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 '상태'가 안좋아서 신경정신과를 다시 다녀야 하나 고민을 좀 하다가, 소공님께 질문을 드려보고, 그냥 내 증상을 여과없이 드러내는 일부터 시도해 보기로 한다.
1. 전시작전통제권에 관하여:
현재 한국군의 전시작전통제권, 줄여서 전작권은, 한미연합사가 가지고 있다. 왠 뜬금없는 전작권 타령이란 말인가. 이러저러한 역경계에 노출되다보면, '나'라는 놈의 전시작전통제권은, 그러니까, 역경계에서 '나'를 이끄는 힘은 과연 누구 혹은 무엇에게 있는가를 면밀히 살피게 된다. 그러다보면, 아직도 '나'라는 것의 독자성과 유일무이성에 대한 착각으로, 그러니까, '나'라는 허상의 탄생과 질긴 생존력으로 인해 '전시'상황이 에누리 없이 펼쳐지고 있음을 살피게 된다. '전작권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것이 문제의 핵이 아니었다. 왜 '전시'인가를 먼저 물었어야 했다.
2. 전작권 환수에 관하여:
"전시작전통제권은 노무현 정부 당시 2012년 환수로 합의됐으나 이명박 정부 시기에 안보공백 우려로 인해 2015년 12월로 미뤄지게 되었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 시기인 2014년 10월에 시기를 명시하지 않고 한국군의 능력과 주변 안보환경 등 ‘조건’이 충족돼야 전작권을 한국에 넘기도록 하여 전시작전통제권 환수가 재연기되었다. 2017년 9월 28일 문재인 대통령이 국군의 날 기념 행사에서 국방개혁의 일환으로 전작권을 조기 환수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처럼 전작권 회수라는 것은 정치권에서는 반드시 해야할 과제로 여기지만 자신들의 집권시기에 다루기는 상당히 난감해서 계속 다음 정부로 떠넘기는 식이 반복되는 형국이다." _위키백과 <전시작전통제권> 中
전작권의 환수가 아니라, 전시상황의 종료가 먼저다. 우리 나라까지 살필 여력은 없고, '나'의 상황이 그러하다. 유능한 존재, 신뢰받는 존재, 사랑받는 존재, 존경받는 존재 등등으로 돌올하게 서는 것은 '나'라는 것을 내 스스로 참으로 잘 지켜나가고 있다는 방증으로서 드러나는 결과물인데, 그 '나'가 허물어지고, 축이나고, 파괴되고, 공격받고, 그러므로, 결국, 뒈져버릴 때, 다시 말해, '나'라는 착각의 소멸로 인해 전시상태 자체가 성립되지 않을 때, 그 때야 비로소 기능으로서의 '나'의 자주국방은 성성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좀 이상한 소리이지만, 한국 땅에서는 유독 예민할 수밖에 없는 몇몇 '용어'들이 있고, 이 용어들은 역사의 자장에서 늘 벌겋게 달구어져 있어, 어떤 이유에서든 쉽사리 자극받고 오해를 일으키기 십상이다. '전쟁'이라는 용어가 그러하다. 6.25 전사자가 두분이나 계시는 우리 집에서는, 정치적 성향 불문,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서는 안된다는 암묵적 합의가 있다. 우리 집 뿐일까. 한국사회에서 '전쟁' 운운하는 것은 어리석은 노릇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달음'을 놓고 일생일대사를 고민하는 처지에서 그런 눈치를 볼 여력이 없으므로, 이토록 위험한 어휘를 다시금 입에 올리고야 만다. 깨달음은 '나'와 '너'의 전쟁에서 결국 '내 공부'가 '네 공부'를 이겨서 도달하는 공포스런 상태가 아니라, '갈고 닦아야 할 나'가 '흠결없는 새로운 나'로 변모하게 되는 영광스러운 자아극복의 논법의 최종국면이 아니라, 무아연기에게 전작권을 통으로 넘기겠노라고 백기를 흔드는 노릇이며, 지구온난화로 인해 시퍼렇게 붕괴되는 북국의 빙하처럼 '내'가 온전히 바스라지는 재난영화 속 클라이막스에 차라리 더 닿아있다. 그러니까, '깨달음'은 전쟁에서 완전히 패배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난민이 되는 일이고, 무국적자가 되는 일이고, 포로수용소에 자발적 전입신고를 하는 일이다.)
3. 지휘통일(Unity of Command)의 원칙에 관하여:
"지휘통일(Unity of Command)의 원칙은 “투입된 모든 군사력을 지도할 수 있는 적절한 권한을 가진 단일의 지휘관 하에서 공동의 목표를 추구할 수 있는 방향으로 모든 군사력이 운용되는 것으로 단일 사령부의 권위에 근거한 일사불란한 지휘체계 하에서 부대의 모든 노력이 통합되어 공동목표로 지향되도록 하는 것"이다.전시작전통제권의 전환에 있어서 이러한 지휘통일의 문제가 부상될 수밖에 없다. 지휘통일의 원칙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자칫 전쟁에서 비효율성을 늘리고 아측 화력에 의한 오인사격 등의 사고가 급증할 수 있다." _위키백과 <전시작전통제권> 中
전작권을 무아연기에게로 넘긴 이상, '지휘통일의 원칙'은 응당 무아연기에게로 온전히 이양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설픈 돈오선언 이후 현재 내 생활의 전작권은, '나와 무아연기의 연합사(?)'가 가지고 있다고 오인하고 있는 실정이다. 아직도 이놈의 '나'가 성성하여, 지휘봉을 쥔 채 '전우여, 나를 따르라!!!'는 등의 잠꼬대를 홀로 목이 쉬어라 외쳐가며 꿈에서 한판 전쟁을 치르고 있고, '나'는 전작권에의 욕망에, 영화 속 주인공으로 남아야 한다는 환상에 중독되어, 이 이상한 전쟁영화의 프레임 밖으로 좀처럼 헤어나올 줄을 모른다.
전작권은 대체 누구의 것이어야 하는지, 전작권 환수는 왜 '나'의 안보에 있어 중요한지 등을 읊조리며 전쟁의 포화가 피어나는 스크린 속에서 홀로 머물고 있는 '나'는, 스크린 속 나의 뒤통수를 짐짓 살핀다. "혼자 깨어 누는 한밤중의 오줌처럼(김사인, '옛우물' 中)", 지금 하고 있는 이 짓이 참으로 신산스럽고 민망함을 즉시 발견한다. 도대체 영화는 언제까지 상영되는 것인가요, 아니, 저는 언제쯤이나 이 영화 밖으로 나가 팝콘과 제로 콜라를 음미하는 관객의 여유를 부릴 수 있게 되는 것인가요, 목놓아 소리쳐 보지만, 이 모든 절규가 나를 조롱하듯 즉시 대사로 처리되어 다시 나의 인이어 속으로 맴맴 울려 퍼진다. 나는 이 영화의 장르가 비극이라고 또 다시 오인, 절망한다.
4. 돈오확철에 관하여:
돈오확철은, 아마도, 지휘통일체계가 무아연기에게로 명확히 이양된 채 내면과 외부에서 펼쳐지는 새로운 '정치적 상태'를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새로운 정치적 상태로 나아가는 도상에서, 나는 다시 한번 '없는' 전쟁을 이토록 요란스럽게 치르는 중이다. 나는 전쟁의 소멸을 욕망하지만, 나는 영화의 객석을 욕망하지만, 그 나는 다시 전작권을 욕망하고 있고, 그 나는 다시 주인공됨을 욕망하고 있다. 이게 바로 전쟁의 본질이자 생리이다. 이런 관점에서 돈오확철은, 내가 싸울 필요가 없어진 어떤 평화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싸워서 쟁취된 폭력적 평화가 아니라, 그럴듯한 종전선언 등으로 인해 선포된 멋드러진 문화적 평화가 아니라, 헛헛하고 밋밋해진 '나'에게, 이젠 힘 다 빠졌냐고, 이젠 같이 한번 놀아볼테냐고 스윽 다가온 옆집 놈팽이 백수같은 그런 무색무취의 '일없는 평화'가 바로 돈오확철인지도 모르겠다.
스크린의 경계에 선 나는, 그 이상한 놈팽이 백수같은 평화와의 만남을 긴장과 환희 그리고 두려움과 절박함 속에서 꿈꾸듯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행인지 불행인지, 그 기다림의 상태가 안좋다. 그럼에도, 상태 안좋은 나날의 기록을 이렇게라도 남겨본다.
첫댓글 이 수행일지는 "이젠 같이 한번 놀아볼테냐고 스윽 다가온 옆집 놈팽이 백수"로 나타나, 나와 더불어 한 시절을 놀다가, 별나라로 훌쩍 떠나버린, 故 김동균을 기리며 쓴 추모사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