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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敬履 1560 1609 長興 而惕 滄浪
1 高敬履 1560 1609 贈司憲府持平高公墓誌銘 幷序○辛丑 墓誌 洪直弼 梅山集
2 高敬履 1560 1609 滄浪高公墓碣銘 庚申 墓碣 宋來煕 錦谷集
3 高敬履 1560 1609 滄浪高公 敬履 墓碣 墓碣 李趾秀 重山齋集
1 고경리(高敬履) 1559~1609. 조선 중기의 유생으로, 자는 이척(而惕)이고 호는 창랑(滄浪)이며, 본관은 장흥(長興)이다. 김장생의 문인으로, 광해군이 즉위한 직후 대북파(大北派) 서인 측을 공격하자, 정철(鄭澈)과 성혼(成渾)을 두둔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이 상소에서 이언적(李彦迪)을 헐뜯었다 하여 상소는 불태워지고 종신토록 금고(禁錮)되었다. 그 뒤 숙종 2년(1676)에 광주(光州)의 운암사(雲巖祠)에 제향되었으며, 지평에 추증되었다. 사계전서(沙溪全書)
2 운암사(雲巖祠)에 …… 봉안 ‘운암사’는 운암서원(雲岩書院)이라고도 한다. 숙종 32년(1706) 지역 유림들의 청원으로 지금의 광주광역시 북구 운암동에 건립하고 조선 중기의 학자 해광(海狂) 송제민(宋濟民, 1549~1602)을 배향하였다. 그 후 숙종 35년(1709)에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의 사촌 동생이자 조선 선조 때의 유생인 창랑(滄浪) 고경리(高敬履, 1559~1609)를 추배하였다. ‘석주 권공’은 권필(權韠, 1569~1612)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여장(汝章), 호는 석주이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문인으로, 성격이 자유분방하고 구속받기 싫어하여 벼슬하지 않은 채 야인으로 일생을 마쳤다. 동료 문인들의 추천으로 제술관(製述官)이 되고, 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으며, 강화에서 많은 유생을 가르쳤다. 유희분(柳希奮) 등의 방종을 임숙영(任叔英)이 공격하다가 광해군의 뜻에 거슬려 삭과(削科)된 사실을 듣고 분함을 참지 못하여 궁류시(宮柳詩)를 지어서 풍자, 비방하였다. 이에 광해군이 대노하여 시의 출처를 찾던 중, 1612년(광해군4)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된 조수륜(趙守倫)의 집을 수색하다가 연좌되어 해남으로 귀양 가다가 동대문 밖에서 행인들이 동정으로 주는 술을 폭음하고는 이튿날 44세로 죽었다. 손재집(遜齋集)
3 창랑공(滄浪公)이 …… 것 창랑은 고경리(高敬履, 1559~1609)의 호이다. 본관은 장흥(長興)이고, 자는 이척(而惕)으로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1591년(선조24)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광해군 즉위 후 집권한 대북(大北)세력이 서인(西人) 학통을 공격하자, 최영경(崔永慶)을 죽이고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호종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곤경에 빠져 있던 정철(鄭澈)과 성혼(成渾)을 두둔하는 상소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이 상소에서 선현으로 이름 높은 이언적(李彦迪)을 제외하였다는 이유로 대북세력에 의하여 상소는 불태워지고, 사림의 구호에도 불구하고 종신금고에 처하여졌다. 《국역 광해군일기 즉위년 4월 24일》 기사에 소개된 그의 상소는 다음과 같다. “아, 우리의 도가 동쪽으로 온 지 오래되었습니다. 정여창(鄭汝昌)과 김굉필(金宏弼)은 앞에서 주창하고 조광조(趙光祖)와 이황(李滉)은 뒤에서 이었는데, 능히 네 어진 이의 도를 밝혀 위로 정주(程朱)의 학문을 밝힌 자는 전조의 신하인 성혼(成渾)이었습니다. 대대로 깊은 지조를 지키며 산림에 숨어 도의에 잠기고 경훈(經訓)을 탐색하여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정심(誠意正心)의 공을 밝혔습니다. 인군을 인도하여 백성에게 혜택이 되게 하는 뜻과 세상을 경륜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재주를 가지고, 말과 행동은 예의로 나아가고 물러감은 의리로 하였습니다. 나아가 조정에 있을 때는 지성으로 인군을 도에 인도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고, 물러나 재야에 있을 때는 부지런히 사문(斯文)을 일으키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아, 지위는 비록 정경(正卿)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조정에 있었던 것은 몇 년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쌓아 온 도덕은 비록 사업에 제대로 펴지 못하였으나, 나라 사람이 본받고 사림들이 중히 여기었으니, 사물에 미치는 혜택이 또한 많았습니다. 그런데 지난 임인년에 논자들은 ‘성혼이 기축년 옥사에서 최영경(崔永慶)을 사주하여 죽였다.’고 성상을 속여 관작을 추삭(追削)하였습니다. 아, 사람을 사주하여 선비를 죽이는 것은 지극히 불인한 자가 아니면 차마 하지 않는 것인데, 일찍이 어질다고 한 성혼이 이런 일을 하였겠습니까. 논자들은 다만 성혼이 정철과 서로 친한 것을 보고 성혼이 교사하여 죽였다고 하는데, 영경의 옥사는 한때 떠도는 소문에 의해 나온 것이었으며, 재차 국문한 일은 편지가 서로 연루된 데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영경이 옥중에서 병들어 죽은 것은 또한 정철이 한 일이 아니었으니 성혼이 어찌 참여했겠습니까. 성혼과 영경은 서로 사랑하는 정의(情誼)가 있었으며, 원망하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영경이 옥에 갇혀 있을 때 성혼은 마음으로 매우 애석히 여겼을 뿐 아니라 그 아들을 보내어 세 번이나 위문하였으니, 이 어찌 죽이라고 사주하였겠습니까. 당시 역적이 진신(縉紳)의 사이에서 나왔기 때문에 인정이 놀라고 분노하여 정국(庭鞫)이 극히 엄중하였으니, 맹렬히 타는 불에 혹 옥과 돌이 함께 타 버린 일도 있었으나, 이것이 어찌 옥사를 다스린 관리들이 무고하게 죽인 것이겠습니까. 세월이 흘러 역적에 대한 분노의 마음은 점점 해이해지고 원통한 죽음이라는 논의는 점점 성해져 원망을 돌릴 곳이 없자, 옥사를 다스린 정철에게 원망을 돌린 것이며, 또 정철과 서로 친한 사람에게 원망을 돌린 것이었으니, 정철의 원통함이 어찌 영경의 원통보다 심하지 않겠으며, 성혼의 원통함이 어찌 정철의 원통보다 심하지 않겠습니까. 보통 사람들이 품은 원통도 반드시 풀어지는 날이 있는 것인데, 더구나 어진 이로서 무고를 당함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전하께서는 특별히 원통을 씻어 주라는 명을 내리어 오래도록 답답했던 선비의 기운을 진작시키소서. 정철은 청백하고 곧은 사람입니다. 비록 일을 처리할 적에 소홀한 점이 없지 않으나 본심을 살펴보면 충성스럽고 진실한 외에는 다른 뜻이 없습니다. 청백하고 진실한 신하로서 이름이 죄적(罪籍)에 실려 있어 품고 있는 원통함이 풀리지 않고 있으니, 전하께서는 아울러 불쌍히 살피소서.”
請流高敬履仍請五賢從祀疏
서명 (역주) 성은선생일고 : 城隱先生逸稿
원서명 城隱先生逸稿
저/편자 신흘 (申仡 , 1550 ~ 1614) 저
저작시기 17 세기
분류사항 집부(集部) 별집류(別集類)
성은선생일고(城隱先生逸稿) 신흘 신해진 역락 2009
(207) 남계 이보의 죽음을 애도함 輓李南溪(輔)-50(208) 상소(疏)
오현 종사를 청한 고경리의 유배를 청하는 상소 請流高敬履仍請五賢從祀疏-51(209)
정인홍의 문순공 이황을 무고한 것에 대한 분별을 청하는 상소 請辨鄭仁弘誣詆文純公李滉疏-59(218)
[부록] 城隱先生逸稿 영인-305 참고자료 양방예열전 楊邦乂列傳-33 인설 仁說 / 주희(朱熹)-36 옥새론 玊璽論 / 박지원(朴趾源)-41 고경리 상소문 高敬履 上疏文-57 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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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일기[중초본] 2권, 광해 즉위년 4월 24일 庚辰 8번째기사 1608년 명 만력(萬曆) 36년
성혼의 무죄를 밝히려는 전라도 유생 고경리 등의 상소문
전라도 유생 고경리(高敬履) 등이 상소하였다.
"아, 우리의 도가 동쪽으로 온 지 오래되었습니다. 정여창(鄭汝昌)과 김굉필(金宏弼)은 앞에서 주창하고 조광조(趙光祖)와 이황(李滉)은 뒤에서 이었는데, 능히 네 어진이의 도를 밝혀 위로 정(程)·주(朱)의 학문을 밝힌 자는 전조의 신하인 성혼(成渾)이었습니다. 대대로 깊은 지조를 지키며 산림에 숨어 도의에 잠기고 경훈(經訓)을 탐색하여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정심(誠意正心)의 공을 밝혔습니다. 인군을 인도하여 백성에게 혜택이 되게 하는 뜻과 세상을 경륜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재주를 가지고, 말과 행동은 예의로 나아가고 물러감은 의리로 하였습니다. 나아가 조정에 있을 때는 지성으로 인군을 도에 인도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고, 물러나 재야에 있을 때는 부지런히 사문(斯文)을 일으키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아, 지위는 비록 정경(正卿)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조정에 있었던 것은 몇 년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쌓아온 도덕은 비록 사업에 제대로 펴지 못하였으나, 나라 사람이 본받고 사림들이 중히 여기었으니, 사물에 미치는 이택(利澤)이 또한 많았습니다.
그런데 지난 임인년057) 에 논자들은 ‘성혼이 기축년 옥사에서 최영경(崔永慶)을 사주하여 죽였다.’고 성상을 속여 관작을 추삭(追削)하였습니다. 아, 사람을 사주하여 선비를 죽이는 것은 지극히 불인한 자가 아니면 차마 하지 않는 것인데, 일찍이 어질다고 한 성혼이 이런 일을 하였겠습니까. 논자들은 다만 성혼이 정철과 서로 친한 것을 보고 성혼이 교사하여 죽였다고 하는데, 영경의 옥사는 한때 떠도는 소문에 의해 나온 것이었으며, 재차 국문한 일은 편지가 서로 연루된 데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영경이 옥중에서 병들어 죽은 것은 또한 정철이 한 일이 아니었으니 성혼이 어찌 참여했겠습니까. 성혼과 영경은 서로 사랑하는 정의(情誼)가 있었으며, 원망하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영경이 옥에 갇혀 있을 때 성혼은 마음으로 매우 애석히 여겼을 뿐 아니라 그 아들을 보내어 세 번이나 위문하였으니, 이 어찌 죽이라고 사주하였겠습니까. 당시 역적이 진신(縉紳)의 사이에서 나왔기 때문에 인정이 놀라고 분노하여 정국(庭鞫)이 극히 엄중하였으니, 맹렬히 타는 불에 혹 옥과 돌이 함께 타버린 일도 있었으나, 이것이 어찌 옥사를 다스린 관리들이 무고하게 죽인 것이겠습니까. 세월이 흘러 역적에 대한 분노의 마음은 점점 해이해지고 원통한 죽음이라는 논의는 점점 성해져 원망을 돌릴 곳이 없자, 옥사를 다스린 정철에게 원망을 돌린 것이며, 또 정철과 서로 친한 사람에게 원망을 돌린 것이었으니, 정철의 원통함이 어찌 영경의 원통보다 심하지 않겠으며, 성혼의 원통함이 어찌 정철의 원통보다 심하지 않겠습니까.
보통 사람들이 품은 원통도 반드시 풀어지는 날이 있는 것인데, 더구나 어진이로서 무고를 당함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전하께서는 특별히 원통을 씻어주라는 명을 내리어 오래도록 답답했던 선비의 기운을 진작시키소서. 정철은 청백하고 곧은 사람입니다. 비록 일을 처리할 적에 소홀한 점이 없지 않으나 본심을 살펴보면 충성스럽고 진실한 외에는 다른 뜻이 없습니다. 청백하고 진실한 신하로서 이름이 죄적(罪籍)에 실려 있어 품고 있는 원통함이 풀리지 않고 있으니, 전하께서는 아울러 불쌍히 살피소서."
[註 057] 임인년 : 1602 선조 35년.
○全羅道儒生高敬履等上疏: "嗚呼! 吾道之東久矣。 鄭汝昌、金宏弼倡之於前, 趙光祖、李滉繼之於後, 能明四賢之道, 而上遡程、朱之學者, 先朝臣成渾其人也。 世守幽貞, 晦迹山林, 沈潛道義, 探賾經訓, 明格致誠正之功。 抱致君澤民之志, 負經世濟物之才, 言動以禮, 出處以義。 進而在朝廷, 則惓惓以引君當道爲己責; 退而在丘園, 則孜孜以興起斯文爲己任。 致位雖至正卿, 立朝未滿 (數) 年, 其道德之薀, 縱未能措諸事業, 國人有所矜式, 士林倚以爲重, 則其利澤之及物者亦多矣。 往在壬寅年間, 論者以渾爲嗾殺崔永慶於己丑之獄, 熒惑天聽, 追削官爵。 噫! 嗾人殺士, 非至不仁者不忍爲, 曾謂渾之賢而有是哉? 論者只見渾與鄭澈相善, 謂渾嗾殺, 永慶之獄出於一時之流聞, 再鞫出於簡辭之相連, 則永慶之瘐死獄中, 亦非鄭澈之所爲, 渾何與焉? 渾於永慶, 有相愛之情, 無相怨之心。 方永慶之繫獄也, 不但心甚惜之, 爲遣其子再三致問, 則此豈嗾殺之哉? 當時逆賊出於搢紳之間, 人情駭憤, 庭鞫至嚴, 猛火之烈或有俱焚, 是豈按獄之官所構殺也? 時移歲改, 憤逆之心漸弛, 冤死之論寢盛, 無所歸怨, 歸怨於按獄之澈, 又歸怨於澈之相善之人, 則澈之冤, 豈不有甚於永慶之冤, 渾之冤, 豈不又甚於澈之冤乎? 凡人抱冤, 在所必伸, 而況賢者之被誣乎? 伏願殿下特下伸雪之命, 以振久鬱之士氣焉。 至如鄭澈, 淸直人也。 雖其處事之際, 不無疎迂之失, 而原其本心, 忠亮無他。 以淸直忠亮之臣, 名載罪籍, 抱冤莫伸, 伏願殿下竝憐察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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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일기[중초본] 2권, 광해 즉위년 4월 25일 辛巳 5번째기사 1608년 명 만력(萬曆) 36년
유석증 등이 김공량에 대한 성명을 환수할 것을 계청하다
지평 유석증 등이, 김공량(金公諒)에 대해 성명을 환수하라고 계청한 다음, 아뢰기를,
"우리 나라 이학(理學)의 선비로는 다섯 어진이058) 보다 훌륭한 사람은 없습니다. 선왕께서 첫해에 유신에게 명하여 《유선록(儒先錄)》을 만들어 올리게 한 다음 특별히 시호(諡號)를 내리어 온 나라 선비로 하여금 본받을 곳이 있게 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이언적(李彦迪)을 태묘(太廟)에 배향하였으니, 선비를 높이고 도를 중히 하는 뜻이 극진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인심이 바르지 못하고 의리가 어두워 식자들이 한심하게 여긴 지 오래이긴 합니다만, 이번 유생 고경리(高敬履) 등의 상소를 보니 다만 네 어진이의 이름만 들고 어언적을 빼버린 대신 성혼으로 이어놓았으니, 망령됨이 그지없습니다. 유윤(惟允)의 직임을 맡은 정원이 사유를 갖추어 계품했어야 할 것인데 우매하여 살피지 못하고 관례만 따라 입계하였으니, 극히 잘못된 것입니다. 색승지를 추고하소서.
이와 같이 근거 없는 소장은 비록 따질 것조차 없겠으나, 문교(文敎)를 숭상하여 교화를 일으키는 날에 있어 만일 통렬하게 지척하여 선비들의 방향을 바르게 하지 않으면, 도깨비같은 무리들이 앞으로 연달아 일어나 우리의 도에 해를 끼침이 끝이 없을 것입니다. 일찍이 듣건대 영락(永樂)059) 의 사이에 요주(饒州)의 사인(士人)들이 상서하여 주돈이(周敦頣)·주희(朱熹) 등 여러 어진이를 지척하니, 각신 양사기(楊士奇)가 그 상소를 불살라 물리쳐 버릴 것을 청하였다고 합니다. 이제 이 관례를 따라 소장을 태학(太學)에 내려 불살라 버리라 명한 다음, 다사(多士)들을 깨우쳐 편파와 사특함을 막아 발본색원한다는 뜻을 보이어야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나의 뜻은 이미 하유하였으니, 이는 따를 수 없다. 소장을 불사르는 것은 윤허한다."
하였다.
[註 058] 다섯 어진이 :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註 059] 영락(永樂) : 명 성조의 연호.
○持平兪昔曾等 司憲府啓曰請金公諒還收成命。 "我朝理學之儒, 莫盛於五賢。 先王初年, 命儒臣撰進《儒先錄》, 特賜易名, 俾一國之士, 得有所矜式, 而李彦迪則配享太廟, 其崇儒重道之意, 至矣盡矣! 近來人心不正, 義理晦塞, 識者之寒心久矣。 今見儒生高敬履等上疏, 只擧四賢之名, 削去李彦迪, 繼之以成渾, 悖妄極矣。 政院任惟允之責, 所當具由啓稟, 而懵不致察, 循例入啓, 至爲非矣。 請色承旨推考。 如此胡亂之疏, 雖不足校, 而當此右文興化之日, 若不痛加斥絶以正士趣, 則魑魅妖怪之徒, 將接迹而起, 貽害於斯道者無窮矣。 嘗聞永樂間, 饒州士人上書斥濂、閩諸賢, 閣臣楊士奇請焚其書而斥之。 今依此例, 命下其疏于太學, 使之燒火, 曉諭多士, 以示距詖息邪、拔本塞源之意。" 答曰: "予意已諭, 玆不從之。 焚疏事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