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령국장(大和寧國藏), 발해대장경
joyah ・ 2026. 8. 12. 15:57
사상 처음 발해의 대장경이 출현했다." 일본의 서도(書道) 전문 학술지 "수미(修美)"는 최근 출간된 102호와 103호에 "발해 대장경"에 대한 논문을 게재했다. 논문의 저자는 "서체 대백과사전"을 쓴 이지마 다치오(飯島太千雄)다.
이지마는 논문에서 "이 경전이 발해에 당, 신라, 일본과 비견되는 불교문화가 있었음을 증명한다"고 했다. 5년 전 존재가 알려진 "발해 대장경"이 본격적으로 해외의 인정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아직 교과서와 백과사전에도 등장하지 않는 "발해 대장경"이란 도대체 뭘까? 1000년 전 사라진 수수께끼의 왕국 발해가 대장경을 인쇄할 정도의 수준 높은 문화를 지니고 있었던 것일까?
조병순 성암고서박물관장은 1990년대에 일본에서 입수한 "대방광불 화엄경 권제38 대화령국장(大和寧國藏)"이란 제목의 불경을 두고 고민에 빠졌다. 황마지 위에 먹으로 글자를 쓴 총 길이 8m50㎝의 불경이었다.
서예가인 고(故) 여초 김응현이 이 불경을 본 뒤 이렇게 말했다. "참 달필이구먼….서도의 어느 경지에 도달한 이가 사심 없이 쓴 게 분명해." 하지만 다른 일부가 일본 교토(京都)국립박물관에도 남아있는 이 불경의 출처는 미지수였다.
단서는 "대화령국"이라고 쓰여진 제목뿐이었다. "화령국"은 동양 역사 어디에서도 기록되지 않은 나라였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던 조 관장은 무릎을 쳤다. "화령이라? 가만… 이 지명은 어디서 본 일이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명나라에 "둘 중에서 국호를 골라 달라"고 요청했을 때 "조선"과 함께 후보로 올렸던 국호가 "화령"이었다. 그곳은 이성계의 고향 함흥의 별칭이었다. 역사에서 화령으로 불린 곳은 함흥뿐이었다.
이번에는 이 불경이 어느 시대 것이냐는 문제가 남았다. 조 관장은 대장경에서 "함차번호"라 불리는 일련번호를 분석해 이 불경에 나오는 "육(育)"이라는 번호가 서기 974년 이후에 중국과 고려에서 사용된 적이 없음을 알아냈다.
김경호 한국사경연구회장은 "통일신라시대 후기 경전을 쓸 때 정형화된 서체"라며 그 시기를 "8세기 말에서 9세기"라고 못박았다. "아, 그럼 통일신라시대 후기 것이로구나"라고 결론을 내릴 무렵 다시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함흥이 신라 땅이었나?" 아니었다. 신라의 북쪽 경계는 함남 용흥강까지였고 함흥은 그 위였다. 당시 함흥이 속해 있던 나라는 다름 아닌 발해였다. 역사에 기록돼 있지 않은 "화령국"은 발해 남쪽의 정치집단이었던 것이다.
발해의 5경(京) 중에서 "남경 남해부"는 지금까지 함남 북청으로 여겨져 왔다. 그런데 조 관장은 북청이 아니라 함흥이라는 단서를 일본 기록에서 잡아냈다.
일본의 정사(正史)인 "속일본기"는 서기 777년 발해 사신 사도몽(史都蒙)이 남해부 토호포(吐{浦)에서 출발했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정사는 약자를 쓰지 않은 게 불문율인데 호(號) 대신 호({)라는 글자가 기록된 것이 의아했다.
"혹시 모양이 비슷한 다른 글자를 잘못 쓴 것이 아닐까?" 중국의 "강희자전"과 일본의 "대한화사전"을 조사해 보니 "령()자는 비슷한 글자가 많아 잘못 표기할 수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
"령"이 맞다면 "토호포"가 아니라 "토령포"였을 것인데, 함흥 남쪽 연안은 고려시대부터 도련포(都連浦)라고 불렸다. "화령국"이란 바로 발해 남경 남해부의 다른 이름이었을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이지마 다치오도 일본의 역사 기록이 잘못됐다는 조 관장의 논리에 수긍했다. 이 불경이 발해 대장경의 일부가 확실하다면, 최초로 발견된 발해의 서지 유물이자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대장경이 된다.
지금까지 발해가 불경을 만들었다는 기록은 861년 일본에 "불정존승다라니기"를 전해 줬다는 내용뿐이었고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대장경은 고려시대인 1006년의 "대보적경 권제32"였다.
"대화령국장"이 11세기에 제작된 거란 대장경의 모본이었음도 밝혀졌다. 조 관장은 "거란 대장경인 "대방광불 화엄경"의 함차번호가 "대화령국장"과 동일한 것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서기 926년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이 대장경을 만들면서 사실상 발해 것을 그대로 베꼈다는 얘기가 된다. 고려 팔만대장경을 만든 공로자인 수기(守其) 대사는 고려 초조대장경과 북송(北宋) 대장경, 거란 대장경을 모두 참고했다.
결국 "고구려→발해→거란"으로 이어진 북방 불교문화의 계통이 고려의 팔만대장경에 고스란히 계승된 셈이 되는 것이다. 국내 대표적 불경 전문가인 박상국 한국문화유산연구원장도 여기에 동의했다.
발해 대장경의 발견은 "고구려와 발해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동북공정의 허구성을 밝히는 또 하나의 근거가 된다. 조 관장은 "독자적인 대장경은 중국과 다른 그들만의 천하관(天下觀)이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등록 2010.10.01
[대한민국지키기불교도총연합] 국내에서 가장 오래 됐다는 발해 대장경의 정체는?
조선닷컴 에 게재되였던 내용입니다. 못 보신분들을 위하여 올렸습니다.북방 불교문화의 역사… 고구려→발해→거란→고려 팔만대장경으로사상 처음 발해의 대장경이 출현했다. 일본의 서도(書道) 전문 학술지 수미(修美)는 최근 출간된 102호와 103호에 발해 대장경에 대한 논문을 게재했다. 논문의 저자는 서체 대백과사전을 쓴 이지마 다치오(飯島太千雄)다.이지마는 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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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화령국장(大和寧國藏), 발해대장경|작성자 joy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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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의 고려팔만대장경은 대진(발해)대장경 계승한 것
전낙배추천 0조회 1818.10.15 12:51댓글 0
백두산 천지
고려 팔만대장경이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가치를 인정받는 이유는 수많은 불경들을 가장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집대성했다는 점일 것입니다. 거란의 대장경도 참조했지만 그보다 더 종합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고구려에서 발해로 이어지는 대진(발해)대장경도 참조한 것에 그 이유가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합니다.
대진(발해)대장경을 베낀 것이 거란대장경인데 즉 거란대장경은 대진(발해)대장경을 복사한 것인데
대진(발해)→ 거란 →고려
고려 팔만대장경은 거란대장경과 중국대장경을 참조해서 만들어진 것이니 즉 팔만대장경 = 대진(발해)대장경 + 거란대장경 이러하니
팔만대장경이 거란대장경보다 더욱 종합적인 것이 당연한 일이겠죠. ------------------------------------------ |
“ 팔만대장경은 발해대장경 계승한 것 ”
‘북방 문화’는 중원이 아닌 고려로 계승됐다. 발해대장경은 거란대장경의 근본
북방불교문화 발해→ 거란 →고려 로 이어져
최근 발견된 8~9세기의 ‘발해(渤海) 대장경’〈본지 8월 7일자 A2면〉이 11세기에 제작된 ‘거란 대장경’의 모본(母本 - 근본)이었음이 확인됐다. 이로써 거란이 발해 것을 그대로 옮긴 대장경을 만들었으며, 거란 대장경을 상당 부분 참고한 13세기의 고려 대장경(팔만대장경)이 사실은 ‘발해 대장경’을 계승했을 가능성이 높아져 발해와 고려의 문화적 계승관계 를 밝히는 데 중요한 실마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서지학자 조병순(趙炳舜) 성암고서박물관장은 “거란 대장경인 ‘대방광불(大方廣佛) 화엄경 (華嚴經)’의 함차(函次)번호가 발해 불경으로 여겨지는 ‘대방광불 화엄경’ 권 제38 ‘대화령국장(大和寧國藏)’과 동일한 것을 확인했다”고 27일 밝혔다.
함차번호란 대장경의 여러 권(卷)을 묶어 천자문 순서대로 매긴 번호로, 이 순서가 동일하다는 것은 곧 같은 계통의 불경 임을 의미한다. 화엄경의 31~40권에 해당하는 현존 ‘대화령국장’의 함차번호는 ‘육(育)’이다.
그 앞에 존재했을 21~30장은 앞 글자인 ‘애(愛)’가 되지만 송나라에서 청나라까지의 중국 불경은 이 부분이 ‘장(章)’으로 돼 있는 반면, 거란 대장경은 똑같은 ‘애’자였다.
고려 팔만대장경(1251년 완성)을 만든 결정적 공로자인 승려 수기(守其)는 1087년 완성된 고려의 ‘초조 대장경’과 북송(北宋)의 대장경, ‘거란 대장경’을 모두 비교·교감(校勘) 했다는 내용이 ‘고려국 신조대장(新雕大藏) 교정별록(校正別錄)’에 기록돼 있다.
많은 학자들은 지금까지 이 내용을 근거로 “거란 대장경은 중원과는 계통이 전혀 다른 대장경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했지만, 1991년 중국 산시성(山西省) 잉셴안(應縣)에서 거란본의 일부가 발견된 뒤에도 그와 같은 대장경이 없어 ‘북방 불교문화’의 실체는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일본의 저명한 불교학자 오노 겐묘(小野玄妙)는 “ 고려 대장경이 참고한 거란본은 거란에 앞선 세력(발해)이 만들었을 것 ”이라고 추정했지만 아직까지 그 근거는 없었다.
‘동일한 함차번호’라는 것은 거란본이 발해본을 사실상 그대로 베꼈다 는 얘기가 된다. 조 관장은 “거란이 발해의 궁중 서고(책 창고)를 고스란히 넘겨받았다 는 기록이 있다”며 “여기서 고구려-발해-거란으로 이어지는 고대 북방 문화의 계통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고려 팔만대장경은 이 ‘북방 문화계통’과 당-송으로 이어지는 ‘남방(중원) 문화계통’을 모두 계승·종합한 ‘완정본’ 이라는 의미이며, ‘북방 문화’는 중원이 아닌 고려로 계승됐다 는 것이다. 조 관장은 또 “ 당시 대장경은 황제의 칙령(명령)이 없이는 번역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대장경을 발간한 세력은 중원의 통치범위 바깥에 있었던 것이 된다 ”며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정권이었다는 중국측의 주장을 반박했다.
불경 전문가인 박상국(朴相國) 국립문화재연구소 예능민속연구실장은 이에 대해 “불경사(史)를 다시 써야 할 큰 발견”이라며 “그동안 잃어버렸던 북방 문화의 실체를 복원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라고 평가했다.
유석재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