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차돈
신라 최초의 불교 순교자 이차돈의 출생에 대해서는 대체로 분명하지 않은 것으로 전하고 있지만 어떠한 기록은 501년에 태어났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 이차돈은 지증왕의 생부인 습보갈문왕의 후예라는 설이 있지만 성은 박씨, 이름은 염촉 또는 거차돈이라고도 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용행이 지은 아도비문에 그의 아버지는 길승, 할아버지는 공한, 증조부는 흘해왕으로 돼 있다.
어려서부터 성정이 곧아 사람들의 신망을 받았으며 일찍부터 불교를 신봉했으나 신라에서 국법으로 불교가 허용되지 않음을 한탄했다.
그 당시의 왕이었던 법흥왕도 불교를 백성들에게 알리고, 불력에 의하여 국운의 번영을 꾀하려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불교를 공인할 수가 없었다. 법흥왕의 이러한 뜻을 헤아린 이차돈이 왕에게 불교 공인을 제안했다.
이차돈은 “나라를 위해 몸을 죽이는 것은 신하의 대절이요. 임금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은 백성의 바른 뜻”이라며 거짓으로 죄를 내려 자신의 머리를 베면 만인이 다 굴복해 교명을 어기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법흥왕은 이를 반대했다. 그러자 이차돈이 다시 “모든 것 중에서 버리기 어려운 것이 신명이지만 이몸이 저녁에 죽어 아침에 대교 불교가 행해진다면 불일이 다시 중천에 오르고 성주가 길이 편안할 것”이라며 왕의 허락을 청하자 왕이 이를 허락했다.
이차돈이 왕의 허락을 얻어내고 천경림에 절을 짓기 시작했다. 이차돈이 불사를 시작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조신들이 크게 흥분하며 왕에게 따져 물었다. 왕은 자기 자신이 명령을 내린 것이 아니라 하고, 이차돈을 불러들였다.
이차돈은 불사를 일으켰음은 부처님의 뜻에 따라 자신이 한 일이라고 했다. 또 “이 불법을 행하면 나라가 크게 편안하고 경제에 유익할 것이니 국령을 어긴다 한들 무슨 죄가 되겠는가”라며 반문했다.
신하들의 반대가 커지자 왕은 이차돈과 미리 약속한 대로 하리신하를 불러 이차돈의 목을 베도록 했다.
이에 이차돈은 “부처님이 신령하시다면 내가 죽은 뒤 반드시 이적이 일어날 것”이라며 하늘을 향해 기도했다.
이차돈의 목을 베자 머리는 멀리 날아 금강산 꼭대기에 떨어졌고, 잘린 목에서는 흰 젖이 수십장이나 솟아 올랐으며, 갑자기 캄캄해진 하늘에서는 아름다운 꽃이 떨어지고 땅이 크게 진동했다.
왕과 군신들은 자기들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불교를 공인했다. 그때 이차돈의 나이는 26세였으며 연대는 법흥왕 15년, 또는 16년이라고 한다.
수년 후인 534년 법흥왕 21년에 천경림에는 신라 최초의 정사가 세워졌다. 절이 완공되자 법흥왕은 왕위를 진흥왕에게 물려주고 스스로 승려가 되어 법공이라고 불렀다. 세상 사람들은 이절을 대왕흥륜사라고 했다.
이차돈이 순교한 뒤 해마다 그의 기일에는 많은 사람들이 흥륜사에서 모임을 가지고 그를 추모했다.
흥륜사는 그후에도 확충하고 증축됐는데 544년 진흥왕 5년 2월 금당이 완성돼 십성을 모실 때 이차돈도 그 가운데에 모셨다. 또 이차돈을 위해 자추사를 세웠는데 이 절에서 치성을 드리면 반드시 영화를 얻고 불도를 행해 법리를 깨닫게 됐다고 전한다.
그의 순교 장면을 상징하는 육면석당이 경주박물관에 보존돼 있다. 이 석당은 그의 죽음을 영원히 공양하기 위해 백률사에 세워진 것이다.
신라의 불교는 문화예술의 발전을 비롯한 외국과의 종합적인 교류 활성화, 국론 통일을 통한 삼국통일의 근간이 됐다. 귀족들의 일방적인 권력에 대한 견제를 가능하게 하면서 소통의 길을 열어 일반 백성들의 정치 참여 기회를 제공하는 한편 왕권을 강화하는 통로가 역할을 했으며 삼국통일의 근간을 이루는 힘으로 작용했다.
첫댓글 목숨을 내놓고 진리를 구하는 모습
무엇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수 있을까
참으로 궁금해지는
참으로 숙연해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