수님은 우리에게서 우리의 들보를 제거해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6절)는 말씀은 이러한 산상수훈을 통해 선포된 율법의 완성된 의미로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신에게 무의미한 것이다. 산상수훈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알지 못하고 무시한다면 결국 자신의 들보(죄)를 알지 못하는 자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해야 하는 것이고 찾아야 하는 것이지 구원을, 율법의 완성을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 아니다. 7절 말씀은 흔히들 생각하듯이 우리가 하나님께 끈질기게 구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신다는 기도에 대한 가르침이 아니다. 기도에 대한 가르침은 이미 6장에서 다 말씀하셨다. 따라서 7절에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십자가로 완성된 것을 구하라는 것이다.
11절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신다고 하셨다. 그리고 12절에서 “대접하라”고 말씀하신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남이란 단순히 이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대접하고 그 하나님께서 이루신 십자가의 완성을 구한다면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주신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여기서 좋은 것이란 무엇인가?
누가복음 11:13에 보면 “좋은 것”이란 성령님이신 것을 알 수 있다. 누가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알고, 완전히 이해하여서 믿는 자 있는가? 성령님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령님을 보내시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씀이 우리가 성령님을 구해야만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주셔서 구원을 이루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허락하셔야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제대로 알 수 있고 또한 그것을 통해 하나님 대접을 받기를 원하신다는 의미이다.
결국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대접할 줄 아는 자는 이웃에 대해서도 함부러 대하는 자가 아니다. 이웃까지 책임질 줄 아는 자는 좁은 문으로 가는 자이다.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좁은 문이다. 좁은 문은 시작에 불과하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좁고 협착한 길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 마지막은 영생이다. 이 길의 특징은 찾는 이가 적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7:15-27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말씀하신다. 거짓 선지자는 양의 옷을 입고 등장한다. 그들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은 열매를 보고 알 수 있다. 거짓 선지자가 주장하는 열매는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하는 것이다. 이런 자들은 세상에 많이 있다-“많은 사람”(22절).
즉 눈에 보이는 표적들을 열매로 내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열매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고 하신다(21절). 아버지의 뜻은 그리스도를 향하여 시종일관 나타났듯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이것이 제자의 길이다. 이 십자가를 지는 길에서 어긋나는 것은 모두가 불법이다(23절).
예수님은 산상수훈 마지막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시며 그 집은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도 무너지지 않는다고 하신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도 행치 않는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고 하신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말씀을 행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산상수훈은 행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것은 누구를 믿는가? 그리고 그분을 기초로 하는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기초란 당연히 예수님께서 지시는 십자가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예수님께서 앞으로 지실 십자가 위에서 새롭게 모든 것을 시작하지 않으면 모든 것은 결국 헛된 것이 될 수밖에 없음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마태복음 7:28-29
예수님의 가르침이 끝나자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아서 기존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가르침과는 전혀 달랐다. 즉 그들의 의와 예수님의 의가 비교되는 것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삶을 보여주고 있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의 삶을 보여주신 것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권세를 가지고 가르쳤으나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의 권세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