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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민석, 황량한 날의 글쓰기 p167-177
자연, 일상, 그리고 그 너머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1.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Thomas Tranströmer 1931~2015)는 스웨덴 출신으로 2차 대전 이후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시인 중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2011년 스웨덴 한림원 노벨상 위원회는 그가 '응축된, 반투명의 이미지들을 통하여 현실에 대한 신선한 접근법을 제공한다."고 노벨상 수상 이유를 밝혔다. 트란스트뢰메르는 1993년 이래
한 해도 빼놓지 않고 노벨상 후보에 올랐고, 노벨상을 받기 전에도 유럽의 유명 문학상들을 휩쓸 정도로 그 성과를 인정받았으며, 그의 시집들은 현재 전 세계 60여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지명도에 비해 그리 많지 않은 작품을 출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런 평가를 받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는 서정시의 낡고도 유구한 전통 위에 서 있지만,서정시에 "신선한 접근법"을 부여함으로써 클리셰cliche에서 벗어났다.그의 시은 일상에서 시작하지만, 일상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전통 서정시에 초현실주의 surrealism적 상상력을 부여함으로써 한편 으로는 수천 년의 문화적 유산을 이어가고, 다른 한편으로는 '옛것'을 '새것'으로 만들어냈다. 게다가 그는 일상에 대한 관찰과 묘사에 그치지않고, 그 안에서 그것 너머에 있는 세계로 이어지는 길을 찾아냈다. 그가 볼 때, 자연이든 일상이든 모든 현실은 그것 자체로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의 배후에는 그것을 창조한 어떤 다른 존재, 존재 자체인 존재, 혹은 어떤 기원, 결과가 아닌 유일한 원인으로만 존재하는 원리가 있다.
트란스트뢰메르를 읽는 평론가들은 이것을 대체로 '현실 너머에 있는 신비'로 읽는다. 그것에 '신비'라는 이름이 붙여지는, '초월적 존재'라는 이름이 붙여지는, 트란스트뢰메르에게 자연이나 일상은 그 자체 존재가 아니다. 그것들은 존재의 그림자이며, 그는 이 그림자들 안에 길게 드리워져 있는 '존재 자체의 손길을 읽어낸다.
거대한 나무들 아래에 등을 대고 누워 있는 사람은
또한 그 나무들 속에 올라가 있다. 그는 수많은 작은 가지들속으로 가지를 뻗는다.
그는 앞뒤로 흔들리며,
천천히 돌진하는 투석기 의자 안에 앉는다.
부두 바닥에 서 있는 사람은 그의 눈을 그 아래 물에 단단히 고정한다
부두들은 인간들보다 더 빨리 늙는다.
그것들은 뱃속에 은회색의 기둥들과 바위들을 가지고 있다.
현란한 빛이 그대로 밀고 들어온다.
온종일 갑판이 없는 작은 배에서 보낸 사람은
빛나는 만들 위에서 움직이다가
마침내 자신의 푸른 램프 그늘 안에서 잠들 것이다.
마치 섬들이 거대한 나방들처럼 지구 위에서 기어 다니듯,
-7월의 공간을 숨쉬기 전문
위 시 속의 주체는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것보다 높이 있는 어떤 것(나무들)의 일부이며, 그것보다 아래에 있는 어떤 것(물)의 일부이다. "자신의 푸른 램프 그늘 안에서" 잠드는 사람은 거대한 "지구 위”를 기어 다니는 "섬"처럼, 더 큰 어떤 것의 부분으로 존재한다. 이처럼 트란스트뢰메르가 그려내는 자연이나 일상은 항상 그것의 원인이자 계기인 다른 것을 향해 있다. 그에게 있어서 모든 현실은 그것 너머의 어떤 것 때문에 존재하므로,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다. 그는 결과인 현실 속에서 원인인 '궁극'을 읽는다. 이런 점에서 그의 시는 '종교적'이
다. 이런 이유로 어떤 논자들은 그를 "기독교 시인"이라 부른다. 종교(기독교)의 이름을 붙이지 않을지라도, 그의 시선은 늘 '초현실적 존재를 향해 있다. 그의 초현실은 부르는 사람에 따라 신일 수도 있고 신비일수도 있다.
어떤 글은 내 안에서
나타난다- 불 위에 종이를 놓을 때
나타나는
안 보이는 잉크로 쓴 말들.
나는 내가 더 멀리 가야 함을 안다.
똑바로 도시를 지나, 다른
쪽 바깥으로, 그리고서 길 밖으로 나와
숲속으로 한참 걸어 들어가야 함을
오소리가 다니는 길들로 걸어가면
거의 어두워져 점점 볼 수 없게 되지.
이끼 위에 누워 있는 돌들
이 돌 중의 하나는 소중해.
그것은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어..
그것은 어둠을 빛낼 수 있어.
그것은 온 나라의 전등 스위치야.
모든 것이 그것에 달렸지.
그걸 봐ㆍㆍㆍㆍㆍㆍ 그걸 만져.....…
-「더 안쪽으로」 부분
그는 일상의 도시도 "더 멀리", 더 깊이, "더 안쪽”의 존재와 연결되어 있음을 안다. 문명 공간 너머에 자연(숲속)이 있고, 자연 너머에 모든 것을 바꾸고, 어둠을 빛낼 수 있으며, 모든 것이 그것에 달린 그 무언
가가 있다. 시인은 "그걸 봐", "그걸 만져"라고 명령한다. 이 작품은 그의 사유의 화살이 어디에서 어디로 날아가는지 잘 보여준다. "더 안쪽으로"라는 제목은 시인이 자신에게 내리는 명령이다. 일상과 자연이 그 자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그 너머에 스스로 존재하는 어떤 것의 결과이며 그림자라는 것, 그러므로 눈앞에 보이는 것에 머물지 말고 '최종 원인'인 절대적 존재로 더 나아가서 그것을 보고, 만지고, 기록하는 것이 그의 시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는 “안 보이는 잉크로 쓴 말들”의 상태를 지향한다. 그러나 안 보이는 잉크로 쓴 말들은, 모든 것의 기원
인 "불"을 만날 때 나타난다(보인다). 이런 점에서 그의 시는 저 안쪽에 안 보이는 어떤 것의 현현epiphany이다. 스웨덴에서 트란스트뢰메르는
종종 "말똥가리 시인buzzard poet"이라 불린다. 그는 말똥가리처럼 저 높은 곳, 신비로운 근원의 자리에서 그것의 그림자인 일상과 자연을 내려다본다. 그가 그려낸 일상과 자연은 말똥가리가 들여다본 듯 선명하고 구체적이다.
2,
그는 자주 일상에서 초월의 세계로 넘어간다. 그럴 때마다 이미지들의 초현실주의적 배열이 나타나지만, 그것은 초현실주의 계열의 시들처럼 난해하거나 모호하지 않다. 그는 초현실주의적 기법을 사용하지
만 언제나 그것 위에, 그것 너머에 있다. 그는 초현실주의자들과 달리 최소한의 이미지들로 매우 단순하게 일상이나 자연의 구체성을 포착한다. 말하자면 초현실주의의 다리를 언어의 미니멀리즘 위에 슬쩍 올려 놓는 격이다. 게다가 그렇게 그가 건너간 초월의 세계는 복잡한 파편들의 집합이 아니라 (단순한?) 경이와 신비의 공간이다. 이런 조건들이 그
의 시에 대한 접근성을 높인다.
나무는 빗속을 걸어 다니다가
우리를 지나 질척질척한 잿빛으로 들어간다.
그것은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체리 과수원의 찌르레기처럼
비에서 생을 빼어낸다.
비가 그치자마자, 나무도 멈춘다.
그것은 움직이지 않고, 밝은 밤 속에 그냥 서서,
눈송이가 자신을 우주 안에 내던질
그 순간을 우리가 기다리듯 기다린다.
-「나무와 하늘」 전문
이 작품에서 가장 빛나는 구절은 빗속을 걸어 다니는 나무가 "체리 과수원의 찌르레기처럼 비에서 생을 떼어 내는 장면과 “눈송이가 자신을 우주 안에 내던질 그 순간"이라는 표현이다. 비가 와서 나무가 흔들리고 비가 그쳐 나무의 흔들림이 멈추는 지극히 단순한 풍경 속에서 시인은 눈송이가 내던져지는 "우주'를, 그 순간의 '초월'을 그려낸다. "맑은 밤"은 그런 초월이 성취되기에 적절한 시간이다. 제목에서도 그는 "나무"를 그 너머 위쪽에 있는 "하늘"과 연관시킨다. 시를 직조할 때부터 그는 저 하늘 꼭대기에 있는 말똥가리의 눈으로 저 아래 지상의 사물들을
바라보고 그것을 다시 하늘로 되돌린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지상의 모든 것은 하늘의 현현이다. 지상의 사물들은 하늘의 구현물이므로 하늘과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초월은 이미 지상의사물에 내재해 있는 것이다. 시인은 지상의 사물과 초월적 존재 사이에 '안 보이는'끈을 '보이게' 만드는 자이다.
그 힘든 몇 달 동안 내 인생은 오로지
당신과 사랑할 때만 불타올랐다.
반딧불이도 불을 켜고 나가고, 불을 켜고 나간다
ㅡ잽싸게 우리는 그 길을 쫓는다
밤의 어둠 속 올리브 나무들 사이로.
그 힘든 몇 달 동안 내 영혼은 게으르고 으깨어진 채
앉아 있었다.
그러나 몸은 당신에게로 가는 가장 가까운 길을 취했지.
밤의 천국들이 음매 하고 운다.
우리는 우주에서 우유를 훔쳤고 살아남았다.
- 불의 대본」 전문
그의 사물들은 항상 제자리가 아닌 다른 어느곳으로 간다. 어두운 밤, 올리브 나무 사이로 반복해서 불을 켜고 나가는 "반딧불이는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것일까. 앞의 시들에서도 살펴보았듯이, 그에게 있어서
사물들은 늘 그것의 원인인 초월적 공간을 향해 움직인다. "밤의 천국들이 음매 하고" 울 때, "우리는 우주에서 우유를 훔쳤고 살아남았다"는 표현은 얼마나 쉬우면서도 얼마나 큰 이야기를 담고 있는가. 지상의 소떼들이 먼 우주의 은하수에 가서 울고, 지상에서 몸의 사랑을 나눌 때만 '불타던 "우리"가 그 소들의 우유를 훔쳐 먹고 살아남다니. 그의 상상력의 힘은 이렇게 현실과 초월을 자유롭게 오가는 데 있다. 그러나 그 자유는 기법이 아니라 세계관이다. 그는 만물을 이어주는 거대한 끈의 존재를 안다. 그 거대한 원리와 무관한 현실은 없다. 이런 점에서 트란스
트뢰메르의 세계관은 블레이크W. Blake의 신비주의와도 친족 유사성을 갖고 있다.
한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려면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담고
한 시간 안에서 영원을 보라
-윌리엄 블레이크, 「순수의 전조 부분
부분 안에서 전체를, 전체 안에서 부분을 읽어내는 상호내주(相互內住)의 철학은 트란스트뢰메르나 블레이크만이 아니라 수많은 문학, 종교, 사상에서 나타난다. 가령, 중세 독일의 신비주의자이자 신학자인 마이스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는 신을 "하나one"라 부르면서 "하나" 안에는 그것이 하나인 한 모든 것이 존재한다. 모든 다수성은 "하나" 안에서 "하나'를 통해 하나이다."라고 말한다. 신플라톤주의 성향의 이런 입장은 다수의 사물 안에서 초월적 '하나'를 향해 나아가는 트란스트뢰메르의 세계관과도 매우 유사하다. 트란스트리베르의 보편성은 바로 이 '하나' 현실 너머에 있던 동시에 현실 속에 이미 들어와 있는 것의 포획에서 성취된다.
달력은 예약이 다 되어 있고, 미래는 모른다.
케이블 티브이는 조용히 어떤 민요를 흥얼거리는데
국적을 모르겠다. 눈이 잿빛 바닷속으로 떨어진다. 그림자들이
부두 위에서 싸운다.
Ⅱ
당신의 인생이 절반에 이르렀을 때, 죽음이 나타나
그만큼의 생의 크기를 취한다. 우리는 그 방문을
잊는다. 인생은 계속된다. 그러나 누군가가 침묵 속에서
옷을 짜고 있다.
-「검은 엽서들」 전문
그가 그리는 풍경들은 선명하고 구체적이고 간결하다. 이 작품에서 일상은 분주하지만, 일상의 주체들은 앞날을 모른다. 티브이는 국적을 알 수 없는 민요를 흥얼거리고, 무슨 암시처럼 잿빛 바다 위에 눈송이들이 날린다. 그것들은 부두 위에 어지러운 그림자를 남긴다. 그는 이렇게 짧은 몇 개의 행으로 (메시지에서 자유로운) 그림을 그린다. 그가 그리는 일상의 풍경은 특별히 무엇을 지시하지 않는다. 화려한 묘사도 없다. 그것은 추상이 아니라 구상이다. 그 일상에 죽음이 이미 다녀갔음을 아무도 모른다. 인생은 계속되지만, 일상의 끝엔 죽음이 도사리고
다"고 읽어도 된다.있다. 그러므로 마지막 문장은 "누군가가 침묵 속에서 수의를 짜고 있다"고 읽어도 된다.죽음도 일상 너머 초월의 세계이다.
3.
일반적으로 초월의 세계는 수직적 상상력으로 그려진다. 그 세계는 대체로 아래가 아니라 위에 있다. 그러나 트란스트뢰메르는 공간의 위계를 무시한다. 그는 위로 오르기도 하고 밑으로 내려가기도 하며, 옆으로 이동하기도 한다. 그에게 초월은 물리적 공간에 있지 않다. 그것은 정신 혹은 영혼의 영역이므로 '어디든지 있다.
흰 태양은 스모그 속에 녹아내린다.
빛은 물을 뚝뚝 흘리며, 제 길로 내려가
지하의 내 눈으로 간다 내 눈은
도시 아래에 있다. 그리고 도시를 본다
아래로부터: 거리들을, 집들의 토대들을
전시 도시의 항공 사진들처럼
그렇지만 반대로: 두더지가 찍는 사진.......
우울한 색들의 말 못하는 직사각형들,
모든 것은 거기에서 결정된다. 그 누구도
산 자의 뼈들과 죽은 자의 뼈들을 구분 못한다.
햇빛이 늘어나 홍수처럼
조종석들과 완두콩 꼬투리를 속으로 넘쳐 든다.
- 지하에서 보기, 전문
이 작품에서 위/아래의 위계는 모두 뒤집힌다. 태양은 아래로 녹아내려 물처럼 뚝뚝 떨어지고, 말똥가리처럼 위에서 내려다보던 눈은 지하에서 거꾸로 세상을 올려다본다. 말똥가리 눈은 "두더지'의 눈으로 뒤집힌다. "모든 것이" "결정되는 곳은 꼭 먼 위쪽의 하늘만이 아니다. 그것과 대척점에 있는 지하에서도 결정된다. 햇빛은 홍수처럼 아래로 흘러내려 "완두콩 꼬투리"에 넘치지만 동시에 하늘의 "조종석으로 넘쳐 들어가기도 한다. 이런 작품은 초월의 저 위쪽에 익숙한 상상력에 교란을 일으킨다. 흘러내리는 것은 달리s. Dali의 시계만이 아니다. 태양도 물처럼 흘러내린다. 트란스트뢰메르에게서 초현실주의의 냄새가 나는 것은 이런 분방한 상상력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초월의 공간이 어디에 있든, 그것은 일상과 자연의 공간이 아니라 그것들을 바라보는 다른 어느 쪽에 있다. 트란스트뢰메르는 일상과 자연(현실)을 노래하면서도 그것을 바라보는 다른 관점의 공간을 항상 생성한다. 그 다른 관점은 현실의 원인이며 자궁이고 아버지이다. 그는 아래서든 위에서든 최종적인 존재의 시각에서 현실을 들여다본다. 그는 사물 자체가 아니라 사물의 원인의 시각에서 사물을 바라본다. 위든 아래든, 물리적 위계와 관계없이 궁극적인 원인은 사물 밖에서 사물로 들어간다. 그는 이렇게 이중의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본다.
예인선은 녹으로 얼룩져 있다. 그것은 여기, 먼 내륙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그것은 추위에 꺼진, 두꺼운 램프이다.
그러나 나무들은 야생의 색깔들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가 구원을 원하기라도 하는 듯이
다른 해변에 보내는 신호들.
집으로 오는 길에, 나는 풀잎을 쑤셔대는 검은 버섯들을 보았다.
그것들은 도움을 청하는 누군가의 손가락들이다.
어둠 속 그 아래에서 오랫동안 자신을 위에 울었던 누군가.
우리는 대지에 속해 있다.
-시월의 스케치 전문
트란스트뢰메르의 시에 익숙해진 독자는 먼 내륙에서 예인선이 갑자기 등장해도 절대 놀라지 않는다. 사물들의 현재 위치는 중요하지 않다. 독자가 읽어내야 할 것은 그 사물들이 보여주는 어떤 '징후'들이다.
태양이 아래로 녹아내리거나 배가 먼 내륙에서 발견되는 것은 모종의 위험, 불안의 신호이다. 그리고 그 신호들은 사물의 작은 움직임들을 통해 감지된다. "풀잎을 쑤셔대는 검은 버섯들"에서 그는 "도움을 요청하는 누군가의 손가락"들을 읽는다. 그에게 있어서 사물들은 징후의 형대로 어떤 궁극적 존재를 소환한다. 이 시에서 그것은 "대지"라는 어머니이다.
그는 별자리처럼 어지러이 흩어진 사물들의 세계를 바라본다. 그의 시에서 그것들의 위계는 중요하지 않다. 사물들은 궁극적 존재가 아니므로 시인에 의해 자유롭게, '초현실적으로' 배열된다. 그렇게 재생된 사물의 세계에서 그가 포획하는 것은 별자리의 배후에 있는 거대한 움직임이다. 그것은, 저 위에, 혹은 저 아래, 혹은 저 멀리에서 사물들의 원인으로 존재하는 그 무엇이다. 그 무엇은 사물들 밖에 있으므로 '초월'로 불리기도 하고, 사물의 질서를 뛰어넘는 것이므로 '신비'라 불리기도 한다.
참고자료
[다음카페] 자크 라캉: part 1 -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 https://m.cafe.daum.net/somdaripoem/rA34/1?svc=cafe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