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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광복직후 고국으로 귀환하기에 앞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상인 충칭시 칠성강연화지 청사에 모인 임정요인 및 직원들[독립기념관 제공]
이들 일행은 순례대표단 단장 이윤구(적십자사 총재)와 실무단장 김인수(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대표)의 인솔 아래 독립지사의 유족, 종교인 대표, 역사학자와 교사, 유관 단체의 회원들로 구성되었다.
임시정부는 3·1운동의 열기에 힘입어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서 출범했다. 그동안 몇 개의 망명정부를 통합하는 성격을 띠었다. 곧 만주, 미주, 연해주, 중국 관내, 그리고 국내 인사들이 합류했으며 복벽(復벽) 노선, 외교 노선, 무장투쟁 노선, 실력양성 노선 등 여러 노선을 추구한 세력들도 합류했다. 이는 바로 통합적 조직이었음을 알려준다.
그 정체는 공화주의였다. 곧 군주제를 폐지하고 주권재민의 국민국가를 지향했다. 또 국명은 대한제국을 승계하되 정체에 따라 제국(帝國)이 아닌 ‘민국’을 내걸었다. 연통제(聯通制)라는 이름의 국내 지방조직도 서둘렀다.
외국의 승인을 받기 위해 대표를 여러 곳에 파견했으며 쑨원의 광둥정부로부터는 정식 승인을 받아내기도 했다. 또 산하 군사조직으로는 만주를 기지로 한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를 산하단체로 만들었다. 독립신문을 발행하여 내외에 우리의 독립의지를 천명했으며 독립공채(獨立公債)를 발행하여 국내외에서 국민모금을 벌였다. 임시정부에 대한 국내외의 기대와 열기는 대단히 높았다.
하지만 이질적 이념집단이 참여하고 각기 다른 노선을 가진 인사들이 결합한 탓으로 각자 패권을 잡으려 하거나 주도권을 놓고 갈등을 빚었다. 무장투쟁 노선과 외교 노선으로 갈라졌으며 고질적인 기호 서북 등 지방색과 양반, 상놈 등 신분 갈등도 곁들여졌다.
1923년 첫 무렵, 임시정부는 창조파와 개조파로 분열됐다. 창조파들은 임시정부를 완전히 해체하고 새로운 정당단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폈고, 개조파는 잘못을 시정하고 임시정부를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두 계열은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뿔뿔이 헤어졌다. 이럴 때 중간세력은 대통령제를 국무령제로 바꾸고 임시정부 고수를 선언했다.
고수파는 이동녕·이시영·김구·조완구·엄항섭·차이석 등이었다. 고수파들은 산하의 하부조직도 없이 고군분투하면서 임시정부를 지켰다. 임시정부는 하나의 독립단체 수준으로 전락한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 조계 마당로에 청사를 마련하여 간판을 내걸고 태극기를 휘날리면서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유지하려 무진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상하이 교민 2,000여명은 단비를 꼬박꼬박 냈다.
윤봉길은 김구가 조직한 한인애국단 단원이다. 김구는 1931년 침체한 항일의 기세를 높이려 한인애국단을 조직했다. 당시 일본군은 상하이로 진출하여 중국 침략을 넘보고 있었다. 상하이에 진주한 일본군은 훙커우공원에서 천장절 행사를 벌였다. 윤봉길은 김구의 지시로 천장절 행사를 하는 요인이 자리잡은 단상에 폭탄을 던져 중국 주둔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카와(白川義則) 등 7명의 요인을 쓸어버렸다. 1932년 4월29일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상해임시정부 청사가 있는 골목
이 사건은 중국인들에게 “중국 백만 대군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냈다”고 말할 정도로 큰 충격을 주었다. 그 배후의 인물이 김구라는 사실이 알려져 일본군은 김구의 목에 20만원의 현상금을 걸고 체포에 혈안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김구의 성가는 치솟았으며 독립운동 선상의 거물 지도자로 부상했다. 더욱이 차츰 국내에도 이 사건의 전말이 알려지자 김구와 윤봉길은 영웅으로 떠올랐다.
일본의 압력을 받은 프랑스 조계 경찰이 김구 등 요인들을 체포하려 했다. 이렇게 하여 임시정부는 긴 유랑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국민당 정부 또는 중국의 유력 인사들은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일본 경찰과 밀정의 체포공작이 끊임없이 다가와서 김구를 비롯한 임정요인들은 항저우(杭州)를 거쳐 자싱(嘉興)으로 옮겨갔다.
김구는 난징에 있을 때를 회상하여 “왜는 내가 남경에 있는 냄새를 맡고 일변 중국 관헌에 대하여 나를 체포할 것을 요구하고 일변 암살대를 보내어 내 생명을 엿보고 있었다” (백범일지)고 기록했다.
일본군은 1937년 중일전쟁을 도발하여 난징을 점령한 뒤 계속 서쪽으로 전선을 확대했다. 이로 하여 임시정부는 계속 국민당 정부를 따라 난징을 거쳐 창사(長沙), 광저우(廣州), 류저우(柳州), 치장(기江), 충칭(重慶)으로 옮겨 다녔던 것이다.
김구는 임시정부를 계속 이동시키면서, 통일전선을 모색했다. 국민당 정부에서 자금을 지원 받기도 하고 우리 청년을 중국 군관학교에 보내 장교로 양성했다. 그리고 한국광복군을 조직했다. 마지막으로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기도 했다.
1941년 작성한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에는 “적에게 부화한 자와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는 선거권, 피선거권을 박탈한다”고 했으며 한국독립당의 행동강령에는 “매국노와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를 징치하며 그 재산을 몰수해 국영사업에 충용하고 그 토지는 국유화한다“고 했다. 친일파 청산의 의지를 확실하게 표현한 것이다.
해방 뒤 개인자격으로 귀국한 김구와 임정 요인들은 친일파를 재등장시키고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하는 이승만과 맞서며 통일정권 수립을 위해 좌우합작을 끊임없이 모색했다. 그런 끝에 이승만의 하수인에게 암살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헌법의 전문에는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는 구절을 넣어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했다. 이는 바로 김구를 비롯하여 임정 요인들이 모든 고난을 물리치고 고집스럽게 임시정부를 고수한 데에서 빚은 결과일 것이다.
이번 순례단의 대장정은 해방 뒤 최초로 이루어졌다. 무더운 여름에 비행기·기차·버스·도보로 유적지를 찾아다녔다. 서울 경교장에서 출발하여 상하이 임정청사 건물에서 출정식을 갖고 충칭의 임정청사에서 마지막 독립지사를 기리는 추도식을 가졌다.
현재 중국의 상하이와 충칭시는 임정청사를 복구하여 잘 보존하고 있으며 류저우, 치장 등지에서도 청사와 유적을 보존하거나 복구하는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이는 한국 관계자들의 노력과 한국 관광객 유치를 위해 중국 지방단체의 협력 아래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도로공사나 도시개발로 헐리고 있는 유적이 많다. 유적보존사업은 친일파 청산과 맞물려 있을 것이다.
-백범의 魂어린 경교장 휴게시설로 전락-
1880년대, 서대문 언저리에 주조선 일본공사관이 있었다. 조선공사인 다케조에 싱이치로(竹添進一郞)는 임오군란 뒤 청·일관계를 조정하고 개화파를 지원했다. 갑신정변이 실패했을 때 공사관 직원을 이끌고 인천으로 도망친 적이 있었다.
김구선생이 머물던 경교장 -임정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조선총독부는 경성의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일본인 주거지역을 중심으로 동명을 바꾸었다. 그리하여 메이지 마치(明治町·지금 명동 일대), 하세가와 마치(長谷川町·현재 북창동 일대) 그리고 위 다케조에의 이름을 따서 다케조에 마치(현재 서대문 주변)가 생겨났다.
광산업자인 최창학이 이곳에, 1938년 연건평 265평, 지상 2층·지하 1층 규모인 으리으리한 별장을 짓고 죽첨장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김구가 귀국하자 최창학은 친일파라는 비난을 면하려 했는지, 김구를 진정 애국자로 받들어서였는지, 김구에게 죽첨장을 바쳤다.
김구는 죽첨장을 다리가 있는 곳이라 하여 경교장(京橋莊)으로 바꾸었다. 그런 뒤 김구와 임시정부 계열의 인사들, 곧 엄항섭·조완구·조소앙 등이 들어와 사무를 보거나 거처하여 마치 임정청사처럼 북적거렸다.
김구는 이곳에서 좌우익의 합작과 민족통일정부의 수립을 구상했다. 김구가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으로 떠날 때 청년 학생들이 몰려든 곳이기도 했다. 한국독립당의 창립 산실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당시 이승만이 거처하던 이화장(돈암장), 김규식이 거처하던 삼청장과 함께 정치집회 장소로 각광을 받았다.
더욱이 김구가 2층 집무실에서 안두희에게 암살된 곳으로 전국의 주목을 받았다. 전국에서 몰려든 수많은 인파는 경교장 앞에서 통곡했다. 그뒤 소유주 최창학에게 반환되었고 다시 삼성재단에 넘어갔다. 삼성재단은 경교장은 보존하면서 주위 건물을 헐고 고려병원을 설립했다.
병원(지금은 강북삼성병원으로 바뀜) 입구에 김구의 자그마한 흉상이 세워져 있고 김구가 집무하던 방에는 몇 장의 김구 관련 사진이 걸려 있다. 그나마도 경교장복원범민족추진위 등 관련 단체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다.
현재 김구 집무실은 병원 관계자들의 휴게실이 되어 침대와 이불이 널려 있거나 빨랫감이 쌓여 있는 등 차마 눈뜨고 못볼 광경이 벌어지고 있으며 일반인에게 개방도 금지되어 있다. 삼성재단은 민족사를 똑바로 인식해야 한다. 경교장은 백범기념관이나 임시정부기념관으로 지정되어야 한다. 이러고서야 민족정기를 어떻게 말할 자격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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