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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곤소곤 철학 이야기
제1강 니체의 '힘에의 의지'에 대한 오해
-진정 프리드리히 니체를 잘 아시나요?
19세기 말 독일 철학자 빌헤름 프리드리히 니체를 필자는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다가 더 들어가 보니 지금까지 사실 니체에 대해 거의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음을 알고 스스로 매우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 '진정 니체를 잘 아세요?'라는 질문을 주저 없이 하게 됩니다. 어느 정도 아시는 분들에게는 특별한 물음이 아닐 수 있으나, 필자는 경험상 이는 상대적으로 매우 진실하고도 정직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빌헤름 프리드리히 니체
사실 필자만 이러한 생각을 한 것은 아닙니다. 후기구조주의 철학자 질 들뢰즈도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거나 잘못 안 니체 철학의 몆 가지 주제에 대해 언급한 바 있습니다. 들뢰즈는 '니체'라는 글에서 니체에 대한 4 가지 오해를 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첫째, '힘에의 의지'를 '지배욕'이나 '힘을 의욕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하지 말라. 둘째, '강한 자와 약한 자' 개념에서 강한 자를 사회적 권력을 가진 자로 오해 말라. 셋째는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고대 그리스나 고대 인도나 바빌로니아인들의 그것에서 가져온 낡은 사상으로 생각지 말라. 넷째는 니체 말년의 저작들이 광기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씌여졌기에 신뢰할 수 없다고 여기지 말라.
20세기 후반 프랑스 철학자인 들뢰즈가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을 보니, 양의 동서 막론 니체에 대한 상당한 오해가 있었음을 알게 돼 고소를 금치 못하겠습니다. 말했듯 필자도 처음에 니체 철학 일부에 똑같은 오해를 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리하여 오해를 받는 '힘에의 의지'에 대하여 먼저 알아봅니다. 이 어휘는 본디 독일어 'Wille zur Macht'인데요, 영어 'will to power'처럼 번역하면 될 것을 일본 학자에 의해 '권력에의 의지'로 바뀌면서 인간이란 정치ㆍ사회ㆍ경제적 권력을 취하길 좋아하는 종족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켰지요. 그냥 '힘에의 의지'로 하면 될 것을 '권력'이란 어휘를 앞세웠으니 말이지요. 그런데 사실 독일서도 니체 사후 이를 권력에 대한 의지로 해석하기도 했으므로 번역자에게 모든 책임을 물을 일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니체의 뜻을 다 이해하지 못한 것이 당초에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힘에의 의지' 혹은 '힘의지'로 읽을 수 있는 니체의 이 개념어구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힘에의 의지'가 초인이 되기에 필요한 용기와 같은 것으로 얘기되고 있습니다만, 초인 관련 부분은 많은 설명이 필요하므로 뒷날을 기약합니다. 자, 니체는 모든 생명체가 내부적 잠재적 근본적으로 존재하려는, 아니 보다 더 높은 질로 존재하려는 의지를 지니고 있다고 보고요, 이를 '힘에의 의지'라고 이른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역사성을 포함한 모든 것의 역사성을 사유하는 한 방식으로 '힘'에 주목하자는 의미를 갖지요.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
보다 앞서 근대에 이르러 스피노자가 '모든 것이 계속 존재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니, 그게 코나투스(conatus)다'라고 한 것이 그 한 선취였다고 할까요. 그러나 스피노자의 '코나투스'가 존재의 지속만 나타내는 것에 비해 니체의 '힘에의 의지'는 자기 존재 그대로에 그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자신의 주인이기를, 더 강해지기를, 더 강도 높은 활동이나 질 높은 존재가 되기를 원하고 노력한다는 의미가 포함됩니다.
라이프니츠는 우주를 쪼개다가 최후에 남는 입자의 개념인 모나드(monad, 單子)를 얘기했고요, 현대 물리학도 가장 작은 입자인 원자를, 그리고 이를 또다시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에너지의 최소 입자인 양자를 얘기하거니와, 니체의 '힘'은 비슷하지만 이 같은 물리적 물량적 존재로 설명될 것이 아닙니다. 움직임이 예정돼 있지 않다는 점에서 라이프니츠 식 추상 개념인 모나드하고도 다릅니다. 또 원자보다 세계와의 소통이 더 원활하다고 이를 만한 것이 니체의 '힘'입니다. '힘'은 상호의존성을 전제하는 개념이므로 그렇습니다. 본디 정치 사회적 권력을 누리는 힘 따위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힘의 상승이 사회 현실적 지배 위치에 놓이게 만드는 경우는 있을 수 있겠지요만. 모든 존재자에게 있다는 니체의 그 '힘'은 늘 의지적으로 존재합니다. '의지'는 '힘'을 더 강하게 하려는 바의 무엇입니다. 그러므로 '힘에의 의지'는 존재자의 내재적 '힘'을 더 강하게 하려는 '의지'인 것이요, 힘의 상승ㆍ강화ㆍ지배를 추구하는 '의지' 작용을 말합니다.
이로 보면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철학, 라이프니츠의 자연철학, 마키아벨리와 루키디데스의 권력철학, 동역학적 세계관도 수용하는 등 당대 사유의 성과들을 활용해 '힘의지 철학'을 구성한 듯합니다.
니체는 이 세계를 다수의 '힘에의 의지들'의 거대한 관계의 네트워크로 봅니다. 즉 니체는 '힘'을 비실체적이요 비원자적인 존재로 보아 '힘에의 의지'를 자존적 존재자로 여기지 않습니다. 니체의 '힘' 또는 '힘의지'는 그러므로 다수 힘들 사이의 '싸움' 혹은 힘들 사이의 '관계 맺음'이라고 논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니체는 말합니다. ''힘에의 의지의 세계는 본질적으로 관계의 세계다''라고 말입니다.
제2강 앙리 베르그송의 시간론
-건각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못 따라잡는다
지난 제34강에서 우리는 시간에 대한 몇 가지 이론을 공부한 바 있습니다. 오늘은 그 중 특별히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전반을 살아간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의 시간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의 시간관은 특별하여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한번쯤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앙리-루이 베르그송
철학자 앙리-루이 베르그송은 19세기 말기 당 시대의 실증주의자 그리고 심리물리학자들과 대결합니다. 즉, 모든 것을 과학적, 수학적, 물리학적 방법으로 해명할 수 있다는 그들의 관점을 정면으로 비판하고자 '시간'을 꺼내듭니다.
종래 서구의 모든 철학자들은 시간을 공간화하여 사유했지요. 예컨대 저 고대의 엘레아학파 중 한 분인 제논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역설을 내놓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영웅으로 걸음이 몹시 빠른 아킬레스와 느리기로 비교 불가인 거북이가 경주를 하는데요, ᆢ그런데 제논은 그 경주에서 아킬레스가 결국 거북이를 따라잡지 못한다고 주장합니다. 이유인즉 이러합니다. 건각의 아킬레스가 빨리 달려 거북이에 따라붙는데요, 그러나 그 순간 아무리 느린 거북이라 하더라도 조금은 더 앞으로 갔을 것이란 얘기입니다. 아킬레스가 또 따라잡으면 거북이 또한 조금이라도 전진했을 것이니, 결국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이겨낼 수 없다는, 말도 안 되는, 그러나 논리상 부정하기 어려운 정황이 전개된다는 거지요.
엘레아의 제논
제논은 또 하나의 역설적 주장을 내놓습니다. 어느날 한 궁수가 사대에 올라 시위를 힘차게 당겨 화살을 쏘았습니다.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그 화살은 사대와 과녁의 중간 지점을 반드시 통과해야 할 터이지요. 반을 통과한 화살은 또 나머지 거리의 그 중간 지점을 반드시 지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과녁까지 거리의 반이 항상 남을 것이고, 그 중간 지점을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화살은 결국 과녁에 영원히 절대로 도달하지 못하게 됩니다. 늘 남은 거리의 반을 통과해야 하니 말입니다. 그리하여 제논은 주장하지요. 그러므로 ''날아가는 화살은 날아가지 않는다''고요.
이게 이른바 우리들이 그동안 자주 들어온 그 유명한 '제논의 역설'입니다. 군더더기 말이지만 여기서의 제논은 헬레니즘 시절에 스토아학파를 세운 '키티온의 제논'이 아니라, 그보다 2백 년 앞 시대를 살아간 동명이인 '엘레아의 제논'이라는 점을 환기해 둡니다.
자, 이 제논의 역설에 대응하여 앙리 베르그송은 어떤 반론을 제기했을까요? 베르그송의 논리는 이러합니다. 엘레아의 제논이 시간을 '공간화'하여 사유하는 바람에 이 같은 역설, 아니 저런 따위의 오류를 범했다는 겁니다. 베르그송은 기본적으로다가 도대체 움직이는 것을 어찌 나누어서 사유하냐고 질문합니다. 앞으로 기어가거나 뛰어가거나 날아가는 존재를 '중간'이니 '순간'이니 하며 잘라 사유하는 방식이 어떻게 온당하다 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즉, 그것은 운동으로서 그냥 그대로 '흐르는 것'으로 접근해야지 왜 금을 그어 반이니 중간이니 따지려 하느냐 하는 얘기입니다. 운동은, 움직임은 '흐름 그 자체'라고 강조합니다. 문제는 서구 철학자들 거개가 시간을 운동, 곧 움직임이나 흐름으로 보려 하지 않은 것에서 저런 따위의 역설이 나온 것이란 주장이지요.
교실의 시간표
시간을 나누는 것은, 곧 시간의 공간화입니다. 학교에서 1교시, 2교시로 나누거나, 우리가 생활을 하루, 이틀 등으로 나누어 이어가는 것도 실은 시간의 공간화라 할 것입니다. 이는 시간을 시간 그 자체로 이해하는 방식이 아닌 것입니다. 무지개를 일곱 색깔로 나누어 인식하는 방식도 옳지 않다고 해요. 이는 빛의 연속을 공간화하는 것이니 무지개의 실체를 알 수 없게 한다는 거지요. 개구리를 해부하여 이해하고자 하는 해부학적 방식도 개구리의 실체를 팍악하지 못하게 하는 공간화, 계량화, 수치화 등 실증주의의 방식이어서 진정 곤란하다는 겁니다.
앙리 베르그송은 모든 공간화와 수량화를 거부합니다. 그는 반실증주의자, 곧 유기체주의자이지요. 그와 비슷한 주장을 한 이가 있으니, 그가 영국의 이른바 과정주의 철학자 알프레드 화이트헤드입니다. 두 사람은 동시대 인물들인데, 한 분은 프랑스에서 다른 한 분은 영국에서 비슷한 생각을 한 것이지요.
그러면 시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 베르그송이 그 답을 내놨으니, 그게 바로 '지속(duree, duration)'입니다. 베르그송의 시간론은 '지속으로의 시간론'입니다. 지속 그 자체가 시간이라는 얘기지요. 지속은 곧 시간의 질적 변화, 끊임없는 운동과 생명의 시간, 생명이 폭발하는 힘의 시간, 질적 시간, 체험적 시간, 변화의 시간입니다. 베르그송은 이 지속으로서의 시간이 변화요, 성숙이요, 창조라고 외치지요. 그러므로 실증주의자들이여, 제발 존재를 공간화, 수치화, 물량화하지 마세요, 라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과학이 다가 아니고, 이성적 판단ㆍ분적ㆍ종합 따위가 전부가 아니라는 간절하고도 투철한 목소리를 내는 겁니다.
그러므로 앙리-루이 베르그송은 반지성주의자, 생성존재론자, 유기체론자, 생명형이상학자입니다.
이 어찌 과학지상주의에 몰두하는 현대사회에 일대 경종을 울리는 주목할 만한 관점이라 이르지 않을 수 있느냐, 이런 말씀입니다. (*)
뽀빠이
거듭 얘기합니다만, 흔히 우리들이 오해하듯 '힘에의 의지'는 가장 강한 자가 승리한다는 식의 낮은 원리를 말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힘에의 의지'는 자신의 행동 반경과 영향력의 범위를 확대하려는 행동 원리라 할 것입니다. 즉 '힘에의 의지'가 인간 활동을 추동하는 동력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므로 '힘에의 의지'는 무언가를 취하는 곳에서가 아니라 창조하는 데에 존재합니다. 어떤 힘이 명령하는 것은 '힘에의 의지'에 의한 것이지만, 어떤 힘에 복종하는 것도 '힘에의 의지'에 의한 것입니다.
이 논리를 보다 근원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다른 예로 말하면, 우리가 ''번개가 번쩍인다''고 말할 때 깊이 살피면 번개가 존재하고 그 다음 번개라는 주체가 번쩍이는 사건을 만들어내는 것이라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은 그렇지 않지요. 번쩍이는 것이 곧 번개입니다. 번개가 곧 번쩍임입니다. 주제론적으로 말하자면, 주체가 따로 있고, 그 주체가 번쩍임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번쩍거림이 곧 번개(주체)이고, 번개(주체)가 곧 번쩍거림이라는 거지요. 존재와 힘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힘'이 곧 존재(주체)요, 존재가 곧 '힘(힘에의 의지, 주체)'입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곧 '힘'입니다. 이렇게 설명해도 확 들어오지 않는 것은 니체의 개념이 당초 아포리즘으로 이뤄져 있기 때문입니다. 니체 철학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은유 혹은 알레고리이기에 본개념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일단 이를 요약한다면, 세계의 모든 존재는 '힘'으로서이다, 종래의 본질론으로는 존재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모든 존재는 그대로 그냥 존재하는데, 그건 바로 '힘'이다, 그런데 그 '힘'이란 단독으로써가 아니라 관계로써 존재한다, '힘'은 더 강해지려는 의지를 지닌다, 그게 '힘에의 의지'다, 인간의 경우 '힘에의 의지'는 스스로 주인이 되고자 하고, 그 이상이 되고자 하며, 더욱 강해지고자 하는 의지 작용이다, 세계 전체로는 '힘에의 의지'는 존재의 원인자, 아니 존재 그 자체가 된다ᆢ, 이런 얘기입니다. 니체의 '유고(遺稿)'에서 그 하나의 아포리즘을 찾아 볼 수 있기에 그러합니다. ''이 세계는 힘에의 의지다. 그 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너희 역시 이 힘에의 의지다. 그 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힘에의 의지' 개념은 초인, 영원회귀, 주인도덕 혹은 노예도덕 등 여타 아주 특별한 니체의 존재론, 윤리학, 미학 등의 개념들과 함께 갑니다. 그것들을 두루 살펴야 니체의 의도에 닿는 이해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여기에 머무르는 것으로.
일단 한 가지만 분명히 알아 둡시다. 빌헤름 프리드리히 니체가 '인간이란 권력을 지향하는 천박한 속성을 지닌 족속'이라는 따위의 수준 낮은 철학을 논했을 것이란 오해나 곡해가 있어선 곤란하다는ᆢ. (*)
제3강. '스케일'을 떠올리는 장자의 우화 하나
-대붕의 비상 혹은 메추라기의 웃음
태평양 남서부에 있는 섬나라 파푸아뉴기니의 국기에는 '극락조(極樂鳥, Birds of Paradise)'라는 새가 그려져 있습니다. 전설에서 이 새는 날개의 길이가 삼천 리로 하루에 구만 리를 날아간다는, 엄청나게 큰 상상의 새입니다. 이에 우리들이 즉각 떠올리는 새가 있으니 그건 바로 장자 선생이 '장자' 소요유 편에 소개해 유명해진, 파푸아뉴기니의 극락조와 비슷한 '붕(鵬)'이란 새 이야기입니다. 두루 알 듯 그 에피소드는 이러하지요.
극락조
"멀리 북쪽 바다에 물고기가 있어. 그 이름이 곤(鯤)이야. 곤의 크기는 몇 천 리가 되는지 아무도 몰라. 이 물고기가 변하여 새가 되는데, 그 이름을 붕(鵬)이라 해. 붕의 등짝이 몇 천 리인지 알 수 없어. 이 붕새가 온 힘을 다해 한번 날아오르면 그 날개가 마치 하늘에 드리운 구름 같아. 이 새는 바다에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남쪽 바다로 옮겨갈 준비를 하는데, 남쪽 바다는 하늘의 연못이야. 제해라는 친구는 이상한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지.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붕새가 남쪽으로 옮겨갈 때 날갯짓으로 물이 삼천 리나 튀어 오르고 회오리바람을 타고 구만 리를 날아 올라가 한번 떠나면 여섯 달 만에야 쉰다고 하더군."
일단 여기까지 읽고 얼른 떠오르는 생각은 붕새의 크기, 곧 스케일입니다. 워낙 커서 붕을 보통 '대붕(大鵬)'이라 이르지요. 실제로 지구 둘레의 길이는 약 4만km, 4km를 우리가 10 리라고 하니 지구 한 바퀴는 대략 십만 리가 됩니다. 그러면 예의 극락조는 한번 날아오르면 지구를 거의 한 바퀴나 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장자의 대붕도 그러합니다. 가히 우주적 새라 이를 만합니다.
'장자'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이어집니다. "그래야 바람이 아래에 쌓이게 돼. 그런 뒤 비로소 바람을 타고 푸른 하늘을 등지고 아무것도 막는 것이 없어지면 드디어 남쪽으로 향하는 거야. 그런데 메추라기는 붕새를 비웃으며 이렇게 말하지. 나는 온 힘을 다해 날아올라 느릅나무나 다목나무에 다다르려 하지만 때론 거기에도 이르지 못하고 땅에 떨어질 뿐이야. 그런데 저 놈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구만 리를 날아올라 남쪽으로 가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대붕
필자는 일상의 사소한 일로 가슴이 답답하거나 마음이 괴로울 때 소요유 맨 앞에 나오는 이 대붕의 에피소드를 읽으며 큰 것과 작은 것에 관해 생각해 보곤 합니다. 소회를 말하자면, 일단 '장자' 내편을 읽고나면 가슴이 웅장해집니다. 그 스케일과 사고 방식에 있어서 압도적으로 장대함과 막강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장자 선생의 이 인류학적 스케일 때문에 내 앞에 닥친 당장의 일이 하찮게 느껴지고요, 그러면 스스로의 문제를 대번에 방기해 버리게 되더군요. 그냥 놓아 버려요. 별 중요한 일이 아닌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다는 자각이 들더란 말이지요. 공자 선생의 "동산에 오르니 노 나라가 작게 보이고,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작아 보이더라"는 말씀과 겹쳐져 그 순간 나는 그야말로 스스로 다 놓아 버리고 웃음을 짓게 되더라고요. 일반화는 아니고, 제 경우가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메추라기
그런데, 이러다가 메추라기의 말을 다시 음미해 봅니다. 대붕의 웅장한 비상이 거대한 '자유' 같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분명한데요, 한편 대붕의 거대한 비상에 대한 메추라기의 의문이 주목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에 대한 기존의 논의가 적지 아니 있으니, 잠시 그걸 소개합니다. 논자들은 대붕의 비상, 곧 위대한 그 '자유'에는 묘한 데가 있다는 겁니다. 아무 때나 날지 못하고 바람을 기다리는 대붕에 무언가 한계와 제약이 느껴진다는 거지요. 그리하여 메추라기가 보다 더 자유의 상징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메추라기는 바람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날갯짓에 의지하며 날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유와 만족을 상징하는 것은 대붕이 아니라 메추라기가 아닌가? 힘든 조건을 넘어 심적 안정을 유지하는 쪽은 대붕이 아니라, 타고난 대로 낮은 나무 사이를 날아다니는 메추라기가 아닐까? 논자들이 이런 질문도 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정 대붕이 자유로운 것일까요, 아니면 메추라기가 자유로운 것일까요? 이는 곧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합니다. 바람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바람을 피할 것인가?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협소한 세계를 돌파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을 협소한 세계보다 더 작게 만들 것인가? 장자 선생은 대붕의 비상을 진정 자유 의지의 실현이라고 생각했을까요? ᆢ결국 그 판단이나 선택은 우리 각자의 몫이 아닐 것이냐, 하는 얘기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또 하나의 테마는 그리하여 기본적으로 '장자'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기존 논자들의 입론에 의지하여 해석하는 방식으로 읽을 수 있고요, 전혀 기존 방식을 따르지 않는 자기만의 독해를 해볼 수도 있으리라 봅니다. '장자'는 이렇게 열려 있는 고전입니다. 예컨대 메추라기의 웃음을 일정한 경지를 모르는 이른바 소인배의 그것이라 비판할 수도 있고요, 대붕의 거대한 비상을 헛되다고 폄훼할 수도 있겠지요. 대붕의 비상을 발전 여지가 많다는 뜻의 붕정만리(鵬程萬里)로 여길 수도, 메추라기의 웃음을 되지 못한 소인이 위인의 업적과 행위를 비웃는다는 그 학구소붕(鶴鳩笑鵬)으로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아니면 또 다른 방식, 이를테면 그대만의 전혀 다른 방향으로도요. 이런 철학적 '해석의 문제'를 생각해 봅니다.
극락조화
그리고 여기 철학의 무거움과 긴장을 장시 풀어낼 얘기 하나를 보탭니다. '극락조'가 아닌 '극락조화(極樂鳥花)'라는 꽃이 있대요. 이 극락조화는 살아 있는 동안 착한 일을 한 사람은 죽어 극락세계로 가고, 나쁜 짓을 한 사람은 지옥으로 간다는 전설과 연결되는 꽃이라 합니다. 또 하나, 인도네시아 바로 옆에 있는 파푸아뉴기니에 극락조가 많이 서식하는데요, 원주민들이 그 화려한 깃털만 얻으려 극락조를 잡으면 발을 잘라내고 가공하였는데, 유럽 학자들이 처음으로 본 극락조가 그 발 없는 극락조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극락조는 ‘평생 하늘을 날아다니다가 죽을 때가 되어서야 땅에 내려앉는 발 없는 새’로 알려져 있었는데요, 나중에 이런 시각이 '큰극락조(Greater bird-of-paradise, Paradisaea apoda)'의 학명에 적용되었습니다. apoda는 '발 없는 동물'을 뜻합니다.
장자 철학은 그러하거니와 저 남쪽 작은 섬 수풀 사이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그 아름다운 새의 발목을 댕강 잘라버리는 인간이란! 아이고, 이놈의 인간이란 도대체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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