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退溪先生文集卷之十二 / 書 / 擬與榮川守論紹修書院事 丙辰○郡守安瑺卽文成公之後
滉再拜。滉聞書院諸生。自春散去。至今歲盡。而猶未復聚。心竊嘆恨。不知所以爲計也。國家之許立書院。何爲也哉。將非尊賢養士樂育人材之地也乎。金仲文爲其有司。所當遵國家之美意。敬謹其職。使多士樂就之。可也。乃反倨傲鮮腆。視諸生如小兒。至發鄙賤之語。則諸生之激怒。空院而去。豈可謂諸生之過也哉。不請於朝。而徑遞仲文之任。韓守琦則固爲非也。然仲文之仍在其任。實亦難矣。爲仲文計。於此尤當慚悔自責。屈己謝過。至誠至懇。則諸生之意。釋然自解。仲文猶爲善人。而書院無一事矣。仲文則不然。懷忿懟挾猜憾。敵諸生而必欲納之於罪罟。因是而致有朝廷之推問。則非唯儒冠被捉而庭詰。其身亦未免於縲絏。此則仲文之失。至再愈大。而亦不善爲身謀者也。滉聞之。過而不改。是謂過矣。又聞之。過而能改則無過。仲文雖有再過。能改則猶爲無過人矣。近聞。仲文尙不知悔。乃攘臂大言曰。我見某某。必不擇梃刃而辱之。又曰。此事終必有士林之禍。嗚呼。仲文其信有此言乎。其或不然。而傳之者過也。傳之者過。則仲文幸矣。使誠有是言。則其能改過而從善。可必乎。夫以仲文之鴟張如是。彼爲士者。前見儒冠之辱。後聞恐嚇之言。以懷恥之心。兼畏禍之慮。其不肯復入書院。亦何足怪哉。城主初爲榮郡。士林相賀。以爲文成公之後。來守旁邑。必有力於書院。今則大失望矣。然而士林非謂城主不力於書院。謂盡力而反有害也。何者。仲文之爲人。滉亦初甚款待。以其有功於書院也。今則不能不以爲非。以其失待士之道而壞院事也。伏想城主之厚於仲文。亦以爲書院故也。然則其失待士壞院事之過。城主何不以爲非而反護之乎。有功則以爲功。公也。有過則以爲過。亦公也。何容心哉。一於公而已。何患士心之不服也。且彼仲文。本一鄕里之人耳。非有文行學識之異。特以幹院之勞。爲周景遊所許。爲諸相所念。又爲城主所厚。凡若是者。豈欲使彼終至於逐士空院。假勢逞臆。以陵脅列郡之縫掖哉。仲文他過。不必問其有無。而只此一事。城主試平心而熟察之。寧不洞知其非也。孔子曰。愛之。能勿勞乎。忠焉。能勿誨乎。城主若知仲文之非。而不誨而改之。是厚仲文。適所以薄仲文也。奉書院。乃所以棄書院也。城主何不反而思之曰。彼書院。爲尊賢養士而設也。仲文失待士之道。吾右仲文而非諸生。吾亦過矣。又推此心而曉仲文曰。彼書院。爲尊賢養士而設也。汝侮諸生而致空院。汝之前功安在。諸相所以許汝之意。又何如哉。於是而反覆深惟之曰。吾不改此過。無以告吾先祖之靈。而負國家立院之意也。則仲文亦必觀感而幡然悟曰。吾不改此過。無以見周先生於地下。而負諸相厚我之意也。以是深陳旣往之悔。顯示能改之道。君子之過也。如日月之食。過也。人皆見之。更也。人皆仰之。士林孰不感激而慕城主之高義乎。不但如是而止耳。豐有黃仲擧。榮有朴重甫。先達者。後進之望。而一境之倡也。城主誠能躬駕於此兩人而懇起之。約日而會于書院。兩人又以書各告其邑中之士而招延之。士必雲集。而無敢後之者。二郡之士旣集。則遠近聞風而爭赴之矣。能如是大更張。使書院之規模。增光而益恢。則庶幾副人之始望。不然。以訑訑之聲音顔色。間誘其易動易制者一箇半箇。而遣之入學。以求食於咄啐之餘而曰。如是足以爲書院。則是書院之名雖在。而書院之實已亡矣。且夫屈己而下士。大夫之美事也。卑身而就食。士子之所恥也。今城主不屈於士。而欲士之屈就書院。是城主見美而不取。士子知恥而自蒙。古所謂人喪其寶者。正如是。豈不惜哉。豈不傷哉。又況日月易失。人事難必。諸生之志未遽回。及瓜之期或已至。竹溪之風月凄涼。廈屋之絃誦寂寥。烟沈草沒。見者傷嗟。則雖使如仲文者十輩。能守廟宇。不廢春秋之香火。滉恐文成公之靈。不肯顧享於斯。而周景遊之魂。亦必抆淚於泉下也。滉之欲進此言。久矣。鑑無因之戒。而不敢發也。適聞城主之過縣。而略布之如右。不知城主以滉言爲何如也。嘉靖三十五年十有二月朔日。滉拜。
[주-D001] 敵 : 敵字上。一本。有力字。
퇴계선생문집 제12권 / 서(書) 1 / 소수서원(紹修書院)의 일을 논하여 영천 군수(榮川郡守)에게 주려 하다 병진년(1556, 명종11) ○ 군수 안상(安瑺)은 바로 문성공(文成公)의 후손이다.
나는 두 번 절을 올립니다. 내가 들으니, 서원의 유생(儒生)들이 봄부터 흩어져 이해가 다 가도록 아직 다시 모이지 않는다 하니 마음으로 탄식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국가에서 서원의 설립을 허락한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장차 어진 이를 높이고 선비를 길러서 즐거이 인재를 육성하는 곳으로 삼으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김중문(金仲文)이 유사(有司)가 되었으면 국가의 갸륵한 뜻을 받들어 그의 직분을 공경히 수행하여 많은 선비로 하여금 기꺼이 오도록 했어야 하는데, 도리어 거만하고 자만하여 유생들을 아이 취급하면서 심지어 비천한 말까지 내뱉었으니, 유생들이 격노하여 서원을 비우고 떠난 것이 어찌 유생들의 탓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조정에 주청(奏請)하지 않고 앞질러 김중문의 직임을 바꿔 버린 것은 한수기(韓守琦)가 실로 잘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김중문이 그냥 그 직임에 있는 것도 실로 어렵습니다. 김중문의 입장에서는 이 상황에서 더욱 참회하고 자책하여 몸을 굽혀 사과하기를 지극히 정성스럽고 간절하게 했다면, 유생들의 마음도 석연하게 풀리고 김중문도 오히려 선인(善人)이 되었을 것이며, 서원에도 아무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김중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분한 마음을 품고 시기와 악감을 지닌 채 유생들을 적대시하여 기필코 죄망(罪網)에 몰아넣으려고 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조정에서 추문(推問)이 있게 되어 유관(儒冠)을 쓴 선비들이 붙잡혀서 조정에서 힐문을 당하였을 뿐 아니라 그 자신도 결박됨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리하여 김중문의 잘못이 재차 더 커지게 되었으니, 자신을 위해서도 제대로 도모하지 못한 것입니다. 나는 들으니, 허물이 있는데도 고치지 않는 것이 곧 허물이라 하며, 또 허물을 저지르고 고친다면 허물이 없다고도 합니다. 김중문이 거듭 잘못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고친다면 그래도 잘못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들으니 김중문이 아직도 뉘우칠 줄 모르고 팔뚝을 걷어붙이고 “내가 누구누구를 만나면 반드시 몽둥이거나 칼이거나 가리지 않고 욕을 보이겠다.”고 큰 소리친다 하며, 또 “이 일이 종당에는 사림(士林)에 화를 불러올 것이다.”라고 한답니다. 아, 김중문이 정말 이런 말을 했단 말입니까. 어쩌면 그렇지 않고 전달하는 자가 잘못한 것입니까. 전하는 자가 잘못 전했다면 김중문에게는 다행이지만, 가령 정말 이런 말을 하였다면 그가 허물을 고치고 선을 따르리라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김중문의 행패가 이와 같으니, 저 선비 된 자들이 앞서는 유관을 쓴 자들이 곤욕을 당하는 것을 보았고 뒤에는 공갈 협박하는 말을 들어 치욕스러운 마음에 화를 두려워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으니, 그들이 다시 서원에 들어가려 하지 않는 것이 무엇이 이상하겠습니까.
성주(城主)께서 처음 영천 군수가 되었을 때, 사림에서는 서로 치하하기를, 문성공의 후손이 와서 이웃 고을의 수령이 되었으니, 틀림없이 서원의 일에 힘쓸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제는 크게 실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림에서는 성주가 서원에 힘을 쓰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힘을 다하기는 하나 도리어 해가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김중문이란 사람을 나도 처음에는 그가 서원에 공로가 있다 하여 매우 너그럽게 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가 선비를 대접하는 도리를 그르치고 서원의 일을 망친 것을 잘못이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성주께서 김중문을 후하게 대하는 것도 서원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가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를 그르치고 서원을 망친 잘못을 성주는 어째서 그르다고 하지 않고 도리어 두둔하십니까. 공이 있으면 공이 있다고 하는 것이 공정하며, 허물이 있으면 잘못이라고 하는 것이 또한 공정한 것입니다. 어찌 사사로운 마음을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한결같이 공정하게 한다면 어찌 선비들의 마음이 복종하지 않을까 걱정하겠습니까. 또 저 김중문이란 사람은 본래 일개 시골 사람일 뿐입니다. 문장이나 덕행이나 학식이 남보다 뛰어난 데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서원의 일을 맡아온 공로로 주경유(周景遊)에게 인정을 받아 여러 재상들이 유념해 주고 성주의 후대도 받게 된 것뿐입니다. 무릇 이렇게 해 준 것이 어찌 그로 하여금 마침내 선비를 쫓아내어 서원을 비우고 위세를 빌려 제 마음대로 교만을 부려서 여러 고을의 선비들을 능멸하고 위협하게 하도록 하려는 것이었겠습니까. 김중문의 다른 잘못의 유무는 따질 것도 없이 이 한 가지 일만을 성주가 공평한 마음으로 자세히 살핀다면, 어찌 그의 허물을 뚫어 보지 못하겠습니까. 공자가 이르기를 “사랑한다면 수고롭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충성한다면 깨우쳐 주어야 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성주가 만약 김중문의 잘못을 알고도 깨우쳐서 고치게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김중문을 후대한다는 것이 도리어 박대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되며, 서원을 받든다는 것이 곧 서원을 버리는 것이 됩니다. 성주는 어찌하여 “저 서원은 선현을 높이고 선비를 기르기 위하여 설치한 것이다. 김중문이 선비를 대접하는 도리를 잃었으니, 내가 김중문을 편들고 유생들을 그르다고 하면 나도 잘못이다.”라고 돌려 생각지 않습니까. 또 이러한 마음을 미루어 김중문을 타일러 말씀하기를, “저 서원은 선현을 높이고 선비를 기르기 위하여 설치하였다. 네가 유생들을 업신여겨서 서원을 비우게 만들었으니 너의 지난날의 공로가 어디 있으며, 재상들이 너를 인정해 준 후의를 어찌하겠느냐.” 하고, 이에 되풀이하여 깊이 생각하여, “내가 이 허물을 고치지 않으면 나의 선조의 신령에게 고할 말이 없으며, 국가가 서원을 설립한 뜻을 저버리게 된다.”고 한다면, 김중문도 틀림없이 보고 감동하여 태도를 바꿔, “내가 이 허물을 고치지 않는다면 주 선생(周先生)을 지하에서 뵈올 낯이 없으며, 여러 재상들이 나를 후대해 주신 뜻을 저버리는 것이다.”라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리하여 지난 허물을 깊이 타일러 주고 고칠 길을 보여 준다면, 군자의 허물은 일식(日蝕)이나 월식(月蝕)과 같아서 허물이 있으면 사람들이 다 보고 고치면 사람들이 다 우러러보는 것이니, 사림의 누군들 감격하여 성주의 높은 의리를 흠모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만 하고 그칠 것이 아니라, 풍기(豐基)에는 황중거(黃仲擧)가 있고 영천에는 박중보(朴重甫)가 있습니다. 선진(先進)들은 후진들이 우러러보는 자이며, 한 지방의 인도자입니다. 성주가 몸소 이 두 사람을 찾으시어 간곡하게 나서도록 하여 날짜를 정하여 서원에 모이도록 하고, 두 사람이 또 각각 그 고을의 선비들에게 편지를 보내 불러들인다면, 선비들은 반드시 구름처럼 모여들어서 감히 뒤처지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두 고을의 선비가 일단 모이게 되면 원근에서 소문을 듣고 다투어 달려갈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크게 경장(更張)하여 서원의 규모를 더욱 확대한다면, 사람들이 당초에 바라던 마음에 거의 부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잘난 체하는 음성과 안색으로 움직이기도 쉽고 제지하기도 쉬운 자 한두 사람을 간간이 유인하여 입학시켜서 야단이나 치는 가운데 녹이나 먹기를 구하면서, 이만하면 충분히 서원이 될 수 있다고 한다면, 서원이란 이름은 있어도 서원의 실상은 이미 없어진 것입니다. 또 몸을 굽혀 선비에게 낮추는 것은 대부(大夫)의 아름다운 일이며, 몸을 비굴하게 낮추어 녹이 있는 곳에 나아가는 것은 선비의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제 성주는 선비에게 굽히지 않으면서 선비가 굽히어 서원에 나오기를 바란다면, 이는 성주는 아름다운 것을 보고도 취하지 아니하는 것이며, 선비는 부끄러운 줄 알면서도 스스로 허물을 무릅쓰는 것이니, 옛사람이 말한 바 사람이 자신의 보배를 잃는다고 한 것이 바로 이러한 일일 것이니, 어찌 애석하지 않으며 마음 아프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세월은 놓치기 쉽고 사람의 일은 기약하기 어렵습니다. 유생들의 마음이 아직 되돌아오기 전에 성주의 임기가 먼저 끝나게 되어 죽계(竹溪)의 모습이 썰렁해지고 큰 집에서 글 읽는 소리도 끊겨 안개에 잠기고 풀로 덮여 보는 이가 마음 아파하고 탄식하게 된다면 김중문 같은 사람 열 명을 시켜서 사당을 지키게 하고 봄가을의 제사를 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문성공의 신령이 아마 이곳을 돌아보고 흠향하려 하지 않으며 주경유의 혼도 틀림없이 지하에서 눈물을 흘릴 것 같아 두렵습니다. 내가 이 말씀을 드리고자 한 지 오래되었으나 관련 없는 일에 참견하지 말라는 경계를 거울삼아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성주께서 이 고을을 지나간다기에 대략 위와 같이 말씀드립니다. 성주께서는 나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가정(嘉靖) 35년(1556, 명종11) 12월 초하룻날 이황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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退溪先生文集卷之十二 / 書 / 擬與豐基郡守論書院事 丁巳○郡守金慶言
滉再拜。去年冬。儒生張某來告滉曰。書院自去春捲堂之後。至今無一人來者。榮川守 安瑺 固要某先往。冀欲諸生因而復聚。愚未知所處。如之何則可也。滉曰。榮守拳拳於書院若此。誠可尙也。然而猶恨其有未盡也。因略道其所以未盡之故。旣而聞榮守以事當過吾縣。擬一書論其事。大槩以爲諸生之空院。以激於金仲文事也。足下右仲文而非諸生。致令仲文益橫。而諸生之辱滋甚。今諸生若無故而復聚。則是諸生之去就不明。而書院之體輕矣。爲足下計。莫若先自咎。以責仲文。以是至誠廣諭於諸生。又躬駕榮,豐二郡先達之鄕居者如朴重甫,黃仲擧輩而懇起之。令約期詣院。而招諸生以入院。諸生宜無敢不至者。如是則足下有下士之美。諸生無自輕之愧云云。已而聞榮守入縣徑去。又聞諸生稍自詣院者多。遂壞藁不敢以示人曰。有是哉。吾見之隘。而吾言之過也。榮守猶不替護院之誠。院之新有司。安駒 又能養士以禮。非求食咄啐之比。庸何傷於士之復往耶。其後。客有過門者。爲滉談院事曰。士有自淸洪來者。有自龍宮來者。皆兄弟聯芳而甚文。一則恒不衣冠而處。任達之人也。一則好嘲謔而善罵人。尙氣之人也。四人。羣士之望也。一唱而百和。書院今不落莫矣。滉聞之。不覺失喜。而又不能無疑於其所爲也。旣而。又因人具聞院中事。則令人悼心失圖。歎息歔欷而不能已也。夫書院何爲而設也。其不爲尊賢講道而設乎。自宋朝四書院之後。漸盛於南渡。而大盛於元明之世。彼數代非無國學鄕校。而必更立書院者。何也。國學鄕校。有科擧法令之拘。不若書院可專於尊賢講道之美意。故或因私立而國寵命之。或國命立之而擇人敎養也。若吾東方。則至當代而後始許立院。所謂因私立而國寵命者。竊仰聖朝之意。亦豈非慕數代之遺風而欲庶幾云云耶。然則冠章甫之冠。衣縫掖之衣。遊於斯。食於斯者。其自處當何如哉。愼齋周侯。創玆偉事。其論事設規。雖未免意高見疎之病。其專於尊賢講道之意。則確乎其不可易矣。故士之來遊者。雖未脫科擧之累。亦未諭講道之方。然猶知重道義。尙禮讓。彬彬乎習於士君子之風。此書院之所以爲貴。而入院之士。或比之登瀛者然也。不幸去年。厄於金仲文辱儒冠而壞院事。斯文之羞極矣。矧今復舊更新之際。遠方名士。不期盍簪。尤當自重其身。率先羣士。勵行檢而美院風。庶不失立院之意。而斯文有賴。今數君子則不然。何其不思之甚耶。且道義之與爵秩。孰貴孰賤。孰重孰輕。以理言之。何啻道義之貴重。以禮言之。爵秩之分。亦安可陵之也。古之士固不屈於人之勢位。然而不過曰彼以其富。我以吾仁。彼以其爵。我以吾義。曰在彼者。皆我所不爲。在我者。皆古之道也云爾。豈凌犯其人。蔑辱衣冠之謂耶。蓋不歆羨不趨附。則我無有自失於彼。不資其勢。不利其有。則彼不得有挾於我。故以匹夫而友天子。不爲僭。以王公而下韋布。不爲辱。此士所以可貴可敬。而節義之名所以立也。今夫郡守。四品之官也。而亦王爵也。其冠帶印符。皆王之命也。其不可慢辱也亦明矣。士子。禮義之宗也。書院。尊賢之地也。彼以禮賢之道來。勤亦至矣。我以呼斥之賤待之。其可乎。子陵加足於帝腹。故人入臥內也。淵明伸脚於州刺。二人在山間也。今郡守。非故人也。秩筵。非二人也。院之講堂。非臥內。又非山間也。且倒懸拳敺。本出於武夫之麤。徵索酒食。濫觴於下流之賤。何可以此地此人。而加此於衣冠之人乎。向非在座先生之彈厭。幾乎擧此事矣。斯不亦所傷之大乎。此則任達之過也。孔子曰。愛親者。不敢惡於人。敬親者。不敢慢於人。大學傳曰。言悖而出者。亦悖而入。恒言或悖。猶患其悖入之辱。而況故辱人之親。以辱吾親者乎。孟子曰。殺人之父。人亦殺其父。殺人之兄。人亦殺其兄。非自殺之也。一間耳。噫。彼辱人之親者。其不念此理乎。夫奴隷盜賊夷狄禽獸之稱。是何等賤稱。以人之子。呼吾之子。置人親於何等辱地耶。言脫於口。而聲入於耳。脫口之惡。甫加人親。入耳之醜。已及吾親。然則非自辱之也。何啻一間之逼耶。言者不忌。聽者不怒。悖慢淫褻。無所不至。口不可道。耳不忍聞。體慄心痛。天驚鬼議。而恬不知怪。方且肆然自以爲得計。問之則曰。今世不如此同流合汚。身不得保。嗚呼。其亦惑之甚也。辱親則生。不辱親則死。苟有良心者。猶不肯辱親以求生。況不辱親者未必死耶。辱之自彼。人子猶當自以爲罪。況自我辱之耶。若是者。雖謂之不失本心。吾不信也。男女。大慾之所存。夫婦。人倫之所始。故先王之敎。每窒其源而謹其防。今羣居談謔。盡是慾坑之事。穢念常在於襟裾。媟語不憚於閨門。甚至形於筆札。轉相贊誦。拍肩擊節。嗢噱終日。向非先生之彈厭。此書遂傳於世矣。其所以壞人心術。瀆人大倫。不亦甚乎。此則尙氣之過也。嗚呼。書院何爲而設也。其不爲尊賢而設耶。講道而設耶。向也儒冠被人之辱。尙爲院羞。況今儒冠相率。而自辱其行耶。士而如此。何貴於士。書院而如此。何貴於書院。而況此風之作。非一朝一處然也。其所由來者遠矣。四維橫決。如山移海飜。無所底止。一時風俗之壞。至此極也。殊非吉祥之兆。不獨爲一院之憂也。昔五胡之亂。何預於淸談。而尙論者歸咎於王夷甫諸人。矧今之所尙。又非淸談之比也。則豈不關於世道之升降耶。足下爲郡守。凡書院之憂。實郡守之憂也。而當日之事。想足下所目覩也。故聊言之。未知足下以滉言爲可乎。爲不可乎。以爲不可。則滉亦無如之何。如以爲可。則請亟以告諭院中諸生而改圖之。幸甚。抑又聞之。數君子當日旣聞黃仲擧之言。深自悔責。手裂其書。而詣門謝過。此則非常人所可及也。是其人必勇於改過遷善。而卒有立於當世矣。彼院中諸生。見數君子之如是也。亦必相戒。而改前日之非。則不待他時。而院風已稍變。滉言終歸於無用。則尤幸矣。大抵守令能不恥下士。而極意尊賢。諸生知自重其身。而勵志講學。則彼此交盡。而書院之名實得矣。惟足下諒之。嘉靖丁巳二月旣望。李滉。拜。
퇴계선생문집 제12권 / 서(書) 1
서원의 일을 논하여 풍기 군수(豐基郡守)에게 주려 하다 정사년(1557, 명종12) ○ 군수는 김경언(金慶言)이다.
나는 두 번 절을 올립니다. 지난해 겨울에 유생(儒生) 장모(張某)가 나에게 와서 말하기를, “서원이 지난봄에 동맹 휴학을 한 이후로 지금까지 한 사람도 오지 않고 있습니다. 영천 군수(榮川郡守) -안상(安瑺)이다.- 가 굳이 저에게 요청하여 먼저 가서 유생들이 다시 모이게 되기를 바란다 하는데, 제가 처신할 바를 모르겠으니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영천 군수가 서원에 대하여 이렇게 정성을 쏟으니 진실로 가상하다. 그러나 아직 미흡한 데가 있는 것이 오히려 유감이다.” 하고, 인하여 대략 그 미흡한 연유를 일러 주었습니다. 얼마 있다가 들으니 영천 군수가 일이 있어 우리 고을을 다녀간다 하기에 그 일을 논한 편지 한 통을 써서 전달하려 하였습니다. 그 대강은 다음과 같습니다. “유생들이 서원을 비운 것은 김중문(金仲文)의 사건에 격분해서입니다. 그런데 족하(足下)가 김중문을 두둔하고 유생들을 비난하여, 김중문으로 하여금 더욱 전횡하게 만들고 유생들의 치욕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이제 유생들이 만일 까닭없이 다시 모인다면, 이는 유생들의 거취가 분명하지 못하고 서원의 체통이 가벼워지는 것입니다. 족하의 입장에서는 먼저 스스로 자책하고서 김중문을 꾸짖고, 이러한 지극한 정성으로 널리 유생들을 일깨우는 것만 한 방법이 없습니다. 또 영주와 풍기 두 고을에 살고 있는 박중보(朴重甫)ㆍ황중거(黃仲擧)와 같은 선달(先達)들을 몸소 찾아가 간곡히 권고하여 일으켜 그들로 하여금 기일을 정해 서원에 나오도록 하는 한편 유생들을 서원으로 불러들인다면, 유생들도 감히 오지 않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 족하는 선비를 높인다는 미덕이 있게 되고, 유생들도 스스로 가볍게 처신한 수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얼마 있다가 영천 군수가 고을에 들어 왔다가 바로 돌아갔다는 것을 들었고, 또 유생들이 점차 스스로 서원으로 돌아온 자가 많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그 편지 초고를 없애 버리고 감히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고는 “그러면 그렇지. 내 소견이 좁고 내 말이 지나쳤도다. 영천 군수가 서원을 보호하는 정성이 아직 변하지 않고, 서원의 새 유사 -안구(安駒)이다.- 가 또 선비를 예로 길러서 녹이나 구하고 호령이나 해 대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니, 선비들이 다시 간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하였습니다. 그 후에 우리 집을 지나는 손님이 나를 위하여 서원의 일을 말하기를, “선비 가운데 청홍(淸洪)에서 온 사람도 있고 용궁(龍宮)에서 온 사람도 있는데 두 쪽 모두 형제가 나란히 급제하였으며 글도 매우 잘 합니다. 한쪽은 늘 의관을 갖추지 않고 지내니 마음 내키는 대로 활달하게 지내는 사람이고, 한쪽은 조롱과 익살을 좋아하고 남을 꾸짖기를 잘하며 호기를 부리는 사람입니다. 이 네 사람은 여러 선비들이 우러르는 대상으로 한 사람이 부르면 백 사람이 화답하여 서원은 이제 적막하지는 않습니다.” 하였습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희색을 잃고 또 그 행위에 의심이 없을 수 없었습니다. 얼마 있다가 또 어떤 사람을 통해 자세히 서원의 일을 들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상심하여 어쩔 줄 몰라 슬피 탄식하여 마지않게 하였습니다. 무릇 서원은 무엇을 하려고 설치한 곳입니까. 어진 이를 높이고 도를 강명하기 위하여 설치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서원은 송조(宋朝)의 네 서원 이후로 남송(南宋) 시대에 점점 성해지다가 원(元)ㆍ명(明) 시대에 와서 크게 성행하였습니다. 저 몇 대(代)에 국학과 향교가 없었던 것이 아닌데도 반드시 별도로 서원을 건립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국학과 향교는 과거와 법령의 구속이 있어서 서원이 어진 이를 존경하고 도를 강명하는 아름다운 뜻에 전념하는 것만 같지 못해서입니다. 그래서 혹은 사사로이 세우고 나라에서 은명(恩命)을 내리기도 하고, 혹은 나라에서 명하여 건립하고서 사람을 선택하여 인재를 가르치고 양성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 동방에서는 당대(當代)에 와서야 비로소 서원 세우는 것을 허락하였으니, 이른바 사사로이 세우고 나라에서 은명을 내린 경우입니다. 우러러 성조(聖朝)의 뜻을 생각해 보면 어찌 저 몇 대의 유풍을 사모하여 다가가고자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선비의 관을 쓰고 선비의 옷을 입고서 여기서 노닐고 여기서 먹는 자들은 처신을 어떻게 해야 마땅하겠습니까. 신재(愼齋) 주후(周侯)가 이 위대한 사업을 창시할 적에 그 일을 논하고 규범을 정한 것이 비록 뜻은 높되 식견이 소루한 흠이 있음을 면하지 못하였지만, 어진 이를 높이고 도를 강명하는 뜻에 전념한 것은 확고하여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선비로서 와서 유학하는 자는 비록 과거(科擧)의 얽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또 도를 강명하는 방법을 아직 깨닫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도의를 소중히 여기고 예의를 숭상할 줄은 알아서 학행을 겸비하여 사군자(士君子)의 풍도를 익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서원을 소중하게 여기는 이유이며, 서원에 들어온 선비를 혹 신선의 땅인 영주(瀛洲)에 오른 것에 비유하기도 하는 이유도 그래서입니다. 불행히도 지난해에 김중문이 유생들을 욕보이고 서원을 엉망으로 만든 일로 곤액을 당하였으니, 사문(斯文)의 수치가 극에 달하였습니다. 하물며 이제 옛 모습을 회복하고 새롭게 출발하는 때에 먼 곳의 명사들이 기약하지 않고도 모였으니, 더욱 마땅히 그 몸을 자중하고 뭇 선비들에 솔선하여 품행과 절도를 가다듬고 서원의 기풍을 아름답게 해야 서원을 세운 본뜻을 잃지 않고 사문(斯文)이 힘입을 바 있게 될 것입니다. 이제 몇 군자는 그러하지 못하니, 어찌 이토록 생각이 모자란단 말입니까. 또한 도의와 벼슬은 어느 것이 귀하고 어느 것이 천하며, 어느 것이 무겁고 어느 것이 가볍습니까? 이치로 말하면 어찌 도의가 귀중할 뿐이겠습니까마는, 예로 말하면 벼슬의 분등(分等)을 또한 어찌 업신여길 수 있겠습니까. 옛 선비들은 실로 남의 세력과 지위에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는 “그가 그의 부(富)를 내세운다면 나는 나의 인(仁)을 내세우며, 그가 그의 벼슬을 내세운다면 나는 나의 의(義)를 내세운다.” 하며, 또 “그에게 있는 것은 모두 내가 하지 않는 것이며, 나에게 있는 것은 모두 옛날 도(道)이다.”라고 하는 데 지나지 않았으니, 어찌 그 사람을 업신여겨 범하고 그 의관(衣冠)을 멸시하고 욕되게 함을 이르는 것이겠습니까. 대개 부러워하지도 않고 아부하지도 않으면 내 스스로 그에게 실수할 일이 없을 것이며, 그 세력에 도움 받지도 않고 그가 가진 것을 탐내지도 않으면 그가 나에게 세력을 믿고 뽐낼 수도 없습니다. 그 때문에 필부로서 천자를 벗하여도 외람되지 않고, 왕공(王公)으로서 선비에게 낮추더라도 치욕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비가 귀히 여겨지고 공경 받을 수 있는 까닭이며, 절의(節義)라는 말이 성립될 수 있는 까닭입니다. 이제 저 군수는 4품의 관직이나 임금이 내린 벼슬입니다. 그 관디(冠帶)와 인부(印符)는 모두 왕이 명하여 준 것이니, 함부로 욕되게 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선비는 예의의 종주이며 서원은 어진 이를 존중하는 곳입니다. 그가 어진 이를 예우하는 도로 왔으니 지성스러움이 지극한 것인데, 내가 함부로 이름 부르고 천대한다면 그것이 옳겠습니까. 엄자릉(嚴子陵)은 발을 광무제(光武帝)의 배 위에 얹어 놓았지만 그것은 친구로서 잠자리에 함께 들어갔기 때문이고, 도연명(陶淵明)은 강주 자사(江州刺史)에게 다리를 뻗었지만 그것은 두 사람이 산속에 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이제 군수는 친구도 아니고, 서열을 차리는 자리는 두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니며, 서원의 강당은 침실도 아니고 또 산속도 아닙니다. 또 사람을 거꾸로 매달고 주먹으로 치는 것은 본래 무부(武夫)의 거친 행동에서 나오는 것이며, 술과 밥을 토색하는 것은 천한 하류배(下流輩)에서 시작된 것인데, 어찌 이런 자리에서 이런 자가 관원에게 이러한 짓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때 좌중에 있던 선생들이 제지하지 않았더라면 거의 이런 행동을 감행하였을 것이니, 이 또한 일이 크게 그릇되지 않았겠습니까. 이것은 예법을 무시하고 함부로 처신하는 데서 오는 잘못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버이를 사랑하는 자는 감히 남을 미워하지 못하고, 어버이를 공경하는 자는 감히 남에게 오만하게 하지 못한다.” 하였고, 《대학》의 전(傳)에 이르기를, “말이 어그러지게 나간 것은 또한 어그러지게 들어온다.” 하였습니다. 일상적인 말이 혹 어그러진 것도 오히려 어그러지게 들어와 치욕스러울까 두려운데, 하물며 일부러 남의 어버이를 욕되게 함으로써 나의 어버이를 욕되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맹자는 말하기를, “남의 아버지를 죽이면 남도 그의 아버지를 죽일 것이요, 남의 형을 죽이면 남도 그의 형을 죽일 것이니, 스스로 죽이는 것은 아닐지언정 별 차이 없다.” 하였습니다. 아, 저 남의 어버이를 욕되게 하는 자는 이러한 이치를 생각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무릇 종놈ㆍ도적ㆍ오랑캐ㆍ짐승이라는 칭호는 얼마나 천시하는 칭호입니까. 남의 아들을 내 아들이라 부른다면 남의 어버이를 얼마나 치욕스러운 지경에 두는 것입니까. 말이 입에서 나가면 소리가 귀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입에서 나간 폭언이 남의 어버이에게 이르기가 무섭게 귀에 들어오는 추한 소리가 어버이에게 미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곧 스스로 어버이를 욕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어찌 큰 차이가 있겠습니까. 말하는 자도 거리끼지 아니하고 듣는 자도 노하지 아니하여, 어그러지고 교만하며 음란하고 외설됨이 이르지 않는 바가 없어서 입으로 말할 수 없고 귀로 차마 들을 수 없으며, 몸이 떨리고 마음이 아프며 하늘이 놀라고 귀신이 나무라는 데도 태평하게 괴이한 줄 모르고 바야흐로 방자하게 스스로 잘된 계책이라 여깁니다. 물어보면 곧 말하기를, “지금 세상은 이와 같이 시류에 따르고 더러운 것과 영합하지 않으면 몸을 보전할 수 없다.” 하니, 아, 또한 미혹됨이 심합니다. 어버이를 욕되게 하면 살고 어버이를 욕되게 하지 않으면 죽는다 하더라도 진실로 양심이 있는 자는 오히려 어버이를 욕되게 하여 살기를 구하려 하지 않을 텐데, 하물며 어버이를 욕되게 하지 않는 자가 꼭 다 죽는 것도 아님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욕됨이 남에게서 와도 자식이라면 마땅히 스스로의 죄로 여겨야 할 것이거늘, 하물며 나로 말미암아 욕되게 한단 말입니까. 이와 같은 자는 비록 본심을 잃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는 믿지 못하겠습니다. 남녀는 대욕(大慾)이 깃든 바요, 부부는 인륜이 비롯되는 바입니다. 따라서 선왕(先王)의 가르침은 매양 그 근원을 막고 방비를 신중하게 하였습니다. 이제 무리 지어 앉아 담소하고 희롱하는 것이 모두 이 욕심구덩이의 일이라 더러운 생각이 늘 소매와 옷자락 속에 있고, 외설스러운 말을 안방에서도 꺼리지 아니하며, 심지어는 글로 나타내어 돌려가며 찬탄하고 외우며, 어깨를 두드리고 장단을 맞추며 시시덕거리면서 하루해를 마치니, 그때 선생들이 제지하지 않았다면 이런 글이 드디어 세상에 전해졌을 것입니다. 이 또한 사람의 심술을 파괴하고 인간의 큰 윤리를 모독함이 심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호기를 숭상하는 데서 오는 잘못입니다. 아, 서원은 무엇 때문에 설치한 것입니까. 어진 이를 높이기 위하여 설치한 것이 아니며, 도를 강명하기 위하여 설치한 것이 아닙니까. 지난번에 유생들이 남에게 모욕을 당한 것도 서원의 수치가 되는데, 하물며 지금은 유생들이 서로 어울려 스스로 자기의 행실을 욕되게 한단 말입니까. 선비로서 이러하다면 선비를 귀하게 여길 이유가 없고, 서원이 이러하다면 서원을 귀하게 여길 이유가 없습니다. 하물며 이러한 풍속이 시작된 것은 하루아침에 한곳에서만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그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예의(禮義)와 염치(廉恥)가 무너진 것이 산이 옮겨 가고 바다가 뒤집히듯 끝간 곳이 없어 한때의 풍속이 허물어짐이 이렇게 극도에 달한 것입니다. 자못 길하고 상서로운 조짐이 아니며, 일개 서원의 근심만도 아닙니다. 옛날 오호(五胡)의 난이 어찌 청담(淸談)에 관계가 있었겠습니까마는 논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허물을 왕이보(王夷甫)의 무리에게 돌렸습니다. 하물며 지금 숭상하는 바는 더구나 청담에 비할 바가 아니니, 그렇다면 어찌 세도의 오르내림에 관계되지 않겠습니까. 족하는 군수이니, 무릇 서원의 근심은 실로 군수의 근심입니다. 그리고 당일의 일을 족하가 목도하였으리라 생각되어 말씀드리는 것인데, 족하가 나의 말을 옳다고 생각할지 그르다고 생각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르다고 생각한다면 나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만 옳다고 생각한다면 급히 서원의 유생들에게 알리고 깨우쳐 고쳐 나간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또 들으니, 몇몇 선비들이 당일에 황중거(黃仲擧)의 말을 듣고 스스로 깊이 후회하고 자책하여 손수 그 글을 찢고 집으로 가서 사죄하였다 하니, 이는 보통 사람으로선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그 사람들은 분명 개과천선하는 데 용감한 것이니, 마침내는 당세에 확립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저 서원의 유생들도 몇몇 선비의 이와 같은 행동을 보고 틀림없이 서로 경계하여 전날의 잘못을 고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체할 것 없이 서원의 풍속이 점점 변하여 나의 말이 마침내 쓸모없게 될 것이니, 그렇게 되면 더욱 다행이겠습니다. 수령은 선비에게 몸을 낮춤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뜻을 극진히 하여 어진 이를 높이며, 유생들은 스스로 그 몸을 자중할 줄 알아서 뜻을 가다듬고 학문을 강명한다면 피차가 서로 할 일을 다하여 서원이란 이름이 명실상부하게 될 것입니다. 족하는 양찰하시기 바랍니다.
가정(嘉靖) 정사년(1557, 명종12) 2월 16일에 이황은 절하고 올립니다.
[주-D001] 왕이보(王夷甫) : 진(晉)나라 왕연(王衍)으로, 자(字)가 이보(夷甫)인데, 재상이 되어 노장(老莊)의 청담(淸談)만 숭상하고 국가의 실무(實務)를 돌보지 않다가, 나라가 외래 민족(外來民族)에게 망하고 자신도 석륵(石勒)에게 잡혀서 죽었다.
ⓒ 한국고전번역원 | 권오돈 권태익 김용국 김익현 남만성 성낙훈 안병주 이동환 이식 이재호 이지형 하성재 (공역)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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退溪先生文集卷之九 / 書 / 上沈方伯 通源○己酉
豐基郡守李滉。謹齊沐百拜上書于觀察使相公閤下。滉疾病駑鈍。守職無狀。輒有愚懇。敢效一得之見。伏以。郡有白雲洞書院者。前郡守周侯世鵬所創建也。竹溪之水。發源於小白山下。流經於古順興廢府之中。實斯文先正安文成公裕之故居也。洞府幽邃。雲壑窈窕。周侯之理郡。尤以興學育才爲先務。旣拳拳於鄕校。又以竹溪是前賢遺迹之所在。乃就相其地。營構書院。凡爲屋三十餘間。有祠廟以奉享文成公。以安文貞公軸,文敬公輔配之。而旁立堂齋亭宇。以爲諸生遊處講讀之所。掘地得瘞銅若干斤。貿經史子集百千卷以藏之。給息米。置贍田。使郡中諸生員主其事。
郡士金仲文幹其務。招集學徒。四面而至。勸奬誘掖。不遺餘力。
旣而周侯去郡。而文成之後今判書公玹。適來按道。謁廟禮士。凡所以增飾作養之方。極盡其慮。役隷之充。魚鹽之供。無不措畫。使之永賴。自是監司之來。亦皆加意於此而奬勵之。無敢忽矣。夫書院之名。古未有也。昔南唐之世。就李渤舊隱廬山白鹿洞。創立學宮。置師生以敎之。謂之國庠。此書院之所由始也。宋朝因之。而其在中葉。猶未盛。天下只有四書院而已。渡江以後。雖當百戰搶攘之日。而閩浙湖湘之間。斯文蔚興。士學日盛。轉相慕效。處處增置。雖以胡元竊據。猶知首立太極書院。以倡天下。逮我大明當天。文化大闡。學校之政。益以修擧。今以一統志所載考之。天下書院。總有三百餘所。其所不載者。想又多也。夫自王宮國都。以及列郡。莫不有學。顧何取於書院。而中國之所尙如彼。何哉。隱居求志之士。講道肄業之倫。率多厭世之囂競。抱負墳策。思逃於寬閒之野。寂寞之濱。以歌詠先王之道。靜而閱天下之義理。以蓄其德。以熟其仁。以是爲樂。故樂就於書院。其視國學鄕校在朝市城郭之中。前有學令之拘礙。後有異物之遷奪者。其功效豈可同日而語哉。由是言之。非惟士之爲學。得力於書院。國家之得賢。亦必於此而優於彼也。古之明君知其然。故宋太宗之於白鹿洞。因江州守臣周述建請。旣驛送九經。又擢用其洞主明起。其後。直史館孫冕。以疾辭于朝。願得白鹿洞以歸。則從其請。理宗尊尙儒學。如考亭書院之類。皆勑賜扁額以寵榮之。此則中國士風之美。非獨士之自美。亦由於上之所養也。惟我東國。迪敎之方。一遵華制。內有成均,四學。外有鄕校。可謂美矣。而獨書院之設。前未有聞。此乃吾東方一大欠典也。周侯之始建書院也。俗頗疑怪。而周侯之志益篤。冒衆笑。排羣謗。而辦此前古所無之盛擧。噫。天其或者由是而興書院之敎於東方。使可同於上國也。雖然。滉竊以爲敎必由於上而達於下。然後其敎也有本。而可遠可長。不然。如無源之水朝滿而夕除。豈能久哉。上之所導。下必趨之。一人所尙。一國慕之。今夫周侯之所作。雖信奇偉。安公之所成。亦甚完密。然此特一郡守一方伯之爲耳。事不經宣命。名不載國乘。則恐無以聳四方之觀聽。定衆人之疑怪。爲一國之效法。而傳於久遠也。滉自到郡以來。於書院一事。未嘗不欲盡其心焉。魯拙無能。加有羸瘵之疾。略不能振奮激勵。以爲多士之勸。氣艷日就於陵替。朋徒漸至於怠散。大懼昔賢流芳之地。吾東人創見之美。遂至於衰墜。妄欲陳乞于朝。冀蒙萬一之裁幸。而地遠言微。恐懼而不敢發也。伏惟閤下任旬宣之寄。崇敎化之務。凡係一面利害。亦宜陳達。況此聖世宏模之所關乎。儻閤下不以詢蕘爲不可。則取其言而芟正之。轉以聞于上。則欲請依宋朝故事。頒降書籍。宣賜扁額。兼之給土田臧獲。以贍其力。又令監司,郡守。但句檢其作養之方。贍給之具。而勿拘以苛令煩條。至於爲郡守而闒茸癃疾如滉者。閤下亟宜擧其曠闕之罪。顯加貶黜。而請於朝。別揀儒紳之有德望經術。節行風義可爲士林矜式者。爲之郡守。以責其任。如是則書院非止爲一邑一道之學。乃可爲一國之學矣。如是則敎原於君上。士樂於來游。可傳之永久而無壞矣。如是則四方欣慕。爭相效法。苟有先正遺塵播馥之地。若崔冲,禹倬,鄭夢周,吉再,金宗直,金宏弼之居。莫不立書院。或出於朝命。或作於私建。以爲藏修之所。以賁揚聖朝右文之化。明時樂育之盛矣。如是則將見吾東方文敎之大明。可與鄒魯閩越。幷稱其美矣。滉竊見今之國學。固爲賢士之所關。若夫郡縣之學。則徒設文具。敎方大壞。士反以游於鄕校爲恥。其刓敝之極。無道以救之。可爲寒心。惟有書院之敎。盛興於今日。則庶可以救學政之缺。學者有所依歸。士風從而丕變。習俗日美。而王化可成。其於聖治。非小補也。獻芹之誠。如得上徹。則病退溝壑。死無所憾。不勝區區之願。謹昧死奉書以稟云。
滉謹按故事。凡書院必有洞主。或山長爲之師。以掌其敎。此一件大事。尤當擧行。但此須擇於遺逸之士。或閒散之員。而其人才德望。實必有出類超羣之懿。卓然爲一世師表者。乃可爲之。如不得其人。而徒竊其號。則與今敎授訓導之不職者無異。有志之士。必望望而去之。竊恐反有損於書院。故今不敢竝以爲請。此則在閤下之裁度獻替。朝廷之商搉可否何如耳。滉又再拜上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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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실록 20권, 명종 11년 1월 18일 무인 2번째기사 1556년 명 가정(嘉靖) 35년
풍기 군수의 공사에 대해 본도 관찰사가 진상을 조사할 것을 정원에 전교하다
○以禮曹公事, 【豐基郡守韓琦, 奪白雲洞書院所屬之田, 付與寺刹事。】 傳于政院曰: "觀此公事, 實若至此, 則豐基郡守, 豈止於推考而已乎? 使本道觀察使, 作急審驗馳啓可也。"
예조의 공사(公事) 【풍기 군수(豊基郡守) 한기(韓琦)가 백운동 서원(白雲洞書院)에 소속된 전지를 빼앗아 사찰에 준 사건이다.】 로 정원에 전교하였다.
"이 공사를 보건대 사실이 이와 같다면 풍기 군수를 어찌 추고만 하고 말겠는가. 본도 관찰사에게 빨리 그 진상을 조사하여 치계하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