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산집 별집 제6권 / 행장(行狀)
홍문관 수찬 월휘당 이공의 행장〔弘文館修撰月輝堂李公行狀〕
공은, 휘는 희증(希曾), 자는 노옹(魯翁)이다. 성은 이씨(李氏), 본관은 강양(江陽)으로, 고려의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 이경분(李景芬)이 시조이다. 증조부 휘 지로(智老)는 병조 참의에 추증되었고, 조부 휘 순생(順生)은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부친 휘 윤검(允儉)은 동지중추부사이다. 모친은 정부인(貞夫人) 최씨(崔氏)로, 훈련원 참군 최계한(崔季漢)의 따님이요 좌의정 최윤덕(崔潤德)의 손녀이다. 공은 형제가 세 사람인데, 둘째는 이름이 희민(希閔)으로 교리를 지냈고 기묘명현(己卯名賢)에 들었으며, 막내는 이름이 희안(希顔)으로 판관을 지냈고 황강(黃江) 선생으로 불리었다. 공은 형제들 중의 장남으로, 세상에서 월휘당(月輝堂) 선생이라고 일컫는 분이다.
공은 성화(成化 명나라 헌종(憲宗)의 연호) 병오년(1486, 성종17)에 초계(草溪) 성산리(城山里)에서 태어났다. 타고난 바탕이 총명하고 재주가 풍부하였으며, 독서를 그리 널리 하지는 않았으나 문장은 기세가 좋고 거침이 없었다. 공은 이귀(李龜) 선생과 정일두(鄭一蠹)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하는 방도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다.
연산군 임술년(1502, 연산군8)에 태학(太學)에 들어가 명성을 크게 떨치니, 연산군이 남의 손을 빌린 것이라고 의심하여 과거에 같이 합격한 젊은이 몇 사람과 함께 대궐 뜰에서 면시(面試)하였는데, 당시 형벌을 쓰는 것이 매우 가혹하였으므로 부형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대내(大內)에서 시제(試題)를 써서 내리자, 공이 바로 붓을 잡고 그 자리에서 답안을 쓰니 승지들이 보고서 감탄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연산군은 특별히 어주(御酒)를 하사하고 위로하여 돌려보냈다.
병인년(1506)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중종반정(中宗反正)이 난 뒤에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뽑혔고, 얼마 후 사재(史才)로 예문관에 뽑혀 들어가 검열(檢閱)이 되었다가 다시 대교(待敎), 봉교(奉敎)로 옮겨졌다. 이때 바야흐로 폐정(敝政)을 개혁하느라 처음으로 언로를 열어 논설이 종횡으로 어지러이 오가자, 사관(史官)도 이것을 모두 기록할 수 없었으나 공만 홀로 물 흐르듯 기록하여 한마디도 빠뜨리지 않았다. 또 대궐 뜰에서 정사를 논의할 때, 재상과 간관(諫官), 시종신(侍從臣)들이 모두 모여 쟁론이 분분하였는데, 공이 왼쪽 오른쪽에서 하는 말을 입에서 나오는 즉시 기록하여 훌륭하게 문장을 만들었다. 상국(相國) 성희안(成希顔)이 공이 쓴 초고를 가져다 훑어보고 손뼉을 치면서 탄복하기를 “참으로 타고난 사신(史臣) 재목이다.”라고 하였다.
당시에 무오년(1498, 연산군4)의 옥사(獄事)가 이미 밝게 바로잡혔으나, 유독 탁영(濯纓) 김공의 관작(官爵)은 회복되지 않았고 적몰(籍沒)된 재산도 반환되지 않았다. 공이 “사화(士禍)가 사국(史局 예문관)에서 비롯되었으니, 우리들이 먼저 논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고, 김공 흠조(金公欽祖), 정공 충량(鄭公忠樑), 김공 영(金公瑛), 이공 말(李公𡊉)과 더불어 상소로 진청(陳請)하여 마침내 윤허를 받으니, 사론(士論)이 더욱 통쾌하게 여기고 공의 명성이 더욱 높아졌다.
얼마 뒤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으며, 성균관 전적을 거쳐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고, 홍문관에 선발되어 들어가 수찬에 제수되었다. 매번 경연(經筵)과 사대(賜對)에서 의리를 정밀하게 분변하여 임금을 깨우쳤으며, 사간원에 있을 때는 옥처럼 꼿꼿한 풍도를 지니면서 일 처리가 과감하고 언론이 분명하였다. 여러 동료들은 손을 놓고 있다가 공의 말 한마디로 판단을 내렸으며, 비록 글에 능하다고 불린 사람들도 봉장(封章)이나 초계(草啓)의 일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옷깃을 여미고 공에게 미루어 양보하였다.
정덕(正德 명나라 무종(武宗)의 연호) 기사년(1509, 중종4) 2월 4일에 집에서 병으로 생을 마쳤으니, 나이 겨우 24세였다. 본군(本郡 합천(陜川))의 오세촌(吾世村) 봉원(鳳原) 유좌(酉坐)의 땅에 장사 지냈다.
공은 가정에서의 처신에 흠잡을 데가 없고 효우가 돈독하였다. 부모가 병에 걸리면 울면서 의원을 부르고 손수 탕약을 달이면서 밤낮으로 허리띠를 풀지 않았으며, 형제가 병에 걸려도 마찬가지로 눈물을 흘리며 돌보았다. 사재(思齋) 김 선생은 공보다 한 살이 적었는데, 사람들이 많은 데서 공을 한번 보고는 마침내 마음으로 감복하여 공과 함께 학문을 연마하고 서로 도왔으며, 공이 세상을 떠나자 비문(碑文)을 지었으니, 두 분이 도의로써 서로 허여한 정의(情誼)를 더욱 알 만하다.
공의 배(配)는 문화 유씨(文化柳氏)로, 동부승지 유적(柳績)의 따님이다.
아들은 하나로 통덕랑 팽년(彭年)이다.
손자는 하나로 천수(天受)이다.
천수의 아들은 윤서(胤緖)이며, 갑자년(1624, 인조2)에 이괄(李适)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반란군의 중군(中軍)으로 있었는데 의리를 붙잡고 절개를 세워, 우찬성에 추증되고 장의(壯毅)라는 시호를 받았다.
윤서에게 아들이 없어서 형원(亨源)을 양자로 들여 후사로 삼았다. 5세손 이하는 다 쓰지 않는다.
오호라, 공은 천령(天嶺) 학맥의 사람이니 스승에게서 직접 가르침을 받은 지결(旨訣)에 의당 전할 만한 것이 있었을 것이고, 또 조정에서의 큰 절의는 비록 오래 살지 못하여 크게 드러나지 못하였더라도, 주사(柱史 사국(史局))에서의 사필(史筆)과 간원(諫院)에서의 탄핵과 연석(筵席)에서의 토론에는 의당 아름다운 문채가 드리웠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400년이 지나 긴 세월의 뒤에서 아득하게 찾아 볼 길이 없으니, 이것은 비단 자손들의 목메는 슬픔일 뿐만이 아니라 실로 사림(士林)이 함께 애석히 여기는 바이다.
그래도 오직 《사재집(思齋集)》에 실린 명시(銘詩)가 있어, 일단 이것으로 공의 자취를 만분의 일이나마 증험할 수 있는데, 지금 공의 후손 기용(夔鏞)이 명시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행장을 써 주기를 청하였다. 아, 행장이란 덕을 기록하는 것이며 본래 명(銘)을 청하는 바탕이 되는 글이니, 명이 당시의 도의군자(道義君子)에 의하여 이미 지어졌는데 행장이 또 무슨 소용이리오. 더구나 명 뒤에 짓는 행장이란 혹 명에 소루(疏漏)한 점이 있을 때 거기에 첨가하고 보충하는 법인데, 몽매한 내가 한 가지 일도 채집하여 보충하지 않고 공연히 겉보기만 바꾸어 이것을 행장이라 부르니, 이는 몹시 올바르지 못한 일인 것 같아, 이 때문에 오랫동안 사양하였으나 끝내 허락을 얻지 못하고, 마침내 삼가 명문(銘文)을 취하여 차례대로 쓰고 응당 기록되어야 할 손자와 증손자를 덧붙였다.
이렇게 하고 나니 마음에 느끼는 바가 있다. 바야흐로 나라가 융성하였을 때에 공의 3형제가 한집에서 함께 태어나 그 덕의와 학문이 마치 금처럼 정순하고 옥처럼 윤택하였으며, 연못처럼 깊고 산처럼 우뚝하였다. 만일 이들로 하여금 다 같이 오래 살아 함께 조정에 나아가게 하였다면, 나라가 평안할 때나 험난할 때나 풍성한 공렬(功烈)을 이루어, 모재(慕齋)와 사재(思齋)가 당시에 아름다운 명성을 독차지하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백씨와 중씨 두 분이 타고난 재주가 출중했음에도 불구하고 낮은 관직에서 겨우 업적을 드러내다가 자립(自立)의 나이도 되기 전에 잇달아 꺾이고 말았으니, 이것은 운수가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겠는가.
백씨와 중씨가 이처럼 꺾이었으므로 계씨 황강(黃江) 선생은 아예 고향에서 조용히 지내며 요순(堯舜)의 도를 즐겼고, 때로 혹 억지로 벼슬에 나아가도 한 해를 마칠 때까지 머문 적이 없었으니, 구름 속의 빛나는 달이 때때로 나타났다가 숨는 것과 어찌 그리 꼭 같았던가. 오직 인품 수양의 모범이 이와 같아서 절개 높은 장의공(壯毅公)이 또 이 집에서 태어나 길이 인기(人紀)를 붙들었으니, 지금 공의 숨은 덕을 드러내는 일이 어찌 세상 사람들을 크게 권면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감히 이것을 아울러 써서 뒤에 오는 군자를 기다린다.
[주-D001] 희민(希閔) : 이희민(1498~?)으로, 본관은 합천(陜川), 자는 효옹(孝翁)이다. 이희증(李希曾)의 아우이다. 별시 문과에 급제하고 지평과 이조 정랑을 역임하였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파직되었다.[주-D002] 기묘명현(己卯名賢)에 들었으며 : 기묘명현은 1519년(중종14)에 일어난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사류(士類)를 일컫는 말이다. 이희민은 지평으로 있을 때 정국 공신(靖國功臣)에 외람되게 기록된 사람을 삭제하도록 논핵하였는데, 사화가 일어나자 이 때문에 이조 정랑에서 파직되었고 후에 기묘명현에 포함되었다.
[주-D003] 희안(希顔) : 이희안(1504~1559)으로, 본관은 합천(陜川), 자는 우옹(愚翁), 호는 황강(黃江)이다. 이희증의 막내아우이며 김안국(金安國)의 문인이다. 14세의 어린 나이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고 만년에 유일로 천거되어 고령 현감이 되었으나 곧 사직하였다. 고향에서 조식(曺植)과 교유하면서 학문을 닦았다.[주-D004] 이귀(李龜) 선생 : 1469~1526.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장(子長), 호는 사미정(四美亭)이다.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ㆍ교리, 상주 목사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고, 만년에는 병을 이유로 벼슬을 그만두고 홍천으로 돌아와 은거하였다.[주-D005] 정일두(鄭一蠹) 선생 : 정여창(鄭汝昌, 1450~1504)으로,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욱(伯勗)이며, 호가 일두이다. 김굉필(金宏弼)과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 시강원 설서, 안음 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 때 경성으로 유배되고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되었다. 중종반정 뒤 우의정에 증직되었고 1610년(광해군2)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일두유집》이 있으며, 시호는 문헌(文獻)이다.[주-D006] 태학(太學)에 들어가 : 이희증(李希曾)이 1502년(연산군8)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간 것을 말한다.[주-D007] 성희안(成希顔) : 1461~1513.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우옹(愚翁), 호는 인재(仁齋)이다. 성종 때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를 지냈고 연산군 때도 이조 참판 등의 요직을 거쳤다. 중종반정을 주도하여 성공한 뒤에 벼슬이 이조 판서와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주-D008] 탁영(濯纓) 김공 : 김일손(金馹孫, 1464~1498)으로,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 또는 소미산인(少微山人)이다.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과 이조 정랑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으나 1498년(연산군4)에 일어난 무오사화 때 능지처참의 형을 받았다. 중종반정으로 복관되고 그 뒤에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문민(文愍)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평생 김종직(金宗直)을 사사하였으며, 저서로는 《탁영집》이 있다.[주-D009] 사가독서(賜暇讀書) : 학자 양성의 한 방법으로, 젊은 관료 가운데 총명한 자를 선발하여 휴가를 주고 독서당에서 학문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한 제도이다.[주-D010] 사재(思齋) 김 선생 : 김정국(金正國, 1485~1541)으로,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국필(國弼)이며, 호가 사재이다.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이조 정랑과 사간, 승지 등을 거쳐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다. 기묘사화 때 삭탈관직 되었다가 그 후 복직되어 경상도 관찰사와 형조 참판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사재집》과 《성리대전절요(性理大全節要)》 등이 있으며, 시호는 문목(文穆)이다.[주-D011] 공보다 …… 적었는데 : 실제로는 김정국이 이희증(李希曾)보다 나이가 한 살 더 많다. 향산의 착오인 듯하다.[주-D012] 의리를 …… 세워 : 이윤서(李胤緖, 1574~1624)는 무과에 급제하고, 1623년(인조1)에 위장(衛將)이 되어 부원수 이괄(李适)이 영변에 병영을 설치하였을 때 중군으로 그 휘하에 있었다.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별장 이순무(李舜懋)와 함께 도원수 장만(張晩)에게로 탈출하였다가 난이 점점 확대되자 반역자를 처단하지 못한 일을 자책하고 자결하였다.[주-D013] 천령(天嶺) 학맥 : 함양(咸陽)을 기반으로 하는 정여창(鄭汝昌)의 학맥을 말한다. 천령은 함양의 별칭이다.[주-D014] 주사(柱史) : 대본에는 이 부분에 “주사는 노자(老子)를 뜻하는데, 노자는 주(周)나라의 주하사(柱下史)였다.”라는 두주가 있다.[주-D015] 모재(慕齋) : 김안국(金安國, 1478~1543)으로,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이며,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의 형이다. 조광조(趙光祖) 등과 함께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도학에 정진하여 지치주의(至治主義) 사림파의 선도자가 되었다.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지평, 장령, 대사간, 병조 판서, 대제학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며, 《모재집》을 비롯한 여러 저술이 있다.[주-D016] 자립(自立)의 …… 말았으니 : 대본에는 이 부분에 “《논어》에 ‘30세에 자립한다.〔三十而立〕’라고 하였다.”라는 두주가 있다. 여기서는 이희증(李希曾)이 나이 24세에 죽은 일과 아우 이희민(李希閔)이 기묘사화 때 22세의 나이로 관직을 삭탈당하고 낙향한 일을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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