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일장 풍경
빛나는 겨울의 오후
핏빛 꽃들의 몸부림처럼
진접, 장현 오일장의 뜨거운 입김이 여물어
삶의 무게로 만져진다
수줍은 제비꽃처럼 벗은 완두콩
햇빛에 주홍빛으로 볼이 녹는 홍당무
좌판의 튀김 냄새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
튀김 건지는 아줌마
손에 튄 기름 화상은 꽃봉오리
촉감에 민첩하고 육감에 충실한
노파가 바닥에 앉아
더덕의 껍질을 벗긴다
추운 손님들은 휑하니 지나치고
노파의 언 입은 쉬이 떨어지지 않는다
삶은 나이 들었다고 비켜 가지 않고
노파의 손이 수백 번 떨어야
더덕에서 향기가 나는구나
2.
거짓
마음에 거짓이 살고 있다
늘 솔직한 척 똑바로 사는 척하지만
실상과 다르게 마련이다
나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인간적이라고 말하는
나의 가식이 살아 숨 쉰다
나를 속이며
얼굴 붉히는 내가
꽃을 하늘을 속이고 있다
그들은 나를 보고 미소 짓는다
차라리 비웃음이었으면 좋으련만
언제쯤이면
내 마음을 열고 웃을 수 있을까?
세상에서
본인의 의지로 바꿀 수 있는 건 자신뿐
3.
어떡하지
아무 곳에나
흩어져 있던 봄이 화려하게 왔다
조용히 가곤 했다
바람골 봄은 기다리지 않아도
어느새 찾아와 안아주고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그래도 나는 봄을 모른 체했다
봄은 해마다 당연히 오는 거라고 믿었으니까
문득
‘봄이 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싶은 생각이 들고
봄이
내 목숨줄을 쥐고 있다는 걸 알았다
봄을 외면한 벌로
나는 소년에서 노인이 되어가고
미풍이 연꽃을 벌리듯
들판을 옮겨 다니다 툭 터진 꽃씨처럼
봄은 해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온다
내년 봄에 이 세상 공기로 숨 쉴 수 없으면
어떡하지
4.
봉선사의 여름
연꽃이 피면
두루미가 연잎을 쓰고
햇볕을 피한다
사람은 연꽃 구경 왔다가
연꽃이 되어 활짝 피어난다
연꽃도 사람을 보고
사람처럼 활짝 피어난다
연꽃을 스치는 바람은
탐욕의 바람이 아니다
연꽃에 머물다 가는
바람은 참회의 바람
연꽃 위에 머문 저 구름은
연꽃 아래 저 진흙탕은
앞을 못 보고 듣지 못해도
연꽃으로 피어난다.
5.
꽃잎을 떨구는 이유
꽃잎을 뚝뚝 떨구며
지나는 이의 시선을 홀리는 능소화
한 여름비 맞고
입 벌린 꽃잎을
지나는 사람마다 나누어 주었다
그대를 꽃으로 보면서 말이다
담벼락이 지나는 끝에
말없이 주저앉은 여름을 불러
지워지지 않는 아픔을 이야기하고
밤에는 별들을 불러 품는다
능소화꽃을 지나는 사람들은
시들지 않은 꽃잎을 떨구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매번 말끔한 얼굴로
고달픈 이의 저무는 생을
능소화는 담장에 걸터앉아
그렇게 위로했다
6.
강촌역 연가戀歌
문득 행복했던 것과 마주칠 때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약속된 장소로 떠나는 춘천행 무궁화호 열차의
뒷모습은 또 만날 수 없다
나의 벗
현용·장태·민국·창희·미경·세미·양순아! 기억하니
열차 바닥에 앉아 기타 치며 노래하던 우리의 웃음을
우리와 함께 흔들 다리를 걷던 아지랑이를
별 보며 은밀하게 속삭이던 그 약속을
봄비처럼 웃으며 너희에게 가고 싶은 내 마음
너희 향기 속에 숨겨진 추억이
한 송이 꽃이 된다는 걸
가끔 우리 삶은 아득한 저음의
통곡 소리처럼 외로운 것
아무도 오가지 않는 강촌역 흔들 다리에서
푸른 기억의 끝을 동여맨
긴 편지를 쓴다
삼악산 녹색 바람이 어깨 위에 앉고
부치지 못한 편지 한 장
강촌역에서 기차를 기다린다
7.
가로세로
하나, 둘 흩날리는 눈발
대지를 세로로 덮고
차근차근 피는 꽃들은
가로로 퍼진다
우리가 담을 수 없는 가로세로의 우주 만물
차들은 차선을 가로로 달리고
담쟁이는 하늘을 세로로 달린다
가로 세로의 욕망을 버려야 하는데
인내심이 없는 사람들은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가로세로를 폭주한다
아래를 보고 세로로 자라며
짧아지는 고드름
참게처럼 가로로 흐르다
윤슬을 잉태시키는 강물
세상을 세로로 달리는 빗방울은
분수를 모르고 가로로 달리는 구름을
불러 세운다
가로에 중심을 두는 가지와
세로의 기둥에 마음을 담는 바람이
균형을 잡는다
첫댓글 좋은 글 세세하게 감상했습니다 손민준 시인님 ~^^
졸시를 세세하게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선생님의 응원에 힘을 냅니다.
감사합니다.
편한 날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