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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장
세계 속의 빈첸시오회
The Society in the World
빈첸시오회의 역사(1833~1990년)
GeneralHistoryoftheSociety
“우리 회는 사상의 분열과 혼란을 야기하는 철학적 정치적 이론에 맞서 건전한 학문을 배우는 탁월한 교육의 장이 되어야 한다. 이 학교에서는 사회와 인간의 정신을 혼란케 하는 문제를 논하지 않을 것이며, 지금까지 반목해오던 사람들이 서로 화목하고 사랑하는 법을 익히는 일에만 열중할 것이다. 이는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사랑에 대한 학습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모든 사람과 화해로 이끌어 준다. 이 사랑은 단순하면서도 하느님처럼 무한하고 영원한 것이다.”(프레데릭 오자남).
1831년 11월에 18세의 한 청년이 법학 공부를 마치기 위하여 파리에 왔다. 그 청년의 부모님은 리용에 살고 있었으며 부친은 의사였다. 프랑스가 이탈리아를 지배하던 시절인 1831년 4월 28일에 그는 밀라노에서 독실한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 “나는 열심히 그리스도 신자인 아버지와 성녀다운 어머니의 무릎에서 자랐다.”고 프레데릭은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였다.
그는 당시에 이름을 날리던 리용 대학의 철학 교수 노와르트 신부(Father Noirot)에게서 종교적 정신적 교육을 받았다. 이 신부에 대해 프란시스코 싸르세이는 ‘영혼을 양성하는 탁월한 선생님’이라고 칭했다. 프레데릭은 학보 기사외에도 시모니즘(Simonism)에 대한 반박 소책자를 발간했다.
프레데릭 오자남은 열일곱 살에 이미 라마르틴의 칭찬을 받을 만큼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였다.
당시 파리는 혁명의 여파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불안한 분위기였다. 그러한 곳에 아들을 보낸 프레데릭의 부모는 몹시 불안 해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염려를 덜어준 다행스러운 일은 프레데릭이 파리에 도착하여 곧 유명한 물리 학자 앙드레-마리 앙페르 박사의 집에 머물게 된 것이었다. 그는 리용 출신으로 프레데릭의 부모님과 친한 사이였다. 프레데릭은 그 학자 밑에서 지성적 삶에 매진하였다.
진리에 대한 헌신적 봉사
Devotedtotheserviceoftruth
프레데릭 오자남이 파리에 온 목적은 법학과 문학 연구에만 있지 않았다. 그는 <5세기 문명>의 서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귀중한 축복(신앙)에 감동되어 나는 하느님께 진리의 봉사에 헌신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의 이상은 ‘가톨릭 사상을 토대로 지식을 연마하는 젊은이들, 곧 자기처럼 생각하고 느끼는 젊은 청년들’의 단체를 조직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청년들의 모임이 파리에 있었는데 그것이 곧 베일리(M. Bailly)가 이끄는 'Society of Good Study’였다. 베일리는 1832년에 역사, 법학, 문학, 철학 등 광범위한 문제를 다루는 가톨릭 대학생들의 ‘역사 철학회’를 만들었다.
프레데릭 오자남은 이 학회에서 뛰어난 두각을 드러냈다. 그는 주위 사람들의 인기를 끌 만한 인간적 매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키는 고작 중간치였고 별로 잘 생기지도 않은 몸매에다 성격은 다소 내성적이고 수줍은 편이었다. 그는 늘 수수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으며 조용히 있을 때의 그의 회색 눈동자는 슬픈 듯 보였다. 한마디로 그는 첫눈에 끌리는 사람이 아니었으며 웅변 재능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정렬이 타오를 때면 열변을 토하는 대담성의 소유자였다. 그는 라코르데르(Lacordaire)가 ‘연설자들의 고민’이라고 한 어려운 순간, 곧 연설을 시작할 때의 당혹감만 극복하면 자신의 사상과 소신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오자남은 뛰어난 재능, 비범한 학문(열심히 공부하여 습득한, 그리고 놀라운 기억력으로 보존하는), 나이에 비해 놀라운 정신적 성숙 그리고 발랄한 상상력의 청년이었다. 그는 페네롱(Fenelon)이 ‘고매한 영혼의 강력하고 설득력 있는 힘’이라고 한 투철한 의식으로 청중을 사로잡는 품위 있고 설득력 있는 연설을 했다.
그의 겸손하고 소박한 성격에 마음이 끌린 동료들은 그의 탁월한 지성을 높이 평가하였으며 지도자로 인정하였다. 그 때부터 그는 잣니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모습을 드러냈고 신앙을 옹호하기 위하여 모인 젊은 학생들의 작은 모임을 이끌어 나갔다.
대학에서 페트로슨(Lotrosne)이나 쥬프로아(Jouffroy) 같은 가톨릭을 공박하는 철학 교수들의 강의에서 상처받은 학생들이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과 wln장을 표명하기 위해 오자남을 대표로 선출하였다. 이러한 경우에서도 그는 자신의 임무를 거뜬히 해 냈다. 특히 쥬프로아 교수는 자신의 발언에 대하여 사과를 청할 정도였다. 쥬프로아는 씁쓸하게 그러나 솔직히 자신의 실패를 인정했다.
오자남은 ‘작은 다락방의 베드로 성인’이었다. 그는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서 친구들이 자신을 가톨릭 청년 지도자로 만들려고 한다고 불평을 했다. 그 때 그는 20살도 채 되지 않았다! 라코르데르의 말을 빌리자면, “오자남의 영혼 안에서 모든 것이 신속히 성장하고 있었다.”
오자남 주위의 학생들 중 역사 강의에 나오는 폴 라마슈(Paul Lamache)와 프랑소아 랄리에르(Francois Lallier)는 ‘연구 모임’이라는 작은 모임을 만들었다.
랄리에르가 어느 날 그 소모임의 한 회원과 토론을 하고 있었다. 이것을 듣고
있던 오귀스크는 그런 ‘무의미한’토론에 싫증을 느꼈노라 실토하면서 가톨릭 학생들의 영성모임이나 자선단체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 소식이 오자남과 라마슈에게 전달되었다. 그 때 한 가지 생각이 그들의 머리 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어느 날, 열띤 역사 강의 끝에 그 말이 다시 거론되었다.
신앙에 대한 회의
Faithversusscepticism
바이론의 회의론을 찬양하는 한 학생이 있었는데 그는 가톨릭을 매우 혐오하는 사람이었다. 오자남은 여느 때처럼 가톨릭을 옹호하였다. 그러나 따지고 드는 그 학생의 충격적 발언에 오자남은 강의실을 뛰쳐나오고 말았다.
“자네가 과거를 거론한다면 자네 말이 옳을 수도 있다. 과거의 가톨릭 교회는 훌륭한 일을 했었지. 그러나 지금은 죽은 시체야. 그래. 가톨릭 신자라고 자부하는 자네는 무엇을 했지? 자네의 신앙을 증언하고 자네의 신앙을 받아들이게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느냐 말이야?”
오자남에게 있었던 그 날의 사건에 대하여 그의 형 알퐁소(Alphonse)는 이렇게 회상했다.
“타일란디에가 현관 계단에서 오자남을 만났을 때 그는 반대자들의 도전과 그 정당성에 대하여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타일란디에 역시 방금들은 그 학생의 말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 ‘진정한 가톨릭 신자가 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들은 자문했다. ‘사랑에 대하여 많은 말을 하지 말자. 말보다는 오히려 이를 실천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자.’ 오자남과 타일란디에는 그리스도인의 참사랑을 그토록 늦게 깨닫게 된 것을 부끄러워하며 그 자리에서 당장 겨울에 때려고 아껴 둔 장작을 안고 한 가난한 형제를 찾아갔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실천에 옮겼으며 이들의 성찰에서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Society of Saint Vincent de Paul)가 탄생하게 되었다.
개인적 행동은 반대자들의 도전에 대한 적절한 대응책이 될 수 없었으며 젊은이들의 헌신의 필요성을 완전히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라마슈의 집에서 가진 학습 모임에서 오자남은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생각을 친구들에게 털어놓았다. “나는 호전적인 강의가 아니라 완저닣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자선에만 전적으로 헌신하는 모임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데 자네들은 어떤가? 지금이야말로 행동으로 우리 신앙을 확인할 때라고 생각하지 않나?”
‘반세기 후’인 1882년에 라마슈는 이렇게 썼다.
“그 날의 장면이 기억에 생생하다. 오자남의 눈동자는 슬픔에 잠겨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동시에 뜨거운 정렬로 가득 차 있었지. 그의 영혼의 진면목을 말해 주는 목소리를 듣는 듯했다.”
용기 있는 결단
Acourageousdecision
그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경험보다 정열을 더 많이 가지고 있었으며 삶에서 부딪칠 수 있는 우발 사건들에 서툴렀다. 특히 파리의 생활에 아직 익숙하지 않은 이들은 자신들을 목적지까지 인도해 줄 확실한 길을 찾고 있었다. 법과 대학 2학년 재학 중인 이 네 학생들의 나이는 19, 20, 21살이었고 세 명은 지방 출신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경험 있는 조언자가 필요했다. 그들은 역사 모임 지도자인 임마누엘 베일리를 적임자로 생각했다. 당시 베일리는 결혼하여 부인과 자녀을 두고 있었으며 철학 교수에 <가톨릭 트리뷴>(Catholic Tribune)지의 창설자요 사장이었다. 그는 모든 정렬을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바쳤다.
오자남의 친구들은 오자남을 베일리에게 보내어 자신들의 생각을 전달하고 조언과 협력을 구하도록 하였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방문하며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청년 활동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베일리 부부의 기도와 묵상에 대한 섭리적 응답과도 같았다.
베일리는 이들의 생각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이 전망하는 삶의 형태에 대한 우려를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는 의욕에 차 있는 젊은이들에게 성 에티엔느 본당 사제의 의견을 알아보도록 했다. 장차 에브르의 주교가 될 올리비에 신부는 당시의 많은 교회 인사들처럼, 평신도들의 활동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회의적 자세로 농담을 하며 학생들을 맞았다. 진지하게 열변을 늘어놓는 학생들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신부는 이들의 장한 뜻을 칭찬하며 농담 섞인 어조로 말했다. 오히려 가난한 아동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일에 열성을 쏟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그 신부의 제안을 실패였다. 빈민 아동 교리는 이 학생들이 찾고 있는 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봉사와 나눔의 정신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것이었다.
베일리는 오자남과 그의 동료들의 결단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몇 명 안 되는 숫자로 단체를 세운다는 것은 역부족임을 일러주었다. 그러자 오자남은 즉시 역사 강의에 나오는 친구들 중 펠릭스 클라브와 쥴 드보를 설득해 보겠노라고 했다. 이들은 즉석에서 오자남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제 남은 일은 가끔 모여 회합을 가질 수 있는 장소를 구하는 것이었다.
베일리는 <가톨릭 트리뷴> 사의 편집실을 사용하라고 하면서 2년간 그 모임의 회장직을 맡아 줄 것을 승낙했다. 회장으로서의 그의 체험, 헌신, 권위는 이 젊은이들에게 매우 귀중한 도움이 되었다.
소박한 출범
Ahumblebeginning
첫 번째 모임은 1833년 4월 23일 오후 8시에 있었다. 회원들을 나이순으로 나열하자면 다음과 같다.
대- 임마뉴엘 베일리(Emmanuel Bailly), 44세
대- 폴 라마슈(Paul Mamache), 23세
대- 펠릭스 클라브(Felix Clave), 23세
대- 오거스크 타일랑디에르(Auguste Le Taillandier), 22세
대- 쥴 드보(Jules Devaux), 22세
대- 프랑소아 랄리에르(Francois Lallier), 20세
대- 프레데릭 오자남(Frederic Ozanam), 20세
이들 젊은이들 중 누구도 종교 단체에 소속된 경험이 없었다. 그들은 서로의 의견을 존중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실천하고 교회에 대한 자녀늬 사랑을 간직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베일리가 주관하는 회합은 “오소서, 성령님!”의 기도로 시작하고 영적 독서로는 <준주성범>을 읽었다. 이들은 이 소모임의 기본 활동을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가는 것으로 결정했다. 비록 이렇게 결정은 했지만 그 일에 관하여 정작 아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사랑의 딸회의 로잘리 랑위 수녀의 지도를 받기로 했다. 로잘리 수녀는 자선 회관의 식료품 분배 담당자였다. 쥴 드보를 그 수녀에게 보내 노동자 가족들의 주소를 알아보도록 하였다. 로잘리 수녀는 젊은 쥴을 매우 친절히 맞아 주었다. 이들은 가능한 한 금전적 도움이 아닌 물질적 도움을 주기로 합의를 보았다.
서로의 유대와 우정을 다지기 위하여 일주일에 한 번씩 모임을 갖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열심히 봉사하자고 다짐했다.
이 모임의 명칭에 대한 간단한 토론이 있은 후 ‘협의회’라는 이름을 채택하기로 했다. 협의회는 젊은이들의 모임에서 자주 사용되는 단어로 그 누구에게도 거부감을 주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성모님과 빈첸시오 성인을 주보성인으로 모신 ‘자선 협의회’가 아주 자연스럽게 설립되었다.
이 자선 협의회는 오자남이 언급하고 있듯이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는 자들의 모델이 되었다. 회원들은 탁월한 자선 주의자 빈첸시오 성인의 표양을 따라 살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모든 위대한 업적은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되며 그 성장은 하느님의 업이라는 것을 차츰 깨닫게 되었다.
회합이 끝날 때 각 회원은 비밀 헌금통을 돌려 모금을 하였다. 여기서 모인 돈은 조심해서 공동 활동에 쓰기로 하였다. 첫 번째 모임에서 회계로 임명돈 드보가 첫 번째 모금을 하였다.
이렇게 하여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가 출범하였다!
친절하게 맞아들이는 가족
Awelcomingfamily
‘자선 협의회’가 설립된 지 몇 주 후에 시모니즘에 빠져 길을 잃은 동료 하나가 오자남에게 측은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가 희망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여덞 풋내기들이 파리와 같은 대도시의 빈민들을 구제 하겠다고! 자네들의 힘이 아무리 세다 해도 자네들은 별 볼일 없을 거야. 훌륭한 제도들과 아이디어들을 가지고 활동하면서 세상을 변혁시키고 빈곤을 이 세상에서 영원히 쫓아낼 사람은 우리다. 우리는 자네들이 수세기에 걸쳐 해야 할 일을 단 1분만에 해낼 수 있다.”고 했다.
이 얼마나 성급한 예언이었던가! 시모니즘을 추종하는 자들이 운영하는 학교는 1833년에 폐교되고 같은 해에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는 발전의 닻을 올렸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에 가진 두 번째 회의에서 이들은 각자가 선택한 가난한 가족 하나씩을 담당했다. 한 회원이 맡은 가족은 로잘리 수녀가 혼신의 힘으로 활동하고 있는 아르바레트 가의 모퉁이에 살고 있는 6~7명의 자녀를 둔 목수 가정이었다.
회합 때마다 회원들은 자신들이 담당한 가족들의 현황과 그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보고 했다. 그리고 모금한 돈을 나누어 다음 방문 대 그들에게 가져다주었다. 이들은 이런방식으로 자신들의 계획이 드디어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하느님의 섭리는 이들의 환상을 깨버렸다.
6월에 있은 세 번째 회의 때 랄리에르가 스타니슬라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는 오르레앙 법원의 법률 고문의 아들인 친구 한 사람을 빈첸시오회에 회원으로 받아 주자고 제안했다. 그의 갑작스런 제안에 동료들이 이의를 제기했다. 한 사람만 알고 있는 낮선 사람이 협의회에 들어옴으로써 분위기를 흩트릴까 염려되었던 것이다. 이 새 회원이 협의회의 이념과 다른 생각을 주장하지 않을 거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현재로서는 협의회의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는 편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되었다.
한 인간에 대한 이러한 편견은 오자남이 추구하는 정신이 아니었다. 그가 생각하는 자선회의 목적은 가족과 멀리 떨어져 객지에서 외롭게 살아가는 가톨릭 학생들이 함께 힘을 모아 자선 활동을 하고 이를 통하여 자신들의 신앙을 강화하고 교회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었다. 오자남은 1834월 7월 24일 에 사촌들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나는 많은 청년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자선 사업에 헌신하는 단체를 만들고 싶다. 이 단체를 전국적으로 확대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나.”
오자남의 중재로 회원을 받아들이는 원칙이 가닥을 잡게 되었고 랄이에르의 친구 드라 누가 베일리를 제외하나 일곱 번째 회원이 되었다.
협의회 입회에 대한 원칙 설정은 예상 외로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한번 개방한 문은 다시 닫힐 줄 몰랐다. 열려진 문으로 지원자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여덟 번째 회원은 쟝 레옹 르 프레보인데, 그는 한 회원과 같은 식당에서 식사를 한 것이 인연이 되어 협의회에 들어오게 되었다. 다른 동료들에 비해 좀 나이가 든 그는 젊은 친구들의 열성에 고무되어 자연적으로 협의회의 분위기에 젖어 들어갔다. 그가 바로 1845년에 (1958년부터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수도회라 부름)성 빈첸시오회 아 바오로 수사회(Congregation of Brother of St. Vincent de Paul)를 창설한 사람이었다.
그의 입회는 머지 않아 다른 사람들의 입히로 이어졌다. 베일리의 소개로 법대
학생 임마뉴엘 드 꽁드(Emmanuel de Conde)??? 협의회의 문을 두들이고, 이어서 랄리에르가 또 다른 스타니슬라스 출신인 법대생 샤를르 홈매(Chares Hommais)를, 그리고 오자남은 역시 법대생 앙리 쁘쏘노와 쟝 도미니끄 쇼랑(Henri Pessonneaux et Jean Dominique Chaurand)그리고 의대생 지누(Gignoux)를 안내했다. 학기 끝날 무렵 협의회 회원 수는 무려 15명으로 불어났다. 8월 말, 방학이 시작하자 이들은 11월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각기 자기 고향으로 내려갔다.
사회 활동에 동참
InvolvementinSocialAction
1833년 11월, 학기 초 <가톨릭 트리뷴>이 문을 단게 되자 자선 협의회는 다른 곳에 사무실을 물색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가톨릭 트리뷴은 미뉴 신부(Father Migne)와 뒤푸르 드라 뛸러러(Mr. Dufour de la Thuillerie)가 창립한 <종교계>라는 신문과 통합하였다. 베일리는 에스트라파드 광장 11번지에 있는 자택 지하 방 하나를 협의회의 사무실로 제공했다. 초기 회원들의 대부분이 이 집에서 집회를 가졌고 오자남과 쥴리 대학 졸업생들이 소개한 네드(Nedde)와 레르미트(Lhermite)등 여러 명의 리용 출신 청년들이 협의회에 들어 왔다. 이들의 합류로 회원수는 더욱 늘어 25명에 육박하고 있었다.
학기가 시작되자 여름 동안 중단되었던 회합이 다시 활기를 띠었다. 회합은 매주 화요일 저녁 8시에 베일리 댁에서 진행되었다. 젊은이들에게 이 회합은 전과 다름없이 매력과 도전의 장이었다. 회원들은 돌아가며 자신들이 방문한 가난한 가정에 대한 보고를 하였다. 이들은 이 보고 내용을 중심으로 진지한 토론을 했다. 1833년 12월 둘째 주일에는 회장과 회계 그리고 쇼랑을 총무로 하는 임원진을 구성하였다. 이때부터 회의록을 쓰기 시작했다.
예기치 않은 일이 이들의 활동 범위를 넓혀 주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모인 청년 단체가 있다는 말이 제 12지구 복지국에서 일하는 볼로(Vollot)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볼로는 그 젊은이들 중 몇 사람을 복지국 ‘자선과’ 정식 직원으로 채용하여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 문제는 베일리를 거쳐 12월 17일에 열린 협의회 회합에 전달되었고 회원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turnl엘(Cheruel), 라바프트(Labarthe), 세르(Serre), 프랑슈빌(Francheville), 쇼랑이 즉시 등록을 했다. 이어서 오자남과 랄리에르가 그들과 합류했다.
쌩 빅토르 불랑제 가의 1번지에서 20번지까지 홀수 가정은 오자남이, 짝수 가정은 랄리에르가 담당하기로 했다. 이들은 정식 직원으로 임명된 1834년 2월 1일부터 여러 해 동안 복지국 일에 헌신했다. 쇼랑과 랄리에르는 1835년에, 그리고 다른사람들은 1836년에 라토(Rataud)와 쉐리에-베카리아(Mr. Scellier-Beccaria)로부터 일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1843년 1월, 베일리는 자선 사업에 대한 본당 사제들의 관심을 일깨우고 그들과 협력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빈첸시오 성인이 초기 선교사들에게 어디를 가든 그 지역의 교회 장상의 승인 없이 활동을 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상기했다. 빈첸시오 성인은 교회 직권자의 승인 없이 하는 일은 그것이 아무리 훌륭한 일이라 할지라도 무용한 일로 간주하라고까지 말씀 하지 않으셨던가! 베일리는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 회는 보당 사제가 우리의 회합에 참석하는 영광을 기대할 만큼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 회원 중 한 사람을 본당 사제에게 보내어 회의 활동과 취지를 설명할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거룩한 수호 성인의 교훈을 따르는 것이다.” 총무인 쇼랑에게 이 임무가 맡겨졌다.
포데트 신부(Father Faudet)가 올리비에 신부(Father Olivier)의 뒤를 이어 쌩 에티엔 뒤 몽(Saint Etienne de Mont)본당 신부로 부임하였다. 쇼랑은 매주 화요일마다 미사가 끝나면 의fp 본당 신부를 찾아가 회의 활동을 자세히 보고하고 겸허한 자세로 그의 자문을 구하였다. 그리고 저녁이면 동료들에게 아침에 있었던 본당 신부와의 대화를 낱낱이 보고하고 신부님이 제안한 협조 사항들, 특히 교육의 도움이 필요한 가정들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영적 목마름. 노틀담 성모님께 간구
SpiritualThirst;AddressesinNotreDame
대협의회 회원들은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종교 교육을 시킬 수 있는 허락을 받기 위하여 파리 대교구의 껠랑 주교님을 찾아갔다.
협의회가 시작되기 전인 1833년 초부터 이미 에스트라파드(Estrapade Place)에 법과 역사 강의를 들으러 오는 몇몇 청년들이 그러한 취지로 청원서를 제출한 적이 있었다. 오자남(Ozanam), 르줄터(Lejoulteux), 몽타제(Montazet)가 대표로 드 껠랑(Mgr. de 뼈디두) 대주교님께 제출서를 상정했다. 이들은 가톨릭 신앙을 반대하는 자들과 정면으로 대결하기를 원했다. 반대자들은 가톨릭 교리를 비판하며 신문과 서적, 심지어는 법정에까지 문제를 들고나서는 판국이었다.
오자남은 신앙을 보호하고 그러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교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대주교님은 여느 때처럼 대표들을 친절히 맞아주며, 이들의 원의를 당장 들어주지 않으셨지만 다음해에 방도를 찾아보자고 약속하셨다.
1834년이 다가올 즈음 이전보다 더 많은 청년들이 합심하여 대주교님께 올리는 새로운 청원서를 마들었다. 그리고 협의회에서 가장 연륜이 있고 모범적인
세 사람, 곧 오자남, 라마슈 그리고 랄리에르를 대표로 선정하였다. 면회를 청하는 이들에게 대주교님은 1834년 1월 13일에 전갈을 보내셨다.
“파리 대주교님께서는 오잔마과 그의 동료 두 사람을 쌩 쟈크 가 193번지 담 드 쌩 미쉘(Dame de Saint Michel, 껠랑 대주교는 1831년에 발생한 대주교관 습격 후 이곳에서 피신하고 있었다.)에서 오늘 오전 중에 접견하시겠다고 답변하셨다.”
파리 대주교님과 접견
MeetingwiththeArchbishopofParis
대주교님과의 접견은 예상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대주교님은 젊은 대표들을 쾌히 영접하시고 이들과 이들 동료들의 소망을 구현시킬 대책을 세우라고 하셨다. 그리고 사제들 중 능력있는 설교자들을 선정하여 사순절 동안 노틀담 대성당 주일 미사에서 청년들의 관심을 모을 수 있는 주제의 강론을 하도록 선처해 주셨다.
대표들은 사실 친구들로부터 특별 강론 설교자로 라코르데르(Lacordaire) 신부님이나 보탱(Bautain) 신부님 중 한 분을 선정해 주실 것을 대주교님께 청하라는 전갈을 바든 터였다.
당시의 많은 젊은이들이 라코르데르 신부님의 도전적 성격을 마음에 들어 했고 보탱 신부님의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정확하고 명철한 철학적 논리와 사고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이 두 성직자는 서로 다른 풍의 학자들이었지만 많은 젊은이들이 따랐고 인기가 대단했다.
협의회 대표들은 이 두 신부님 중 한 분을 설교자로 모시고 싶다는 원의를 대죽님께 정중히 표명하면서 설교자들이 각자 다른 주제를 가지고 강론을 한다면 청중들이 일관성 있는 가르침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 민감한 문제에 대한 의논이 계속되는 동안 객실 문이 열리면서 드 람므니아스 신부님이 들어오셨다. 대주교님께서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로 신부님을 맞이하시며 젊은이들에게 말씀하셨다. “자, 이 분이 바로 여러분에게 필요하신 분이십니다. 이 분의 우렁찬 목소리를 듣기 위하여 대성당 문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대성당은 청중들로 좁아 터질 것입니다.” 그러자 람므니아스 신부님이 황송하여 말씀하셨다. “대주교님, 저의 직무는 끝났습니다.”
이 신부님이 들어오시는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선 세 명의 젊은이들은 주교관 문을 나섰다.
다음 날 조간신문의 머리기사는 이 청년들의 인터뷰와 함께 람므니아스(Father de LAMMENAIS) 신부와 연관된 작은 사건을 실었다. 이러한 누설에 매우 화가 난 오자남과 랄리에르는 라마슈와 의논한 후 대주교님을 찾아갔다. 이들은 전 날 있었던 대화가 부적절한 때에 일간지에 실린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음을 솔직히 말씀드렸다. 대주교님은 신문을 가지고 오라하여 기사를 자세히 읽으신 다음, “기자들은 구제 불능의 친구들이야.” 라고 말씀하셨다. 대주교님은 죄송해 하는 두 젊은이를 안심시키며 그들을 가까이 오라고 하여 두 팔로 안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대
“내가 여러분에게 주기로 마음먹은 설교자들이 복도에 와 있어요. 여러분을 그들에게 소개할 터이니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나 다 하시오.”
이렇게 하여 이 LEN 젊은이는 사순시기동안 노틀담 대성당에서 강론을 해 줄 신부님들과 만났다. 소개가 끝나자 대주교님께서 자리를 비켜 주셨다. 주교님이 떠나신 다음 신부님들과 젊은이들 사이에 진지한 대화가 시작되었다. 젊은이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어떤 내용의 강론을 원하는지 열심히 설명했다. 강론 신부들은 이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이들의 견해에 최선을 다해 응답하였다.
벽난로 가까이에서 열기 띤 대화가 진행되었다. 장차 몽뻘리에르의 주교님이 되실 티보(Thibault) 신부님과 오자남은 객실을 거닐며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이들이 방 저쪽 끝에서 큰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을 때 대주교님께서 다시 들어오셨다. 티보 신부님이 “대주교님, 우리는 이 청년들과 완전히 통했습니다.”고 하자 주교님께서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시며 응답하셨다. “당신들이 서로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동의는 할 것입니다.” 청년들은 주교님의 깊은 배려와 환대에 감사드리며 자리를 떠났다.
협의회의 젊은 친구들의 기대에 미치는 타협을 끌어낼 수 없었다는 아쉬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온 이들은 즉시 펜을 들고 대주교님께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이들의 머리는 주교님께 드리고 싶은 말과 생각들과 가득 차 있었다. 이들은 불꽃 튀기는 생각들을 주고받으며 편지를 써 내려갔다. 오자남이 진행을 이끌어 갔다. 이들은 자신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들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일일이 정확하에 열거했다. 거의 모두가 사회에 대한 교회의 역할과 관련된 것이었다.
두 사람이 쓴 내용을 바탕으로 하나의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는 각서가 작성되었고, 그것은 즉시 대주교님께 우송되었다. (이 편지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2월 8일 자의 <유니버스>는 ‘노틀담 강연’에 대한 대대적 기사를 실었다. 1834년에 있었던 이 강연에서는 엄선된 일곱 분의 고명한 설교자들이 강연을 해다. 이들의 설교를 들으러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같은 날 다른 시간에 라코르데르 신부가 스타니슬라스 대학에서 자신의 첫 번째 강연을 했다. 여기에 참석한 사람들은 대부분 젊은이들이었다. 마지막 강연은 청중들에게 사랑의 실천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자선의 대상은 불우한 예술가 쟝모였다. 그는 30세의 불구자 화가로서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의 회원들의 방문을 받은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다.
자선의 모델,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Amodeltoimitate,St.VincentdePaul
'자선 협의회‘는 영성에 대한 추구와 배우려는 열의로 가득 찬 젊은이들의 영향을 받았다. 1833년 5월의 첫 번째 회의에서 회원들은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를 주보성인으로 모셨다. 1834년 2월 4일에 르 프로보스트의 제안으로 “오서서, 성령님”의 기도에 “성 빈첸시와 아 바 오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라는 기도를 추가함으로써 빈첸시오 성인이 이들의 특별 수호성인이 되셨다. 또한 매년 7월 19일에 그분의 축일을 지내기로 결정하였다.
같은 회의에서 오자남은 빈첸시오회를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 마리아께 봉헌할 것과 마리아 축일 가운데 하루를 선택하여 특별한 방법으로 경축할 것을 제안하였다. 허르미트가 원죄 없이 잉태하신 마리아 축일을 그 날로 하자고 제안하였다. 회원들은 두 가지 제안을 만장일치로 받아들이고 회의 기도에 성모송을 추가하기로 합의하였다. 1834년 사순시기 무렵에 회원 수가 배로 증가하였다. 젊은 청년들의 정신적, 영신적 의식이 이들의 열의에 참신한 자극제로 다가왔다.
1834년 4월 13일 일요일, 빈첸시오 성인의 유해 이동 기념일이 세르브르가에 있는 라자리스트(Lazarists) 성당에서 거행되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 후 거의 200년 동안 모독당하지 않도록 작은 함에 소중히 보관해 온 성인의 유해를 옮기는 행사였다. 유해 보관함이 약간 손상되어 있었다. 유해는 라자리스트 성당 제대에 딸린 작은 방에 이시로 모시기로 했다. 협의회의 회장인 베일 리가 예식 전날 협의회가 주보성인으로 선택한 분의 유해를 방문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이러한 특은을 감사히 여기며 60여 명의 협의회 회원들은 4월 12일 아침에 라자리스트 성당으로 향했다. 미사 후에 이들은 성인의 유해가 전시되어 있는 제단 옆방으로 내려갔다. 덮개 밑으로 성인의 얼굴 모습을 쉽게 알아 볼 수 있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증인 앞에서 잠시 묵념하고 기도드렸다.
1834년 5월 6일, 로잘리(Rosalie) 수녀의 부탁으로 보기라르 가에 사는 세 명의 젊은 노동자들에게 글을 가르치기 위하여 회원들을 선정하였다.
5월 27일, 협의회 회원들은 신이 나서 노테르 마을의 성체 행렬에 합류하였다. 이 젊은이들의 뜻을 알아차린 본당 신부는 그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표명하고 그 다음해인 1835년과 1836년에 노테르와 바티뇰 성체 행렬에 이들을 초대하였다. 그 당시 바티뇰은 파리 구역이 아닌 외각에 속해 있었다.
1830년 사건 이후 파리에서는 성체 행렬과 같은 종교 행사가 금지되었다.
고통의 딜레마
AnAgonizingDilemma
이 작은 단체의 성공이 회를 확장하고 활동을 늘리고 싶은 열망을 회원들의 가슴에 불러일으킨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들의 목적은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었다. 회원들은 회의 발전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신앙과 우정이 나란히 성장할 수 있는 협의회 활동은 젊은 그리스도 청년들 간의 형제적 결속을 더욱 굳게 다져 주었다.
이들 모두는 협의히의 활동 범위를 넓혀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으며 이 문제는 회합과 대화에서 자주 거론되었다. 이들은 꿈으로 부풀어 있었다. 1834년 3월 27일 성화요일에 랄리에르와 타일랑디에는 오자남의 집에 모여 머리를 맞대고 조직을 파리와 지방으로 확대하는 계획에 대하여 궁리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인원이 불어난 회합들이 초기의 열기와 매력을 잃어 가고 있었다. 방문 가정들에 대한 상세한 보고가 뜸해지고 원조금 모금이 초창기의 힘을 잃어 가고 있었다. 1834년 4월 29일의 회합에서 회원들 사이에 활동의 활성화에 대한 대책과 문제점들이 거론된 듯하다. 그것은 저녁 10시에 회합을 끝내고 나온 오자남과 드보와 랄리에르가 판테온 광장을 거닐며 한 시간 이상 이야기를 나눈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이들은 처음으로 협의회를 지구별로 분할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의견에 접근했다. 그렇게 할 때 회원들이 서로를 더 잘 알 수 있고 진정한 회의 정신으로 되돌아 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서였다.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을 찾지 못한 채 1년이 흘렀다. 그러나 회를 지역으로 확장해 간다는 전망과 함께 이 문제는 여러 차례 진지하게 논의되었다. 사실 1834년 7월 10에 오자남은 파리에 들른 자신의 옛 친구 한 사람을 협의회에 소개했다. 그는 님 출신인 레옹스 뀌르니에르(Leonce Curnier of Nimes)라는 사람으로 빈첸시오회원들의 회합에 꼭 한 번 참석하고 싶어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이 회합에서는 한 학생이 자기 선생님의 스튜디오에서 모금한 35프랑을 전달한 것 외에 별다른 일이 거론되지 않았다. 모금은 협의회 회원들이 방문하는 가정들을 위한 생활 보조금에 보태기 위한 것이었다. 회합이 끝날 무렵 뀌르니에르는 자기를 맞아준 회원들의 형제적 사랑에 감사하며 님에 협의회를 세우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그는 1835년 초에 자신의 목표를 달성했다.
대학생 지구인 데 그레스 가(Rue des Gres)에 청소년 수감자들의 ‘교정소’가 있었다. 이곳 소년들의 대부분은 교육은 고사하고 완전히 버려진 상태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이었다. 특히 정신적 면에서 그러했다. 프레보스트(Prevost)가 이 청소년들에게 기본 윤리 교육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동료들에게 자신의 포부를 말하자 여러 명이 지지를 약속했다. 교정소에 접근하기 위하여 우선 민사법원 원장인 벨레인의 허락을 얻어내야 했다. 젊은 회원들 중에는 그에게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마침내 한 친구를 통하여 벨레인를 접촉할 수 있었다.
벨레인는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여 1834년 7월말에 허가를 내주었다. 이렇게 하여 청소년 수감자들을 위한 협의회 활동의 막이 올랐다. 프러보스트, 오자남, 라마슈 그리고 타일랑디에가 이 프로그램에 적극 협력했다. 그러나 이 일은 그들의 진을 뺄 정도로 힘이 들었다. 게다가 이것을 알아주는 사람도 없었다. 이러한 어려운 조건에서도 이들은 꾸준히 수감자들이 데 그레스 가에서 파리의 반대편에 있는 마들로네트(Madelonnettes) 교도소로 이동될 때까지 2년간 돌보며 수업을 계속했다. 소년 수감자들을 위한 이 활동은 1836년 초에 고아들을 위한 사업으로 대치되었다.
1834년 방학 동안 가난한 사람 방문은 파리에 남아 있는 학생들이 계속하였다. 이들은 프레보스트처럼 약간 나이가 건강이 좋지 못한 학생들이었으나 확고한 신앙과 단단한 정신력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학기가 시작되자 지방 학생들이 다시 파리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하던 협의회 활동을 다시 계속했다. 회합도 다시 활력을 찾았다. 지방에 내려갔던 회원들은 새로운 친구들을 데리고 왔다. 1834년 10월 15일에 오자남은 이렇게썼다. “우리는 리용의 젊은 친구들을 파리로 데리고 갈 것입니다. 이 친구들은 여러분의 모임을 불어나게 할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 저는 우리의 자선 사업의 발전을 위하여 회원들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협의회의 역사를 많이 이용하고 있습니다.” 오자남의 말대로 1834년 11월 12월에 회원 수가 100여 명을 넘었다.
협의회 분할 문제에 대한 논의의 재개
Reneweddebateoverdividingtheconference
제 1차 개편 때 이미 논의되었던 문제, 곧 협의회를 여러 지구로 나누자는 문제가 다시 제기되었다. 12월 16일 회합에서 오자남이 이 문제를 제기했을 때 꽤 많은 사람들이 이를 반대하였다.
문제의 핵심은 현실적으로 베일리 혼자서 여러 그룹을 이끌어 갈 수 없다는데 있었다. 베일리는 회의 창설에 헌신적으로 동참했다. 그는 회 초창기에 유익한 조언자로서 회를 이끌어 나갔다. 그는 협의회 지도에 거의 모든 시간을 바쳤다. 회의 유지와 운영에 베일리의 협조가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일부 회원들은 그분의 힘이 골고루 미칠 수 없는 협의회들이 혹시나 약화되거나 심지어는 없어지게 되지나 않을까 우려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는 그 어떠한 결정도 불가능했다.
그로부터 2주일 후인 12월 30일에 아르투르가 이 문제를 다시 제기했다. 결국 위원회를 구성하여 이 문제를 검토하기로 했다. 위원회는 즉시 다음날 회합을 가졌다. 좋았던 것은 위원회 위원들이 아닌 사람들까지 이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회합에 참석한 것이었다. 열기 띤 회의가 진행되었다. 오자남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페리에는 이 안을 강력히 반대하고 나섰다. 타이랑디에는 협의회 분할이 회원들 간의 관계에 타격을 주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눈에 눈물까지 머금고 있었다.
회의가 계속되었다. 시계 바늘이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대립과 감정이 열을 더해 갔다. 시계가 신년을 알렸다. 그 순간 베일리가 일어나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근래 이 문제가 나의 건강을 해쳤습니다.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자, 악수를 합시다. 그리고 여러분 모두의 소망을 채워줄 수 있는 해결책은 나에게 맡겨 주십시오.” 이 말이 끝나자 모든 회원이 일어나 서로 포옹하며 새해의 행운을 기원했다.
분리의 필요성
NecessaryProliferation
다음 화요일인 1835년 1월 6일, 베일리는 문제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 협의회 분리를 지지하는 위원회와 이를 반대하는 위원회를 만들었다.
그들은 여러 차례의 회합을 가졌다. 1월 27일 몬스의 베일리 자택에서 회합을 갖고 협의회를 둘로 나누자는 안을 채택하고 이에 동의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안에 합의하였다.
대- 각 협의회은 원조 배당 문제에 관한 회합을 갖는다.
대- 특별 재정적 원조에 대하여는 총회에서 표결로 결정한다.
대- 신입 회원 입회 문제는 총회에서 다룬다.
대
이러한 대책을 세움으로써 양분의 위험을 피하기로 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베일리는 1월 24일 전체 회합에서 협의회가 두 협의회로 분할된다는 것을 알렸다. 제 1협의회는 파리 시내의 제 12지구를 , 그리고 제 2협의회는 제 1, 10, 11구를 담당하기로 하였다.
베일리는 회장직을 계속 갖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제 1협의회의 부회장에 오자남, 총부메 브락(Brac de la Perriere), 회계에 파카르(Picard)가 임명되었다. 제 2협의회의 부회장에 르바소르(Lavasseor), 총무에 튀리(Thury), 회계에 프레보스트(Prevost)가 임명되었다.
2월 10일에 오자남은 님에 협의회가 창설되었다는 뀌프니에르의 편지 내용을 회원들에게 보고했다. 이 소식은 자선 협의회를 필요로 하는 시대적 요구에 들어맞는 것이었다.
4월 7일에 랄리에르가 쌩 쟈크 근교의 이름을 딴 제 1협의회의 부회장직을 오자남에게 인수하고 동시에 프레보스트(Prevost)는 쌩 제르맹(Saint Germain)이라고 이름지은 제 2협의회의 부회장직을 라바쏘(Lavassor)에게 넘겨주었다. 이렇게 하여 오자남은 제 1협의회의 회장이 되고 프레보스트는 제 2협의회의 회장이 되었다.
새 회원들이 들어오면서 식구가 급속도로 늘어났고 회의는 밤늦게까지 계속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한 상황은 특히 외딴 지역에 사는 회원들에게 불편을 주었다. 따라서 룰르(Le Roule) 근교에 사는 클라브와 몇몇 동료들이 그 지역에 새로운 협의회를 갖고 싶다는 원의를 표명하였다. 이러한 제의는 당연히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세 번째 협의회의 첫 회합이 1835년 5월 25일에 카트뤼쏘(Catrusso)의 시화로 룰르의 포부르쥬(Rue de faubourge) 20번재에 있는 클라브(Clave)의 집에서 열렸다. 여기에는 오자남과 랄리에르가 참석했다. 같은 해 6월 30일에 또 다른 회원이 본누벨(Bonne Nouvelle) 본당을 중심으로 네 번째 협의회의 창설을 요청했다. 이 지역은 에스트라파드에서 매우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이 회원은 자기와 같은 지역에 사는 세 사람의 지원자를 데리고 왔다. 그의 요청 역시 순조롭게 수락되었다.
7월 19일에 주보성인 축일을 경축하기 위하여 전 회원이 라자리스트(Lazarists) 성당에 모여 2시 39분에 저녁기도를 드린 후 저녁 8시에 대강당에서 전체 회의를 가졌다. 전체 회의에서 회원들은 1835년에 독서실 설치와 빈민 가정 구호용 의류 창고를 짓기로 결정했다.
방학이 되자 매년처럼 대부분의 회원들이 지방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방학동안 각 협의회에 빈민 방문을 계속할 수 있는 회원들은 충분히 확보되어 있었다.
총회장인 베일리는 방학기간인 9월 29일에 회의를 열기도 했다.
협의회의 기본 정신은 인간적 명성을 멀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회의 성장과 더불어 능력이 생기면서 자연히 회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1835년 2월 10일 회의 때 쌩 에티엔느 뒤 몽(St. Etienne de Mont) 본당 사제의 방문을 받았고, 벨기에의 농아학교 교장으로 있는 시카르(Sicard) 신부님의 양자인 피생-시카르(Pissin-Scard)의 방문을 받았다. 3월 30일에는 렌느빌(Rainneville)이 직장(職長)들을 위한 워크숍에 대한 제보를 구하러 협의회를 찾아왔다. 이들을 통하여 지방에서 오는 노동자들과 견습공들을 위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4월 15일, 쌩 마르탱(St. Martin)가에서 가톨릭 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수사들이 성인 야간 학교를 도와줄 사람을 구하려 협의회를 찾아왔다. 타일랑디에(Taillandier)와 에스트브(Esteve)가 자원봉사를 자청했다. 5월 28일에 같은 수사들이 주일 음악학교를 도와 달라는 요청을 했다.
6월 16일, 250프랑이 회에 입금되었다. 20프랑은 스타니슬라스(Stanislas)학교 교장인 오쥬(Father Auge) 신부님의 기부이고, 30프랑은 청년들을 모금, 그리고 200프랑은 Juilly 대학에서 보내온 것이었다.
핵심 조직
EssentialOrganization
1835년 말 현제 빈첸시오회의 교육을 받은 회원 수가 250여 명에 달했다. 이들에게 정식 조직을 제공해야 할 시기가 온 것 같았다. 방학이 끝나고 모든 회원들이 다시 파리에 모이면 명문화된 회칙을 마련하기로 결정했다. 랄리에르가 회칙 작성자로 선정되었고 베일리가 몇 가지 소견을 피력한 서문을 쓰기로 했다.
베일리는 포부르그 쌩 제르맹(Faubourg St. Germaine)에 특별 임대를 받기 위한 수속을 밟기 시작하였다. 목적은 앞으로 이 지역에 속하는 협의회들의 회합 장소로 사용되는 것이며 같은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쌩 필립 뒤 룰르(Ssint Philippe de Roule), 본 누벨(Bonne Nouvelle), 쌩 쟈크(St. Hacques) 협의회들의 지부를 두는 것이었다. 이 건물은 카세트 가(Rur de Cassette)의 쌩 프랑소아 레지스 회(Societe de Saint Francois Regis)가 사용하고 있는 건물 안에 있었다. 레지스 회의 회장인 쥴 고쌩(Julee Gossain)은 이를 쾌히 승낙했다. 그 당시 그는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에 대하여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이 바로 1844~1846년까지 빈첸시오회의 제 2대 회장이 될 사람이었다.
1835년 12월 8일, 빈첸시오회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축일을 성대히 경축하였다. 베일리 총회장은 이 날 저녁 총회에서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의 회칙을 발표하고 자신이 쓴 서문을 낭독하였다. 이 회칙의 내용은 거의가 성 빈첸시오의 저술과 기록물에서 취한 것으로써 모든 회원의 생각 및 견해와 완전히 일치하고 있었다. 회원들은 ‘회칙’을 박수로 환영하였다.
회칙 낭독이 있은 후 베일 리가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의 제 1대 총회장으로 추대회었다. 부총장에 르 브락(Le Brac)이, 사무총장에 브락 드라 피에르(Brac de la Perriere)가, 총회계에 드보(Devaux)가 임명되었다. 이 네 명의 임원이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의 전체적 운영을 책임지는 총회장단을 구성했다.
쌩 제르맹 구역 협의회 회장에 쇼랑(Chaurand), 비서에 타이랑디에(Le Thaillandier), 회계에 들라리스(Delalice)를 임명했다. 오자남은 쌩 쟈크 구역 협의회 회장이 되었고 서기에 르나르(Renard), 회계에 피카르(Pecard)가 임명되었다.
세계를 향한 진출
WorldExpansion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는 1836년까지 꾸준한 성장을 계속하며 확고한 체계를 다져가고 있었다. 사순 제 1주일에 네 협의회의 총회가 열렸다. 1836년 8월 16일에 파리에서 공부를 마친 리용 출신 학생들이 리용에 두 번째 협의회를 설립했다. 그들이 님(Nimes)에 창설한 첫 번째 협의회는 당분간 문을 닫았다가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리용 협의회 회원들은 오자남이 회장직을 계속해 주기를 원했다. 빈첸시오회 교본에 언급된 대로 1837년 초에 파리(Pairs), 리용(Lyon), 님(Nimes), 렌느(Rennes), 낭트(Nantes)협의회들 사이에 상설 관계가 제정되었다.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는 수 개월 내에 여러지방으로 확사뇌고 몇 년 후에는 로마(1842), 벨기에 . 스코틀랜드 . 아일랜드 (1843), 영국(1844), 독일 . 네덜란드 . 그리스 . 터키(1846), .스위스(1847), 오지리 . 스페인 (1850)으로 줄기차게 확장해 갔다. 멕시코와 미국은 1846년에, 그리고 캐나다는 1847년에 회가 설립되었다. 빈첸시오회는 이제 전 세계에 진출하여 있었다. 따라서 확고한 조직 제정이 요청되었다.
회의 발전과 더불어 중재 구조가 필요하게 되면서 ‘운영 참사회’를 ‘총참사회’로 개칭하였다.
빈첸시오회는 실제로 1833년부터 1860년 사이에 급속도의 성장을 이루었다. 젊은 지성인들뿐 아니라 각계각층으 그리스도인들이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열성을 보였다. 1848년의 사건들이 보여준 것처럼 거의 전 유럽에서 노동자 문제가 핵심 화제가 되었다. 사도좌는 교회법이 명시하는 교계의 틀 안에서 조직된 순수한 평신도 조직인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의 목적과 활동을 승인하였다. 빈첸시오회는 창립 27년 후에 전 세계에 약 2,500개의 협의회와 무려 50,000여 회원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 당시 회의 예산은 약 400만 프랑이었다.
유익한 시련과 새로운 진보
PositiveTrialsandNewAdvances
1860년에서 1870년까지는 회의 시련의 시기였다. 특히 프랑스의 경우에 그러했다. 첫째로 유물론의 확산이 인간성을 고갈시켰고, 둘째로 제 2제국주으 당국자들이 빈첸시오회에 대하여 불리한 입장을 취했다. 그들은 이 단체가 저항의 원산지가 될 위험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파리의 총이사회가 당국의 요청으로 합법적으로 해체되었으며 이어서 많은 협의회들이 문을 닫아야 했다. 미국과 남미에서 발전이 있었지만 어려움들은 다른 나라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총이사회는 4879년부터 정상적 활동을 되찾게 되었다. 서서히 프랑스에서 겪은 손실을 회복하고 다른 나라들과 연대를 강화해 갔다. 1913년 제 1차 세계대전 전야에 오자남의 탄생 100주년을 경축했다. 지난 100년 동안 빈첸시오회가 성취한 결과들이 부각되었고, 이 경축 행사를 더욱 풍요롭게 해주었다. 프랑스와 사도좌 사이에 국교가 끊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교황 비오 10세께서는 교황대사를 통하여 빈첸시오 회원들과 가까이 계신다는 의향을 밝히셨다. 그 당시의 통계로는 8,000여 협의회와 133,000여 명의 회원으로 집계되었다.
1914~1918년 전쟁 동안 빈첸시오회원들은 민간 피해자와 전쟁 포로들을 위한 일에 열성적으로 헌신했다. 일부 독일군 캠프에서는 협의회가 형성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한 징병은 새 회원들의 수를 감소시켰고 경제적 어려움은 회의 재정을 어렵게 만들었다.
전쟁이 끝나자 참담한 현실이 노출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주요 전투 지역의 피해는 더욱 비참했다. 전국 차원의 피해 복구 작업이 수해오디는 동안 빈첸시오회는 활동 방향을 새로운 상황에 맞추어 갔다. 그리고 중국, 일본, 말레이군도, 인도차이나 반도, 미얀마, 인디아, 스리랑카, 마다가스카르, 동아프리카 등 빈첸시오회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세계 전역에 진출을 시도했다. 대부분의 나라에 진출할 계획을 세웠다.
미국의 협의회 수는 프랑스에 버금갔다. 1933년에 거행한 빈첸시오회 창립 100주년 행사에 33개국이 참가하여 세계적 확장을 증언해 주었으며 국제 단체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교황 특사의 자격으로 예식을 거행한 베르디에 추기경(Cardinal Verdier)은 많은 나라 대표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고위 당국자들의 찬사를 받았다. 그 때 협의회 수가 무려 12,000여 개에 달했으며 전 세계 회원 수는 200,000여 명을 헤아렸다.
어두운 시절
Adarkperiod
창립 100주년 기념이 안겨준 당당한 기세는 제 2차 세계대전으로 다시 기울기 시작하였다. 세계의 전 지역을 강타한 이 사건이 빈첸시오회의 활동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시국에선 시행된 소집령이 협의회의 지도자들의 수를 줄게 하였다. 거기에다 전투와 폭격으로 많은 나라에서 도시와 마을이 파괴되었고 그로 인하여 상당수의 협의회가 자취를 감추었다. 그럼에도 자선 활동은 개인 회원들에 의하여 면면히 이어져 갔으며 한 번도 끊긴 적이 없었다. 전쟁 포로 형무소에 협의회가 형성되는 일도 생겼다. 이렇게 전쟁으로 인하여 새로운 분야의 활동이 전개되기도 했다.
파리의 총이사회는 거의 대부분의 나라들과 연락이 단절되었고, 협의회 전체의 반 정도가 점령군에 의해 마비 상태에 있었다. 그나마 약간의 연락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의 자유로운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부총장 덕분이었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봉사를 향한 결정적 진일보
ADecisivesurgeforwardintheserviceofthepoorest
전쟁이 끝나자 빈첸시오회는 미래를 향한 재로운 지평과 박력감으로 고무되었다. 아프리카, 아시아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와 같은 어려운 상황에 처한 대륙들에서도 새로운 바람이 감돌며 성장을 향한 큰 발걸음이 재촉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다른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회원 수가 계속 증가하고 활기에 넘쳤다. 1950년에 협의회의 수가 17,000여 개에 접근하고 있었으며, 약 300,000여 명의 회원들이 세계 곳곳에서 열심히 뛰고 있었다.
사회적 변화와 급속한 발전이 회의 조직에도 영향을 미쳤다. 변화와 쇄신이 요청되었다. 특히 전쟁이 몰고 온 온갖 형태의 재난과 고통, 전쟁 피해자들, 유배자들, 난민들, 나라를 잃은 사람들을 도와야 했다.
결국 난민과 개발도상국들의 다양한 문제들은 빈첸시오회원들에게 국내는 물론 국제적 협력 확대화 노력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협력은 부유한 나라들의 협의회와 빈곤 지역의 협의회들 간의 결속 체제, 자매결연 그리고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의 탁월한 형제애으 실천을 통하여 구체화되었다.
이미 전 세계로 확산되는 협의회들 간의 결속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1848년에 ‘회보’(Bulletin)가 창간되었다. 이 회보는 120년 동안 빈첸시오회원들의 중요한 연결 고리 역할을 했으며, 1968년부터 프랑스 전국이사회에서 발간하는 <오자남 소식지>(Ozanam Note)가 이를 계승했다.
1967년 10월 20일에 파리에서 개최된 총회에서는 1856년에 볼로냐에서 창립된 성 빈첸시오회 여성 지부가 남성 지부와 통합하였다. 처음부터 이 두 지부는 긴밀한 협력 관계에 있었다.
1969년 3월 15일, 성 루이 드 마리약(St. Louise de Marillac) 축일에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와 루이 드 마리약 운동의 합병이 프랑스에서 체결되었다. 이것은 그들의 모든 정신적 인간적, 물질적 재화를 고통, 빈곤, 고립, 불의와 같은 긴간을 피폐시키는 요인들을 불식시키는 투쟁에 공동 투자하기 위해서였다.
1990년에 빈첸시오회는 5대륙 113개 국가에 무려 900,000여 명의 남녀 회원들과 45,020여 협의회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빈첸시오회의 위대한 모험’이라고 무를 수 있는 섭리의 확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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