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묘박해 乙卯迫害
▲ 새남터성지 주문모신부 동상
1795년(정조 19)에 일어난 한국 천주교회 박해 중의 하나. 일명 ‘북산 사건’ (北山事件) 혹은 ‘주문모 실포 사건' (失捕事件)이라고도 하는데, 그 이유는 이 박해가 북산(즉 북악산)아래의 계동(桂洞, 현 서울 종로구 계동 , 가회동 인근)에 숨어 있던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를 체포하려다가 실패하면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중국인 주문모 신부는 1794년 12월 3일(양력 12월 24일) 조선 교회의 밀사 지황(池璜, 사바)의 안내로 압록강을 건넌 뒤 의주에서 윤유일(尹有一,바오로) 등을 만나 12월 14일 한양에 도착하였고, 신자들이 마련해 놓은 계동의 최인길(崔仁吉, 마티아) 집으로 가서 생활하게 되었다. 이처럼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게 된 배경에는. 우선 1791년의 신해박해(辛亥迫害) 이후 조선 신자들이 재개한 성직자 영입 운동이 있었고. 둘째로 이를 받아들여 그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한 북경의 구베아(A.deGou- vea,) 주교가 있었다.
이후 주문모 신부는 최인길의 집에서 조선어를 배운 다음 1795년 윤 2월 16일(양력 4월 5일) 부활절에 신자들을 모아 놓고 미사를 집전하였다. 이 미사가 바로 이 땅에서 최초로 봉헌된 미사였으며, 이로써 조선 천주교회는 ‘조선 본당’ 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또 그는 윤유일을 책문(柵門, 중국의 국경 관문)으로 보내어 사목에 필요한 물품을 받아 오도록 하였고, 지방 순회에 나서 경기도 양근과 충청도, 전라도 지방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었다. 당시 교회지도층에서는 그 의 입국 사실을 되도록 비밀에 부치려고 하였지만. 보이지 않게 이 사실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이승훈(李承薰. 베드로)도 이 사실을 관청에 발고하려다 정약용(丁若鏞, 요한)의 만류로 그만둔적이 있었다.
주 신부의 입국 사실이 조정에 알려진 것은 진사 한영익(韓永益)의 밀고 때문이었다. 즉 예비 신자였던 한영익이 여동생에게서 이 말을 듣고는 사실을 직접 확인한 뒤 우선 이벽(李檗, 세례자 요한)의 아우인 포장 이석(李皙)에게 밀고한 것이다. 이어 이석이 남인의 영수인 좌 의정 채제공(蔡濟恭)에게 사실을 알려 주었고, 채제공이 다시 정조에게 이를 보고하였다.
그 결과 5월 11일(양력6월 27일)에는 ‘주문모 신부 체포령’ 이 내려졌는데, 다행히 조정에 있던 한 무관이 이를 신자들에게 알려 줌으로써 주 신부는 계동에서 빠져나와 남대문 안의 창동(倉洞)에 있던 강완숙(姜完淑, 골롬바)의 집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이때 집주인 최인길은 그의 피신 시간을 벌기 위해 주 신부의 모습을 한 채 남아 있었고, 포졸들은 그를 주 신부로 알고 체포하였다. 실제로 최인길은 역관 출신으로 중국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포졸들을 속일 수가 있었다.
이 내 포도청으로 압송된 최인길은 중국인이 아닌 것이 탄로 나고 말았으며, 포도대장 조규진(趙奎眞)은 서둘러 다시 주 신부를 체포해 오도록 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포도대장은 이에 앞서 주 신부의 입국을 앞장서서 도운 밀사 윤유일과 지황도 체포해 오도록 하였고. 그 결과 윤유일과 지황이 자신의 거처에서 각각 체포되어 최인길과 함께 문초를 받게 되었다. 당시 충주 사람 이국승(李國昇 , 바오로)을 비롯하여 다른 신자 4명도 체포되어 문초
를 받았지만, 얼마 안 되어 석방되고 말았다.
포도대장은 윤유일, 최인길. 지황으로부터 주 신부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 갖은 형벌을 가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오로지 신앙을 증거할 뿐 다른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훗날 구베아 주교가 조선의 밀사들로부터 전해 듣고 기록한 내용에 따르면, 그들은 모두 주저하지 않고 신자임을 고백하였으며. 어떠한 형벌과 유혹에도 흔들림이 없었다고 한다. 또 매를 맞아 죽는 순간까지도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면서 얼굴에는 영적인 기쁨을 나타냈다고 한다.
이처럼 이들 3명은 1795년 5월 12일(양력 6월 28일) 포도청의 문초와 형벌 과정에서 순교하였으니. 당시 윤유일은 36세. 최인길은 30세, 지황은 28세였다. 주문모 신부는 이후 1801년에 순교할 때까지 지도층 신자들과 함께 교회의 정착과 복음의 확대를 위해 노력하였다.
이처럼 을묘 박해는 주문모 신부의 입국 사실이 알려지면서 발생하였고, 3명의 순교자를 탄생시키면서 일단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 내적으로는 주 신부의 행방을 쫓는 박해자들과 이에 호응한 충청 감사에 의해 1797년 이후 충청도의 정사박해(丁巳迫害)가 일어나게 되었으며. 정치적으로는 남인 공서계(攻西系)와 노론 계 인물들에 의한 공격 때문에 채제공과 남인 친서계(親西系) 인물들의 정치적 입지가 어려워지는 결과를 낳았다.
또 천주교를 증오하는 조정 대신들은 이처럼 ‘포도청에서 3명의 천주교 신자를 몰래 때려죽인 사건’(捕廳三賊徑斃事)을 성토하기 시작하였다. 남인들을 보호하려는 재상 채제공은 물론 정조까지 의심한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윤유일, 지황의 북경 파견 때 정조와 채제공이 이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거나, 여기에 관여하지 않았느냐고 의심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연루설을 밝힐만한 근거는 없다.
윤유일, 최인길, 지황의 시신은 조정의 명령에 따라 강물에 버려지고 말았다. 이 또한 보기 드문 조치였다. 오늘날의 교회사학자들은 이들의 시신이 버려진 강물을 중랑천 하류 즉 살곶이다리 부근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장안에서 죽은 사람들의 시신은 광희문(즉 시구문)을 거쳐 성 밖으로 나갔기 때문이다. 한편 천주교 수원교구에서는 이 을묘박해 순교자들의 현양을 위해 1987년과 1996년에 윤유일의 후손들이 묻혀 있는 이천의 어농리(현 이천시 모가면 어농리)에 그들의 가묘를 조성하고 축복식을 가졌다.
그리고 이들 3명과 동료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을 추진하여 1996년 10월 1일 시성성으로부터 “
하느님의 종들의 시복을 추진하는 데 장애 없음”을 승인받게 되었다.
자료: 가톨릭 대사전