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시즌 3 팟 캐스트 , 영성 에피소드 25.
구원: 고통(5)
우리는 시즌2 마지막에서 예수님께서는 태어나셨을 때부터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사람들로부터 환호를 받으셨으며 또한 동시에 고난을 당하는 일들이 계속해서 벌어졌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수난을 당하시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엉망진창이 된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고통으로부터 우리가 벗어나게 하시고자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유진 피터슨의 이야기를 빌리면 이런 예수님의 구원은 그리스 신화에서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불을 던져주었던 프로메테우스 이야기하고는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는 정말 다양하게 버전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프로메테우스 이야기는 한 가지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는 비슷하게 통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먼저는 그 당시에 살던 사람들이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신체인 등에 언제 죽을지 정확한 날짜가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프로메테우스가 사람의 삶을 안타까워했던 이유는 사람들이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긍휼히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가 3가지 일을 하였는데, 하나는 사람들이 등에 기록된 자신이 죽을 날을 기록한 날짜를 지워버림으로 말미암아 그가 언제 정확히 죽을지를 모르게 한 것입니다. 이것은 지옥의 신인 하데스가 모르게 만든 것이라 합니다. 두 번째는 프로메테우스는 인간들에게 인간 이상의 존재를 추구하는 마음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체로 머물면서 낙심하면서 죽지말고 더 낳은 신적인 존재로 또는 반신반인적인 존재를 갈망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그것이 프로메테우스가 인간들에게 삶에 희망과 목적을 가지고 살도록 도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프로메테우스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도구인 불을 주었다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때부터 불을 사용하게 된것이라고 합니다. 제우스는 이런 프로메테우스의 행동에 굉장히 화를 냈고 그를 높은 바위산에 묶어두어 독수리가 매일 그의 간을 먹게하는 형벌을 내렸다고 얘기합니다. 이런 것이 프로메테우스의 다양한 버전이 통하는 공통된 장면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이 그리스 신화에 담겨있는 내용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역사속의 고통에 대한 부분이 드러났으며, 한 영웅이 나타나서 그가 사람들에게 더 낳은 존재가 되게끔 희망을 주고 그 희망을 실제로 실천할 수 있는 도구를 주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영웅은 그 일을 한 댓가로 처벌을 받고 고통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프로메테우스가 한 일이 그렇다고 우리가 당하는 현실의 고통에 대한 온전한 반응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얘기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당하셨던 고난과는 다른 점입니다. 프로메테우스는 우리가 고통을 당하는 것을 비인격화 하겠금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비인격화라는 말은 단순히 우리로 하여금 고통을 외면하고 피하게끔 하였고 또는 초능력을 가진 영웅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그런 사람이 와야만 우리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을 믿게끔 만드는 일을 프로메테우스가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제임스 휴스톤은 ‘멘토링 받는 삶’에서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팜된 주님으로부터 멘토링을 받아서 살아가는 삶을 가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주님이 아닌 것에 멘토링을 받게 하는 세속적인 것이 바로 영웅주의가 그중의 하나라고 말합니다.
한 영웅 혹은 지도자를 제대로 세운다면 이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줄 수 있을거야 라는 생각하는 것이 지금의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우리가 2022년 3월쯤에는 향후 5년동안 이 나라의 지도자 대통령을 선출하게 되는데 누구를 뽑을 것인가 그 사람이 이나라의 모든 문제를 잘 해결해 줄거야 라는 식으로 생각하게끔 언론이나 또는 아주 일부 지지자들이 그렇게 전하고 또 사람들은 그렇게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프로메테우스가 가진 잘못된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프로메테우스는 우리가 가진 현실의 조건을 부인하고 새로운 세상을 추구하고 살게끔 만들어 버렸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예수님은 고통의 현실가운데로 들어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프로메테우스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현실 즉 역사를 잘 다룰수 있고 우리 스스로 잘 관리할 수 있다고 전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이 사실을 인정하게끔 이 현실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음! 우리가 우리의 문제를 잘 다룰 수 있어, 이는 아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역사가 복잡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든 문제를 흑 혹은 백으로 쉽게 단정지울 수도 없을뿐더러 굉장히 많은 부분에 있어서 회색지대가 섞여있다는 것입니다. 수 많은 사람의 어떤 이권이나 혹은 생각과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씨줄과 날줄처럼 서로 엮겨 있기 때문에 어떤 초능력을 가진 영웅이 나타나서 우리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줄 수 있다,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영웅에 대한 모습은 좀 다르지요. 그도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끌어안고 일상의 사람들처럼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연약함도 보이고 강점과 약점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때로는 실수하고 실패도 하며 넘어지고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극복해서 마침내는 이겨내는 그런 영웅,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그 영웅을 따라 이겨내야 한다고 얘기하는 영웅주의는 우리에게 동기부여하는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다시 예수님은 결국에는 온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는데 초능력으로 인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무슨 도구를 주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인하여 세상이 주는 고통과 고난을 통해서 결국에는 하나님이 옳지 않다고 고발하는 고발자들이 틀렸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부각시키는 그런 방법으로 세상을 구원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역사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원의 영성이라는 것은 바로 이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먼저 고난이라는 것에 있어서 왜 이렇게 세상에는 고난이 있는가 했을 때 기독교인들이 가져야 할 분명한 인식은 정말 하나님과 동등한 힘을 가지고 있는 악의 존재가 있어서 선하신 하나님과 악한 존재가 대립적으로 싸우고 있다는 식의 인식을 버려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고난과 악은 하나님이 틀렸으며 완전하거나 온전하신 것이 아니며 사랑 그 자체도 아니다 그래서 그것을 고발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고발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비인격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고난을 줌으로 인해서 결국 하나님을 저주하게끔 그래서 마귀조차도 하나님을 저주하게끔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욥기에 나오는 이야기의 가장 큰 맥락이다는 것입니다.
욥이 왜 무엇 때문에 회개를 해야 했을까요. 하나님이 허락하신(물론 마귀가 한 것이지만) 것이잖아요. 욥 자신도 모르게 나의 올바름을 인정해 달라고 계속해서 하나님께 탄원한 그것이 정직한 욥에 있어서는 힘드는 일이교 너무도 갑짝스럽게 당한 말도 안되는 고난이였던 것이지요. 그 고난 때문에 아내까지도 버리고 떠나고 가장 친한 친구 세 친구마저도 ‘너는 하나님께 잘못했으니까 이렇게 벌을 받는거야 빨리 회개해야돼 그렇지 않으면 더 혼날 것야’ 그런식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하나님 앞에 더욱 탄원하는 것이 자신도 모르게 고발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마귀는 하나님께 욥에게 고난을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가 감사하는 것은 가진 것이 많기 때문에 그렇지 가진 것이 없어진다면 하나님을 저주하고 비난할 것이라고 고발합니다. 하나님이 만든 세상은 결국에는 온전하지 않다. 결국 하나님을 고발하기 위하여 그런 고난을 허락해달라고 얘기 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악은 결국에는 그 악이 영적인 존재인든 사탄이든 악마든 루시퍼이든 어떤 존재든 간에 결국에는 사람들에게 고난을 주게끔 하는 일은 결국 하나님이 틀렸다는 것을 고백하게끔하기 위한 이용도구로서 그 고난을 준다는 것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고난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인 것입니다.
이것을 인식해야만 우리가 마치 이 고난을 하나님이 그냥 마치 내버려 두시는 것처럼 오다는 것에서부터 벗어나 바른 인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는 바른 인식은 그 고발이 하나님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고발자의 계략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악마존재의 고발이 틀렸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그 모든 고난을 짊어지고 그 고난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악마가 고난을 줌으로 인해서 그 고난을 당하는 존재가 결국에 하나님을 비난하게 된다면 악마의 고발이 성공한 것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악마의 고발이 성공하지 못한다면 죽는 그 순간까지 악마가 주는 고난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얘기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악마들에게 너희는 나를 이용해서 (비인격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마치 아닌 것처럼 고발하려고 하지만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내는 사람이 한 존재인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있으면 그 고발은 실패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이루신 분이 바로 예수님 이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들어오셔서 그 고난의 문제를 해결하셨다는 것은 즉 구원을 하셨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틀리지 않으셨고 신실하시며 온전하시다는 것을 증명한 것입니다.
그렇게 고난의 문제 구원의 영성에 있어서 하나님이 악마에게 마음대로 해보라고 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렇게 이야기할지라도 결국 우리를 돌보시지 않는 것이라고 하시며, 크게 다를 바가 뭐냐고 얘기 하실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 그분이 직접 오셔서 우리가 당해야 할 모든 고난을 그분이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이기셨다는 것이지요.
‘내 버려둘게, 나는 팔짱을 끼고 그냥 있을거야‘ 가 아니라 그 고난은 너의 고발이 틀렸다는 것을 보이시기 위하여 그분이 창조주로서 모든 것을 버리시고 우리에게 내려오셔서 그 모든 고난을 짊어지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부활하심으로 증명하시고 승리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구상의 그 어떤 신도 인간의 모든 것을 위하여 죽기까지 낮아졌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프로메테우스마저도 신 그 자체는 아니지요. 반신반인의 존재인 것입니다. 반쪽 신이라고나 할 수 있겠지요.
고난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고난이 시작되게끔 한 고발이 틀렸다는 것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내가 너희를 돌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내가 너희와 함께 하는 임마누엘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이시기 위하여 그분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온전히 알아야 우리가 구원의 영성이 무엇인지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고 얘기 할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