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 사전전고(祀典典故) 서원(書院) 경상도(慶尙道)
거창(居昌)
도산서원(道山書院) 현종 병신년에 세웠으며 임인년에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정온(鄭薀)
완계서원(浣溪書院) 현종 갑진년에 세웠으며 숙종 경신년에 사액하였다. : 김식(金湜)
용원사우(龍源祠宇) 병인년에 세웠다. : 문위(文緯) 자는 순부(純夫), 호는 모계(茅溪), 본관은 단성(丹城), 거창(居昌)에 이거(移居)하였다. 남명(南冥)과 덕계(德溪)의 문인이다. 독행(篤行)으로 천거되어 교관(敎官)에 제수되었다.
원천서원(源泉書院) 신묘년에 세웠다. : 윤순거(尹舜擧)ㆍ변벽(卞璧) 호는 귀산(龜山)이다. ㆍ전팔고(全八顧) 호는 원천(源泉)이다.
포충사(褒忠祠) 영종 정사년에 세웠으며 무오년에 사액하였다. : 이술원(李述原) 무신년에 순절(殉節)하였으며, 대사헌에 증직되었다.
경충사(景忠祠) 결(缺) : 신명익(愼溟翊) 승지에 증직되었다.
용천향현사(龍泉鄕賢祠) 결(缺) : 형사보(邢士保)ㆍ유자방(柳子雱)ㆍ이계준(李繼俊)ㆍ전팔고(全八顧)ㆍ전팔급(全八及)ㆍ서숙(徐䎘)
..................
현종 병신년에 세웠으며 임인년에 사액하였다->효종 병신년에
원문교감필요
병신년은 1656년(효종7)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1권 / 경상도(慶尙道) 거창군(居昌郡)
《대동지지(大東地志)》
【사원】
도산서원(道山書院) 현종 경자년에 세우고, 임인년에 사액하였다. 김굉필(金宏弼 )ㆍ정여창(鄭汝昌)ㆍ이언적(李彦迪) 모두 문묘 편에 보라. 정온(鄭薀) 광주(廣州) 편에 보라.
○ 완계서원(浣溪書院) 현종 갑진년에 세우고, 경신년에 사액하였다. 김식(金湜) 청풍(淸風) 편에 보라.
○ 포충사(褒忠祠) 영조 정사년에 세우고 무오년에 사액하였다. 이술원(李述原) 자는 선숙(善叔)이며 연안(延安) 사람이다. 영조 무신년에 좌수(座首)로써 절개를 지키다가 죽었으며, 벼슬은 증 사헌부대사헌(贈司憲府大司憲)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익성 (역) | 1969
....................
무민당(无悶堂) 박인(朴絪)생년1583년(선조 16)몰년1640년(인조 18)자백화(伯和)호임헌(臨軒)본관고령(高靈)
无悶堂先生文集年譜
熹宗皇帝天啓元年辛酉 先生三十九歲
六年丙寅 先生四十四歲 答李枏溪重茂書。時桐溪爲嶺伯。士論欲建寒暄先生書院于郡北志同巖。枏溪書以議之。而先生答之。書在集中。
인조 5 1627 정묘 天啓 7 45 學行으로 천거되다. ○ 永慕錄이 완성되다.
无悶堂先生文集卷之二 / 書 / 答李柟溪 丙寅。桐溪爲嶺伯。士論欲建寒暄堂書院于崇山。
*李重茂 1568 1629 碧珍 晦敷, 敷汝 枏溪
曾枉降臨。繼辱惠書。前後厚意。心實感幸。况一封瓊韻。奚啻萬斛明珠。獲此寶貺。罔知攸謝。且中呈書方伯事。屢承下諭。鐫誨良勤。僕雖無狀。尙賢一心則亦與人同耳。今此之擧。固不待人言而先登矣。第緣採薪之憂。後於海寺之會。往來無便。又未修復。罪負實深。至於初六追呈之敎。僕竊惑焉。顧惟方伯寔此吾黨中冠冕也。鄙意願定送二員于方伯所。先禀建院之由。宣力經營之地。亦必悉心矣。一書之呈。雖待廵到之日。尙未晩也。
........................
동계(桐溪) 정온(鄭蘊)생년1569년(선조 2)몰년1641년(인조 19)자휘원(輝遠)호고고자(鼓鼓子)본관초계(草溪)
인조 4 1626 병인 天啓 6 58 1월, 啓運宮의 喪禮를 논의하다. ○ 4월, 형조 참판, 동지의금부사에 제수되다. 대사간이 되다. ○ 5월, 慶尙道 觀察使에 제수되다. ○ 10월, 대사간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귀향하다.
桐溪先生續集卷之三 / 附錄 / 許 燉 上先生書
積歲曠候。一拜無緣。恒切星斗之仰。何幸特霈天恩。按節南臨。七十州大小蒼生。擧皆歡欣鼓舞。如赤子之見慈母。枯木之遇陽春。則于嶺有光。實非偶然。而有關於國家之休戚矣。日昨拜昌詩氏。聞伏審氣候萬福。區區喜慰。曷可勝達。燉跧伏窮廬。親又老病。學不加進。昏惰日甚。趁未趨候於棠陰之下。實出緇衣誠薄。悚恨悚恨。第文敬公寒暄金先生建院事。擧措至重且大。不可容易經始。伏念令公尊賢衛道之誠。有以負士林之倚重。則必自知審處。而蓋崇山僻在。士論多岐。頃於海寺之會。又以初六巡到之日。有齊訴之議。願令公相時量宜。以副多士之望。幸甚。忘僭先容。伏增惶恐。
....................
동계(桐溪) 정온(鄭蘊)생년1569년(선조 2)몰년1641년(인조 19)자휘원(輝遠)호고고자(鼓鼓子)본관초계(草溪)
현종 3 1662 임인 康熙 1 - 居昌 道山書院에 賜額하다.
....................
전암(典庵) 강정환(姜鼎煥)1741년(영조 17)~1816년(순조 16) 계승(季昇) 심시재(尋是齋), 육이옹(六二翁), 진주(晉州)
영조 17 1741 신유 乾隆 6 1 8월 20일, 漆原 舞沂里에서 태어나다.
~ - ~ ~ ~ - ~ 가솔을 이끌고 居昌 石岡里로 이거하다.
축문은 거창 加祚縣 龍山의 蓮竹祠 터를 닦을 때 지은 축문과 거창의 道山書院을 중수할 때 金宏弼, 鄭汝昌, 李彦迪 세 선생의 위판을 移安 還安하면서 지은 告由文 등이다.
...................
道山書院을 중수할 때 金宏弼, 鄭汝昌, 李彦迪 세 선생의 위판을 移安 還安하면서 지은 告由文->金宏弼, 鄭汝昌, 鄭蘊
*초기에는 김굉필,정여창,정온 제향, 말기에 이언적 추향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1593년(선조 26)~1666년(현종 7) 중원(重遠) 진주(晉州)
謙齋先生文集卷之七 / 祭文 / 道山書院奉安文
箕封瓜割。蠻觸乾坤。無往不復。有啓眞源。本朝龍興。不絶注邍。藍靑茜絳。
....................
典庵文集卷之六 / 祝文 / 道山書院重修時。三先生位版移安告由文。
廟宇滋久。上漏旁攲。夙宵惶懔。亟謀葺治。玆涓吉辰。移安講堂。敢告厥由。奉以周章。
..................
典庵文集卷之六 / 祝文 / 還安告由文
補漏撐攲。廟貌維新。不遠而復。神人胥欣。玆用吉辰。式陳豆籩。冀垂鑑格。俾永萬年。
..................
典庵文集卷之五 / 序 / 白文甫家藏世譜序
余少也。見外舅春窩白公。公方考閱白氏世譜曰。我東白氏。系出扶餘。貫稱大邱者。非吾派也。以水原爲貫鄕而顯于世者。有三派焉。休庵公玉峯公及吾祖忠壯公是已。餘派當爲別譜。而獨居昌新谷宗人貫以水原。而其幾世諱仁武。與吾祖諱仁景諱仁豪。同其仁字。則似是同爲行列。而考其前後昭穆。皆不合焉。便同姜氏御史公殷烈公瞻字之同。而昭穆不孚也。此莫非程夫子所謂宗子法壞。則人不知來處。以至流轉四方。往往親未絶不相識者歟。雖然有所慨然者。新谷宗氏之家。以孝聞于世久矣。而居昌士友一辭稱美。又以士流見稱於嶠南。則京外諸宗以爲別譜者。蓋由於宗法壞而不相識者也。余在傍而對曰。世或有如許派譜者。周愼齋不過三四世系。而不害爲名賢。則新谷白氏。雖不入於水原三派之譜。而亦不害爲孝友家也。其後數十餘年。
余僑居于居昌。與新谷密邇。蓋嘗聞知於昌之士友。則自仁武公以下世世入黌堂之儒案。而與鄕先生幷列爲錄。則其有望於鄕黨可知也。往歲設鄕老會。始見新谷處士於
道山書院。諸老人莫不尊敬於處士曰。孝哉若人。人無間言。於是定耆老會序次。非七十以上莫敢入。依司馬公耆英會故事。雖不滿七十。新谷處士以孝行卓異。必參於是序中。至今傳以爲美事。一日有兩少年袖家藏譜牒。請序于余。見知爲新谷之子若孫也。不敢以不文辭。以所聞於外舅公及鄕人之所尊敬者爲之序。
...................
敬山遺稿 權相直 (1868~1950) 未詳 敬山(경산) 安東(안동) 거주지 : 山淸 丹城(산청 단성)
敬山遺稿卷之一
詩
早秋作加祚行過道山院基 寒暄一蠹晦齋桐溪四賢書院
爲訪伽倻萬疊山 紛紛世事不相關
滿地嘉禾疏雨裏 一天流火暮雲間
偶然作客新秋好 又是隨君此地還
百歲僉賢廬阜址 階前花葉自生顔
.......................
謙齋先生文集 河弘度(1593~1666) 重遠(중원) 謙齋(겸재) 晋陽(진양) 거주지 : 河東 玉宗(하동 옥종)
謙齋先生文集卷之八
祝
道山書院奉安文
箕封瓜割蠻觸乾坤無往不復有啓眞原本朝龍興不絶淵源藍靑茜絳
粵若寒暄門庭小學作聖之根學醇履篤氣和言溫天德將成一 氣之元
恭惟文獻實出同門志同道合考亭南 軒孝源百行聲徹天閽割鷄花林懸懸末村相邀此地一席講論麗澤同心斷金蘭薰沂洛及泗流蕩無垠坑灰再熱莫此時昏七日而復 曰含冤百年有半人亡道存地不忍荒愈久難 諼爰侐有廟繚以崇垣
玆配文簡元鎭强魂涓吉妥靈斯文益尊剛鬛之腥玄淸其樽陟降于獻照晢蒿焄佑我後學思皇鳳騫其始自今永世彌敦
右告寒暄一蠹二先生
德裕山高葛川流澈降神毓秀篤生美質私淑 文貞遂及先哲心期聞道知造明決學優而仕霜臺擢列陳善閉邪章甫適越身任綱常志不可敓北譴南謫生理足說天定勝人復見天日腥塵大起天地潰裂讀書有得就義決烈天意 佑忠殊而不歿結廬深山與世相絶忠而全孝終以大昳所造益驗松栢嚴雪後學景仰久而
:: 0061 ::
益切旣配龍門又思如渴今配兩賢同此廟室 永以德配世世罔缺
右告桐溪鄭先生
......................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1593년(선조 26)~1666년(현종 7) 중원(重遠) 진주(晉州)
謙齋先生文集卷之七 / 祭文 / 道山書院奉安文
箕封瓜割。蠻觸乾坤。無往不復。有啓眞源。本朝龍興。不絶注邍。藍靑茜絳。
粤若寒暄。門庭小學。作聖之根。學醇履篤。氣和言溫。天德將成。一氣之元。
恭惟文獻。實出同門。志同道合。考亭南軒。孝源百行。聲徹天閽。割鷄花林。懸懸末村。相邀此地。一席講論。麗澤同心。斷金蘭薰。沂洛及泗。流蕩無垠。坑灰再熱。莫此時昏。七日而得。豈曰含冤。百年有半。人亡道存。地不忍荒。愈久難諼。爰侐有廟。繚以崇垣。
玆配文簡。元鎭強魂。涓吉妥靈。斯文益尊。剛鬣之腥。玄淸其樽。陟降于獻。昭晢蒿焄。佑我後學。思皇鳳騫。其始自今。永世彌敦。
.......................
謙齋先生文集卷之七 / 祭文 / 鄭桐溪配享文
德裕山高。葛川流澈。降神毓秀。篤生美質。私淑文貞。遂及先哲。心期聞道。知造明決。學優而仕。霜臺擢列。陳善閉邪。章甫適越。身任綱常。志不可敓。北譴南謫。生理足說。天定勝人。復見天日。腥塵大起。天地潰裂。讀書有得。就義猛厲。天意佑忠。殊而不歿。結廬深山。與世相絶。忠而全孝。終以大昳。所造益驗。松柏嚴雪。後學景仰。久而益切。旣配龍門。又思如渴。今陪兩賢。同此廟室。永以德配。世世罔缺。
......................
苟齋文集 鄭載星 (1863~1941) 聚五(취오) 苟齋(구재) 晋陽(진양) 거주지 : 茶田(다전)
苟齋文集卷之七
書
與灆溪書院士林
伏惟榴炎僉體萬重老先生遺集工幾斷手不無賴於賢勞而事體 重大勉加訂正期之盡美是區區之望也生等頃旣忝末議而有未 及仰佈者顧鄙鄕之
道山院卽老先生平日講道之所也
風韻之藹爾儀文之秩然可以次於本院而不幸廢爲鞠茂然鄕人士猶撫迹 興慕齗斷如昨日事今印本之不槪及於斯院文字者是幷其迹而 泯沒之也其爲鄙鄕之厚憾當復如何就集中而請額侑享等編苟 無其例則已旣有其例則豈以斯院之述作而不可倂入也是述之 存否雖不足以輕重於本集而顧鄙鄕則泯沒故實可謂有後生也 耶此生等之不能無言而且彝誠之所慕乎老先生則遠邇一也如 或諉之以後時則生等固不能無咎然斯文之重大而毋拘蚤晩曲 盡物議僉執事其有以自任也玆繕
寫疏及侑文以送
幸毋憚煩費
:: 0046 ::
而諒加例附俾光旣廢之院幸甚
......................
1 일두집(一蠹集) 一蠹先生遺集卷之二 附錄 褒贈祀典 정여창(鄭汝昌) 1635 a015_472c
溪。後配柳西崖,盧蘇齋,鄭愚伏。肅廟二年丙辰。賜額道南。鄭愚伏集 毅宗烈皇帝崇禎三十二年 孝宗大王十年 己亥。居昌士林。追慕先生及寒暄兩先生。建書院于山際洞。配鄭桐溪。顯廟朝。賜額道山。景賢錄 崇禎五十七年 肅宗大王十年 甲子。關北士林。追慕先生之德。建書院于 번역문 이미지
2 일두집(一蠹集) 一蠹先生續集卷之二 附錄 道山書院 顯廟壬寅 賜額祭文。[李殷相製進。] 이은상(李殷相) 1635 a015_510d
3 일두집(一蠹集) 一蠹先生續集卷之二 附錄 道山書院請額疏 顯宗己亥 [鄭必達] 정필달(鄭必達) 1635 a015_525b
4 일두집(一蠹集) 一蠹先生續集卷之二 附錄 道山書院請額疏 顯宗己亥 [鄭必達] 정필달(鄭必達) 1635 a015_525b
先正聚講之所。乃臣等所居鄕吾道山之山際洞。卽其地也。當成廟甲寅。時鄭汝昌宰於安陰。金宏弼家於陜川。以茲山爲兩地之中。且有水石之勝。五六載之間。屢與約會。徜徉信宿。從容晤語。阻面不至旬日。猶恐其或相離也。今於文獻公實紀觀之。則可見矣。噫。古今如許其寥闊。而兩先正 번역문 이미지
5 일두집(一蠹集) 一蠹先生續集卷之二 附錄 道山書院春秋享祝文[金千鎰] 김천일(金千鎰) 1635 a015_526c
.........................
사미헌집 제11권 / 행장(行狀) / 상산 김공 행록〔商山金公行錄〕
공의 성은 김씨(金氏)이고 휘는 기수(基洙)이며 자는 치원(致源)이고 호는 백후(栢後)이니 대개 ‘뒤에 시든다’는 것에서 말을 취하였다. 본관은 상산(商山)이니, 시조는 고려 시대 시중(侍中)을 지낸 수(需)이다. 정정공(貞靖公) 식(湜)과 청평공(淸平公) 희일(希逸)을 지나 조선조에 이르면 휘 상견(尙堅)이 있었으니 호는 매오(梅塢)로 형 영계(𤃡溪) 익견(益堅)과 함께 동계(桐溪) 정 선생(鄭先生)을 사사하여 사류들에게 추중을 받았다. 상견이 낳은 진사를 지낸 휘 두병(斗柄)은 훌륭한 문장과 행실이 있었다. 두병이 낳은 휘 윤서(允緖)는 무신년(1728, 영조4)에 의사(義士) 윤상거(尹商擧)와 함께 창의하여 역적을 토벌하였으니 이분이 공에게 5대 조부가 된다. 고조부의 휘는 우태(遇兌)이고 증조부의 휘는 용운(龍運)이며 조부의 휘는 달흥(達興)이고 아버지의 휘는 귀찬(龜璨)이다.
어머니는 현풍 곽씨(玄風郭氏)인 경(璥)의 따님이며 부사(府使)를 지낸 정후(禎垕)의 손녀이니, 여사(女士)의 훌륭한 행실이 있었다. 4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진사를 지낸 기한(基漢)이고 둘째는 기부(基溥)이며 막내는 기연(基淵)이고 공은 셋째 아들이다. 불행하게도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는데, 어머니가 일찍이 네 아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부지런히 독서하고 부지런히 공부하여 너의 집안 명성을 실추시키지 마라.”라고 하니, 모두가 어머니의 명령을 잘 받들어 게을리하지 않았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더욱 총명하고 특출하여 겨우 말을 배울 때 간지(干支)와 방위 그리고 숫자를 알았다. 책을 읽게 되자 문득 글뜻을 깨달았으며, 찌를 두드리며 책을 낭랑하게 읽는데 기상(氣象)이 좀스럽지 않았기에 보는 사람들이 큰 그릇으로 기약하였다. 어머니의 명령을 받들어 정재(定齋) 유 선생(柳先生)에게 배웠다. 선친에게 효도를 다하지 못한 것을 어머니에게 극진히 하여 밤낮으로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시절에 따라 맛있는 음식을 얻으면 반드시 가슴에 품고와 어머니에게 드렸다. 어머니께서 늙고 병들어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자 혹 부축해주거나 등에 업었다. 어머니상을 당하자 장례와 제례 등을 하나하나 정재 선생에게 품의하여 결정하였다.
백형과 중형 섬기기를 엄부 섬기듯이 하여 정성과 공경이 극진하였다. 또 고아가 된 동생의 두 아이〔조카〕를 어루만지기를 자기 자식과 같이 하여 모두 성취할 수 있게 하였다. 종형(宗兄) 기로(基老)를 따라 밤낮으로 각고의 노력을 하여 어떤 책이든 읽지 않음이 없었으며, 책을 읽으면 가슴 중에 간직하지 않음이 없었다. 표현하여 시문을 지으면 마치 장강대하가 바람을 만나 물결이 일어나는 듯하였으니, 무릇 학교와 서원 그리고 서당의 상량문이나 기문의 글들은 공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 많았다.
일찍부터 과거시험을 공부하여 성대하게 명망이 있었지만 누차 대과에 낙방하였다. 마침 서울의 귀한 사람이 함께 공부하자고 함에 공이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 말하기를 “차라리 상좌를 비워놓고 궁한 귀신을 맞이할지언정, 길이 허리 굽혀 달관(達官)에게 절하지 않겠네.〔寧虛上座延窮鬼 不以長腰拜達官〕”라고 하였다. 《장릉지(莊陵誌)》를 읽고 느낌이 있어 시를 지어 말하기를 “살아서 사지를 만나는 것이 죽음보다 어려우니, 정충을 바쳐 사육신이 되었네.〔生逢死地難於死 輸與貞忠作六臣〕”라고 하였다. 무릇 여러 역사서에 종묘 사직의 존망과 열사들이 목숨을 바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애초에 여러 번 반복하여 읽으며 감탄하지 않음이 없었다.
지난번 병인년(1866, 고종3)에 강화도가 방어에 실패하자 군사를 불러 모으는 왕명이 있었다. 공이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서양 오랑캐가 창궐하는데, 조정에서 애달프게 여기는 교지가 있었다.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 마땅히 자신이 만나는 처지에 따라 자신의 떳떳한 분수를 다해야 할 것이니, 어찌 직책의 유무를 논할 것인가. 나아가면 의병을 창도하여 일으켜 끓는 물과 타오르는 불로 달려갈 것이고, 물러나면 관아를 도우고 지역을 방어해야 한다.”라고 하고서, 장차 분발하여 모병에 응하려 하였으나 얼마 후 수복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만두었다.
평소에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여 장엄하고 공경하는 모습으로 스스로 견지하였다. 연상(硏桑)의 계교(計較)와 천포(泉布 돈) 미염(米塩 쌀과 소금) 등의 일을 절대로 입에 올리지 않았다. 매양 마음이 회통하는 사람을 만나면 시주로 창화하며 천고의 역사를 자유롭게 담론하였다. 후생들을 인도함에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는 것같이 하였다. 남전(藍田) 고사에 의거하여 계(契)를 만들고 사창(社倉)을 설립하였다.
도산(道山)과 용천(龍泉) 사이에 강회소를 설치하여 유교 문풍과 문물을 원근에 일으켰다.
본래부터 아름다운 산수를 좋아하여 지역 내의 명승지에 그윽한 곳을 찾고 진경(眞景)을 채록하여 글로 짓자마자 문득 사람들의 입에 전파되었다. 동문(同門)의 벗인 신암(愼庵) 이만각(李晩慤)이 항상 당대의 호걸스러운 선비라고 일컬었다. 순조 무인년(1818, 순조18) 6월 10일에 가야산 아래 부산리(釜山里) 집에서 태어나 고종 계유년(1873, 고종10) 9월 5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56세였다. 그 다음해 4월에 견암(見巖) 을좌(乙坐) 언덕에 장례를 지냈는데, 문상 온 사람이 수백 명이었다. 마을 앞에 있었던 두 그루의 잣나무는 공이 애호하는 것이었는데, 한 그루는 공이 병든 해에 고사하였고 한 그루는 공이 돌아가신 뒤에 고사하였으니 기이한 일이다.
부인은 파평 윤씨(坡平尹氏)인 광옥(光玉)의 따님인데, 공이 일생 학업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부인의 내조에 힘입은 것이라고 말하더라. 2남을 두었으니, 우현(友鉉)과 덕현(德鉉)이다.
아! 내가 일찍 공과 교유해보니 공에게 지기(志氣)의 탁월함과 자품의 고매함은 보통사람보다 매우 뛰어난 점이 있었으나, 효우(孝友)로 인격을 성취하고 문학으로 내실을 채웠으며, 마음을 견지함은 견고하고 의리를 파악함은 분명하였다. 가령 공이 도유(都兪)의 세상에 태어나 조정의 신하가 되었다면, 문장은 보불(黼黻)을 꾸밀 수 있었을 것이고 이름은 역사책에 드리울 수 있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사나운 시대의 운수를 만나 자기 분수에 맞추어 유유자적하였다. 만년의 공부는 이미 알고 있는 것과 이미 터득하고 있는 것으로 스스로 만족하지 않았으나, 하늘이 수명을 연장해주지 않았다.
애석하구나! 공의 맏아들 우현(友鉉)이 공이 지은 여러 편의 시문을 수습하고 바야흐로 출간하여 후세에 전하려고 하는데, 행록이 없다는 이유로 늙고 피폐한 나에게 그것을 부탁하였다. 평소의 계분을 추념해보니 차마 한마디 말없이 넘어갈 수가 없어서, 삼가 가장에 의거하여 서술해 후대 집필자가 채택하는 것에 대비한다.
[주-D001] 호는 …… 취하였다 : 《논어》 〈자한(子罕)〉에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알 수 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也.〕”라고 하였다.[주-D002] 윤상거(尹商擧) : ?~1728.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이상(而相)으로 거창에 거주하였다. 1728년(영조4) 이인좌(李麟佐)의 반란이 일어나 청주가 함락되고 정희량(鄭希亮)이 또한 안음(安陰 안의(安義))에서 일어나 이인좌를 도와 형세가 중대하게 되었다. 이에 노령에도 불구하고 의병 500여 명을 모집하여 진주 영장 이석복(李碩馥)의 군사를 도와 적의 수뇌들을 죽이고 마침내 난을 평정하였으나, 자신도 병세가 심하여 죽었다. 1890년(고종27)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추증되었다.[주-D003] 무신년에 …… 토벌하였으니 : 무신년(1728)에 경종(景宗) 사후 정권에서 배제된 노론의 거두 김일경(金一經)의 잔당인 이인좌(李麟佐)와 정희량(鄭希亮) 등이 공모하여 영조 즉위 후 실세한 소론의 호응을 얻어 밀풍군(密豐君) 탄(坦)을 추대하여 왕통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김윤서는 거창에서 반란한 정희량을 토벌하였다.[주-D004] 장릉지(莊陵誌) : 권화(權和), 박경여(朴慶餘) 등이 조선 제6대 왕 단종의 왕위 피탈 후에 전개된 상황을 기록한 책이다. 장릉은 단종의 능호로 강원도 영월에 있다.[주-D005] 병인년에 …… 실패하자 : 1866년에 흥선대원군의 천주교도 학살과 탄압에 대항하여 프랑스함대가 강화도에 침범한 병인양요를 말한다.[주-D006] 연상(硏桑)의 계교(計較) : 돈을 벌 계획을 말한다. 연상은 계연(計硏)과 상홍양(桑弘羊)의 병칭이다. 계연은 춘추 시대 월(越)나라의 경제가(經濟家)인데, 월왕 구천(句踐)이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패한 뒤에 이를 복수할 생각을 품고는 범려(范蠡)와 계연을 등용하자, 계연이 월나라를 경제적으로 부강시킬 계책을 진달하니, 구천이 그 계책을 써서 나라를 부강하게 해 마침내 오나라에 복수를 하였다. 상홍양(桑弘羊)은 한(漢)나라 때 치속도위(治粟都尉)가 되어 염철법(鹽鐵法)을 평준화하여 국용(國用)을 이롭게 하였는데, 뒤에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면서 상관걸(上官桀)과 더불어 모반을 꾀하였다가 죽임을 당했다. 《史記 卷129 貨殖列傳》[주-D007] 남전(藍田) 고사 : 남전 여씨(藍田呂氏) 향약을 말한다. 남전(藍田)은 중국 서안부(西安府)에 있는 현의 이름인데 송(宋)나라 때 여씨(呂氏) 4형제가 살면서 일가친척은 물론 향리 전체를 교화하기 위해 처음으로 향약(鄕約)을 마련하여 시행하였던 곳이다. 여씨 4형제는 대충(大忠), 대방(大防), 대균(大勻), 대림(大臨)이었으며, 향약의 규약은 크게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교(禮俗相敎), 환난상휼(患難相恤)의 네 가지이다.[주-D008]
도산(道山) : 도산서원(道山書院)을 말하는 듯하다. 도산서원은 거창군 가조면 일부리에 있었다. 1661년(현종2)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정온(鄭蘊), 이언적(李彦迪) 등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62년(현종3) ‘도산(道山)’이라고 사액되었으며, 선현배향(先賢配享)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9년(고종6)에 훼철된 뒤 복원되지 못하고 현재는 서원터만 남아 있다.[주-D009] 용천(龍泉) : 동계(桐溪) 정온(鄭蘊)이 지은 용천정사(龍泉精舍)를 말한다. 거창군 가북면 용산동에 있다.[주-D010] 이만각(李晩慤) : 1815~1874.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근휴(謹休), 호는 신암(愼庵)ㆍ암후(巖后)이다. 외숙 유치명(柳致明)에게 배웠다. 《퇴계전서(退溪全書)》 중에서 긴요한 종지(宗旨)만을 발췌하여 《계서약선(溪書約選)》을 편집하였고, 고증학에도 밝아 용학의목(庸學疑目)인 《암후유기(巖后類記)》를 남겼다. 저서로 《신암문집》이 있다.[주-D011] 고종 : 원문에는 철묘(哲廟)로 되어 있으나, 연대가 맞지 않아 고쳤다.[주-D012] 도유(都兪) : 도(都)는 왕의 의견에 찬탄할 때 신하가 내는 탄미의 소리이고, 유(兪)는 신하가 제시한 의견에 왕의 환영 내지 허락의 뜻을 나타낼 때 내는 소리이다. 곧 군신간에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하는 태평성대를 말한다.[주-D013] 보불(黼黻) : 옛날 임금의 대례복(大禮服)에 놓은 수를 말한다. 보(黼)는 도끼 모양의 흑백색 수이고, 불(黻)은 아자(亞字) 모양의 흑청색(黑靑色) 수이니, 보불은 일반적으로 왕정(王政)을 돕는 귀한 인재를 비유한다.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송희준 (역) | 20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