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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탐방] 청백리의 고향 - 봉화 계서당(성이성)을 찾아서
樽中美酒千人血 준중미주천인혈
盤上佳肴萬姓膏 반상가효만성고
燭淚落時民淚落 촉루락시민루락
歌聲高處怨聲高 가성고처원성고
두루미 안의 맛있는 술은 뭇 사람의 피요, 판 위의 좋은 안주는 만 백성의 기름이며, 촛물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지고, 노래소리 높은 곳에 원망소리 높도다
(이 시(詩)는 성이성(1595 ~1664)의 계서선생일고(溪西先生 逸稿)와 4대손 성섭(成涉)이 지은 필원산어(筆苑散語)에 실린 한시로서 계서당 전면 벽에 걸려있는“암행어사 테마체험”현수막 내용이다.)
겨우내 잠자던 개구리가 뛰쳐 나온다는 경칩도 지났건만 새벽길을 나서니 아직도 기온은 쌀쌀하기만 하다. 서울 동서울 버스터미널에서 7시40분발 봉화행 버스에 올랐다. 경북 청송과 영양과 함께 우리나라‘3대오지’로 알려진 경북 봉화로 출발한 버스는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36번 국도를 지나서 10시20분경 봉화읍에 도착했다.
#이몽룡생가 - 계서당 가는 길
산간오지에서 관광지로 도약하는 경북 봉화는 한국인을 정신적으로 지배하였던 정감록 비결이 전하는‘한국십승지(十勝地)’중의 한 곳으로‘예로부터 산이 깊고 물이 풍부하여 세상을 등지고 숨어 살기 좋은 고을’이라 했다. 계서당(溪西堂)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춘향전 이몽룡의 실존인물로 알려진 계서(溪西) 성이성(成以性)선생이 거주하면서 후학양성에 힘쓰던 곳으로 1613(광해군5)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진다.
계서당(국가민속문화재 제171호)은 봉화읍 소재지에서 물야 방면 915번 지방도로 약 6km를 가서 가평에 이른 뒤 다시 가평에서 두문.수식 방향으로 좌회전해서 약 500m 지점에 있다. 이곳은 부석사가 자리잡고 있는 봉황산 줄기의 끝자락으로 풍수지리상 명당이라 한다. 봉화읍에 내려서 택시 기사에게 “계서당 갑시다”하니‘계서당이 어디죠?’옆에 있던 다른 기사가 아!“이몽룡 생가”하니까 그제서야 ‘알았다’며 타라고 한다. 이 지역에서는 계서당 보다는 ‘이몽룡생가’로 더 알려져 있음을 실감케 한다.
#조선시대 대표 로맨티스트, 이몽룡의 모티브
양반의 자제와 기생의 딸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 <춘향전>의 남자 주인공 이몽룡을 경북 봉화에서 만날 수 있다. 조선시대 대표 로맨티스트 이몽룡의 실제 모델이자 내외 관직을 두루 거친 청백리였던 계서 성이성의 청렴한 성품과 따뜻한 감성은 그의 생가인 봉화 계서당 종택에 그대로 남아 있다.
남원부사 성안의의 아들과 퇴기 월매의 외동딸 성춘향의 사랑이야기 <춘향전>의 남자주인공 이몽룡이 실제 인물 성이성이라는 것은 지난 1999년 연세대 설성경 교수의‘이몽룡러브스토리’를 주제로 한 연구논문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남원에서 생활하다 우연히 남원 기생 춘향을 만나게 된 성이성. 그러나 춘향과는 이루어지지 못했고 이는 바로 소설 춘향전의 모티브가 되었다. 소설에선 실명거론이 부담스러워 주인공 성을 이씨로 바꿨고, 대신 춘향을 ‘성’씨로 정했다고 전해 내려온다.(국민권익위 발행, 2018여름호, 청백리 계서 성이성 소개 글 인용)
#3번 파직에 4번 암행어사
성이성은 당대에 뛰어난 경세가이자 어진 목민관으로서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살피고 고단한 삶을 위로하였다. 특히 호남지역에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부패한 관리들을 적발해 척결하여 칭송 받았다고 기록된다. 강직한 성품과 거침없는 직언으로 3번이나 파직당하고도 어찌하여 또 다시 네차례나 암행어사?
예나 지금이나 공직에서 파직당하면 보통은 벼슬길이 끊기는데도 말이다. 당연히 의문이 든다. 그 연유에 대해 계서종손(성기호 14대손)은 말하기를“파직을 이유로 아무리 뒤를 파 봐도 비리에 걸린것이 없으니, 처벌은 못하고 대신 청렴함을 인정받아 외직으로 만 돌게 한 것이다.”라고 증언한다.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조선시대에 청백리 제도가 있었고 현재 서울시에서도 본청과 25개구청을 상대로 청렴한 직원을 매년 발굴, 포상하고 있다. 이름하여 하정(夏亭) 청백리상이다. 그러나 오늘날 국민들에게 비춰지는 한국의 공직자상은 어떤가? 한마디로 추하게 일그러진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청와대도 고위공직자 임용에서 배제되는 7가지 비리를 발표했다. 병역기피와 부동산투기, 세금탈루, 위장전입, 논문표절, 음주운전, 성 관련 범죄 등이다. 그러나 고위공직자 인사청문회에서 보면 대다수 인사가 이 규정에 위반된다는 사실이 충격적이다.
#성이성의 청백리 정신과 정약용의 목민심서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 국가비젼이다. 역사를 통하여 과거를 돌아보고 이 시대에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조선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에 대한 기본적 이해는 어쩌면 필수적이 아닐까 생각한다. 다산은 조선 중기 당시에 공리공담으로 흐른 성리학을 비판하고 현실적인 목민사상을 강조하였고 모든 부분에 있어서 불합리한 요소는 과감히 제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산은 청렴이란 목민의 기본 임무며 모든 선의 원천이요 모든 덕의 근본이라고 했다. 당시 조선의 정치문란상을 보면서 “터럭 한 끝에 이르기까지 병들지 않은 곳이 없으니 지금에 와서 개혁하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가 망하고 말 것이다.”라고 개탄했다. 목민심서는 공직자가 행해야 할 일종의 매뉴얼이다. 목민심서에서 보면, 목민관이 갖춰야 할 덕목으로 율기(律己), 봉공(奉公), 애민(愛民)을 들고 있다.
첫번째로 율기의 핵심은 淸心조항이다. 청렴이란 공직자의 본질적인 임무다. 청렴하지 아니하고는 공직자 노릇을 할 수 없다. 다산의 절검(節儉, 절약과 검소)사상은 수신(修身)을 위하여 마땅히 필요하며 또한 국가경제와 국부를 증가시키는 기반이라고 하여 정부관리들의 청렴결백 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두번째는 봉공이다. 봉공편의 핵심은 守法조항이다. 사리에 합당한 법은 조건없이 지켜야 하나 문제가 있는 법은 융통성 있게 지켜야 한다는 점이 주의할 대목이다.
세번째는 애민편이다. 핵심은 진궁(振窮)조항이다. 백성을 사랑하라는 조항에서 백성이 누구인가를 알아야 한다. 가난하고 힘없으면 병들고 약하며, 천하고 지위 낮은 사람이 바로 民이다. 공직자는 바꾸고 고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복지부동의 공직자는 나라를 망치는 주범이다. 문제는 오늘 날 정치상황도 그 당시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성이성의 청백리 정신이 목민심서 곳곳에 배어있다.
목민심서는 성이성 사후 154년이 지난 1818년(순조18)에 완성되었다. 각설하고 성이성의 청백리 정신이 목민심서 곳곳에 배어있다. 이렇게 주장하면 독자는 당장 “무슨 말이냐?”고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목민심서 집필과정.환경에서 그 단초를 유추해 보건대 성이성의 계서유고, 호남암행록 등 여러 저서가 목민심서 집필에 많은 참고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근거로는
첫째, 정약용은 강진에서의 유배기간중 고산 윤선도를 배출한 해남 尹씨 외가로부터 빌려 온 “천여권의 책을 쌓아 놓고 스스로 즐겼다”고 했고 조선과 중국의 역사서를 비롯하여 여러 책에서 자료를 뽑아 수록하였다는 사실.
둘째,목민심서는 "옛 이론을 찾아내어 쓸 만한 것을 찾아 목민관에게 주어 백성 한 사람이라도 그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나의 마음 씀이다"라고 하였다. 제도개혁에 있어서 목민심서는 군현의 범위에서 목민관에 의해 수행되어야 할 것을 강조한 사실.
셋째, 목민심서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사서를 비롯해 자(子)·집(集) 등에서 치민(治民)과 관련된 자료를 뽑아 수록하였다는 사실이다.
성이성은 1635(인조13)년 부교리 배명 등이 역론으로 죽고 그 아들이 연좌되어 죽게 되어도 아무도 말 못하고 있을 때 과감히 상소로 간곡히 주청하여 그 아들과 연루된 자들 모두 죽음을 면하게 하고도 이를 감추어 아무도 모르게 한 일화는 유명하다. 관직에선 절용(節用), 애민(愛民) 청렴을 첫째로 삼았는데 이러한 사상은 훗날 목민심서의 율기, 봉공, 애민 사상과 상통한다. 여인을 향한 진실한 마음과 더불어 강직한 성품으로 수많은 일화를 남긴 성이성은 1695년(숙종21) 청백리로 녹선됐다.
왜? 오늘에도 공직사회에 청백리 정신이 필요한가? 공직을 함부로 맡지 말라. 벼슬은 구해도 좋으나 목민의 벼슬은 구하지 말라. 목민의 벼슬은 책임이 막중한데 직무수행이 쉽지 않다. 조선 시대에는 간악한 아전의 횡포가 심했다. 고상한 글이나 읽으며 세상물정 모르는 수령이 노회한 아전들에게 놀아나고 결국 백성들이 고초를 겪게 되는 것을 다산은 매우 경계했다. 아전을 단속하는 일의 근본은 스스로를 규율함에 있다. 자신의 몸가짐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일이 행해질 것이고 자신의 몸가짐이 바르지 못하면 명령을 하더라도 일이 행해지지 않을 것이다.
#백성들에게 귀감되는 청렴 근검한 공직자의 삶
성이성에 대해 계서행장에서는“신도(臣道)에게 세가지가 있으니, 임금을 섬김에는 충직하고, 백성에게는 자애롭고, 벼슬에는 청백함이네. 공에게 능한 것은 진실로 이 세가지이고 공에게 능하지 못한 것은 명예와 지위를 취함”이라 하였다.
벼슬에 있어서는 절용(節用), 애민, 청렴을 첫째로 삼아 한결같이 법을 준수해 누구도 감히 그에게 사사로운 청탁을 못했다. 그는 근검, 검소, 청빈으로 재물을 탐하지 않았다. 잘못된 관습.관행 등 불합리한 제도를 개선해 나갔다. 선정을 베풀었고 애민사상을 실천했다. 불의를 보고 직언을 서슴치 않았다. 조선의 청백리 열전에서 보면 골치아픈 업무는 등한시 하고 그저 책만 읽다가 청백리가 된 무능한 관리도 있었다고 한다. 성이성은 어떤가?
그의 저서 계서행장, 호남실록 등 자료에서 보면“1654년(효종5) 가을 모친상을 당하였다. 복을 마치자 군기시정(軍器侍正)을 거쳐 진주 목사에 부임했다.
그곳의 백성들은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대략 매장하고 오래도록 장례를 치루지 않으니 공이 이를 금하였다. 그들 가운데 스스로 장례를 치를 형편이 못되는 사람들은 도와주어 완전히 매장을 하도록 하니 미개한 풍속이 고쳐졌다.” 임금의 노여움을 살 정도로 직언도 서슴치 않았다. “~ 연회가 끝나고, 병사가 어사를 위해 촉석루에서 크게 놀음놀이를 벌여 어사의 환심을 얻으려 하자, 성이성이 단연 그것을 제지하여 막아 버렸다.”이를 듣고 어사가 깊히 감복하여 조정에 들어가 으뜸으로 보고하여 표리(表裡) 한 벌이 하사되었다.
그는 비범한 자질, 강직한 성품, 결백한 처신으로 일관하여 임금과 상사의 꺼림을 입어 세 번이나 파직되는 등 진로가 순탄하지 못했다. 그는 항상 진지하고 냉철하게 현실 문제에 접근하려 했으며 알프레드 마샬교수가 말한바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으로(Cool head but warm heart)”정치.사회 현상을 인식하려고 했다. 그는 탁상공론이 아닌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개혁이 요청될 때에는 단호하게 고쳐나갔으며 민심동향을 관찰.분석하는데는 냉철하게, 그 해결책은 정열적으로 강구한 유능한 목민관이었다.
‘춘향전 이몽룡의 실존인물’이라는 이미지와 ‘암행어사 청백리’와의 흥미롭고도 신비로운 만남이 향후 체계적으로 연구되어서 더욱 선양되기를 기대해 본다.
註)참고문헌: 설성경 著『민족고전 춘향전의 원류, 봉화 계서 성이성 종가』예문서원.2017.8.21
2019. 3. 10.
(글쓴이: 성범모 /창녕성씨 대종회보편집장, 전 문경대학교 교수, 경제칼럼니스트)
*이글은 춘향전 이몽룡 실존인물이라는 흥미로운 기사를 보고 불천위제사에 참석한 후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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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꼭한번 가보고 싶으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