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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람은 벗을 두고 ‘제이오(第二吾)’, 즉 제2의 ‘나’라고 했다.
내가 품은 생각을 그가 홀로 알고, 그의 깊은 고민을 내가 먼저 안다.
지기(知己)니 지음(知音)이니 하는 말은
차고 쓴 세상을 견뎌내는 동지애적 연민을 수반한다.
남녀의 사이에도 우정은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더구나 상대가 기녀였다면?
☆☆☆
"아가씨께서 달 보고 거문고를 뜯으며
<산자고사(山鷓鴣詞)>를 불렀다지요?
어찌 한적하고 은밀한 곳에서 하지 아니하고,
윤공의 비석 앞에서 하여 말 많은 자들의 엿보는 바가 되고,
석 자 거사비(去思碑) 앞에서 시를 더럽혔더란 말이오.
이는 아가씨의 잘못인데 욕은 내게로 돌아오니 원통하오.
근자에도 참선은 하시는가요? 그리운 맘 간절하구료."
1609년 1월 허균이 부안 기생 계랑(桂娘)에게 보낸 편지다.
계랑은 매창(梅窓)이란 호로
더 잘 알려진 당대의 이름난 기생이다.
그런데 편지의 내용이 범상치 않다.
뭔가 사연이 있다.
계랑이 전임 부사였던 윤공의 거사비(去思碑) 앞에서
달밤에 거문고를 연주하며 <산자고사>를 불렀는데,
그것을 본 사람들이 기생이 전임군수의 공덕비 앞에서
그리움의 연정을 노래로 불렀다고 입방아를 찧었고,
그 소식이 서울까지 올라갔던 모양이다.
노래는 계랑이 불렀는데 욕은 정작 허균이 먹었다.
☆☆☆
허균은 이 일이 있기 전인 1607년 4월,
아침마다 부처에게 향을 피워 놓고 절을 올렸다 하여
삼척부사에서 파직 당했고,
그해 12월에 어렵사리 공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4월 암행어사의 장계에 따라 다시 파직되었다.
서울 생활에 환멸을 느낀 그는 잠시 부안의 우반동에
정사암(静思庵)을 짓고 그곳에 얼마간 머물렀다.
이 편지를 보낼 1609년 1월 당시 허균은
다시 서울로 올라와 승문원 판교(判校)로 재직 중이었다.
어쨌거나 허균은 계랑의 노래 사건으로
공연한 구설수에 오르게 되었는데, 그 앞뒤 사정이 참 궁금하다.
☆☆☆
허균과 계랑, 두 사람의 첫 만남은 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601년(선조 34) 7월, 허균은 조운을 감독하는 전운판관(転運判官)이 되어
전라도 땅으로 내려간다.
허균은 그때의 일을
<조관기행(漕官紀行)>이란 일기에서 상세히 적고 있다.
그해 7월 23일의 일기다.
23일 부안에 당도하였다. 비가 심해 유숙하였다.
고홍달(高弘達)이 와서 만나 보았다.
기생 계생(桂生)은 이옥여(李玉汝)의 정인이다.
거문고를 끼고 시를 읊조리는데, 모습은 비록 대단치 않았으나
재주와 정감이 있어 함께 이야기할 만하였다.
하루 종일 술 마시고 시 지으며 서로 창화하였다.
저녁에 침소에 그 조카를 들이니, 혐의를 멀리하기 위함이다.
기생 계랑을 처음 만난 날의 장면이다.
예쁘지는 않았지만 재주와 정이 넘쳐 하루 종일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놀았는데,
그녀는 이옥여의 정인이었으므로 혐의를 피하려
허균과 동침하지 않고 조카를 침소에 들게 하였다.
이옥여는 당시 김제군수로 있던 이귀(李貴, 1557~1633)을 말한다.
이귀는 1599년 이곳 군수로 와서 계랑과 사랑을 나누었다.
이귀와 만나기 전 계랑은 천민 신분이었으되
시로 이름이 높았던 유희경(劉希慶)과 근 서른 살에 가까운 나이 차를 뛰어넘어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의 사랑은 당시 서울에까지 널리 알려질 만큼 유명하였다.
그러다가 고을의 관장인 이귀가 그녀에게 관심을 표시하면서
두 사람은 타의로 헤어지고 만다.
그녀의 유명한 시조로
“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나를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는
이러한 정황을 두고 읽으면 더 절절하게 읽힌다.
이귀는 얼마 후 제방축조 공사를 무리하게 시행하다
백성들의 원망을 사서, 암행어사의 장계에 따라 파직되고 만다.
그런데 앞서 허균의 편지에서
계랑이 그리움을 토로하였다는 대상은
허균도 아니고 이귀도 아닌 윤공(尹公)이었다.
그는 이귀 이후에
부안군수로 부임했던 윤선(尹銑)이었다.
관기였던 그녀는 그 재주로 인해 부임하는 관장을 마다
관심의 대상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앞서 달밤의 노래 사건 때 계랑은 37세였다.
이듬해 세상을 떠나는 것으로 보아, 당시 그녀는 건강을 놓쳐
시름시름 앓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니 그녀가 공덕비 앞에서 불렀다는 노래는
윤선을 향한 그리움이 아니라 원망의 노래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느끼며,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쓸쓸한 삶을 곱씹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날 밤 그녀가 불렀다는 <산자고사(山鷓鴣詞)>는 어떤 노래였던가?
<산자고사>는 예전 중국의 민간에서 불려지던 노래 형식인
악부시(楽府詩)의 한 곡조 이름이다.
☆☆☆
여러 사람이 같은 제목의 작품을 남겼지만
당나라 때 이익(李益, 748~827)의 것이 널리 알려졌다.
湘江斑竹枝 錦翼鷓鴣飛 処処湘雲合 郎従何処帰
상강반죽지 금익자고비 처처상운합 랑종하처귀
상강에 얼룩무늬 대나무 가지
비단 날개 자고새가 날아가누나.
곳곳에 상강의 구름 가리니
우리 임 어디메로 돌아오려나.
자고새는 뜸부기다.
중국사람들은 뜸북뜸북 우는 이 새가, ‘행부득(行不得)’
즉 ‘갈 수가 없네’ 하며 운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고새는 그리움을 뜻하는 새이다.
곽무천의 《악부시집(楽府詩集)》에는 우조곡(羽調曲)이라고 적고 있다.
떠난 임을 그리는 슬픈 가락의 노래다.
시를 보면 순임금을 따라 죽은 이비(二妃)의 피눈물이 배었다는
소상강의 얼룩 무늬 대나무 가지 사이로 고운 날개 빛의 자고새가 날아간다.
그런데 도처에 구름인지라, 한 번 허공으로 훨훨 날아간 새가
처음 떠나온 곳으로 돌아오려 해도 돌아올 수 있겠느냐는 내용이다.
그러니까 반죽(斑竹)은 떠난 임을 기다리는 자신이고,
고운 깃의 자고새는 멀리 떠나간 임이 된다.
하지만 소상강에는 언제나 구름이 자옥하니,
임이 이곳을 다시 찾으려 해도 찾을 길이 없을 것이라는 탄식이다.
☆☆☆
<산자고사>는 이백을 비롯하여 역대 수많은 시인들이 즐겨 부른 노래이다.
기생이 전직 군수와의 사랑을 못 잊어,
그 공덕비 아래서 노래를 불렀다니, 어찌 보면 흐뭇한 미담이 아닌가?
그런데 왜 아무 관련도 없는 허균이 이 일로 욕을 먹게 되었을까?
그 까닭이 자못 궁금하다.
☆☆☆
허균은 《성수시화》에서
이 일에 얽힌 이야기를 다시 이렇게 적고 있다.
부안 창기 계생은 시에 능하고 노래를 잘 불렀다.
한 태수가 그녀를 가까이하였는데, 그가 떠난 뒤 고을 사람이
비석을 세워 그를 그리워하였다.
어느 날 저녁 고운 달이 떠오르자
비석 위에서 거문고를 연주하며 하소하며 길게 노래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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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형(李元亨)이란 사람이 지나다가 이를 보고 시를 지었다.
一曲瑶琴怨鷓鴣 荒碑無語月輪孤
일곡요금원자고 황비무어월륜고
峴山当日征南石 亦有佳人堕涙無
현산당일정남석 역유가인타루무
한 곡조 거문고로 자고새를 원망하니
거친 돌은 말이 없고 달빛만 외롭고나.
현산 땅 그때에 정남석 앞에서도
어여쁜 님 고운 눈물 떨군 적이 있었던가.
☆☆☆
당시 사람들이 이를 절창이라고 했다.
이원형은 내 집의 손님이다.
젊어서부터 나와 이재영(李再栄)과 더불어
같이 지냈던 까닭에 능히 시를 지었다.
다른 작품 중에도 좋은 것이 있다.
석주 권필은 그 사람을 좋아해서 칭찬하곤 했다.
이 글에서 허균은
짐짓 계랑과 전혀 모르는 사이인 것처럼 시치미를 뚝 뗐다.
그리고는 당시 사람들이 이원형의 시를 절창이라고 했다 하였는데,
이 말은 단순히 문면 그대로 읽고 말 일이 아니다.
시 속에 매서운 풍자의 뜻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이 이 시를 절창이라 했다는 것은
곧 속이 후련하게 여겼다는 뜻이다.
한데 좀 이상하다.
계랑이 공개적인 자리에서 노래를 부른 것도 아닌데,
서울 사람으로 그것도 허균과 잘 아는 사이인 이원형이
하필 그 밤중에 우연히 그곳을 지나다가 그 일을 직접 목격했다.
우연으로 돌리기엔 뭔가 미심쩍다.
아마도 이원형은 이 이야기를 풍문으로 전해 듣고 시를 지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일을 서술한 허균이 뻔히 이름을 아는 윤선을
그저 ‘일태수(一太守)’라 하여 말꼬리를 흐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일을 남녀 정사의 흐뭇한 미담으로 본 것이 아니라
심히 비꼬는 뜻을 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원형의 시도 그렇다.
시의 첫 구절로 보아 그녀가 부른 노래가 앞서 본
당나라 이익의 시였던 것은 분명하다.
자고새를 원망한다는 말은
떠난 뒤 소식조차 없는 임을 원망한다는 말이다.
걸리는 것은 3, 4구의
‘현산(峴山)의 정남석(征南石)’ 운운한 대목이다.
☞ 이와 관련한 고사가 있다.
진(晉)나라 때 양양태수로서
선정을 베풀었던 양호(羊祜)라는 인물이 있는데,
그는 태수로 있으면서
시간이 나면 늘 현산을 노닐며 쉬곤 했다.
양호가 떠난 뒤 백성들이 그가 노닐던 현산에
비석을 세우고 사당을 건립하여 공적을 기렸다.
명절 때면 제사를 올렸는데
그 비석을 바라보던 사람이 모두 눈물을 흘리곤 하였으므로
두예(杜預)가 이 비석을 ‘타루비(堕涙碑)’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원형의 시는
예전 양호는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눈물을 흘렸는데,
지금 부안에서는 백성은 안 울고
기생이 와서 눈물을 흘리고 있으니 해괴하다는 뜻이 된다.
목민관으로서의 책임은 외면한 채
일개 기생과 사랑 놀음만 하고 온 군수에 대한
비난의 뜻이 담겨 있었다.
윤선이 정치적으로 허균과 어떤 미묘한 관계에 있었는지
가늠할 만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당시 윤선은 사헌부 장령으로 있었다.
어쨌든 허균은 이원형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이 시의 진짜 작가로 지목되어 논란이 일게 된 모양이다.
이런 사정을 짐작할 만한, 같은 해 10월
허균이 이원형에게 보낸 편지가 한 통 남아 있다.
☞ 그 편지는 이렇다.
"자네가 윤공의 비석을 노래한 시는 참으로 절창이었네.
하지만 내게 해가 됨이 너무 심하네 그려.
자네가 지은 것인 줄은 권필(権韠) 말고는 한 사람도 믿는 이가 없으니
장차 어찌 스스로 해명하시려오?
내가 이 일 때문에 무릇 세 차례나 대관들의 의논을 거쳤다오.
여러 사람이 붙들어 잡아준 덕을 보았을 뿐이오.
내 비방을 도운 것이 가볍지 않으니,
이후로는 삼가서 하지 말도록 하오.
자네가 어잠부(魚潜夫)의 <작매부(斫梅賦)>와 관계된 일을 보지 않았던가?
아아! 두려워할 만한 일일세."
☆☆☆
요컨대 이원형이 지은 위의 시 때문에
허균이 세 차례나 대관(台官)들의 성토를 받았다는 것이다.
권필을 제외하고는 가까운 사람마저도 위 시를
허균이 윤선을 해코지하기 위한 의도로 지어낸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허균은 연산군 때 어무적(魚無迹)의 <작매부>이야기를 들어
이원형에게 경계로 삼으라고 하였다.
어무적 이야기는 이렇다.
김해의 관노인 어무적이, 고을 원님이 고을의 매화나무까지 세금을 부과하자
견디다 못한 백성 하나가 매화나무를 도끼로 찍어버린 일을 풍자한
<작매부>란 시를 지었다.
어무적은 격노한 원님이 잡으려 하자 도망가다 죽고 말았다.
그러니까 허균은 이원형이 지은 위 시가 어무적의 <작매부>처럼
서슬 푸른 풍자의 의미를 담고 있고, 자칫 큰 화를 입을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고 충고한 것이다.
실제로 《대동시선》에는 이 시가 이원형의 이름 아래
‘희제모사군거사비(戯題某使君去思碑)’란 제목으로 되어 있다.
아무개 사또의 거사비(去思碑)에 장난삼아 썼다는 것이니,
단순히 계랑의 붉은 마음을 찬양한 노래가 아니라
노골적으로 윤선을 비난하려는 의도가 담긴 시임이 분명해진다.
문제는 허균과 권필 외에는
아무도 이 시의 원작자가 이원형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대동시선》에는 이원형의 시로
<도절사기(悼節死妓)>란 작품이 하나 더 있다.
그런데 정작 이 책에서
이원형의 인적사항은 ‘허균가(許筠家) 문객’으로만 나온다.
이원형의 이 시는 전혀 엉뚱하게 계랑이 세상을 뜬 뒤
개암사(開巌寺)에서 간행한 《매창집》에 <윤공비(尹公碑)>란 제목 아래
엄연한 계랑의 작품으로 잘못 올라 있다.
실제 허균이 계랑에게 보낸 편지는 불과 몇 달 전
부안 우반동의 생활을 접고 올라온 직후에 쓴 것이었다.
허균은 계랑과의 첫 만남 이후
이미 기생으로서는 늙어버린 37세의 그녀와
풍류의 만남을 오랜만에 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승문원 판교 임명 소식에 해도 바뀌기 전 허균은 서울로 돌아왔다.
☆☆☆
계랑, 그녀가 사랑을 나눈 사람은
유희경과 이귀, 그리고 윤선까지 여러 명이었다.
하지만 허균과의 만남은
사랑보다 우정에 가까운 만남을 가졌다.
위의 편지에서 근래에도 참선을 하는지
묻고, 그리운 마음이 간절하다고 했다.
허균은 버림받고 잊혀진 자신의 신세를 탄식하면서
허물어져 가던 그녀에게 참선 공부로 마음을 다스릴 것을
충고해 주었던 모양이다.
허균은 이원형에게 위에서 본 편지를 보내기 한 달 전
계랑에게 다시 한통의 편지를 부친다.
"봉래산의 가을빛이 한창 짙으리니,
돌아가고픈 흥을 가눌 길 없습니다.
낭은 내가 구학(丘壑)의 맹서를
저버렸다 응당 비웃겠지요.
그때 만약 한 생각만 어긋났더라면
나와 낭의 사귐이 어찌 십 년간이나 끈끈하게
이어질 수 있었겠소?
이제서야 진회해(秦淮海)가 사내가 아님을 알겠소.
하지만 선관(禅観)을 지님은 몸과 마음에 유익함도 있지요.
언제나 하고픈 말 마음껏 나눌지,
종이를 앞에 두고 안타까워합니다."
1609년 9월에 쓴 편지다.
☆☆☆
이때 허균은
막 형조참의에 제수되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고향에 돌아가 편히 살겠다고 노래를 불렀는데,
몸은 갈수록 벼슬길에 얽매여 어찌해 볼 수 없는 처지를 이렇게 말한 것이다.
한 생각이 어긋났더라면 운운하며 처음 만나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 억지로 동침을 요구했더라면 오늘날까지 서로 존중하는 우정이
끈끈하게 이어질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앞서의 편지에서 참선을 하느냐고 물은 것과,
두 번째 편지에서 선관(禅観)을 말한 것으로 보아,
만년의 계랑 또한 허균처럼 불교에 몹시 심취했던 듯하다.
☆☆☆
진회해(秦淮海) 운운한 부분 역시 고사가 있다.
진회해는 송나라 때 문인 진관(秦観)이다.
지은이를 알 수 없는 《동강시화(桐江詩話)》에는
<창도고(暢道姑)>란 항목이 있다.
☞ 창씨 성을 가진 여도사의 이야기다.
그녀는 대대로 도교를 숭신했던 집안의 여인으로, 자색이 뛰어나게 아름다웠다.
그녀를 본 진관이 넋을 잃고 백방으로 유혹하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진관은 마침내 그녀를 품에 안으려는 욕심을 버리고,
그녀의 고귀한 자태를 찬양하는 <증여관창사(贈女冠暢師)>란 작품을 지어준 일이 있었다.
☆☆☆
허균은 이 이야기를 슬쩍 끼워 넣음으로써
자신도 그때 진회해가 창도고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대에게 마음을 빼앗겼었노라고 짐짓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복잡한 전후 사정이 있었지만,
어쨌거나 허균과 기생 계랑이 나눈 오랜 우정은 특별한 느낌을 준다.
시문을 통한 공감과 거문고의 흥취, 불교에 대한 심취까지
두 사람 사이에는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앞서의 소동이 채 가라앉기도 전인
1610년 계랑은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다.
그러고 보면 앞서의 소동은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사위어가는 청춘을 조상하는
서글픈 의식이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
그녀가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듣고,
허균은 <애계랑(哀桂娘)>이란 시 두 수를 지어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妙句堪摛錦 清歌解駐雲 偸桃来下界 窃薬去人群
묘구감리금 청가해주운 투도래하계 절약거인군
灯暗芙蓉帳 香残翡翠裙 明年小桃発 誰過薛涛墳
정암부용장 향잔비취군 명년소도발 수과설도분
절묘한 싯귀는 비단 펼친 듯
맑은 노래 가던 구름 길을 멈췄네.
복숭아 훔친 죄로 인간 내려와
불사약을 훔쳐서 인간 떠났네.
부용 휘장 등불은 어둑도 하고
비취빛 치마엔 향기가 남아.
내년에 복사꽃이 활짝 피면은
그 누가 설도(薛涛) 무덤 지나가리오.
凄絶班姫扇 悲涼卓女琴 飄花空積恨 衰蕙只傷心
처절반희선 비량탁녀금 표화공적한 쇠혜지상심
蓬島雲無迹 溟滄月已沈 他年蘇小宅 残柳不成陰
봉도운무적 명창월이담 타년소소택 잔류불성음
처량타 반희(班姫)가 부치던 부채
구슬퍼라 탁문군(卓文君)이 타던 거문고.
날리는 꽃 공연히 한만 쌓이고
시든 향초 다만 마음 상하네.
봉래도라 구름은 자취도 없고
푸른 바다 달빛은 하마 잠겼네.
훗날 소소(蘇小)의 집을 찾으면
시든 버들 그늘도 못 드리우리.
‘비단을 펼쳐놓은 듯 아름답던 시,
청아한 노랫소리는 구름도 가던 길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었다.
내 보기에 그대는 복숭아 훔친 죄로 인간 세상에 귀양 온 선녀였었다.
그런데 이제 인간의 불사약을 훔쳐 달나라로 달아났던 항아(嫦娥)처럼
훌쩍 왔던 곳으로 되돌아갔구나.
그대의 거처엔 불이 꺼지고, 그대 입던 치마엔 향기만 남았으리.
봄날이 와, 그대가 훔쳐와 심은 그 복숭아 나뭇가지에 꽃이 활짝 피어나면,
사람들은 저 옛날 중국의 시기(詩妓) 설도(薛涛)의 무덤을 찾지 않고,
모두들 그대의 무덤을 찾아 스러져버린 꽃다운 기억들을 추억하게 될게요.’
둘째 수에서는 버림받은 신세를 가을 부채에 견주었던
한나라 반첩여(班婕妤)의 <원가행(怨歌行)과 탁문군(卓文君)의 거문고 고사를 끌어와
이 둘을 합한 것이 바로 계랑이라고 추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삶은 흩날리는 꽃잎처럼 한만 답쌓이고,
거듭되는 이별에 가슴만 아픈 나날이었다.
그제 그녀는 봉래산으로 건너갔고,
달빛은 바다에 잠겨 세상은 어둠 속에 묻히고 말았다.
유명한 기생 소소(蘇小)의 명망도
이제 그녀의 꽃다운 이름 앞에는 무색해질 수밖에 없을 터이다.
진정으로 그녀의 재주와 인간을 아꼈던 허균의 솔직한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
이 시에 붙인 부기에서
허균은 다시 이렇게 적고 있다.
"계생(桂生)은 부안 기생이다.
시를 잘 짓고 글을 이해했다. 또 노래와 거문고 연주에 뛰어났다.
성품이 고결하고 굳세어 음란함을 즐기지 않았다.
내가 그 재주를 아껴 막역의 사귐을 나누었다.
비록 담소하며 가까이 지낸 곳에서도
난잡함에 미치지는 않았기에 오래도록 시들지 않았다.
이제 죽음을 듣고
그를 위해 한번 울고 율시 두 수를 지어 애도한다.
오래 사귀었으나 몸을 나누지는 않았다.
그녀는 음란함을 즐기지 않았고, 나는 난잡함에 미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오래오래 우정을 지속할 수 있었다.
이제 그대가 나를 버리고 떠나니 나는 슬픈 눈물로 그대를 전송한다.
꽃다운 넋은 고이 잠들라."
- 상향(尚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