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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1장 1-7절
1.『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
모세의 빈자리는 여호수아로 채워지고 이어졌지만, 여호수아의 빈자리는 다른 한명의 걸출한 리더쉽으로 채워지지 않았다. 여호수아의 부재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시대, 다른 국면이 시작되었음을 알려 준다. 이 새시대를 가리켜 사사시대라고 한다. 사사라는 말은 재판관이라는 의미다. 곧 하나님이 재판관이시며,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인 것이다.
사사기를 이해하려면 여호수아서를 이해해야 한다. 여호수아서는 땅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호수아 1장 6-8절에서『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결국 여호수아는 물리적인 전쟁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전쟁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5장 5절에서『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μακάριοι οἱ πραεῖς, ὅτι αὐτοὶ κληρονομήσουσιν τὴν γῆν.』 교회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온유하다는 말을 부드러운 심성을 가진 자로 생각하고, 땅을 세상의 땅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온유는 플라에이스(πραεῖς 기본형은 플라우스)로서, 마음이 가난한 자를 의미한다. 마태복음 5장 4절과 일맥 상통한다.
땅은 하나님 약속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출애굽하여 광야에 있는 백성들에게 약속의 땅(가나안)을 주실 것이라는 말이다. 온유한 자라는 말은 시편 37편 11절에서『그러나 온유한(아나브)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온유한 자라고 번역했지만, 가난한 자라는 것이다.
스가랴 9장 9절에서『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아니)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아나브와 아니는 같은 의미를 갖는다. 겸손이 가난하다는 의미다. 핍박받는 자의 가난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21장 5절에서『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프라위스 πραῢς)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겸손하다라고 번역된 것이 온유하다는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생각하는 메시야는 말을 타고 오는 모양이지만, 예수님은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다. 나귀새끼를 타는 모습은 가난하다는 표현이다. 마태복음 11장 28-29절애서『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프라위스 πραΰς)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성경에서 가난하다는 말을 하는 이유는 마태복음 11장 26-27절을미루어보면, 아버지의 뜻을 잘 아는 자가 가난한 자라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은 십자가의 죽음이다. 십자가의 죽음이 온유의 개념인 것이다. 이사야 53장 2-5절에서『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온유한 자는 십자가를 앞둔 예수님의 모습이고 십자가의 죽음과 연계되는 상황을 그린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자가 온유한 자가 된다. 온유한 자가 하늘의 복을 받고,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는다.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까지 여호수아를 통해서 하나님을 따를 수 있었다. 이제까지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뜻이 여호수아를 통해 전해져 왔다. 분명한 살과 피와 목소리를 가진 여호수아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선명하게 존재하시는 분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죽음으로 부재하게 되었고, 이제 그들 스스로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따르기 위해 새로운 감각을 동원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하나님을 따르는 일은 아주 세세하고도 구체적인 질문과 답의 과정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가나안을 정복하라는 것이 하나님 뜻이고 방향이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디를 누가 차지해야할지 하나님께 여쭈어야 했으며, 심지어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울지까지도 하나님께 묻는 장면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질문은 세세하게 이어졌다. 이렇게 전쟁을 앞두고 하나님의 뜻을 가늠하여 준비하고, 마침내 가나안 족속을 향해 진군하는 일련의 과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감각하고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경험하고 배우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들은 기도하며 묻고 싸우고 죽이며 땅을 정복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족속을 죽이고, 성을 불사르고, 땅을 차지하였다. 이러한 정복 전쟁의 일원으로 참여하는 과정을 통해 그들은 추상적인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따르며 신앙적 자립의 여정을 걸었다.
사사기 1장은 당시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밝힌다. 정복전쟁의 이야기 가운데 반복해서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였다』는 단서가 8번이나 등장한다. 1장에서 정복전쟁의 표면적 승리가 아니라, 그 이면을 부각시켜서 이야기한 것을 보면서 저자의 분명한 의도가 담겨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사기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로 불려지는 사무엘이 그 저자로 알려져있다. 사무엘이 사사시대 말미에 지난 역사를 성찰하며, 이스라엘의 역사가 쇠락했던 원인을 살폈을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가나안 정복이 온전히 이뤄지지 못한 부분을 그 원인 중 하나로 보았음을 추론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족속을 가볍게 물리칠 만큼 모두 강하지가 않았다. 유다와 시므온이 연합전선을 이루어고서야 공격하는 모습이 그러하고, 베냐민과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스블론과 아셀과 납달리가 가나안 족속을 몰아내지 못한 것이 강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점도 이러한 현실을 반영한다.
가나안 정복은 생각처럼 순식간에 깔끔하게 이뤄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가나안을 정복하는 사명을 역사 안에서 지속적으로 이뤄가야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그 안에서 더욱 힘을 키워 강성해져서, 마침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가나안 족속을 물리쳐가야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진적으로 이뤄진 가나안 정복이 완벽하게 성취되지 않은 가장 큰 원인은, 이스라엘 백성의 중심이 흔들린데 있었다. 그들이 정복하지 못한 가나안 민족은 전통과 유산과 문화와 언어와 삶의 방식을 가진 존재들이었다. 가나안 민족과 같이 살아간다는 것은 다른 정신과 가치가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혼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단번에 느껴지지는 않겠지만, 삶을 구성하는데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여기서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이는 여호수아서와 연결 고리 역할을 하고 있으며, 사사기 전체의 역사적 배경을 알림과 동시에 과연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제 가나안에서의 새로운 정착 시대가 시작이 됨을 알려주고 있다.
『여호와께 묻자와』 이는 전쟁의 승패가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믿음인 동시에 전쟁에 임할 태세가 갖춰져 있음에 대한 표현이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유훈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가나안 땅에 거주하고 있는 거민들을 쫓아내어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나라를 완전히 건설하기 위한 전진을 시작하고 있다. 여호와께 묻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본다. 우림과 둠밈으로(출 28:30; 민 27:21), 혹은 제비뽑기로(수 7:14; 잠 16:33) 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어느 지파가 제일 먼저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는 전쟁을 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묻고 있다. 이는 이스라엘 전체가 한 군대를 이루어서 전쟁을 하던 여호수아 1-10장의 양상과는 달라 보인다. 분배 받은 기업 내에서의 전쟁이기 때문이다.
2-3.『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 주었노라 하시니라 유다가 그의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내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네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하니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
창세기 49장 8-10절에서『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그리스도가 유다 지파에서 나오시게 된다. 유다는 지도자로서 이스라엘 지파들 중에서 가장 많은 군사를 지니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가장 강한 유다 지파를 먼저 택한 이유는 민족의 지도자인 여호수아가 죽고 난 이후에 가나안 정복 정착의 완성에 대해 의기소침해 있을 이스라엘 백성을 격려하고 자신감을 불러 일으켜 가나안 정복 정착 사업을 완성케 하려는 것이다.『이 땅』은 가나안 내의 미정복지를 뜻한다. 아직 미정복으로 남은 땅도 이스라엘에게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창세기 49장 5-6절에서『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여동생 레아를 겁탈한 세겜에 복수하기 위해 시므온과 레위가 할례를 이용하여 그들을 모두 죽인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야곱이 그들을 저주하게 된다. 그러나 레위는 제사장 그룹으로 회복된다. 시므온은 여호수아서를 통해서 보면 유대지파에 부속되는 것이다. 유다와 시므온이 함께 정복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마치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이 영적 전쟁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유다는 그리스도, 시므온은 교회를 상징할 수 있다.
시므온 지파는 자기의 기업을 완전히 차지하기 위한 정복 전쟁에서 유다 지파와 연합을 한 것이다.『너의 제비 뽑아 얻은 땅』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하나님의 언약에 부응하고자 하는 두 지파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4.『유다가 올라가매 여호와께서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그들의 손에 넘겨 주시니 그들이 베섹에서 만 명을 죽이고』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은 가나안의 일곱 족속 중 두 족속이다. 이들은 블레셋 중부와 요단 서편 계곡 및 평원에서 살았다. 브리스는 특별히 알려진 것이 없지만 산간지역에 살고 있었던 듯하다. 베섹은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당시 유다 지파의 진격로가 동쪽으로부터 진입하여 북쪽에 있는 므낫세 지역의 가나안 성읍을 점령하고 이어서 남쪽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진격했기 때문에, 사무엘상 11장 절8의 암몬을 치기 위해 사울이 군대를 소집한 베섹과 같은 곳으로 추측한다.
5-7.『또 베섹에서 아도니 베섹을 만나 그와 싸워서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죽이니 아도니 베섹이 도망하는지라 그를 쫓아가서 잡아 그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르매 아도니 베섹이 이르되 옛적에 칠십 명의 왕들이 그들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이 잘리고 내 상 아래에서 먹을 것을 줍더니 하나님이 내가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하니라 무리가 그를 끌고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니 그가 거기서 죽었더라』
『아도니 베섹』은 베섹이라는 지명과 주권자, 통치자라는 아돈의 합성어로 베섹의 왕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고대 근동 지역에서 패배한 적군의 왕의 신체를 절단한다는 것은 커다란 수치를 안겨주는 행위였다. 뿐만 아니라 군사적 의미에서 엄지손가락을 끊음으로 칼, 활, 창 등의 무기를 사용할 수 없게 하고 엄지발가락이 없으면 걷는 것이 불편하여 전쟁에 나가는 것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에 이런 행동은 전사로서의 기능을 상실케 하는 것이었다.
칠십 왕은 누구인지 기록이 없으나 아도니 베섹에게 정복당한 성읍의 성주나 부족장을 의미하는 듯하다. 당시 가나안은 여러 부족 연맹체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왕들은 가나안의 한 지역이나 성읍 또는 부족을 다스리던 통치자를 말한다. 『상 아래서 먹을 것을 줍더니』 상은 바닥에 앉아 먹기에 편리하게 만들어진, 크기가 작고 키가 낮은 것일 수도 있고 의자를 노고 먹는 탁자일 수도 있다. 상 아래서 먹을 것을 줍는 실제로 칠십 왕들이 상 밑에 들어가서 그런 짓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마치 개와 같이 주인이 먹다가 떨어뜨렸거나 남긴 부스러기를 먹는 광경을 연상케 한다. 그들이 얼마나 비참한 연명을 했는지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이 나의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이는 남에게 보인 손해만큼 가해자가 동일한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동형복수법의 인과응보의 원리를 보여주는 구절이다. 아도니 베섹은 유다의 공격 전에는 칠십 왕을 잔혹하고 무자비하게 다스렸던 권세를 가졌지만, 하나님의 심판 아래서는 무기력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전락하여 똑같은 고통을 당하게 될 처지에서 탄식하고 한탄한 것이다. 그를 예루살렘까지 끌고 간 것은 그가 예루살렘의 왕이었으므로, 예루살렘 성을 지키던 군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려 정복을 용이하게 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영적으로 보면, 아도니는 주 라는 의미의 아도나이에서 나온 것이다. 베섹은 해처럼 떠오르는 의미다.『해처럼 떠 오르는 주』는 태양신(세상의 왕)을 의미한다. 아도니 베섹이 붙잡혀서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잘렸다. 칠십이라는 숫자는 모든 열방 나라를 의미한다. 아도니 베섹은 칠십 군황을 다스리던 권세자였으나 하나님의 징계로 패주하게 되었다. 아도니 베섹은 사탄(세상의 왕)을 상징하는 것이다.
아도니 베섹(사탄)이 유다(그리스도를 상징)에 의해서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이 잘렸다. 세상 왕이 그리스도에 의해 쫒겨난 것이다. 그 장소가 예루살렘이다. 이 모든 것이 내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나의 심령 속에 죄가 왕노릇하는데, 바로 그 왕이 아도니 베섹이라는 것이다.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이 잘렸을 때, 비로소 가난한 자가 되어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다. 그래서 영적 예루살렘인 가나안으로 하나님의 군대가 들어가는 것이다. 온유한 자가 그 땅을 상속받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21장 1절에서『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