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의 예찬 없는 땅의 예찬을 읽고
한병철은 독일에서 가장 주목받는 철학자이다. 나는 그를 몰랐지만 그의 책인 사회비평서 '피로사회'는 알고 있었다. 읽지는 않았다. 노을공원시민모임 독서모임에서 한병철의 책 '땅의 예찬'을 읽자고 했다. 독일 베를린예술대학의 교수이며, 세상을 꼬집는 사회 비평가가 정원을 가꾸며 쓴 책이라니! 독특하게 독어로 글을 쓰고 번역하여 출간했다니! 심지어 제목이 '땅의 예찬'이라니!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책을 받아들었다. (200페이지대 만만한 책의 두께도 마음에 들었다)
이 책은 정원을 다뤘지만 독특하게 '겨울' 시점부터 시작된다. 그는 정원이 1년 365일 살아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의 시선에서 '겨울'은 죽은 계절이 아닌 숭고한 생명이 피어나는 계절이었다. 겨울꽃이 피는 계절을 그는 '첫 번째 봄'이라고 표현했다. 모든 생명이 저물고, 에너지를 응축하는 계절에 반대되는 생명의 발산이라니. 그들에게는 겨울이 봄이겠다. 여름이 겨울이겠다. 그들에게 견디는 시간은 '겨울'이 아닌 '여름'이었던 것이다. 사람도 자연도 자신만의 '제철'이 따로 있는 것이다.
(신기했던 점은 겨울정원을 이루는 꽃들의 대부분이 극동아시아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그가 살고 있던 베를린과 기후 조건이 맞았던 것인가? 이 부분은 궁금하다)
그는 책에서 때때로, 자주 독일 문학을 끌어들인다. 다양한 철학자, 시인, 문학 작가들의 글을 인용하곤 하는데, 아마도 작가 자신이 느끼는 감상을 이미 대문호들이 해놓았고, 자신은 그 이상의 표현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가장 좋았던 구절을 공유한다.
노발리스는 낭만주의를 이렇게 정의한다.
평범한 것에 높은 의미를
일상적인 것에 신비로운 겉모습을
잘 아는 것에 모르는 것의 품위를
유한한 것에 무한한 모습을 주어
나는 그것을 낭만화한다.
독일의 시인이자 철학자인 노발리스가 정의한 '낭만주의'를 읽으며, 이상하게 '낯선'이란 단어가 계속 떠올랐다. <평범한 것, 일상적인 것, 잘 아는 것, 유한한 것>이라고 정의 내리는 것에 반기를 들고, 낯선 이란 낭만을 심어보자. 낯섬은 신비로움을 내포하기에 충분히 낭만적이 될 수 있다.
(여기에서부터 본심)
한편, 한병철 저자가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편애'로 인해 꾸준히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특히 불편했던 지점은 '아름답고 허약한 것들에 대한 찬양과 질기고 꾸준한 생명에 대한 증오심'이었다.
예컨대 퍼져나가는 '클로버'에 대한 증오심이다. 클로버는 질소고정 식물로 땅을 비옥하게 만들어주는 기능도 있다. 개체 수 조절을 하면 될 문제이지 '피부암'이란 표현을 하다니. 그의 정원에서는 자신이 선택한 아름답고 허약한 꽃들 외에는 모두 잡초이며 제거 대상이다. 이 외에도 민달팽이를 모두 죽이는 등 상당히 결벽증적인 성향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자연은 건강한 관계 속에 서로 상호 호혜적으로 성장한다. 그러한 생태계를 자연스럽게 만들어주는 것이 정원사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인간의 개입은 최소화되어야 한다고 보는 나로서는 저자 한병철의 편애와 통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애당초 '잡초'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불필요한 생명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말을 늘어놓는 사람이라도 말과 실제 행동이 다르면 말은 힘을 잃는다. 그는 땅의 중요성, 우리가 땅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디지털 사회의 문제와 정원에서 찾은 희망 등 멋지고 개념있는 말들을 많이 써놓았지만 (그의 정원사로서 행위)를 알고난 후 기껍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자연을 머리로 이해한 전형적인 지식인으로 보여 조금은 실망했고, 그가 정원 활동을 지속하여 땅과 생명에 보다 깊은 유대감을 갖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