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도(李晩燾, 1842~1910)
향산집 제10권 / 발(跋)〈/ 학리도설〉 발문〔學理圖說跋〕
이것은 눌헌(訥軒) 서성구(徐聖耉) 공이 찬집한 〈학리도설(學理圖說)〉이다. 도면은 총 50장이다. 그중 46장은 모두 상수(象數)의 원리를 그린 것이고, 인설(仁說) 이하 4장의 도면은 모두 마음을 다스리는 요체를 그린 것이다. 오로지 상수의 원리에 대해서만 논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데로 귀결시키지 않는다면 사람에게 실제 쓰임이 될 수 없기 때문이며, 오로지 마음을 다스리기만 하고 상수의 원리를 궁구하지 않는다면 또 종지(宗旨)를 통괄하고 일원(一元)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수의 원리를 그린 도면이 마음을 다스리는 요체를 그린 도면보다 10배나 많은 것은 또 무엇 때문인가? 무릇 상수의 원리는 하늘의 일이므로 은미하여 알기 어렵다. 이 때문에 도면이 많아도 번다한 폐단이 없다.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사람의 일이므로 내면에 반성하여 궁구하기 쉽다. 이 때문에 도면이 소략해도 부족한 폐단이 없다.
이 50장의 도면은 전현(前賢)들이 이미 완성한 도면을 유별로 모은 것인데, 여기에 몽매하고 고루한 나로서는 전현의 글에서 보지 못한 것이 간간이 있다. 아마 공이 선유(先儒)들이 해설한 내용에 나아가 손수 배열한 것이라 짐작된다. 조리와 구획이 분명하고 문장과 이치가 서로 어울려, 자리를 억지로 끼워 맞춘 병폐가 없으며 조화를 천양한 공로가 있으니, 포희(庖犧)의 순신(純臣)이라 해도 될 것이다.
듣건대 공의 선조 돈암공(遯庵公)께서 단종이 왕위를 내어놓던 시대를 만나 성균관 유생으로서 소백산 속으로 은거하여 진퇴(進退)의 의리를 잘 실천했다고 하니, 공의 가학에 근본이 있었던 것이다. - 교상(膠庠)은 주나라 시대 국학의 이름이다. 뒤에는 학궁을 통칭 교상이라고 하였다. -
공은 숙종, 경종, 영조 세 임금의 치세를 살면서, 당시에 성균관에서 크게 칭예가 있었다. 그러나 송죽(松竹) 속에 노닐면서 스스로 눌(訥)의 삶을 지향하였으니, 공의 식견과 공의 신조는 실로 섣불리 말할 수 없다. 가령 공이 세상의 영욕을 따라 일시적인 이록(利祿)을 추구했다면 장차 의리의 오묘한 경지에 크게 힘을 펼칠 수 없었을 것이다. 부귀란 저 뜬구름이나 지나가는 새와 같아 덧없기 짝이 없는 것이니, 우리 유학의 일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오늘날 세가(世家)를 논할 때 죽계 서씨(竹溪徐氏)를 문헌(文獻)의 고가(故家)요 예악(禮樂)의 고장으로 친다. 그것은 선유의 학설을 확장하고 후학의 공부를 열어 준 기본 바탕이 있었기 때문이니, 어찌 이것을 저 세속적 부귀와 바꿀 수 있겠는가. 공이 평소 하시던 말씀이 본집에 실려 있으며, 또 의례(疑禮)를 논변한 5책의 저술이 따로 한 부의 책으로 만들어져 있다. 여기에 나아가 종합적으로 고찰하여 이해한다면 공이 편찬한 도설의 내용이 하나하나 실질적인 것이요 그저 문자 사이에서 도출해 낸 것이 아님을 더욱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후손 상사(上舍) 서상수(徐相銖) 및 서병봉(徐丙奉), 서병철(徐丙轍), 서상탁(徐相鐸)이 나를 형편없는 인물로 여기지 않아 분에 넘치게도 발문을 부탁하니, 의리에 끝내 사양할 수가 없다. 정리와 편집을 이미 마쳤기에 개인적인 소감을 위와 같이 간략하게 첨부한다.
[주-D001] 서성구(徐聖耉) : 1663~1735. 본관은 달성, 자는 희언(希彦), 호는 눌헌(訥軒)ㆍ기암(寄菴)이다. 서숙(徐璹)의 아들이다. 1691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어려서부터 대자(大字)를 써서 이름이 났고, 특히 초서(草書)에 능하였다. 젊었을 때에는 역학(易學)에 관심을 가져 〈학리도설(學理圖說)〉을 찬집하였고, 만년에는 예설에 관심을 가져 《의례논변(疑禮論辨)》을 편찬하였다. 저서로 《눌헌집》이 있다.[주-D002] 학리도설(學理圖說) : 《눌헌집》 잡저 권4와 권5에 걸쳐 실려 있다.[주-D003]
돈암공(遯庵公) : 영주 출신의 학자 서한정(徐翰廷, 1407~1490)이다. 본관은 달성, 돈암은 호이다. 일찍이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단념하고 가족과 소백산으로 들어가 은둔 생활을 하며 일생을 보냈다. 권득평(權得平)은 그를 노중련(魯仲連)과 백이(伯夷), 숙제(叔齊)에 비겨 고절을 찬양하는 시를 지었다. 영주시 단산면 사천리(沙川里)에 그가 강학하던 돈암정이 남아 있다. 사헌부 지평에 추증되었고, 구고이사(九皐里社)에 제향되었다. 구고이사는 뒤에 구고서원(九皐書院)으로 승격되었다.[주-D004] 의례(疑禮)를 …… 저술 : 《의례논변(疑禮論辨)》을 가리킨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규필 (역)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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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재집 별집 제1권 / 시(詩) / 구고사 등서루 시운에 삼가 차운하다〔謹次九臯社登西樓韻〕
등서로 이 누를 이름한 것이 좋으니 / 好把登西號此樓
고사리를 캐 먹은 높은 절의 천추토록 함께하네 / 採薇高節幷千秋
두견새 우는 창밖에 달은 밝은데 원통함은 영원하고 / 鵑窻月白冤終古
은행나무에 봄이 돌아오니 이치가 어두움을 밝혔네 / 鴨樹春回理闡幽
숙종이 능을 축조하니 참으로 성대한 덕이요 / 肅考封陵眞盛德
충신이 능지를 읽으니 오히려 남은 근심 있었네 / 忠臣讀誌尙餘愁
물줄기에 백 자의 누각이 선 것은 무슨 까닭인가 / 臨流百尺緣何起
다만 선생이 옛날 노닐던 곳이기 때문일세 / 只爲先生此舊遊
[주-D001] 구고사(九臯社) : 경북 영주시 단산면 구구리 도인봉 아래에 소재했던 사당으로, 서한정(徐翰廷, 1407~1490)의 위패를 모셨다. 영조 29년(1753) 창건 당시에는 구고서당이라 하였는데, 정조 10년(1786)에 구고사로 고쳤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0년(고종7)에 훼철되었다. 서한정의 본관은 달성(達城), 호는 돈암(遯菴)이다. 세조(世祖)가 즉위하자 달성에서 가족을 이끌고 소백산(小白山)으로 들어가 은둔(隱遁)하였다. 저서로는 《돈암일집(遯庵逸集)》 1책이 있다.[주-D002] 등서로 …… 함께하네 : 원문 등서(登西)는 서산, 즉 수양산(首陽山)에 오른다는 뜻으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주(紂)를 정벌하는 것을 반대해서 간하다가 듣지 않자, 수양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으면서 노래하기를, “저 서산에 올라가 고사리를 캐도다. 포악함으로 포악함을 바꾸면서도 그른 줄을 모르도다.[登彼西山兮, 采其薇兮. 以暴易暴兮, 不知其非兮.]” 하였다. 《史記 伯夷列傳》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을 위해 서한정이 절의를 바쳐 은둔한 것이 백이ㆍ숙제에 비견됨을 표현한 것이다.[주-D003] 두견새 …… 영원하고 : 두견새는 일명 자규(子規)라고도 한다. 세조(世祖)가 단종을 몰아내어 영월(寧越)로 연금(軟禁)시키면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降等)하였다. 단종은 영월의 자규루(子規樓)에서 두견새가 구슬피 울자 “달 밝은 밤 자규새는 구슬피 우는데 시름겨워 자규루에 기대노라. 네 울음 슬퍼 내 마음 괴롭구나 네 소리 없으면 이내 시름 없을 것을. 이 세상 괴로운 사람에게 말하노니 부디 춘삼월에 자규루에 오르지 마오.[月白夜蜀魄啾, 含愁情依樓頭. 爾啼悲我聞苦, 無爾聲無我愁. 寄語世上苦勞人, 愼幕登春三月子規樓.]”라고 하였다. 즉 이곳에서 울던 두견새를 가리킨 것이다.[주-D004] 은행나무에 …… 밝혔네 : 원문의 ‘압수(鴨樹)’는 압각수(鴨脚樹)의 준말로, 은행나무의 별칭이다. 은행잎이 오리발 모양으로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여기서는 순흥의 읍내 중앙에 있는 오래된 은행나무를 말하는데, 금성대군(錦城大君)과 함께 단종 복위 운동에 참여했던 순흥 부사 이보흠(李甫欽)이 죽고 고을이 폐해지자, 그 은행나무도 뒤따라 말라 죽어 온 고을 사람들이 비통에 잠겨 있었다. 그런데 어떤 노인이 지나가다가 말하기를 “흥주(興州) 고을이 폐해져서 은행나무가 죽었으니 은행나무가 살아나면 흥주가 회복될 것이다.”라고 하매, 고을 백성들이 그 말에 감개(感慨)하여 오랫동안 그 말을 전송(傳誦)해 왔는데, 1681년(숙종7) 봄에 비로소 은행나무에 새 가지가 나고 잎이 퍼지더니 계해년(1683)에 과연 흥주부(興州府)가 회복되었다고 한다. 《梓鄕誌 順興誌 古蹟 鴨脚樹》[주-D005] 숙종이 능을 축조하니 : 1698년(숙종24)에 노산군(魯山君)의 위호(位號)를 회복하여 묘호(廟號)를 단종으로, 능호(陵號)를 장릉(莊陵)으로 한 것을 말한다. 《端宗實錄 附錄》[주-D006] 충신이 …… 있었네 : 《조선왕조실록》 영조 34년 무인 10월 4일 조에, 예조 판서 홍상한(洪象漢)이 아뢰기를, “신이 영월(寧越)에 있을 때 우연히 《장릉지(莊陵誌)》를 읽어 보았더니, 본릉(本陵)을 복위(復位)한 것은 지난 무인년 10월 28일이었는데, 신규(申奎)의 소(疏)로 인하여 그리하였습니다. 장릉의 화소(火巢) 안에 사육신(死六臣)의 창절사(彰節祠)가 있는데, 고 감사 홍만종(洪萬鍾)과 이천 부사(伊川府使) 박태보(朴泰輔)가 힘을 합쳐서 개수(改修)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화소 안에 있는 사당을 옮겨서 건립하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영조가 승지들에게 명하여 쓰게 하기를, “지금 예조 판서가 아뢰는 것을 들어 보니, 단종[端廟]께서 복위(復位)하신 간지(干支)가 금년 이달 28일과 같다고 하므로 서글픈 심회(心懷)를 억누르기가 어려워, 마땅히 제문(祭文)을 친히 짓고, 대신(大臣)을 보내서 제사를 섭행(攝行)하게 한다. 듣건대, 사육신의 창절서원(彰節書院)이 능침(陵寢) 동구(洞口)에 있다고 하는데,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즉시 수리 보수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김숭호 이미진 (공역) |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