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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 쉬운 한글 독송
번역에 사용된 원문의 출처 : 동국역경원 데이터베이스 통합대장경
경명 : 유식삼십론송(唯識三十論頌)
약칭 : 삽십론(三十論), 유식삼십론(唯識三十論),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
별칭 : 삼십유식론(三十唯識論)
유식삼십론송(唯識三十論頌)
세친(世親) 지음 vasubandhu 4-5세기, 북인도 출신의 승려.
현장(玄奘) 한역
밥통 스피커 이문호 현대 쉬운 한글 번역
[1]
나와 세계, 몸과 시공간, 주관과 객관은 임시적 가상의 설정이다.
이 설정으로부터 우주 모든 일이 일어난다.
일체는 단일의식의 자기 변화 즉 자기 자각이다.
(생사 모든 일은 단일의식의 일인다역의 장엄한 연극이다)
단일의식은 세 가지로 작용한다.
[2]
제8식 아뢰야식 이숙식은 깨달음의 보물창고 즉 단일의식
제7식 말라식 사량식은 나라는 생각, 이 기준점으로부터 모든 종류의 일이 일어난다.
전5식과 제6식 판단식은 감각 지각으로 대상을 구분하는 의식이다.
제8식 아뢰야식 이숙식은 세상만물이 각각 다르게 꽃피고 열매 맺지만,
일체 모든 일은 단일의식의 직접 나타남 즉 깨달음이라는 진실
[3]
제8식 단일의식의 위치를 알 수 없고, 스스로 세상 만물로 나타나고 감지해서 파악하고 분명하게 구분하는 작용과 기능이 어떻게 가능한지 불가사의하다.
제8식은 감각하는 전5식, 지각하는 제6식 및 몸 안에 내(=의식)가 있다고 생각하는 제7식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영원한 원천이다.
단일의식을 어떻게 알아보고 그와 통할 수 있는가?
오직 이원성이 투명해지는 곳(不苦不樂=捨受), 즉 제7식 개인이 희박해지는 곳과 직접 통한다.
[4]
제8식은 덮여 가려지지 않은 채 공개돼 있고, 선악 생멸 이원성과 상관이 없다.
즉 단일하고 동일하며 불변이고 불생불멸이다.
감각 지각 생각 즉 전5식 제6식 제7식 역시 그 정체는 제8식과 동일하다.
왜 그러한가?
5식 6식 7식은 모두 제8식의 직접 나타남이고,
이원성은 임시의 가상 설정이기 때문이다.
단일의식의 일인다역의 드라마, 생사고락이 폭류처럼 흐르지만
의식의 위치와 개수에 대한 앎이 있는 곳에 폭류는 그친다.
[5]
제8식이 스스로 변위하여 임시 가상의 주체가 되면
이를 제7식 말라식이라 이름한다.
7식은 8식에 의지하여 운행되는데
생각하는 기능이 7식의 특성이고 모습이다.
[6]
7식은 항상 고통과 공포의 4가지 원인을 불러오는데
그것은 어리석음, 내가 있다는 고집, 교만, 자기만을 사랑함이다.
7식은 전5식 및 제6식을 고통과 공포로 물들인다.
[7]
7식은 항상 어리석음, 내가 있다는 고집, 교만, 자기만을 사랑함으로 뒤덮이고
전5식과 제6식에 명령하여 4가지 고통을 실행하지만 스스로는 선악이 없다.
자기 선택으로 자기를 창조하고, 그 창조된 바를 따라 스스로 속박된다.
즉 생각이야말로 우주 만물의 창조자이다.
아라한 멸진정 출세도에 이르면 4가지 원인이 그친다.
[8]
8식은 7식을 거쳐 스스로 6가지 종류의 의식으로 변위한다.
즉 감각하고 지각하는 의식이다.
6식을 재료로 삼아 대상 객관 세계를 건설하는데
그것이 6식의 특성이고 모습이다.
이 세계는 선과 불선 그리고 선도 아니고 불선도 아닌 것으로 나타난다.
[9]
8식은 7식을 거쳐 6식을 자기수단으로 삼아
6식의 51가지 의식 현상으로써 자기체험(자기 깨달음)을 한다.
51가지를 분류하면 변행, 별경, 선, 번뇌, 수번뇌, 부정이다.
이들 각각은 고, 락, 불고불락의 모양을 나타낸다.
(心所=의식 작용, 의식 현상)
[10]
8식은 6식을 수단으로 사용해서 6근(안이비설신의)과 6경(색성향미촉법)이라는 주객을 임시로 설정하고, 가상의 접촉, 자유의지, 감각감정, 이미지, 생각의 5가지로 작용한다.
(촉(觸)·작의(作意)·수(受)·상(想)·사(思), 5가지 보편적인 의식 현상=5변행심소(五遍行心所))
(6근+6경=6식, 이것은 가상의 주객 및 가상 상호작용의 가상결과)
6식에서 일어나는 특별한 5가지 의식 현상이 있다.
욕(欲)은 개인 중심 세계의 부질없음과 허망함을 혐오하여 궁극의 진실을 구하고자 하는 발심 초심을 말한다.
승해(勝解)는 궁극의 진실에 대한 가리킴을 사랑하고 그 가리킴에 귀와 가슴을 여는 것이다.
염(念)은 정견으로서 궁극의 진실을 매 순간 잊지 않는 것이다.
정(定)은 개인적 동기를 멀리하여 고통과 공포가 깃털처럼 가벼워짐을 말한다.
혜(慧)는 삶과 죽음의 진실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죽음 앞에서도 늘 현전하고 생사를 관통하여 무주상보시 즉 사랑밖에 다른 것이 없음을 말한다.
이런 5별경심소는 인연에 따라 각양각색 다르게 펼쳐진다. 이 또한 단일의식의 1인다역의 연극이기 때문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11]
제6식에 11가지 좋은 것이 있다.
신(信)은 믿음이니 선현이 가리키신 궁극의 진실을 믿는 것이다.
참괴(慚愧)는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다. 즉 잘못을 즉각 인정하고 사과하고 그 손해를 최선을 다하여 보전하는 언행으로써, 무궁한 改善이 이어진다. 이것은 사실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무탐 무진 무치 즉 삼독 없음을 3선근이라 말한다. 탐욕 화냄 어리석음은 모두 단지 궁극의 진실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근(勤)은 근면한 것이다. 무엇에 근면한가? 늘 진실과 신실한 벗을 가까이하고 기억하며 용기를 내어 믿음이다.
안(安)은 오직 좋은 것으로부터만 가볍고 경쾌한 편안함과 안심이 온다는 뜻이다.
불방일(不放逸)은 가상 주객의 연극에 매몰될지라도 그것이 연극임을 늘 아는 것이다. 즉 오해를 정견으로 대체하는 일이 저절로 연속되는 것이다.
행사(行捨)는 부질없고 덧없는 일에 에너지를 쏟지 않고 역으로 진실에 에너지를 사용함이다.
불해(不害)는 해를 끼치지 않음이니, 일심 단일의식 자신이 어찌 자기 자신에게 해를 끼치겠는가? 불해는 곧 무한한 사랑이다.
[12]
제6식에 좋지 않은 것, 즉 번뇌(고통과 공포)가 있는데, 총론적으로 말하면 6가지이고 각론적으로 말하면 20가지이다.
고통과 공포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의식 현상으로서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탐(貪)은 분수에 맞지 않는, 과도한, 필요 이상의, 돈과 재물, 권력, 명예, 여자, 남자를 갈구하는 것이다. 스스로 만드는 가장 큰 고통이고 공포이다.
진(瞋)은 탐하고 기대하고 의지한 것이 어그러짐에서 오는 분노이다.
치(癡)는 ‘평등하고 단일하고 동일한 의식’을 발견하지 않고 혹은 그 가리킴을 즐겨 듣지 않고, 개인으로 몰입되어 스스로 갈애와 분노를 일으키는 어리석음이다. 자승자박이다.
만(慢)은 교만하고 자만하고 오만하게 언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가하는 큰 고통이다.
의(疑)는 선각의 가리킴을 의심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다스릴 수 있다.
악견(惡見)은 정견(正見)의 반대말이다. 의식의 위치와 개수에 대한 오해야말로 가장 큰 악견이다. 인류의 문화와 문명 그 자체를 악견이라 이름한다.
다음으로 20가지 좋지 않은 각론적 의식 현상을 말한다.
분한(忿恨)은 억울하고 한스러운 마음이다. 피해자의식이며 피해자 코스프레이다. 분한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당연히 위 6가지 근본 고통으로부터 파생한다.
부(覆)는 자기 책임과 자기 잘못을 타로 돌려 전가(轉嫁) 부담시키는 防禦기제이다. 개인은 이렇게 하여 책임과 잘못으로부터 해방된다고 여기지만 결과는 거꾸로 되어, 고통과 공포가 더욱 커지기만 한다.
뇌(惱)는 고통과 공포가 스스로 만드는 것임을 눈치채지 못하여, 고통과 공포가 일상화되어 여러 가지 정신적 육체적 질환으로 현출하는 의식 현상이다.
질(嫉)은 그리하여 남은 것은 시기 질투 이간질 이중플레이 등이고 이로써 악역을 스스로 맡아 연기하게 된다.
간(慳)은 스스로 만든 고통과 공포의 일상화 안에서 어찌 포용하고 베풀고 너그럽고 사랑하는 마음이 나타날 수 있을까?
[13]
광(誑)은 속이고 사기 쳐 타인의 재산을 도둑질하는 것이다.
첨(諂)은 아첨해서 일거에 횡재하거나 권력을 얻으려는 의식이다.
해(害)는 이익을 위해서 해를 가하는 것이다.
교(憍)는 거만 방자하게 함부로 까불고 날뛰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드디어 내가 깨달았다”라고 외치는 것이다.
무참(無慚) 및 무괴(無愧)는 무책임과 잘못에 대하여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다.
도거(掉擧)는 들뜨고 흔들리고 요동치는 것이다.
혼침(惛沈)은 지엽말단에 쏠려 중심을 잡지 못하고 항상 주변부를 맴도는 귀신의 방랑 현상이다.
불신(不信)은 진실을 듣고도 용기를 내지 못하여 개인 습관에 굴복하고 의심을 일상화하는 것이다.
해태(懈怠)는 습관에 굴복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마음은 매우 급해지는 것이다.
[14]
방일(放逸)은 ‘궁극의 진실’, ‘궁극의 해답’에 대하여 발심하기는커녕 오히려 염증을 일으킨다. 그리고는 불가지론, 무신론, 맹신주의, 인본주의, 뉴에이지, 과학주의, 철학 등 기만적 프레임에 빠진다. 그러고는 “나는 미신적이지 않고 현대적인 스마트한 이성적 인간이다”라고 자만한다. 그 결과는 다른 80억 명의 사람 대열에 합류하여 지극히 안심하고는, 그저 ‘어찌 되겠지’하면서 죽음을 회피하는 동시에 내심 공포로 기다리는 것이다.
실념(失念)은 개인적 동기로 진실의 길을 걷다가 개인적 동기의 불성취에 실망하여, 진실에 등을 돌리고 진실의 적이 되어 세상으로 돌아가 마음껏 악을 행하고자 맹세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쩌리! 악마저 마음대로 행할 자유가 없다는 진실 앞에서!
산란(散亂)은 개인적 동기가 강하게 작동하여 혼동 속에서 의식의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이다.
부정지(不正知)는 정견이 아닌 것을 정견이라 여겨 부여잡고는 여기저기 다니면서 싸움질을 하고 갈등을 최대한 일으켜 화제의 중심에 있고 싶은 의식 현상이다.
특별히 정해진 것이 아닌 의식 현상, 즉 등장인물 캐릭터에 따라 유동적인 의식 현상으로는 회면(悔眠)과 심사(尋伺)가 있다.
회면(悔眠)은 이전의 모든 것을 회개하고 뉘우치며 죽은 시늉을 하고 잠자코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양변에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 중도가 요청된다. 즉 ‘회개하지 않는 것’과 ‘오직 자기 정죄와 회개로 100년을 보내는 것’, 둘 다 아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음이라)
심사(尋伺)는 진실을 찾고 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양변에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 중도가 요청된다. 즉 ‘찾지 않고 구하지 않는 것’과 ‘오직 찾고 구함으로 100년을 보내는 것’, 둘 다 아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義)를 구하라)
[15]
8식은 스스로 변전하여 가상의 주객 즉 이름과 모양으로 自現하고
가상 주객의 가상 접촉으로
전 5식 즉 5가지 감각이 나타난다.
감각 자체는 무색투명 중립이지만, 6식과 7식이 개입하여 다채로운 감각 지각이 출현한다.
5식은 혹은 다 함께 혹은 별도로 일어난다.
이는 다양한 파도가 단일 바다에 의지하고, 다양한 질그릇이 단일 진흙에 의지함과 같다.
[16]
제6 의식은 항상 현재 지금 일어난다.
전 5식 감각 자료를 재료로 해서, 호불호 느낌, 이미지, 언행, 판단(受想行識)을 창조한다.
수상행식이 잠잠하게 가라앉거나(無想), 바람과 기대가 없을 때(無心)
꿈도 없이 잘 때, 기절했을 때는 일어나지 않는다.
[17]
8식 7식 6식(법신 보신 화신)이, 통합적으로 기능하여,
임시 가상의 주관(分別)과 객관(所分別)으로 자기를 창조한다.
8식 7식 6식은 능히 스스로 변전하여,
멘탈체, 아스트랄체, 육체라 불리는 중첩 통합 3 주관을 자기 창조하고,
주관 창조와 동시에, 이와 연기(緣起)하여,
전 5식 감각의식 즉 물질 공간 시간이라 불리는 객관을 자기 창조한다.
이런 이유로 주관과 객관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다.
내면 정신과 외부 공간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주객 모든 것은 一體로 단일하고 동일한 하나의 의식이다.
[18]
일체 모든 것의 근본인 단일의식에는
본래 주관과 객관이 없는 것인데
스스로 자변(自變)하여, 1인다역의 드라마로
전개되고 흘러가는 힘이 있기에
주객, 정신물질, 몸 시공간 등의
임시 가상의 이원성이 일어난다.
[19]
밀고 당기면서 생각 말 행동으로
아직은 희미한 자타(自他)를 마구 붙잡는
일체 모든 습관의 힘은
개인 주관과 대상 객관을 뚜렷하게 창조하고 유지한다.
(-촉-수-애-취-유-생-노사-)
그 습관이 선한 습관인지 악한 습관인지 전혀 묻지 않는다.
거듭되는 선한 습관은 선한 습관을 더욱 강화하고
거듭되는 악한 습관은 악한 습관을 더욱 강화한다,
(인류에 한정해서, 선악의 유일한 기준은 황금률이다)
[20] 변계소집 무자성
自他가 생겨난 이후에는
서로 간에 접촉과 복잡한 계산 즉 deal(거래)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복잡한 계산과 deal(거래)의 결과 특정 自他를 붙잡고는 밀고 당길 수밖에 없다.
변계소집(遍計所執)에서,
변계(遍計)는 두루 계산하는 주관이고
소집(所執)은 잡는 바 대상 객관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런 自他가 존재하지 않는다.
自他는 가상 임시이기 때문이다.
*** 분석
遍計所執性
遍計 + 所執 = 性
주관 + 객관 = 마음의 나타남 = 의식자각 = 覺不覺 = 족빠첸뽀
[21] 만법 무자성
타에 의지해야만 비로소 일어나는 것이 스스로의 성품이다.
주관(因)은 반드시 주관(因)이 아닌 것에 의지하여 비로소 일어나고
객관(緣)은 반드시 객관(緣)이 아닌 것에 의지하여 비로소 일어나므로
이들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 즉 실체가 아니다.
그러나 바로 이 가상의 주객이 있는 곳에
본래 원만하고 진실 된 실체 즉 진여가 있지만
다만 변계소집을 멀리 떠나야만 드러난다.
(주객이 가상임을 보면 그것이 곧 진여 단일의식이다)
(꿈 안에서 꿈이라는 진실을 알면 그것이 곧 깨어남이다)
[22]
그런 이유로 원성실성과 의타기성은
다르지도 않고 같지도 않다. (不二不一)
단일의식과 주객은 다르지도 않고 같지도 않다.
주객·생멸(無常)은 불생불멸(性)과 동시이고 같다.
불생불멸은 생멸로 자기를 나타낸다.
단일의식은 1인다역의 장엄한 드라마를 펼친다.
모습 없는 궁극의 진실은 모습으로써 자신을 드러낸다.
몸·물질·시공간을 보면 단일의식은 볼 수 없지만
단일의식을 보면 몸·물질·시공간은 단일의식과 같이 있다.
영원이전 처음부터 둘이 아니었다.
[23]
변계소집성, 의타기성, 원성실성 각각에는
‘나’라고 할만한 실체가 없다.
그러므로 모든 붓다께서는 이 비밀을 가리키셨다.
일체 모든 생멸은 임시 가상이라는 진실을.
*** 그렇다면,
지금 누가 무엇이 이 컵을 보는가?
‘보는 자’를 찾을 수 있는가?
꿈속의 모든 주관과 객관이 전부 다 꿈이라면
꿈꾸는 실체는 누구인가? 무엇인가?
‘꿈꾸는 자’를 찾을 수 있는가?
다만 찾지 못하는 줄 알면
그것이 곧 이것
(但知不會 是卽見性)
유식(唯識)
오직 단일의식
[24]
변계소집 즉 가상의 주객이 접촉하여 나타나는 千變萬化 온갖 모습은
스스로 존재하는 성품이 없고(五蘊皆空, 諸相非相)
의타기성 즉 원인과 결과, 주관과 객관 역시 연기법에 의거하여
서로를 규정하면서 서로 계속 변화하므로 정해진 실체가 없다(無有定法)
원성실성 즉 진여는, ‘나와 세계가 다만 하나의 의식’이라는 진실을 듣고 알아
이전의 착각, ‘나와 세계가 별개의 실체’라는 꿈에서 풀려나
고통과 공포가 가벼워지는 것을 말한다(聞法解脫)
[25]
이것이 가장 뛰어난 의로움이고 올바름이다.
(의의 교사, 이신칭의,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이것이 가장 뛰어난 선량함이고 아름다움이다.
즉 궁극의 진실이고 궁극의 해답이다.
그 본성은 불생불멸로 영원히 변함없으니
유식 즉 단일하고 동일한 하나의 의식
오직 이것이다!
[26]
그리고 아직 유식, 즉 단일의식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앎, 믿음이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피상적이고 형식적으로 소위 깨달음에 안주하기를 구하면
(명상, 참선, 요가, 차크라, 관찰자, 위빠사나, 체험, 견성 등등의 개인적 수행으로 평범한 사람에서 깨달은 사람으로 바뀌기를 구하면)
의식대상(所取) 의식주체(能取) 2取가 의식에 잠복하여 있다가
인연 조건을 만나기만 하면 광란하며 튀어나와 주인 노릇을 행할 것이다.
*** 그러면 어찌해야 하는가?
1. 평소 ‘의식의 위치와 개수에 대한 지혜’(프라즈나 파라미타)를 가장 소중히 하고
2. 개인적 동기를 가능한 한 뒤로 멀리하는 것
3. 즉 평소 몸 물질 시공간이 하나의 단일의식임을 보는 것(色空)
4. 그리고 마음의식 안에서 집으로 돌아와
5. 삶에서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
[27]
명상, 참선, 요가, 차크라, 관찰자, 위빠사나, 체험, 견성 등등의
개인적 동기를 바탕으로 공부해서 평범한 사람에서 깨달은 사람으로 바뀌기를
제법 오래 구하다 보면
무언가 대상적 현상을 얻을 수 있는데
이를 깨달음으로 여기고 붙잡는다면
참으로 애석하다.
목전에서 놓쳤으니
진여는, 새롭게 얻어지는 무엇을 가짜의 징표로 하며
본래 있는 것이 드러남을 진실의 징표로 한다.
*** 가장 깊은 진실이
다른 것도 아닌
‘우리 자신’의 진실이
그토록 어렵게
극소수의 사람에게
희귀한 체험 등을 통해서만
매우 매우 드물게 드러나고 일어나는 것이라면
그것에다가
진실, 진리, 보편지혜라고
이름 붙이는 것이
너무나도 부끄럽고
어이가 없습니다.
[28]
대상에서 동시에 대상으로, 무엇인가를 얻고자 하는 마음이 투명해 지면
(그 대상이 세속적이든 탈 세속적이든 불문하고)
(얻고자 하는 마음을 없앨 수는 없다, 다만 가볍고 투명해지는 것일 뿐)
비로소 자유와 평안에 이르는 것이니
(고통과 공포가 가벼워지는 것이니)
개인과 세계가 별개 실체로 있다는 생각의 전도몽상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29]
주관과 객관에서 아무 얻을 바 없고
오히려 ‘주객’(=色空=단일의식=일심) 통째 이대로
영원부터 본래 주어진 가장 소중한 보물임을 보는 지혜는 불가사의한 이득을 준다.
이것이야말로 세상의 지식과 다른 것이다.
나와 세계라는 거칠고 무거운 짐 덩어리를 던져버렸기에
문득 어느새 개인이 물러나고 일심 단일의식 지혜가 앞장서니
항상 있던 고통과 공포를 찾을 수 없음(無有恐怖, 공포의 모습은 있지만 실체가 없다)이
궁극의 진실 지혜의 증거가 된다.
*** 3구 메시지
보는 이것
통째 하나면 의식 자각
따로따로면 물질시공간
[30]
이것이 새나감 없는 온전한 진실 세계이고
이원성을 떠난 영원한 선함이며
고통과 공포에서 풀려난 자유와 평화이다.
이름하여 大聖賢 法身이라 말한다.
첫댓글 자비심에 귀의합니다 감사드립니다 토니파슨스 강독중에 자아를 통제할려고 하지말고 단일의식에 견고한 믿음을 일으켜라 그리하면 스스로 하나님과부처님이 작용하신다 밥통 스피커 교수님께 지극한 의식으로 귀의합니다
어렵기만 하던 대승기신론 유식삼십송 어디서도 볼수없는 귀한 쉬운독송 자비심에 합장삼배올립니다
감사합니다!
자세히 들여다 볼수록 알아듣기 쉽게 번역된 진귀한 보물입니다.
오래 전에 한문을 번역한 거의 뜻풀이에 가까웠던 유식 30송을 접했던 때와는 다른 신세계입니다.
동일 원본이 이렇게 쉽게 표현 될 수 있음이 경이롭습니다.
귀한 쉬운 현대적 번역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