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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十四 離相寂滅分 상을 떠남으로해서 적멸하다
爾時에 須菩提가
聞說是經 深解義趣 涕淚悲泣
而白佛言 希有 世尊
佛說 如是 甚深經典 我從昔來所得慧眼
未曾得聞如是之經
世尊
若復有人得聞是經 信心淸淨 則生實相
當知 是人 成就第一希有功德
是實相者 則是非相 是故 如來 說名實相
世尊 我今 得聞如是經典 信解受持 不足爲難
若當來世後五百歲 其有衆生
得聞是經 信解受持 是人 卽爲第一希有
何以故
此人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
所以者何
我相 卽是非相 人相衆生相壽者相 卽是非相
何以故 離一切相 卽名諸佛
佛告 須菩提 如是如是
若復有人 得聞是經 不驚不怖不畏
當知 是人 甚爲希有
何以故 須菩提 如來 說 第一波羅蜜
卽非第一波羅蜜 是名第一波羅蜜
須菩提 忍辱波羅蜜
如來 說非忍辱波羅蜜 是名忍辱波羅蜜
何以故 須菩提 如我昔爲歌利王 割截身體
我於 爾時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
何以故
我於往昔節節支解時 若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應生嗔恨
須菩提
又念過去於五百世 作忍辱仙人
於爾所世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
是故 須菩提
菩薩 應離一切相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生無所住心
若心有住 卽爲非住
是故
佛說 菩薩 心不應住色布施
須菩提 菩薩 爲利益一切衆生 應如是布施
如來 說一切諸相이 卽是非相
又說一切衆生 則非衆生
須菩提
如來 是眞語者 實語者 如語者 不誑語者 不異語者
須菩提 如來所得法 此法 無實無虛
須菩提
若菩薩 心住於法 而行布施 如人 入暗 則無所見
若菩薩 心不住法 而行布施 如人 有目 日光明照 見種種色
須菩提 當來之世
若有善男子善女人 能於此經 受持讀誦
則爲如來 以佛智慧로悉知是人 悉見是人
皆得成就無量無邊功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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離相寂滅 8 斷持說未脫苦果疑,
상을 떠남으로 해서 적멸하다.
圭峰:
第八은斷持說未脫苦果疑로다
論에 云하되
向說捨身은 苦身果報故로 福劣라하니
若爾라면 依此法門持說하는 諸菩薩의 行苦行도
亦是苦果이니 云何此法이 不成苦果함을 斷之시니라
文二니 一은 明超忍以斷疑이고
二는 勸離相以安忍이니라 初中에 文二니
一은 明忍體라
규봉:
8 (疑斷)
經을 지니고 說함이 괴로운 과보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의심을 끊어주신 것이다.
論에 이르기를
“앞에서 말해온 몸을 버리는 것은
몸을 괴롭게 한 과보이므로 복이 얕은 것이라”
하니, 만약 그렇다면 이 법문을 의지해 지니고
說하는 모든 보살의 고행을 행함도 역시 고의 과보이니
어찌하여 이 법이 괴로운 과보를 이루는 것이 되지 않는가?
하는 것(의심)을 끊어주신 것이다.
글에 두 가지니
(1)은
참는 것(忍)을 초월함을 밝혀 의심을 끊는 것이고
(2)는
相을 여읨으로서 참는 것이 편안함을 이끌어 주신 것이다.
처음 가운데 글이 두 가지니
①은
참음의 실다운 것(體)을 밝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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爾時 須菩提 聞說是經 深解義趣 涕淚悲泣 而白佛言
希有 世尊 佛說如是甚深經典
我從昔來所得慧眼 未曾得聞如是之經.
그때 수보리가 이 경 설함을 듣고 뜻을 깊이 깨달아 알고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울면서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희유하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한
이토록 심오한 경전은 제가 옛부터 얻은 지혜의 눈으로도
일찍이 이와 같은 경은 얻어듣지 못하였사옵니다.
淸峯:
혜안은 사람(我)이 공함을 요달함이고,
듣지 못함은 진리가 공함을 요달함인 것이다.
즉 들어도 들음이 없는 것으로
일체 모든 진리가 공한 것을 깨달았음이다.
古來無生有 고래무생유 하나
有而無有有 유이무유유 하니
眼不自見眼 안불자견안 하고
團團不知團 단단부지단 하니라
옛부터 남이 없이 있으나
있어도 있다는 있음이 없으니
눈은 눈을 스스로 보지 못하고
둥글고 둥근 것은 둥근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說誼:
經初에는 以上根悟入이니 故로 不動悲欣하고 直讚希有이나
此는 迹同中容하여 權示悟入이니 故로 悲欣交集然後에 讚佛希有니라
설의:
경의 처음에는 상근기로써 깨달아 들게 하므로
슬픔이나 기쁨에 동하지 않고 곧 바로 '희유하다'고
찬탄했으나,
여기에는 자취를 중근기와 같이해서
방편(이끌어 줌)으로 깨달아 들어가게 보여줌으로
슬픔과 기쁨이 뒤섞이게 된 뒤에 부처님께
'희유하다'고 찬탄한 것이니라.
청봉착어:
세존이 말없음으로 말없음을 보이시니
상근기가 이 희유함을 알고
말 있음으로 말없음에 이름을 보이심은
하근기도 알게되어 희유하다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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圭峰:
捨身之苦도 己感人心인데 何況更聞하고 不及持說이랴
是故悲淚이니라 論에 云하되 念彼身苦하여
尊重法故로 悲淚라하다 慧眼은 人空也요 未聞은 法空也니라.
규봉:
몸을 버리는(布施) 고통도
이미 사람의 마음을 감동하는데 하물며
다시 듣고 가지고 말해주지 못할 것인가?
이 때문에 슬피 운 것이다.
論에 이르되
“저 몸의 고통을 생각하여
법을 존중히 여기므로 슬피 운다”고 했다.
혜안은 사람이 공한 것이고
듣지 못했다는 것은 법(一切)이 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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傅大士:
聞經深解義하여 心中喜且悲니라 昔除煩惱障하고
今能離所知로다 徧計를 於先了하고 圓成은 證此時로다
宿乘無礙慧이나 方便勸人持로다.
부대사:
경을 듣고서 깊이 뜻을 알아
마음으로 기뻐하고 또 슬퍼하니라.
옛날엔 번뇌의 장애를 없애고
지금엔 능히 所知(알아야 할 대상)를 여의었다.
두루 헤아린 것(徧計)을 먼저 깨닫고서
원만히 이루어진 것은 이때 증하였도다.
과거세 지혜에 걸림이 없으나
방편으로 사람들이 가지게 이끌어 주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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冶父:
好笑거늘 當面諱了로다.
說誼:
喜事現前하면 也好吐笑거늘 涕淚悲泣은 只要諱却이로다
又深悟佛意하니 忍 不云喜하고 內悅外悲하니 所以堪笑니라.
야부:
좋아서 웃어야 하거늘 얼굴에는 숨겼도다.
설의:
기쁜 일이 앞에 나타나면 또한 좋아서 웃음을 토해야 하거늘
눈물을 흘리고 슬피 우는 것은 다만 숨기려고 하는 것이로다.
또 부처님의 뜻을 깊이 깨달았기에 차마 기쁘다고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는 기뻐하되 밖으로 슬퍼하니 그 까닭에 웃음을 참은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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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봉착어:
기쁨이 지나치면 감격이 되고
감격이 지나치면 눈물이 나니
눈물을 흘려 보였으되
내심은 기쁨이 충만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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冶父:
自小來來慣遠方하여 幾廻衡岳渡瀟湘인가
一朝에 踏着家鄕路하니 始覺途中日月長이로다
說誼:
因小利養하여 捨父逃逝하여 流落天涯하며
幾度往返我人山下하며 幾度出沒恩愛河中인가
忽逢良友指示로 踏得常樂家鄕하니
始知昔年生死路에서 虛送百千閑日月이로다.
야부:
어려서부터 돌아다녀 먼길에 익숙하여
몇 번이나 높은 산(衡岳)을 돌고
소수와 상수(江)를 건넜던가.
하루아침에 고향 길을 밟으니
비로소 途中에 세월이 길었음을 깨달았도다.
설의:
작은 이익으로 인하여 아버지를 버리고 멀리 도망쳐서
하늘가를 떠돌며, 몇 번이나 我人의 산 아래를 향해 돌아왔으며
몇 번이나 은혜와 정의 물 가운데를 드나들었던가.
홀연히 어진 벗을 만나 가르침(指示)으로 항상 즐거운 고향을 밟으니,
비로소 옛날 생사의 길에서 헛되이 긴 세월만 보냈음을 알겠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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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봉착어:
차별현상에 끄달려 밖으로 찾아
길고 긴 세월 헛것만 쫓았으나
선지식을 만나 바른 가르침을 받아
안으로 본처를 찾으니 비로소 참 낙(樂)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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圭峰:
二는 心淨契實具德勝이라 於中에 文二니
初는 正明이니라
규봉:
㉡ 마음이 깨끗하여 실상에 계합하면
덕의 수승함을 갖추게 되느니라.
그 가운데 글이 두 가지니
처음은 밝음을 바르게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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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尊 若復有人 得聞是經 信心淸淨
卽生實相 當知是人 成就第一希有功德
세존이시여!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게 되어 믿는 마음이
깨끗하면 곧 실상을 내게 됨을 마땅히 알겠사오니
이 사람은 가장 희유한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이옵니다.
淸峯:
실상을 낸다는 것은 일체가 절대 청정하여 둘 아님(不二)을
보아(契合) 반야지혜가 발현됨을 이르는 말이다.
실상을 내는 것은 청정함으로 인하여 반야(지혜)가 나게 되는 것이니
일체의 차별 현상을 떠났으되 또한 이 현상에 상즉하며,
유무를 떠났으나 유무에 상즉하는 것이다.
圭峰:
論에 云하되 此中有實相이요 餘者는 非實相이라하다
규봉:
論에 이르기를 “이 가운데에 實相이 있으니 나머지는
實相이 아니라”고 했다. (餘者는 인천, 소승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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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祖
自性不癡가 名慧眼이요 聞法自悟를 名法眼이니라
須菩提는 是阿羅漢으로 於五百弟子中에 解空 第一이며
己曾勤奉多佛이 豈不得聞如是深法하고
今於釋迦牟尼佛所에서 始聞也인가 然이나
或是須菩提ㅊ於往昔所得은 乃聲聞慧眼이다가
今始得聞如是深經하고 方悟佛意하여 悲昔未悟故로
涕淚悲泣인가 聞經諦會를 謂之淸淨이니라
從淸淨中에서 流出般若波羅蜜多深法이니
當知하라 決定成就諸佛功德이니라
육조
自性이 어리석지 않는 것을 지혜의 눈(慧眼)이라 하고
法을 듣고 스스로 깨닫는 것을 일체를 밝게 보는
눈(法眼)이라 한다.
수보리는 아라한으로 오백제자 가운데 空의
도리를 제일 잘 알며 이미 일찍이 많은 부처님을
부지런히 섬기었으니 어찌 이 같은 깊은 법을
듣게 되지 못하고 이제 석가모니 부처님 처소에서
비로소 들었다 하는가?
그러나 혹 수보리가 옛적에 증득한 것은
이에 소승(聲聞)의 慧眼이었으나,
이제야 비로소 이 같은 깊은 경을 듣게 되고
바야흐로 부처님의 뜻을 깨닫게 되어
일찍이 미처 깨닫지 못했음을
슬퍼하게 된 까닭으로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운 것인가?
경을 듣고 깊이 이치를 깨달아 앎을 淸淨이라고
하는 것이다.
청정한 가운데로부터 반야바라밀다의 깊은 법이
흘러나오는지라.
마땅히 알라.
결정코 모든 부처님의 功德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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圭峰:
二는 拂迹이라
규봉:
둘째는 자취를 떨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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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尊 是實相者 卽是非相 是故 如來 說名實相
세존이시여! 이 진실한 모양(실상)이라는 것은 곧 모양이 아니니
이 까닭에 여래께서 이름하여 참 모양이라 하셨사옵니다.
淸峯:
무슨 뜻인가?
세존께서 말씀한 참모양은 형상 있음이 아니라,
설명하자니 참 모양이라 했을 뿐이다.
마음도 마음이라 하면 본체의 마음이 아니요,
청정함도 청정하다 하면 청정이 아니니,
일체가 그러해서 말로써 이를 수 없는
공적영지한 것이나
방편상 참 모양이라 표현한 것이다.
普遍三世界 보편삼세계 하여
有應無所住 유응무소주 하는
此理卽本體 차리즉본체 요
本體如虛空 본체여허공 이니라
삼세에 두루하여
마땅히 머묾 없이 머물고 있는
이 실체(理)가 곧 본체요
본체는 허공과 같으니라
說誼:
經顯眞常妙體시니 聞經生信하면 妙體實相이
當處現前이니 故로 云하되 信心淸淨하면 卽生實相이시니라
此實相者는 不可以見聞覺知求이며 不可以色香味觸覓이니라
故로 云하되 是實相者는 卽是非相이니
是故로 如來가 說名實相이라시니라
又 是實相者는 非有相非無相이며 非非有相非非無相이니
是故로 如來가 說名實相이니시라.
설의:
경에 참되고 항상한 묘한 체를 드러내시니
경을 듣고 믿는 마음을 내면 실상의 묘한 체가
바로 그 자리에 드러나므로 이르되,
“신심이 청정하면 곧 실상이 난다”고 하시니라.
이 실상이란 보고 들어서 깨달음을
지식(知)으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색, 향, 미, 촉으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니라.
그러므로 이르되
“이 실상이란 곧 相이 아니니 이러하므로 여래께서
실상이라 이름한다”고 설하시니라.
또는 이 실상이란
상이 있지도 않고, 상이 없지도 않으며,
상이 있지 않음도 아니요, 상이 없지 않음도 아니니,
이러하므로 여래께서 實相이라 이름한다고 설하시니라.
청봉착어:
맑아 깨끗한 그것이 곧 실상인 것이라
보고 듣는 말과 글이 실다움이 아니니
유와 무를 초월하여 공적영지한
그것이 실상이라 하나 말로써
이를 수 없는 이 것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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圭峰:
無着이 云하되 爲離實相分別故라하다
규봉:
무착이 이르되
“실상은 분별을 여의기 위한 까닭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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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祖:
雖行淸淨行이나 若見垢淨二相當情하면
並是垢心이니 卽非淸淨心也이니라 但心有所得이면
卽非實相이니라.
육조:
비록 청정한 행을 행하나 만약 垢(더러움)와
淨(깨끗함)의 두 가지 相을 (능히) 알음알이(情)로
본다면 아울러 이것은 마음의 때이니
곧 청정한 마음이 아닌 것이다.
다만 마음에 얻은 것이 있으면
곧 실상이 아닌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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傅大士:
未有無心境하고 曾無無境心이니 境亡心自滅하고
心滅境無侵이로다 經中에 稱實相은 語妙理能深하여
證知唯有佛이니 小聖이 詎堪任이리오.
부대사:
마음이 없는 경계가 있지 않고
일찍이 경계 없는 마음도 없으니
경계가 없으면 마음도 스스로 멸하고
마음이 멸하면 경계가 침범함이 없노라
경 가운데 실상이라 일컫는 것은
묘한 말씀의 이치가 능히 깊어
증오해 알면 오직 부처님일지니
작은 성현이 어찌 감당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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冶父:
山河大地를 甚處得來이니
說誼:
若謂一向非相하면 卽今山河大地는
顯然是相이니 甚處에서 得來인가
야부:
山河大地를 어느 곳에서 얻어 왔는가?
설의:
만약 한결같이 相이 아니라 하면 곧 지금의 산하대지는
분명 이 相인데, 어느 곳에서 얻어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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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봉착어:
산하대지는 본래부터 있음이 아니로다.
산하대지는 어느 곳에서 왔는가?
누가 만일 이를 묻는다면
바다 밑에서 연기 난 곳이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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冶父:
遠觀山有色이요 近聽水無聲이라 春去花猶在요
人來鳥不驚이로다 頭頭皆顯露하나 物物體元平이라
如何言不會오 秖爲太分明이거늘
說誼:
迷之則目前有法이니 所以로 遠於道也하고 悟之則耳畔無聲이니
所以로 近於道也니라 所以로 道하되 以衆生妄見則種種粉紜이나
以如來實見則一切眞寂이로다 雖云無色聲이나 相相이 常宛然하고
雖云常宛然이나 相相을 不可得이라 所以로 道하되
無相無空無不空이 卽是如來眞實相이니라
此眞實相은 頭頭上顯하고 物物上明하여 無時無處而不明顯也이니
旣頭頭上顯하고 物物上明인데 老盧는 因甚하여 道不會佛法인가
眉底兩眼이 極分明하니 反觀眸子作何樣인가
야부
멀리 살펴보니 산은 색이 있고
가까이 들어도 물은 소리가 없도다
봄은 갔어도 꽃은 아직 남아 있고
사람이 와도 새는 놀라지 않네
낱낱이 모두 드러내나
만물의 體가 원래 평등하도다
어떻게 모른다고 말하는가?
다만 너무나 분명하거늘.
설의:
미혹한 즉 눈앞에 법(일체 모든 것이 있다는
상에 끄달림)이 있으니
이 까닭에 道에서 멀어지고 깨달은 즉
귓가에 소리가 없으니
(空) 이 까닭에 道에 가까우니라.
그런 까닭으로 말하되 중생의 망견으로는
곧 가지가지로 시끄러우나
여래가 진실을 봄으로는
즉 일체가 참이요 고요하다 하니라.
비록 色聲이 없다 이르나
相과 相이 항상 완연하고
비록 항상 완연하다 이르나
相과 相을 가히 얻지 못하니라.
그런 까닭으로 말하되
相도 없고 空도 없고
공 아님도 없는 것이
곧 여래의 참으로 실다운 모습이라 하니라.
이 진실상은 낱낱에 모두 나타나 있고
만물에 분명해서 때도 없고 처소도 없이
밝게 나타나지 않음이 없으니
이미 낱낱에 모두 나타나고
만물에 밝은데 老盧(혜능)는
무엇으로 인하여 佛法을
알지 못한다 말했는가?
눈썹 밑에 두 눈이 지극히 분명하니
돌이켜 눈동자를 보라.
무슨 모양을 지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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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봉착어:
있다 하면 작용이요 환이니
본래 실상은 있어도 있음이 없어
만물의 체가 본래 진공이라
일체의 체가 절대 평등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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圭峰
三은 信解三空同佛勝이
於中에 文三이니 一은 總標信解라
규봉
㉢은 三空을 믿어 알면 부처님같이 뛰어난 것이다.
그 글 가운데에 세 가지니
첫째는 믿어 아는 것을 모두 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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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尊 我今得聞如是經典 信解受持 不足爲難
세존이시여! 제가 지금 이와 같은 경전을 얻어듣고
믿어 알고 받아 지니기는 족히 어렵지 않사오나
淸峯:
즉, 수보리 존자는 혜안을 갖춘 해공 제일 아라한이라
세존의 말씀을 듣고 깨달았으나
일반 중생으로서는 쉽지 않다 하는 것은 쉽고도 어려우며
어렵지도 않고 쉽지도 않은, 알음알이를 여읜 진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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冶父:
若不得後語하면 前話也難圓이니라
說誼:
若使空生으로 但說其易하고 不言其難하면
話不得圓이나 如今難易을 俱說하니 話得爲圓이로다
야부:
만약 뒷말을 얻지 못하면 앞의 이야기도
원만하기(알기) 어려웠으리라.
설의:
만약 수보리로 하여금 다만 쉽게만 말하고
어려움(뜻)을 말하지 않았으면
그 이야기를 원만히 얻어듣지 못했거니와
지금같이 어려운 것과 쉬운 것을
갖추어 말씀하시니 말씀(뜻)을
원만히 얻어 가지게 되었도다.
---
청봉착어:
만약 말세 중생이 이 도리를 알기 어려울 것을 몰랐다면
수보리가 이 실상을 얻어 가짐이 원만하지 못했으리라
말씀은 소리요 실상이 아니니
실상은 알 수 없으나 방편인 말씀으로 깨닫게 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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冶父:
難難難이여 如平地上靑天이요 易易易여 似和衣一覺睡로다
行船은 盡在把梢人하니 誰道波濤從地起리오
說誼:
言其難也는 五目으로 不能覩이며 二耳로 不能聞이요
言其易也는 開眼便見하고 側耳便聞하며 開口則頭頭說破요
擧足則步步踏着이니 平地上天은 誠不易이나
和衣覺睡가 豈爲難이리오 看看하라
難易가 只是一人의 機變이로다.
야부:
어렵고 어렵고 어려움이여!
평지에서 靑天에 오름과 같고
쉽고 쉽고 쉬움이여!
옷 입은 채 한잠 자고 깸과 같도다.
배가 가는 것은 삿대 잡은 이에 있으니
누가 파도가 땅(人地)에서 일어난다 말하리오?
설의:
그 어려움을 말하면
다섯 눈으로도 능히 보지 못하고
두 귀로도 능히 듣지 못하는 것이요,
그 쉬움을 말하면
눈을 뜨면 곧 보이고 귀를 기울이면
곧 들리며 입을 열면 낱낱이 설파요,
발을 들면 걸음걸음마다
밟는 것이니 평지에서 하늘에
오름은 진실로 쉽지 않으나,
옷 입은 채 자다 깨는 것이
어찌 어려우리오?
보고 보아라.
어렵고 쉬움이 다만 한 사람 근기의 변화(機變)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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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봉착어:
어렵고 어려우며 쉽고도 쉬움이라
어렵기는 대추나무에 오름이요
쉬움은 세수하다 코 만지기니
행주좌와 일체처 일체사가 법 아님이 없건만
쉬고 쉬어 안으로 보지 못하고
밖으로 구하려는 어리석음에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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若當來世 後五百歲 其有衆生
得聞是經 信解受持 是人 卽爲第一希有
만약 이다음 세상 후 오백세(2천5백년 후)에 중생이 있어
이 경을 듣게 되어 믿고 이해하여 받아 지닌다면,
이 사람은 곧 가장 희유하게 될 것이옵니다.
淸峯:
받아 지니다(受持)하는 것은
이 경을 끼고 다니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니,
이 경의 심오한 근본 뜻을 혜오(慧悟)함인 것이다.
說誼:
經顯人人本有시니 此本有底一着子는 硬如鐵壁이요
軟似兜羅로다
軟似兜羅故로 受持卽易하고 硬如鐵壁故로 受持卽難이니
空生이 左叩右擊하여 以現其中이로다.
설의:
경에서 사람 사람들에게 본래 있음을 드러내셨으니,
이 본래 있는 한 물건은 굳기가 철벽과 같고
부드럽기는 버들가지 꽃으로 만든 솜(兜羅)과 같도다.
부드럽기가 버들개비 꽃과 같으므로 받아 지니기가
곧 쉽고 굳기가 철벽같으므로 받아 지니기가 곧 어려우니,
수보리가 좌로 두드리고 우로 침으로써
그 가운데(중도)를 나타내었도다.
청봉착어:
부드럽다니 쉬운 것 같고
철벽같다니 어려운 것 같도다
그러나 어렵지도 쉽지도 않으니
다만 본래 나를 다시 찾으려 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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冶父:
行住坐卧와 着衣喫飯이 更有甚麽事리오
說誼:
佛法이 只在日用의 行住坐臥處와 着衣喫飯時인
一切時一切處에 一一呈露靡遺이니 旣然如是인데
信解受持가 何難之有며 雖然信解가 亦何希有인가
야부:
다니고 머물고 앉고 누움과 옷 입고 밥 먹는 것이니
다시 무슨 일이 있으리오?
설의:
佛法이 다만 날마다 쓰는,
다니고 머물고 앉고 눕는 곳과 옷 입고 밥 먹는 때인
어느 때 어느 곳에나 낱낱이 드러나고 빠뜨림이 없으니,
이미 이와 같음인데 믿고 알고 받아 지님이
무슨 어려움이 있으며, 비록 그러하니 믿고 아는 것이
또한 어찌 희유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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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봉착어:
배고프면 밥 먹고 곤하면 잠자니
행주좌와 일체처 일체시 기거동작이
이 한 물건의 나툼인데 무엇이 희유인가
잊었던 것을 찾았을 뿐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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冶父:
冰不熱火不寒이며 土不濕水不乾이니
金剛脚踏地하고 幡竿頭指天이라 若人信得及하면
北斗面南看하리라
說誼:
冰不熱로 至頭指天은 平常總不動着이니 只如平常底道理를
作麽生道인가 行船宜擧棹하고 走馬卽加鞭이니 若遇飢來飯하고
還因困卽眠이니라 君今欲識平常道하면 北斗南星이 位不別이니
只如不別底道理를 且作麽生道하라 雨中看好月이요
火裏汲淸泉이며 直立頭垂地요 橫眠脚指天이로다
야부:
얼음은 뜨겁지 않고 불은 차지 않으며
흙은 습하지 않고 물은 건조하지 않으며
金剛神은 다리로 땅을 밟고
깃대의 머리는 하늘을 가리키도다
만약 사람이 믿는데 이르게 된다면
북두를 남쪽을 향해 보리라.
설의:
‘얼음은 뜨겁지 않고’로부터
‘(깃대의 머리는) 하늘을 가리키도다
’까지는 항상 평등하여 모두 움직이지 않는 것이니
다만 저 항상 평등한 도리를 어떻게 말할 것인가?
배가 가는 데는 마땅히 노를 들어야 하고
말을 달리게 하는데는 곧 채찍을 쳐야 되나니
만약 주리면 밥을 먹고 도리어 곤하면 곧 잠을 자도다.
그대가 지금의 평상한 도리를 알고자 하면
북두칠성과 남쪽별이 그 위치가 다르지 않으니
다만 저 다르지 않은 도리를 또 어떻게 말해 보아라.
비 오는 가운데서 밝은 달을 봄이요,
불 속에서 맑은 샘물을 길러 냄이며
바로 서서 머리를 땅에 드리움이요,
가로누워 자는데 다리가 하늘을 가리킴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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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봉착어:
항상 평등하다는 것은
북두를 남쪽으로 향해 봄이라
서쪽 집 말이 여물 먹으니
동쪽 집 소가 배가 터짐이요
남산에 구름 일기 전에
북산에 비가 온 소식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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圭峰:
無着이 云하되 未來法滅時에도 尙有菩薩受持이니
故無我人等取거늘 云何汝等은 於正法時에 遠離修行함에
不生慚愧인가하다 二는 別顯三空이라.
규봉:
무착이 이르되
“미래에 법(佛法)이 멸할 때에도 오히려
보살들이 받아 지님이 있을 것이니
그러므로 아상 인상 등에 집착함이 없을 것이거늘
어찌하여 너희들은 정법 시대에
수행을 멀리함에 부끄러움을 내지 않는가” 했다.
둘째는
三空을 달리 드러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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何以故 此人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
所以者何 我相 卽是非相 人相衆生相壽者相 卽是非相
何以故 離一切相 卽名諸佛이
왜냐하면, 이 사람은 내라는 상이 없고, 사람이라는 상도 없고,
중생이라는 상도 없으며, 오래 산다는 상도 없는 것이니,
어째서인가하면, 내라는 상은
곧 상이 아니며 사람이라는 상, 중생이라는 상,
오래 산다는 상이 곧 상이 아닌 것이니 왜냐하면,
일체 모든 상을 여읜 것을
곧 이름하여 모든 부처라 하는 것이옵니다."
淸峯:
여여 부동하여 본래 실상은 같고 같아 있음도 아니요,
없음도 아닌, 없이 존재하는 불가사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본체와 계합하여 둘 아니게 되는
(見性‧成佛) 것은 형상에 집착해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상을 여의어야 만이 실상을 증득 할 수 있는 것이다.
내라는(假我) 것이 있다고 집착하고서
어찌 진여의 묘유를 체득할 수 있으며
무여열반에 들 수 있겠는가?
실상은 일체의 차별 경계를 떠나되
일체 차별적인 경계에 상즉하여 유‧무를 여의며
유‧무가 아님도 여의고, 유‧무와 둘 아니며,
또한 유‧무와 곧 합하지도 아니하므로 실재(實相)라 한다.
이경에서 말씀한 4相과 4見은
일체의 차별적인 모습과
그에 따른 차별 견해를 총괄하는 명칭인 것이다.
이 4상으로 인하여 주관적인 주장인
근본 견해가 나게 되는(4見) 것이다.
따라서 4상으로 인한 일체 모습과
일체 견해는 허망된 망상이 되는 무명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무명으로 미혹한 어리석음을 일으키게 되는 습기는
육근에 있어서는 대상의 경계를 분별하는 식(見分)이 되고,
견분의 그림자로 나타난 지각의 세계인(육경) 相分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근의 기능으로 작용하는 견해의 분야
즉 견분을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이라 하고
그 견분의 그림자로 나타난
상분인 육경을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 인, 중생, 수자라는 4상인 상분의
허상에 집착하여 그 견분(4見)의 망상에 걸려
끄달리게 되는 것이다.
인연으로 인하여 일시적으로 잠시 뭉쳐진 환과
같은 지수화풍 4대를 잘못 나로 알고
4상의 견해인 4견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4상과 4견은 일체의 모습과 일체의 견해의
근본이 되는 것인데,
그 근원은 4대를 집착하여 내라고 고집하여
아상, 아견이 생기게 되기 때문이니,
이 아상으로 일체의 집착과 끄달림이 일어나
모든 증애(憎愛)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되는 것이다.
또 법상(즉, 모든 일체상)이 실재로 존재해 있다고
생각하면
상견(있음이 항상 하다는 소견)에 떨어지게 되고
법상이 아예 없다고 생각하면 단견
(즉, 끊어져 없다는 공 하다는데 매이는 소견)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니, 이렇게 되면
반야의 중도를 잃게 되는 것이다.
說誼:
聞經信受를 何名第一希有인가 以離四相하여
超然獨步故也니 四相遠離이 爲難이거늘 因甚却能遠離인가
以開智慧眼하여 了四相本空故也니라 了相本空하여
而能遠離를 何名第一希有인가 離一切相을 卽名諸佛故也니라
설의:
경을 듣고 믿고 받아 지니는 것을
어찌하여 제일 희유하다고 이름하는가?
四相을 여의고 초연히 홀로 걷는 것으로서
연고한 것이니라.
四相을 멀리 여읜다는 것이 어려움이거늘
무엇으로 인하여 도리어 능히 멀리 여읠 것인가?
지혜의 눈을 떠서 四相이 본래 공함을 밝게
깨달아야 하는 연고인 것이니라.
相이 본래 공한 줄을 깨달아
능히 멀리 여읨을 어찌 제일 희유하다 이름하는가?
일체상을 여읜 것을 곧 모든 부처라 이름하기 때문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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圭峰:
無着이 云하되 無我等者는 無人取我相이요
卽非相等者는 無法取며 離一切相者는 顯示諸菩薩이
隨順學相이니 諸佛世尊이 離一切相이니
是故로 我等應如是學이라니라
규봉:
무착이 이르되
“내가 없다 하는 등은 사람이 내라는 상을 집착하지 않는 것이고,
곧 상등이 아니라고 하는 등은 일체의 것을 취할 것이 없는 것이며
일체의 상을 여읜다는 것은 모든 보살이 따라 배우는 모습을
드러내 보인 것이니
모든 부처와 世尊이 모든 상을 여의었으니
이런 까닭으로 우리들도 마땅히 이와 같이 배우는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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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祖:
須菩提가 深悟佛意하여 呈自見處하니 業盡垢除하야 慧眼明徹하여
信解受持는 卽無難也니라 世尊이 在世說法之時에도 亦有無量衆生이
不能信解受持거늘 何必獨言後五百歲인가 蓋佛在之日에는
雖有下根不信하고 及懷疑者라도 卽往問佛하면 佛이 卽隨宜爲說하시어
無不契悟이니 佛滅度後後五百歲에는 漸至末法하여 去聖遙遠하고
但存言敎하여 若人有疑라도 無處諮決로 愚迷抱執하여 不悟無生하고
着相馳求하여 輪廻諸有리니 於此時中에 得聞深經하여 淸心敬信하여
悟無生理者는 甚爲希有이니 故로 言第一希有也니라
於如來滅後後五百歲에
若有人이 能於般若波羅蜜甚深經典을 信解受持하면
卽知此人은 無我人衆生壽者相이니 無此四相이 是名實相이니
卽是佛心이니라 故로 云하되 離一切諸相을 卽名諸佛也이라하니라.
육조:
수보리가 부처님의 뜻을 깊이 깨달아
자기의 見處를 드러내었으니
업이 다하고 때(垢)를 없애서 지혜의 눈으로
밝게 통하여 믿고 알고 받아 지님이 곧
어려움이 없게 된 것이다.
세존이 세상에 계시면서 설법할 때에도 역시 한량없는
중생이 능히 믿고 알고 받아 지니지 못하였거늘
하필이면 유독 후 오백세를 말했을까?
대개 부처님이 계실 때에는 비록 하근기로 믿지 않고
더불어 의심을 품는 자가 있을지라도
곧 부처님께 가서 물으면 부처님이 곧 마땅함을 따라
그들을 위해 설하시어 깨닫지 못함이 없을 것이나
부처님이 멸도 하신 뒤 후 오백세에는
점점 말법(시대에)에 이르게 되어
聖人에 가기가 아득하게 멀어지고
다만 가르치신 말씀만 있게 되어
만약 어떤 사람이 의심이 있어도
물어 해결할 곳이 없어서, 어리석고 어두워
(迷惑) 집착을 가져서 남(生)이 없는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상에 집착하여 분주하게 구해서 육도에 윤회하리니,
이때에 심오한 경전의 말씀을 얻어듣고 맑은 마음으로
믿고 공경하여서 無生의 이치를 깨닫는 자는
심히 드물게 있게 되므로 가장 희유하다고 말하신 것이다.
여래께서 멸도 하신 뒤, 후 오백세에
만약 어떤 사람이 능히 반야바라밀의
심히 깊은 경전을 믿고 알고 받아 지니면,
곧 알라
이 사람은 내다, 사람이다, 중생이다, 죽지 않고 오래 산다는
상이 없으니
이 네 가지 상이 없으면 이것을
이름하여 實相이라 하는 것이니
곧 이것이 佛心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르되
“일체 모든 상을 떠난 것을
곧 이름하여 모든 부처라 한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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傅大士:
空生聞妙理는 如蓬植在麻이니 凡流信此法하면
同火出蓮華로다 恐人生斷見하여 大聖預開遮시니
如能離諸相하면 定入法王家니라
부대사:
수보리가 묘한 이치를 들음은
쑥을 삼밭에 심어 둠과 같으니
범부들이 이 법을 믿으면
불에서 연꽃이 피는 것과 같노라
사람들이 斷見을 낼까 염려하셔
큰 聖人이 미리 열고 막으시니
만약 능히 모든 상을 여의면
결정코 法王의 집에 들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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冶父:
心不負人이면 面無慙色이로다.
說誼:
佛有三身이니 是法身耶인가 報身耶인가 化身耶인가
看彼毘盧老漢의 住處하라 非三非一이로되 而三而一이니
若使文殊不來途中하고 普賢이 忘却靑山이면 早已辜負毘盧老漢이라
辜負毘盧則心有歉然하여 面無慙色이나 如今不然하여 寒山은
忘却來時路하고 拾得은 相將携手歸이니
所以로 心無歉然하여 面無慙色이로다.
야부:마음에 사람을 저버리지 않으면
얼굴에 부끄러운 빛이 없을 것이로다.
설의:
부처님은 세 가지 몸이 있으니
이것은 法身인가? 報身인가? 化身인가?
저 비로자나불의 머무는 곳을 보라.
셋도 아니고 하나도 아니로되 셋이요 하나이니,
만약 문수(智慧)로 하여금 반야지혜의 쓰임(途中)에
오지 않고(定에만 국집해서 머묾: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행을 하지 않음)
보현(行)으로 하여금 본체(靑山)를 잊게 한다
(行만 있고 定이 없음)면 일찍이 이미
비로자나불(眞佛)을 저버리는 것이라.
비로자나불을 저버린즉 마음에 열적고
어색함이 있어서 얼굴에 부끄러운 빛이 있게 되나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寒山(청산:체)은
올 때의 길을 잊어버리고 拾得(도중:작용)과
서로 손을 잡고서 돌아오니
(體, 用이 함께) 이 때문에 마음에 부끄럽고
열적어 어색함이 없어서 얼굴에 부끄러운 빛이 없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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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봉착어:
비로자나불 법신은 동함이 없으나
지혜 문수와 보현 행이 있어 수승하며
한산(靑山)의 지혜가 습득(途中)의 행과 더불어
성인의 경계를 보이니 부끄러움이 없도다.
법신은 하나도 둘도 셋도 아니며,
하나이기도 셋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둘 아니라(不二) 하는 것이다.
만일 비로자나불(법신)만이라면
그것은 無記와 같음이니
문수의 지혜는 본체(자성, 불성)와
더불어 있으므로 만약 행(用:途中)으로 쓰이지 않고
定에만 국집하고, 보현은 행(보살, 작용)이므로
만약 체(定:청정본성:靑山)를 여의고
행(用)에만 국집해서 만상에만 끄달린다면
모두 어긋나는 것이다.
體(한산:청산)와 用(습득:도중)이 둘 아니므로
함께 증득하고 서로 여의지 않아야 함을 드러낸 것이다.
---
冶父:
舊竹에 生新筍하고 新花는 長舊枝인데 雨催行客路하고
風送片帆歸로다 竹密이 不妨流水過요 山高가 豈礙白雲飛랴
說誼:本始雙成이니 父子가 同業이라 旣然同業이니
莫戀家裏事하고 好作途中客하며 亦莫戀途中하고 却向家裏歸니라
雖然如是나 途中이 不礙家裏事요 家裏가 不礙途中事니라
看看하라 文殊普賢이 左旋右轉하니 毘盧滿面笑春風이로다.
야부:
묵은 대에서 새순이 나고 새 꽃은 옛 가지에서 자라는데
비는 나그네길을 재촉하고 바람은 조각배를 돌려 보내도다.
대나무 빽빽해도 물 흐름에 방해되지 않고
산이 높아도 흰 구름 날아감을 어찌 막으랴?
설의:
진여본체(本覺)와 깨달아 증한 본체(始覺)가
쌍으로 이뤘으니
父子가 동업
(본연이나 깨달음이나, 진이나 속이나 다르지 않음)이라.
이미 그렇게 동업일진대 집안 일은 생각말고
길 가운데 객이 됨을 좋아하며,
역시 길 가운데 일(用)은 생각지 말고
도리어 집안(體)을 향해 돌아갈지니라.
비록 이 같으나 길 가운데 일(俗諦)은
집안 일(眞諦)에 걸리지 않고
집안 일은 길 가운데 일에 걸리지 않느니라.
보고 보아라.
문수(智慧) 보현(行)이 좌로 돌고 우로 굴리니
비로자나불(法身體)의 얼굴 가득히 봄바람의 웃음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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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봉착어:
법신과 보신이 공적함을 깨쳤으니
걸림 없는 마음이라 무애자재하도다.
本覺과 始覺이 둘 아니니
청정(眞諦)한 가운데 밝게 행(俗諦)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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圭峰:
三은 如來印定이라
규봉:
셋째는 여래가 印定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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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 告須菩提 如是如是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렇다, 그렇다.
淸峯:
그렇다 그렇다. 한 것은 수보리의 깨달은 바
견처가 부처님과 계합함으로 인정하여 인가한 것이니,
두 번을 거듭 옳다 한 도리를 또한 알아야 한다.
이것은 공안이 되므로 파설 될까 염려하여 설명하지 않겠다.
다만 격외로 한마디 한다면,
“달이 달을 삼키고, 물에 도장을 찍었으되 흔적이 없음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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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祖:
佛이 印可須菩提는 所解가 善契我心이니 故로 重言如是也니라.
육조:
부처님이 수보리를 인가하신 것은
그 아는 것이 자기의 마음에 바르게 계합한 것이므로
거듭 말씀하시되 ‘그렇다’고 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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圭峰:
四는 聞時不動希有勝이라
규봉:
㉣은 經을 들을 때에 動하지 않아
희유함이 뛰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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若復有人 得聞是經 不驚不怖不畏 當知是人 甚爲希有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이 경을 얻어듣고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면,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심히 희유한 것이니라.
淸峯:
어떻게 하는 것이
놀라고 겁내고 두려움이 없게 되는 것일까?
의심함이 없고 물러남이 없으며 어지럽지 않아
적적요요(寂寂寥寥)함인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가 공하여 말에나 문자에 있지 않음을
요달(의심하지 않고 믿고 깨달음)한 것이다.
說誼:
空生의 希有之說이 妙契於理이니 故로 讚言如是如是이시니라
衆生이 違背覺王이 其來久矣이니 聞佛開示하고 多生驚怖하나
苟不驚怖면 甚爲希有로다 比之窮子가 立令 竮孤露하여 爲日已久다가
得見父王은 實爲天幸이로다 然이나
其父는 門庭이 高峻하고 窮子는 志意가 下劣하여
見已에 未免驚怖去在이니 見已에 不驚怖者는 甚爲希有로다
설의:
수보리의 희유하다는 말이 묘하게 이치에 계합함으로
칭찬해서 말씀하시되
‘그렇고, 그렇다’하시니라.
중생이 覺王(佛)을 어기어 온지 오래였으니
이제 부처님의 開示함을 듣고 많이 놀래고
두려움을 내게 되나, 진실로 놀래고 두렵지
않으면 심히 희유한 것이로다.
비유하면
집나간 窮한 자가 비틀거리며 외로이 거리를
헤매인지 오래다가 父王을 만나보게 된 것은
실로 천행이었도다.
그러나 그 아버지의 문과 뜰이 고준(高峻)하고
그 궁한 자는 생각하는 뜻이 하열하여 보고 나서
놀랍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나니,
보고 나서 놀래고 두려워하지 않으면
심히 희유할 것이로다.
청봉착어:
풍족함을 스스로 갖추고 있어도 모르면 가난하고
갑자기 자기의 것임을 알 때 놀래기 쉬워
오묘한 이치를 능히 알면 희유할 것이나
계합해 깨달아 증오하면 놀랠 것이 없으리라.
---
圭峰:
論에 云하되 驚者는 謂非處生懼요 怖者는
不能斷疑心故요 畏者는 一向怖故이니 其心이 畢竟墮驚怖故니라
규봉:
論에 이르되
“驚(놀랜다)은(두려움을 낼 곳) 아닌 곳에서
두려움을 내는 것이요,
怖(두려움)는 능히 의심을 끊지 못한 연고요,
畏(겁냄)는 한결같이 두려워하는 연고이니
그 마음이 필경은 驚怖에 떨어진다”고 했다.
[세 가지 상(驚,怖,畏)이
서로 행하는 것이 같지 않으니
驚은 놀래서 기이하게 여기는 것이고,
怖는 나아가고 물러남에 두렵고 두려워함이고,
畏는 한결같이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마치 사람이 서울을 올라 갈 적에
이 길이 원래 옳지 않다고 말하거나
혹은 한계를 느껴 더 나아가지 않거나,
혹은 무서워 광기가 발작하여 골짜기에 떨어지거나
바위에 던져져 천명을 마치지 못하는
등과 같은 것으로
법에 합하는 것은 가히 알기 어려운 것이다]
청봉착어:
驚怖畏가 사람의 감정이 다르니
놀랜다(驚)는 것 두려움이 생긴 때문이요
두려워한다(怖)는 건 의심스럽기 때문이며
겁낸다(畏)는 것은 한결같이 두렵기 때문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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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祖:
聲聞은 久着法相하여 執有爲解하고
(爲解는 一作所解라) 不了諸法本空一切文字皆是假立하나
忽聞深經하고 諸相不生하여 言下卽佛이라니 所以驚怖이니라
唯是上根菩薩은 得聞此理하고 歡喜受持하여 心無怖畏退轉이니
如此之流는 甚爲希有也니라
육조:
聲聞은 오랫동안 法相에 집착하여
함이 있음을 알아 집착하고,
모든 것이 본래 공하여 일체 文字가
모두 거짓으로 세운 것임을 요달하지 못하였으나,
홀연히 깊은 경전을 듣고 모든 상이 나지 않게 되어
말 아래 곧 부처라니,
이런 까닭에 놀래고 겁내는 것이다.
오직 상근기의 보살은 이 이치를 얻어듣고
기쁘게 받아 지니게 되어
마음에 두렵고 겁내어 퇴전함이 없으니
이러한 이들은 심히 희유함이 되는 것이다.
---
傅大士:
如能發心者는 應當了二邊하니 涅槃은 無有相이요
菩提는 離所緣이니 無乘及乘者라 人法兩俱捐하고
欲達眞如理이며 應當識本源이니라
부대사:
이같이 능히 발심한 이는
마땅히 二邊(유, 무의 소견)을 여의고 중도를 깨달아야하니,
열반은 相이 없음이요, 菩提는 반연함을 여읨이니
오를 것도 올라 갈 자도 없어
사람과 모든 것 양쪽 모두를 버려야 하고,
진여의 이치를 요달하고자 하면
마땅히 본래 근원을 알아야 하니라
冶父
秖是自家底니라
說誼:
不生驚怖를 說爲希有하니 是則是矣나 而父子는
本自同氣이며 亦自同家이니
何曾驚怖이며 雖不驚怖를 亦何希有하리오
야부:
다만 이것이 자기 집이니라.
설의:
놀래고 두려워하지 않음을 희유한 것이라 하니
이는 옳기는 곧 옳으나 父子는 본래 자연 같은 氣이며,
또한 자연 같은 집이니, 어찌 일찍이 놀랍고 두려울 것이며
비록 두렵고 놀래지 않는 것을 또한 어찌 희유하다 하리오?
---
청봉착어:
어리석어 집착이 있으므로 저열한 수행인이
부처님의 말씀을 듣되 소리와 문자에 집착하나
소리나 문자는 황엽(黃葉)과 같아 방편일 뿐임을 알라
일체 상이 상 아님을 깨달으면 심히 희유함이 되니라.
---
冶父:
毛呑巨海水하고 芥子納須彌하면 碧漢一輪滿하고
淸光六合輝로다 踏得故鄕田地穩하여(鄕은 一作關이라)
更無南北與東西로다
說誼
塵毛芥子는 物之最微者也요 巨海須彌는 物之最大者也로
以最微로 攝最大는 非情識之所到로다 然이나
智以照之則塵毛芥子가 不曾小이며 巨海須彌가 不曾大이니
容巨海於毛端하고 納須彌於芥子는
是吾輩之常分이라 非假於他術이니 因甚如此인가
性天覺月이 虛徹靈明輝騰六合하고
光被萬像하여 洪纖巨細가 無一不容其光焉이니
踏得這般境界하며 見得這般消息하면 更說甚麽是東是西하며
是南是北이리오 南北東西를 皆吾化이니 一切由我總無妨이노라
恁麽則建立도 亦在我며 掃蕩도 亦在我이니라
야부
한 올 터럭이 큰바다를 다 삼키고
겨자 속에 수미산을 받아들이며
푸른 하늘에 밝은 달이 가득하고
맑은 빛이 온 우주(六合)에 빛나도다.
고향의 논밭을 밟으니 안온하여
다시 남북과 더불어 동서가 없도다.
설의:
먼지, 털, 겨자는 만물의 가장 작은 것이요,
큰 바다와 수미산은 만물의 가장 큰 것으로
가장 작은 것으로써 가장 큰 것을 거둔다는 것은
생각해 아는 것으로써 이를 바가 아니로다.
그러나 지혜로 비춰보면
먼지, 털, 겨자가 일찍이 작은 것이 아니며
큰 바다와 수미산이 일찍이 큰 것이 아니니
큰 바다를 터럭 끝에 받아들이고
수미산을 겨자에 받아들임은
이것은 우리들이 항상 하는 것이라
다른 것을 꾀하여 빌린 것이 아니니
무엇으로 인하여 이 같은가?
임금의 성품(性天:
주인공인 본성)을 깨달은 달이
허공을 꿰뚫어 신령스럽게 밝아
온 우주에 밝게 빛나고
빛은 삼라만상에 입혀서
넓고 가늘고 크고 작은 것이
한 가지도 그 빛을 용납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런 경계를 밟게 되며
이러한 소식을 알게 된다면
다시 무슨 동과 서를 말하며
남과 북을 말하리오?
남북 동서를 모두 내가 만든 것이니
일체가 모두 나로 말미암음이니
모든 것에 방해가 없노라.
이런즉 건립하는 것도 역시 나에게 달려 있으며
또한 쓸어 없애는 것도 또한 나에게 달려 있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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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봉착어:
작은 것과 큰 것이여!
작음이 큼이요 큼이 작음이니
공한 것과 공함은 곧 공함이라
깨쳐서 알 바요 생각으로 이를 수 없으니
겨자 속에 수미산 넣고
터럭 끝에 바다가 듦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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圭峰:
五는 大因淸淨第一勝이라
규봉:
㉤은
큰 원인이 되는 청정함이 가장 뛰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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何以故 須菩提 如來說第一波羅蜜 卽非第一波羅蜜이
是名第一波羅蜜
왜냐하면, 수보리야! 여래가 말한 제일 바라밀은
곧 제일 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제일 바라밀인 것이니라.
淸峯:
본래 이름이 없고 형상이 없는 것을
제일 바라밀이라 명할 때,
곧 상을 세우게 되는 것이니,
상을 여읜 것이 아니고 취한 것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실상이 아니요,
명상(名相)인 것임을 알 수 있지 않는가?
說誼:
聞經不怖를 因甚道甚爲希有인가 此法은 物無與等이며
而能與物爲等이라 深玄幽奧하여 不近人情이니 聞者가
多生驚怖하여 信解者가 誠難이라 如今에 能生淨信하여
不生驚怖이면 所以希有이니라
설의:
경을 듣고서 두려워하지 않음을
무엇 때문에 매우 희유하다고 말하는가?
이 법은 어떤 만물과 더불어 같음이 없으며
또한 능히 사물과 더불어 같은 것이라.
깊고 그윽하고 숨겨져 오묘하여
사람의 식정에 가깝지 않으니
듣는 사람이 많은 놀라움과 두려움을
내게 되어 믿고 이해한다는 것이
실로 어려운 것이라서,
지금 능히 깨끗한 믿음을 내어서
겁내고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런 까닭으로 희유하게 되는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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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봉착어:
공한 것은 유위의 형상이 아니나
유위를 떠나고 무위의 실상이 머물곳이 없으니
물은 파도를 여의지 못하고 파도는 물을 여의지 못함을
밝게 깨달아 알면 희유하다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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圭峰:
何以故者는 有二이니 一은 躡前佛驚等徵이요
二는 都躡前勝以徵이니라 論에 云하되 此法門은
名爲大因이니 勝餘脩多羅라 故名爲淸淨이니
無量諸佛이 同說故니라 故彼珍寶檀等은 無如是功德이니
是故로 彼福德中ㅊ此福이 爲勝이라하다
규봉:
‘何以故’는 두 가지 뜻이 있으니
하나는 앞에서 놀래지 않는 等을 밟아서 물은 것이요,
둘은 앞의 뛰어난 것을 모두 거두어 물은 것이다.
論에 이르되
“이 법문은 이름이 큰 인함(大因)이 되니
다른 경전(修多羅)보다 뛰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이름이 청정이라 하니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이 다같이 설한 까닭인 것이다.
그러므로 저 진귀한 보물을 보시한 것 등은
이 같은 공덕이 없으니
이러한 까닭에 저 복덕 가운데
이 복이 뛰어난 것이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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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祖:
口說心不行하면 卽非요 口說心行하면 卽是이며
心有能所하면 卽非요 心無能所하면 卽是니라
.
육조:
입으로 말하고 마음으로 행하지 않으면 곧 그르고,
입으로 말하고 마음으로 행하면 곧 옳은 것이며,
마음에 能과 所가 있으면 곧 옳지 않고,
마음에 能所가 없으면 곧 옳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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傅大士:
波羅를 稱彼岸이니 於中에 千種名이라 高卑는 緣妄識하고
次第는 爲迷情이니 焰裏에 尋求水하고 空中에서 覓響聲이니
眞如何得失인가 今始號圓成이로다
부대사:
건너면(波羅) 저 언덕(彼岸)이라 일컬으니
이 가운데 천 가지 이름이 있도다.
높고 낮음은 망념과 앎을 인연하고
차례는 미혹한 알음알이 때문이니
불꽃 속에서 물을 찾고 공중에서 메아리를 찾음이니
眞如를 어찌 얻고 잃음이 있는가?
지금을 비로소 원만히 이루어진 것이라 부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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冶父
八字打開하여 兩手分付하다
說誼:
第一波羅蜜은 更無向上이요 非第一波羅蜜은 不異向下이니
是名第一波羅蜜은 是向上耶인가 向下耶인가 向上向下를
都說示하시어 兩手로 分付了也로다
야부:
양팔을 벌려서 두 손으로 나누어 부치시도다.
설의:
제일 바라밀은 다시 위로 향할 것이 없음이요,
제일 바라밀이 아닌 것은 아래로 향함과 다름이 아니니
제일 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은 위로 향함인가?
아래로 향함인가?
향상(向上), 향하(向下)를 모두 설해 보이시어
두 손으로 나누어 부쳐 마치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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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봉착어:
안다는 것은 알음알이요
마음에 계합해야 곧 옳으니
마음에 함이 있으면 곧 차별이 되고
마음에 함이 없으면 비로소 옳다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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冶父
是名第一波羅蜜은 萬別千差가 從此出이니
鬼面神頭가 對面來하니 此時도 莫道不相識하라
說誼:
第一波羅蜜이여 差別이 所從出이로다
窅然幽奧深難測이나 爭奈頭頭常現露리오
常現露하니 別無眞이니 此時에도 莫道不相識하라
야부:
제일 바라밀이라 이름하는 것은
천차만별이 이로 쫓아 나옴이니
鬼面과 神頭가 대면하여 오니
이때도 서로 모른다고 말하지 말라.
설의:
제일 바라밀이여!
온갖 차별이 이로부터 나왔도다.
깊고 아득(窅然)하여 그윽하고
깊고 깊어 헤아리기 어려우나,
낱낱이 항상 드러나 있음을 어찌하리오?
항상 드러나 있어서 따로 참다운 것이 없으니
이때에도 서로 모른다고 말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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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봉착어:
피안에 이른 곳 거기가 본처이니
일체가 이로부터 나왔도다
꼬리를 보아 호랑이를 알 수 있거늘
어찌 모른다 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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圭峰:
第八은
斷持說未脫苦果疑로다
論에 云하되 向說捨身은
苦身果報故로 福劣라하니 若爾라면 依此法門持說하는
諸菩薩의 行苦行도 亦是苦果이니 云何此法이 不成苦果함을 斷之시니라
文二니 一은 明超忍以斷疑이고 二는 勸離相以安忍이니라
初中에 文二니 一은 明忍體라
규봉:
8(疑斷)
經을 지니고 說함이 괴로운 과보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의심을 끊어주신 것이다.
論에 이르기를
“앞에서 말해온 몸을 버리는 것은 몸을 괴롭게 한 과보이므로
복이 얕은 것이라” 하니, 만약 그렇다면 이 법문을 의지해 지니고
說하는 모든 보살의 고행을 행함도 역시 고의 과보이니
어찌하여 이 법이 괴로운 과보를 이루는 것이 되지 않는가?
하는 것(의심)을 끊어주신 것이다.
글에 두 가지니
(1)은 참는 것(忍)을 초월함을 밝혀 의심을 끊는 것이고
(2)는 相을 여읨으로서 참는 것이 편안함을 이끌어 주신 것이다.
처음 가운데 글이 두 가지니
①은
참음의 실다운 것(體)을 밝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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須菩提 忍辱波羅蜜 如來說非忍辱波羅蜜
是名忍辱波羅蜜
수보리야! 인욕바라밀이라 하는 것도
여래가 말한 것은 인욕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인욕바라밀인 것이니
淸峯:
본질을 투득해 보면 인욕바라밀이라는 것이
있음이 아니고 일체가 공한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고통이 있으므로 참을 행이 필요하나,
고통의 본질이 참으로 본래 없는 공한 것임을
깨달으면 고통이 없는데 참고(忍), 수행할 고통이
마땅히 없을 것이 아닌가?
계는 지킬 것이 있으므로 있는 것이고
생각 내지 않고 집착함이 없으면 계도 또한
지킬 것이 없는 것이므로 참다운 계(戒)를 이른다면
생각 일으키지 않음이 참 계인 것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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圭峰
忍到彼岸이니 己難苦相이며 況彼岸非岸이니
誰苦誰忍인가 二는 明忍相이라 於中에 又二니
初는 引一生證極苦忍이라 又二니 一은 正明이라
규봉:
인욕이 피안에 이르게 하니 이미 괴로움의
相을 떠났으며 하물며 저 언덕은 언덕이 아니니
누가 고통스럽고 누가 참을 것인가?
②는
참음의 실다움을 밝힌 것이다.
그 가운데 또 둘이니
㉮는 일생의 가장 괴로운 것(極苦)을 참음으로
깨달음을 증득하게 이끌어 주신 것이다.
또 두 가지이니
㉠은 바름을 밝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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何以故 須菩리 如我昔爲歌利王에게 割截身體
我於爾時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
왜냐하면, 수보리야!
내가 옛적(전생)에 가리왕에게 몸을 베이고 찢기었으되
나는 그때 나라는 상이 없었고, 사람이라는 상이 없었으며,
중생이라는 상도 없었고, 수명이 있으니 죽지 않고
오래 살겠다는 상도 없었느니라.
청봉착어:
만약 내라는 상에 집착하고
사람이라는 상, 중생이라는 상,
죽지 않고 오래 살겠다는 상이 있다면
참는 것에 한계가 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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圭峰:
歌利王은 此云極惡이니 佛昔作仙으로 在山中修道할때
王獵疲寢에 妃共禮仙하니 王問得四果不인가 皆答云不하니
王怒割截함에 天怒雨石하니 王懼而懺悔하다 仙證本無嗔으로
王乃免害하다 論에 云하되 不但無苦이며 而乃有樂이니
以慈悲故라하다 二는 反顯이라
규봉:
가리왕은 여기서 극악이라고 이르는데
부처님이 옛날 仙人으로 山中에서 수도할 때
왕이 사냥하다 피로하여 잠이 든 사이
그 시비들이 함께 선인에게 예배하기에
왕이 “四果를 얻었느냐 고 물음에
“모두 얻지는 못했다”고 답하니 왕이 노하여
몸을 베었는데, 하늘이 노하여 돌 비를 내려서
왕이 두려워 참회하였다.
仙人은 본래 성냄이 없음을 증득하였으므로
왕이 이에 해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論에 이르길
“다만 괴로움이 없을 뿐 아니라 이에
즐거움까지 있으니 자비로운 까닭이라” 했다.
㉡은
반대로 드러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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何以故 我於往昔節節支解時
若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應生瞋恨
왜냐하면, 내가 옛적에 마디마디 사지를 찢기고
끊길 그때
만약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었다면
마땅히 화를 내고 원망을 하였으리라.
淸峯:
즉, 나라는 것이 본래 공적함을 깨달았기 때문에
본래 없는 나라는 것에 애착하지 않게 되어
죽는다는 두려움도 없게 되는 것이니
성내고 원망할 것이 없는 적묵하고 여여한
경지가 되었다 하는 말씀이다.
說誼:上讚信解하시어 令發心竟하시고
將勸菩薩離相發心하시어 先擧自己行菩薩道時에
逢難安忍하던 離相之迹하시니
忍辱波羅蜜者는 逢難安忍하여
求到彼岸也요 非忍辱波羅蜜者면 辱境이 本空하고
忍心이 本寂하며 無彼岸可到也니라 爲甚如此인가
如我昔爲歌利割截하여 不見有辱境當情하며
亦不見有身心當彼所害하니 初無我人之相이라
尙不見有辱境身心이니 何更見有彼岸可到也인가
因甚知無我相인가 我於彼時에 若有我相이면
應生瞋恨이나 旣不生瞋이니 故知無相也니라.
설의:
위에선 믿고 아는 것을 찬탄하시어 듣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내도록 해 마치시고 장차 보살에게 상을 여읜
마음을 낼 것을 따르게(勸)하려 하시어
먼저 자기가 보살도를 행할 때에 어려움을 만났으나
참음이 편안하였던 상을 여읜 자취를 드신(예로) 것이니라.
인욕 바라밀이란 어려움을 만나 인욕의 편안함에
안주하여 피안에 이르름을 구하는 것이요,
인욕바라밀(참는 수행으로 저 언덕에 이름)이 아니면
참기 어려운 치욕스러운 경계가 본래 공하고,
참는 마음이 본래 비고 고요하여 피안에
이를 것도 없는 것이니라.
어째서 이 같은가?
내가 옛날 가리왕에게 찢기고 베일 때와 같이
욕된 경계가 있음을 마땅히 생각으로 보지 않으며,
또한 몸과 마음이 저에게 해침을 당할 것이
있음을 보지 않았으니,처음부터 내라는 것과
사람이라는 상이 없는 것이니
욕된 경계와 몸과 마음이 있음을 보지 않거늘
어찌 다시 이를 만한 피안(彼岸)이 있음을 가히
보겠는가.
무엇을 인하여 아상이 없었음을 아는가?
내가 그때에 아상이 있었으면 응당히 성내고
원망함을 냈을 것이나 이미 성내고 원망을 하지 않았다
하심으로써 相이 없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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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祖:
見有辱境當情이면 卽非이고 不見有辱境當情이면 卽是로다
見有身相하고 當彼所害이면 則非요 不見有身相하고
當彼所害이면 卽是니라 如來가 因中在初地時에 曾爲忍辱仙人이시어
被歌利王에게 割截身體하되 無一念痛惱之心하셨으니
若有痛惱之心이면 卽生瞋恨이셨으리라 歌利王은 是梵語이니
此云無道極惡君也니라 一說에 如來가 因中에 曾爲國王시어
嘗行十善하여 利益蒼生하시니 國人이 歌稱此王이니
故云歌利라하다 王이 求無上菩提하여 脩忍辱行이니
爾時에 天帝釋이 化作旃陀羅하여 乞王身肉이거늘
王이 卽割施하되 殊無瞋惱라하니 今存二說은 於理는
俱通하니라.
육조:
참기 어려운 치욕스런 경계(辱竟)가 응당 있다는 소견이면
곧 그릇된 것이고, 참기 어려운 치욕스런 경계가 마땅히
있다는 소견이 아니면 곧 옳은 것이다. 몸이 있다고 생각하고
害하는 것을 당한다면 곧 그른 것이고,
몸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해치는 것을 당한다면
곧 옳은 것이다.
여래가 초지 보살의 인욕행을 닦는 가운데 있을 때에
일찍이 인욕선인이 되시어 저 가리왕에게 신체가 찢기고
끊겼으되 마음에 한 생각도 아파하거나 괴롭다는
생각이 없으셨으니, 만약 아프고 괴로운 마음이
있었으면 곧 화를 내고 원망하셨을 것이다.
가리왕은 범어인데
이를 일러 극악무도한 임금이라 말한다.
一說엔
如來가 전생(因中)에 일찍이 국왕이 되어 일찍이 十善을 행하여
많은 중생(蒼生)을 이익케 하시니 국민이 이 왕을 노래로써 歌利라
칭송하였으므로 가리라 일렀다 했다.
王이 위없는 지혜를 구하여 인욕행을 닦으니 이때에 제석천이
포악한 살생자(旃陀羅)로 변하여 王의 身肉을 구하거늘 왕이
곧 베어서 베풀되 조금도 성내거나 괴로워하지 않았다 했다.
지금의 두 가지 설을 두는 것은
이치에 모두 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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冶父:
智不責愚니
說誼:
仙人은 逢難不動을 歌利가 昧仙證空이니
愚智가 皎然이라 逢難不動으로 是不責愚니라
야부:
지혜는 어리석음을 책망하지 않나니
설의:
仙人은 어려움을 만나도 동하지 않음을
가리왕이 선인이 공함을 증득한 것을 모르니
어리석음과 지혜는 분명(상대적으로)하도다.
어려움을 만나도 동하지 않음으로
이 어리석음을 책망하지 않는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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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봉착어:
몸이라는 것이 실상으로
항상함으로 생각하면 옳지 못하고
몸이라는 것이 환과 같음을 알면 옳으니
신체가 찢기고 끊어져도 원망이 나지 않음은
나라는 상이 없음에서이니라.
어려움을 만나 동하지 않으니
망(妄)이 곧 반야임을 요달했음이라
그러므로 어리석음과 지혜가 분명하니
어리석은 이는 지혜로운 이의 가르침을 받아야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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冶父:
如刀斷水요 似火吹光이라 明來暗去이니
那事無妨이로다 歌利王歌利王이여 誰知遠煙浪에
別有好商量인가
說誼:商은 一作思라 靈源이 湛寂하여 攪之不可動이며
靈焰이 烜赫하여 吹之不可滅이라 任他八風交馳하여
內智가 湛爾常凝한 歌利之愚으로 焉知逢難之中에도
具無限好消息也리오
야부:
칼로 물을 베는 것과 같고 불로 해를 부는 것과 같도다.
밝음이 오면 어둠이 가니 무슨 일이라도 방해로움이 없도다.
가리왕 가리왕이여!
멀리 연기 같은 풍랑(遠煙浪)에도 달리 생각하여 헤아릴
좋은 소식이 갖추어 있음을 아는가.
설의:
(商은 딴 곳에는 思라고 됨) 신령스런 근원이 맑고 고요해서
흔들어도 가히 움직이지 않으며 신령스런 불꽃이 밝게 빛나서
불어도 가히 꺼지지 않느니라.
저 八風에 번갈아 달려감에 맡겨도 안으로 지혜가 맑음을
항상 엉기게 된 가리왕의 어리석음으로 어려움을 만난
가운데서도 한량없는 좋은 소식이 갖추어 있음을
어찌 알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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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봉착어:
내가 공하니 걸림이 없어
해함에도 방해롭지 않다네
어두움(愚昧)이 곧 보리이니
팔풍인들 어찌 항상한 것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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圭峰
後는 引多生에 證相續忍이라
규봉:
㉯는 여러 전생에서도 서로 이어진 인욕행으로
증득함을 이끌어 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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須菩提 又念過去於五百世 作忍辱仙人
於爾所世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
수보리야! 또한 생각하면 과거 오백세에
인욕선인이 되어 수행하던 그때 세상에서도
내라는 상이 없었으며, 사람이라는 상도 없었고,
중생이라는 상도 없었으며, 죽지 않고
오래 살겠다는 상도 없었느니라.
淸峯:
즉, 사상(四相)을 여읜 인욕바라밀로써 보리심을
증득했기 때문에 본래 내라는 것이 없어 집착할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되었으므로 참을 것도 없는
경계가 된 것이다.
옛날 인도에 가리(극악)왕이 있을 때 부처님은
인욕행을 닦는 선인이 되시었는데,
하루는 가리왕이 산중에서 사냥을 하다 잠시
잠을 자다 깨어보니 시녀들이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아 찾아보니 어떤 선인이 앉아있는 곳을
둘러싸고 예배를 드리고 있어 노하여
“그대는 방자하게 남의 여자를 탐하는가?”
하고 꾸짖으니
“나는 인욕계를 갖는다”
답하자,
왕은 칼로 선인의 몸을 끊고 오리고 하였으나
선인은 안색도 변함 없고 원망도 하지 않았다고
하는 이야기이다.
이 대문에서는
인욕 수행을 예를 들어 설하였는데
아상 등이 없었다고 하는 것은 성품이 공함을
통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상등의 망상을 일으키지 않는다 해서
생각(想)이 일체 끊어져 없어진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백치의 어리석음이 되는 것이니
어리석음이 인(因)이 되어 진심(塵心)이
도리어 일어나게 되어 반야의 오묘한 지혜를
장애하게 되는 것도 알아야 할 것이다.
說誼:
非但一生安忍無相이며 五百生中에서
頻遭此苦여도 悉皆無相이라시니라
설의:
단지 一生을 잘 참아서 相이 없을 뿐만 아니며
오백생(前生) 가운데에서 자주 이런 고통을 만났어도
모두 相이 없었다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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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봉착어:
참음으로써 고통을 참은 것이 아니라
고통을 참아야 할 내가 없음을 요달한 것이니
인욕은 참는 것이 아니요, 참을 것이 없음(空)을 보아
참아야 할 생각을 일으키지 않음인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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圭峰:
累苦故로 忍이요 忍熟而樂이니 但與正定慈悲相應故니라
偈에 云하되 離我及恚相이면 實無有苦惱요 共樂有慈悲니
如是苦行果라하다.
규봉:
누적된 괴로움이므로 참는 것이요,
참음이 익혀지면 즐거움이 되니
다만 바른 머묾(正定)과
더불어 자비가 서로 응하는 때문이다.
[누적된 괴로움은 참기 어려운 것이나
도리어 누적된 괴로움으로 말미암아
능히 참음이 익혀지는 것으로
세 가지 뜻(참음이 ①누적됨 ②익어짐 ③바른 머묾)
가운데 뒤의 2가지 뜻(樂, 慈悲)을 함축한 것이다.
낙이란 네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참는 것이 익음으로 낙이고,
둘째는 바른 머묾인 때문에 낙이고,
셋째는 남을 불쌍하고 가엽게 여기는 때문에 낙이고,
넷째는 자기를 이익케 하는 때문에 낙이 되는 것이다]
게송에 이르기를
“나와 더불어 성냄을 여의면 실로 몸과 마음의
괴로움이 있음이 없고 함께 즐거움과 자비가 있는
것이니 이 같음은 고행의 결과라” 했다.
[고행의 과보라는 것의 의심되는 것에 대해
깨뜨려 주시는 것이니 “고통의 과보는 고통이고,
낙의 과보는 낙이라 그러므로 같지 않다” 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앞의 질문에
“어찌하여 이 법이 고통의 과보를 이루지 않는가?” 하니
이제 이를 맺어서 이르기를 “이와 같은 괴로운 행
(있음이 공하여 보지 않음)인 연고로 괴로운 과보를
이루지 않는다” 한 것이다]
----
청봉착어:
의심되는 것 깨뜨리면 밝게 깨우치니
무엇이 의심인가? 아상의 실상이라
내가 공하고 고가 공하니
고통 받을 나도 고통도 더불어 공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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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祖:
世者는 生也라 如來가 因中에 於五百生을
修行忍辱波羅蜜하시어
以得四相不生이니라 如來가 自述往因者는
欲令一切脩行人成就忍辱波羅蜜이니라
行忍辱波羅蜜人이 旣行忍辱行하면 先須不見一切人過惡하고
寃親平等하며 無是無非하여 被他의 打罵殘害해도 歡喜受之하여
倍加恭敬하리니 行如是行者는 卽能成就忍辱波羅蜜이니라.
육조:
世란 生이다.
여래가 전생(因中)의 오백생을 인욕바라밀을
수행하시어 이로써 四相이 일어나지 않음을
얻으신 것이다.
여래가 스스로 과거의 원인(成佛하신)을 돌이켜
말씀하신 것은 모든 수행인으로 하여금
인욕바라밀을 성취케 하고자 한 것이다.
인욕바라밀을 행하는 사람이 이미 인욕행을
행하고자 하면
먼저 모름지기 모든 이의 과오를 보지 않고,
원수나 친한 이나 평등히 하며, 옳고 그름도
없이 하여, 다른 사람의 때림과 꾸짖음과
해침을 당할지라도 기쁨으로 그것을 받아들여서
더욱 더 그를 공경할지니, 이 같은 행을 행하는 자는
곧 능히 인욕바라밀을 성취한 것이다.
傅大士
暴虐唯無道로 時稱歌利王이니
逢君出遊獵하여 仙人橫被傷이나 頻經五百世나
前後極時長에 承仙忍辱力하여 今乃證眞常이로다.
부대사:
포악하여 오직 도가 없으므로 그때 가리왕이라 일렀으니
사냥 나온 왕을 만나 仙人이 뜻밖에 헤침을 당했으나
여러 오백 생을 지나 전후로 지극히 긴 시간에
仙人의 인욕력을 이어와
지금 이에 참으로 항상함을 증득 했음이로다.
冶父
目前無法이니 從敎柳綠花紅하고
耳畔無聞이니 一任鶯吟燕語로다
說誼:
深達法性空하여 塗割에 兩無心함은
達性空則하여 根塵無礙되어 得無心으로 則事事無妨이로다
所以로 道하되 智明頭頭明이요 心閑事事閑이시니라
야부:
눈앞에 법이 없으니
버들이 푸르고 꽃이 붉은 대로 두고
귓가에 들음이 없으니
꾀꼬리 울고 제비 지저귐에 맡겨 두도다.
설의:
法性이 空함을 깊이 통달해서 더럽히나(塗)
해침(割)에 둘 다 무심함은, 성품이 空함을 통달하여
六根과 六塵에 걸림이 없게 되어 無心을 증득하였음으로
곧 일마다 방해롭지 않도다. 그런 까닭에 말하되
지혜가 밝으면 낱낱이 모두 밝고,
마음이 한가하면 일마다 모두 한가하다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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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봉착어:
오랫동안 참고 내가 공함을 관하여
원수도, 친한 이도, 남의 시비도 보지 않으며
남의 해침을 당함에도 기쁘게 받아들여 공경하면
능히 인욕바라밀을 성취하게 되니라.
---
冶父:
四大元無我이니 五蘊悉皆空이로다 廓落虛無理는
乾坤萬古同이고 妙峯嶷嶷常如故로 誰管顚號括地風이리오.
說誼:
四大五蘊이 同鏡像이니 空空無我亦無人이로다
無我無人性常住하니 同地同天古到今이로다
古到今에 無變異이니 從敎八風來彭彭이도다
야부:
四大가 원래 내가 없어 五蘊이 모두 空하도다.
넓고 공허한 이치는 천지와 옛과
지금(시공을 초월해서)이 같고
묘한 봉우리 높고 높아 항상 같으므로
누가 땅을 휩쓰는 회오리바람(8풍)에 넘어진들 상관하리오
설의:
四大五蘊이 거울 속의 모습과 같으니 空하고 空해서
나도 없고 또한 사람이라는 것도 없도다.
나도 없고 사람도 없으나 자성은 항상 머무니,
땅도 같고 하늘도 같아서 옛부터 지금에 이르도다.
옛부터 지금에 이르도록 변해서 달라짐이 없으니
八風이 와도 시끄러운(彭彭)대로 맡기도다.
청봉착어:
사대가 공하고 5음인 내가 본래 공하여
옛과 지금에 변함이 없도다
팔풍도 지어 만들어 있음에 쫓으나
본래 그러한 것 공한 줄 알면 끄달리지 않으리라
---
圭峰:
二는
勸離相以安忍이라 論에 云하되 若有菩薩이 不離我相이면
見苦行苦에 欲捨菩提心이니 故勸離相이라하다 無着이 云하되
爲對治不忍因緣이니 不忍因緣이 有三種苦이니
謂流轉苦와 衆生相違苦와 乏受用苦라하다
於中에 文二니 一은 總標라
규봉:
(2)는
상을 여의게 되면 참음이 편안한 것임을 이끌어주신 것이다.
論에 이르되
“만약 보살이 내라는 상을 여의지 못하면,
괴로움을 보거나 괴로움이 있을 때 보리심을
버리고자 하므로, 상을 여의도록 이끌어 주신
것이라” 했다.
無着이 이르되
“참지 못할 인연에 대하여 다스려 주고자 하는 것이다.
참지 못할 인연에 세 가지 괴로움이 있으니
흘러가는 고통(流轉苦)과
중생이 서로 어기는 고통(衆生相違苦)과
수용이 부족한 고통(乏受用苦)이라”고 했다.
이 가운데 글이 두 가지이니
①은 모두 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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是故 須菩提 菩薩 應離一切相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이런 까닭으로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모든 상을 여의고
무상정등정각의 생각을 일으키되
淸峯:
상을 여읜다는 것을 잘못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차별 경계인 유의 세계와 공적한 세계가 둘이 아닌
일심 중도의 공함을 바르게 요달해야 하는 것이니,
모든 존재를 부정만 하는 허무단멸의 공으로
잘못 이해해서 사견을 기르면 안 되는 것이다.
따라서 색이 공이요, 공이 색임을 깨우쳐 알면
취하고 버림이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색을 보되 그 색의 본질이 또한 공함을 알아
집착하고 끄달리지 않게 되어야 하는 것을
일체상을 여읜다 하는 것이다.
說誼:
旣悟自心與佛無殊면 更能塵塵無着하고 念念無生하여야
是眞發心이며 名眞菩薩이니라 由是로 凡有發心者는
要應離相也이니 此는 正勸離相發心也니라
又離相發心者는 是非人我가 俱是虛妄이니
悉應遠離하고 但發無上菩提之心也니라 然이나
所謂離相은 但了相虛妄하여 能所不生을 卽名爲離요
非別有相爲可離也니라
설의:
이미 자기 마음이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깨닫게 되었으면, 다시 능히 티끌들(경계)에
집착하지 않고 생각 생각이 일어나지 않게
되어야 이것이 참으로 발심한 것이며
참다운 보살이라고 하느니라.
이런 까닭으로 무릇 발심한 사람은
요컨대 마땅히 相을 여의어야 하는 것이니,
이것은 바르게 相을 여의고 발심해야 함을
권(이끄심)한 것이니라.
또 相을
여의고 발심 한다는 것은 옳고 그름과
사람이다, 나다 하는 것이 모두 허망한
것이어서 모두 마땅히 멀리 여의고
다만 위없는 菩提心만 내게 되는 것이니라.
그러나 이른바 상을 여읜다는 것은,
다만 相이 허망한 것임을 밝게 깨달아
能과 所(상대적 차별심)가 나지 않는 것을
곧 여읜 것이라 하는 것이요,
따로 상이 있어서 가히 여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니라.
청봉착어:
자기마음이 부처인 줄 안다면
객진 경계에 집착하지 않고
상을 여의면 마땅히 불지에 오르나
여의어야 할 상이 본래 없음을 요달해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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圭峰:
若離相發心이면 雖逢大苦라도 卽能不捨니라
無着이 云하되 離一切相者는 爲離如是三苦相也라하시니라.
규봉:
만약 相을 여읜 발심이면 비록 큰 고통을 만나더라도
곧 능히 버리지(보리심) 않게 되는 것이다.
무착이 이르되
“일체 상을 여의었다는 것은
이와 같은 세 가지 고통
(윤회의 고통,
서로 어기는 고통,
갖고자 하는 고통)의
相을 여의게 된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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冶父:
是가 卽此用인가 離此用인가.
說誼:
旣云離相發心이면 心與相이 相去多少인가
冲虛妙粹하고 廣大靈明하여 離諸幻妄을 名之爲心하고
日用是非人我와 現前色香味觸의 俱是虛妄을 皆名爲相이니라
然이나 相非外來이고 全是自心起用이니 伊麽則此心이 卽此用인가
離此用인가 若道卽此用이면 爭奈絶相離名이며
若道離此用이면 爭奈不礙諸相이리오
畢竟作麽生道인가 若人이 識得心하면 大地無寸士니라
所以로 道하되 於一毛端에 現寶王刹하고
坐微塵裏하며 轉大法輪이라시니라.
야부:
이것은 이 쓰는 것(用)에 卽한 것인가?
이 쓰는 것(用)을 여읜 것인가?
설의:
이미 상을 여의고 발심한 것이라 이른다면
마음과 더불어 相의 거리가 얼마인가?
텅 비어 묘하게 순수하고 넓고 크고 신령스럽게 밝아서
모든 幻같은 망을 여읜 것을 이름하여 마음이라 하고
날마다 쓰는 옳다는 것과, 그르다는 것, 사람이라는 것,
나라는 것과 앞에 나타난 색향미촉의 모든 허망한
이 모두를 이름하여 相이라 하느니라.
그러나 이 相이란
밖에서 온 것이 아니고
온전히 자기 마음에서 일어난 작용이니
이러한즉 이 마음이 이 用에 卽한 것
(곧 용과 함께 함)인가?
이 用을 여읜(마음이 용과 별개로 있음)것인가?
만약 이 用에 즉(卽)했다고 말하면 상을 끊고
이름을 여읜 것을 어찌하며,
만약 이 用을 여의었다고 말하면
모든 상에 걸리지 않음을 어찌하리오?
필경 어떻게 말할 것인가?
만약 사람이 마음을 알아 얻으면
大地(마음)에 寸土(작은 것)도 없으리라
그런 까닭에 말하기를 한 터럭 끝에
불 세계(寶王刹)가 나타나고
티끌 속에 앉아서 大法輪(큰 법의 수레)을
굴린다 하시니라.
---
청봉착어:
일체에 집착하지 않고자 하는가?
반야바라밀에 의하여 행하라.
파도는 물을 여의지 못하고
물은 파도를 여의지 못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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冶父:
得之在心이고 應之在手이니 (在는 一作於라) 雪月風花이니
天長地久로다 朝朝鷄向五更啼하고 春來處處山花秀로다
說誼:
失其旨也이면 離却日用하고 別求生涯이나
得其源也하면 機境上에 把得便用이니라
伊麽則頭頭가 淨妙國土요 物物이 常住眞身이로다
一切聲은 是佛聲이요 一切色이 是佛色이니
觸處天眞하여 雌黃無分이로다 鷄向五更啼하고
處處山花秀하니 可得雌黃麽인가
야부:
얻은 것은 마음에 있고 응함은 손에 있으니
눈(雪)위에 비친 달빛이며 바람에 흔들리는 꽃이니
하늘은 멀고 땅은 오래구나
아침마다 새벽(五更)에 닭이 울고
봄이 오면 곳곳마다 꽃이 아름답도다.
설의:
그 뜻을 잃어버리면 날마다 작용하는 것을 여의고
따로 生涯(삶)를 구하거니와 그 根源을 얻으면(證得)
일체 경계 위에서 그것을 잡아 문득 쓰게 되는 것이니라.
이러한즉 낱낱이 깨끗하고 묘한 국토요,
만물이 항상 머물러 있는 참 몸(眞身)이로다.
모든 소리는 모두 부처의 음성이요,
만물이 모두 부처의 형상이니
닿는 곳마다 모두 天眞
(꾸밈없는 본연 그대로)해서
비소와 황산이 섞였으니(雌黃) 구분할 수 없도다.
닭은 오경에 울고 곳곳마다 산 꽃들이 아름다우니
가히 자와 황을 얻겠(유황과 비소를 나누어 가림)는가?
---
청봉착어:
높고 넓어 볼 수 없으나
항상 응해 쓰는 것이 이것이니라
일체 처 만물이 부처의 몸이요
일체의 소리와 움직임이
불설이니 龍蛇혼잡이로다.
---
圭峰:
二는 別顯이라 於中에 文이 二이니 一은 對治不忍流轉苦라
규봉:
②는 나누어(別顯) 드러냄이라. 그 중에 글이 둘이 있으니
㉮는 참지 못하는 것과 이어지는 고통을
마주하여 다스리고자(對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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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生無所住心.
응당 형상에 머물러서 생각을 내지 말며,
마땅히 소리, 냄새, 맛, 촉감과
모든 것에 머물러서 생각을 내지 말며,
마땅히 집착하는 바 없이 생각을 내어야 하는 것이니라.
淸峯:
머무는 바 없이 이 마음을 낸다는 것은
곧 무엇에건 처소를 국한하여 있지 않으면서
집착이 없이 생각을 낸다는 뜻이다.
내라는 것이 있다고 집착해
육진 경계에 증애심을 내면
망심이 생겨 불성을 가리게 되어
자비보살의 집착이 없는 마음이
나지 않게 되는 것이니
방일하지 말고, 생각 생각에 법이 공함을 깨달아
알고 집착하지 말며, 불퇴 정진을 행하되
반야바라밀에 의하여야
정각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
六祖:
不應住色生心者는 是都標也요 聲香等은 別列其名也니라
於此六塵에 起憎愛心하면 由此로 妄心積集하여 無量業結하여
覆蓋佛性하니 雖種種勤苦修行도 不除心垢하면 終無解脫之理니라
推其根本하면 都由色上住心이니 如能念念常行般若波羅蜜하면
推諸法空하여 不生計着하며 念念常自精進하고
一心守護하여 無令放逸이니라 淨名經에 云하되
求一切智하면 無非時求라하시다 大般若經에 云하되
菩薩摩訶薩이 晝夜精進하되 常住般若波羅蜜多하여
相應作意하되 無時暫捨라하니라
육조:
마땅히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않는다는 것은
모두 통틀어 표한 것이요,
소리 냄새 등은 따로 그 이름을 열거한 것이다.
이 육진에서 증애의 마음을 일으키면
이로 말미암아
妄心이 쌓여서 무량의 업이 맺어져 불성을 덮으니,
비록 가지가지로 힘든 수행을 할지라도
마음의 때를 없애지 못하면
마침내 해탈할 이치가 없는 것이다.
그 근본을 미루어 보면
모두 색 위에 마음을 머무는 까닭이니
만약 능히 생각 생각이 항상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모든 法이 空함을 알아서 계교하여 집착하는
생각을 내지 않으며,
생각 생각 항상 스스로 정진하고 일심으로
수호(守護)하여 방일함이 없게 할 것이다.
정명경(유마경)에 이르되
“모든 지혜를 구하려면 때 아님이 없이
구해야(항상 수행 정진)한다”고 했다.
대반야경에 이르되
“보살마하살이 주야로 정진하되
항상 반야바라밀다에 머물러
서로 응해 뜻을 짓되
잠시도 버림이 없게 하라”고 했다.
---
청봉착어:
색은 일체 각양각색으로 있다고 하는
성,향,미,촉,법의 총칭이요
소리, 냄새 등은 구분해서 일러주신 것이다.
환과 같은 육진 경계에 집착하면
망심으로 범부를 면치 못하고
항상 반야바라밀에 의지해
집착함이 없으면 곧 해탈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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若心有住 卽爲非住
만약 마음에 집착함이 있으면
곧 머무는 것(응무소주)이 아니니
淸峯:
앞의 有住(머묾)는 집착하여
집착(한정된 것)하는 것에 머묾이요,
뒤의 住(머묾)는 집착이 없이 머무는 곳 없는,
응무소주의 두루한 머묾으로
경계에 집착하면 그곳에 머문다 하고
집착이 없으면 일체처에 두루 머묾인 것이다.
---
六祖:
若心住涅槃이면 非是菩薩住處라 不住涅槃하고
不住諸法하며 一切處不住하여야 方是菩薩住處이니
上文에 說應無所住하여 而生其心者是也니라
.
육조:
만약 마음이 열반에만(곧 열반에 집착) 머무르면
이것은 보살이 머무를 곳이 아닌 것이다.
열반에도 머물지 않고 모든 것에도 머물지 않으며
모든 곳에도 머물지 않아야 바야흐로
이것이 보살의 머무를 곳이니,
윗글에서 설한 ‘응당히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낸다’는 것이 이것이다.
--------
是故 佛說菩薩心 不應住色布施.
이런 까닭으로 부처가 말하기를
‘보살의 마음은 마땅히 형상에 집착하지 않고
보시하는 것이라’하는 것이니라.
淸峯:
보살심이란 일체가 공함을 요달하여
만법이 평등하여 베푸는 이도
베풂을 받는 이도
베푸는 것도 보지 않아서 집착하지 않고
보시를 하게 되는 마음인 것이다.
汝我本來則無二 여아본래즉무이 이요
主客實相有而無 주객실상유이무 이니
金獅子脫外虛空 금사자탈외허공 이라
無相無空無無空 무상무공무무공 이어라
너와 내가 본래 곧 둘 아니요
주인과 객이 실상은 있으나 없음이니
황금사자가 허공 밖을 벗어남이라
본래 상도 없고 빈 것도 없고 비어 없음도 없어라.
---
六祖:
菩薩은 不爲自身五欲快樂하여 而行布施하고
但爲內破慳心하고 外利益一切衆生하여 而行布施니라.
육조:
보살은 자신의 오욕 쾌락을 위해서 보시를
행하지 않고,
다만 안으로는 아끼는 마음을 깨뜨리고
밖으로 일체 중생을 이익케 하기 위하여
보시를 행하는 것이다.
---
圭峰:
初는 正明流是集諦轉是苦諦이니
無着이 云하되 若着色等하면 則於流轉苦中에 疲乏故로
若提心이 不生이라하다 後는 引證이니
引前說無住施具含六度하여 證此文矣니라
二는 對治不忍相違苦라.
규봉:
처음은 이어져(流)서 쌓임은 괴로움의 과보(集諦)가 되고
뒤집으면 생사의 괴로움(苦諦)이 됨을 바르게 밝히는 것이니,
무착이 이르되
“만약 모양등에 집착하면 곧 이어지는 괴로운 가운데에서
피로하고 궁핍한 까닭에 보리심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뒤에는 이끌어서 증명하는 것이니 앞에 설한 무주상보시가
육도(6바라밀)를 모두 포함하고 있음을 이끌어
이 글을 증명한 것이다.
㉯는 참지 못하는 것과
서로 어기는 고통을 마주하여 다스린 것이다.
------
須菩提 菩薩 爲利益一切衆生 應如是布施
수보리야! 보살은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마땅히 이와 같이 보시하는 것이니,
淸峯:
보살은 일체가 둘 아님을 증오하였으므로
자리이타(自利利他)로
집착이 없는 자비심을 발현하게 되는 것이다.
說誼:
識浪內湧하면 則境風이 作而常動하며 智水가
內凝則風塵하여 息而常靜이니라 靜無靜相이어야
眞明自照이니 是謂無住生心으로 是眞菩薩住處니라
由是로 發心之者는 凡於應用之際에 但當無念而應하고
不應着意攀緣이니 着意墮魔坑하여 非眞菩薩住處也니라
所以然者는 菩薩發心은 只爲益生이니
自若有住면 豈能令他無住인가
所謂有諸己然後에 求諸人이며 無諸己然後에 非諸人是也니라
所謂無念無住는 正似秋天野水에 森羅自顯이니
豈同寒灰枯木一於忘懷者哉인가 忘懷는 沈鬼窟이라
亦非菩薩住處也니 若眞住處이면 不依有住而住하며
不依無住而住하며 亦不依中道而住하여야 如是而住也니라
설의:
識(알음알이)의 물결이 안으로 용솟음치면
곧 경계의 바람이 일어나 항상 움직이며,
智慧의 물이 안으로 엉기면(잠잠해짐) 풍진(육진 경계)이
쉬게 되어 항상 고요할 것이니라.
고요하되 고요하다는 相이 없어야
참다운 밝음이 스스로 비추는 것이니
이것이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낸다는 것으로
이것이 참으로 보살이 머물 곳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發心한 사람은
무릇 응하여 쓸 때에 다만 마땅히 무념으로써
응하고, 마땅히 생각에 집착하여 인연에 끄달리지 말 것이니,
생각에 집착하면 마군이의 구덩이에 떨어지게 되어
참다운 보살이 머물 곳이 아닌 것이니라.
그러한 까닭은 보살의 발심은
다만 중생을 이익케 하기 위한 것이니
스스로 주함(執着)이 만약 있으면
어찌 능히 다른 이로 하여금 머물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이른바 모든 것을 자기가 갖추어진 연후에
남을 구할 것이며, 모든 것을 자기에게 없게
한(집착하는 허물) 연후에
남(모든 사람)을 그르다
(잘못을 일러줌) 하는 것이 이것이니라.
이른바
무념, 무주라는 것은 바로
(正) 가을 하늘과 들의 맑은 물위에
삼라만상이 스스로 드러나는 것과 같으니,
어찌 싸늘한 재와 고목처럼 한결같이 잊는 것
(無記空)과 같겠는가?
생각을 잊는 것은 귀신 굴속에 잠기는 것이라
또한 보살의 머무는 곳이 아닌 것이니
만약 참답게 머무는 것이라면
머무는(執着) 곳 있음에 의지해서 머물지도 않으며,
머무는 것 없음(定에만 머묾)에 의지하여 머물지도 않으며,
또한 中道를 의지하여(중도라는데 국집) 머물지도 않아야
이와 같이 머무는 것(응무소주)이니라.
청봉착어:
식정이 물결치면 경계가 요동하고
엉기어 고요하면 지혜가 밝으리니
고요한 것은 고요하다는 생각이
없음이 참 고요함이며
무릇 응하여 쓰되 무념으로 행함이 보살행이니라.
자기가 집착하면서 어찌 남에게 욕심을 버리라 하며
자기가 허물이 많으면서 어찌 남의 허물을 이를 것이며
자기가 증오(證悟)하지 못하고서
어찌 남을 제도한다 하리요?
유주, 무주, 중도도 집착하지(변견) 않아야
참으로 머묾 없는 행이니라.
------------
六祖
菩薩者는 行法財等施하여 利益無彊이나
若作能利益心하면 卽是非法이요 不作能利益心하면
是名無住이니 無住卽是佛心也니라
육조:
보살은 法과 재물 등을 베풀어서
이익을 한량없게 하는 것이나,
만약 능히 이익케 한다는 생각을 지으면
곧 법(眞理)이 아니요,
능히 이익케 한다는 마음을 짓지 않으면
이것을 無住(머묾이 없다)라 이름하니,
머묾(執着)이 없는 곧 이것이 佛心인 것이다.
---
傅大士:
菩薩이 懷深智이니 何時不帶悲이랴
投身憂虎餓하고 割肉濟鷹飢로다(濟는
一本에 作恐이라) 精勤三大劫하되 曾無一念疲하니
如能同此行하면 皆得作天師이니라.
부대사:
보살이 깊은 지혜를 품고 있으니
언제라도 자비를 갖고 있지 않겠는가?
주린 호랑이를 걱정하여 몸을 던지고
살을 베어 굶주린 매를 구제하도다.
정근을 삼아승지겁 동안 하였으나
일찍이 한 생각도 고달픔이 없었으니
만약 능히 이와 같이 행하면
모두 하늘의 스승이 되리라.
---
冶父:
有佛處에도 不得住하고 無佛處에는 急走過지니
三十年後에 莫言不道니라
說誼:
有佛處는 有敎可遵이며 無佛處는 無敎可効니라
然이나 有敎無敎는 盡令人不得洒洒落落이니
旣不坐於兩邊이면 亦不滯於中道하고
透過三關已하여 亦復不留蹤하라
야부:
부처가 있는 곳에도 머물지 말고
부처가 없는 데서는 급히 지나갈지니
삼십년 후에 일러주지 않았다고 말하지 말지니라.
설의:
부처님 있는 곳에는 가르침이 있으니 가히 쫓을 것이요
부처님이 없는 곳은 가히 본받을 만한 가르침이 없노라.
그러나 가르침이 있고 없는 것은 모두 사람으로 하여금
깨끗하여 거리낌이 없게(洒洒落落) 하지 못하게 하니,
이미 양변에 앉지 않았다면 또한 중도에도 막히지 말고
세 가지 관문(有, 無, 中道)을 뚫고 지나
또 다시 자취도 남지 않게 하라.
---
청봉착어:
부처가 있다 해도 곧 옳지 못하고
부처가 없다 해도 곧 옳지 못하며
유무를 여의고 또한 중도마저 여의어야 하나니
훗날 일러주지 않았다고 말하지 말라.
---
冶父:
朝遊南嶽하고 暮往天台로다 追而不及이나
忽然自來로다 獨行獨坐無拘繫하고
得寬懷處이니 且寬懷로다
說誼:
彼此無所止하고 中間亦無蹤니 蕭然獨脫無拘繫하니
雲蹤鶴態도 喩難齊로다 旣不坐於三千里內하고
亦不立於三千里外이니 是可謂逸驥之於春風廣野요
神龍之於月明滄海로다
야부:
아침에는 南岳(衡山)에서 놀고 저물면 天台山에 가도다
쫓으려도 미치지 못하였으나 홀연히 저절로 오는도다.
홀로 행하고 홀로 앉음에 걸려 막힘이 없고
너그러움을 증득한 곳이라 또한 너그럽도다.
설의:
저것에도 이것에도 머묾이 없고
중간 역시 자취가 없어 쓸쓸히 홀로 벗어나
얽매임이 없으니, 구름의 자취와 학의 자태로도
(똑같이) 비유하기 어렵도다.
이미 삼천리(有, 無, 中道)안에 앉아 있지 않고
역시 삼천리밖에도 서있지 않으니
이것을 일러 넓은 들 봄바람에 준마가 달림이요,
달 밝은 푸른 바다에 神龍이 오름이라 하도다.
---
청봉착어:
아침에 일어나 신통을 쓰고
저녁에 잠잘 때 소연히 홀로하니
찾으려 해도 없는 듯 하나
항상 함께 하는 이것이로다.
---
如來說一切諸相 卽是非相
又說一切衆生 卽非衆生
여래가 말하는 일체의 모든 형상은 곧 이 형상이 아니
또한 모든 중생이라고 말하는 것도 곧 중생이 아닌 것이니라.
淸峯:
여래가 말씀하는 일체의 법이나 중생이라는 것은
그 본질적인 성품이 공하여 모양도 이름도 없으나
방편으로 일컬으신 것이므로
차별상(相)을 갖고 말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있다 하는 소견은 분별하는 생각인 것으로
因이 緣에 응하여 果를 짓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일체의 차별적인 경계(모습)들은
곧 실재의 모습(實相)이 아니며
일체중생이라고 하는 것도
바로 실상의 중생이 아닌 것이요,
이름(말하자면)이 중생인 것이다.
說誼:
諸相이 本空하여 無相可住요 衆生本寂하여
無生可度也이니 此所以勸離相發心也니라.
설의:
모든 相이 본래 공하여 머물만한 相이 없음이요,
중생이 본래 고요하여 제도할 중생이 없으니
이 까닭에 相을 여의는 마음을 일으키도록
권(이끌어줌)한 것이니라.
청봉착어:
일체 있다고 생각한 것들
모두가 본래 공한 것이니
집착할 것 없는 幻임을 알아
일체상을 여의도록 이끌어 주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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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祖:
如者는 不生이요 來者는 不滅이니
不生者는 我人不生이요 不滅者는 覺照不滅이니라
下文에 云하되 如來者는 無所從來며 亦無所去이니
故名如來라하니 如來가 說我人等四相은 畢竟可破壞으로
非眞覺體也요 一切衆生은 盡是假名이라
若離妄心하면 卽無衆生可得故로 言卽非衆生也라하니라
육조:
如란 나지 않음이요 來란 멸하지 않음이니,
不生이란 내라는, 사람이라는 것이 나지 않음이요,
不滅이란 깨달아 비춤이 멸하지 않는 것이다.
아래 글에 이르되
如來란 쫓아서 온 곳도 없으며
또한 가는 곳도 없으므로 如來라 하니,
如來께서 설하신 我人等 四相은 필경 가히 무너질 것으로
참된 깨달음의 體가 아닌 것이요.
일체 중생은 모두 거짓 이름인 것이다.
만약
망심만 여의면 곧 얻을 만한 중생이 가히 없으므로
곧 중생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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冶父:
別有長處이니 不妨拈出이로다
說誼:
相卽非相이고 生卽非生이니
只說得一半이요 說不及一半이니
一半을 更須拈出하여야 始得이로다
야부:
따로 長處(좋은 곳)가 있으니
집어내는데 방해롭지 않도다.
설의:
相은 곧 相이 아니고 중생은 곧 중생이 아니니
다만 반만 말했고 아직 반은 말로써 미치지 못했으니
반을 다시 모름지기 잡아내어야 비로소 증득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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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봉착어:
항상하여 남(生)도 없고 없어짐도 없는 것이 여래이니
일체 제상이 불생(不生)하고 본각이 불멸함이로다
따라서 온 곳도 없고 갈 곳도 없으니
나도 중생도 모든 것이 실상이 아니며 아니라는 것도
아니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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冶父:
不是衆生不是相이여 春暖黃鶯이 啼柳上하여
說盡山雲海月情이로다 依前不會空惆悵하니
休惆悵하라 萬里無雲天一樣이로다
說誼:
纖毫不掛處에 萬像頓彰時라
山頂白雲은 封不開요 海天明月이 正蕭然 見已하니
情自悅하나 此情을 說向誰리오 傍有遠鄕客作夢이매
扶起分明說此情하니 睡初起眼昏昏하여
依前不會空惆悵이로다 休惆悵하라
一道寒光이 滿目前이로다
야부:
중생도 아니고 相도 아님이여!
따뜻한 봄날 황금 꾀꼬리 버드나무 위에서 울어
산 구름과 바다 달의 정을 다 설했도다
앞을 의지하여 알지 못하고
공연히 슬퍼 하니 슬퍼함을 그치라
만리에 구름 한 점 없으니
하늘은 한 모양이로다.
설의:
가는 털도 걸지 못하는 곳에 萬像이
몰록 드러날 때로다.
산꼭대기의 흰 구름은 봉하여 열리지 않고
바다와 하늘의 밝은 달이
로(正) 쓸쓸함을 이미 보니,
情이 스스로 즐거우나
이 情을 누구를 향해 말하리오?
곁에 있는 고향을 멀리 떠나
온 나그네가 꿈을 꾸고 있어
붙잡아 일으켜 분명한 이 정경을
말해주나 잠에서 막 깬지라
눈이 흐려 앞을 쫓아 알지 못하고
공연히 서글퍼 하도다.
슬퍼함을 그치라
한 줄기 차가운 광명이 눈앞에 가득 하도다.
---
청봉착어:
확연 공적하여 홀로 고요한 곳에서
두두물물이 이에 쫓아 나투는
이 소식을 일러주나 어리석은 이가
무명의 잠에서 깨어나지 못해
밝게 보지 못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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圭峰:
無着이 云하되 旣爲衆生行施이면 云何於彼에 生嗔이리오
由不能無衆生想故니라 衆生이 相違時에 卽生疲乏이니
故로 顯示人無我法無我이시니 其第三苦는 此不用之라하다
論에 云하되 諸相者는 衆生相也요 非相者는 無我也이니라
陰中見我가 是衆生相이니 一切衆生者는 五陰法也요
非衆生者는 陰空故로 法無我也라하다
第九는 斷能證無體非因疑니라 論에 云하되
於證果中에 無道거늘 云何彼於果에 能作因斷之니라
文二는 初는 斷疑라
규봉:
무착이 이르되
“이미 중생을 위해서 베풀었으면
어찌하여 저에게 진심(嗔心)을 내리오?
중생이란 생각(想)이
능히 없지 않음으로 말미암은 연고이다.
중생이 서로 어길 때 곧 고달픔을 내니
그러므로 사람이 내가 없고
모든 것(法)이 나라는 것이 없음을 드러내 보이시니
第三의 고통은 여기에서는 쓰이지 않았다”고 했다.
論에 이르되
“모든 상(諸相)이란 衆生相이요,
상 아님(非相)이란 無我인 것이다.
색수상행식 가운데 내라는 생각이
이 중생상이니 일체 중생이란 五陰法이요.
중생 아님은 五陰이 본래 공하므로
일체(法)에 내가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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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疑斷)
( 九, 斷能證無體非因疑)
능히 깨달으면(증오) 體가 없어서 因
(근본 되는 원인:바탕)이 아니라는 의심을 끊은
(아예 근본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論에 이르되
“과를 증득하는 가운데는 길이 없거늘 어찌하여
저 果에 능히 因(근본원인)을 지으(찾나)리오
”하는 것을 끊어주는 것이다.
글에 두 가지니 (1)은 의심을 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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須菩提 如來
是眞語者 實語者 如語者 不誑語者 不異語者
수보리야!
여래는 참다운 말을 하는 이며, 실다운 말을 하는 이며,
같은 말을 하는 이며, 거짓말을 하지 않는 이며,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이 이니라.
淸峯:
여(如)라는 것은 중도의 이치와 일치하여
진실로 큰 열반을 증오했음이고,
거짓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허망하지 않음이요,
두 말을 하지 않는다 하는 것은
진리가 바뀌지 않음으로 시종 같은 말씀이요,
여래께서 하신 말씀(事)은
여래가 체득하신 진리는 일체 만법의 실재성품
(實相:理)인 것이며, 이 실상인 근본 성품이 진공인 것이다.
즉, 진리를
증오한 바를 토하시니 진실하여 처음과 나중이
다르지 않고 한결같은 말을 하는 이인 것이다.
바른 말은 진리를 일컫고, 실다운 말은 진실한 말이니,
진여는 실상을 말함이기 때문이다.
거짓 말을(허황된) 하지 않음은 혼란한 삿됨이 아니고,
다른 말을 설하지 않음은 진리는 항상 변함 없으므로
이랬다 저랬다 말씀하지 않으심인 것이다.
說誼:
諸法實相을 說也이니 說盡하시고 乃云하되 我所說法은
眞不僞며 實不虛며 上不違如理하고 下不誑衆生이라
佛佛이 皆然하여 初無異說하니라
설의:
모든 법의 실상을 설함이나 설하여 마치시고
이에 이르시길
“내가 설한 바 법은 진실하여 거짓이 아니며
실다워서 헛되지 않으며 위로는 틀림없는
이치를 어기지 않고 아래로는 중생을 속이지 않는 것이니라.
부처와 부처가 모두 그러해서 처음부터
다른 말씀이 없다” 하시니라.
청봉착어:
바른 말은 곧 진리이며
실다운 말은 진실만을 이름하고
실상은 말을 빌려 진여를 일러줌이며
다른 말을 하지 않음은 진리는 항상 변하지 않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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圭峰:
佛所有說은 皆如其事이니 今說證果를 何疑不然이리오
眞語者는 說佛大菩提法也이니 是眞智故이니라
實語者는 說小乘四諦로 諦是實義요 如語者는 說大乘法이니
大乘法은 有眞如이나 小乘은 無也니라
不異語者는 說三世授記等事는 更無參差이니
佛將此四語하여 不誑衆生이니 是故로 秦譯에서 加不誑語하니라
규봉:
부처님이 설하신 것은 모두 그 일과 같으니
(깨우치신 진리 그대로 설하심)
지금 증득한 과를 말씀하신 것을
어찌 그렇지 않다고 의심하리오.
참다운 말씀(眞語)이란
부처님께서 大菩提法을 설한 것이니
이것은 참다운 지혜인 까닭이다.
실다운 말씀(實語)이란
소승(小乘)의 사제(四諦)를 설한 것으로
이치(諦)인 이 실상의 뜻이요.
같은 말씀(如語)이란
大乘法을 설한 것이니
大乘法은 眞如
[대승불교의 이상 개념으로, 잠연 적정하여
활동이 없는 것이 아니라 연을 만나면 여여한
체가 생멸변화 하는 만유를 내는 것
(보살행:하화중생:이타행)으로 물이 연에 따라
파도를 일으키는 것과 같음]가 있으나
소승은 없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말이 다르지 않다(不異語)는 것은
三世의 授記 等의 일을 설한 것은
다시 어긋남이 없음이니,
부처님이 네 가지를 말씀하여
중생을 속이지 않으신 것이니
이러한 까닭으로
秦譯에서 ‘속이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
(不誑語)’을 추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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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祖:
眞語者는 說一切有情無情皆有佛性이요
實語者는 說衆生造惡業定受苦報요 如語者는
說衆生脩善法定受樂報요 不誑語者는 說般若波羅蜜法이
出生三世諸佛決定不虛요 不異語者는 如來所有言說이
初善中善後善이니 旨意微妙하여 一切天魔外道가
無有能超勝하고 及破壞佛語者也니라
육조:
진실한 말(眞語)이란 일체 有情 無情이
모두 불성이 있음을 설한 것이요,
실다운 말(實語)이란 중생이 악업을 지으면
결정코 괴로움의 과보를 받는다는 것을 설한 것이요,
같다는 말(如語)이란
중생이 바른 법을 닦으면 반드시 樂의 과보를 받는다고
설하신 것이요,
속이지 않는다는 말(不誑語)이란
반야바라밀법이 삼세제불을 출생하되
반드시 헛되지 않음을 설한 것이다.
말이 다르지 않다(不異語)는 것은
여래가 말로서 설하신 바가 처음도 바른 것이고
중간도 바른 것이며 나중도 바른 것이니,
깊은 뜻이 미묘하여 일체의 천마외도가
능히 초월할 수 없고
또한 부처님의 말씀을 파괴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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傅大士:
衆生與蘊界가 名別體非殊이니 了知心似幻이라도
迷情見有餘니라 眞言은 言不妄이고 實語는 語非虛이니
始終無變異어서 性相本來如니라
부대사:
중생과 더불어 오온계가 이름은 다르되
體는 다르지 않으니
마음이 幻과 같음을 요달하여 안다 할지라도
미혹한 마음의 소견이 남아 있느니라.
참된 말은 말이 망령되지 않고
실다운 말은 말이 헛되지 않음이니
시작과 끝이 변하여 달라짐이 없고,
법성(性)과 법상(相)이 본래 같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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冶父:
知恩者는 少하고 負恩者는 多로다
說誼:
諄諄之慈가 靡所不至이나 隨語生解者가 衆하고
承言會旨者鮮하니 承言會旨는 所以知恩이고
隨語生解는 所以負恩이니라.
야부:
은혜를 아는 이는 적고 은혜를 저버리는 이는 많도다.
설의:
다정하고 친절한 자비가 이르지 않는 곳이 없으나
말을 따라 알음알이를 내는 이는 많고,
말을 받들어 깊은 뜻을 아는 이는 드무니
말을 받아 깊은 뜻을 아는 것은 은혜를 아는 까닭이고,
말을 따라서 알음알이를 내는 것은
은혜를 저버리게 되는 까닭인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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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봉착어:
말에 굴림을 당해 말끝을 쫓는 이는 많고
말뜻을 깨달아 말을 굴리는 이는 적으니
부처님의 말뜻을 깨달으면 은혜를 갚음이고
말을 쫓아 알음알이를 내면
은혜를 저버리는 것이니라.
冶父:
兩箇五百이면 是一貫이요 阿爺元是丈夫漢이니
分明對面向渠言이나 (向은 一作報라) 爭奈好心無好報리오
眞語者 實語者여 呵呵呵喏喏喏이로다
說誼:
天下에 無二道요 聖人은 無兩心이니
如來眞實說은 只說這介法이라 琴上分明彈報知이나
一曲無生을 和者稀로다 邈然天地間에 唯師獨知恩하여
忍俊不禁笑呵呵하고 肯心自許云喏喏이로다
且喜瞿曇이 逢此老하리니 白雲千載에 一知音이라
連下三聲字細看하라 亦與忠老로 作知音이로다
야부:
오백근이 둘이면 일관이요 아비는 원래 장부니라
분명히 얼굴을 대해 그것을 말해줘도
좋은 마음에 좋은 報가 없음을 어찌 논하리오.
참된 말을 하고 실다운 말을 하는 이여! 하하하,
그래 그렇도다.
설의:
천하에는 진리가 둘이 없고, 성인은 두 마음이 없으니,
여래의 진실한 말씀은 다만 이 法(진리)을 설한 것이로다.
거문고를 퉁기어 분명히 알리나
한 곡조 無生曲에 화답하는 이가 드물도다.
아득한 천지간에 오직 스님(冶父)은 홀로 은혜를 알아
그 뛰어남에 참을래야 참지 못하여 ‘하하하’ 웃고,
기꺼운 마음이 스스로 허락하여 이르되
‘그래 그렇도다’라 하도다.
또한 瞿曇(고타마:석가세존)이
이 노인(冶父) 만남을 기뻐하리니
흰 구름이 뒤덮인 천년 사이에
곡을 아는 한 사람을 만났음이니라.
아래로 이은 세 소리의 글자를 자세히 보아라.
역시 충성스런 종(忠老)과 더불어
음을 아는 이를 내었도다.
---
청봉착어:
실상과 성인의 마음이 둘이 없고
여래의 설함은 깨우친 바를 말씀함이니라
오묘한 그 뜻을 아는 이 드무나
다행히 지음자(知音者)가 있어 법이 이어지도다.
圭峰:
二는 離執이라
규봉:
(2)는 집착을 여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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須菩提 如來所得法 此法 無實無虛
수보리야! 여래가 증득한 이 법은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는 것이니라.
淸峯:
실다움이 없다함은 말은 방편이요 도구이니
참 실상이 아닌 때문이요,
헛된 것이라 하면 단멸이요 거짓인 것이 되기 때문이니,
실상은 실체가 공하여 실과 허를 여읜, 있는 그대로인 것이다.
무실은 성품이 공적하여 가히 얻을 것이 없음이요,
무허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단멸의 무(無)가 아닌 것으로
따라서 진(眞)은 거짓이 아닌 위없는 보리요,
실은 헛됨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양변에 떨어질까 하여 무실무허라 하신 것이다.
여래가 체득한 법은
곧 일체 모든 것의 실상인 있는
그대로의 참(眞理)인 것이므로
일체상이 자체의 성품이 없는
그 공적함을 요달한 것이니
말에 끄달려 모든 만법에 집착해서
취할 실제의 대상이 있다고 한다면
진실 되지 못한 것이라
말과 법이 있다는 소견을 내어
모든 현상의 실제 성품이
본래 공함을 요달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子卽是母母是子 자즉시모모시자 이니
當知方物不塞圓 당지방물불색원 하고
方圓各有所有理 방원각유소유리 이니
月照萬像無自影 월조만상무자영 이니라
아들은 곧 어머니요 어머니는 아들이니
당연히 모난 것으로 둥근 구멍을 막지 못하고
모난 것은 모남으로 둥근 것은 둥글어야 맞으나
달이 우주를 비춰도 제 그림자 없음이니라.
說誼:
前明所說하시고 此明所得하시니
所說도 亦只是不二法이며 所得도 亦只是不二法이니
無實無虛는 是言不二니라
청봉착어:
증득한 것이 둘 아닌 것이요
설함 또한 둘 아닌 것이니
그러므로 무실무허라 하시나
실다운 형상이 없으며
아예 없는 단멸(斷滅)도 아니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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圭峰:
無實者는 如其言說이 性非有故요 無虛者는
不如言說하고 自性有故이니라
규봉:
실다움이 없다는 것(無實)은
그 말로써 설한 것이 自性이 있지 않은 것과 같기 때문이요,
헛됨이 없다는 것(無虛)은 그 설한 것이 말만인 것과(헛된 말)
같지 않고 자성이(말의 뜻에) 있는 까닭이다.
---
六祖:
無實者는 以法體空寂하여 無相可得이라 然이나
中有恒沙性德하여 用之不匱이니 故言無虛니라
欲言其實이면 無相可得이요 欲言其虛이면 用而無間이니라
是故로 不得言有이며 不得言無이니 有而不有이고 無而不無이니라
言辭不及者는 其唯眞智乎이니 若不離相修行하면 無由臻此也니라
육조:
실다움이 없다한 것(無實)은 法의 體가 비고
고요해서 가히 얻을 相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는 항하사 같은 性德이 있어서
그것을 써도 다함이 없는 까닭에
헛됨이 없다(無虛)고 말한 것이다.
그 實을 말하고자 하면 가히 얻을 만한 相이 없고,
그 虛를 말하고자 하면 써도 끊임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有라고 말하지 못하며 無라고도 말하지 못하니,
있어도 있음이 아니고 없어도 없음이 아닌 것이다.
말로써 미치지 못하는 것은 오직 참다운 지혜이니
만약 상을 여의고 수행하지 않으면
여기에 이를 수가 없는 것이다.
---
傅大士:
證空便爲實이요 執我乃成虛로다 非空亦非有이니
誰有復誰無리오 對病應施藥이요 無病藥還袪니라
須觀二空理하며 穎脫入無餘리라.
부대사:
空을 증오하니 문득 실이요
나를 집착하면 이에 허망함을 이루도다.
空도 아니요 또한 有도 아니니
무엇이 있고 다시 무엇이 없으리오
병을 만나면 마땅히 약을 주고
병이 없으면 약 또한 버리니라
모름지기 二空의 이치를 관하면
지혜가 드러나(穎脫) 남김 없음에 들어가리라.
---
冶父:
水中鹹味요 色裏膠淸이로다
說誼:
是有인가 是無인가 是實인가 是虛인가
야부:
물 속의 짠맛이요,
물질 속의 깨끗한 아교(보이지 않음)로다.
설의: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실다운 것인가? 헛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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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봉착어:
공이 실이라니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있어서 실다운가? 없어서 헛됨인가?
있어도 있음이 없고 없어도 없음이 없으니
바닷물 속의 짠맛 같도다.
---
冶父:
硬似鐵軟如酥하여 看時有覓還無로다
雖然步步常相守이나 要且無人識得渠로다 咦
說誼:
且强且柔하며 易見難曉로다 雖一切處에 披露分明이나
乃一切處에 摸扌索 不着이로다 更知道하리라 十聖三賢도
不知處하니 有時에 閑掛寺門前이로다
야부:
굳기는 철과 같고 부드럽기는 연유와 같아
볼 때는 있는 듯하나 찾으면 도리어 없도다.
비록 그렇게 걸음걸음에 항상 서로 지키나
요컨대 또한 그를 아는 사람이 없도다. 咦!
설의:
또한 강하기도 하고 부드럽기도 하며
보기는 쉽되 알기는 어렵도다.
비록 일체처에 헤쳐 드러내어 분명하나,
에 일체처에서 더듬어도
손댈 데(着)가 없도다.
다시 이를 줄 알지니라.
十聖三賢도 그 있는 곳을 알지 못하나
어느 땐 한가롭게 절 문 앞에 걸려 있도다.
---
청봉착어:
두두물물이 이 한 물건의 나툼이라
이를 찾으려면 보이지 않으니
밥 먹고 잠자는 때 늘 함께 해도
그를 알지 못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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圭峰:
第十은
斷如徧有得無得疑니라
論에 云하되 若聖人이 以無爲眞如法으로 得名이면
彼眞如가 一切時處에 恒有인데 何故로 有得者하고
有不得者인가하다 斷之니라 文二니 一은 擧喩斷疑니라
규봉:
10.(疑斷)
如(진여)가 두루한데 얻음이 있고(有得) 얻지 못함(無得)이 있는가
하는 의심을 끊은 것이다.
論에 이르되
“만약 성인이 無爲의 진여법으로써 이름을 얻었다면
저 眞如가 일체의 때와 곳에 항상 있는데 어찌하여
얻는 자도 있고 얻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하였다, 하는 것을
그 의심을 끊어주신 것이다.
글에 두 가지가 있으니
(1)은 비유를 들어서 의심을 끊어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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須菩提
若菩薩 心住於法 而行布施 如人入暗卽無所見
若菩薩 心不住法 而行布施 如人有目 日光明照 見種種色.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마음에 모든 것(法)에 집착하여 보시를 행하면,
사람이 어두운 곳에 들어가면 보이는 것이 없는 것과 같고,
만약 보살이 마음이 모든 것에 집착하지 않고 보시를 행하면
사람이 눈이 있고 햇빛도 밝게 비치면
온갖 물체를 볼 수 있는 것과 같으니라.
淸峯:
미혹하여 청정하지 못하면 본래면목을 볼 수 없음이요,
집착함이 없으면 빈 가운데 일체를 구족함을
요달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밝은 지혜인 것이다.
차별적인 경계에 끄달리면 어둡게(無明)되고,
공하되 둘 아닌 이치에 통달하면 밝고 분명하게 되는 것이다.
일광(日光)은 반야의 오묘한 지혜를 비유한 것이다.
안주하여 집착할 대상이 없어 본질이 공적함을 통달하면
일체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고 싶어하게 되나
집착하지 않으므로 상에 끄달리지 않아
대가를 바램이 없게 되는 것이다.
暗者遮明是暗 암자차명시암 이고
明者却暗是明 명자각암시명 이니
明頭來明頭打 명두래명두타 하고
暗頭來暗頭打 암두래암두타 하라
어둠은 밝음을 가리어 어둡고
밝음은 어둠이 물러나면 밝음이나
밝음이 오면 밝음으로 치고
어둠이 오면 어둠으로 치노라
---
圭峰:
論에 云하되 無智住法하면 心不淸淨故로 不得이요
有智不住法에 心淸淨故로 得이니 有目者는 如得對治法이요
日光者는 如 所治闇盡하면 能治現前이니라 卽有目及日光이면
合見空中諸色이니 空喩眞如之性이요 色喩性上萬德이라하다
규봉:
論에 이르기를 “지혜가 없이 모든 것(法)에 집착하면
마음이 청정하지 못하게 되므로 얻지(證得) 못하고,
지혜가 있어 법에 집착하지 않으면 마음이 청정하게 되므로
얻게 되는 것(證得)이니, 눈이 있는 자는
상대하여 다스릴(對治) 法을 얻음과 같고,
햇빛(日光)이란 다스릴 것인 어둠
(미혹:상대적으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하면
능히 다스리는 것(智慧)이 앞에 나타나는 것과 같다.
이미 눈과 햇빛이 있다면 마땅히 빈 가운데의
모든 물체들을 볼 것이니,
空은 眞如의 性品에 비유한 것이요,
물체를 성품의 만가지(온갖) 덕(慧)에 비유한 것이라” 했다.
---
六祖:
於一切法에 心有住着하면 則不了三輪體空이
如盲處暗無所曉了니라 華嚴經에 云하되
聲聞은 在如來會中에서 聞法이 如盲如聾은 爲住法相故이니
若菩薩이 常行般若派羅蜜多無着無相行하면
如人有目處於皎日之中이어서 何所不見也리오하다.
육조:
모든 것(一切法)에 마음이 머물어 집착함이 있으면
곧 三輪의 體
(주는 자, 받는 자, 물건)가 空함을 밝게 깨닫지 못하는 것이
눈먼 자가 어두운 곳에 처하여 밝게 아는 것이 없는 것과 같다.
화엄경에 이르기를 “聲聞은 여래가 계신 모임 가운데서 법을 들으나
맹인과 같고 귀머거리와 같은 것은 法相에 집착하기 때문이니,
만약 보살이 항상 반야바라밀다의 집착함이 없고
상이 없는 행을 하면
사람이 눈이 있으면서 밝은 햇빛 속에 있음과 같아서
보지 못할 것이 무엇이리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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傅大士:
不拘寂靜地하면 縱橫觸處通이나 若心依相住하면
有作枉施工이니라 離法如行慧하면
淸光一鏡中하여 靈源常獨照하며 坦蕩總含容하리라
부대사:
고요하고 조용한 곳에 구애되지 않으면
종횡으로 만나는 곳마다 통하거니와
만약 마음이 相에 의지해 머무르면(집착)
조작함이 있어서 그릇된 공만(수고) 들이게 되니라.
모든 것(法)을 여의고 지혜로서 행할 것 같으면
맑은 빛이 한 거울 가운데 있어
신령스런 근원이 항상 홀로 비추며
넓고 너그러워 모든 것을 포용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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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봉착어:
베푸는 자, 받는 자,
그 베푸는 것인 육진경계에 집착하면
실상이 공함을 요달하지 못하게 되어
법문을 들어도 눈먼 자가 사물을 분별하지 못함과 같고,
집착을 여의고 일체를 본다면
눈이 있고 밝은 태양 빛이 있어 만물을 봄에
걸림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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圭峰:
二는 讚經功德이라 於中에 有二하니 一은 總標라
규봉:
(2)는 經의 공덕을 찬탄한 곳이다.
그 중에 두 가지니 ①은 모두 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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須菩提 當來之世 若有善男子善女人
能於此經 受持讀誦 卽爲如來 以佛智慧
悉知是人 悉見是人 皆得成就無量無邊功德
수보리야! 오는 세상에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능히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면,
곧 여래가 부처의 지혜로
이 사람을 다 알며 이 사람을 다 보는 것이니,
한량없고 끝없는 공덕을 모두 성취하게 되리라.
淸峯:
여래가 부처(法身)의 지혜로 본다는 것은 부처가 나요,
내가(如來) 부처이므로 보는 내가 지혜로써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래지세는 세존입멸 후 5백세(2500년)뒤로
말법 오탁지세를 말하는 것이다.
수행인이 이 금강경의 깊은 뜻에 따라 반야바라밀을
수행하여 부처의 지견을 얻으면 무상정등정각을
이룰 것이니 이보다 더하고 이에 비할 바 공덕이
있을 것이 없음을 설해 주신 것이다.
月照千江月千個 월조천강월천개 이나
千個更在一個中 천개경재일개중 하고
一建一切一生多 일건일체일생다 이니
一切物物皆含一 일체물물개함일 이네
달 하나 천강 위에 비춰 천개의 달이나
그 모두를 하나가 거두고 잡고 있어
하나가 모두를 건립하고 일체는 하나에서 생기니
물건마다 모두가 하나를 머금고 있네.
說誼:
前明無住所以하시고 此喩明無住하시니 法本無實이니
不應住於有이며 法本無虛이니 不應住於無니라
住於有則違於空寂之本體요 住於無則違彼靈明之本用이니
卽與本體本用으로 相違則性上萬德이 無由顯發이리니
如人入暗卽無所見이라 是可謂盲者가 不知光所在하여
低頭冷坐暗思量이니라 不住有則契乎本體하고
不住無則契乎本用이니 旣與本體本用으로
相契則性上萬德이 當處現前하리라
如人有目當陽見色이니라
是可謂決散浮雲孤月上하면 大千沙界一時明이로다
설의:
앞에서는 집착함이 없어야 하는 까닭을 밝히시고
여기서는 비유로 집착함이 없어야 함을 밝히시니
법은 본래 실다움이 없으니 마땅히 있음에도
집착(住)하지 말 것이며,
법은 본래 헛됨이 없으니
마땅히 없음에도 머물지(집착) 말 것이니라.
있음에 머무는 즉 저 비고
고요한 본래의 몸(本體)을 어기게 되고,
없음에 집착(住)하는 즉
저 밝고 신령(靈明)한 본래의 작용(本用)을
어기는 것이니 곧 本體本用과 더불어 서로 어긋나는
즉 성품상의 萬德이 드러날 수 없는 까닭이니,
어떤 사람이 어둠에 들어가면
곧 보이는 것이 없는 것과 같음이라.
이것은 가히 눈먼 자가 빛 있는 곳을 알지 못하여
머리를 떨구고 쓸쓸히 앉아서 암울한 생각을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느니라.
있음을 집착하지 않으면 本體에 계합하고
없음에 집착하지 않으면 본용에 계합하니,
곧 本體, 本用과 더불어 서로 계합한 즉
성품상의 만덕이 당장 앞에 드러날 것이니라.
이는 마치 사람이 눈이 있어서 햇빛에서
물체를 보는 것과 같음이니라.
이것을 일러 가히 뜬구름을
모두 흩어버리면 홀로 둥근 달이 떠올라
모래 수 같은 대천세계가
일시에 밝아지게 되는 것이라 하는 것이로다.
청봉착어:
몸은(體:定) 곧 공하니 있음에 집착말고
작용(慧:用)은 곧 묘용이 있으니 없음에 집착하지 않아야
정과 혜를 어기지 않나니
정혜를 계합한 즉 만덕이 현전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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圭峰:
無着이 云하되 讀誦者는 此說受持因故로 爲欲受故로 讀이요
爲欲持故로 誦이라하다 論에 云하되 受持修行은
依總持法故ㅊ讀誦修行은 依聞慧廣故라하다
是則從他聞法하고 內自思惟하는 爲得修行智也니라
故로 偈에 云하되 脩從他及內라하다.
규봉:
무착이 이르되 “讀誦이란 받아지니
(受持)는 因을 말하는 것이므로
받고자하는 까닭이므로 읽는 것이(讀)요,
가지고자 하므로 외우게 되는 것(誦)이라” 했다.
論에 이르기를
“받아 지니는 수행은 모두를 가지는 법을 의지하는 까닭이고
읽고 외우는 수행은 들음으로 지혜가 넓어지는 까닭이라” 했다.
이것은 곧 타로(밖)부터 법을 듣고 안으로는 스스로 사유하는
수행으로 지혜를 얻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게에 이르기를
“수행이란 밖으로(他)부터 안에(自身) 이르게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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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祖:
當來之世는 如來滅後後五百歲濁惡之時니
邪法이 競起하여 正法이 難行이라 於此時中에
若有善男子善女人이 得遇此經하여 從師稟授하고
讀誦在心하여 專精不忘하며 依義修行하여 悟入佛之知見하면
則能成就 阿耨多羅三藐三菩提하리니
以是로 三世諸佛이 無不知之니라
육조:
장차 오는 세상(當來之世)은
여래가 입멸하신 뒤 후 오백세의 혼탁하고 악한 때이니
삿된 법이 다투어 일어나서 正法이 행하기 어려운 때이다.
이런 때에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을 만남을 얻어서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독송하여
마음에 두고(계합하여) 오로지 정진하며 잊지 않고
그 뜻에 의하여 수행하여 부처님의 지견을 깨달아 들어가면
곧 능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리니,
이런 까닭으로
삼세제불이 알지 못함이 없다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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冶父:
因地而倒는 因地而起이나 地向爾道什麽인가
說誼:
地不令人倒하며 亦不令人起하니 起倒由人이고
不關於地니라 法不令人悟하며 亦不令人迷하니 迷悟在人이고
不關於法이니라 法不令人取하며 亦不令人舍이니
取舍由人이라 不在於法이니라
야부:
땅으로 인해 넘어진 사람은 땅을 인해서 일어나나,
땅이 너를 향해 무엇이라고 말하던가?
설의:
땅은 사람이 넘어지게도 하지 않으며
또한 사람을 일어나게도 하지 않으니,
일어나고 넘어지는 것은 사람에 연유하고
땅에 관계되지 않느니라.
법이 사람을 깨닫게(悟) 하지 않으며
또한 사람을 미혹(迷)하게도 하지 않으니
迷와 悟는 사람에게 있고
법에 관계되지 않느니라,
법은 사람을 집착하게 하지 않으며
또한 사람으로 하여금 버리게도 하지 않으니
취하고 버리는 것은 사람으로 인한 까닭이지
법에 있는 것이 아니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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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봉착어:
독송의 목적은 受持이니
받아 읽고 외워 가지는 것이로다
밖으로부터 안으로 이르게 됨이 수행이나
미혹도 깨달음도 스스로에 있도다.
그러므로 땅에 넘어진 자는
땅을 짚고 일어나야 한다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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冶父:
世間萬事가 不如常하며 (不如常은 他本에 作總如常이라)
又不驚人又久長이로다 如常은 恰似秋風至여서
無意涼人人自涼하도다
說誼:
世間萬事가 不過常與不常이니 言其常也하면 頂天立地하고
飢飡渴飮이니라 又不驚人하나 亦乃久長이로다 言其不常也하면
身上出水하고 身下出火로다 此則驚動人心하며 又不久長하노라
雖云奇特하나 就實而觀하면 不如常也로다 伊麽則觸目皆道로다
是平常이니 平常이 何以使人驚이리오 不以有相驚於人하며
不以無相驚於人이나 人於其間에 自生障碍하여 或以爲有相하여
着於有而落於常見之坑하며 或以爲無相하여
着於無而落於斷見之坑하나니 正似秋風은 無心하나
而人이 自涼하도다 迷悟도 亦然하니라
야부:
세상사 모든 일 한결같지 않으며
또한 사람을 놀라게 하지 않으며 또한 오래 가도다.
한결같다 함은 흡사 가을바람이 이르름과 같아서
사람을 서늘케 할 뜻이 없으나
사람들이 스스로 서늘해 하도다
설의:
세간 만사가 항상 함과 항상 하지 못함에 지나지 않으니,
그 항상 함을 말하면 이마는 하늘을 이고 땅에 서 있으며
주리면 먹고 목마르면 마시는 것이니라.
또 사람을 놀라게 하지 않으나
(자체의 성품이 없음-놀라는 것은 사람 스스로)
또한 이에 오래감(久長:항상한 것이 아니나 나투고
작용함이 끊임없음)이로다.
그 不常을 말하면 몸(바탕)위에서 물이 나오고
몸 밑에서 불이 나옴이니라
.(본체로부터 작용하여 일체를 나투나
나툰 것은 항상하지 않음)
이것이 사람의 마음을 놀라 움직이게 하며
또한 오래가지 않기도 하노라
(차별상인 用).
비록 기특하다 이를만 하나 실상에 나아가
관하면 항상 여여하지 못하도다.
이러한즉 눈에 닿는 것마다 모두가 道로다.
이것이 항상 평등함이니 항상 평등한 것이
어찌해서 사람을 놀라게 하리오?
相이 있어서 사람을 놀라게도 하지 않으며
상이 없어서 사람을 놀라게도 하지 않으나,
사람이 그 가운데 스스로 장애를 내어서
혹 相이 있다고 여겨 있음에 집착해서
常見(있다는 소견)의 구덩이에 떨어지며
혹은 상이 없다고 여겨 無에 집착해서
아예 없다는 소견(斷見:無)의 구덩이에 떨어지나니,
바로 가을 바람은 무심하나 사람이 스스로
서늘해 하는 것과 같도다.
어리석음(迷)과 깨달음(悟)도 역시 그러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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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봉착어
모든 것은 항상 함과 덧없음에 지나지 않아
목마르면 마시고 주리면 먹는 일 항상 하고
그러한 일 한결 같지 않으니 덧없음이라
어찌 놀랠 일이며 어찌 놀랍지 않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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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鏡:
空生이 聞說是經하고 解義趣而悲流雨淚하며 仙人은
垂慈弘忍笑하시고 雪刃而謾斬虛空이로다 如是印可其詞하시니
能離一切諸相이로다 未審이라 感悟處에 有何奇特인가
豁開慧眼明如日이고 返照微塵世界空이로다
說誼:
空生이 離相之言에 妙契於理하니 佛稱如是하시고 印可其詞로다
종경:
수보리(空生)가 이 경 설함을 듣고 그 뜻을 알아서
비 오듯 눈물을 슬프게 흘렸으며,
仙人(부처님)은 자비를 드리워 크게 웃음을 참으시며
雪刃(항상 하지 않는 눈 칼날:베는 것도 벨 수도 없음)으로
부질없이 허공을 베었도다.
이와 같이 그 말을 인가하시니
능히 일체 모든 상을 여읨이로다.
알지 못하겠도다
깨달은 바에 무슨 기특함이 있는가.
넓게 혜안을 여니 밝기가 해와 같고
돌이켜 비춰보니 미진 세계가 空하도다.
설의
수보리가 相을 여읜다는 말에 묘한 이치에 계합하니
부처님이 ‘그렇다’라고 칭찬하시고
그 말을 印可하셨도다.
宗鏡:
善吉親聞하여 徹見源하여 悲欣交集하여 讚慈尊하도다
心空法朗超眞際하니 堪報從前不報恩이로다
종경:
수보리(善吉)가 친히 듣고 근원을 사무쳐 보게 되어
슬픔과 기쁨이 뒤섞여 慈尊(석가세존)을 찬탄 하도다.
마음이 공하고 法이 밝아 眞際를 뛰어나니
지금까지 갚지 못한 은혜를 가히 갚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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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봉착어:
수보리는 오묘한 말씀에 계합하여 기뻐 울었고
부처님은 설해도 설한 바 없었도다
집착을 여의고 공함을 요달해 혜안이 열렸음에
아뢰고 인가함이 죽착합착(竹着合着)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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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단수득보신유취의[斷受得報身有取疑,
보신(報身)을 얻는 것도 일종의 취함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끊음] :
무위복승분제십일(無爲福勝分第十一),
존중정교분제십이(尊重正敎分第十二),
여법수지분제십삼(如法受持分第十三),
이상적멸분제십사(離相寂滅分第十四,
8)
단지설미탈고과의[斷持說未脫苦果疑,
경전을 지니고 설할지라도
괴로운 과보는 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끊음] :
무위복승분제십일(無爲福勝分第十一),
존중정교분제십이(尊重正敎分第十二),
여법수지분제십삼(如法受持分第十三),
이상적멸분제십사(離相寂滅分第十四,
9)
단능증무체비인의[斷能證無體非因疑,
증득할 수 있는 것은 실체가 없으므로
깨달음의 원인이 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끊음] :
무위복승분제십일(無爲福勝分第十一),
존중정교분제십이(尊重正敎分第十二),
여법주지분제십삼(如法受持分第十三),
이상적멸분제십사(離相寂滅分第十四
10)
단여변유득무득의[斷如遍有得無得疑,
진여(眞如)는 두루하여 있는데
어찌하여 얻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가?
라는 의심을 끊음] :
지경공덕분제십오(持經功德分第十五),
능정업장분제십육(能淨業障分第十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