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담양 용연리 담양국씨 묘(어느 묘가 진혈인가?)
1. 담양국씨(潭陽鞠氏)
* 담양국씨의 시조는 국주(鞠周)인 바 그는 중국 송나라에서 공경대부를 지내다가 1128년(고려 인종6년) 고려로 귀화하고 금나라와의 외교에서 공을 세워 삼중대광에 오르고 추성군(秋城君)에 책봉되었다. 중시조는 국경례(1428~?)로 아들 6명 후손이 크게 번성하였다. 인구는 2만명(95 순위). 시조 이하 9위까지는 개성에 있어서(다만 5세조는 부여에 묘가 있다) 담양 학동리 306-7에 사당을 지어 모신다. 담양입향조 국무의 무덤은 사당 뒤에 있다.
* 9세손 국유(호는 복애)가 1392년 두문동 72현 중 한 사람으로 순사하자 그의 장남 국무(鞠珷)는 중종2년(1400년) 과거에 응시하라는 조정의 회유를 뿌리치고 담양으로 이주하여 담양입향조가 되었다. 후손들은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농사와 장사에 종사하였는데 담양(고려 이래 추성군이다)땅이 비옥한 덕으로 만석꾼이 여럿 있었다. 일제 때 28세손 국채웅은 만석꾼으로 독립군을 지원하고 민심을 얻어 생일 축하객 1만2천명이 줄을 섰다고 하며 그의 증손 31세손 국창근은 국회의원을 하는 등 대표 가문이 되었다.
2. 국공(鞠公)의 묘
* 담양 용연리 산335은 국씨선산으로 상단에 있는 창덕궁위장을 지낸 국공(鞠公) 묘와 하단에 있는 무명 고총(無名古塚)이 유명한데 묻힌 분은 국씨선조인 것은 분명해보이는데 구체적인 내력을 알 수 없다. 여러 간산기도 담양국씨 선조 묘라고 쓰고 있는데 국공의 묘를 말하는가 아니면 무명고총을 말하는가 애매하게 보일 수 있으나 무명 고총을 말한다고 이해된다.
* 비석없는 무명고총은 그렇다 치더라도 비석있는 국공의 묘 또한 비석 앞면에 이름이 없고 비석 뒷면은 글자가 마모되어 판독이 불가능하다. 앞면의 비문은 아래와 같다.
“호조참판(주; 판서보조)겸 동지의금부사(주; 의금부 종2품) 行 가선대부(주; 조선시대 종2품) 동지중추부사(주; 종2품) 창덕궁위장”인 바, 요약하면 망인은 가선대부로서 종2품이었고 창덕궁위장직에 있었다는 것이다.
창덕궁은 태종 때인 1405년 건축되었는데 임란 때 소실되고 1610년 광해군 때 재건되어 1867년 경복궁 재건 때까지 활용되었다. 창덕궁위장은 무과급제자가 임명받는 경우가 많았고 영조 때부터 고종때까지 임명되었다. 전택리가 1774년(영조 50년) 가선대부(종2품 품계) 동지중추부사(중추부소속 종2품 관직) 창덕궁위장의 임명장을 받았는데 이곳 국공과 꼭 같은 계급과 벼슬이다. 인터넷 정보를 모아보면, 담양국씨는 문과2명 무과1명의 급제자가 있었는데 무과급제자는 국감(1604~1637)이다. 국감은 창덕궁위장 보다 더 높은 벼슬을 하였다. 14세손 국효채가 첨지중추부사, 국민중이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국민중일 가능성이 있다. 여기의 국공은 종2품과 그에 걸맞는 창덕궁위장을 맡았던 사람이므로 국씨문중에서 상당한 유력자라고 생각된다. 비석의 낡은 정도로 보아 2~3백년전 인물이 아닐가. 국씨문중에 확인해보지 못했다.
2. 답사
* 사람들은 담양국씨는 만석꾼 집안이고 이곳은 3천년 향화지지이며 금구하수형이라고 한다. 상단에 3기, 하단에 4기가 있는데 어느 묘가 진혈일가? 여러 묘주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는가? 물형은 무엇일가? 어떤 등급의 대혈일가?
* 소국---내장산 래룡으로 추월산을 거쳐 비네산으로 왔다. 산331은 당판이 동그랗게 올라 있는 곳으로 성불명인의 집장지로 중등초급 명당이다. 산335는 국씨 묘가 있는 곳으로 당처도 당당하지만 주위의 사격이 엄청 강하다.
* 산335의 묘---다수는 상단에 있는 창덕궁위장 국공의 묘가 좋다고 하나 그곳은 혈이 맺히지 않고 하단 가운데 제일 위에 있는 크다란 봉분 묘 하나(아래 도면표시 무명 고총)가 정확하게 앉았다. ①생기는 국공 묘로 왔다가 방향을 틀어 무명 고총으로 내려가 결혈하였다. 가만히 보면 무명고총에 은은한 태극훈이 보인다. 국공 묘는 과룡처이다. ②국공 묘에 전순이 없다. ③ 왼쪽 어깨 뒤가 낮아서 바람이 침범한다. ④외청룡에 험악한 바위가 있는데 하단 묘는 청룡이 두 가닥 생겨서 살기를 완화시켜주는데 대하여 국공 묘는 살기를 직면한다. ⑤국공 묘는 좌판이 기울었다. 당판이 안정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이에 대하여 하단 묘 중 제일 위에 있는 무명 고총은 국공 묘에서 방향을 틀어 장유로 내려오다가 개팔(開八)하고 미미하게 와(窩)를 만들고 앉았다. 池국풍은 무명고총 부근에 진혈이 비어 있다고 간산하였는데 필자가 보기에는 무명고총이 정확하게 들었고 그 상하에 빈자리는 없다.
* 세상에 완벽한 것은 부처님 상호밖에 없다. 무명 고총에도 결점이 있으니 ①전순이 넓게 퍼지면서 밋밋하게 내려가야 좋은데 뾰족하게 내려간다. 금구하수형이란 당치 않다. 송곳 같은 거북이 입이 있든가. ②백호방에서 바람이 침범한다. 그런데 백호 끝 부근은 수구이고 잘 짜여 있으므로 국외(局外)바람은 들어오지 못하고 국내(局內)바람이 침범할 것이다. 풍수에서 골바람은 해롭지만 들판바람은 넓게 퍼지면서 들어오므로 피해가 적다고 한다. 꽉 짜인 국내에서 바람의 침해는 적다고 보아야된다. 혈처에서 보면 수구에 있는 추월산 상봉이 수문장역할을 하고 있다.
* 이곳 묘들의 상관관계는 어떠한가? 국공 묘의 봉분 뒤에 유인(孺人) 전주이씨 묘가 있고 그 뒤에 무명 묘 1기가 있다. 국공은 권세가 있었으므로 국공 묘가 쓰인 후에는 봉분 뒤에 다른 묘를 쓰기 어렵다. 좌판의 풍화현상을 보드라도 전주이씨 묘가 오래 된 것 같다. 결국 전주이씨 묘가 쓰여져 있었는데 그 아래 국공 묘를 썼다고 추측된다. 무명 고총은 봉분이 상당히 크다. 고려말 내지 조선초기의 묘가 이렇다. 예컨대 고령신씨시조 묘와 황희정승 묘를 들 수 있다. 무명 고총 아래에 무명 쌍분이 있는데 크기가 작고 근래에 쓴 묘로 보이고 계속하여 그 아래 무명 묘1기가 있는데 봉분이 상당히 크다. 담양입향조는 10세손 국무이지만 시조 국주가 추성군이라는 봉호를 받을 때 담양 땅을 식읍으로 하사받았을 것이니 땅 관리를 위하여 그 후손들이 담양을 래왕하였을 것이다. 무명 고총의 봉분 또한 고려말이나 이조 초기의 묘와 유사하다.
그렇다면 무명고총은 10세손 입향조보다 윗대의 선조묘로 추정할 수 있고(개성에 선조 묘8기가 實存하는지 의문이다) 창덕궁위장을 지낸 국공보다 훨씬 윗대의 선조 묘가 된다. 그런 연유로 담양국씨들이 현재까지 묘지를 소유하고 관리해 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 국씨 묘 지도---
* 결론을 말하자면, 이곳에는 창덕궁 위장의 묘와 무명의 고총인 국씨선조 묘가 있는데 선조 묘가 진혈이고 장군대좌형으로 상등초급 명당이다. 마땅히 조선백대 명당에 올려야 하나 묘주와 발복을 알 수 없어 옳은 대접을 받지 못 하고 있다. 추측한 내용이 많아서 오류가 있을 터이니 틀린 부부은 지적해주시기 바랍니다.(2024.5)
3. 관련사진
* 국공 부부 합장묘 비석---
* 국공 묘의 기울어진 좌판---박정희 조부의 이장 묘도 기우러 졌다.
* 유인 전주이씨---국공 묘 뒤. 무명 묘1기가 더 있다.
* 하단의 무명 고총---
* 무명 고총에서 본 안산---앞에 무명쌍분과 무명 묘1기가 있다.
* 백호방 수구---
* 청룡방 바위---하단의 묘들은 금구하수형이라는 이유로 흙으로 좌판을 만들고 석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