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덕유산 종주를 나섰다가 비가 쏟아지고 천둥, 번개가 치니 입산금지가 되어 버려서 어쩔 수 없이 도중하차하고 말았었다.
그때 원추리는 원없이 봤지만 나머지 구간을 못해 내내 아쉬웠는데 청명한 날씨가 자꾸만 손짓을 한다.
서늘해진 바람이며 한들거리는 들풀들이 내뿜는 가을냄새를 이기지 못하고 배낭을 짊어졌다.
지난번에 내려왔던 황점마을에서 다시 삿갓재대피소로 향했다. 하루밤을 지내고 남덕유산을 향하여 출발이다.
가면서 기념이 될만한 곳마다 찍은 인증샷. 삿갓재대패소에서 영각사탐방센터까지 8키로 정도(삿갓봉 포함)를 12시간 걸렸다.
언제나 말하듯 나는 보통사람들이 걸리는 시간보다 배가 더 걸린다. 그렇게라도 갈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산다.
삿갓봉에서 사방팔방으로 들러보는 풍경들.
뒷쪽은 지난번에 들렀던 무룡산. 앞쪽은 앞으로 가야할 남덕유산,
그 옆으로 서봉 등 덕유산을 상징하는 봉우리들이 정말 장관이다.
시시각각으로 왔다가 사라지는 안개 때문에 잠시 잠시 사진 찍을 기회를 놓치곤 했다.
아니, 구름이 있기에 더욱 봉우리들이 신비하게 느껴져 샷터 누르는 속도를 누추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남덕유산에 도착해서 영각사쪽으로 발길을 돌리니 정말 멋진 풍경이 눈길을 사로 잡는다.
우뚝 솟은 바위, 그 위를 올라갈 수 있는 계단들이 멀리서도 보인다.
어쩌면 자연훼손을 한 일일 터인데 왜인지 이번엔 아름답게만 보인다. 나도 이제 속물이 되어가나 싶다.
그 계단을 올라갈 일이 설레이기까지 한다. 저곳을 보기 위해 왔던가 싶다.
한발 한발 가까이 가면서 내려다보는 주의 풍경이 아찔하다. 계단의 경사가 급해서 잘못하면 낭떠러지로 곤두박질 칠 것 같다.
대피소 떠나올 때 직원이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하던 말이 그냥하는 소리는 아니었구나 싶다.
철계단을 내려가면서 아찔한 순간을 경험했다.
경사가 너무 급해 스틱을 쓰지 못하고 양쪽 난간을 잡고 내려가야만 하는데 들고 가던 스틱이 오히려 불편했다.
난간을 한쪽만 잡고 한 손으로 스틱 두개를 들고 가자니 자꾸 걸리적거린다.
속으로 하나만 있으면 괜찮은데 두개라서 더 불편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스틱 하나가 손에서 쑥 빠져나가면서 철계단을 미끄려져 내려간다.
그 스틱을 잡으려다 하며터면 앞으로 꼬꾸라질 뻔 했다. 가슴이 철렁했다.
결국 그 스틱은 때굴때굴 굴러 저 아래 난간에서 간신히 걸쳤다.
자칫 공간사이로 빠져나가버렸으면 내려가서 주워 올 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잃어버릴 뻔했다.
천만다행으로 다시 손에 넣을 수 있었지만 그 순간 스틱에게도 듣는 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모두 귀가 열려있구나.
그러니 어느 누구한테든, 아니 세상 어떤 사실앞에서도 결코 헛된 생각을 품지 말아야 할 일이다.
여려 계단들을 어렵게 내려가고 나니 그때부터는 너덜길이다.
그야말로 정리가 안 된, 홍수에 휩쓸려 내려왔을 법한 돌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바람에 무척 힘이 들었다.
처음엔 길을 잘못 들었나 했는데 간간히 이정표가 있는 것을 보니 길이 맞는 듯 싶었지만 점점 걱정이 되었다.
발길은 돌에 치여 계속 터덕거리지, 날은 점점 어두워져 가지, 무슨 소리만 들려도 등줄기가 섬뜻거리지 해서
어둠이 내려앉을 무렵엔 같이 가던 친구와도 아무말도 못하고 발걸음만 떼었다.
다행히 어렴풋하게나마 달빛이 있어 길을 찾아 내려올 수 있었다.
영각사 탐방소를 지나고 나서야 마음이 안정이 되었다.
그때부터는 달빛과 반딧불을 벗삼아 주차장까지 낭만을 즐기며 걸었다.
어느 가을날의 일기
⬆ 산오이풀
⬆ 구절초
⬆ 산오이풀
⬆ 흰진범
⬆ 참꿩의다리
⬆ 신감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