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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점정리(重點整理) b. 진성여왕의 실정과 국고결핍. c. 군웅 할거와 농민의 봉기 |
가. 후 고구려의 성쇠(盛衰)
(1) 건국 : 궁예(弓裔)가 901년(新羅 孝恭王 5년)에 송악(松嶽 開城)을 도읍으로 하고 국호를 후 고구려라 하여 나라를 세웠다.
(2) 변천(變遷)
국 호 | 연 호 | 년 수 | 도 읍 지 명 | 년도(서기) |
후 고구려 | 3년 | 송악(松嶽) | 901 | |
마진(摩震) | 무태(武泰) 성책(聖冊) | 1년 6년 계 7년 | 송악(松嶽) 송악(松嶽) | 904 |
태봉(泰封) | 수덕만세(水德萬歲) 정개(政開) | 3년 5년 계 8년 | 철원(鐵圓) | 911 |
(3) 태봉은 강원, 경기, 황해의 거의 전부와 평안, 충청의 일부 등에 걸치는 대 영토를 확보하였을 뿐만 아니라
명장 왕건(王建)의 수군은 진도(珍島), 금성(錦城 : 羅州)등을 점령하여 해상권을 손에 넣었다.
(4) 멸망(滅亡)
궁예는 국력이 강대해짐에 따라 자칭 미륵불(彌勒佛)이라 하고 아들을 보살(菩薩)이라 하여
호사한 생활과 횡포를 거듭하매 재정은 궁핍하여지고 국민의 생활은 도탄에 빠졌다.
더구나 소위 관심법(觀心法)을 얻었다 하여 부하와 처자를 함부로 죽이매 민심은 궁예를 이반(離叛)하게 되었다.
이때 부하 신숭겸(申崇謙),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등은 왕건(王建)을 추대하고 궁예를 몰아내니
궁예는 도주하다가 백성에게 피살되고 말았다.
나. 후백제의 성쇠
(1) 건국 : 견훤(甄萱)이 완산주(完山州 : 全州)를 도읍으로 신라 효공왕(孝恭王) 4년(900)에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2) 발전 : 북으로 한때 백주(白洲 : 白川)까지 차지하였으나 대략 충청도 중부일대를 경계로 하였고
동으로는 대야성(大耶城 : 陜川)을 점령하고 경상도 서부일대를 정복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후당(後唐), 오(吳), 월(越) 및 왜(倭)국과도 국교를 맺고 상호간의 문물을 교환하였다.
(3) 후백제의 신라침공
(가) 효공왕(孝恭王) 11년(907) 일선군(一善郡) 이남의 10여 성을 점령하였다.
(나) 견훤은 경명왕(景明王) 4년(920) 보기(步騎) 1만으로 대야성(大耶城 : 陜川)을 함락하였다.
(다) 경애왕(景哀王) 4년(927)에 후백제 군은 상주(尙州), 영천(永川) 등을 거쳐 경주(慶州)를 급습하여 경애왕을 죽였다.
이때 신라의 군신들은 포석정에서 놀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4) 고려와의 싸움 : 후백제와 태봉과의 사이에는 치열한 싸움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는데
태봉의 궁예가 죽고 왕건(王建)이 고려를 세운 뒤에도 후백제와 고려와는 싸움은 끊이지 아니하였다.
(가) 신라의 서울을 함락한 견훤은 고려의 원군을 공산(公山 : 大邱 동쪽)에서 크게 격퇴하였다.
그리하여 그 기세가 한때에는 예성강(禮成江)에 까지 이르렀다.
(나) 고려 왕건은 이에 굴하지 않고 군사를 일으키어 태조 17년(934)에 운주(運州 : 洪城)을 공격하여
웅진(熊津 : 公州) 이북의 30여 성을 점령하였다. 이로써 후백제는 결정적인 치명상을 입었던 것이다.
(5) 후백제의 멸망<936>
(가) 내분 : 견훤의 장자 신검(神劍)이 두 아우와 공모하여 견훤을 금산사(金山寺)에 유폐시키고
견훤이 사랑하는 넷째 아들 금강(金剛)을 죽인 후 스스로 대왕(大王)이라 하였다.
(나) 견훤의 고려 귀순 : 유폐된 견훤은 3개월만에 탈출하여 고려의 땅 나주(羅州)에 와서 귀순할 것을 청하매
태조는 이를 맞아 상부(尙父)로 후대하였다.
이듬해(936) 왕건은 대군을 이끌고 선산(善山)에서 신검의 군을 대파하여 항복 받았다.
다. 신라의 멸망
(1) 지배층의 분열 및 대립과 특히 진성여왕의 실정은 국력을 극도로 쇠퇴시켰으며
경애왕 때에는 후백제의 침입을 받아 국가의 위신이 땅에 떨어졌다.
(2) 한편 강성일로(强盛一路)의 고려가 신라에 대하여 회유책(懷柔策)을 쓰므로 민심은 고려로 향하였다.
(3) 경순왕(敬順王)은 군신회의를 열어 마의태자(麻衣太子)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들어 고려에 귀순하였다.<천수 18년(935) 신라 56왕 99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