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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시도록 준비하자
2018년 5월 13일 / 대예배, 오후예배 / 창세기 4:1-7
예배 / ➊ 구약에는 ‘아바드’ - 봉사 혹은 섬김을 의미합니다. ‘굴복하다’, ‘엎드리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굴복하며 엎드리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➋ 신약에서는 ‘프로스퀴네오’ - ‘경배하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➌ 라틴어의 ‘라트레이아’(latreia) - ‘섬김’이란 뜻입니다. 사람이 공동체를 위해 행하는 일을 의미합니다. ➍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의 섬김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예배의식’(liturgy)이란 단어의 어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배란 문자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깊이 엎드리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1. 출 3:1-12과 출 19:1-6을 보면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셔서 ➊ 그에게 엎드려 예배하게 하시고 ➋ 예배하는 모세에게 사명을 주시고 ➌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하게 하시는 핵심적 목적은 하나님만을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어 온 세계 모든 민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예배하게 하려 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은 오늘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기도 합니다.
➊ 출 3:1-6 / [빈들에서 불붙는 떨기나무] 모세는 미디안의 제사장인 장인 이드로의 양 떼를 이끌고 빈들 서쪽으로 가다가 하나님의 산인 호렙에 다다랐다. 2) 그때 하나님의 심부름꾼이 떨기나무에 붙는 불꽃으로 모세에게 나타났다. 그가 바라보니 불꽃은 활활 타오르나 나무가 불타 없어지지는 않았다. 3) 모세는 하도 이상해서 `내가 가까이 가서 이 엄청난 광경을 자세히 보아야겠다. 어째서 나무가 타지 않을까!'하고 중얼거렸다. 4) 여호와께서 그가 자세히 보려고 가까이 오는 것을 보시고 떨기나무 가운데에서 모세를 부르셨다. `모세야, 모세야' 모세가 `예, 주님' 하고 대답하자 5)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서 있는 땅은 거룩한 곳이다. 그러니 네 신발을 벗어라. 6)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
➋ 출 3:7-10 / … ‘나는 애굽에서 내 백성이 얼마나 고통당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보았다. 또 강제노동을 시키는 자들 때문에 울부짖는 소리도 다 들었다. 그래서 그들의 고난이 얼마나 뼛속 깊이 사무치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다. 8) 이제 내가 내려가리라. 내가 내 백성을 애굽 사람들의 손아귀에서 빼내리라. 그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답고 넓은 땅, 곧 가나안 사람, 헷 사람, 아모리 사람, 브리스 사람, 히위 사람, 여부스 사람이 사는 땅으로 데려가리라. 9) 이스라엘 사람들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울부짖는 소리가 내 귀까지 들리고 애굽 사람들이 그들을 개 취급하듯 다루는 모습도 내가 보았다. 10) 그래서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낸다.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 사람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라.’
➌ 출 3:11-12 /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었다. ‘제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겠습니까? 더구나 이스라엘 사람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다니요! 두려운 마음뿐입니다. 주님.’ 12) 하나님이 다시 말씀하셨다. ‘분명히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네가 내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낸 뒤에 너희가 이 산에서 너희의 하나님인 나를 섬기리라(예배).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내는 표징(증거)이 되리라.’
▶ 모세는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자기를 만나주신 곳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시고, 그들에게 예배자로서 해야 할 사명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예배자인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출 19:1-6 / [여호와와 계약을 맺을 준비]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 땅에서 나온지 석 달이 되었을 때 그들은 시내 광야에 이르렀다. 2) 그들은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이르러 시내산 부근에 진을 쳤다. 3) 모세가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올라가자 여호와께서 산에서 모세를 불러 말씀하셨다. “너는 야곱의 자손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러라. 4) ‘내가 애굽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또 내가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어떻게 내게로 데리고 왔는지 너희는 다 보았다. 5) 온 누리가 다 나의 것이 아니냐?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가 세워 준 계약을 잘 지키면 너희는 뭇 민족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가 되리라. 6) 너희야말로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반드시 일러주어라.” 7) 모세가 되돌아와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모아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것을 모두 이야기하였다. 8) 백성이 일제히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것을 우리가 그대로 실천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 이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예배를 위해 철저히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출 19:10-15 / 여호와께서 계속해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너는 이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에는 성결하게 하고 옷가지를 빨아 11) 셋째 날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일러라. 셋째 날에 나 여호와가 온 백성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시내산 위에 내려가리라. 12) 너는 백성이 가야 할 곳과 가지 말아야 할 곳을 알 수 있도록 산 사방을 돌아가며 표를 해두고 아무도 산에 오르거나 표를 해둔 곳을 넘어서지 못하게 하여라. 산에 오르는 사람은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 14)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 백성에게로 돌아와서 백성들에게 일러 성결하게 하였고 그들은 옷을 빨았다. 15) 모세는 백성에게 셋째 날을 위해 준비하고 여인을 가까이하지 말라고 일렀다.
여기에서의 예배를 위한 준비는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아니라 지도자인 모세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준비가 되었을 때에 이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하셨고, 하나님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십계명을 비롯하여 지켜야 할 말씀들을 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품위가 있는 하나님의 백성(정식적으로 하나님께서 저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저들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들에게는 영적인 복만이 아니라 ‘너희가 만일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잘 듣고 내가 보기에 올바르게 살며 나의 명령을 귀담아 들어 모든 규칙을 잘 따른다면, 내가 애굽 사람들에게 내렸던 질병을 너희에게는 내리지 않으리라. 나는 여호와, 너희의 병을 치료해 주는 이이다.’(출 15:26) 말씀처럼 육신의 건강도 지켜 주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레 26장, 신 28장, 30장).
▶ 하나님의 구속(救贖)의 목적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예배하게 하시려고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이름을 ‘예수’(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져내실 분이다)라고 하시면서 또한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를 것(사 7:14)이라고 하셨는데,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저들로 하여금 성막을 만들게 하셨는데, 성막은 출애굽(出埃及)의 또 다른 은총이었습니다. 성막은 막연히 하나님께 제사하는 장소가 아니라 광야에서 저들과 만나시는 곳이며 또한 저들의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들이 40년 동안 성막을 중심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하나님의 뜻은 제사 중심, 성막 중심의 삶이었습니다.
▶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외형적으로는 교회 중심이지만 실제로는 예배 중심의 삶을 원하십니다. 구약의 출애굽은 10가지 재앙이 있은 다음에 이루어졌으며, 출애굽을 통해 하나님만을 예배하게 하시고 이어서 저들에게 지켜야 할 여러 말씀들을 주셨습니다. 신약의 오순절은 제자들을 3년 동안 양육하신 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시고 이어서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강림을 통하여 저들에게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고 하시며 그들이 말씀을 전할 때마다 표적이 따르게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하심으로써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구원을 선포하는 거룩하고 영원한 말씀)을 확실하게 증거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모이는 것이야말로 전 신앙의 여정에 있어서 핵심이며, 전제(前提)입니다. 교회에서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예배입니다. 예배는 성도에게 매우 중요한 삶입니다. 예배는 교회의 존재 이유이자 목적이기도 합니다.
히 11:4 / 아벨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가인이 드린 것보다 훨씬 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을 드린 것도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예물을 기꺼이 받아 들이셨다는 것을 증명(그의 예물을 기꺼이 받으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랜 옛날에 죽은 아벨에게서 우리는 지금도 많은 교훈을 배우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예배, 준비된 예배 >
나물을 요리하기 전에 먼저 나물을 다듬습니다. 그리고 깨끗이 씻어서 각종 양념을 넣어 무칩니다. 그리고 맛까지 봅니다. 상을 차린 후 음식들을 잘 먹었는지에 대하여도 묻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드려질 예배이기에 예배를 나름대로 잘 준비해야 합니다.
예배에는 여러 가지 많은 요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크게 나누자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가운데 우리의 사랑과 마음의 고백을 드리는 ‘드림’의 요소와 하나님의 예비하신 은혜를 누리는 ‘받음’의 요소가 있습니다. 잘 준비된 예배를 위해서 우리는 ‘드림’의 요소 중 찬양과 대표기도와 헌금을 어떻게 잘 준비해서 드릴 것인가를 살피고 ‘받음’의 요소 중 설교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들을 잘 전달해야 합니다.
1. 찬양을 철저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먼저 찬양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온전한 예배는 모든 목적이 하나님이기에 우리가 드리는 찬양의 대상 또한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예배 속에서 드리는 찬양을 보면 하나님을 목적으로 두고 하는 찬양인가 의심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것에 목적을 두는 음악회를 보면, 음악을 듣는 관객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연주자들은 철저하게 준비합니다. 악보의 한 장, 마디의 한 음표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손가락이 부르트고 허리가 끊어질 듯한 고통 가운데에서도 완벽하게 준비합니다. 혹여나 공연 당일 연주자의 갑작스러운 변동사항까지 고려하여 예비 반주자까지 준비해둡니다.
사람이 목적이 되는 음악회도 이처럼 철저한 준비가운데 이루어지는데 예배 가운데서 하나님을 목적으로 하는 찬양은 어떠합니까? 예배 전 한 시간 맞춰 보고 찬양의 자리에 서는 경우가 교회의 현실임을 감안한다고 할지라도, 대곡이 아니라 찬송가로 준비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성가대원들이 미리 연습을 해 온다거나, 가사의 내용을 마음에 담고 기도로서 그 찬양의 목적이 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찬양 곡을 선곡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흔히 찬양인도자들이 범하기 쉬운 실수는 자신에게만 은혜가 되는 찬양을 가지고 올라가 혼자만 은혜 받고 내려오는 경우입니다. 설교도 청중을 고려한 설교로 준비하는 것처럼 찬양 또한 청중, 예배 시 함께 찬양할 대상을 고려하여 선곡해야 합니다.
그럴 때 찬양인도자뿐만 아니라 모두가 함께 은혜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예배 전 찬양인도자의 찬양이 은혜가 되면 예배 전체가 은혜가 됩니다. 먼저 그 은혜의 찬양을 통해 설교자도 은혜가 되고, 동시에 성도들도 은혜에 젖어들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고,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있을 것입니다.
‘찬양은 설교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다’라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많은 분들이 예배 중에서 중요한 순서들을 꼽을 때 설교를 꼽습니다. 물론 틀린 말이 아니며, 개혁주의 예배에서 설교의 중요성은 그 어느 것보다 강조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찬양도 설교만큼이나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찬양가운데 거하시기에 찬양을 습관적으로나 우리의 감정을 따라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설교를 준비하는 것과 같이 찬양을 하는 사람들 자신이 얼마나 중요하고 거룩한 일에 드려지는가를 자각하고 최선으로 준비하여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 ‘찬양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사람이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감격과 감사의 표현으로 천국에서도 멈춰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그야말로 매우 귀한 것이기에 하나님께 얻어내기 위해 내미는 청구서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배에 드려져야 하는 찬양에는 송영, 경배, 찬양이 주를 이루어야 하겠지만 회개와 경건을 위한 기도와 간구, 평안과 위로, 전도와 선교, 예식에 대한 곡도 많습니다.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님’(8장)도 있지만 ‘천부여 의지없어서 손들고 옵니다’(280장)도 필요합니다. 나의 견해는 경배 찬송을 부르기 전에 죄를 씻는 회개가 선행되어 영광을 돌리는 찬양으로까지 이어져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예배로 영광을 돌리려면 가인처럼 예물만 들고 나와 받아달라고 하지말고 예배 시간 전 일찍 나와서 회개와 더불어 거룩하게 살도록 하나님께 눈물로 간구기도를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가복음 18:13처럼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볼 생각도 못하고 슬픔에 잠겨 가슴을 치며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라는 찬양을 눈물로 드렸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이렇게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회개 찬양기도를 들으시고 기뻐하시면서 은혜를 주실 것이고 그로 인해 다시 감사의 찬양과 영광의 찬양을 드리지 않겠는가 말입니다. 그런데 회개와 눈물의 기도 없이 ‘하늘에 가득한 영광의 하나님 … 우리 예배를 받아주시옵소서’라고 한다면 과연 그 찬양이 하나님께 상달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배를 드리기 전에 ‘샘물과 같은 보혈은 주님의 피로다 … 저 도적 회개하고서 보혈에 씻었네 저 도적 같은 이 몸도 죄 씻기 원하네’(258장)라는 찬송들을 통해 눈물로 죄를 씻겨주시기를 위해 간구기도와 찬양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예배 시간 전에 철저히 회개기도로 영광을 돌리기 위해 철저히 준비해야 합니다. 아니면 예배시간에라도 회개를 하며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리새파 사람처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면서 ‘하나님,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죄인이 아닙니다. 더욱이 저기 있는 세관원과 같은 죄인이 아닌 것을 얼마나 감사한지요! 나는 절대로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은 일도 없고 간음한 일도 없습니다. 나는 한 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내가 얻은 모든 것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눅 18:11-12)라는 식의 찬양을 한다면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실까요?
2. 대표기도를 철저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개인기도와 예배 때 드리게 되는 대표기도와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개인기도는 시간의 간섭도, 공간의 간섭도, 그 무엇의 간섭도 받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이 개인기도입니다. 하지만 대표기도는 다릅니다. 제한되어 있는 시간 안에, 제한되어진 장소에서 하는 것이 대표기도입니다. 전체 예배시간이라는 틀 안에 대표기도는 들어있습니다. 그러므로 대표기도는 시간의 제약을 받는 동시에 예배가 드려지는 장소 안에서 행해진다는 공간적인 제약도 뒤따릅니다. 대표기도는 신앙적으로 교회를 대표할만한 사람이 해야 하는데. 이들은 교회를 잘 알고, 목회자의 목회철학을 잘 아는 자들이다.
대표기도를 잘 하는 법 /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가? ① 개인기도를 많이 하라 ②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기도 제목을 4-5가지로 정리하라. ③ 한 두 가지 기도 제목을 가지고 길게 하지말라. ④ 공중(교회)의 관심사를 기도에 반영하라. ⑤ 반드시 주보를 보라. ⑥ 설교 제목과 본문을 보라. ⑦ 목회자를 위한 기도를 잊지 말라. ⑧ 은근히 원망하거나 남을 정회, 비판하는 부정적인 기도를 하지 말라. ⑨ 개인 기도는 길게, 대표 기도는 짧게 ⑩ 3-4분 기도하기 위하여 3시간 기도하라. ⑪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기억하라(예를 갖추라) ⑫ 항상 준비된 자세로 기도하라. 갑자기 해야 할 상황을 대비하라 ⑬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기도하라. ⑭ 형식적인 기도를 하지 말라. 뜨거운 마음으로 기도하라. ⑮ 대표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대신 기도하는 것임을 잊지 말라. ⑯ 개인기도가 아니다. 가성(假聲)을 사용하지 말라. 개인의 감정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 설교나 교훈식으로 하지 말라. ⑰ 1인칭 주어를 사용하지 말라. 용어 사용에 유의하라. ⑱ 장황해서는 안 된다. 미사여구를 사용하지 말라. 진실한 기도를 드려라. ⑲ 음성의 높낮이, 말의 속도를 잘 조절하라. ⑳ 주일예배 대표 기도시 절대로 즉흥적으로 하지 말라.
3. 드리는 예물은 철저히 준비해야 합니다.
미국 텍사스 댈러스에 있는 한인 목사님 / 이 목사님은 하루에 2천불 이상을 버는데, 한 달에 20일 정도 일을 하면 4만 불을 버는 셈입니다. 이분이 지금은 연세가 많아서 65세가 넘으셨습니다. 목사님 내외(당시는 집사)가 한 35년 전에 미국으로 이민을 왔는데, 200불을 가지고 왔는데 이 돈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답니다. 어디 잘만한 처소도 구하지 못해서 그곳 예배당 긴 의자에서 잠을 자고 교회 화장실에서 씻으며 기거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곳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 부인에게 감동이 오기를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이 떠올랐습니다. ‘과연 그 과부는 모든 것을 드리고 굶어 죽었을까? 아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적극적으로 책임지시고 좋은 조건으로 살게 해 주신 것이 아니겠는가!’는 생각이 들면서 이 말씀에 기대감을 가졌습니다. 미국에 와서 첫 주일을 맞이하면서 그 부인이 남편에게 하나님 앞에 드릴 헌금을 의논했더니, 알아서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중에 가난한 과부가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드려서 그 사람의 생활을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는 설교가 생각이 났다면서 가진 돈 200불을 전부 감사헌금으로 드리자고 했습니다. 그 당시 200불은 적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이분들이 각자의 이름으로 100불씩 헌금을 하니 교회에서는 많은 돈을 가지고 이민 온 사람들로 알고 교회 장로님들이 이분들을 만나러 왔습니다. 그리고 어디 사냐고 물으니 교회에서 산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니 믿음이 대단해서 아버지 집을 떠날 줄 모르는 사람들로 마음대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집으로 심방을 한번 가보고 싶다고 하니 “저희들은 집이 없습니다. 이민 올 때 가지고 온 것도 없어서 아버지 집에서 머무르고 있습니다.”했더니 즉시 인상이 일그러지더랍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더 이상 교회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표정을 보고는 다음 날부터 열심히 일자리를 찾아 다녔습니다. 아무리 돌아다녀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또 밤을 되어 갈 곳이 없어 다시 교회로 갔는데 다행히 문이 잠겨있지 않아 하룻밤 쉴 수 있어서 하나님께 너무 감사해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고 합니다. 일자리를 찾아 돌아다니다가 한 신발 수리하는 가게에 들어가서 일을 배워보고 싶다며 서투른 영어로 이야기를 하다보니 가게 주인이 장로님이셨습니다. 장로님은 사정이 딱해서 함께 일하자고 하며 한 달에 돈 700불을 주었는데, 이것도 여전히 방세를 내기엔 모자랐습니다. 그래도 그 부부는 당분간은 교회에서 기거할 생각을 했습니다. 부인은 부인대로 한국인 식당에 가서 일해주고 400불 정도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 집사님들은 믿음이 좋아서 항상 일을 하면서 찬양을 했고 일에 열심을 다하니 4년이 지난 뒤에는 일류 기술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이 다른 곳으로 돈을 벌러 가야 하니 이 가게를 맡아 운영하고 한 달에 얼마씩만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집사님이 얼마나 일을 겸손하고 성실하게 수행했던지 한 달에 4일 정도만 일하면 보내줄 돈은 다 마련되고 나머지는 모두 그 집사님의 수입이 되었습니다. 이제 직원들도 둘 정도로 가게가 번창해지자 부인이 신학교를 가야할 때가 되었다고 해서 신학을 하고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한 교회를 목회하는 것에 뜻을 두지 않고 세계선교를 위해 선교단체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모은 재물들을 사용하면서 남미 여러 나라, 멕시코나 개발도상국에 열심히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애를 쓰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한인 축구회를 만들고 그곳에 운영자금으로 매년 11만 불을 보내고 있습니다.
▶ 구약시대에는 아무것이나 제물로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레위기 말씀을 통해 정해졌던 제물들은 각 제사의 종류대로 구별되어 있었는데 소를 드리든, 양과 염소를 드리든, 비둘기를 드리든 동일하게 흠이 없는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흠 없는 동물을 요구하는 이유는 예배자가 온전치 못한 동물을 가져옴으로 정성 없이, 습관적으로 내어 놓는 헌금, 의미 없이, 감사함 없이 헌금 드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감사는 신앙의 수준이며 그 감사는 헌금으로 드러납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헌금의 액수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 헌금을 얼마나 잘 준비하는가가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고백과 감사의 감격이 있는 성도라면, 한 주간동안 하나님과 동행하심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그 감격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을 넘치도록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바로 그러한 감격과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헌금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 교회 성도 중 한 분이 평소 입버릇처럼 ‘나는 죽으면 내 재산 다 하나님 앞에 바치겠다’고 말하고 다녔답니다. 그런데 말이 씨가 됐는지 일찍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이 분에게는 젊은 아내와 어린 자식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 아내는 남편이 남겨놓은 재산을 가지고 자식과 함께 먹고 살아가야 되는데 남편이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렸답니다. 하지만 자신이 이걸 다 드리고 나면 자식들하고 먹고 살 길이 막막했습니다. 남편이 남겨놓은 것은 다른 사람에게 가게로 세준 허름한 건물이었는데 그 건물의 가치가 7천 5백만 원 정도였습니다. 그 가게를 2500만원에 남에게 세를 주고 자기 가족들은 월세방을 얻어서 살았습니다. 아내가 고민을 하다가 전 재산들 다 정리해서 남편이 한 말을 지키기 위해서 교회로 가지고 왔답니다. 교회는 이 여인의 형편을 알지만 헌금으로 드린 것이니까 일단 받았습니다. 그리고 임시 당회를 열었습니다. “아무개 미망인이 남편이 죽은 다음에 남편이 평상시에 한 말을 지키기 위해서 이렇게 전재산을 가지고 왔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목사님과 장로님들이 회의를 한 끝에 이 헌금을 바로 구제대상을 정해서 구제비로 사용하도록 결정했습니다. 구제대상은 물론 그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구제 명목으로 교회이름으로 그 여인에게 같은 액수를 드려서 여인과 자녀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마지막 남은 동전 두 닢을 드리고 이제부터 당장 굶어야 할 과부를 보면서 예수님께서 ‘헌금을 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이렇게 헌금을 하라.’는 의도로 말씀을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많은 교회에 헌금 강요가 본의 아니게 일반화 되어 있습니다. 헌금에 대한 강요 때문에 교회에 다니지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드리는 헌금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믿는 믿음에서 드려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내가 이 돈 없이는 살아도 하나님 없이는 못삽니다.’ 이게 헌금의 가장 중요한 마음입니다.
■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온 가족이 나눈 대화 / 앞좌석에 앉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렇게 이야기를 나눈다. 어머니가 먼저 자신의 남편에게 ‘여보, 오늘 성가대 음정이 약간 플랫이 된 것 같아요. 영 신경이 쓰여서... 연습을 제대로 해야 하는 것인데.’라고 이야기를 건넸다. 이 이야기에 남편은 운전대를 잡고 계속 운전을 하면서 ‘그래, 나도 영 듣기 거슬렸었어, 그리고 오늘 목사님의 설교도 썩 좋지 않았던 것 같아.’라며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이렇게 부모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뒷좌석의 아이가 대화에 끼어들며 ‘에이~~~ 천 원짜리 예배가 그 정도면 훌륭하지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예배의 현실, 헌금의 모습을 모두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4. 말씀을 철저하게 준비해야 한다.
지난 2007년 7월 8일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 평양대부흥 100주년을 기념하며 진보와 보수를 넘어 한국교회가 한자리에 모인 ‘2007 한국교회 대부흥 100주년 기념대회’ 설교자로 나선 옥한흠 사랑의교회 원로목사는 울먹이며 참회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10만 명의 성도들에게 눈물의 회개와 영적 각성을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계 3:1-3을 본문으로 한국교회의 회개를 촉구하며 폐부를 찔렀던 그의 설교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 남아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메시지는 여전히 생명력을 갖고 메아리친다. 당시 옥 목사가 선포했던 설교 전문을 요약하였습니다.
주여 살려 주옵소서”
100년 전 한국교회는 복음을 받아 들인지 불과 반세기가 되지 않았고 믿는 사람도 3, 4만 명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나약한 한국교회를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찾아오셔서 성령의 불을 부어주셨습니다. 원산에서 타오르기 시작한 성령의 불길은 평양에서 절정을 이루었고, 그 후에 연이어 한반도 곳곳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수년 사이에 수십만 명이 예수님을 믿고 교회로 돌아오는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 후 나라가 기울자, 교회는 사경회라든지, 3‧1운동, 사회계몽에 앞장서면서 절망에 빠진 백성들을 끌어안아 줄 수 있었습니다. 교회가 핍박을 받을 때는 순교의 피를 흘려 한국교회의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
우리가 평양 대부흥을 돌아보면서, 무엇보다 특별히 주목해야할 중요한 사실이 하나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과 함께 강력한 회개의 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그러한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성령께서 죄를 자복하도록 몰아붙이지 아니하시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불가사의한 회개였습니다. 당시 기록을 보면 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무시무시한 죄의 공포가 우리 위에 임하였다는 말이 있는가 하면, 아무도 그것을 피하여 도망할 수 없었다고 하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장대현 교회에 모였던 선교사들과 교인들은 밤새도록 가슴을 치며 통곡하며 숨은 죄를 토해놓았습니다. 이런 초자연적인 회개를 경험하면서 한국교회는 세상 앞에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왜 100년 전의 부흥을 다시 사모하며 기다리는 것입니까? 가장 절박한 이유는 한국 교회가 다시 살아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가 사는 길은 100년 전과 같이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고 교회 안에 있는 악한 것들, 우리 안에 있는 더러운 것들을 다 쓸어내는 회개밖에 없다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는 한국교회 이래서는 안 된다는 탄식을 오래 전부터 들어왔습니다. 오늘 이 시간 100년 전과 같이 다시 한 번 하나님이 하늘을 가르시고 우리에게 임하셔서 성령의 불, 통회하고 자복하게 하시는 회개의 영을 한국교회에 다시 한 번 부어주시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소망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사데교회는 오늘의 한국교회의 실상을 들어다 볼 수 있는 거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저는 이 말씀을 전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우선 제가 너무 부담스러운 말씀이고, 듣기에 거북한 말씀이고, 기분이 좋지 않은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말씀을 전하고 싶지 않아서 꽤 고집을 피웠습니다마는 주님은 밤낮 이 말씀에만 매달리도록 종을 몰아 붙였습니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전하고 싶어서 전하는 말씀이 아님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사데교회를 향해서 주님은 이렇게 책망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었느니라.’ 이름이 살았다는 것으로 보아 사데교회는 평판이 꽤 좋았던 것 같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사람들은 “아! 그 교회 대단하지.” 하면서 인정을 했던 것 같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사데교회가 한 때 놀라운 부흥을 경험한 화려한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그 후광을 즐기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보기에는 살아 움직이는 교회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열심도 뜨겁고, 봉사도 많이 하고, 예배도 감동적이고 뭐 하나 흠을 잡을 데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들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허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중심을 보시는 주님의 눈에는 불행하게도 그 교회는 행위가 죽어있었습니다. 행위에서 온전한 것을 찾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위가 무엇입니까?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위가 무엇입니까? 믿음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가리킵니다. 사데교회 안에는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렇게 사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사데교회를 보면서 오늘날의 한국교회를 보는 것 같다는 불안을 감출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난 70년 동안 기적같은 부흥을 경험한 화려한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그것을 자랑합니다. 5만의 교회, 천만의 성도, 세계 최대의 교회, 새벽을 깨우는 제단의 열심, 남에게 뒤지지 않는 헌신, 1만여 명의 선교사, 많은 헌금, 큰 교회당 등 자랑거리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세계를 다녀보십시오. 한국교회에서 왔다고 하면 다시 한 번 우리를 쳐다봅니다. 겉으로 보면 한국교회는 절대로 죽은 교회가 아닙니다. 무엇보다 한국교회에는 목숨을 아끼지 않고 충성하는 목회자가 참 많습니다.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목사보다 더 헌신하는 평신도가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들이야말로 한국교회의 자존심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만일 누가 오늘날의 한국교회를 보고 행위가 죽었다고 하면 저는 그 말을 절대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그렇지만 저의 이러한 확신을 흔들어 놓는 심각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사회가 한국교회를 너무 불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목사의 신뢰도는 오래전부터 하위권입니다. 교회에 들어왔다가 실망하고 등을 돌리는 젊은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전도를 해도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무종교자들에게는 기독교가 제일 인기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우리를 이중인격자로 보는 것 같습니다. 말하고 행동하고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랑, 사랑 하면서 교회에서 왜 그렇게 잘 싸우느냐고 비아냥거립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들이 자기들보다 더 정직한데가 어디 있느냐고 따져 묻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데는 자기들하고 똑같다고 봅니다. 사회의 각종 스캔들에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끼어도 이제는 놀라지도 않습니다. 한마디로 자기들과 다를 바가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기가 막히게도 우리는 이러한 비난을 받으면서 한마디 변명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 이처럼 교회가 짠 맛을 잃으면, 우리보다 더 악한 세상 사람들의 발에 짓밟히도록 내 던지는 것이 주님의 징계요 심판입니다. 우리가 지금 그러한 끔찍한 상황에 놓여있지 않는지 두려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지금 주님께서 한국교회를 보시고 뭐라고 하실까요? 이름은 살았으나 행위가 죽었다고 책망하지 않으실까요? 누가 ‘아니요‘라고 변명할 목사가 있습니까? 아니라고 변명할 장로가 있습니까? 평양 백주년의 진정한 기념은 이런 우리의 영적인 비참함을 직시하고 가슴을 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사데교회를 보면서 제가 두려워하는 것이 또 있습니다. 일곱 별을 손에 쥐신 예수님께서 행위가 죽은 교회의 책임을 지도자에게 묻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사데교회 사자에게 편지하라’ 사자는 교회의 지도자요 목회자를 가리킵니다. 저는 왜 주님께서 목회자에게 책임을 물으시는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수십 년 목회를 하면서 목사의 입장에 서면 이름은 요란하지만 행위가 죽은 교회를 만드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다는 것을 저는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는지 궁금하십니까? 이렇게 하면 됩니다. 목사가 설교를 하거나 말씀을 가르치면서 복음을 조금씩 변질시키면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복음이 얼마나 변질되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둔감해지면 됩니다. 그러면 교회는 이름은 살아도 행위는 죽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복음이란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이 복음에는 진리의 양면성이 들어 있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그 믿음의 진가는 순종하는 행위로 검증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구원의 절대적인 요소라고 한다면 행위는 구원의 필연적인 요소가 됩니다.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았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행위는 따로 놓고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실을 가리켜서 좋은 나무와 좋은 열매로 비유하셨습니다. 따라서 목회자는 믿음과 순종을 똑같이 가르쳐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로마서를 설교하였다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야고보서도 진지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청중은 원래 귀에 듣기 좋은 말씀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하면 모두가 ‘아멘’ 합니다. 믿음만 있으면 하늘의 복과 땅의 복을 받는다고 하면 ‘할렐루야’ 하고 열광합니다. 그러나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요 구원도 확신할 수 없다고 하면 얼굴이 금방 굳어져 버립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죄를 지적하거나 책망하면 예배 분위기가 금방 싸늘해져버립니다. 듣기가 싫고 몹시 거북스럽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교회에서 사역할 때 저는 비슷한 반응을 가끔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청중의 반응에 예민해지면서 저도 모르게 그들이 좋아하는 말씀을 일부러 골라서 설교하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을 보았습니다. 대신 죄라던지, 회개라던지, 순종이라던지, 거룩이라던지 하는 듣기 피곤한 말씀은 할 수 있으면 피하거나, 꼭 말을 해야 한다면 부드럽게 달래듯이 말하고 싶어하는 유혹에 끌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의 이런 모습은 예수님이 절대 바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도 절대 원하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러한 일이 강단에서 일어나고 있었고, 그 결과 저도 모르는 사이에 복음을 조금씩 변질시켜가는 설교자가 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교회가 커지면 커질수록 말씀대로 순종하는 행위에는 관심이 없고, 믿음만 가지고 떠드는 값싼 은혜에 안주하는 무리들이 늘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 사도행전 20장 20절을 보면 바울은 유익한 말씀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 없이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를 비롯하여 한국교회의 많은 지도자들은 바울처럼 무엇이든지 거리낌 없이 전하는 용기를 잃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단 것은 먹이고 쓴 것은 가능하면 먹이지 않으려는 나쁜 설교자가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설교자는 청중에게 인기가 있어서 사람을 많이 끌어 모으는 데는 성공할지 모르나 행위가 죽은 교회를 만드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 지도자 여러분! 복음을 변질시켰다는 주님의 질책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우리 중에 몇 명이나 됩니까? 입만 살았고 행위가 죽은 교회를 만든 책임은 너에게 있다고 질책하신다면 나는 아니라고 발을 뺄 수 있는 목회자가 몇이나 됩니까? 평양 대부흥의 진정한 기념은 복음을 변질 시킨 죄를 놓고 가슴을 치는 목회자들의 회개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것이 한국교회를 향하신 주님의 간절한 소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행위가 죽은 사데교회를 향해 회개하라고 명하십니다. 회개만이 살 길이라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를 향해서도 똑같은 명령을 하고 계시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답답한 일은 우리의 힘으로 회개가 잘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입으로 잘못했다는 말은 수없이 할 수 있으나, 죄를 끊어버리고 단호하게 돌아서는 거룩한 결단은 잘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백 년 전 하디 선교사가 하던 회개, 길선주 장로가 하던 회개, 무명의 성도들이 밤새도록 추운 겨울 밤 찬 마룻바닥에 엎드려 땅을 치며 통곡하던 그 회개를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에 비해 우리는 훨씬 더 많은 죄를 짓고 사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회개는 한국교회에서 형식적인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생명을 서서히 죽이는 암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진정한 회개를 하고, 세상 앞에 새 옷을 갈아입으려면, 성령께서 회개할 힘을 우리에게 주셔야 합니다. 통회하고 자복하고 버리는 결단을 할 수 있도록 성령이 우리를 도와 주셔야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능으로도 안 됩니다. 오직 성령으로 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성전 된 우리를 깨끗하게 청소하실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백 년 전과 같이 하나님께서 하늘을 가르시고 이 땅에 강림하셔서 아낌없이 부어주셨던 성령의 불, 회개의 영을 다시 부어달라고 힘을 다해 부르짖어야 할 것입니다. 부르짖고 문을 두드리면 주님께서 응답하실 줄을 믿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자녀에게 좋은 것으로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우리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한국교회가 진정으로 회개하고 죽은 행위를 벗어버리면, 아직도 죽음의 권세 아래 신음하는 이 백성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한국교회가 믿음과 행함이 일치하는 온전한 복음을 회복하면 온갖 더러운 죄로부터, 그 죄에서 나는 악취로부터 이 사회를 치료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한국교회가 성령의 능력을 다시 입으면 북한의 무너진 교회를 우리 모두 다시 일으킬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한국교회가 성령의 거룩한 불이 타오르는 용광로가 되면 주님께서 21세기 세계를 위해 가장 중요한 일에 우리 한국교회를 불러주실 줄을 믿습니다. 믿습니다. 두 손을 높이 들고 따라합시다.
주여, 한국 교회를 살려주옵소서, 한국 교회를 살려주옵소서. 통회하고 자복하는 영을 부어주옵소서. 부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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