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경덕 시집 <사물의 입>존재적 시적 발견을 통한 삶의 성찰 / 임윤식 / 오늘의 한국 9월호
200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마경덕 시인이 신발론,글러브 중독자에 이어 세 번째 시집을 상재했다. 마경덕 시인은 강남문화원, 롯데 문화센터, AK문화아카데미 등에서 시창작 강사로 활동 중이
며, 네이버 블로그 <내 영혼의 깊은 곳>을 운영하면서 중견 및 장래가 촉망되는 신진시인들의 좋은
시를 발굴하여 블로그에 소개하거나 사물에 접근한사물 시와 예리한 시평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여성시인이다.
둥근 접시에
선홍색 꽃잎이 활짝 피었다
되새김질로
등에 꽃을 심고 쓰러진소여,
피처럼 붉은 저 꽃은
죽어야 피는 꽃이었구나?
- 꽃등심 전문
시집을 펴면 제일 먼저 꽃등심이라는 시가 눈에 들어온다. "피처럼 붉은 저 꽃은 죽어야 피는 꽃"이라니…누구에게나 평범한 꽃등심이라는 객관적 대상을 '죽어야 피는 꽃으로 은유화시킨 시인의 시적 상상력이 놀랍다. 소는 죽어서야 그 '쓸모가 가장 극대화되는 동물이기도 하다. 말없이 우직하게 살다가 결국 남을 위해 제물이 되는 소의 일생.
그 거룩한 침묵과 희생은 에우리피데스(Euripides, BC484-406)의 말처럼 '참된 지혜에서 우러나오는 최상의 응답인지도 모른다. 시인은 또 '죽어야 핀다' 는 역설적 대비를 통해 깊은 존재론적 사유를 이끌어 낸다.
고봉준 평론가는 시집해설에서 "마경덕의 시는 동물(성)과 식물(성)이라는 극단적인 이미지의 충돌을 통해 시적인 긴장을 만든다. 동물과 식물 이미지가 전부는 아니다. 그녀는 사물에 대한 관찰을 통해 대상에서 새롭고 낯선 이미지를 찾아내고, 그렇게 발견된 이미지를 사물에 대한 상식적인 이미지와 충돌시킴으로써 시를 생산한다. 동물성과 식물성, 즉 동물에서 식물성을, 식물에서 동물성을 이끌어내는 것은 이러한 충돌의 대표적인 경우이다. 짐작하듯이 '꽃등심'과 '꽃의 관계는 일종의 말장난(pun)이라고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시에서 그것의 효과는 말장난보다는 그것이 동물성과 식물성이라는 이질적인 관계를 횡단한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둥근 접시에/선홍색 꽃잎이 활짝 피었다"라는 진술에 언어유희가 개입되지 않은 것은아니지만, 그것은 언어유희 이전에 시각적인 관찰과 이미지에 의해 견인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심지어 “죽어야 피는 꽃이라는 마지막 진술은 삶(생명)과 죽음이라는 또 다른 극단적 가치를 횡단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낸다"고 평한다.
접시꽃 담벼락 아래 튀밥장수 영감 지루한 하품이 손풍로를 돌린다. 강냉이 마른떡국 콩, 손때 절은 깡통 일렬로 줄 맞추고 압력계기판 눈금이 달아오르면 담장 위 키다리 접시꽃이 아슬하다. 고소한 냄새에 목을 뽑은 접시꽃, 한 입만, 한 입만, 빈 접시를 내밀고
뻥!
튀밥이 날고
쨍그랑!
접시 깨지고
얄팍한 소갈머리에 뭐 담을 게 있어. 쯧쯧, 혀를 차는 영감, 평생 뻥만 치다 늙은 장돌뱅이 영감. 속 깊은 자루에 튀밥을 담는 동안 귀가 먹먹한 접시꽃, 재빨리 깨진 접시를 주워 모은다. 층층 다시 접시가 쌓이고 저 튀밥 언제 한 입 먹어보나, 쩍 입을 벌린 접시꽃, 뜨거운 햇살이 뱅글뱅글 풍로에 감기고, 담장 위 접시꽃, 얼른 새 접시를 꺼낸다.
- 접시꽃 핀다 전문
"사물'을 그 자체로 초점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맥락 속에서 발견하는 것, 또는 맥락 속에 위치시킴으로써 재발견하는 시적 시선은 마경덕의 시 어디에서든 쉽게 발견되는 특징적인 면모이다. 이 시에서의 '사물'인 '접시꽃 역시 담벼락 아래 튀밥장수 영감'이라는 이야기 요소가 강한 맥락을 배경으로 등장한
다. 이 때문에 '접시꽃'은 튀밥장수의 '접시'와 중첩되면서 새로운 시적 의미를 부여받는다.
오탁번 시인(전 한국시인협회장, 고려대 명예교수)은 전에 마경덕 시인의 <연장통이라는 시를 보고 "이런 진짜 시를 우연히 발견하고 읽을 때면 하루 종일 기분이 무지 좋다. 시를 쓴 시인과 일면식이 없을 경우에는 그 기쁨은 곱절이 된다. 눈물겹게 아름다운 작품이다."라고 평한 적이 있다. 필자 역시 위 시를 읽고 지금 기분이 무지 좋다.
돌멩이를 던지는 순간
둥근 입 하나 떠올랐다
파문으로 드러난 물의 입,
잔잔한 호수에 무엇이든 통째로 삼키는 거대한 식도(食道)가 있다
물밑에 숨은 캄캄한 물의 위장
찰나에 수면이 닫히고
가라앉은 것들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물가에서 몸부림치던 울음을 지우고 태연한 호수
계곡이며 개울을 핥으며 달리다가
폭포에서 찢어진 입술을 흔적 없이 봉합하고
물은 이곳에서 표정을 완성했다
물속에 감춰진 투명한 찰과상들, 알고 보면 물은 근육질이다
무조건 주변을 끌어안는
물의 체질
그 이중성으로 부들과 갈대가 번식하고 몇 사람은 사라졌다
물의 얼굴이 햇살에 반짝인다
가끔 허우적거림으로 깊이를 일러주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잔잔한 물의 표정을 믿고 있다
- 물의 입 전문
마경덕 시인은 시적대상을 관념적으로 서술하거나 논리적으로 주장하지 않고 사물에 투영시켜 감각적으로 형상화시키는데도 탁월하다. "돌멩이', '계곡', '폭포 등 객관적상관물들을 통해 시적 진실을 찾아내면서 동원된 여러 이미지들을 상호 관계성에 따라 아름답게 정렬시킨다. 시인은 또 '물'이라는 이미
지를 통해 가끔 허우적거림으로 깊이를 일러주지만/사람들은 여전히 잔잔한 물의 표정을 믿고 있다'고 여유로운 관조적 깨달음을 읊는다.
최연수 시인은 "마경덕 시인의 시들은 신선한 감각으로 무장되어 있다. 그 감각이 불러들인 낯선 상상은 나태와 욕망에 젖은 일상을 자극해 새로움으로 변모시킨다. 사물에 대한 투시를 통해 진지하게 열어가는 사유는 대상의 본질에 대한 의미를 되새기며 현재를 성찰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또한 바람직한 미래를 숙고하게 만든다. 중력이 제거되면서 현실적인 의미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사물들의 입을 통해, 시인은 시적대상과 인간과의 경계를 허문다. 단절이 아닌 공존의 방식을 택하고 있는 대상들은 무겁거나 가볍지 않다. 적당히 힘을 빼고 있는 그들
이 저마다의 부족함을 극복하면서 위트와 은유로 날리는 펀치는 통쾌하다. 비루함마저 넉넉함으로 돌려놓는다"고 강조한다.
노점상 여자가 와르르 얼음포대를 쏟는다
갈치 고등어 상자에 수북한 얼음의 각이 날카롭다
아가미가 싱싱한 얼음들, 하지만 파장까지 버틸 수 있을까
사라지는 얼음의 몸, 한낮의 열기에 조금식 각이 뭉툭해진다
질척해진 물의 눈동자들
길바닥으로 쏟아지는땡볕에 고등어 눈동자도 함께 풀린다
얼음은 얼음끼리 뭉쳐야 사는 법
얼음공장에서 냉기로 꽁꽁 다진 물의 결심이 풀리는 시간,
한 몸으로 들러 붙자는 약속마저 몽롱하다
서서히 조직이 와해하고 체념이 늘어난다
핏물처럼 고이는 물의 시체들
달려드는 파리 떼에
모기향이 향불처럼 타오르고 노점상은 파리채를 휘두른다
떨이로 남은 고등어, 갈치 곁에 누워버린
비리고 탁한 물
이곳에서 살아나간 얼음은 아직 없었다
노점상은 죽은 생선에 자꾸 죽은 물을 끼얹는다
-얼음의 죽음 전문
이 시를 읽는 순간 어느 섬 선착장 노점상 전경이 파노라마처럼 필자의 뇌리를스쳐간다. 랭보의 시 <저녁기도> 구절처럼 말이다. 현실세계의 흐름 속에 숨겨진 의미의 풍경화' 라고나 할까.
이승하 시인(중앙대 교수)은 그의 시창작 지침서에서 "국내 시인 가운데 사물 시를 잘 쓴 시인으로 오세영과 임영조를 꼽을수 있다. 오세영 시인은 연작시 그릇을 통해 존재의 깊이와 넓이를 끝까지 들어간 시인이다. 생명체 탄생의 비밀에서부터 우주만물의 순환구조까지 탐색한 연작시라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차원의 명제를 다루고 있어 어려울 법 하지만 그릇이라는 우리가 매일 보는 사물을 제재로 삼았기에 독자는 비교적 쉽게 그의 시에 접근할 수 있다"고 쓴 바 있다.
필자가 보기에는 마경덕 시인의 시도 비슷한 면이 적지 않다. '얼음' 이라는 평범한 피사체를 통해 시 행간마다 우주변화의 철학을 숨기고, 만물생로병사의 진리를 보일 듯 말듯 풀어낸다. 우리가 늘 보는 친숙한 사물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묘사하고 있어 조금도 부담감을 느끼지 않는다. 죽은 생선에 자꾸 물을 끼얹는 노점상을 통해 역설적 신선함도 느껴진다.
김경민 시인(한국시문화회관 대표)은 "마경덕 시인의 사물들은 진실이 들여다보이는 거울이며 광학렌즈이며 프리즘이다.
영원의 문양과 소멸하지 않는 불사의 흉장을 시인은 아주 작고 사소하고 보잘 것 없는 것들에서 찾아낸다. 육체를 지닌 인간 개개인은 숨 쉬는 피조물이다. 시간이 지나가는 물길로서의 사물의 자취에는 순간을 넘어선 불멸의 표식이 숨겨져 있다. 시인은 이 시집 속에서 자연과 사물과 몸이라는 서로 상처 입고 소멸하는 피조물과의 대화를 통해 순간 속의 영원이란 섭리를 어루만지고 있는 것이다"라고 풀이한다.
마당에 깔린 그늘이 한 자루다
마루 밑에 웅크린 어둠은 몇 가마니의 무게로 늙었
다
먼지 낀 시간위에 됫박으로 씨를 뿌린 잡초들
이곳에서 적막은 거름으로 쓰인다
뒷목이 서늘한 추녀 끝
그늘에 묶인 씨종자들 서로의 머리채를 붙잡고
단단한 고요의 매듭에 피가 마른다
겨울의 발톱이 빠지고 뒤곁에 잔풀이 돋아도
사람의 흔적은 폐허로 남았다
눈이 침침한 대추나무
절구통 밑으로 굴러간 묵은 대추 몇 알 더듬는 봄날
장대를 휘두르며 빈집을 다녀간
바람의 성대만 늙지 않았다
-빈집 전문
필자는 섬 여행을 자주하는 편이다. 너무 친숙하고 평범한 것들에 대한 지루함과 반감이랄까? 나의 삶과 문학의 낯설게 하기'를 위한 작은 실천이기도 하다. 섬에는 평소 볼 수 없었던 낮선 풍경들이 적지 않다. 섬에서 쉽게 눈에 띄는 「빈집도 그중의 하나이다. 젊은 사람들이 자꾸 육지로 나가다 보니 섬에는
폐가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나이 든 할머니, 할아버지와 빈집들만 섬을 지킨다. 섬 여행에서 빈 집을 보면 필자는 마경덕 시인의 첫 시집 신발에 실렸던 <폐가>라는 작품이 종종 생각난다 "바람 한점에 /픽, 바지랑대 쓰러지고/놀란 집이 퍼뜩/한쪽 발을 쳐든다"라는 섬세하고 감각적인 시구가 기억에 남는다.
시의 요체는 은유, 상징, 역설과 이의 함축이겠지만, 감각적표현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요소 중 하나이다. 시를 '언어로 된 그림'이라고 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림은 추상화처럼 은유적이고 상징적일 수도 있지만 풍경화처럼 아름답고 감각적이어야 보는 사람이 좋아한다. 마 시인의 시를 볼 때마다 늘 느끼는 건 표현이 참으로 섬세하고 아름답다는 점이다.
「폐가」에서 놀란 집이 퍼뜩한쪽 발을 쳐든다'도 그렇고, 위시 「빈집의 마당에 깔린 그늘이 한 자루다' 라든가, 이곳에서 적막은 거름으로 쓰인다'. 절구통 밑으로 굴러간 묵은 대추 몇 알 더듬는 봄날 등이 그렇다. 빈집의 낯설고 특수한 풍경의 전경화'를 통해 새로운 눈으로 폐가를 그리는 시인의 시적 붓 터치가 놀랍다.
글 임윤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