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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彥迪 | 1491 | 1553 | 李迪 | 驪州 | 復古 | 晦齋, 紫溪翁 | 文元 |
晦齋先生集附錄 / [記] / 玉山書院記[許曄]
許曄 | 1517 | 1580 | 陽川 | 太輝 | 草堂 |
權德麟 | 1529 | 1573 | 安東 | 君瑞 | 龜峯 |
陜川郡守權公德麟。晦齋李先生之學徒也。
隆慶六年季秋。以書來曰。爲先生起書院。其記始末。且名齋舍哉。曄受而藏之。疾病遷延。未卽起草。
萬曆癸酉冬。先生之孫浚來傳權君已下世。爲之驚悼。少年志學之士。遽至於是。噫。是何司命也。感念亡友之囑。謹寫拙詞。以付李君之還。竊惟先生之德容。幸及瞻覩於遊泮之日。先生之德行。又得備聞於退溪所撰行狀。景慕而仰嘆者久矣。嘗見大明一統志。程朱所過一憩馬一嘯詠之地。無不起書院。好賢之無已有如是者。況先生之所棲遲做業者乎。
府尹李侯齊閔。採鄕十三之願。躬卜定其基。告于監司。請建書院。出其庫餘。以主其費。鄕老儒士亦盡其力。
李齊閔 | 1528 | 1608 | 全州 | 景誾 |
壬申二月始事。八月訖功。則祠宇與講堂曁東西兩齋及乎前樓總四十餘間。吁盛矣哉。
慶州安康縣之良佐洞則先生之居也。洞之西十五里。有紫玉山。先生建別墅。以爲游息藏修之所。有濯纓,澄心,觀魚,洗心等臺。皆先生所題目。而嘗逍遙自樂者也。今之書院。正當洗心臺之上。上下龍湫。澄泓可愛。予雖未得踐斯境。而據權公之示。已竦然興起矣。予雖未及摳衣於先生之門。而聞先生之語。得見心經附註。竊自尊之。以爲吾之師矣。
遂名其東齋曰敏求。取孔子所訓好古敏以求之之意也。其西齋曰闇修。取朱子自贊中闇然而日修之意也。樓曰納淸。淸者氣也。氣者陽也。登斯樓者納淸而養陽。養陽以凝道。斯其具也。
萬曆癸酉。賜額玉山書院。依然朱子講義之地。名號之美。斯文之光。可謂至矣。嗟夫。予衰且病。無由一入院中。瞻拜祠宇。得與鄕士子講明先生之正學。以致提撕警覺之事。徒爲東望悵悵而已。惟願士子之居是院者。感府尹營建之意。思先生棲息之所。不但慕其道德之高厚。而且學其深潛縝密之功。不但學其深潛縝密之功。而且勵其篤實堅確之志。則先生之鄕。永爲鄒魯之多士。而我國家取材而經世者。益悠遠而無窮矣。豈不于先生有光哉。嗚呼。可不勉哉。
萬曆甲戌孟春。通政大夫成均館大司成知製敎陽川許曄。謹記。
회재집 부록 / 옥산서원기〔玉山書院記〕
합천 군수(陜川郡守) 권덕린(權德麟) 공은 회재(晦齋) 이 선생(李先生)의 제자이다. 융경(隆慶) 6년(1572) 9월에 내게 편지를 보내 “선생을 위해 서원(書院)을 세웠으니, 그 시말(始末)을 기록해 주고 재사(齋舍)의 명칭도 정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내가 편지를 받아서 간직해 두고도 병을 앓느라고 즉시 초안을 잡지 못하였다. 만력(萬曆) 계유년(1573, 선조6) 겨울에 선생의 손자인 이준(李浚)이 찾아와서 권군(權君)이 이미 별세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기에 놀라 애도하였다. 학문에 뜻을 둔 젊은 사람이 갑자기 이렇게 되었으니, 아! 이 무슨 운명이란 말인가. 감회에 젖어 죽은 벗의 부탁을 생각하고는 삼가 졸렬한 글을 엮어서 이군이 돌아가는 편에 부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는 선생의 의용(儀容)을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날에 운 좋게 뵌 적이 있었고, 선생의 덕행을 또 퇴계(退溪) 선생이 지은 행장(行狀)을 통해서 잘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매우 존경하고 우러러 감탄한 지가 오래되었다. 일찍이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를 보니,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지나간 지역은 한 번 말을 멈추었거나 한 번 시를 읊조린 곳이라도 빠짐없이 서원을 세웠다. 명나라 사람들이 현인(賢人)을 한없이 좋아한 것이 이와 같았는데, 더구나 선생이 머물며 학문을 강론한 곳이겠는가.
경주 부윤 이후 제민(李侯齊閔)이 13개 고을 인사들의 바람을 수합하여 몸소 터를 정한 뒤에 감사에게 고하여 서원을 세우기를 청하고, 여유분의 재정으로 그 비용을 담당하였으며, 고을의 원로들과 선비들도 힘껏 이를 도왔다. 임신년(1572, 선조5) 2월에 역사를 시작하여 8월에 완공하였는데, 사우(祠宇)와 강당, 동서 양재(兩齋) 및 전면의 누를 합해서 모두 40여 칸이다. 아, 성대하다.
경주 안강현(安康縣)의 양좌동(良佐洞)은 선생이 사셨던 곳이다. 양좌동에서 서쪽으로 15리 되는 곳에 자옥산(紫玉山)이 있는데, 선생이 별서(別墅)를 지어 노닐며 휴식하고 강학(講學)하는 곳으로 삼았다. 여기에 탁영대(濯纓臺), 징심대(澄心臺), 관어대(觀魚臺), 세심대(洗心臺) 등이 있으니, 모두 선생이 이름을 붙이고 일찍이 소요하며 즐기셨던 곳이다. 지금의 서원이 바로 세심대 옆에 있는데, 아래위의 용추(龍湫)가 맑고 깊어 사랑스럽다. 내가 비록 이곳에 가 보지 못하였지만, 권공이 보내 준 글만 보고도 이미 저절로 공경하는 마음이 들었다.
내가 비록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지는 못했지만, 선생의 말씀을 듣고 《심경부주(心經附註)》를 볼 수 있었기에 내심 스스로 존경하여 나의 스승으로 생각하였다. 마침내 그 동재(東齋)를 ‘민구(敏求)’라고 명명하였으니, 공자(孔子)께서 가르치신 ‘옛것을 좋아하여 민첩하게 구한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그 서재(西齋)를 ‘암수(闇修)’라고 명명하였으니, 주자의 자찬(自贊)에 ‘드러나지 않는 가운데 날마다 닦는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누는 ‘납청(納淸)’이라고 명명하였다. 맑은 것은 기운이고 기운은 양(陽)이니, 이 누에 오르는 자가 맑은 기운을 받아들여 양을 기르고 양을 길러 도(道)가 모인다면 제대로 되었다고 할 것이다.
만력 계유년(1573, 선조6)에 조정에서 옥산서원으로 사액(賜額)하였으니, 주자가 의리를 강론했던 곳을 떠올리게 하는 것으로, 명호(名號)의 아름다움과 사문(斯文)의 영광됨이 지극하다고 하겠다. 아, 내가 늙고 병들어서 한번 서원으로 들어가 사우(祠宇)에 참배한 뒤 고을의 선비들과 더불어 선생의 바른 학문을 강구하여 밝힘으로써 분발시키고 각성시키는 데에 이르지 못하고, 그저 동쪽을 바라보며 아쉬워할 뿐이다.
오직 하나 바라는 것은, 이 서원에서 공부하는 선비들이 부윤이 서원을 건립한 뜻에 감동하고 선생이 머무셨던 곳임을 늘 생각하여, 그 높고 두터운 도덕을 사모할 뿐만 아니라 깊이 침잠하고 치밀하게 연구했던 그 자세를 배우고, 깊이 침잠하고 치밀하게 연구했던 자세를 배울 뿐만 아니라 독실하고 확고했던 뜻에도 힘쓰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선생의 고을이 길이 공맹(孔孟)의 고향인 추로(鄒魯)처럼 많은 선비가 배출될 것이고, 우리 국가에서 인재를 취하여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더욱 유원(悠遠)하여 다함이 없을 것이니, 어찌 선생에게도 영광되지 않겠는가. 아,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력 갑술년(1574, 선조7) 맹춘(孟春)에 통정대부(通政大夫) 성균관대사성 지제교 양천(陽川) 허엽(許曄)은 삼가 기문을 쓴다.
[주-D001] 공자(孔子)께서 …… 뜻 : 《논어(論語)》 〈술이(述而)〉에 “나는 선천적으로 아는 사람이 아니라 옛것을 좋아하여 민첩하게 구하는 사람이다.〔我非生而知之者, 好古敏以求之者也.〕”라고 한 것을 말한다.[주-D002] 주자의 …… 뜻 : 주희(朱熹)의 글에 “선사의 가르침을 명심하고 전현(前賢)의 법규를 받들어 드러나지 않는 가운데 날마다 닦는 것은 어쩌면 거의 할 수가 있으리라.〔佩先師之格言, 奉前烈之餘矩, 惟闇然而日脩, 或庶幾乎斯語.〕”라고 한 것을 말한다. 《朱子大全 卷85 書畫象自警》[주-D003] 주자가 …… 곳 : 주희(朱熹)가 옥산(玉山)에서 학자들에게 도(道)의 요체를 설명하였던 일을 가리킨다. 《朱子大全 卷74 玉山講義》 옥산이라는 지명이 옥산서원과 같으므로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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草堂先生文集 / 記 / 玉山書院記
許曄 | 1517 | 1580 | 陽川 | 太輝 | 草堂 |
陜川郡守權君德麟。晦齋李先生之學徒也。隆慶六年季秋。以書來曰。爲先生起書院。其記始末。且名齋舍哉。曄受而藏之。疾病遷延。未卽起草。萬曆癸酉冬。先生之孫浚。來傳權君已下世。爲之驚悼。少年志學之士。遽至於是。噫。是何司命也。感念亡友之囑。謹寫拙詞。以付李君之還。竊惟先生之德容。幸及瞻覩於遊泮之日。先生之德行。又得備聞於退溪所撰行狀。景慕而仰嘆者久矣。嘗見大明一統志。程,朱所過一憩馬。一嘯咏之地。無不起書院。好賢之無已。有如是者。況先生之所棲遲做業者乎。府尹李侯齊閔。採鄕十三之願。躬卜定其基。告于監司。請建書院。出其庫餘。以主其費。鄕老儒士。亦盡其力。壬申二月始事。八月訖功。則祠宇與講堂曁東西兩齋及乎前樓。摠四十餘間。吁盛矣哉。慶州安康縣之良佐洞。則先生之居也。洞之西十五里。有紫玉山。先生建別墅。以爲遊息藏修之所。有濯纓,澄心,觀魚,洗心等臺。皆先生所題目。而嘗逍遙自樂者也。今之書院。正當洗心臺之上。上下龍湫。澄泓可愛。予雖未得踐斯境。而據權君之示。已竦然興起矣。予雖未及摳衣於先生之門。而聞先生之語。得心經附註。竊自尊之。以爲吾之師矣。遂名其東齋曰敏求。取孔子所訓好古敏以求之之意也。其西齋曰闇修。取朱子自贊中闇然而日修之意也。樓曰納淸。淸者。氣也。氣者。陽也。登斯樓者。納淸而養陽。養陽而凝道。斯其具也。萬曆癸酉。賜額玉山書院。依然朱子講義之地。名號之美。斯文之光。可謂至矣。嗟夫。予衰旦病。無由一入院中。瞻拜祠宇。得與鄕士子講明先生之正學。以致提撕警覺之事。徒爲東望悵悵而已。惟願士子之居是院者。感府尹營建之意。思先生樓息之所。不但慕其道德之高厚。而且學其深潛縝密之功。不但學其深潛縝密之功。而且勵其篤實堅確之志。則先生之鄕。永爲鄒,魯之多士。而我國家取材而經世者。益悠遠而無窮矣。豈不于先生有光也哉。嗚呼。可不勉哉。萬曆甲戌孟春。通政大夫。成均館大司成,知製敎陽川許曄。謹記。
[주-D001] 得 : 晦齋集得字下有見字[주-D002] 也 : 晦齋集無也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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予衰단旦病->且
*予衰且病<晦齋先生集附錄 / [記] / 玉山書院記[許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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穌齋先生文集卷之七 / 贊 / 玉山書院諸額贊
盧守愼 | 1515 | 1590 | 光州 | 寡悔 | 穌齋, 伊齋, 十靑亭, 暗室, 茹芝老人 | 文懿, 文簡 |
體仁廟
生物之春。在我爲仁。體之以身。何不長人。
求仁堂
心德何損。放而曰遠。一念知反。卽此是本。
兩進齋
擇善惟明。反身惟誠。孰重孰輕。聖賢同行。
偕立齋
敬直義方。內外交相。惟操弗忘。天德之光。
無邊樓
靡欠靡餘。罔終罔初。光歟霽歟。游于太虛。
亦樂門
聞風則回。望道而來。不亦樂哉。邦之英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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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도서(輿地圖書) / 慶尙道 / 慶州府 / 壇廟 〔新增〕
玉山書院。 在府北五十里, 安康縣西, 紫玉山東, 華蓋山下。 文元公李彦迪【號晦齋。】所享。 隆慶壬申, 府尹李齊閔刱建於獨樂堂下數百武之地。 癸酉, 自西嶽鄕賢祠移安位板,
廟號體仁。 講堂曰求仁, 東齋曰兩進, 西齋曰偕立, 樓曰無邊, 門曰亦樂。 講堂東有藏經閣, 宣賜書冊及院備書冊累千卷藏焉。
壬辰兵燹後, 藝閣書籍盪然。 萬曆己亥冬, 自弘文館輸去古書二十三帙, 以爲鋟梓之本。 工訖, 還藏之。
萬曆甲戌, 觀察使金繼輝啓請, 賜額玉山書院。
○體仁廟銘: “生物之春, 在我爲仁。 體之以身, 何不長人?”
○求仁堂銘: “心德何損? 放而曰遠。 一念知反, 卽此是本。”
○兩進齊銘: “擇善惟明, 反身惟誠。 孰重孰輕? 聖賢同行。”
○偕立齋銘: “敬直義方, 內外交相。 惟操不忘, 天德之光。”
○無邊樓銘: “靡欠靡餘, 罔終罔初。 光歟霽歟! 遊于太虛。”
○亦樂門銘: “聞風卽回, 望道而來。 不亦樂哉! 邦之英才。”
○銘皆盧守愼所題也。
○李安訥《無邊樓》詩: “萬古山傳紫玉名, 海東夫子晦先生。 無邊樓下梧桐月, 想得當年意味淸。”
○許曄記曰: “陜川郡守權公德麟, 晦齋李先生之學徒也。 隆慶六年季冬, 以書來曰: ‘爲先生起書院。 其記始末, 且名齋舍哉。’ 曄受而藏之, 疾病遷延, 未卽起草。 萬曆癸酉冬, 先生之孫浚來傳權君已下世。 爲之驚悼。 少年志學之士遽至於是。 噫! 是何司命也? 感念亡友之囑, 謹寫拙詞, 以付李君之還。 竊惟先生之德容, 幸及瞻睹於遊泮之日; 先生之德行, 又得備聞於退溪所撰行狀, 景慕而仰歎者久矣。 嘗見《大明一統志》, 程、朱所過一憩馬、一嘯詠之地, 無不起書院。 好善之無已有如是者, 況先生之所棲遲做業者乎? 府尹李侯齊閔採鄕十三之願, 躬卜定其基, 告于監司, 請建書院, 出其庫餘, 以主其費。 鄕老、儒士亦盡其力。 壬申二月始事, 八月訖功, 則祠宇與講堂曁東西兩齋及乎前樓摠四十餘間, 吁! 盛矣哉! 慶州安康縣之良佐洞卽先生之居也。 洞之西十五里有紫玉山, 先生建別墅, 以爲遊息藏修之所。 有濯纓、澄心、觀魚、洗心等臺, 皆先生所題目而常逍遙自樂者也。 今之書院正當洗心臺之上。 上下龍湫, 澄泓可愛。 予雖未得躡斯境, 而據權公之示, 已竦然興起矣; 予雖未及摳衣於先生之門, 而聞先生之語, 得見《心經附註》, 竊自尊之, 以爲吾之師矣。 遂名其東齋曰敏求, 取孔子所訓‘好古, 敏以求之’之義也; 其西齋曰闇修, 取朱子自贊中‘闇然而日修’之義也。 樓曰納淸, 淸者, 氣也; 氣者, 陽也。 登斯樓者納淸而養陽, 養陽以凝道, 斯其具也。 萬曆癸酉。 賜額玉山書院, 依然朱子講義之地, 名號之美, 斯文之光, 可謂至矣。 嗟夫! 予衰且病, 無由一入院中, 瞻拜祠宇, 得與鄕士子講明先生之正學, 以致提撕警覺之事, 徒爲東望悵悵而已。 惟願士子之居是院者, 感府尹營建之意, 思先生棲息之所, 不但慕其道德之高厚, 而且學其深潛縝密之功; 不但學其深潛縝密之功, 而且礪其篤實堅確之志。 則先生之鄕永爲鄒、魯之多士, 而我國家取材而經世者, 益悠遠而無窮矣, 豈不于先生有光哉?”
崇烈祠宇。 在府南三十里, 龍山下。 貞武公崔震立所享。 肅廟庚辰, 府尹李衡祥與鄕人刱建。 辛卯, 賜廟額崇烈祠宇。 迎額後, 士林揭號曰龍山書院, 有講堂曰敏古, 南北兩夾曰興仁、明義, 兩齋曰好德、游藝, 門曰植綱。 藏書閣在講堂南。
權德麟。 文元公李彦迪門人。 號龜峯。 早歲志學。 屢入道薦。 明廟癸丑登別科居魁, 歷典郡邑, 皆有聲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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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全仁 | 1516 | 1568 | 驪州 | 敬夫 | 潛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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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重器 | 1685 | 1757 | 迎日 | 道翁 | 梅山, 梅谷, 艮巢 |
梅山先生文集卷之十二 / 行狀 / 通訓大夫行兵曹正郞龜峯先生權公行狀 甲戌
權德麟 | 1529 | 1573 | 安東 | 君瑞 | 龜峯 |
本貫慶尙道安東府。
曾祖孝忠司直。
祖命錘奉直郞尙衣院直長。
父繼中奉直郞軍資監僉正。妣恭人陽城李氏。儒學敎導世柱之女。
先生諱德麟字君瑞姓權氏。鼻祖諱幸起福州。戴麗祖受姓。拜太師。其後有諱至正仕至佐尹。自是世襲簪纓。入我朝。有諱軫爲世宗朝左議政諡文景。公兄弟俱大顯。其季曰軺文科寺正。移居龍宮。其孫壽海司正。又移迎日。卽先生之高祖也。曾祖司直公又移慶州。因居焉。嘉靖己丑。先生生于州北安康縣。天資穎秀。才致明敏。旣僉正公早世。嚴訓無所及。太恭人憂之曰寡婦之子。人必傲之。以其無所敎也。遂令就外傅受業。不以慈愛弛其課督。令一小奚日夜守其側。若所誦或違課則輒笞奚以警之。以此益竦愧自勵。八九歲。能通文義綴詞句。稍長詣晦齋李先生門。執脩請學。李先生愛其英秀而許之。次第授經書。函丈講質之際。能推明言外之旨。李先生點頭曰此子多有警發人處。與之講學。甚有益也。以其叔父之子妻之。先生孝友出於天。奉太恭人極其誠。日必晨昏定省。養體養志。無不備至。與弟僉正公德鸞怡然共湛樂。人無間焉。葢亦有資於學問之力也。丁未秋。李先生爲羣小所陷。遠謫關西。先生以親老不得隨侍。自以未卒業爲至恨。益自奮迅。日習舊聞。卜居本縣楊月里。龜城下作小齋。扁曰龜峯書舍。杜門靖處。日蒐獵諸史百氏。孶孶不少懈。旁治擧子業。亦無所不能。癸丑應公車選。登對大庭。俱居嵬等。年纔二十五。華聞益大播。而于時邪黨滿朝。忌疾善類。黜補芸閣。是冬聞李先生訃。迎柩於中路。丙辰陞成均館典籍。丁巳遷禮曹正郞。戊午轉兵曹。庚申出爲懷德縣監。準瓜而遞。丙寅除河東縣監。是時朝議稍平。賢路漸開。艶先生文行。方屬以臺閣之望。而先生爲便養計。每求補外。棲遑下邑。公議惜之。然其爲政。必約己惠民。所到皆有聲績。庚午除永川郡守。以家近數月而棄歸。
辛未與鄕間同志。會于安康縣舍。議建書院于玉山。葢李先生伸雪之後。久有尸祝之議。而震剝之餘。士氣摧折。囁嚅莫敢發。先生獨慨然先倡。人服其尊道之誠。
壬申除陜川郡守。益勵淸操。常祿外秋毫無所取。御吏以威燭奸如神。莅民則極其撫愛。爲之興利祛弊。患檢田不公。輸賦不均。設詳定所。審虗實均平之。庸調之煩重者。又多蠲除。使之及時耕作。訓士則重修學校。儲養才俊。課之以經傳。導之以禮讓。涵濡振作。一變其陋習。甫一歲。郡境翕然如戴父母。頗有古循吏之風。秋典武選。以擧子亂場罷歸。婦孺皆喪氣相弔曰我輩失乳矣。到郡之初。弟若嫂在家繼逝。先生捐月俸以助其葬需。而猶不敢多費官帑。貽書孤姪曰喪祭稱家有無禮也。只當隨力營辦。不必過爲浮文。及孤姪請折簡府伯。求得役丁。則拒之曰爲私喪動民力。非國典也。其秉義守法有如此。
癸酉除昆陽郡守。將奉親赴任。啓道有疾而返。以七月十日終于寢。享年四十五。九月二十四日。葬于府北頭流洞負卯原。先兆之次也。訃出。士林皆曰賢君子亡矣。爲之咨
不已。陜人尤驚號涕泣。或奔哭於殯次。或來奠於葬所。是年又斲石爲銘以頌遺愛。其文曰我矦前後。未有我矦。又曰學有淵源。未大厥施。德義之入於公頌者。有不可掩矣。許草堂曄。與先生素爲道義之交。聞其歿。亦爲之傷慟曰少年志學之士。遽至於斯。是何司命也。此非但爲先生惜也。葢爲李先生道學之泯其傳而重惜之也。配淑人驪州李氏。迪順副尉諱苾之女。訓鍊院參軍贈吏曹判書諱壽會之孫。生于嘉靖辛卯。年五十一而卒。祔葬在後。有一男一女。男士毅順陵參奉。女適士人安大海。側室二男士敏,士訥。參奉生一男應生鎭川縣監。縣監生三男炁通仕郞,㶵參奉,燾通德郞。通仕生三男垓,
,埈。參奉生五男仲均,仲坦,仲垕,仲培,仲增。通德生三男塾及第,奎,壆。內外來晜以下。凡三百餘人。今不能盡錄。
夫先生之世。何等世也。己卯網打之餘。理學二字。爲世大禁。李先生方深自韜晦。不肯任師道倡率後學。而先生以鄕里間孤露一丱角。能負笈摳衣於木鐘之地。奉德音受經旨。懇懇有求道之志。斯其過人也遠矣。若使始終陪遊。以畢其願學之誠。則其所以循序進步者。焉可量也。不幸禍酷師門。路阻絶塞。不得隨鵩舍。益聞緖論以博其趣。又不幸而早年登第。爲親奉檄。不得退田廬。私淑後生以永其傳。又不幸而召還旣遲。年壽遽嗇。不得整牙笏立淸朝。少試其經綸之業。噫嘻哉。其亦有命焉乎。遺文散落於兵燹。繼又灰燼於宗家火變。只有對策二試券得以保存。其亦幸也。今讀其遺篇。宏辭直論。健麗豪壯。有如神駒逸蹏駕輕車而奔千里。片舟孤帆帶順風而放大洋。以如許才識。何所用而不可哉。貯瀛館而煥猷華國之手可以展矣。登烏府而憚邪慴奸之筆可以奮矣。而外焉不內。專而不咸。名湮沒於枳棘之間而未大顯於世也。牛刀割雞之歎。豈獨於言子游爲然哉。本鄕章甫以爲先生德學不可泯沒。謀欲祭於社者久矣。至百有餘年而後議遂定。建祠於雲泉洞。始俎豆之。識者皆以爲幸。而纔數年。旋以禁令後新設見撤。可勝歎哉。歲壬申。先生之六世孫淳等訪余梅山下。悒然而曰吾先祖學術行誼。有足以傳示來世者。而小碣闕銘。又年久而泐矣。今方改石乞銘。以圖不朽。敢以善狀屬之子。子其無讓焉。吾曾祖參奉公曾著遺事一篇。而草草多遺漏。輯故蹟塡補而潤色之者。非子不可能。况子爲吾先祖外裔。其可辭乎。余拜而𧬄曰昔余遊漢中。見所謂海東儒林錄。雖未知其何人所編。而歷敍理學淵源頗詳。至我晦齋先生。則曰門人權某官郡守號龜峯。是實國人之所共尊者。爲前輩左袒。在公義不敢辭。而顧淺識末學。忝在外孫之列。雖欲發揮潛光。以示於人。人誰復信之。須改就別人而謀之其可乎。淳等督之愈不止。遂不敢終辭。略取見存文字而敍次之。以俟夫當世立言者之財幸焉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